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 뜻밖의 손님(1)
때는 다름 아닌 자작령을 함락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
보급을 기다리며 이곳에서 야영 준비를 하던 때.
“이건···.”
커너는 잔해들 속에서 미묘하게 남겨진 표식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모르는 이가 본다면 그냥 지나칠 법한 자연스러운 잔해들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커너에게는 아니었다.
그것은 아주 오래 전, 암흑가에 몸을 담고 있을 때의 일.
암흑가의 사냥개로서 특급 암살자로 활동하던 때 자주 보던 표식이었으니까.
커너는 슬쩍, 주위를 살폈다.
루벤의 병사들은 야영 준비로 주변의 잔해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휴식이 필요했던 찰나였고, 또 때 마침 보급도 떨어진 차.
오늘은 이곳에서 쉬어간다는 시안의 명령이 떨어졌다.
해서 커너도 병사들과 함께 야영 준비를 하던 찰나였건만···.
스윽.
커너는 은신술을 사용하여 살며시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꽤나 멀리 떨어진 숲 속에서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인기척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울창한 숲.
“뭡니까.”
“진짜··· 커너잖아?”
커너가 입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나무 위에서 한 여인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달빛을 닮은 은발의 여인.
“세상에··· 정말로 커너?”
다름 아닌 그림자 달의 길드장, 다이애나였다.
또한 지난 날, 커너가 몸을 담고 있던 길드의 길드장이기도 했다.
모습을 드러낸 다이애나는 크게 놀라고 있었다.
“네, 네가 어떻게 여기에···? 너 죽은 것이 아니었어?”
“죽을 뻔하긴 했습니다만, 죽진 않았습니다.”
커너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다이애나는 자세한 설명을 바라보는 눈치였지만 커너는 무시했다.
“그보다 길드장께서는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
다이애나는 여전히 놀란 눈으로 커너를 바라봤다.
죽은 사람이 돌아온 것만 같은 충격이 얼굴로 표현되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다이애나의 기억 속, 커너는 죽은 사람이었다.
시안을 암살하라는 의뢰 이후 커너는 그곳에서 돌아오지 못했었으니까.
커너는 그림자 달 소속 특급 암살자.
암살자의 의뢰 실패는 딱 한 가지 경우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 보이는 커너의 모습.
심지어 커너의 복장을 보라.
루벤의 병사로서 전쟁에 참전한 것 같았다.
아니, 단순한 병사는 아닌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커너를 대하는 병사들의 태도가 달랐으니까.
마치 커너를 상관으로 대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보아하니 커너가 꽤나 높은 직책에 있는 것 같았다.
다이애나는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어째서 죽은 커너가 살아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 보이는 커너의 모습.
그러니까 커너가 루벤에서 갖는 입지.
그런 커너가 도와준다면 일이 쉽게 풀릴 터.
다이애나는 재차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커너, 한 가지 부탁을 좀 해도 될까?”
그리고 부탁이라고는 말했지만 다이애나는 커너가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커너는 그림자 달 소속으로 활동한 특급 암살자.
즉, 자신의 부하라 할 수 있었다.
비록 지금은 루벤에 있는 처지였다만 자신의 청을 결코 거절하지는 않을 터였─.
“거절합니다.”
일순간 들려온 커너의 말.
커너는 단호한 눈빛으로 다이애나의 부탁을 거절했다.
“전 더 이상 그림자 달 소속이 아닙니다. 루벤의 암살 교관이죠. 무슨 부탁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거절하겠습니다.”
커너는 등을 돌려 터벅,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커너는 고민하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또한 그런 커너의 태도엔 어떤 충성심 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그것도 절대 꺾이지 않는 충성심이 말이다.
“······”
다이애나의 표정이 일순간 멍해졌다.
특급 암살자에게 충성심이라니?
다이애나는 그 이질감에 잠시 자리에 서 있었다.
예전 커너의 상관으로서 이런 생각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림자 달의 길드를 이끌고 있는 길드장으로서도 이런 생각을 해도 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암흑가에 충성심 같은 건 없었다.
범죄자들의 도시에 충성심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무슨···.
커너가··· 원래 저런 사람이었나?
다이애나의 정신은 멍해져만 갔다.
그러나 이대로 떠나보낼 수도 없는 일.
다이애나는 떠나는 커너의 등 뒤로 말했다.
“좋아. 네가 이제 그림자 달 소속이 아니라는 건 알겠어. 더 이상 내 부하가 아니라는 것도. 하지만 그림자 달 소속이었다는 건 사실이잖아?”
일순간 커너의 발걸음이 멈춰섰다.
그리고는 슬쩍, 고개를 돌려 말했다.
“설마 길드를 함부로 탈퇴할 수 없다,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아니. 범죄자들이 날뛰는 암흑가이지만···.”
“팔 하나면 됩니까?”
“······ 뭐?”
다이애나는 순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길드를 탈퇴하는 대가로 팔 하나를 자르면 되냐고 물었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그게 무슨···.”
다이애나는 커너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다이애나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커너는 정말로 자신의 팔을 자르려고 하고 있었다.
얘가 지금 무슨···.
다이애나는 황급히 커너의 팔을 붙잡았다.
“지금 뭐하는 짓이야?”
“길드를 함부로 탈퇴할 수 없다 하셨잖습니까.”
“아니라고 했잖아. 난 그런 걸로 대가를 바라진 않아. 아무리 범죄자들의 도시에 적을 둔 길드지만, 고작 길드 탈퇴의 요건으로 팔 한 짝을 내놓는게 말이 되니?”
다이애나는 어처구니 없는 표정으로 말했고.
커너는 그때서야 날붙이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럼 그 말씀을 하신 이유가 뭡니까?”
커너는 가만히 다이애나를 바라봤다.
암흑가의 정점에 올라선 다이애나.
그러나 사실 다이애나는 범죄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애초에 다이애나가 그런 짐승들과 다를 바 없는 범죄자였다면.
“오래 전, 내가 어떤 꼬맹이를 거두어 준 적이 있어서 말이야.”
오래 전, 어린 커너를 거두어주지도 않았을테니까.
“그러니까, 저를 거두어주신 은혜를 갚으라 이 말씀이십니까?”
“강요해서 미안해.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어.”
다이애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이애나는 어떤 확신을 느낄 수 있었다.
커너가 자신의 청을 들어줄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커너는 암흑가의 사냥개였지만 은혜를 모르지 않았으니까.
커너 또한 암흑가의 범죄자들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다이애나는 커너를 바라봤고.
커너는 머릿속으로 오래 전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과거 어린 시절.
커너는 뒷골목을 전전하며 하루를 연명하던 때가 있었다.
혼자 살아가기엔 커너는 너무도 어렸고.
그런 어린 커너에게 암흑가는 너무도 험한 지역이었다.
살인은 고사하고 고문, 강간, 납치.
창의적인 범죄 행위를 서슴없이 저지르는 놈들의 구역.
그러면서 일말의 죄책감마저 느끼지 않으니.
그야말로 짐승.
심히 개새끼라 불러도 모자람이 없는 놈들이 들끓는 곳이었다.
그림자 달의 길드장, 다이애나는 그런 개새끼들이 날뛰는 암흑가에 단신의 몸으로 들어왔다.
신분도, 출신도 모를 정체 불명의 여인.
그러나 그녀는 홀로 광기에 미쳐있는 개새끼들을 모조리 짓밟았고.
혼돈으로 가득찬 암흑가에 ‘규칙’ 이라는 것을 부여했으며.
끝내 암흑가의 정점에 올라선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암흑가를 평정한 다이애나는 가장 먼저 한 것이 길거리의 아이들을 거두는 일이었다.
커너를 비롯한 수많은 아이들이 다이애나에게 거두어졌고.
다이애나는 커너가 암흑가에서 살아갈 수 있게끔 만들어준 인물이었다.
커너는 그런 은혜를 모르지 않았고 다이애나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커너는 시안과 다이애나, 둘 모두를 배신할 수가 없었다.
다이애나의 목숨으로 협박하는 이사벨.
커너는 이사벨이 건넨 독을 스스로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날에 암흑가의 사냥개, 커너는 죽었다.
지금의 커너는 루벤의 암살 교관.
“죄송하지만, 그 은혜는 이미 갚았습니다.”
커너는 단호히 등을 돌렸다.
“뭐라고?”
다이애나의 두 눈이 일순간 치켜떠졌다.
은혜를··· 갚다니?
다이애나는 커너에게 딱히 무언가를 받은 기억이 없었다.
애초에 다이애나는 커너가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은혜를 갚기는 뭘 갚았단 말인가.
“길드장께서는 그 동안 엘란두르의 추적을 받고 있으셨죠.”
“그걸 네가 어떻게···?”
“어느 순간부터 추적이 느슨해졌고요.”
다이애나의 눈이 다시 한 번 치켜떠졌다.
커너가 왜 갑자기 저런 이야기를 꺼내는 지 알 수가 없었다.
“됐습니다. 알아줄 것이라 생각한 일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러나 커너는 그에 따른 답을 해주지 않았다.
커너는 다시 걸음을 옮겨 자리를 떠나갈 뿐이었다.
“그게 무슨 헛소리야?”
다이애나는 그런 커너의 앞길을 막아세웠다.
다이애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커너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커너는 씁쓸하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하기사, 그 일을 다이애나가 알리가 없을테지.
“대체 무슨 도움이 필요하길래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시안 백작을 같이 설득해줘.”
“거절합니다.”
“뭘 설득해야하는지도 안 물어봐?”
“무엇이든 거절합니다.”
커너는 다시금 멈추었던 발걸음을 움직였다.
그러나 똑같이 앞길을 막는 다이애나의 모습에 금방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이러셔도 저는···.”
“그럼 만나게만 도와줘!”
“하아···.”
커너는 저도 모르게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끈덕지게 늘어지는 다이애나.
보아하니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았다.
잠깐의 고민.
“······ 알겠습니다.”
커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약간의 의심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다이애나는 암흑가의 정점에 올라선 인물.
그리고 엘란두르에게 억압되고 있는 상태였다.
여기에 현재 루벤이 엘란두르와 전쟁 중인 상황임을 감안하면 혹시···? 라는 물음이 떠오르긴 했었다.
그래서 썩 도와주고 싶지 않았거늘.
“영주님께 길드장이 만나고 싶다는 보고는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영주님께서 거절하신다면 저는 더 이상 도와드리지 않을 겁니다.”
커너는 그 말과 함께 자리를 떠나갔다.
단호하다 못해 매몰찬 모습.
예전 특급 암살자였던 커너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
다이애나는 그저 멍하니 그 자리에 서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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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정리가 되어가는 전장.
루벤의 병사들이 저마다의 막사를 설치하고 있었다.
다이애나는 그런 병사들 사이를 가로질러 걸어갔다.
달빛을 머금은 듯한 은발의 여인.
생소한 다이애나의 모습에 병사들이 의아한 얼굴로 바라봤다.
“이쪽입니다.”
하지만 앞선 커너의 모습 때문일까.
병사들은 별 의심없이 다시 할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어째, 커너라는 존재를 믿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다이애나는 미묘한 기분을 느끼며 커너를 따라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 간을 걸었을까.
커너가 한 막사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아니, 이건 막사라고 할 수가 없었다.
본디 막사라함은 천막과 같은 것으로 임시로 지은 건물을 의미했다.
그 안에 군인들이 머물 수 있도록 지은 건물.
당연히 그 조잡함이야 이루 말할 것이 없었다.
“이건···.”
그런데 지금 이 막사는 아니었다.
견고함과 튼튼함 그리고 깔끔함까지.
결단코 임시, 라는 개념을 들이밀 것이 아니었다.
이건 막사가 아니라 하나의 건축물이나 다름 없었다.
아무래도 오면서 보았던 드워프 공병들이 지은 것 같은데···.
장인의 종족이라 불리는 드워프.
다만, 그 드워프들이 왜 루벤의 병사들과 같이 있냐는 것이었다.
‘대체 뭐하는 군대인건지···.’
엘란두르를 파죽지세로 몰아붙이는 것도 그렇고 말이다.
다이애나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안에 들어가시면 영주님이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그 순간 커너의 말이 다이애나의 상념을 깨며 들려왔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커너는 그 말을 끝으로 터벅, 자리를 떠나갔다.
정말로 더 이상 도와줄 것이 없다는 듯.
내딛는 걸음에는 한치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내 밑에 있을 때는 저렇지 않았는데 말이지.”
다이애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는 다시 시선을 돌려 막사의 문을 바라봤다.
막사 주제에 어떻게 여닫이 문이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삼키면서 다이애나는 막사의 문을 두들겼다.
똑똑.
-들어오십시오.
그러자 안 쪽에서 젊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크 소리와 거의 동시에 들려온 목소리.
아무래도 다이애나가 밖에 있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다이애나는 달칵, 막사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보인 막사 내부의 풍경은 역시나 막사라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이렇게 직접 보는 것은··· 아마 처음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다시 들려온 젊은 사내의 목소리.
바라본 그곳엔 금발의 사내, 시안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이애나는 시안을 향해 살며시 고개를 숙여보였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백작 각하. 그림자 달의 길드장, 다이애나입니다.”
“아시다시피 시안 루벤 백작입니다.”
시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을 해보였다.
그리고 다이애나가 자리에 앉기도 전.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시안이 곧바로 다이애나에게 물어왔다.
“왜 절 만나고 싶다고 하신 겁니까?”
단도직입도 이런 단도직입이 없었다.
그래도 약간의 사담 정도는 하기 마련이거늘.
이 정도면 사족을 떼기는 커녕 잘라버리다시피한 수준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으셨으니, 저도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이애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는 입을 열었다.
“도움이 필요합니다.”
“도움이 필요하다?”
다이애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관련한 사정에 대해 입을 열려던 찰나.
“거절하겠습니다.”
시안의 답이 한박자 빠르게 들려왔다.
그리고 다시 이어진 시안의 답.
“제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는 무시하시더니. 이제 와 도움을 달라라···.”
다이애나는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시안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았으니까.
다름 아닌 시안이 암스베르크에 있을 당시.
시안은 소렌을 찾고자 그림자 달에게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그 일환으로 시안은 그림자 징표까지 동봉해서 다이애나에게 보내왔다.
다이애나가 언제든지 도움을 주겠다며 주었던 증표를 말이다.
하지만 다이애나는 이에 응답하지 않았다.
한 마디로 개무시.
하지만 당시엔 다이애나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다이애나는 모습을 함부로 드러내서는 안되었으니까.
길드는 거의 해체 직전까지 갔으며 현재까지도 다이애나는 숨어 지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시안을 도와줄 여력은 없었다.
다이애나에게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었다.
“뻔뻔하다는 생각이 드시지 않으십니까?”
하지만 시안에게는 그냥 개무시나 다름 없었다.
그렇게 개무시 해놓고 이제 와 도움을 달라니.
시안은 살짝, 화가 난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할까?
커너를 통해서 접촉하지 않았더라면, 시안은 만나볼 생각도 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 그건···.”
다이애나는 정말이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이래서 커너의 도움이 필요했건만···.
다이애나는 아쉬움을 삼켰지만 커너는 도와줄 생각이 눈꼽만큼도 없어보였다.
“무엇보다 루벤은 지금 전쟁 중입니다. 다른 곳에 눈을 돌릴 여력이 없습니다.”
시안은 다이애나를 쏘아보듯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희 루벤은 그림자 달을 도와줄 이유도, 여력도 없습니다.”
다이애나는 역시나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거진 팩트 폭력이나 다름 없는 시안의 말에 변명의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내려앉는 정적.
“용건이 그 뿐이라면, 이만 돌아가십시오.”
시안은 그 말과 함께 다이애나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더 이상의 할 말은 없다는 듯,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이쪽이 도움이 필요할 때는 나몰라라 해놓고,정작 저들이 필요할 때는 도와달라?
심지어 언제든지 도와주겠다 약조한 것은 그림자 달 쪽이었다.
먼저 신의를 져버린 것은 다름 아닌 저쪽이었다.
하여간, 범죄자 놈들은 이래서 안 되었다.
암흑가의 정점에 서 있는 그림자 달 길드.
그 말은 즉, 범죄자들의 정점이나 다름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엘란두르와 한창 전쟁 중이었다.
이 전쟁 때문에 최후의 드래곤과 수인족들의 왕국을 찾는 일도 뒤로 미루었다.
여러모로 그림자 달을 도와줄 이유도, 시간도, 여력도 없었다.
시안은 다이애나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런 시안의 모습을 지켜보던 다이애나.
대체 왜일까.
다이애나에게 도와달라 찾아왔던 귀인족의 장로, 파벨.
매몰차게 거절당한 파벨이 이런 심정이었을까.
다이애나는 잠깐이나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시안은 정말 더 이상 다이애나와 할 이야기가 없어보였다.
다이애나 또한 솔직히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 떠나는 것이 맞는 걸까.
질끈 쥐어진 두 주먹.
“······ 그림자 달이 아닙니다.”
다이애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시안은 여전히 다이애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방금 전의 말은 듣지도 못했다는 듯 여전히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이것저것 잴 것이 아니었다.
앞뒤 재가며 간을 볼 상황도, 상대도 아니었다.
다이애나는 망설임을 지워버리며 나지막히 말을 내뱉었다.
“수인족들을··· 도와주십시오.”
멈칫.
그러자 시안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이윽고 시안의 얼굴이 천천히 다이애나에게로 향했다.
그렇게 보인 시안의 표정.
그 표정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건 또 뭔 개소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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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이어진 이야기.
“그러니까···.”
시안은 탁자를 검지 손가락을 두들기며 다이애나의 이야기를 정리했다.
“수인족의 대족장이 현재 실종 상태이고. 수인족은 모종의 위협을 받고있다··· 이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다이애나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런 다이애나를 바라보던 시안.
“그 사정을 어떻게 그림자 달의 길드장께서 알고 계신 겁니까?”
시안은 의심스러운 얼굴로 다이애나에게 물었다.
지금 다이애나가 들려준 이야기.
그건 현재 수인족들이 처한 상황에 관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수인족은 수 백년 전부터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런데 어떻게 다이애나는 그런 수인족들의 사정을 알고 있는 것일까.
제국 최고의 정보 길드··· 이기 때문이라면 그럴 수는 있었다.
아무리 시안이라도 정보 길드의 정보력을 따라갈 수는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문제는 남아있었다.
다이애나는 왜 수인족들의 사정을 조사했으며.
그 사정을 왜 시안에게 말함과 동시에.
왜 시안에게 수인족들을 도와달라 부탁하는 건가.
시안의 물음은 이 모든 것들을 함축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이애나 또한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건···.”
다이애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나 추가로 내뱉어지는 말은 없었다.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하는 걸까.
아니, 설명을 한들 믿어는 줄까.
다이애나는 상당히 주저하는 모습이었다.
시안은 그런 다이애나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 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다이애나가 시안을 향해 불쑥, 왼쪽 팔을 내밀었다.
정확히는 왼쪽 소매를 어깨 위까지 올리며 뽀얀 속살을 드러내었다.
은발의 머리와 대비되는 새하얀 다이애나의 속살이 비쳐보였다.
지금 저게 뭐하는 건가, 싶은 생각도 잠시.
촤라라라락.
일순간 다이애나의 피부가 뒤집어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촘촘한 무언가가 다이애나의 피부 위로 자리매김했다.
“비늘···?”
그건 어떤 비늘과도 같아 보였다.
이내 다이애나가 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손에 들린 자그마한 단검.
이내 단검 위로 새파란 마력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다이애나는 오러의 힘을 끌어 단검에 새겨넣었다.
암흑가의 정점에 선 다이애나.
그건 암살의 기술 또한 수준급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시안은 순간적으로 기세를 피워올렸다.
그리고 마(魔)의 힘을 끌어내려는 것도 잠시.
다이애나가 주저없이 오러가 깃든 단검을 내질렀다.
그리고 그것은 시안이 아닌, 다름 아닌 다이애나의 왼팔을 향하고 있었다.
카앙─!
불꽃이 튀어오르며 단검이 튕겨져나갔다.
오러를 머금은 단검이 다이애나의 속살을 뚫지 못하고 튕겨져나갔다.
되려 단검의 날이 상해있었다.
“무슨···.”
시안은 저도 모르게 눈이 크게 떠졌다.
다이애나의 속살을 뚫지 못한 오러의 단검.
저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현재 루벤의 병사들이 입고 있는 S등급의 방어구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
그 방어구조차도 오러가 담긴 힘을 직격으로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시안이 장비한 초월 등급 방어구, 불멸(不滅).
불멸(不滅)정도가 되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당연하게도 생명체의 피부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어떤 포악한 몬스터도 오러가 깃든 일격을 고작 피부 따위로 막아내지 못한다.
아니, 정확히는 딱 한 존재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오러가 담긴 힘을 직격으로 맞아도 끄덕하지 않을 수 있는 생명체가 대륙에 딱 하나가 있었다.
세상 모든 종족들의 꼭대기에 군림하는 자.
만물 위에 군림하는 지상 최강의 생명체이자 범접할 수 없는 최강자.
드래곤(Dragon).
하지만 보이는 다이애나의 모습은 분명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또한 느껴지는 기세 또한 그리 강대하지 않았다.
인간이되 드래곤의 특색을 지닌 인간.
“용인족···?”
다이애나는 용인족(龍人族)이었다.
다이애나는 시안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촤라라라라락.
이윽고 다이애나의 피부가 다시 새하얀 속살로 돌아왔다.
그것은 인간 여인의 것처럼 여리고 또 보드라웠다.
“하악···! 하악···!”
그리고 어째서인지 다이애나의 숨소리가 거칠어져있었다.
식은땀마저 흐르는 것이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자, 잠깐···.”
시안은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져왔다.
“용인족이 어째서···?”
다이애나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다만, 거칠어진 호흡을 삼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얼굴 위로 드러난 표정.
보아하니··· 무슨 복잡한 사연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에 관해서는 딱히 말하고 싶어하지 않은 것 같았다.
해서 시안은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말하기 싫어하는 사연을 캐물어서 무엇할까.
무엇보다 사연이야 어찌되었든 다이애나가 용인족임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한 마디로 다이애나는 수인족의 일원이라는 뜻이었다.
다이애나가 수 백년전에 자취를 감춘 수인족들의 사정을 알 수 있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고 있었다.
또한 왜 수인족들을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이유까지도 설명이 되었다.
‘그림자 달의 길드장이 용인족이라···.’
시안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아니, 그건 그렇고.”
시안은 생각을 정리하며 다이애나에게 물었다.
“이 이야기를 제게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생각해보면 그러했다.
자신이 용인족임을 밝히는 것도 그렇고.
수인족들의 사정을 설명하며 도와달라는 것도 그렇고.
굳이 시안을 찾아와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정확히는 시안을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그것도 엘란두르와 전쟁 중인 자신을 찾아와서 말이다.
제국 최고의 정보 길드 수장이라 불리는 자가 그런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터.
“그건···.”
아니나 다를까 다이애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조금의 시간이 지나 들려온 다이애나의 말.
“엘란두르가 이 일에 개입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인가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