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 카일의 후예(1)
이름 모를 드넓은 평야.
사아아아아아─!
평야 너머로 보이는 지평선 가로지르며 한줄기 어둠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번쩍!
이윽고 터져나오는 검은빛.
그와 동시에 어둠이 빛과 같은 속도로 쏘아져나갔다.
“확실히···.”
시안은 차분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금 어마어마한 속도로 쏘아지고 있는 이 속도.
메긴기요르드의 힘을 최대한으로 조이며 마혼무영보를 극한으로 밟은 속도는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한 속도였다.
평소의 시안이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불과 몇 시간 전의 시안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메긴기요르드의 부작용으로 전신의 근육이 모조리 찢어지고 파열되어야했으니까.
설령 근육이 버틴다고 한들.
이 속도에 따른 공기 저항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신체가 짓이겨져야 마땅했다.
그런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반동은 커녕 저항감조차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드래곤의 수준으로 신체를 강화하는 소울 오브 드래곤(Soul of Dragon).
상속세가 비싼 이유가 있었다.
다만,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기는 했었다.
“드래곤 하트는 안되네.”
시안의 심장은 예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물론 조금 더 강력하고 활력이 솟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드래곤 하트라 부르기엔 무리가 있었다.
뭐, 소울 오브 드래곤의 효과는 ‘신체의 강도를 드래곤의 수준으로 강화한다.’ 였다.
신체를 드래곤으로 만들어준다, 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지.”
아쉽긴 했지만 이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드래곤 하트가 상당히 좋기는 했지만···.
아니, 좋다 못해 미친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아쉬움 정도로 남길 수 있었다.
사아아아아─!
다름 아닌 카일의 유산.
마력의 효율을 30배나 올려주는 극마지체(極魔肢體).
이 때문에 시안은 한층 증폭된 마기를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전신으로 들끓는 마기(魔氣)의 힘.
심지어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과정에서 마기(魔氣)가 쌓이는 것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통제하는 마혼제법(魔魂制法)의 효율까지도.
역시나 퀘스트의 보상 중 역대급 보상.
과연 아르나이즈의 유산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째 퀘스트는 별 말이 없단 말이지.”
다만, 퀘스트가 클리어 된 이후로 또 다른 퀘스트가 떠오르지 않았다.
연계 퀘스트든 아니면 새로운 퀘스트든.
뭐라도 추가로 나와야하는데 별 반응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시안은 의문이 무엇인지 아직 알지 못했으니까.
퀘스트의 제목이었던 ‘끝나지 않은 의문’.
분명 더 퀘스트가 있을 듯 한데 더 이상 퀘스트는 떠오르지 않았다.
“음··· 일단은 넘어가자.”
하지만 시안은 금방 생각을 떨쳐버렸다.
이런 적이 처음은 아니었으니까.
무엇보다 지금 당장 중요한 사실도 아니었다.
누르비아의 등장.
아직 끝나지 않은 엘란두르와의 전쟁.
그리고 루벤의 병사들과 갈라진 지금.
가장 급선무는 병사들과 합류해야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어디에 있냐는 건데···.”
시안은 루카스에게 퇴각하라고만 말했을 뿐 구체적인 장소를 따로 지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루카스라면 시안이 찾아올 법한 장소를 선별했을 터.
그렇기에 대강 짐작이 가는 곳은 있었다.
“수인족들의 왕국에 수도가 있다고 했었지.”
수인족들이 가장 많이 모여사는 곳.
아직 상황이 끝나지 않은 현재로서 가장 최적의 장소라 할 수 있었다.
“문제는 또 거기가 어디냐는 건데···.”
하지만 뭐, 이것도 큰 문제는 없었다.
이 공간 전부를 뒤적거리다보면 찾을 수 있을테니까.
넓은 공간이었지만 이 속도라면 금방 찾을 수 있을 터였다.
“빨리 움직이자.”
번쩍─!
시안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몸을 쏘아보냈다.
#
싱긋, 웃는 레이첼의 모습.
그 주위로 도열해있는 하얀 늑대 기사단들.
설마 추격을 하고 있었나?
루카스는 빠르게 상황을 판단했다.
아니, 아니다.
이건 추격으로 따라잡은 속도가 아니었다.
추격으로 따라붙는다면 앞이 아니라 뒤로 쫓아왔어야했다.
그러나 지금 보이는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이건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고밖에 설명이 되지 않았다.
처음부터 추격할 생각이 없었나?
어쩐지 추격을 하는 것 같지 않더라니.
아무래도 추격보다는 장소를 미리 선점해둘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문제는 루벤이 어디로 갈 것인 줄 알고 선점하냐는 건데···.
생각을 읽힌 것인가.
루벤과 시안이 갈라진 것을 저들도 알고 있었다.
따라서 루벤의 입장에서 시안과 합류하는 것.
그것이 가장 급선무라는 것을 저들 또한 충분히 생각할 수 있었다.
그 정도까지 생각했다면 이 장소를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저들도 생각이라는 것을 할 줄 아는 이들이었으니까.
실책이다.
루카스는 빠르게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추격을 따돌릴 생각만 했었지 이렇게 앞서 지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명백한 실책이었다.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후회는 나중에.
“전원 전투 준비!”
루카스의 외침과 함께 루벤의 병사들과 기사들이 무기를 꺼내들었다.
기세 끓어오르며 마(魔)의 기운이 치솟기 시작했다.
이미 한 번 밀어붙인 적이 있던 하얀 늑대 기사단.
그러나 이번에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달랐으니까.
가장 큰 이유는 알 수 없는 힘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루카스도 그것이 어떤 힘인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시안이 무언가 했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현재 루벤의 전력은 엘란두르의 하얀 늑대 기사단에게 안된다.
아니, 사실 그런 건 부차적인 문제였다.
그 힘이 없더라도 어떻게든 맞붙어 버틸 수는 있었다.
밀어붙일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진다는 뜻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시야 앞으로 보이는 3명.
듀라크와 카이 그리고 에런.
저 셋을 상대할 전력이··· 이쪽에는 없었다.
루카스 본인조차 에런 한 명을 상대하기가 벅차다.
저들을 상대할 수 있는 존재는 딱 한 명, 시안.
그러나 시안은 지금 이곳에 없었다.
시안의 부재만은 대체할 수가 없었다.
열악하다못해 처참한 상황.
그러나 그 상황 속에서도 해야하는 법이었다.
루카스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다이애나님. 에런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 해볼게.”
다이애나의 답은 금방 들려왔다.
용인족의 혈통이자 한때는 수인족의 가장 날카로운 발톱이었던 다이애나.
아까 전의 싸움에서도 다이애나는 상당한 실력을 발휘했었다.
비록 용인족의 힘을 온전히 발휘할 수는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림자 달의 길드장이라는 자리는 아무나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다이애나라면 에런을 상대로 어떻게든 시간 벌이 정도는 할 수 있을 터였다.
물론 얼마 간 버틸 수 있느냐가 문제였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었다.
다이애나의 답을 들은 루카스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성녀님. 저와 함께 듀라크와 카이를 상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시안은 아리아의 참전을 극구 반대했었다.
루카스 또한 그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는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었다.
뮤리엘의 환생이라 불리며 역사상 가장 강대한 신성력을 지닌 성녀, 아리아.
신성력의 축복과 더불어 아리아와 합공한다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터였다.
아니, 버텨야만 했다.
지금은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루카스는 아리아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런데 왜일까.
아리아에게서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네, 네가···.”
경악에 기반한 중얼거림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아리아는 왜인지 상당히 놀라고 있었다.
물론 지금 상황이 놀랄 만한 상황이긴 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아리아의 놀람은 지나치게 느껴졌다.
크게 떠진 아리아의 두 눈.
그것은 백합색 머리의 여인, 레이첼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네가 어떻게 여기에···?”
“음?”
아리아의 중얼거림을 들은 것인지 레이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윽고 레이첼이 아리아를 발견하더니.
“어머. 뜻 밖의 손님도 계셨네요?”
레이첼 또한 놀랍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제가 그걸 대답해드려야 하나요?”
레이첼이 싱긋,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리아는 여전히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리아 또한 금방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레이첼이 어째서 이곳에 있는지는 모르겠다.
또한 왜 엘란두르와 함께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의문은 나중에.
어쨌거나 레이첼이 관여되어있는 지금.
아리아가 나서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병사들에게 축복을 걸어줄게. 그리고 나를 서포팅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줘.”
아리아는 신성력을 끌어올리며 앞으로 나서보였다.
그런 아리아의 옆으로 루카스가 붙어서보였다.
마스터에 한 발 걸쳐있는 루카스.
그러나 객관적으로 아리아와 비하면 뒤쳐져있었다.
그 뒤로 다이애나를 비롯한 루벤의 병사들과 기사들이 도열했다.
이에 따라 엘란두르 또한 전열을 가다듬었다.
앞으로 나서는 듀라크와 카이.
그 뒤로 도열하는 에런과 하얀 늑대 기사단.
첨예하게 대립하는 기세 속.
앞선 시야로 역시나 듀라크와 카이가 비쳐보였다.
그 둘의 표정은 별 다른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런 위협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긴장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대륙 제 1의 검, 듀라크.
제국의 별, 카이.
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그러나 루카스는 떠오르는 불신을 애써 떨쳐버렸다.
지금은 해야만 할 때.
루카스는 긴장으로 검을 꽈득, 움켜쥐었다.
그리고 찰나.
무덤덤하기만 하던 듀라크의 두 눈이, 일순간 빛이 났다.
온다.
루카스의 생각과 동시에 듀라크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바로 앞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듀라크의 검.
꽈아아앙!
루카스의 시야가 일순간 뒤흔들렸다.
#
루벤과 엘란두르와의 격돌.
그 치열한 격돌을 지켜보며 수인족들은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정확히는 차마 앞으로 나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알고는 있었다.
루벤은 수인족들을 도와주기위해 싸우고 있다는 것을.
그렇기에 루벤을 도와 같이 싸워야한다는 것을.
그리고 저기 가장 앞에서 싸우고 있는 은발의 여인.
한때는 수인족들의 가장 강력한 발톱이었던 루나.
지금은 다이애나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루나 또한 수인족들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
수인족들과 전혀 관련이 없는 루벤.
이제는 수인족이 아니게 된 다이애나.
그 둘이 수인족들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
그렇기에 저들을 도와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밀리고 있었으니까.
밀린다기 보다는 당하고 있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비단 다이애나뿐만이 아니었다.
듀라크와 카이를 대적하는 루카스와 아리아.
하얀 늑대 기사단들을 대적하는 루벤의 병사들.
그 어디 하나 앞서는 것이 없었다.
모든 전황은 루벤의 패배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니 수인족들이 나서봤자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괜히 엘란두르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밖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하지만···.
“우, 우리랑은··· 관련이 없지 않나.”
어디선가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의 목소리인지, 또 어느 종족의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사실 크나큰 의미도 없었다.
“그, 그래. 우리랑은 관련이 없다네.”
“우린 그냥 이대로 있으면 되, 되네.”
다른 수인족들 또한 그 의견에 동조하고 있었으니까.
수호자라도 나선다면 상황은 크게 달라질 터였다.
그러나 수호자는 여전히 방관만하고 있었다.
저항할 수 없는 일에 나서는 것은 헛된 죽음일 뿐.
멸족보다 앞서는 사명은 없다.
“······”
“······”
수인족들은 끝내 그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
치열한 전황 속.
“음··· 생각보다 저항이 거세네요.”
레이첼은 조금 의외라는 어투로 중얼거렸다.
솔직히 말하면 금방 끝날 줄 알았다.
딱 봐도 전력의 차이가 두드러지게 났으니까.
해서 원래 계획은 루벤을 빠르게 제압하여 인질로 삼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루벤의 사람들을 하나하나 죽일 생각이었다.
어딘가에 숨어있을 시안을 불러내기 위한 계략으로 말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저항이 거셌다.
빠르게 제압할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싸움이 늘어졌다.
특히나 아리아와 루카스.
둘은 듀라크와 카이를 상대로 꽤나 호각을 다투고 있었다.
정확히는 아리아가 둘 상대로 잘 버티고 있었다.
물론 신성력의 힘이 공격보다는 방어에 특화되어 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역시 곧 죽어도 성녀는 성녀라는 것일까.
괜히 뮤리엘의 환생이라 불리는 것은 아니었다.
“어째 예전보다 신성력이 더 강대해진 것 같기도 하고···.”
그 때문에 듀라크와 카이가 둘을 쉽사리 제압하지 못하고 있었다.
뭐, 저것도 사실 조만간이긴 했다.
아리아가 어떻게든 버티고 있었지만 단지 그뿐.
서서히 숨통이 죄어지고 있었다.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숨통이 죄어질 터.
그러나 그 시간을 조금 단축시킬 필요는 있어보였다.
“어느 정도 회복되셨으면 부탁드려도 될까요?”
레이첼은 슬쩍,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런 레이첼의 시야로 보인 한 여인.
【내가? 아까보니까 너랑 아는 사이 같은데··· 네가 하지 않고?】
나태의 악마, 누르비아가 조금 귀찮다는 표정으로 답을 해왔다.
레이첼은 살며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은데, 아시다시피 전 아직 개화하지 않아서요.”
【그래도 저 년 정도는 처리할 수 있지 않나?】
“통제가 안돼요. 자칫 잘못하면 저쪽으로 옮겨갈 수가 있어서.”
레이첼의 말에 누르비아의 시선이 정면으로 향했다.
듀라크와 카이에 맞서 싸우고 있는 아리아.
백금발을 휘날리며 신성력을 터트리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기그지 없었다.
싸우는 모습에서 아름답다라는 생각이 먼저 떠오를 정도로 아리아는 아름다웠다.
오래 전, 어떤 재수 없는 년이 생각날 정도로.
【확실히···.】
그렇기에 레이첼의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누르비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추잡한 욕망과 딱 어울리는 미모이긴 하네.】
“그러니 부탁드릴게요.”
【흐응··· 그래도 귀찮은데.】
누르비아는 쉽사리 확답을 해오지 않았다.
【그 녀석은? 그러고보니 그 녀석이 안 보이는데?】
“제가 다른 곳의 수색을 부탁드렸거든요. 루벤이 찾아올 장소로 여기가 유력하긴 했는데, 혹시 모르는 일이라서요. 지금 바로 오고 계세요.”
【일부러 밍기적 거리는 거 아니야?】
“그렇진 않을 거예요. 그 이유는··· 잘 아시잖아요?”
【하긴, 이렇게 먹을 게 잔뜩 있는 곳에 빠질 녀석이 아니긴 하지.】
누르비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좋아. 금방 끝내고 올게.】
누르비아의 모습이 일순간 사라졌다.
그리고 찰나.
키이잉─!
공간이 진동하는 떨림이 느껴졌다.
“당신은···!”
그리고 들려온 경악 어린 외침.
“커헉!”
그것은 재차 들려온 격통과 그리 큰 시간 차이를 두지 않았다.
레이첼이 고개를 돌리자 한 사내가 허공을 날아가고 있었다.
루카스··· 라고 했었던가.
루벤의 경비대장이니 뭐니 했었던 것 같았다.
화아아아아아악!
일순간 시야 앞으로 신성력의 빛이 터져나왔다.
빛은 방벽을 이루며 루카스와 앞선 시야를 가로막았다.
그 순간 검붉은 마력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콰르르르릉!
커다란 폭발이 일며 공간이 뒤흔들렸다.
찬란한 신성력의 방벽이 산산히 깨어지며 흩어진다.
그와 동시에 듀라크와 카이가 틈을 비집으며 달려들었다.
아리아는 황급히 신성력을 터트렸으나 한계가 있었다.
덥썩.
우악스러운 손길이 아리아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아윽···! 까윽···!”
아리아는 벗어나고자 발버둥을 쳤다.
이를 까득, 깨물며 가진 바 모든 신성력을 터트렸다.
그러나 삼켜진다.
악마를 소멸시키는 절대적인 힘이었건만.
이 끔찍한 악마 앞에서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고 스러질 뿐이었다.
마치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는 공포.
이 압도적인 악의 앞에서 아리아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피부 끝을 찌르는 흉측한 악의(惡意).
【흐응···.】
누르비아는 손 안에 쥐어진 연약한 생명을 바라봤다.
움켜쥔 손아귀로 아리아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가까이서 보니까 그 년이랑 똑같이 생겼네.】
생김새만 비슷한 게 아니었다.
마치 신성력으로 몸을 빚어낸 것만 같은 존재.
그 때문인지 목을 움켜쥔 손아귀에서 강한 거부 반응이 일어났다.
【이런 년이 대체 뭐가 좋다는 건지 원···.】
누르비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 얼굴은 확실히 예쁘긴 하네.】
인간과 미(美)의 기준이 다른 악마의 관점에서도 확실히 예쁘다, 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종족을 뛰어넘는 진정한 초월적인 미(美)였다.
【참 아까운 얼굴이네.】
누르비아는 꽈득, 움켜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그와 동시에 아리아의 발이 하늘로 떠오르며 숨이 턱, 하고 막혀온다.
그리고 그 상황을 지켜보던 레이첼.
“귀찮다고 하실 때는 언제더니···.”
레이첼은 가볍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뭐, 이로써 끝이다.
레이첼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정확히는 고개를 돌리려던 그때였다.
찾았다.
어디선가···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
아니, 이건 목소리가 아니었다.
목소리라기 보다는 어떤 의지.
아니, 정확히는 감각 사이로 파고드는 공포와 가까운─.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레이첼은 그 이상의 생각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
누르비아는 저도 모르게 아리아를 붙잡은 손을 놓아버렸다.
지금 감각 사이로 파고든 어떤 기운.
그리고 어떤 생각.
당장 이 손을 놓지 않으면 죽는다.
이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죽는다.
치명적인 본능이 강력하게 경고한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앞선 공간 전체가 무언가에 휩쓸려 사라졌다.
누르비아가 방금 전까지 있던 공간이 완전히 소멸해버렸다.
【이 무슨···!】
누르비아의 두 눈이 부릅, 떠졌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느껴진 이 힘.
이 힘은 마치─!
꽈아아아아아아앙!!
누르비아의 앞선 시야가 다시 한 번 폭발했다.
황급히 마력의 결계를 펼쳤지만 그 충격을 온전히 막아낼 수 없었다.
【커헉···!】
누르비아의 입으로 억눌린 비명이 터져나왔다.
입 사이로 솟구친 선혈이 누르비아의 입술을 더욱 붉게 물들였다.
【이게 대체···!】
누르비아는 고개를 홱, 치켜들며 앞선 시야를 바라봤다.
그리고 보인 한 사내.
그것은 다름 아닌 그토록 찾아 해매던 시안이었다.
시안은 누르비아가 펼친 마력의 결계와 검을 맞대고 있었다.
파지지지직─!
그 힘의 충돌에 붉은 마력과 검은 마기가 얽히고 있었다.
쩌저적─!
그리고 밀리는 것은 이쪽이었다.
마기의 힘에 짓눌려 붉은 마력의 결계가 깨지고 있었다.
【이, 이게··· 이게 대체···!】
누르비아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부릅, 떠진 두 눈이 시안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아무런,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너 잘 만났다는 통쾌함.
제 발로 찾아왔다는 어리석음.
죽여버리겠다는 분노.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분노? 웃기는 소리다.
누르비아는 지금 분노하고 있지 않았다.
【어, 어떻게···! 어떻게···!】
공포.
누르비아는 아이러니하게도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결계 위를 내리누르는 끔찍한 힘.
이건··· 이건 인간의 힘이 아니다.
인간 따위로 정의내릴 수 있는 힘이 아니다.
천 년전.
그 어떤 악마들조차 범접할 수 없었던 악마들의 공포이자 악몽.
누르비아의 사고가 정지한다.
전신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덜덜, 떨려온다.
“아까와는 다를 거야.”
그리고 들려온 시안의 목소리.
“현질하고 온 참이거든.”
파장창─!
누르비아의 결계가 산산히 부서져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