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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질하는 영주님!-239화 (239/322)

239화 - 시작된 전쟁(2)

본격적으로 시작된 루벤과 엘란두르의 전쟁.

설마설마했던 전쟁은 끝내 루벤의 선제 공격과 함께 터져버렸다.

그리고 소식은 빠르게 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그에 따라 제국의 정세는 발칵, 뒤집혀버렸다.

“설마설마 했거늘···.”

“정말로 전쟁을 일으킬 줄이야···.”

제국 어딜 가나 관련한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다.

“이번엔 시안 백작이 오판을 한 것이 아닌가 싶은데···.”

“그러게··· 나도 같은 생각이야.”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루벤의 패배를 예상했다.

3천도 채 되지 않은 루벤의 전력.

루벤의 전력이 정말이지 말이 되지 않았다.

차라리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이 더 가능성이 있는 수준이었다.

“정말로 보여주기 식이었을지도.”

“이거, 생각보다 전쟁이 그리 길지 않겠네.”

사람들은 그저 쇼맨십에 불과한 것.

그렇기에 전쟁이 그리 길지 않을거라 그리 생각할 뿐이었다.

그런 예상 속에서 시작된 전쟁.

그리고 들려온 소식은 사람들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 버렸다.

“엘란두르의 병력이··· 궤, 궤멸되었다고?”

“루벤의 병력이 아니라?”

엘란두르의 패퇴.

아니, 패퇴의 정도가 아니었다.

“버, 벌써 9개의 남작령과 4개의 자작령이 함락되었다는데?”

“그 말은··· 엘란두르 영토가 함락되었다는 뜻?”

“이,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출병을 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야말로 파죽지세.

속된 말로 하면 뚝딱.

루벤은 거침없이 전선을 밀어올리고 있었다.

“마, 말도 안돼···.”

“세상에나···.”

제국 전체가 경악에 빠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엘란두르가 대저 누구인가.

제국을 지탱하는 두 기둥 중 하나.

수 백년간 그 입지를 단단히 굳혀온 명문가 중의 명문가.

제국의 황가조차도 어찌하지 못하는 무소불위 권력의 가문이었다.

그런 엘란두르가 무너지고 있었다.

그것도 다름 아닌 루벤이라는 신생 가문이자 영지에게 말이다.

심지어 그리 많은 병력이 동원되지도 않았다.

고작 2,700.

엘란두르가 지닌 수 백년의 아성을 무너뜨리는 데는 고작 3천의 병력이 채 필요하지 않았다.

“거, 거짓말··· 거짓말이지?”

“이건 도무지 말이 안되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제국 전체가 뒤집히다 못해 경악하고 있는 가운데.

암흑 도시, 베네르.

그리고 그 베네르에서 가장 어두운 구역에 위치한 허름한 집.

“대족장 카리스님이 실종된 건 두 달 전의 일이라고 합니다.”

흐레스는 앞선 누군가를 향해 보고를 이어갔다.

그리고 그런 흐레스가 보고를 하는 당사자.

달빛을 머금은 듯한 은발의 여인.

그림자 달의 길드장, 다이애나.

······”

다이애나는 아무런 반응을 내보이지 않았다.

흐레스의 보고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정확히는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했냐는 듯.

다이애나는 무심한 눈빛을 지어보일 뿐이었다.

그런 다이애나의 심정과는 별개로 흐레스는 계속해서 보고를 이어나갔다.

“두 달 전에 카리스님이 누군가와 만나야 한다면서 왕국을 떠났다고 합니다. 추가로 카리스님이 수호자를 뵙고 난 이후의 일이라고 합니다.”

일순간 다이애나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카리스가 수호자를 만났다는 흐레스의 보고.

그건 지난 날, 파벨이 찾아와 했던 말과 모순된 보고였다.

파벨은 분명 수호자는 수 년전부터 수인족들과 만나지 않았다고 했었으니까.

그런 다이애나의 의문을 눈치 챈 것일까.

“파벨 장로님께서 말씀하신 건 사실입니다. 수호자께서는 수 년전부터 수인족들의 그 누구와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카리스 대족장님이 실종되기 직전의 만남이 유일했습니다.”

흐레스는 차분히 보고를 이어나갔다.

“어째서 수호자께서 만남을 거부하신 것인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수호자께서 어느 누구와도 만나지 않다가 갑자기 카리스 대족장님과 만난 이유 또한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

“다만, 수호자님과의 만남 이후로 카리스님이 왕국 밖으로 나가는 일이 잦아졌다고 합니다. 그러다 갑자기 누군가와 만나야 한다면서, 이번에는 길게 나갔다와야 한다는 말과 함께 왕국을 떠났다고 합니다.”

“······”

“이 또한 어떤 목적인지, 또 누구를 만났는지를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다만, 카리스님이 만나고자 한 이는 인간의 여인이라는 것 정도만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카리스는 수인족의 왕국을 떠났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카리스님은 돌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세상에 밝혀지지 않은 수인족들의 사정.

그러나 제국 최고의 정보 길드, 그림자 달이라는 것일까.

흐레스의 보고는 굉장히 자세했다.

물론 단순히 제국 최고의 정보 길드이기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

다이애나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무심하면서도 관심없는 눈빛만이 허공을 향할 뿐이었다.

흐레스는 다시 한 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단순한 실종 사건 정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대상이 카리스님이라는 것이 이상했습니다만··· 그래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수인족의 대족장, 카리스.

그런 카리스가 실종되었다는 건 정말로 큰 문제였다.

그러나 그럴 수 있다, 라는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정확히는 카리스에게 개인적으로 무슨 일이 있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문제였다.

다이애나가 신경 쓸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이어진 흐레스의 보고.

“엘란두르가 개입한 정황이 포착되었습니다.”

이건 그럴 수 있다, 라는 말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엘란두르가 이 일에 개입했다.

수인족들은 수 백년 전에 세상으로부터 자취를 감추었다.

그런데 엘란두르가 대체 어떻게 알고 이 일에 개입한단 말인가.

무엇보다 현재 엘란두르는 루벤과 전쟁 중이었다.

전쟁 중인 상황에서 다른 일에 손을 쓸 힘이 있다?

파죽지세로 전선을 밀어올리고 있는 루벤.

엘란두르는 다른 곳에 눈을 돌리기조차 힘든 상황이었다.

“······!”

다이애나의 두 눈이 살짝 치켜떠졌다.

지금까지 아무런 반응조차 보이지 않던 것이 무색하게, 다이애나의 두 눈은 흐레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얀 늑대 기사단들과 더불어 카이 엘란두르가 움직였습니다. 처음엔 루벤과의 전쟁 때문이라 생각했습니다만··· 그 움직임이 굉장히 이상했습니다.”

해서 흐레스는 하얀 늑대 기사단을 추적했다.

그리고 그 추적 끝에 밝혀낸 사실.

“하얀 늑대 기사단들이 수인족의 왕국을 찾고 있었습니다.”

흐레스는 그 말과 함께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리고 다이애나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갑작스러운 수인족의 대족장, 카리스의 실종.

갑작스러운 엘란두르의 수상한 움직임.

흐레스의 보고가 사실이라면··· 카리스의 실종엔 엘란두르가 연관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는 것은 분명했다.

갑자기 엘란두르가 수인족들의 왕국을 찾을리가 없었으니까.

그 시기와 교묘하게 카리스가 실종될리가 없었으니까.

이유는 모르겠다.

정확한 사정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말로 엘란두르가 수인족의 왕국을 찾고 있다면.

그리고 엘란두르가 수인족의 왕국을 어찌할 생각이라면.

“······”

솔직히 말해 다이애나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엘란두르 앞에서 다이애나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없었다.

제국을 지탱하는 두 기둥.

수 백년의 아성을 지켜온 무소불위의 가문, 엘란두르.

지금 당장 다이애나, 본인의 상황조차 어찌하지 못했다.

제국 최고의 정보 길드인 그림자 달.

그림자 달도 엘란두르의 압박에 해체 직전까지 치달은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다이애나는 이렇게 숨어지내야만 했다.

다만, 전쟁 때문인지 지금은 그 압박이 느슨해진 상황이었다.

그러니 엘란두르가 나섰다면 그걸로 끝이었다.

그 누구도 엘란두르에게 대항할 수 없다.

그건 수 백년의 역사가 증명해온 사실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

다이애나는 자꾸만 한 이름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엘란두르에게 당당히 선전포고를 한 어떤 미친 놈의 이름이.

그리고 지금 파죽지세로 전선을 밀어올리고 있는 어떤 가문의 이름이.

대륙에서 엘란두르에 대적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그리고 다이애나가 수인족들의 사정에 관여할 이유 또한 없다.

이제 루나라는 존재는 없다.

지금의 나는 그림자 달의 길드장, 다이애나.

그런데 나는 지금.

“······”

대체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 것일까.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길게 이어지는 정적.

“······ 시안 루벤 백작을 한 번 만나봐야겠다.”

굳게 닫혀있던 다이애나의 입이 열었다.

#

초토화가 되어버린 영지.

“에스티스 자작령을 완전히 함락시켰습니다.”

이어진 루카스의 보고에 시안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엘란두르 산하로 있는 16명의 남작과 8명의 자작.

지금 에스티스 자작령을 함락함으로써 루벤은 도합 9개의 남작령과 5개의 자작령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그로써 엘란두르의 세력을 절반 넘게 궤멸시킨 것이나 다름 없는 셈.

그리고 그 시간이 고작 일주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엘란두르가 지켜온 수 백년의 아성이 무너지는데 고작 일주일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럴 수 있었던 이유에는 역시나.

“신기전은 문제 없지?”

신기전의 화력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볼 수 있었다.

성(城)을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전략 병기, 신기전.

이 신기전의 화살 앞에서 수성이라는 개념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고작 벽돌로 지은 성 따위는 방벽이 되어주지 못했다.

벽돌은 커녕 강철로 지은다 한들 의미가 있을까?

모르긴 몰라도 루벤의 방벽인 ‘넌 모찌나간다! 티타늄책 Lv.7’ 정도는 되어야 의미를 갖을 것 같았다.

그렇기에 전쟁의 과정은 단순했다.

신기전의 화력으로 성벽을 폭파.

그 이후 루벤의 병사들과 기사들이 진입하여 휩쓸어 버린다.

사실 신기전도 신기전이었지만 루벤의 전력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수준 자체를 달리하는 루벤의 병력

성벽을 오르는 공성이라면 모를까 백병전은 당해낼 수가 없었다.

여기에 후방을 지원하는 든든한 마법 병단까지.

성이 함락되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속된 말로 뚝딱.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불가능했다.

어느 순간부터 루벤의 진군 속도는 점점 느려졌다.

일단 첫 번째.

“아멜리아는 어디쯤이래?”

보급을 수달받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보급의 속도가 진군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성벽을 무너뜨리는 데 필요한 신기전의 화살은 상당했다.

성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하기는 하나 소모되는 물자 또한 거진 폭행 수준이었다.

물론 루벤에서 드워프들이 1+1 파격행사로 찍어내고 있기는 하다만.

그 보급이 도달하기까지의 시간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루벤에서 보급을 받은 직후 출발했다고 합니다. 아마··· 하루 정도 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진군의 속도를 조절해야할 필요는 있었다.

또한 보급의 문제도 보급이었지만 병사들도 휴식이 필요했다.

아무리 손쉬운 전투였다고는 한들 전쟁은 어디까지나 전쟁이었다.

병사들의 체력과 정신이 소모되는 것은 당연한 일.

“병사들에겐 오늘은 푹, 쉬라고 해. 내일이면 보급이 올테니 남아있는 음식들도 양껏 풀어주고.”

여러모로 진군을 멈추고 휴식을 취할 상황이었다.

“알겠습니다.”

시안의 명에 루카스가 절도있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리고는 일을 지시하려는 듯 천천히 자리를 떠나갔다.

시안은 그런 루카스를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부서진 전장의 잔해들을 정리하는 병사들의 모습.

걱정과는 달리 전쟁은 순조롭게 흘러갔다.

필연적으로 피해가 발생하는 전쟁이지만 지금까지 피해라고 부를 만한 것들도 없었다.

순조롭다 못해 원하는 바대로 흘러가는 상황이었다.

정말로 이상적인 상황이었다.

‘이상하단 말이지···.’

그러나 시안은 한편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왜 아직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지?’

그도 그럴 것이 엘란두르가 너무 잠잠했다.

현재 엘란두르의 가신들 중 절반의 세력이 궤멸된 상황이었다.

물론 아직 엘란두르 자체는 건재했다.

그러나 세력이 궤멸된 건 엘란두르 입장에서도 치명적인 피해였다.

그러니 이쯤되면 행동에 나서야만 했다.

이렇게 차근차근 각개격파 당하기 전에 움직여야했다.

하얀 늑대 기사단의 단장, 에런.

엘란두르의 장자, 카이 엘란두르.

그리고 대륙 제 1의 검, 듀라크까지.

엘란두르의 최정예 전력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야만 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최정예 전력은 물론, 하얀 늑대 기사단들조차 코빼기도 모습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엘란두르의 사정이 이 정도로 좋지 않다고?’

물론 시안의 횡령과 더불어 비자금의 강탈.

그로써 예산에 허덕이는 것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 이해는 할 수 있었다.

‘이 정도는 아닐텐데?’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다른 일반적인 가문이었다면 시안은 고개를 끄덕였을 터였다.

하지만 엘란두르는 일반적인 가문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시안이 엘란두르의 부행정관으로서 역임해본 바.

엘란두르의 저력은 이 정도로 무너지지 않는다.

고작 이 정도로 멸문할 것이었으면 200년도 전에 멸문했을 터.

수 백년의 아성 같은 말이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엘란두르는 행동에 나서지 않고 있었다.

이렇게 본진이 쑥대밭이 되어가는데도 마땅히 행동에 나서지 않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행동에 나서긴 했었다.

그 행동이 개수작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었지만.

“고, 고맙습니다! 루벤 병사 나으리들 정말 고맙습니다!”

“저희는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는데···.”

“사, 살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루벤의 병사들에게 고개를 연신 숙이는 사람들.

저들은 다름 아닌 엘란두르의 백성들이었다.

시안이 이번 자작령을 함락시킬 때의 일이었다.

엘란두르는 갑자기 일반 백성들을 방패막이로 내세우기 시작했다.

보통 영지전이 발발하면 일반 백성들은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킨다.

영지전의 승패가 어찌되든 백성들은 백성들.

그리고 공격 측에서도 일반 백성들은 건드리지 않는다.

그들은 죄가 없는 백성들이었니까.

제국법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이는 불문율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 엘란두르는 아니었다.

엘란두르는 백성들을 방패막이로 내세웠다.

그 때문에 시안은 이번 전투에서 신기전을 쉽사리 사용할 수가 없었다.

신기전의 화살은 피아를 가리지 않는다.

신기전을 사용하면 일반 백성들의 피해는 이루 말할 것이 없었다.

물론 그딴 건 다 무시하고 공격을 감행할 수야 있었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었으니까.

피와 살육으로 쓰여지는 역사.

전쟁에는 수단과 방법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야.’

하지만 시안은 그러지 않았다.

윤리와 도덕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이건 병사들의 사기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루벤의 병사들은 루벤을 지키기 위해 검을 잡았다.

세상으로부터 핍박받고 또 버림받은 이들이 모인 루벤.

그레이슨을 비롯한 인간의 영지민들은 엘란두르에게.

세미르를 비롯한 드워프의 영지민들은 같은 동족들에게.

아스란디즈를 비롯한 다크 엘프의 세상 모두에게.

루벤의 사람들은 모두 그런 아픔을 가지고 있었다.

그 누구하나 손을 내밀어주지 않는 아픔 속에서 살아왔다.

그 아픔 속에서 루벤은 검을 쥐었다.

내 가족에게만큼은 이런 아픔을 주고 싶지 않아서.

나의 아이들만큼은 이런 아픔 속에서 자라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목숨을 걸었고 고된 일들을 전혀 마다하지 않았다.

루벤의 검과 방패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런데 그 검이 죄없는 백성들에게 향한다?

그 방패가 힘없는 자들을 보호해주지 않는다?

자신들을 버린 그들과 똑같은 행동을 한다?

물론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백성들이었다.

그러니 한 두번이야 그럴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점점 병사들의 정신을 갉아먹을 터였다.

그리고 끝내 병사들을 무너뜨릴 것이 분명했다.

병사들을 넘어 루벤 자체를 무너뜨릴 것이다.

‘이건 고려할 가치가 없는 문제야.’

무엇보다 시안도 썩 내키지 않았다.

진군의 속도가 느려지고 있었지만 시안은 문제 삼지 않았다.

‘이런 미친 짓을 자행했단 말이지···.’

이런 전략을 사용한 엘란두르를 문제 삼을 뿐이었다.

아니, 이건 전략이라 할 수도 없었다.

그냥 무고한 이들을 희생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용납할 수 없는 반인륜적인 행동이었다.

그런데도 엘란두르가 이 정신 나간 짓을 감행했다는 것.

그건 한 가지 분명한 목적을 지니고 한 행동이라 볼 수 있었다.

‘시간을 끌려는 건가?’

루벤의 진군 속도를 늦추기 위함.

그로써 시간을 끌려는 속셈.

그리고 그 말은 즉.

‘뭔가를 준비하고 있나?’

이렇게까지 생각될 수 있는 일이었다.

단순한 억측일 수 있겠지만 시안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는 엘란두르의 최정예 전력.

무언가 꿍꿍이를 감춰두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문제는 그게 뭐냐는 건데···.’

지금 당장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지금으로써는 진군의 속도를 높이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였다.

그런데 백성들을 방패막이로 내세우고 있으니 그마저도 힘들었다.

다행히 세라의 마법 병단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이번 전투도 상당히 힘들어졌을 터였다.

“흐음···.”

깊어지는 고민.

바로 그때였다.

“저··· 영주님.”

누군가 시안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그곳엔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

“커너?”

다름 아닌 루벤의 암살 교관, 커너가 서 있었다.

이번 전쟁에서 중요 인물 납치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커너.

과연 특급 암살자다운 면모를 보여준 커너였다.

“다름이 아니라, 영주님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응? 나를?”

커너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전쟁 통에 갑자기 무슨 말인가 싶었다.

그리고 분위기를 보아하니 루벤의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애초에 루벤의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커너가 대신 전달할 이유는 없었다.

그냥 직접 찾아오면 그만이었으니까.

누군가 싶은 것도 잠시.

“그것이···.”

커너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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