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 카일의 후예(2)
꽈아아아아앙!
멸살의 검이 누르비아의 마력을 베어내며 큰 폭발을 자아내었다.
산산히 깨어진 검붉은 마력이 시야를 가려왔다.
【크학···!】
그 사이로 들려오는 누르비아의 비명.
그로써 보이는 찰나의 틈.
시안은 몸을 앞으로 쏘아보내며 멸살의 검에 마기의 힘을 담았다.
하지만 금방 그 뜻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번쩍! 쐐애액!
양쪽에서 쇄도해오는 두 개의 빛.
시안은 멸살의 검을 양 옆으로 두 번 내리그었다.
쾅! 콰쾅!
크나큰 폭발과 함께 쏘아지던 빛이 사라졌다.
사라지는 빛 뒤편으로 듀라크와 카이가 휘청거리며 물러났다.
다르···다?
다르···다?
물러서는 듀라크와 카이의 머릿속으로 공통된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분명 똑같은 시안이었다.
얼마 전도 시안과 똑같은 시안이었다.
아니, 얼마 전도아니었다. 불과 하루도 채 되지 않은 시간.
그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시안이다.
그런데 다르다.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
마치 하나의 거대한 벽을 마주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
“······!”
듀라크와 카이의 두 눈이 충격으로 크게 떠졌다.
【어, 어떻게···! 네가 어떻게···!】
누르비아의 경악 어린 외침이 들려왔다.
누르비아는 떨리는 눈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도 안된다. 말도 안된다.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표정은 공포에 질린 사람처럼 정신이 나가있었다.
정면을 바라보는 누르비아의 떨림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시안은 그런 시선들을 마주하며 뒤 쪽으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진 아리아에게 말했다.
“아리아. 괜찮아?”
“케엑···! 케켁···!”
대답은 고통스러운 기침으로 들려왔다.
아리아는 여전히 바닥에 쓰러진 채 생명을 갈구하듯 계속해서 기침을 토해냈다.
시안은 아리아를 부축여 일으켜세웠다.
가까이서 바라본 아리아의 백옥 같은 목덜미에는 붉디 붉은 손자국이 새겨져있었다.
“어딜 갔다···! 케헥···! 이제 온··· 거야···!”
아리아가 질책하듯 시안을 쏘아붙였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표정만은 그렇지 않았다.
살아있었구나. 다행이야.
시안을 바라보는 아리아의 얼굴에는 안도감이 새겨져있었다.
“미안. 현질 좀 하고 오느라.”
시안은 멋쩍게 웃으며 답을 해보였다.
현질···?
아리아는 순간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시안은 아리아를 부축하며 차분히 주변을 훑어보았다.
경악 어린 시선의 누르비아.
충격 받은 듀라크와 카이.
그리고 루벤과 엘란두르와의 격돌.
갑작스러운 시안의 등장으로 잠시 소강 상태에 있었다.
정황이 어떻게 흘러간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어떤 상황인지는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다.
“루카스. 다이애나와 함께 에런을 맡아줘.”
시안은 빠르게 판단을 내리며 전장을 지휘했다.
아리아와 함께 듀라크와 카이를 상대로 버텼던 루카스.
마지막에 누르비아에게 당한 것 때문일까.
루카스의 상태는 여러모로 좋지 않았다.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은 싸워야할 때.
루카스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별 다른 이견없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시안은 다시 시선을 돌려 부축한 아리아를 바라봤다.
“아리아. 상태가 안 좋은 것을 알지만··· 부탁해도 될까?”
아리아 또한 별 다른 이견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신성력을 끌어올리며, 시안의 옆으로 바로 서보였다.
듀라크와 카이 그리고 누르비아.
실로 강대한 적들이었으나 시안과 함께라면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병사들과 함께 싸워줘.”
들려온 시안의 말은 아리아의 예상과는 달랐다.
“··· 뭐? 뭐? 케헥···!”
아리아는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
새어나온 기침이 말문을 막지만 않았더라면 아리아는 무슨 소리냐며 쏘아붙였을 터였다.
시안과 아니라 병사들과 함께 싸우라니?
아리아는 무슨 소리냐는 듯 시안을 쳐다봤지만 시안은 뜻을 꺾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으니까.
현재로서 루벤의 병사들과 기사들이 하얀 늑대 기사단을 대적할 수가 없었다.
<뮤리엘의 축복> 없이는 상당히 힘들었다.
그리고 <뮤리엘의 축복>은 100시간에 한 번 사용가능한 버프.
약 4일이라는 시간이 지나야만 다시 사용할 수 있었다.
하여 <뮤리엘의 축복>을 사용할 수 없는 지금.
하얀 늑대 기사단을 대적하려면 아리아의 힘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이건 아리아의 축복이라 불러야 하나?’
시덥지 않은 농담에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뭐···.
<뮤리엘의 축복>에 비하면 <아리아의 축복>은 조금 뒤떨어졌다.
사실상 <뮤리엘의 축복> 너프 버전이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아르나이즈가, 뮤리엘이 상정 외의 존재일 뿐.
아리아의 힘이 약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괜히 뮤리엘의 환생이라 불리겠는가.
아리아가 도와준다면 병사들은 충분히 하얀 늑대 기사단을 대적할 수 있을 터였다.
물론.
“너는 어쩌려고!”
그에 따른 대가는 오롯이 시안이 짊어져야만 했다.
루카스와 다이애나가 합공하여 에런을 막아선다.
아리아와 루벤의 병사들이 하얀 늑대 기사단을 막아선다.
이 말은 즉.
듀라크와 카이 그리고 누르비아.
이 셋을 시안 혼자서 감당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는 불가능했다.
말 그대로 불가능이라 아리아는 확언할 수 있었다.
방금 전에 직접 대면해봤기에 확언할 수 있었다.
아무리 시안이라도 저 셋을 혼자 감당할 수 없었다.
일전에도 시안은 듀라크와 카이의 협공에도 고전을 면치 못했었다.
그런데 여기에 누르비아까지 가세한다?
보지 않아도 뻔했다.
시안은 또 다시 스스로를 희생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데.
“괜찮아. 그것보다 이것 좀 맡고 있어봐.”
시안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 말과 함께 시안이 등에 맨 무언가를 아리아에게 건넸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사람 머리만한 구체.
아리아는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들었다.
“성물이야. 그런데 등에 매고 싸우기엔 영 거추장스러워서 말이지. 자칫 잘못하면 빼앗길 수도 있어서. 네가 맡고 있어.”
시안은 그제서야 홀가분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리아는 받아든 성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황금빛 구체 안에서는 묘한 힘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리고 왜인지 모르겠지만··· 상당히 익숙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아 맞다. 그거 뮤리엘이 만든거거든? 방법은 잘 모르겠지만 어떻게 잘 활용해봐.”
“뭐라고···?”
“그럼 부탁할게.”
시안은 그 말을 끝으로 앞으로 터벅, 걸음을 옮겼다.
사아아아─!
이윽고 어둠이 시안의 얼굴을 감싸며, 투구가 씌워졌다.
어둠의 기사(Dark Knight).
아리아는 시안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불가능 해··· 불가능한 일이야···.】
서서히 다가오는 시안의 모습에 누르비아가 주춤, 뒷걸음질 쳐보였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누르비아는 미친 사람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 또한 반복되고 또 반복된다.
당장이라도 공격을 해야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저들이 시덥잖은 대화를 나누게끔 놔둬서는 안된다는 것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저 성물.
저 성물을 당장이라도 빼앗아와야 한다는 것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몸이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여서는 안된다고.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었다.
전신을 옥죄어오는 공포.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두려움.
콰르르릉!
터져나오는 뇌명에 시안의 몸에서 폭발의 소리가 일었다.
들끓는 마기가 전신을 회전하며 끔찍한 힘을 자아낸다.
아니, 아니다.
누르비아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어털어버렸다.
그 존재는 죽었다.
까마득한 천 년이란 세월 전에 이미 죽어 사라졌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인간이었다.
실로 믿기지 않았지만 필멸(必滅)의 운명을 지닌 인간이었다.
따라서 그 존재는 아니다.
눈앞에 있는 시안은 그 후예일 뿐이다.
결단코 그 존재가 아니다.
이성이 다시 자리하며 공포가 사라진다.
공포가 사라지니 방금 전의 행동이 얼마나 추했음을 깨닫는다.
감히, 라는 분노의 감정만이 자리매김할 뿐이다.
【이 개자식이!】
누르비아의 악의(惡意)가 날뛴다. 이윽고 누르비아의 손톱이 공간을 할퀴었다.
콰자자자작─!
앞선 공간이 찢어지며, 검붉은 마력이 발톱처럼 쇄도해온다.
터져나온 붉은 빛이 사방을 덮쳐온다.
펼쳐지는 붉은 마력의 세계.
그 절대적인 세계 속에서 시안은 물러나지 않았다.
터벅, 가볍게 발걸음을 앞으로 내딛었다.
콰르르르르릉!
전신의 마기가 요동치며 멸살의 검으로 요악한 힘이 모여든다.
어둠에 어둠을 덧칠하듯, 멸살의 검에 마기가 파들거리며 휘몰아쳤다.
10배의 힘을 사출하는 메긴기요르드.
그 힘을 증폭시키는 극마지체(極魔肢體)의 효율.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받아내는 소울 오브 드래곤(Soul of Dragon).
그 속에서 시전되는 극한의 마혼수라검.
마혼수라검(魔魂修羅劍).
제 1식(第 一式).
극(極) - 수라천살(修羅天殺).
.
.
.
콰아아아아아아아─!
펼쳐진 붉은 마력의 세계가 일시에 소멸한다.
소멸한 마력의 세계로 어둠의 시간이 찾아온다.
【······!!!!】
누르비아의 얼굴로 경악이라는 감정이 새겨진다.
다르다. 그리고 똑같았다.
절대로 아닐거라, 결단코 있을 수 없을거라 생각했던 그 일.
그 때의, 그 날의 악몽.
그 악몽이 지금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불안함을 주체할 수가··· 없다.
번쩍─!
드리운 어둠의 세계로 한 줄기 묵빛 섬광이 쇄도한다.
【감히···! 감히 너 따위가!!】
누르비아가 손을 앞으로 뻗어보였다. 손 위로 붉은 마력이 뿜어져나오며 수 십, 수 백개의 결계가 새겨졌다.
그리고 섬광이 결계에 맞닿기 직전.
시안은 알 수 없는 고양감에 가득찼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요동쳤고.
근육은 당장이라고 폭발하듯 꿈틀거렸다.
그러나 견뎌낸다.
휘몰아치는 마기(魔氣)가 시안의 의지대로 움직인다.
꽈아아아아아아앙!!
공간이 뒤흔들리며 결계가 부서진다.
수 백개의 결계가 시안의 일격을 버티지 못하고 산산히 부서져 깨어진다.
【뭐하고 있어!!!】
누르비아가 카랑거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 목소리에 퍼뜩, 듀라크와 카이가 시안을 향해 쏘아져나갔다.
누르비아를 위시한 듀라크와 카이의 합공.
시안은 자세를 바꾸며 멸살의 검을 크게 휘둘렀다.
꽈아아아아앙!
마기가 크게 부풀며, 공간이 터질 것처럼 진동했다.
극한으로 응집된 마기는 앞선 모든 것들을 집어삼켜버렸다.
누르비아의 악의(惡意)는 물론, 듀라크와 카이의 힘 또한 삼켜졌다.
‘할 수 있어.’
시안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극마지체(極魔肢體)로 진화한 신체.
이는 단순히 진화라는 개념이 아니었다.
아리아의 몸이 신성력으로 빚어낸 것처럼 느껴지듯.
그로써 강대한 신성력을 발휘할 수 있듯.
시안의 몸 또한 그 자체를 마기로 빚어내 재탄생한 것만 같았다.
그리고 소울 오브 드래곤(Soul of Dragon)으로 진화한 신체.
드래곤 수준의 강도는 그 모든 부작용들을 받아내었다.
심기체(心氣體)의 완벽한 조화.
그것은 시안을 경험해보지 못한, 너머의 영역으로 데려다 주었다.
화아아아아악─!
시안의 의식이 확장된다. 확장된 의식으로 강맹한 마기가 요동친다.
요동치는 마기는 시안의 전신으로 스며들며 터져나온다.
【이, 이건···!】
누르비아의 얼굴로 뚜렷한 경악이 새겨진다.
지금··· 지금 보이는 시안의 모습.
짙은 어둠을 흩뿌리는 시안의 모습에서는 더 이상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후작가의 망나니.
천하의 둔재.
지금 시안의 모습은 결단코 그렇게 부를 수가 없었다.
아주 오래 전의 기억 속.
어떤 한 존재의 모습이 겹쳐보일 뿐이었다.
최강이라 불렸던 아르나이즈.
엑시드(Exceed), 그 너머의 영역에 닿은 역사상 유일무이한 존재.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누르비아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쳐보였다.
알고 있다. 시안은 그 존재가 아니다.
그 존재에 비하면 여전히, 한없이, 까마득히 초라하다.
그런데··· 그런데··· 겹쳐보인다.
시안은 지금.
그 아득한 길의 영역에, 홀연히 서 있다.
번쩍─!
일순간 쏘아지는 한줄기의 묵빛 섬광.
비틀거리며 물러서는 누르비아.
푸확!
그녀의 입가로 새빨간 피가 뿜어져나왔다.
마혼수라검(魔魂修羅劍).
제 2식(第 二式).
초(超) - 멸천수라(滅天修羅).
#
어둠으로 잠식된 세상의 풍경.
“이, 이게 대체···!”
레이첼은 경악이라는 감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갑작스러운 시안의 난입.
예정된 계획과는 달랐으나 문제는 없다 생각했다.
어쨌거나 시안을 불러낼 생각이었으니까.
또한 시안이 가지고 있는 성물을 다시 가져와야했으니까.
그러니 이대로 시안을 제압하고 성물을 강탈하면 그만이었다.
분명···
푸확!
그러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의 풍경.
누르비아의 입가로 뿜어진 새빨간 선혈만이 엿보일 뿐이었다.
알고는 있었다. 시안이 어떤 존재인지.
정확히는 누구의 길을 따라 걷는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건··· 이건 아니었다.
상정 수치를 아득히··· 벗어났다.
지금 보이는 풍경은, 광경은, 모습은.
결단코 시안이 아니었다.
최강의 아르나이즈, 카일(Kyle).
그의 힘이 천 년이란 세월을 뛰어넘어 지금 여기.
다시 한 번 재림하고 있었다.
카일의 후예.
그 공포스러운 개념이 레이첼의 머릿속으로 똑똑히 각인되었다.
이대로라면··· 밀린다.
밀리는 것은 다름 아닌 이쪽···.
“······!!!”
레이첼의 표정이 충격으로 일그러졌다.
방금 머릿속을 스쳐지나간 생각.
그 생각이 얼마나 말도 안되는 생각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것은 명백한 현실이다.
그 말도 안되는 생각이 지금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된다.
전장에 변수가 필요하다.
레이첼은 앞으로 나서보였다.
아직 완전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위험을 감수해야할 때였다.
레이첼은 내재된 악(惡)의 힘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바로 그때.
【탐스러운 먹잇감으로군.】
레이첼의 귓가로 진정한 변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흠칫.
감각 사이를 파고드는 위화감.
시안이 위화감을 느낀 것은 초(超) - 멸천수라(滅天修羅) 직후.
비틀거리는 누르비아를 향해 다시 한 번 몸을 내던졌을 때였다.
시안은 어둠을 새빨갛게 물들이는 광기를 인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누르비아의 것이 아니었다.
누르비아와는 달랐으며, 무엇보다 누르비아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또한 그것은 시안을 향하고 있지 않았다.
“아리아!”
시안은 경고를 하듯 아리아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그런 시안의 경고 때문일까.
아니면 아리아 또한 무언가를 느낀 것일까.
화아아아악!
아리아는 신성력을 끌어올리며 신성의 방벽을 전개했다.
순백의 방벽이 아리아의 전신을 감싸며 모든 부정한 것을 몰아내었다.
바로 그 순간.
【이건 함부로 먹었단 탈이 나는데.】
아리아의 귓가로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어쩔 수 없군.】
살갗을 아려오는 듯한 끔찍한 악의(惡意).
이윽고 어마어마한 힘이 방벽 위로 느껴졌다.
쩡─! 쩌정─!
억누르는 힘이 신성의 방벽을 두들겼다.
그리고 쩌저적─! 방벽 사이로 거미줄과 같은 실금이 새겨졌다.
“크흑···!”
아리아는 이를 까득, 깨물며 신성력을 사출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방벽의 실금이 더욱 거세지며 곧 깨질 것처럼 흔들렸다.
머뭇거릴 틈이 없다.
시안은 곧장 몸을 돌려 아리아에게로 쏘아져나갔다.
하지만.
“어딜!”
듀라크와 카이가 그런 시안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 새끼가···! 쿨럭!】
그와 더불어 정신을 차린 누르비아의 마력이 시안을 덮쳐왔다.
젠장.
시안은 이를 까득, 깨물며 다시 몸을 되돌릴 수밖에 없었다.
파장창─!
이윽고 신성의 방벽이 깨지며 빛이 흩어졌다.
그와 동시에 아리아의 시야 앞으로 낯선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리아가 무얼 반응하기도 전.
뻐어억─!
아리아의 복부 쪽에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아리아가 맥없이 허공을 날아갔다.
이윽고 콰당탕!
아리아가 바닥으로 거칠게 내동덩이 쳐졌다.
【그 순간에 반격을 한 건가.】
그리고 들려온 서늘한 목소리.
바라본 그곳엔 한 사내가 서있었다.
사내는 차분히 시선을 내려 손등을 바라봤다.
손등에는 새하얀 신성력이 엉겨붙어 피부가 부글부글, 들끓고 있었다.
조금만 반응이 늦었더라면 팔 전체가 잠식되었을 터.
역시나 괜히 먹었다가는 탈이 나도 제대로 날 뻔했─.
콰아아아아앙!
생각의 흐름을 끊고 날선 공격이 이어졌다.
그 사이로 보인 것은 한 인간 사내, 시안.
그 찰나의 순간에 합공을 뚫어내고 온 것인가.
【확실히.】
사내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처음엔 비웃었지만 직접 대면해보니 알겠다.
왜 이렇게 누르비아가 고전을 면했는지.
그리고 레이첼이 왜 그렇게 조심스럽게 행동했는지.
공간을 잠식하는 마기(魔氣).
사내는 씨익, 웃음을 흘렸다.
【이건 꽤나 먹음직스럽지.】
그 순간.
시안의 마기가 사내의 입 속으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굴복한다, 라는 개념이 아니었다. 삼켜먹고 있었다.
말 그대로 마기를 집어 먹고 있었다.
“이게 무슨···.”
당황스러운 심정도 잠시.
시안은 빠르게 상황을 판단했다.
지금 삼켜지는 마기(魔氣).
그리고 정신을 아려오는 듯한 흉측한 악의(惡意).
시안은 금방 사내의 정체를 눈치챌 수 있었다.
교만, 탐욕, 질투, 분노, 색욕, 탐식, 나태.
그 죄에서 깨어난 일곱의 악마.
그들 중에서 '먹는다(食)' 라는 개념과 관련이 있는 악마는 단 한 명뿐이었다.
정확히는 마기를 집어삼킬 수 있는 존재는 딱 한 명뿐이었다.
탐식의 악마, 굴네리아(Gullneria).
【오랜 만에 먹는 맛이야.】
굴네리아의 붉은 광채가 번뜩인다.
어마어마한 힘이 시안의 전신을 내리눌렀다.
쩌어어어억─!
굴네리아의 입이 다시 한 번 찢어질 듯 벌어졌다.
그것은 절대 벌어질 수 없는 기괴한 형태로 벌어지며 존재하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끝없는 굶주림, 탐식(貪食).
존재하는 모든 것을 무차별적으로 집어삼키는 탐식은 인간의 욕심과 닮아있었다.
쩌억, 벌어진 거대한 아가리 속으로 시안의 마기가 빨려들어갔다.
피어오르는 시안의 마기가 흩어사라진다.
하지만.
사아아아아아─!!
시안의 마기는 멈추지 않았다.
더욱더 기세가 폭발하며 굴네리아의 탐(貪)에 마기를 밀어넣었다.
인간의 욕심과 닮은 굴네리아의 탐(貪).
그 그릇의 크기는 감히 추정할 수 없었다.
가히 무한이라 부르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허나, 시안이 다루는 마(魔)는 그 궤를 달리했다.
본질의 근원을 다루는 마(魔).
채울 수 없다면 무한의 그릇 자체를 부서버린다.
한계를 뛰어넘는 초월적인 힘으로 찍어누른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
칠흑의 마기가 끊임없이 쏟아져나왔다.
마혼제법과 극마지체의 효율이 극한으로 어우러진다.
끝없는 밤의 세계.
【······!】
굴네리아의 두 눈에 뚜렷한 경악이 새겨진다.
지금 삼켜지는 이 마기.
삼켜도 삼켜도 끝없이 채워진다.
그릇의 한계를 넘어서며 계속해서 폭사한다.
말도 안되는 일이나 끝없는 굶주림이 채워지고 있었다.
이, 이제 더 이상은···!
콰아아아아앙!
일순간 터져나온 폭발에 시안의 몸이 저 멀리 밀쳐졌다.
【허헉···! 허헉···!】
굴네리아는 그때서야 달뜬 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위험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밍기적 거린 건 아니겠지··· 하학···!】
누르비아가 나서는 것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역으로 삼켜질 뻔했다.
탐(貪)의 권능이 저 마기에 되려 삼켜질뻔 했다.
확실히 다르다.
굴네리아는 단번에 이 상황을 판단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상태로 싸워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다.
누르비아가 가세한다 한들 쉽사리 이길 수가 없다.
참···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었다.
악마 6군주의 2군주가 나섬에도 이길 수가 없다니.
그러나 이는 명백한 사실─.
바로 그때.
“카리스··· 오빠?”
어디선가 낯설면서도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라본 그곳.
“카리스 오빠··· 맞지?”
그곳엔 다이애나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