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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질하는 영주님!-256화 (256/322)

256화 - 진화

휑한 산 정상의 풍경.

“보면 볼수록 신기하단 말이지.”

시안은 주변의 풍경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이렇게 쫓아낼 수 있는 거지.”

뭐, 공간이동 마법의 일종인 것 같았다.

그런데 공간 이동 마법이 이렇게 쉽게 되는 것이었던가?

시안이 알기로 절대 그렇지 않았다.

이동시킬 공간 좌표를 계산해야하고, 각각의 변수 흐름 또한 실시간으로 수정, 배열해야했다.

단연코 이렇게 따악─!

맑은 소리 하나로 이루어지는 것이 결단코 아니었다.

“심지어 본인이 아니라 타인을 이동시킨단 말이지.”

드래곤이 괜히 마법의 주종이라 불리던 것이 아니었던 걸까.

마법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시안임에도 경이롭다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런 드래곤을 뛰어넘은 엘로디는 얼마나 대단했던거야?”

어째, 캐면 캘수록 아르나이즈들을 더더욱 이해할 수가 없었다.

카일이야 당연히 말할 것도 없었고.

뭐, 어쨌든.

비록 늙고 쇠약해져있었으나 여전히 카르제는 강대한 존재였다.

그렇기에 시안은 정말 아쉬웠다.

현재 악마 7군주 중 한 명, 누르비아가 개입되어있었으니까.

“카르제가 도와주면 참 좋을텐데···.”

카르제의 힘은 정말 큰 도움이 될 터였다.

5억 골드도 5억 골드였지만 카르제의 도움만은 못했다.

하지만 카르제는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타성에 젖어 이 상황의 방관을 선택했다.

천 년의 고룡, 카르제.

그 기나긴 세월 속에서 카르제는 무엇을 보고 느꼈던 것일까.

‘삶을 선호하는가 인간이여. 그 찰나의 깜박임을.’

카르제는 아르나이즈들과 함께 했다.

아르나이드들의 노력과, 의지와, 신념을 지켜봤다.

‘운명을 바꾸고자 수많은 죽음이 있어왔다. 그러나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누군가는 숭고한 희생이라 말했지만, 결국은 바꾸지 못했다.’

그리고 아르나이즈들의 죽음 또한 지켜봤다.

그들의 죽음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았다.

‘가치있는 죽음은··· 존재하지 않았다.’

카르제는 그들의 죽음에서 대체 무엇을 본 것일까.

그 죽음 속의 무엇이 카르제를 이렇게 만든 것일까.

생각이 이어지며 조금 깊어졌다.

“가치있는 죽음이라···.”

이 세상 모든 생명체들이 반드시 맞이하는 운명, 죽음.

우리는 어떻게 보면 죽음을 향해 달려나가는 존재라 할 수 있었다.

카르제의 말처럼 이 세상에서 살아나가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삶에 어떤 가치가 있을까.

어차피 죽음이 결정된 운명에서 삶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또한 가치있는 죽음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

죽음에 어떤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 것일까.

존재한다면 그것은 대저 어떤 죽음인 것일까.

점점 생각이 깊어져 간다.

“······ 에이, 모르겠다.”

하지만 시안은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털어내었다.

생각을 이어가자니 괜시리 시안 또한 타성에 젖어가는 것 같았으니까.

누군가 그랬었다.

삶에 대해 아직 다 모르거늘, 어찌 죽음에 대해 논할 수 있을까.

지금은 저런 머리 아픈 상념은 떨쳐버리고 앞으로 나아가야할 때였다.

시안은 다시 한 번 고개를 거세게 흔들었다.

그렇게 마지막 남은 상념까지 털어내며 시안은 스마트 폰을 꺼내들었다.

[현재 보유 중인 골드] - 281,135,200 G

카르제에게서 얻어낸 2억 1천만 골드를 더한 골드.

물론 환전하지 않은 2억 9천만 골드의 보물을 제한 금액이었다.

“음? 조금 적은 것 같은데?”

그럼에도 예상치 금액보다 적은 금액이었다.

보아하니··· 그 사이에 110만 골드가 유지 관리비로 빠져나간 것 같았다.

지금 루벤에는 수많은 생산 시설들이 밤낮으로 불을 지피고 있을 터.

그런 제반 시설들을 극한으로 가동하고 있어서일까.

“유지 관리비가 미쳐돌아가네···.”

시안은 저도 모르게 푹, 한숨을 내쉬었다.

가치있는 죽음이고 나발이고 지금 당장 살아갈 돈부터가 걱정이었다.

뭐, 지금 인벤토리에 있는 돈은 빵빵했다만.

[극마지체(極魔肢體)] - 100,000,000 G.

[소울 오브 드래곤(Soul of Dragon)] - 100,000,000 G.

이제 곧 사라질 돈이었다.

카일의 유산과 노에미의 유산.

그 유산을 상속 받기 위해 필요한 골드는 도합 2억 골드.

그 효과를 생각하면 거저 주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럼에도 덜덜, 떨리는 손은 차마 어찌할 수가 없었다.

시안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구매 버튼을 눌렀다.

꾹, 꾸국.

《구매완료오오오오오오오!!!》

손떨림에 번지는 두 번의 터치.

그와 함께 모바일 영주의 알림창이 떠올랐다.

오랜 만에 들어보는 발작과 같은 알림창이었다.

그리고 2억 골드를 쏟아부었음에도 기절하지 않은 모바일 영주였다.

“아르나이즈 유산은 조금 다르게 적용되는 건가?”

혹시 상속세라서 투자가 아닌 세금을 걷는 개념인건가?

뭐, 아무튼.

화아아아아아악!

일순간 환한 빛무리가 시야를 가렸다.

그 빛의 출처는 다름 아닌 시야 뒤 쪽.

“성물?”

등에 단단히 맨 성물에서 찬란한 빛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따스하면서도 강력한 힘이 느껴지는 빛.

지난 날에 ‘뮤리엘의 기적 - 신화’를 받았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성물에서 터져나온 빛이 시안의 전신을 휘감았다.

시안은 그 빛을 거부하지 않았고, 빛은 점점 시안의 몸 속으로 흡수되며 사라졌다.

그렇게 조금의 시간이 지나.

띠링!

《마(魔)에 깃든 근원의 힘을 받아 신체가 진화합니다!》

《드래곤의 힘을 흡수하여 신체가 진화합니다!》

이윽고 떠오른 스마트 폰의 알림창.

시안은 시선을 내려 몸 상태를 확인했다.

“겉모습은 딱히··· 변한 게 없는데?”

용인족(龍人族)처럼 변할까 조금 우려되었지만 모습은 달라진 것은 없었다.

방금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시안.

즉, 인간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외견 상의 변화일 뿐이었다.

“오···.”

시안은 전신으로 들끓는 어마어마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몸을 느낄 수 있었다.

“음···.”

이쯤되자 솔직히 궁금해졌다.

드래곤의 수준으로 진화한 신체.

그로써 비로소 조화를 이루게 된 심기체(心氣體).

지금이라면 고질적인 문제였던 마혼수라검의 반동을 제어할 수 있을까?

“한 번 해볼까.”

시안은 오른손을 옆으로 살짝 뻗었다.

파지직─! 검은색의 전류가 튀어오르며 멸살(滅殺)의 검이 손에 쥐어졌다.

그리고는 메긴기요르드의 허리띠를 극한으로 조였다.

그로써 증폭된 힘은 무려 10배.

시안이 견뎌야하는 반동 또한 무려 10배였다.

그렇기에 시안은 메긴기요르드를 극한으로 사용하지 않았었다.

10배를 사용했다가 어떻게 될지 뻔히 알았으니까.

해서 2배 내지는 3배.

그 사이를 왔다갔다하며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울 오브 드래곤으로 신체가 강화된 지금.

꽈드드드득!

극한으로 조여진 메긴기요르드에 전신의 근육이 폭발하듯 꿈틀거렸다.

“버틸만 한데?”

그리고 생각보다 버틸만 했다.

물론 별 다른 힘을 사용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래도 이 힘에 근육이 버티질 못해야했다.

확실히 예전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시안은 가벼운 마음으로 발검의 자세를 취했다.

“그러고보니··· 멸살로 10배의 힘을 사용하는 건 처음인데.”

잠깐의 고민.

“조금 힘을 빼볼까.”

시안은 가볍게 마기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역시나 가볍게 전방으로 멸살을 휘둘렀─.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 사라졌다.

휘둘러진 멸살의 검.

그 앞으로 모든 것이 사라졌다.

“어···라?”

시안은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물론 어느 정도 진심이 담긴 일격이긴 했다.

마기도 끌어올렸고 무엇보다 메긴기요르드를 극한으로 조였다.

비록 가벼운 마음이긴 했으나 진화된 신체가 반동을 버틸 수 있을지 실험하고자 진심을 담았다.

그런데 이럴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공간이 찢어졌다? 라고 표현하기에도 민망했다.

공간이 사라졌다, 정도로 표현해야 그나마 수긍을 할 수 있었다.

봉우리가 통째로 날아간 산 정상의 풍경.

그리고 시안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반동에 따른 부작용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시안은 그 사실을 인지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단순한 산 정상이 아니었으니까.

멸살에 의해 사라져버린 공간 그 사이.

그리고 그 안 쪽으로 보이는 거대한 생명체.

[······?]

카르제의 두 눈동자로 정확히 물음표가 찍혔다.

천 년의 타성이 무색하게도 카르제의 표정에는 당혹, 의문 그리고 의혹의 심정이 드러났다.

그도 그럴 것이 갑자기 앞선 공간이 사라져버렸다.

그러니까 집 문이 박살이 나버렸다.

카르제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이윽고 카르제의 두 눈이 정면을 향했다.

그리고 카르제는 어떤 놈팽이를 볼 수 있었다.

“하, 하하··· 안녕···하세요···?”

당황한 얼굴로 시덥지도 않은 말을 꺼내는 놈팽이를 말이다.

카르제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향했다.

그리고 시안의 손에 들려있는 흑뢰(黑雷)의 검을 볼 수 있었다.

잠깐의 상황 파악.

하지만 카르제가 무얼 반응하기도 전, 시안의 행동이 한 박자 빨랐다.

“마, 마지막으로 인사를 드리려고요! 그, 그럼 안녕히 계세요!”

사아아아아─!

일순간 시안의 몸이 어둠으로 흩어지며 사라졌다.

극마지체(極魔肢體)와 소울 오브 드래곤(Soul of Dragon).

역시 상속세가 비싸긴 해도 카일과 노에미의 유산인 것일까.

극한으로 펼쳐진 마혼무영보의 속도.

그로써 도망치는 시안의 모습은 그야말로 빛과도 같았다.

#

시안이 공간을 소멸시키고 토낀··· 아니, 사라진 이후.

[······]

카르제는 정말이지 승천할 어이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갑자기 등장한 인간 수컷 한 마리.

5억 골드에 달하는 보물을 강탈해간 것도 모자라 이제는 둥지까지 박살을 내버렸다.

아무리 타성에 젖은 카르제였지만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아마 시안이 그대로 토끼지만 않았다면.

그리고 그 움직임을 카르제가 놓치지만 않았더라면.

카르제는 분명 몸을 일으켰을 터였다.

하지만 시안은 순식간에 카르제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렇기에 카르제는 분노와 더불어 또 하나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놀람.

사실 카르제는 시안을 보고 느낀 주된 감정은 놀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전, 시안에게 느껴지던 기운이 심상치 않았으니까.

전혀 다른 존재였다.

아까 전까지 카르제에게 삥을 뜯던 인간 수컷.

그리고 방금 전에 둥지를 박살낸 인간 수컷.

둘은 전혀 다른 존재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았다.

설마하니 힘을 숨기고 있었나?

그렇다고 하기엔 카르제가 알아차리지 못했을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 짧은 시간안에 성장을 했다···?

불가능했다. 거진 찰나와도 같은 시간이 흘렀을 뿐.

그 시간 안에 성장이란 것은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그것도 어느 정도가 있는 법이었다.

이렇게까지의 성장은 절대로 있을 수 없었다.

심지어 카르제는 착각을 했었다.

방금 전, 둥지의 문이 박살나고 보인 시안.

카르제는 처음 시안이 아니라 다른 한 남자의 모습을 본 것만 같았다.

세상을 오시하던 절대적인 존재.

그것은 아주 찰나였지만 카르제는 분명 그 모습을 겹쳐볼 수 있었다.

[······]

침묵하는 카르제.

지금 쫓아간다면야 쫓아갈 수는 있었다.

하지만 카르제는 굳이 그러지 않았다.

물론 다시 한 번 찾아온다면 그땐 타성이고, 맹약이고, 나발이고, 염병이고 진짜 배를 찢어버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굳이 쫓아갈 필요까지는 느끼지 못했다.

어차피 아무런 의미가 없었으니까.

카르제의 커다란 두 눈이 다시금 스르륵, 감겼다.

그리고 감긴 시야 속.

‘카르제, 너의 도움이 필요하다.’

아주 오래 전의 기억이 스쳐지나간다.

‘인과의 운명. 그것은 언제나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었다. 허나, 과정을 이해하면 결과도 만들어낼 수 있는 법.’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세계를 규정하는 인과의 법칙은 절대적.

그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 따위가 감히 어찌할 수 있는 법칙이 아니다.

따라서 과정의 이해?

그것은 신(神)이 되겠다는 소리나 다름 없었다.

‘나는 망가진 운명의 고리를 끊겠다.’

웃기는 소리다.

그렇게 말하고는 당신도 끝내 해내지 못했지 않은가.

필멸(必滅)의 운명 앞에 스러져 사라졌지 않은가.

반면에 대륙을 위협하는 악마들은 불멸(不滅)의 존재였다.

끝이 존재하는 필멸자(必滅者).

끝이 존재하지 않는 불멸자(不滅者).

유한(有限)과 무한(無限).

그 싸움 끝에 필멸자가 닿을 수 있는 결과는 오로지 죽음뿐이다.

결과가 정해진 싸움이었다.

이미 결과가 정해져있거늘 그 과정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운명의 종착역에 다다르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그리고.

‘마, 마지막으로 인사를 드리려고요! 그, 그럼 안녕히 계세요!’

천 년의 세월을 넘어 나타난 후예.

하물며 그때의 남자와 비교하면 한없이 처참하다.

너라고 과연 다른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역시, 이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그 생각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

다만 그 생각의 답을 확인해보는 것 정도는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천 년의 세월이 지나 다가온 삶의 끝자락.

카르제는 마지막으로 한 번. 상황을 지켜보고자 했다.

#

휙휙, 지나가는 주변의 풍경.

루카스는 몸을 내던지듯이 앞으로 쏘아져가고 있었다.

시안으로부터 멀리 퇴각하라는 명을 받은 루카스.

그런 루카스를 따라 수많은 루벤의 병력들이 이동하고 있었다.

상당히 빠른 루카스의 움직임이었음에도 병사들은 뒤쳐지지 않았다.

도무지 병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움직임의 행렬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 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이 정도면 상당한 거리를 벌렸을 터.

“정지.”

루카스는 내딛던 발걸음을 멈춰섰다.

그에 따라 따라오던 병사들이 일시에 자리에 멈춰섰다.

“대열을 정비하고, 낙오자가 있는지 확인하고 보고하도록.”

루카스의 지시에 병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저··· 이, 이제 내려주셔도··· 괜찮아요.”

그리고 들려온 청아한 목소리.

다름 아닌 루카스의 등에 업혀있는 로라의 목소리였다.

“아, 죄송합니다.”

루카스는 그때서야 등에 업혀있는 로라를 내려주었다.

퇴각 당시 로라를 들쳐업었던 루카스.

성녀인 아리아는 성녀임과 동시에 대륙에서 손꼽히는 강자였다.

병사들의 움직임을 충분히 따라올 수 있었다.

그러나 로라는 평범한 여사제였다.

신성력을 다룬다 뿐이지, 일반적인 여인과 다름 없었다.

로라는 루벤의 병사들과 기사들의 움직임을 따라오기란 힘들었다.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루카스는 로라의 상태를 살폈다.

신경을 쓴다고는 했으나 상황이 다급했기에 움직임을 늦츨 수가 없었으니까.

“네. 덕분에···.”

하지만 다행히 큰 이상은 없어보였다.

“다행입니다.”

루카스는 그때서야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런데 왜일까.

로라의 얼굴은 왜인지 상당히 붉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리아.

“로라? 어디 아파?”

아리아가 한껏 걱정스러운 얼굴로 로라에게 다가왔다.

“네, 네? 아, 아뇨?”

“그런데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

“제, 제 얼굴이 뭐가 어, 어때서요?”

로라가 당황하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설마 어디 아프신 겁니까?”

루카스 또한 걱정스러운 얼굴로 로라에게 물었다.

그러자 로라의 얼굴이 더욱더 빨개지며 딸기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자, 잠시 놀라서 그런 거예요! 저는 괜찮아요! 아무런! 아무런 문제도 없어요!”

그리고는 홱, 몸을 돌리더니 후다닥, 도망치듯 사라졌다.

역시나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리아.

“이상하단 말이지···.”

아리아는 평소와 다른 로라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

아리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침울해졌다.

다름 아닌 홀로 남은 시안.

시안에 대한 걱정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금방 걱정을 떨쳐버렸다.

믿었으니까. 루카스를 비롯한 루벤의 사람들처럼 아리아도 믿었으니까.

시안은 언제나 그러해왔었다.

어벙하고, 가끔은 얄밉기도 그렇게 얄미울 때가 없었지만 그래도 믿음을 주는 남자였으니까.

시안은 반드시 살아돌아올 것이었다.

“흑사자 기사단 전원 이상 없습니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자니 병사들 사이에서 상황 보고가 들려왔다.

“1소대. 전원 이상 없습니다.”

“2소대. 전원 이상 없습니다.”

.

.

줄줄이 이어지는 보고는 다행히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루카스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안의 희생 덕분에 전원 모두가 무사할 수 있었다.

문제는 역시나 시안의 희생 덕분이라는 것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시안을 도우러 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되었다.

지금은 감정보다 이성적으로 행동해야할 때.

“저희들 때문에 이렇게···.”

그 순간 옆에서 들려온 파벨의 말.

바라본 그곳엔 파벨이 죄송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지금 이 상황은 루벤이 수인족들을 도와주려다 발생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정작 수인족들은 나몰라라 하고 있으니.

파벨로서는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괘념치 마십시오. 영주님께서 판단하신 일입니다.”

루카스는 그런 파벨에게 말했지만 파벨은 고개를 차마 들지 못했다.

루카스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돌린 시선으로 헐떡거리는 다이애나의 모습이 보였다.

파벨을 업고 뛰어온 다이애나.

동시에 용인족의 힘을 사용한 부작용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여러모로 복잡한 상황이었지만 이러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지금은 계속 이동을 해야했다.

동시에 나중에 시안이 찾아올 수 있는 장소도 찾아봐야했다.

해서 루카스가 퇴각 경로로 삼은 이곳.

“수인족들의 왕국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수인족들의 왕국.

정확히는 가장 많은 수인족들이 모여있는 왕국의 수도.

“물론입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루카스의 말에 파벨이 그때서야 고개를 들어보였다.

그리고는 곧장 걸음을 옮겨 루카스를 안내했다.

“모두 이동한다.”

루카스는 병사들을 통솔하며 파벨을 따라갔다.

그렇게 한 걸음, 두 걸음.

왕국의 수도로 입성하려던 그때.

멈칫.

루카스의 발걸음이 순간 멈춰섰다.

그에 따라 루벤의 병사들과 기사들의 걸음 또한 멈춰섰다.

아리아와 로라 그리고 다이애나까지 걸음을 멈춰섰다.

그리고 바라본 루카스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뭔가 싶은 물음도 잠시.

앞선 시야로 기묘한 인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일련의 사람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하얀 늑대의 문양이 새겨진 갑옷.

엘란두르의 하얀 늑대 기사단.

“어머. 이제 오셨나요?”

그 사이로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하얀 백합의 머리를 한 고혹적인 여인.

“그런데 어째··· 시안은 안 보이네요?”

레이첼이 싱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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