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 전쟁의 서막(1)
집무실의 분위기가 더욱 무겁게 내려앉았다.
시안은 다시 한 번 집무실에 모인 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폈다.
긴장한 기색과 함께 어딘가 결연한 표정의 사람들.
“더 이상 엘란두르를 두고 볼 수는 없어.”
시안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왜 엘란두르와의 전쟁을 해야하는지.
시안은 관련한 사안들을 사람들에게 세세히 말해주었다.
그렇게 길지도, 짧지도 않은 이야기가 끝이 나고.
“언젠가 올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만···.”
루카스가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이들이라고 모르지 않았다.
엘란두르와 언젠가 맞부딪혀야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항상 마음 속으로 준비하고 있었건만.
막상 눈앞으로 다가온 현실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전쟁은 단순한 전투와는 달랐으니까.
하물며 그 대상이 엘란두르라면야.
그렇기에 비단 루카스 뿐만이 아니었다.
루벤의 핵심 인물들이자 최정예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이들.
지금 집무실에 모인 다른 이들 모두가 루카스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시안은 그런 이들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리고 시안이 쏟아부어버린 어마어마한 현질.
각각 2억 골드를 투자한 <샤를롯의 전당>, <엘로디의 마탑>.
여기에 덕지덕지 쳐바른 성장버프 덕분일까.
시안이 황궁에 다녀온 동안 어마어마한 성장을 했음을 인지할 수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루벤은 엘란두르의 전력에 비해 부족했다.
일단 인구적인 부분에서 압도적으로 밀렸다.
엘란두르의 산하로 있는 16명의 남작과 9명의 자작.
반면에 루벤은 하나의 작은 영지에 불과했다.
물론 신기전과 오룡거의 힘을 빌린다면 인구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엘란두르의 최정예 전력은 아니었다.
하얀 늑대 기사단의 단장, 에런.
그리고 카이와 듀라크.
루벤은 엘란두르의 최정예 전력을 상대할 힘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루카스와 세라가 합세하면 에런을 대적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도 그럴 것이 루카스는 어느덧 마스터(Master)의 경지를 바라보고 있었고.
세라 또한 대마법사의 반열인 6위계(位界)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개별적으로는 아직 부족할 터였다.
그러나 둘이 합세한다면 충분히 에런을 어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레아가 나서준다면야 더없이 좋은 상황.
그러나 레아는 루벤에서 나갈 수가 없었다.
‘카이는 켄드릭이 나서면 되고.’
마스터 상급의 데스 나이트, 켄드릭.
켄드릭이라면 충분히 카이를 대적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륙 제 1의 검이자 엘란두르의 최고 전력.
‘듀라크는 내가 막는다.’
듀라크는 시안이 대적할 수 있었다.
아니, 대적해야만 했다.
이길 수 있을지는··· 솔직히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현재 시안은 예전의 시안이 아니었다.
장족의 발전을 했음을 물론, 아르나이즈들의 무구들과 같은 초월 장비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초월 스킬들과 뮤리엘의 축복까지.
이 것들을 십분 활용한다면 가능성은 충분했다.
루벤은 어느덧 엘란두르와 대적할 정도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은 소수의 정예로 판가름 나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었다.
“루카스, 지금 바로 병사들과 함께 전쟁을 준비해. 그리고 병사들의 수준을 객관적으로 파악해서 나한테 알려줘.”
“알겠습니다.”
“아스란디즈님도 마법 병단과 전쟁을 준비하면서 그들의 수준을 파악해서 저에게 알려주세요.”
“알겠습니다.”
루카스와 아스란디즈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안은 시선을 돌려 한스와 크마루를 바라봤다.
“한스, 너는 전쟁에 필요한 물자들과 그 보급들을 정리해줘.”
“알겠습니다 도련님.”
“크마루는 한스가 보급 정리를 마치면 드워프 분들을 통솔해서 해당 물자들을 위주로 만들어주시고요.”
“크하하하핫! 맡겨만 주시오 영주!”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는 한스와 호탕한 웃음을 짓는 크마루.
시안은 다시 시선을 돌려 이번엔 아멜리아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멜리아.”
“네 영주님.”
“아멜리아는 이번 전쟁의 보급을 도맡아줘. 할 수 있겠어?”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뭐니뭐니해도 보급이었다.
아무리 전력이 강하다고 한들.
아무리 압도적인 군대를 보유했다고 한들.
뭘 먹어야 싸울 수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보급을 담당하는 아멜리아.
아멜리아야 말로 이번 전쟁에서 가장 핵심 중의 핵심이라 할 수 있었다.
또 그렇기에 아무나에게 맡길 수 없는 일.
“걱정마세요 영주님.”
그러나 아멜리아라면 전혀 걱정이 없었다.
아멜리아는 굳은 결의로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렇게 각각의 역할 배분이 끝난 이후.
“그럼 다들 바로 움직여 줘.”
사람들은 곧장 저마다의 일을 찾아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사람들이 떠나간 집무실.
“음···.”
시안은 휑한 집무실의 책상에 앉아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사실 시안의 행동은 굉장히 급하다고 할 수 있었다.
전쟁이라는 것은 이렇게 단기간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못해도 수 개월.
길면 년 단위의 준비가 필요한 것이 바로 전쟁이었다.
하물며 그 대상이 엘란두르라면 더더욱 준비가 필요했다.
그걸 시안이라고 모르지 않았지만 시안은 일을 서둘러 진행했다.
“아직도 움직임이 없단 말이지···.”
다름 아닌 여전히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엘란두르.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건 확실해.”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했다.
무엇보다 작위식에서 듀라크에게 느껴졌던 미약한 루슈리아의 기운.
확실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만일 엘란두르가 정말로, 정말로 악마 7군주와 연관되어있다면···.
‘······ 확실한 건 아니야.’
시안은 고개를 흔들었다.
확실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을 흐려서는 안된다.
어쨌거나 엘란두르는 어떤 꿍꿍이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되는 것도 변함 없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움직이는 건 옳은 판단이었다.
하지만 빠르게 움직인다 한들, 필요한 절대적인 시간은 있는 법.
“한 1주일 정도 걸리려나.”
준비가 끝날 때까지 조금의 시간이 있었다.
그렇기에.
『[스토리 메인 퀘스트] - ‘풀리지 않은 의문’
▶최후의 드래곤을 찾으세요.』
<보상: ???>
.
.
.
“잠깐 찾으러 갔다 와볼까.”
길게 자리를 비울 생각은 없었다.
전쟁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곳에 눈을 돌릴 여력도 없었다.
다만, 마침 시간도 조금 남겠다.
무엇보다 평균 수명 천 년의 드래곤.
어느덧 천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드래곤의 존재와 생사 여부 정도는 확인해볼 필요가 있었다.
물론 드래곤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황궁의 서고에서 확인한 정보.
어둠의 숲 너머에 있는 그들의 왕국.
“수인족의 왕국 위치만 확인하고 오자.”
시안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제국 동부에 위치한 엘란두르 후작령.
그리고 그런 저택에 위치한 이사벨의 집무실.
이사벨은 가만히 시선을 들어 눈앞의 여인을 바라봤다.
새하얀 백합을 닮은 머리.
그런 머리색과 어울어진 화사한 분위기의 여인.
“······ 해서. 수인족들의 왕국을 찾아주시는데 전념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신성 제국의 추기경, 레이첼.
레이첼은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맺었다.
그리고 그런 레이첼을 바라보던 이사벨.
“······”
이사벨은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싸늘한 시선으로 레이첼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
지금 레이첼은 엘란두르를 조종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물론 도움을 주겠다, 거래를 하겠다.
그런 명분이 있기는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선을 넘고 있었다.
지금 레이첼의 말은 엘란두르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과 다름 없었다.
감히 엘란두르에게 명령을 내린다?
그것도 타국의 추기경 따위가?
물론 레이첼은 신성 제국에서도 쫓겨난 신세였다.
한 마디로 파면된 사제.
본인 입으로는 파면까지는 아니라고 하나 실상은 파면이나 다름 없었다.
한 마디로 이제는 추기경도 아닌 존재였다.
그런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엘란두르를 조종하려 하고 있었다.
레이첼을 바라보는 이사벨의 두 눈은 분노로 일그러져있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끌어 내 쫓아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사벨은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오해는 말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이 모든 것은 엘란두르 후작께서 직접 지시하신 사항이니까요.”
이 모든 것은 듀라크가 직접, 이 일을 지시했으니까.
정확히는 레이첼의 요구를 들어주라.
듀라크는 이사벨에게 그리 명했다.
그렇기에 저것은 레이첼의 말이자 동시에 듀라크의 명령.
“······ 알았다.”
이사벨은 결국 저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사벨은 차분하게 말을 내뱉었다.
속으로는 분노가 끓어올랐으나 표출하지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했으나 표정만은 담담했다.
엘란두르의 안주인이라는 자리.
이 자리는 감정만으로 일을 처리해서는 안되는 자리였으니까.
이사벨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입을 열었다.
“수인족들의 왕국을 수색하는 건 어렵지 않다. 존재만 한다면 찾는 것은 시간 문제이지.”
제국을 지탱하는 두 기둥, 엘란두르.
엘란두르의 정보력은 그리 만만하게 볼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당장은 무리가 있다.”
하지만 지금 아니었다.
일단 현재 엘란두르의 사정도 좋지 않았거니와.
“시안, 그 놈이 언제 공격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힘을 분산시킬 수는 없다.”
지금 당장 루벤과 전쟁 중인 상황에서 다른 곳에 눈을 돌릴 여력이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레이첼이라고 모르지 않을 터.
“알고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어요.”
“그 말은, 우리 보고 피해를 감수하라?”
“이럴 때 사용하려고 만든 화살 받이들이 있으시지 않으신가요?”
레이첼의 말에 이사벨의 두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레이첼이 방금 말한 화살 받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았으니까.
엘란두르에게 충성을 바치는 수많은 가신들.
엘란두르의 세력이라 불리는 이들.
“그들을 앞세워 희생시키라는 건가?”
“시간을 벌어야하니까요.”
레이첼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고.
이사벨은 싸늘한 눈빛으로 레이첼을 바라봤다.
딱히 분노의 감정이 드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레이첼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니까 이런 다급한 일에 방패막이로 사용하고자.
그들을 받아들인 의도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다급할 때의 일.
최후의, 최후의 방법이었다.
그리고 그 결정을 레이첼이 내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역시나 듀라크의 결정이었겠지만, 지금 말을 하는 건 레이첼이었으니까.
“쉽지 않은 결정인 건 알아요. 하지만 수인족들의 왕국만 찾으면 모든 것이 끝이 난다는 사실을 알아주셨으면 해요.”
대체 수인족들의 왕국에 뭐가 있길래.
이사벨은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역시 듀라크의 명령.
“······ 하얀 늑대 기사단을 파견하겠다.”
이사벨은 결국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과 더불어 한 분을 더 파견해주셨으면 해요.”
“누구를 말하는 거지?”
“엘란두르의 대공자님이요.”
“대공자···?”
본디 대공자라 함은 가문의 후계자를 의미했다.
하지만 현재 엘란두르의 후계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보통 후계자는 가문의 핏줄이 이어받는다.
엘란두르의 핏줄은 도합 4명.
그러나 한 명은 지금 엘란두르와 전쟁 중에 있었다.
그리고 로즈웰과 네이슨이 없는 지금.
대공자라 불릴 이는 딱 한 사람밖에 없었다.
“카이를 말하는 건가?”
이사벨의 말에 레이첼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주의 명령이 내려진 터라 가만히 있었거늘···.”
그리고 이번엔 이사벨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점점 정도를 넘어서는구나.”
살벌한 침묵이 집무실 전체를 내리눌렀다.
그러나 레이첼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듣자하니··· 대공자께서는 엘란두르의 비기를 완성하고자 연무장에 틀어박혀계신다고 알고 있어요.”
다시 이어진 레이첼의 말.
“하지만 그건 무의미한 노력이에요.”
“뭐라고?”
“애초에 온전하지 않게 전해진 비기이니까요.”
“······”
“그리고 아무리 대공자께서 시대의 천재라 한들. 엘란두르의 비기를 완성할 수 없을 거예요. 그건··· 엘란두르가 생각하는 것보다 높은 차원에 있는 무(武)이니까요.”
“네 년이 지금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 구나.”
이사벨은 끝내 참았던 분노를 터트렸다.
분노로 일그러진 분위기가 숨을 옥죄어왔다.
“하지만 저희가 도움을 줄 수 있다면요?”
그러나 레이첼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엘란두르의 대공자를 수인족들의 왕국을 찾는 일에 참여시켜주세요. 그러면 엘란두르의 비기는 물론···.”
의미심장한 레이첼의 말.
“엘란두르의 비기를 뛰어넘는 무언가를 대공자께 알려드릴테니까요.”
레이첼의 얼굴엔 어떤 추악(醜惡)함이 걸려있었다.
#
샤를롯 제국의 국경 너머 어둠의 숲 깊숙한 곳.
사아아아아아─!
울창한 숲을 가로지르며 한줄기 어둠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순식간에 스쳐지나가는 주위의 배경.
띠링!
일순간 들려온 경쾌한 알림음에 어둠이 멈칫, 자리에 멈춰섰다.
이윽고 어둠의 흩어지며 시안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마혼무영보를 밟으며 빠르게 이동 중이었던 시안.
“뭐지?”
시안은 품 속에서 스마트 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확인한 화면.
[초월(超越) 장비를 제작이 완료되었습니다.]
그건 초월 등급의 방어구가 완성되었다는 시스템의 알림창이었다.
착용자의 인과에 맞게 제작된다면서 빛무리를 터트리고만 있었던 방어구.
시안이 수인족들의 왕국을 확인하고자 떠날 때까지도 계속 빛무리만 터트리고 있었다.
해서 시안은 어쩔 수 없이 루벤에 두고 왔던 참이었다.
“지금 완성되었나보네.”
아무래도 그게 지금 막 완성이 된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초월(超越) 장비 두 번째 세트 효과가 적용됩니다.]
[초월(超越) 장비가 성명절기(成名絶技)로 변화합니다.]
새로운 세트 효과가 적용된다는 알림창이 떠올랐다.
“성명절기···?”
그 효과는 다름 아닌 성명절기로의 변화였다.
뜻 풀이만 보자면··· 대표하는 어떤 기술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시안을 대표하는 기술 혹은 시안만이 할 수 있는 기술.
이 정도로 해석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모바일 영주에서 말하는 성명절기는 조금 다른 의미인 것 같았다.
[장비의 이름을 지어주세요.]
“장비의 이름을 지어달라는 건···.”
아무래도 시안을 대표하는 무구를 의미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아르나이즈들처럼 인스티즈(Insitz)하면 엘로디.
조디악 소드(Zodiac Soward)하면 샤를롯.
단순한 무기의 이름만으로 주인의 존재까지 상징하는 것.
모바일 영주에서 성명절기(成名絶技)라 함은,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한 마디로 고유 무기라 할 수 있겠다.
초월 장비로 진화하면서 이제 시안 또한 그런 고유 무기를 갖게 되는 것 같았다.
다만.
“뭐로 하지?”
시안은 생각해둔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 전에는 그냥 SS등급의 검.
혹은 SSS등급의 검과 같이 등급으로밖에 부르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고유 무기의 이름을 지으라니.
“음···.”
시안은 상당히 난감했다.
꽤나 깊이 이어지는 고민.
“마혼수라검으로 할까?”
가장 무난한 것은 역시나 마혼수라검이었다.
시안을 상징하는 검술이기도 했으니까.
“역시 안되겠지.”
하지만 금방 고개를 저었다.
초월 등급의 검이야 마혼수라검으로 지어도 큰 문제는 없었다.
오히려 마혼수라검이 딱 알맞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안은 방어구까지 이름을 지어야했다.
초월 등급의 검의 이름이 마혼수라‘검’ 이니, 자연스레 방어구의 이름은 마혼수라방어구.
“마혼수라방어구가 뭐야.”
그 뭔 네이밍 센스란 말인가.
“마혼수라갑옷··· 도 이상하네.”
어감은 물론 뜻도 굉장히 이상했다.
마혼수라, 라는 것 자체가 영 어울리지 않았다.
“그냥 대충 지을까.”
잠깐 생각했지만 역시나 금방 고개를 저었다.
이 무구들은 시안을 상징하는 성명절기였다.
어쩌면 먼 훗날, 아르나이즈들의 무구들과 같이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도 있었다.
그런 무구의 이름이 마혼수라방어구다?
그럼 신화 속의 이야기에서 등장한다면.
[거대한 파력의 파동. 그러나 시안의 마혼수라방어구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이렇게 이야기가 적힐 것이 아닌가.
“절대 안돼.”
절대로 대충 지을 수가 없었다.
“음···.”
시안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루벤의 검? 루벤의 방어구? 그것도 좀 그런데···.”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
“그러고보니, 초월 장비 스킬들의 이름이 꽤나 멋있었는데.”
다름 아닌 멸살(滅殺)과 불멸(不滅).
각각 그에 걸맞는 효과를 지닌 초월 스킬들이었다.
“그 초월 스킬들의 이름을 따서 지으면 안 되나?”
그러니까 검의 이름은 멸살(滅殺).
방어구의 이름은 불멸(不滅).
“나쁘지 않은데?”
이렇게 보니··· 꽤 괜찮았다.
아니, 솔직히 멋있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의 고민.
“검의 이름은 멸살. 방어구의 이름은 불멸로 해야겠다.”
시안은 금방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그렇게 시안은 떠오른 알림창을 터치했다.
꾹, 하는 터치와 함께 뒤바뀐 화면.
이내 대륙어로 된 자판이 화면 위로 떠올랐다.
지난 날, 고객센터에 문의할 때 사용한 자판과 같은 것이었다.
시안은 능숙하게 손가락을 움직여 각각 멸살과 불멸의 이름을 새겨넣었다.
[멸살(滅殺)의 이름이 각인됩니다.]
[불멸(不滅)의 이름이 각인됩니다.]
그러자 떠오르는 시스템의 알림창.
그와 동시에 띠링! 모바일 영주의 알림창이 재차 떠올랐다.
《어마낫 세상에! 성명절기를 만드셨다고요!》
《각 차원에서도 극에 달한 이들만이 얻을 수 있다는 성명절기를요!》
《본래라면 이리 까무러치고, 저리 까무러쳐도 이상하지 않을 일!》
《하지만 당신이 얼만큼의 인과를 쏟아부었는지 알고 있다는 말씀!》
띠링!
《그러니 이번 호들갑은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닷!》
갑자기 울화가 치미는 건 무슨 이유일까.
시안은 울컥하려다가 금방 한숨을 내쉬었다.
《성명절기라 함은 당신을 상징하는 무구라 할 수 있죠!》
《당신의 인과가 새겨진 전 차원에 단 하나뿐인 무구!》
《시그니처~ 무구!!》
《당신의 인과가 새겨져있기에 어느 시간대이든, 어느 차원이든.》
《당신이 있는 곳이 그 어디든! 무구들은 당신의 부름에 응한답니다!》
.
.
“내가 어디에 있든 부름에 응한다고?”
현재 초월 등급의 방어구··· 그러니까, 불멸은 루벤에 있었다.
그리고 현재 시안은 루벤에서 제법 먼 거리를 온 상태였다.
모바일 영주의 말대로라면 루벤에 있는 불멸을 불러올 수 있다는 뜻.
“한 번 해볼까?”
시안은 바로 성능을 실험해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하는 거지?”
이름을 부르면 되는 건가?
아니면 속으로 생각하면 되나?
시안은 고민 끝에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불멸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물론 어떻게 생겼는지 아직 알지 못했다만─.
바로 그때.
사아아아아─!
시안의 전신으로 갑자기 짙은 어둠이 피어올랐다.
시안이 터트린 마기가 아닌 다른 무엇.
이내 어둠이 뭉쳐지며 시안의 전신 위로 무언가 입혀졌다.
가슴부터 시작해 어깨와 다리 그리고 얼굴까지.
투구까지 완벽히 겸비한 칠흑의 풀 플레이트 갑옷이 입혀졌다.
시안은 손을 내려다보며 불멸의 형태를 살폈다.
짙은 어둠을 베이스로 황금빛이 겸비된 갑옷.
정말로 불멸(不滅)의 이미지가 떠오를 법한 멋드러진 갑옷이었다.
“오.”
절로 새어나오는 감탄.
“근데 이거··· 평소에 착용하기엔 좀 그런데.”
갑옷 자체가 불편한 것은 아니었다.
풀 플레이트 갑옷인지도 모를 만큼 가볍고 또 활동하기 편했다.
그러나 보이는 모습까지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전투 할때야 더없이 좋겠다만 평소에는 착용하기가 힘들었다.
어딘가에 쳐박아두었다가 전투 때마다 불러와야하나 싶은 그때.
사아아아아─!
다시 한 번 어둠이 피어나며 갑옷의 형태가 변형되었다.
그리고 활동하기 편한 흉갑의 형태로 자리 매김했다.
아무래도 원하는 형태로 변형할 수 있는 기능까지 있는 듯 싶었다.
“오!”
과연 초월 등급의 장비라 할 수 있었다.
“잠깐, 그럼 멸살도 되려나?”
불멸과 같은 초월 세트인 멸살.
시안은 곧장 인벤토리에서 멸살을 꺼내들었다.
칠흑의 검신과 더불어 단조로우면서도 서늘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멸살의 검.
시안은 멸살의 검자루를 가볍게 말아쥐었다.
그리고 잠깐 고민을 한 후.
“흐읍!”
있는 힘껏, 멸살을 앞으로 내던졌다.
그러자.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
내던져진 멸살이 전방위를 폭사시키며 쏘아져나갔다.
어마어마한 힘이 터져나오며 앞선 숲의 풍경을 뒤집어버리고 있었다.
박살이 나다못해 아작이 나버리는 숲의 풍경.
“아, 맞다···.”
멸살은 초월 등급의 검이었지.
시안은 그때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아무도 없으니 다행이지.”
루벤에서 했다면 정말 큰일날 뻔했다.
뭐, 어쨌든.
쏘아진 멸살은 저 멀리,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다만,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폭음은 여전히 숲을 박살내고 있는 것 같았지만··· 뭐, 아무튼.
시안은 오른손을 길게 펼쳐보였다.
그리고 던져버린 멸살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그 순간.
파지직─!
뻗은 시안의 손으로 짙은 검은색 전류가 튀어올랐다.
이윽고 파지지직─!
검은색 전류는 시안의 손을 휘감았다.
이내 전류 사이로 어떤 형체가 잡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안의 손에 느껴지는 어떤 감촉.
던져버린 멸살이 어느샌가 시안의 손에 쥐어져있었다.
“오!”
시안은 정말로 순수한 감탄을 터트렸다.
언제, 어디서든 시안의 부름에 응답하는 멸살과 불멸.
이 기능은 정말이지 활용도가 무궁무진했으니까.
당장 시안이 던져버린 멸살만봐도 그러했다.
이러면 원거리의 적은 이제 문제가 되지 않았으니까.
검을 던졌다 다시 회수하면 그만이지 않은가.
“혹시 유도 기능은 없나?”
그런 기능까지 있다면 그야말로 사기나 다름없었다.
물론 진짜로 있는지는 확인해봐야 알겠지만.
“역시 초월등급인가.”
확실히 강화를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지지지직─!
일순간 멸살의 주위로 다시 한 번 검은색의 전류가 튀었다.
이내 팔찌의 형태로 변하더니 시안의 손목 위로 착, 달라붙었다.
불멸과 마찬가지로 형태 변환까지 가능한 모양.
“전투 상황이 아니면 알아서 바뀌는 건가.”
정확히는 시안의 의지에 반응하는 것 같았다.
원래는 멸살에 이런 기능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성명절기가 되면서 위력이 더해지고, 추가 기능까지 탑재된 것 같았다.
“역시.”
강화를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2억 5천만 골드가 전혀 아깝지가 않았다.
“이러면 듀라크는 진짜 문제 없겠는데?”
여기에 세미르가 흑석을 만들수만 있다면.
그로써 무한정으로 멸살과 불멸을 강화할 수 있다면.
“악마 7군주도 별 문제 없을지도···?”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그럴지도 몰랐다.
괜시리 새어나오는 웃음.
“그럼 다시 수인족의 왕국을 찾으러 가볼까.”
사아아아아아─!
시안은 마혼무영보를 밟으며 어둠의 숲을 가로질러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