259화 - 탐식의 악마
굴네리아의 등장과 함께 싸움이 잠시 멈춰섰다.
치열하게 격돌하던 이들이 모두 행동을 멈추고 이쪽을 바라봤다.
그리고 시선 속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굴네리아가 지닌 흉측한 악의(惡意).
그 악의에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오직 단 한 사람.
“카리스 오빠···.”
다이애나만은 당황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카리스?”
시안은 그 이름을 한 번 되뇌였다.
생소한 이름이었으나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오빠라는 호칭에서 알 수 있듯.
그는 다이애나의 유일한 혈육이자 용인족의 혈통.
그리고 수인족들의 대족장.
그의 이름이 바로 카리스였다.
‘실종 상태라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카리스는 현재 실종 상태였다.
몇 달전에 실종되었고, 그 이후로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내심 죽었다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그런데 지금 들려오는 이름, 카리스.
시안은 다이애나를 바라봤다.
다이애나는 떨리는 눈빛으로 어느 한곳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탐식의 악마, 굴네리아.
다이애나의 시선은 굴네리아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이윽고 굴네리아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루나···? 너 루나니?”
그리고 진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전까지 느껴졌던 악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있었다.
“오빠? 정말 오빠야···?”
“세상에. 정말 루나구나!”
카리스는 감격한 얼굴로 다이애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성큼, 다이애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루나, 내가 널 정말 보고 싶었단다.”
“오빠가 어째서···.”
카리스는 다이애나를 향해 계속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바로 그때.
번쩍─!
카리스를 향해 검은빛이 터져나왔다.
콰아앙, 하는 폭음과 함께 시야가 뒤흔들렸다.
바로 한 시야로 시안이 카리스를 억압하고 있었다.
다이애나가 크게 당황하며 소리쳤다.
“지금 무슨 짓을···!”
“정신차려 다이애나!”
시안은 고함을 지르며 소리쳤다.
“이 자는 네가 알던 카리스가 아니야!”
“그, 그게 무슨···!”
다이애나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갈피를 잃은 두 눈동자는 시안과 카리스를 쉼없이 왔다갔다거렸다.
시안은 그런 혼란스러운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지금 카리스에게서는 그 어떤 악의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오직 드래곤의 특색.
즉, 용인족(龍人族)의 카리스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시안은 알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시안만은 알 수 있었다.
감각 사이로 느껴지는 감춰진 악의(惡意).
지금 이 존재는 카리스가 아니라 탐식의 악마, 굴네리아다.
어째서 굴네리아가 카리스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아니, 단순히 모습만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카리스의 몸을 잠식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또한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확실한 건, 이 자는 카리스가 아니다.
히죽.
카리스의 입가가 기괴하게 벌어진다.
시안을 바라보는 두 눈이 붉은 광채로 다시 한 번 번뜩인다.
【예전부터 그 눈치가 상당히 거슬렸지.】
피어오르는 끔찍한 악의(惡意).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끔찍함을 담아낸 듯한 불길함을 지니고 있었다.
꽈드드득!
시안은 멸살의 검을 부서져라 움켜쥐었다.
움켜쥠과 동시에 내재된 마기를 사방으로 폭사시켰다.
꽈르르르릉!
공간이 왜곡되며 풍경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억눌러놓은 포악한 힘이 해방을 맞이하며 들끓어오른다.
쩌어어어억─!
굴네리아의 입이 다시 한 번 크게 벌어졌다.
도무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기괴한 모습으로 아가리를 벌렸다.
【죽여버리겠어!】
그 사이로 누르비아의 카랑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키이이이이잉!!
검붉은 마력과 광기가 두 군주에게서 쏟아져나왔다.
그것은 사방으로 터져나가며 틈조차 허용하지 않는 마력의 세계를 펼쳐내었다.
감각이 뒤죽박죽 엉켜왔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일그러진다.
시안은 이를 까득, 깨물며 가진 바 마기를 모조리 폭발시켰다.
뒤엉키는 마기와 광기.
꽈꽈꽝!!
크나큰 폭발과 함께 시안이 뒤로 주르륵, 물러났다.
굴네리아와 누르비아 또한 그 힘의 여파를 감당하지 못하고 크게 뒤로 밀려났다.
【하흑···! 카흐흑···!】
누르비아는 균형을 잡히 못하고 몸을 휘청거렸다.
바라본 누르비아의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아보였다.
다시 한 번 드는 생각이지만··· 역시 안된다.
믿기 힘든 사실이나 둘의 힘만으로는 시안을 어찌할 수 없다.
정확히는.
【성물은··· 성물은 어디에 있어?】
지금의 상태로는 말이다.
처음, 굴네리아가 시안이 아닌 아리아를 노린 이유.
천천히 내린 시선.
성물이 찬란한 황금빛을 내뿜으며 굴네리아의 손에 쥐어져있었다.
【당장 시작해. 어서!】
누르비아가 재촉하며 소리쳐왔고.
굴네리아 또한 망설일 생각이 없었다.
본연의 힘이 봉인된 성물.
하지만 아쉽게도 완전히 힘을 해방하는 것은 불가했다.
이 성물에는 아르나이즈라 불리던 이들의 힘이 담겨있었다.
그들의 힘은 악마 6군주를 뛰어넘은 힘.
그 힘을 뚫고 봉인을 해방하려면, 귀찮지만 복잡한 의식과 아니꼬운 절차가 필요했다.
그 과정을 여기서 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건 일부의 힘만을 해방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뭐··· 큰 상관은 없었다.
콰지직─!
그 힘의 일부는 일부라 말할 수 없을테니까.
#
촤아악─!
시안의 몸이 바닥으로 11자 모양의 긴 잔상을 남기며 밀려났다.
시안은 황급히 균형을 잡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보인 시야.
그어어어어어어어─!
끔찍한 악의(惡意)가··· 날뛰고 있었다.
끝없는 사념(死念)이 터져나오며 세상이 광기로 물들고 있었다.
다르다. 차원이 다르다.
이건 그 동안 시안이 마주했던 그 어떠한 것보다 차원이 다른 흉악함을 품고 있었다.
새까만 증오가 기지개를 피오른다.
광기의 향연이 이어진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해지는 세계.
“끄으으윽···!”
“아아아악!”
루벤의 병사들이 고통에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두 눈이 새빨갛게 물들어지며 광기에 잠식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비단 루벤의 병사들 만이 아니었다.
“이, 이건···!”
“으으으윽!”
하얀 늑대 기사단들 또한 그 광기에 잠식되고 있었다.
흉측한 광기는 피아를 가리지 않았다.
세상을 새빨갛게 물들이는 광기가 피부 사이로 스며든다.
밀도가 높아도 너무 높았다.
그간 경험했던 광기와 본질 자체를 달리한다.
그렇기에 시안은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성물의 봉인이 깨어졌다.
이 힘은 봉인이 풀어지며 강림한 악마 본연의 힘.
탐식과 나태.
천 년전, 대륙 전체를 혼란에 빠뜨렸던 절대적인 악(惡).
그 악의 두 군주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다.
“미, 미안···해···! 나 때문에··· 하흑···!”
시안의 뒤쪽으로 아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리아는 처참한 몰골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무래도 기절했다 지금 깨어난 것 같았다.
아니, 기절해 있었던 것이 맞는 걸까.
지금 보이는 아리아의 모습.
드문드문, 찢어진 옷 사이로 아리아의 속살이 비쳐보였다.
그리고 그곳에 죄다 검푸른 멍이 새겨져있었다.
특히나 복부 쪽은 그 정도가 심했다.
복부 전체의 피부 색이 죄다 변질되어 있었다.
저건 내장이 죄다 터졌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성물을 지키려다 굴네리아에게 걷어차였던 아리아.
아무래도 그때 내장이 모조리 터진 것 같았다.
일반적인 사람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죽었어야할 중상이었다.
하지만 아리아는 존재 자체가 신성력인 성녀인 덕분일까.
터져버린 내장은 차츰차츰 복원되었고, 생명이 끊어지는 것만은 면할 수 있었다.
기절이 아니라 죽어있다가 되살아났다.
지금의 아리아는 그렇게 표현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렇기에 시안은 아리아를 탓하지 않았다.
탓할 것도 못 되었다.
아리아는 목숨을 걸고 성물을 지켰다.
단지 상황이 너무도 불리했을 뿐이었다.
탓을 해야한다면 시안의 잘못이 더욱 컸다.
또 한 명의 악마 군주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못한 시안의 잘못이 더욱 컸다.
무엇보다.
【아아···! 드디어···!】
지금와서 누구의 잘못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누르비아가 황홀한 표정으로 몸을 떨어보였다.
부르르, 떨리는 전신으로 담을 수 없는 악의가 쏟아져나왔다.
이윽고 누르비아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레이첼, 거추장스러우니까. 휘말리기 전에 인간들을 데리고 꺼져.】
“괜찮으시겠어요?”
레이첼은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금방 고개를 흔들었다.
풀려난 봉인. 그로써 느껴지는 이 악의.
물론 일부분에 불과했지만 끔찍하다라는 말이 절로 새어나왔다.
일순간 레이첼의 시야로 황금빛의 구체가 던져졌다.
얼떨결에 받아들자, 그 뒤로 굴네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서 성물의 완전한 해방 의식을 준비해라. 이곳을 처리하고 금방 따라가지.】
레이첼은 이번엔 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탐식과 나태. 힘을 해방한 두 악마 군주.
“가시죠.”
전혀 걱정할 것이 없었다.
레이첼은 듀라크와 카이를 향해 말했다.
그리고 듀라크와 카이는 잠시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듀라크와 카이가 검을 집어넣었다.
지금 느껴지는 힘.
그리고 아까 전, 마주한 시안의 경지.
인정하긴 싫었지만··· 수준 미달이다.
이 초월적인 싸움에 둘은 개입할 수 없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지금의 수준일 뿐.
“약속된 힘을 드릴 때가 되었네요.”
듀라크와 카이는 레이첼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런 듀라크와 카이의 뒤를 따라 하얀 늑대 기사단들이 따라움직였다.
광기에 잠식된 하얀 늑대 기사단들이 홀린 듯이 뒤를 따라 걸어갔다.
번쩍─!
그 뒤를 따라 묵빛 섬광이 터져나왔다.
섬광은 성물을 들고 있는 레이첼을 향해 정확히 쏘아져나갔다.
꽈아아앙!
힘의 충돌이 사방을 울려왔다.
흩어지는 힘의 파편.
그 사이로 보인 것은 다름 아닌 누르비아였다.
누르비아는 손을 앞으로 뻗어 시안의 검을 막고 있었다.
손에서 사출되는 붉은 마력은 시안을 검째로 밀어내고 있었다.
누르비아가 히죽거리며 웃는다.
【아까와는 다를거야.】
쩌어엉─!
굉음과 함께 시안의 몸이 크게 뒤로 날아갔다.
시안은 몸을 한 바퀴 돌며 다음 공격을 연결하려했다.
그러나 그 생각과 동시에, 누르비아의 붉은 마력이 이미 시안의 몸에 닿아 있었다.
콰지직─!
불멸(不滅)의 갑옷을 짓이겼다.
짓이겨진 갑옷 사이로 마력이 꿰뚫어오며, 시안의 가슴을 완전히 헤집어놓았다.
“끄으윽···!”
끔찍한 통증. 의식이 저만치 날아간다.
머릿속으로 경종이 쉼없이 울려온다.
시안은 이를 까득, 깨물며 떠나가는 의식을 붙잡았다.
바로 그때.
“카, 카리스님···?”
어디선가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라본 그곳엔 수도의 입구 쪽으로 수많은 수인족들이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카리스님이다!”
“카리스님이 돌아오셨다!!”
수인족들은 카리스의 모습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카리스님 어딜 가셨다 오신 겁니까.”
“저희가 얼마나 기다렸다고요!”
소식을 들은 수인족들이 모두 앞으로 쏟아져나왔다.
종족은 물론 노인, 아이 가릴 것없이 모든 이들이 카리스를 보기 위해 뛰쳐나왔다.
“안돼!”
그를 본 다이애나가 황급히 뛰쳐나갔다.
하지만 그보다 카리스의 행동이 한박자 더 빨랐다.
쩌어어어어억─!
카리스의 입이 기괴하게 찢어진다.
찢어진 입 사이로 카리스가 이죽거린다.
그로테스크한 악마의 얼굴.
“카리스··· 님?”
의문이 무색하게도, 앞선 수 십의 수인족들이 그대로 삼켜져버렸다.
꽈득, 우걱우걱.
쩌업 쩝.
엉킨 살육들이 분쇄되는 끔찍한 소리가 들려온다.
쩌──────억!
이윽고 굴네리아의 입이 다시금 찢어졌다.
그 사이로 광기의 마력이 터져나와 공간을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장미 꽃이 피어나듯.
공간 전체가 핏물로 덧칠해지기 시작했다.
키에에에에에에에엑───!!
그 사이로 흉측한 괴성이 들려왔다.
괴성 속에는 분노, 증오와 더불어 기쁨과 환희같은 감정의 파편들이 피어올랐다.
이윽고 새빨간 공간 사이를 비집으며 흉측한 마물들이 튀어나왔다.
새까만 증오와 광기로 뒤덮인 축생.
맹목적인 살의로 빚은 짐승.
키에에에에에에에엑───!!
“끄아아아악!”
“안돼···! 안돼!!”
공명하듯 울부짖는 비명에선, 모든 핏줄에서 쥐어짜낸 듯한 증오가 터져나왔다.
#
[끝이군.]
상황을 관조하던 드래곤, 카르제는 그렇게 주억거렸다.
역시 달라지는 건 없었다.
후예는 어디까지나 후예일 뿐이었다.
그것도 한없이 부족한 후예.
결국, 이곳에서 모두 죽는다.
대항할 수 없는 악의(惡意)만이 남을 뿐이다.
천 년전에도 운명은 바뀌지 않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바뀌지 않는다.
이미 결정되어있던 운명.
그 길의 끝을 향해 걸어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카르제는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하다.
그렇기에 카르제는.
-모두 정신차려!!
저 행동의 의미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
띠링!
《샤를롯의 긍지가 내려앉습니다!》
《아군에게 행해지는 모든 정신 공격이 무효화 됩니다!》
찬란한 빛이 전장에 강림하며 드리운 광기의 마력이 일시에 물러났다.
“내, 내가 무슨···!”
“허헉···! 허헉···!”
그로써 광기로 물들었던 병사들의 정신이 되돌아왔다.
하지만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키에에에에에에에엑───!!
사방을 뒤덮는 광기의 마물들.
탐식의 권능로 탄생한 마물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끔찍함을 담고 있었다.
차라리 하얀 늑대 기사단들을 상대하는 것이 더 나을 지경이었다.
무엇보다.
【귀찮게 굴긴!】
꽈아앙! 하는 폭발과 쩌저적, 대지가 갈라졌다.
갈라진 대지 위로 누르비아의 몸이 앞으로 쏘아졌다.
고속으로 펼쳐지는 누르비아의 움직임.
그것은 잠시나마 인지의 영역을 벗어나있었다.
‘승부수를 띄워야한다.’
이르지만 어쩔 수 없었다.
힘을 아끼고 자시고 할 상황이 아니다.
이것 저것 잴 상황도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두 군주의 힘은 계속해서 강해지고 있었다.
시안은 가진 바 모든 마기를 폭사시켰다.
모든 힘을 쏟아부어야한다.
사아아아아아─!!!
휘몰아치는 마기가 광기의 세계를 걷어냈다.
끔찍한 마력의 힘에 시안의 몸이 파르르, 떨려왔다.
그러나 견딘다. 버텨낸다.
노에미의 유산, 소울 오브 드래곤. 그것을 믿는다.
꽈꽈꽝!!
사출된 마기가 터진다. 폭발한 힘이 공간을 찢어버렸다.
광기의 세계가 공간에 찢겨져 소멸된다.
【아직도 모르겠어?】
하지만 누르비아의 이죽임을 걷어내진 못했다.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에는 명백한 비웃음이 걸려있었다.
【이제 끝났어.】
공간이 다시 한 번 붉은 빛으로 물들며, 마력이 크게 솟구쳤다.
대항할 수 없는 악의(惡意)가 밀려온다.
투지조차 꺾이는 압도적인 힘에 짓눌린다.
이 힘 앞에서 아무것도 의미가···.
‘아니. 아니야.’
시안은 생각을 끊어내었다.
그럼에도 계속되는 생각에 정신을 닫아버렸다.
생각하면 안된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한다.
현재로서는 틈을 먼저 만들어야한다. 그것이 최선이다.
닫아버린 정신을 다시 열자, 생각의 흐름이 가속화된다.
아찔한 두통이 밀려온다. 의식이 아득해진다.
어둠으로 번들거리는 두 눈이 마력의 흐름을 엿본다.
멸살의 검에 마기를 밀어넣었다.
억지로 몸을 비틀며, 붉은 마력의 세계를 찢는다.
번쩍! 하며 터져나온 검은빛.
시안은 한줄기 흑뢰(黑雷)처럼 앞으로 쏘아져나갔다.
가히 번개와 같은 속도.
신체가 활용되는 속도를 생각이 쫓아가질 못한다.
꽈아아아앙!
검은빛의 뇌전이 누르비아의 주변으로 내리쳤다.
누르비아가 몸을 휘청거리며 밀려났다.
사출한 마력의 힘과 구조가 일시에 무너져내린다.
【이 새끼가 아직도!】
누르비아가 발작을 하며 소리쳤다.
손을 빠르게 휘저으며, 무너진 마력의 구조를 재조립했다.
‘지금!’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기 전.
어둠이 터지며 멸살의 검이 이미 휘둘러진다.
당황하는 누르비아의 목덜미로 멸살의 검이 스쳐지나간다.
콰아아아아아아─!!
충격에 영혼이 뒤흔들린다.
위험하다. 시안의 공격은 일반적인 것과는 달랐다.
본질에 관여하는 힘. 일격을 허용할 때마다 정신의 연결이 드문드문 끊어진다.
힘을 해방했다고 해서 방심할 정도는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이쪽이 당한다.
【그래봤자 이 정도로는─!】
그 순간.
알아.
그런 목소리가, 들려온 듯한 착각이 일었다.
시안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어둠으로 번들거리는 두 눈은,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 정도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
사방을 날뛰던 마기가 일시에 멈춘다.
그리고 누르비아의 기억이 툭. 끊어진다.
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광경.
기억과 함께 누르비아의 정신이 끊어진다.
마혼수라검(魔魂修羅劍).
제 1형(第 一形).
아수라(阿修羅).
.
.
.
모든 것들이 소멸하는 무(無)의 세계.
그 무(無)의 세계 속에서 누르비아는 멍하니 서 있었다.
인정···한다.
누르비아는 현재로서 시안을 이길 수 없었다.
비록 온전한 힘을 해방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인정한다.
누르비아 혼자였다면 이 싸움에서 반드시 패배했을 것이다.
아니, 방금 일격에서 승부가 결정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리고 다행히도.
쩌어어어억─!
누르비아는 혼자가 아니었다.
벌어진 심연의 아가리.
해방된 탐(貪)이 권능이 펼쳐진 무(無)의 공간을 집어 삼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