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질하는 영주님!-250화 (250/322)

250화 - 마주치는 운명(1)

쫓겨났다.

눈 깜빡 하는 사이에 따악─!

청명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시야가 뒤틀렸다.

이윽고 약한 현기증이 일며 보인 것은 지금의 풍경.

휑한 산의 정상이었다.

당연하게도 카르제의 둥지로 향하는 공간은 닫혀져있었다.

“치사하게.”

시안은 투덜거리듯 말을 내뱉었다.

“그거 좀 나눠주면 어디 덧나나.”

아니, 막말로 곧 죽을 날만 기다리는 드래곤이지 않은가.

그러니 설령 나눠줘서 어디 덧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죽을 텐데 어디 하나 덧나면 뭐 어떠한가.

말로는 삶은 깜빡임이고, 죽음은 영원하니 뭐니.

아무리 발악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느니 뭐니.

온갖 타성에 젖어있으면서 정작 보물 좀 나눠 달라고 하니까 쫓아내는 것 하고는···.

“누가 욕심 그득한 존재 아니랄까봐.”

덩치는 웬만한 산보다도 더 컸으면서.

속은 진짜 밴댕이 소갈딱지만도 못했다.

“아니, 방관만 할 거면 좀 주면 안되나?”

진짜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치사해도 너무 치사했다.

발악하는 인간들이 불쌍해서라도 좀 나눠줄 수 있지 않은가.

수호자로서 아무것도 안 할 거라면 도움 정도는 줄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 저 곧 죽는다고 나몰라라 하고 있으니.

“못 되먹었다니까.”

정말이지 못 되먹은 드래곤이었다.

시안은 그렇게 말을 내뱉고는 가만히 닫힌 공간을 바라봤다.

비록 공간은 닫혀있었지만 어떤 식으로 연결되어있을 터였다.

그러니까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카르제의 눈과 귀를 통해 전달되고 있을 터였다.

그러니까 알현을 청할 때 오고 가고 하겠지.

한 마디로 카르제는 시안이 방금 전에 내뱉은 말들을 모두 들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에휴.”

시안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발도 상대가 반응을 해야 의미가 있지.

이런 식으로 미적지근하면 괜히 힘만 빠질 뿐이었다.

“어째, 나까지도 타성에 젖을 정도네.”

시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건 그렇고··· 다들 어딜 간거야?”

시안은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둘러보았다.

그리고 역시나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리아는 물론 다이애나와 파벨.

심지어 루카스와 루벤의 병사들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먼저 내려갔나?”

아마 그런 것 같았다.

지금은 비록 닫혀있지만 방금 전까지 공간이 열려있었다.

그 사이로 드래곤의 존재감이 계속해서 느껴졌을 터.

괜히 이곳에서 드래곤의 존재감을 버티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겠지?”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금방 고개를 털어버렸다.

아무래도 전투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애초에 이곳, 수호자의 둥지에서 무슨 일이 있을까.

시안은 금방 생각을 털어내었다.

“어쨌거나··· 성물의 위치는 알아내었는데.”

문제는 그것이 전부라는 것이었다.

“카일이 마주한 진실이 무엇인지 물어보지도 못했네.”

솔직히 억지로 눌러앉아 물어볼 수야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물어봐도 답을 해줄 것 같지 않아 금방 포기했다.

“숨만 쉬고 있다 뿐이지. 그냥 죽은 것이나 다름 없던데.”

타성에 젖은 천 년의 고룡.

카르제는 살아있되, 죽어있는 존재나 다름 없었다.

“그래도 아쉽긴 하단 말이지.”

솔직히 아쉬운 건 사실이었다.

카르제는 카일을 직접 만난 유일무이한 존재였으니까.

물론 카일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무언 가를 알고 있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래서 뭐 좀 물어보려고 했거늘···.

“아, 맞다!”

그 순간, 시안의 머릿속으로 생각 하나가 스쳐지나갔다.

“퀘스트가 클리어 되지 않았었나?”

다름 아닌 스토리 메인 퀘스트.

최후의 드래곤을 찾으라는 내용이었고, 카르제의 만남과 함께 클리어가 되었었다.

시안은 곧장 스마트 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역시나.

『[스토리 메인 퀘스트] - ‘풀리지 않은 의문’ (클리어!)』

화면 위로 떠올라있는 클리어 알림창을 볼 수 있었다.

시안은 곧바로 알림창의 화면을 터치했다.

꾹.

『[스토리 메인 퀘스트] - ‘풀리지 않은 의문’ (클리어!)

▶대륙에 마지막으로 남은 최후의 드래곤!

우여곡절 끝에 당신은 최후의 드래곤과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천 년의 고룡!

신화를 직접 경험한 살아있는 화석!

그야말로 움직이는 도서관!

당신은 드디어 천 년의 진실에 다가갈 수 있다는 설렘을 가득 안고 입성합니다!

두근두근! 세근네근!

이두박근!!!

그렇게 마주한 최후의 드래곤!

그런데··· 어라라?

드래곤의 상태가··· 어딘가 이상합니다.

뭔가 싶은 것도 잠시!

드래곤은 짙은 타성에 젖어있었습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삶의 덧없음을 느끼고 있었죠.

어차피 모두 죽을거라나 뭐라나.

그런 주제에 보물은 또 안 나눠줬습니다!

이 망할 놈의 드래곤!

이래서 도마뱀, 도마뱀 하나 봅니닷!』

.

.

“응?”

퀘스트의 내용을 읽던 시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저기서 끝이었다.

“뭔데?”

싶은 생각도 잠시.

띠링!

그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이 스마트 폰의 알림음이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화면 위로 새로운 알림창이 떠올랐다.

『[스토리 메인 연계 퀘스트] - ‘끝나지 않은 의문’』

“그럼 그렇지.”

시안은 작게 한숨을 쉬며 떠오른 알림창을 터치했다.

꾹.

『▶망할 드래곤! 속 좁은 도마뱀!

누가 욕심 그득한 도마뱀 아니랄까봐.

밴댕이 소갈딱지 도마뱀인 거 있죠!

치사빤스 흥칫 뿡!

하지만 마냥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천 년전에 악마들은 소멸되지 않았고.

수 백년 전에도 악마들이 침공해왔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죠.

그리고 아르나이즈들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를 예지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뮤리엘은 그에 따른 대비를 했죠.

아르나이즈들의 힘을 빌어 성물을 만들었고.

그 성물의 힘으로 악마들의 힘을 약화시켰습니다.

그리고 뮤리엘은 그 이후에 자결을 했죠.

혹시 뮤리엘이 자결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을까요?

언젠가 찾아올 악마들.

성물의 위치를 숨겨야만 하는 의무.

뮤리엘은 스스로의 입을 막고자 자결을 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리하여 어쩌면 카일이 마주한 진실.

그 진실이 바로 악마들이 소멸하지 않고 부활한다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 쫓아오던 진실이로다!

비로소 그 궁금증이 해결되나 ··· 싶던 찰나!

어라라라···?

뭔가 조금 이상합니다.

말처럼 악마들이 소멸하지 않았더라면.

언제고 다시금 대륙에 찾아올 것임을 알았더라면.

카일은 어째서 이 사실을 비밀로 했던 것일까요.

왜 다른 아르나이즈 동료들에게 말하지 않았던 걸까요.

아르나이즈 동료들에게 말하는 편이 않았을까요?

악마가 부활한다, 이를 같이 대비해야만 한다.

그 편이 훨씬 좋았을텐데 말이죠.

그런데 카일은 그들에게 비밀로 했던 것일까요.

그리고 왜 홀연히 떠나야만 했던 걸까요.

어쩌면··· 카일이 마주한 진실은 다른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뮤리엘은 정말로 성물의 위치를 숨기고자 자결을 했던 것일까요.

복잡해지는 당신의 머릿속!

그러나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해야하는 일은 따로 있으니까 말이죠!

카일이 마주한 진실이 무엇이든 악마들은 다시 침공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엔 성물을 노리고 있죠!

그 성물을 빼앗긴다면 어찌될 지는 뻔한 일!

그러니 지금 바로 움직여야겠죠?

혹시 몰라요?

성물을 찾는 그 과정에서 카일이 마주한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지도요!

자, 그럼 무엇 해야할지 알고 계시겠죠?

성물을 찾아서~!

렛츠 고고~! 후비고고!!』

<보상: 카일의 유산 + 노에미의 유산>

.

.

.

새로이 정리된 퀘스트의 내용.

“음···.”

시안은 그 내용을 다시 한 번 살폈다.

“진짜 카일은 왜 홀로 떠난 것이지?”

뭐, 이유는 간단했다.

다른 아르나이즈 동료들이 알아서는 안되는 무언가가 있었겠지.

그리고 퀘스트의 내용대로 악마가 부활한다는 것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그 이유라면 카일이 비밀로 할 이유가 없었다.

심지어 홀로 떠날 이유도 없었다.

“그럼 대체 뭐 때문에?”

깊어지는 의문.

그러나 금방 고개를 털어버렸다.

지금 당장 고민한다고 알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당장 해야할 일이 있었으니까.

뮤리엘의 성물.

엘란두르보다 먼저 그 성물을 찾아야만 했다.

“그보다··· 이번엔 보상 정보가 나와있네.”

기존 퀘스트에는 보상이 ‘???’로 처리되어있었다.

하지만 갱신된 퀘스트에는 카일과 노에미의 유산이 보상으로 적혀있었다.

아르나이즈들의 유산.

그간 받아온 것들을 생각하면 이 또한 엄청난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카르제는 없네.”

다만, 카르제와 관련한 것은 보상 정보로 나와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카르제의 보물> 이런 것이 없었다.

딱히 보물이 아니어도 상관 없었다.

<카르제의 도움> 이런 것만 있어도 상당히 큰 힘이 되었겠지만···.

아무래도 카르제는 이대로 방관하는 존재인 것 같았다.

시안은 슬쩍, 시선을 돌렸지만 여전히 공간은 닫혀있었다.

이제 존재감 마저 느껴지지 않는 주위.

“일단 성물부터 찾자.”

시안은 아쉬움을 털어내며 산 아래로 내려갔다.

#

시안이 투덜거리는 사이.

카르제는 둥지에 가만히 누워있었다.

그런 카르제의 귓가로 모기와 같은 소리가 앵앵거려왔다.

쪼잔하다느니, 치사하다느니. 못되먹었다느니.

그런 시덥지도 않은 말들이 앵앵거리며 들려왔다.

솔직히 말하면··· 욱, 하는 감정이 아주 약간은 일었다.

많이는 아니고 아주 약간.

그리고 타성을 잠시나마 이겨낸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카르제는 끝내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여전히 무심한 눈빛. 무심한 표정.

그러나 머릿속으로는 아주 오래 전의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그건 무려 천 년전의 기억이었다.

카르제가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의 기억.

당시 어렸던 카르제는 악마와의 전투에 참전하지 못했다.

또 어렸기에 악마들의 타겟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대륙에 평화가 찾아오고 난 이후.

한 남자가 카르제를 찾아왔다.

세상을 오시하는 절대적인 존재.

죽음조차 베어낼 것만 같았던 초월적인 존재.

천 년도 더 된 어린 카르제의 기억이었지만, 지금도 피부 끝을 아려올 정도로 생생했다.

남자는 카르제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난 망가진 운명의 고리를 끊어낼 것이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운명을 끊어낸 다는 것은 말 그대로 불가능(不可能)이었다.

그것은 절대적인 인과의 법칙.

이 세상을 규정하는 불변의 법칙이었으니까.

그 법칙 속에서 태어나고 자란 존재는 그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것은 자신의 뿌리를 부정하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조상을 죽이는 것과 똑같은 패러독스(Paradox)였다.

일어날 수도, 일어나서도 안되는 일.

다른 이라면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을 것이다.

하지만 카르제는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이 남자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네 도움이 필요하다.’

남자는 카르제에게 도움을 청했다.

카르제가 보아온 그 어떤 존재보다 경이로운 존재.

그라면 불변의 운명마저 굴복시킬 수 있을 거라 카르제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결국 다른 이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 또한 필멸(必滅)의 운명을 이겨내지 못하고, 끝내 굴복했다.

그리고 천 년의 세월이 흘러 지금.

그의 후예라며 한 인간이 찾아왔다.

놀라운 일이었다.

이미 운명에 스러졌다 생각했거늘.

그러나 그 뿐이었다.

그 남자에 비하면 너무도 초라하다.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다.

세상을 오시하던 초월적인 존재조차 운명을 거스르지 못했다.

그런데 한낱 처량한 후예 따위가 무얼할 수 있을까.

-일단 성물부터 찾자.

투덜거리며 산을 내려가는 한 처량한 인간의 모습.

[결국 아무런 의미도 없는 발악인 것을···.]

카르제는 무심하게, 두 눈을 감을 뿐이었다.

#

시안은 빠른 속도로 일행들이 있을 산 아래로 내려갔다.

마혼무영보를 밟을 때마다 휙휙, 지나가는 산의 풍경.

“레비스··· 레비스 숲이라.”

카르제는 성물이 레비스 숲에 있다고 했다.

방관을 했지만 거짓말을 할 리는 없을 터.

“그런데 여긴 어둠의 숲 아닌가?”

생각해보면 이곳 전체가 어둠의 숲이었다.

정확히는 이곳, 수인족들의 왕국이 어둠의 숲에 있는 공간이었다.

그런데 레비스 숲은 또 뭐란 말인가.

“그냥 지명을 따로 부르는 건가?”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고보니··· 이 공간은 환계의 마법으로 만들어진 공간인건가?”

그러니까 어둠의 숲 공간을 빌려 창조한 공간?

그런 것치고는 너무도 현실 같은데.

그렇게 이런저런 의문을 삼키자니.

시안은 금방 산 아래로 내려올 수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일행들의 모습.

그런데 왜일까.

“아무리 그래도 인간들이지 않습니까.”

“인간들을 믿는다는 것이···.”

왜인지 소란이 일고 있는 것 같았다.

바라본 그곳엔 두 인파가 양쪽으로 갈라져 있었다.

한쪽은 루벤의 병사들과 기사들.

그리고 다른 한쪽은···. 가지각색의 동물들이 모여있는 것만 같은 모습.

“수인족?”

수인족들인 것 같았다.

그렇게 두 인파가 양쪽으로 갈라져 대립하는 듯한 형세를 취하고 있었다.

시안은 뭔가 싶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가까이서 바라본 형세는 시안의 예상과는 달랐다.

처음엔 루벤과 수인족들의 대립 구도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정작 보인 것은 루벤이 아니었다.

다이애나와 파벨.

그리고 다른 수인족들이 대립하고 있었다.

“이쪽 인간들에게 성물의 위치를 말씀해주시다니요.”

“이런 말씀은 없으셨잖습니까.”

그 사이에 루벤이 껴어든 것뿐.

시안은 그 사이로 터벅, 걸음을 옮겼다.

일순간 이목이 시안에게로 집중되었다.

“영주님. 오셨습니까.”

“왔어?”

시안의 등장에 루카스와 아리아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뭐래? 드래곤이?”

“딱히 별 말은 없긴 했는데··· 그냥 밴댕이 소갈딱지였어.”

“밴댕이 소갈딱지···?”

시안의 말에 아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게 있어. 그건 그렇고. 여긴 대체 무슨 일이야?”

“그것이···.”

시안의 물음에 아리아 대신 루카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충 듣자하니···.

파벨이 시안에게 성물의 위치와 수호자가 있는 곳을 알려준 것이 문제가 된 모양이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시안은 수인족이 아닌 인간.

그리고 수인족들을 학살하는 엘란두르 또한 같은 인간이었다.

“그러나 이분들은 우리 수인족들을 도와주었네. 같은 인간이라도 다른 인간들이란 말이네.”

“이들이 저희들을 도와준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상당히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허나···.”

수인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을 향했다.

그곳은 시안이 아닌 다른 곳.

“루나가 데려온 인간이지 않습니까.”

다름 아닌 다이애나가 있는 곳이었다.

용인족이자 한 때는 수인족의 일원이었던 다이애나.

루나는 다이애나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다이애나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파벨 또한 마찬가지로 아무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보아하니··· 어떤 사연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사연이 다이애나가 수인족을 떠난 이유인 것 같기도 했다.

상황이 이쯤 되니 무슨 사연인가 조금 궁금하긴 했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한가로이 그 사연을 들을 시간이 없었다.

시안은 터벅, 한 발 앞으로 나서보였다.

“그러니까, 저희를 못 믿으시겠다는 겁니까?”

시안의 말에 수인족들이 훔칫, 몸을 떨어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수인족 중 한 명이 한 발 나서보였다.

박쥐의 특색을 지닌 편인족(蝙人族).

“그런 뜻은 아니네. 다만···.”

편인족은 난감한 표정을 말을 내뱉었다.

“도움을 주는 건··· 별개의 문제라는 말이네.”

의미를 좀처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시안은 그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현재 수인족들의 상황에 껴있는 루벤과 엘란두르.

엘란두르는 현재 성물을 요구하고 있었다.

성물만 넘겨주면 그들은 순순히 물러가겠다 하고 있었다.

반면에 시안은 그 성물을 넘겨주면 안된다 말하고 있었다.

같은 인간, 서로 다른 요구.

수인족들은 어떤 식으로든 선택을 해야만 했다.

물론 시안 쪽으로 도움을 주는 것이 당연하면서도 옳은 선택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엘란두르는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만일 시안 쪽에 도움을 주었다고 하자.

그러다가 시안이 엘란두르에게 당해버리면?

그 이후에 엘란두르가 수인족들을 가만둘까?

성물은 성물대로 빼앗기고 멸족은 멸족대로 당해야하는 입장이었다.

그렇다고 엘란두르를 도와주는 건 말도 안되는 일.

무엇보다 수인족들에게는 똑같은 인간이었다.

루나가 데려온 인간이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루벤이나 엘란두르나 똑같은 인간이었다.

하여 수인족들이 내린 선택.

“······”

“······”

방관.

너희들끼리 알아서 해라.

시안은 그런 수인족들을 바라봤다.

어딘가 죽어있는 눈빛.

아까 전, 카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눈빛이었다.

기반된 감정은 달랐으나 시안은 그 둘 사이의 차이점을 느끼지 못했다.

시안은 천천히 등을 돌렸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터벅, 걸음을 옮겼다.

수인족들과 함께 싸운다면 엘란두르와 대적하는 것이 용이할 터였다.

그러나 설득할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엘란두르는 성물을 찾고 있을테니까.

무엇보다 카르제도 그렇고, 지금의 수인족들도 그렇고.

이미 죽어있는 자들을 설득할 방법은 없었다.

“가자.”

시안은 그렇게 자리를 떠나갔다.

#

시안은 루벤의 병사들과 함께 레비스 숲으로 향했다.

레비스 숲이 어디인지는 역시나 알지 못했지만, 다이애나는 아니었다.

한때는 수인족의 일원이었던 다이애나.

다이애나는 레비스 숲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저만치 앞서 가며 길을 안내하는 다이애나.

그렇게 다이애나를 따라 얼마 간을 걸었을까.

“죄송합니다.”

파벨이 시안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

바라본 파벨의 얼굴은 한껏 부끄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마 수인족들의 방관을 말하는 것 같았다.

“아닙니다.”

시안은 신경쓰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들의 생각과 행동이 옳다고 여기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들도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닥친 위기에 맞서 싸워왔을 것이었다.

당장 시안이 왔을 때만 해도 그러했다.

수많은 수인족들의 전사가 엘란두르와 싸우고 있었다.

성물을 보관하고 있던 마을에서도 수많은 수인족들의 시체가 있었다.

그 이전에는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어왔을까.

그들도 싸우고 저항했을 터였다.

하지만 상대가 강해도 너무 강했다.

멸족의 위기가 걸린 입장에서 그들의 방관은 이해하지 못할 사정은 아니었다.

시안은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봤다.

그런 시야로 묵묵히 걸어가며 다이애나가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수인족의 일원이었으나 지금은 그림자 달의 길드장이 된 다이애나.

그리고 아까 전, 다이애나를 대하는 수인족들의 태도.

그 때문일까.

뒤로 보이는 다이애나의 긴 은발의 머리가 처량하게만 느껴졌다.

“아시고 계시다시피··· 루나님은 용인족의 일원이십니다.”

그 사이로 파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래곤의 특색을 지닌 용인족(龍人族).

대족장의 혈통이자 아르나이즈 노에미의 후손.

“하지만 루나님은 용인(龍人)으로서의 특색이 없으십니다.”

이어진 파벨의 말에 시안은 잠시 멈칫했다.

생각해보니··· 그러했으니까.

수인족들은 각기 다른 동물들의 특색을 지니고 있었다.

정확히는 인간과 동물의 특색을 동시에 지닌, 말 그대로 '수인(獸人)'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수인족들은 단번에 그 종족을 알아보기가 쉬웠다.

척 보면 아! 할 정도로 해당 동물들의 특색이 뚜렷하게 드러났으니까.

당장 귀인족(龜人族)인 파벨은 거북이의 특색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다.

시안은 앞서 가는 다이애나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은발의 머리.

그 어디에도 드래곤의 특색은 보이지 않았다.

최후의 드래곤, 카르제를 직접 봤기에 확언할 수 있었다.

다이애나에겐 그 어떤 드래곤의 특색도 보이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다이애나가 시안에게 용인족임을 밝혔을 당시도 조금 이상했다.

다이애나는 드래곤의 피부를 시안에게 보여준 바가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 굉장히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였었다.

처음엔 그냥 그런가보다 했었건만···.

“루나님은 어째서인지 인간으로서의 특색이 더욱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다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수인족들의 사회에서 인간이 살아가기엔···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았지요.”

해서 수인족들의 사회에 녹아들지 못하고 겉돌았다고 한다.

용인족의 혈통임에도 불구하고 다이애나는 수인족의 일원이 될 수가 없었다.

“루나님은 언제나 혼자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다이애나는 혼자 지내왔다.

친구 한 명 없이 다이애나의 유년기 시절은 지나갔다.

그나마 마음을 터놓을 이는 한 명.

“카리스님은 그런 루나님을 언제나 안타까워 여기셨죠.”

“카리스님이라면···?”

“루나님의 유일한 혈육입니다. 저희 수인족들의 대족장이시기도 하죠.”

다이애나의 혈육이자 수인족들의 대족장, 카리스.

“그러고보니··· 대족장님이 실종 상태라고 하셨죠.”

그리고 카리스는 현재 실종 상태였다.

“그렇습니다···.”

시안의 물음에 파벨이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리스님만 계셨어도 이렇지는 않았을텐데···.”

시안은 카리스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대족장이라는 직책이 아무에게나 주어지지는 않을 터.

무엇보다 카르제를 본 지금.

드래곤의 특색을 지녔다는 것이 얼마나 강대한 존재임을 의미하는지 시안은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카리스가 실종되었다는 것.

그건 조금 의아한 일이라는 생각이─.

우뚝.

순간 시안은 발걸음을 그대로 멈춰섰다.

그런 시안을 따라 파벨을 비롯한 아리아, 루카스 그리고 루벤의 병사들까지.

모두가 발걸음을 멈춰섰다.

“영주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사람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시안에게 물어왔다.

하지만 시안은 대답 대신 파벨에게 물었다.

“여기가 레비스 숲입니까?”

“조금 더 가야되긴 합니다만···.”

파벨은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답을 해보였다.

시안은 시선을 앞으로 고정하며 기세를 끌어올렸다.

방금 전 느껴졌던 기묘한 기운.

기분 탓이라 생각될 만큼 아주 미묘한 기운이었다.

그러나 확인할 필요는 있었다.

시안은 감각을 날카롭게 벼리며 주변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의심은 곧 확신으로 바뀔 수 있었다.

감각으로 느껴지는 강대한 기운.

그리고 그것은 시안에게 상당히 익숙하면서도 생소한 기운이었다.

또 한 명의 것이 아니었다.

듀라크와 카이.

“모두 전투 준비해.”

멀지 않은 곳에, 듀라크와 카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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