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 황녀와 성녀(2)
띠링! 띠리리링!
모바일 영주의 알림음은 거진 발작을 하듯 계속 들려왔다.
띠리리리리리리리링!!!!
농담이 아니라 모바일 영주가 정말로 발작하고 있는 것만 같은 알림음이었다.
하지만 시안은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일단 콘라드 앞에서 모바일 영주를 신경쓸 수 없었을 뿐더러.
지금 눈앞에 놓인 2장의 전표.
정확히는 한 장의 전표와 한 장의 어음.
[250,000,000 G]
[100,000,000 G]
‘아아···!’
이건 시안도 발작하지 않을 수 없는 금액이었으니까!
도합 3억 5천만 골드라는 천문학적인 금액.
이 금액 앞에서 어찌 제정신을 차릴 수 있을까!
시안의 몸이 저도 모르게 떨려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니, 아니지.’
시안은 금방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다름 아닌 이 금액의 사용처.
그 사용처를 떠올리는 순간 떨림이 가라앉았다.
일단··· 가장 먼저 초월 등급의 방어구로 강화해야했다.
『<불멸(不滅)> - 사용 불가
[효과] - 시전 시, 5초 간 착용자에게 가해지는 모든 피해를 무효화 시킵니다.』
-해당 효과 적용 시, 착용자가 주는 피해 또한 모두 무효화 됩니다.
-해당 효과는 24시간 마다 한 번 사용 가능합니다.
-해당 효과는 초월(超越) 등급의 갑옷이 있어야만 발동 가능합니다.
.
.
.
다름 아닌 초월 등급 방어구가 갖는 초월(超越) 스킬.
저 말도 안되는 스킬과 더불어 초월 등급 세트 장비의 효과까지 받을 수 있었다.
아직 세트 효과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초월 스킬만 보더라도 평범하지 않을 것은 분명했다.
해서 듀라크와 대적해야할지도 모르는 지금.
또 엘란두르가 악마 7군주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를 지금.
‘강화는 해야돼.’
방어구 강화는 반드시 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강화에 들어가는 비용이··· 한 두푼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확률이었기에 알 수는 없었다.
초월 등급의 검처럼 한 번에 강화에 성공한다면야 더할나위 없이 좋았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정말로 만에 하나라도 모르크루의 기운을 100% 찍게 된다면···.
“······”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미래였다.
여기에 엘란두르 전쟁에 대비해서 현질해야하는 것들하며.
또 그 전쟁에 소모되는 물자 비용하며.
‘젠장.’
솔직히 그리 많은 금액이라 볼 수 없었다.
‘많지가 않아···?’
시안은 순간 이게 맞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3억 5천만 골드가 많지가 않다니?
4인 가족이 대략 97만 년을 숨만 쉬고 살아갈 수 있는 금액이?
“······”
시안은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멍하니 자리에 앉자있자니.
“그건 그렇고 자네.”
콘라드가 나지막히 시안을 불렀다.
정신을 차리고 바라본 시야.
그곳엔 콘라드가 묘한 표정으로 시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싶은 것도 잠시.
“신성 제국의 성녀와는 대체 무슨 사이인가?”
“예? 갑자기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시안은 뭔가 싶었다.
아리아와 무슨 사이냐니?
“내 듣자하니··· 성녀와 선물을 주고 받는 돈독한 사이라고 들었네만.”
이어진 콘라드의 말.
아무래도 아까 전 귀빈실에서 있었던 일.
그 일이 콘라드의 귀에 들어간 듯 싶었다.
‘그거 얼마 되지도 않은 일인데?’
그런데 그건 아까 전의 일이었다.
말 그대로 ‘아까 전’ 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오래되지 않았다.
아무리 길어야 1시간이 채 되지 않은 일.
‘그 사이에 보고가 들어간 건가.’
하여간, 괜히 황궁에서 입과 행동을 조심하라는 이유가 있었다.
뭐, 황족들이 기거하는 공간이니 그럴 수 있었다만.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닐텐데?’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건 거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상당히 의아한 심정도 잠시.
“내 평생 엘레나가 그렇게 초조해하는 건 처음 봤네.”
시안은 금방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그 사이에 엘레나가 다녀간 듯 싶었다.
“자네 설마, 성녀와···.”
“무슨 말도 안되는 말씀이십니까?”
시안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어보였다.
“난 아직 ‘성녀와’ 라는 말밖에 안 했네만.”
그런 단호한 시안의 모습에 콘라드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시안은 여전히 단호한 태도를 일관했다.
“아리아와 이렇고 저런 관계냐. 그리 물으시려는 것 아니셨습니까?”
콘라드가 뭐라 말 할지 뻔히 알고 있었으니까.
역시나 콘라드가 헛기침을 해보였다.
그리고 슬쩍, 시안의 눈치를 살피더니.
“아닌가···?”
넌지시 시안에게 물어왔다.
시안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대체 엘레나가 무슨 말을 했길래 콘라드가 저러는 것일까.
왜 저런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일까.
“절대 아닙니다.”
시안은 단호히 고개를 저어보였다.
뭐, 아리아와 친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딱 그 뿐이었다.
애초에 시안과 아리아는 상극이었다.
마(魔)를 다루는 검사.
신성력을 다루는 성녀.
상극도 이런 상극이 없었다.
아리아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어지럽고 헛구역질이 나오거늘.
뭔 놈의 이렇고 저런 관계란 말인가.
“자네는 아직 짝이 없고, 성녀의 미모가 뛰어난 것은 사실이니···.”
“미모가 뛰어나다고 전부는 아닙니다.”
아무리 초월적인 미모의 여인이라 한들.
역시나 아리아와는 상성이 워낙 좋지 않았다.
“흠··· 지난 번 브라헤 영애도 그렇고. 미인계가 통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만···.”
하지만 콘라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니, 아리아의 초월적인 미모에는 상성 따위가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듣자하니 이번에 성녀와 같이 루벤에 간다고.”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럼 엘레나도 같이 가는 건···.”
“안됩니다.”
시안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건 시안의 문제가 아니었다.
황가의 입장이 상당히 난처해지는 상황이었다.
“제가 엘란두르에 선전포고한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다름 엘란두르와의 전쟁.
현재 루벤과 엘란두르는 전쟁 중인 상황이었다.
듀라크에게 그 사실이 전달되었는지는 모르겠다만.
그건 시간 문제일 뿐, 그 사실이 변하지는 않았다.
그런 상황에 엘레나가 루벤으로 온다?
그러니까 황가의 일원이 루벤에 온다?
아리아야 샤를롯 제국과는 관련이 없는 인물이니 딱히 문제될 것은 없었다.
물론 이 또한 따지고 들면 외교적인 문제로 불거질 수 있는 일이긴 했다만.
어디까지나 따지고 들면이었다.
그러나 엘레나는 아니었다.
존재 자체만으로 어떤 메세지를 전달하는 격.
“그건 그렇긴 하다만.”
콘라드는 살짝, 시선을 내리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엘레나가 많은 걱정을 해서 말이네.”
“황녀님께서 말입니까? 아니, 뭘 걱정하신다는 겁니까?”
“성녀가 자네한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말이네.”
“예? 그건 또 무슨···.”
“그러면서 이 참에 약혼식이라도 올리고 가는 게 어떠냐고 하던데··· 그럼 안심이 될 것 같다고 하더군.”
그리고 이어진 콘라드의 말.
“작위식도 끝났겠다. 급작스럽기는 하다만,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그리고 생각이 어떠하긴 무슨.
“못 들은 거로 하겠습니다.”
시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히 더 있다가는 골치만 아파질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콘라드의 말마따나 작위식도 끝났겠다.
샤를롯의 검술 값도 제대로 받았겠다.
추가로 엘로디의 지식도 팔았겠다.
드래곤의 행방도 어느 정도 파악했겠다.
황궁에서 할 일은 모두 끝난 상황이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시안은 전표를 챙긴 뒤, 그대로 집무실을 나섰다.
#
제국의 수도, 다르칸.
한 대의 휘황찬란한 마차 한 대가 다르칸에서 빠져나갔다.
하얀 늑대의 문양이 그려진 마차.
마차 안에는 마부를 제외한 한 명의 사내와 한 명의 여인이 타고 있었다.
두 남녀는 서로 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로써 묵직하게 내려앉은 마차 안의 분위기.
그렇게 얼마 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작위식은 어떠셨나요?”
여인의 목소리가 마차의 정적을 깨뜨렸다.
백합을 닮은 머리색과 뒤로 곱게 땋인 머리를 한 여인.
황혼 교파의 수장이자 쫓겨난 추기경, 레이첼.
레이첼은 사내의 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설원에 홀로 서있는 우두머리 늑대와도 같은 분위기의 사내.
“원하는 게 뭐지?”
듀라크가 무심한 어투로 레이첼의 물음에 답을 해보였다.
“그 말씀은··· 저와 거래를 하시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겠죠?”
레이첼의 말에 듀라크는 곧장 답을 해오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묵직한 정적이 흘렀고.
또 다시 얼마 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 원하는 것을 말해라.”
듀라크가 끝내 입을 열었다.
레이첼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저희는 현재 성물의 행방을 찾고 있어요.”
“저희? 너말고 다른 이들이 있는 건가?”
그러자 레이첼이 살짝 놀란 눈을 떠보였다.
마치 실수를 했다는 듯, 한 손으로 입을 살며시 막아보였다.
“그건 나중에 차차 말씀드릴게요. 아무튼 저희는 현재 성물을 찾고 있어요.”
듀라크는 가만히 레이첼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듀라크가 혀를 차보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성물이라 함은 무엇을 말하는 거지?”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저희의 힘을 제약하는 물건이에요.”
“힘을 제약한다?”
레이첼은 고개를 한 번 끄덕여보였다.
그러나 단지 그 뿐.
그 이후로 추가적인 말을 해오지 않았다.
듀라크는 그런 레이첼을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걸 찾아달라는 건가?”
“비슷해요.”
“비슷하다?”
“네. 성물의 위치는 이미 알고 있거든요.”
듀라크가 눈을 살짝, 치켜떠보였다.
레이첼은 잠시 뜸을 들이고는 가볍게 입을 열었다.
“수인족들의 왕국.”
그리고 다시 이어진 레이첼의 말.
“수인족들의 왕국에 저희가 찾는 성물이 있어요.”
“수인족들의 왕국은 그 존재가 불명확하다.”
듀라크는 들을 것도 없다는 어투로 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수인족들의 왕국은 전설로만 전해지는 곳이었다.
애초에 수인족들이 존재하는지도 불명확했다.
과거에는 인간들과 교류가 활발했다고는 하는데···.
무려 수 백년도 전의 이야기였다.
그 이후로 수인족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세상과 단절한 엘프들조차 간혹 모습을 드러내건만.
수인족들은 그러한 모습조차 일체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수인족들의 왕국은 전설처럼 내려져 오고 있었다만.
“아뇨. 수인족들의 왕국은 확실해 존재해요.”
레이첼은 어째서인지 확신을 하고 있었다.
“다만, 어디에 있는지는 저희도 잘···.”
그리고 들려온 레이첼의 중얼거림.
그때서야 듀라크는 아까 전, ‘비슷하다’ 라는 레이첼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수인족들의 왕국을 찾아달라?”
듀라크는 입을 열었고.
레이첼은 정확히 짚었다는 듯 작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수 백년도 전에 사라진 수인족들의 흔적.
지금 와서 그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찾지 못할 것은 또 아니었다.
“엘란두르의 정보력이라면 가능하지 않으신가요?”
엘란두르는 역시나 엘란두르였으니까.
제국을 떠받치는 두 기둥 중 하나.
제국 동부를 지배하는 엘란두르는 단순히 힘만 강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쉽지는 않겠다만 정말로 수인족들의 왕국이 실존한다면 충분히 찾아낼 수는 있었다.
다만.
“우리가 얻는 것은 뭐지?”
아무런 대가 없이 할 일은 아니었다.
가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
레이첼 또한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는 듯.
“시안과 루벤.”
듀라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 둘을 확실히 짓밟을 수 있게 도와드릴게요.”
“그건 너희들의 도움이 없어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듀라크가 코웃음을 치며 답을 해보였다.
물론 직접 시안을 확인해 본 바.
생각을 어느 정도 고쳐먹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자신은 여전히 대륙 제 1의 검이었고.
엘란두르는 여전히 제국을 떠받치는 두 기둥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들려오는 레이첼의 말.
“누누히 말씀드린 것이지만, 지금의 엘란두르로는 힘들답니다.”
그건 듀라크의 심기를 건드리는 어떤 도발과도 같았다.
듀라크의 기세가 일순간 피어올랐다.
의지만으로 존재를 죽이는 끔찍한 살의가 마차 안을 잠식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그리고, 엘란두르의 오랜 숙원을 완성시켜드릴게요.”
다시 들려온 레이첼의 말.
듀라크의 기세가 일순간 누그러졌다.
바라보는 시선.
“무얼 말하는 거지?”
“완성되지 않은 엘란두르의 비기 말이에요. 그걸 저희가 완성시켜드릴 수 있다면··· 충분한 거래가 되지 않을까요?”
“헛소리.”
듀라크는 단호하게 레이첼의 말을 일축시켜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저건 정말 말이 안되는 일이었으니까.
수 백년 동안 이루지 못한 엘란두르의 숙원.
당대 천재라 불리던 선대의 모든 엘란두르가 실패한 일이었다.
하물며 듀라크 또한 어찌하지 못했다.
카이는 혹시 가능하지 않을까.
제국의 별이자 자신을 뛰어넘을 천재, 카이.
그런 기대를 품고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기대일 뿐이었다.
어떻게 레이첼이 엘란두르의 비기가 완성되지 않음을 알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건 알고 말고의 문제가 아닌 일이었다.
“헛소리를 할 것이라면, 없던 일로 하겠다.”
듀라크는 단호하게 레이첼의 말을 일축했다.
그리고 그런 듀라크의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것일까.
“아무래도 후작께서는 잘 모르시는 모양이네요.”
레이첼이 다시 한 번 말을 이었다.
“엘란두르의 비기가, 정말 엘란두르의 비기가 아니라는 것을요.”
“그게··· 무슨 뜻이지?”
듀라크는 저도 모르게 눈을 치켜떠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레이첼의 말.
그건 절대로 레이첼이 알아서는 안되는 사실이었으니까.
듀라크 또한 정확한 사정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엘란두르의 가주들에게만 전해지는 어떤 이야기.
듀라크는 엘란두르 비기와 관련한 어렴풋한 비화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엘란두르의 가주가 아니면 절대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사벨은 물론, 카이조차 알지 못하는 이야기.
그런데 지금.
“오래 전의 이야기죠. 그때 아마··· 황제가 피살되며 어떤 무언가가 소실되었다죠?”
레이첼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네가 그걸···?”
“그때 황제가 어떻게 피살되었을까요? 황제가 피살될 정도로 제국에 닥쳐온 위기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리고 그때 소실된 무언가는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요?”
이어지는 레이첼의 말.
“특히나 저희들이 그 비기를 직접 마주한 적이 있다면, 믿으실 수 있으신가요?”
“······”
“정말이지··· 지독한 기억이었죠. 뭐, 엄밀히 따지면 '제' 기억은 아니지만요.”
레이첼이 싱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지금 알려드릴 수 있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듀라크는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다시 한 번 내려앉는 정적.
“······ 어떻게 하면 되지?”
듀라크의 입이 끝내 열렸다.
“일단 수인족들의 왕국을 찾는데 힘을 집중해주세요. 나머지는 그 이후에 이야기를 하도록 하죠.”
“시안. 그 놈은 어떻게 할 생각이지? 이대로 내버려두나?”
“어쩔 수 없어요. 지금은 성물을 찾는 게 우선이거든요. 그러니 루벤과의 전쟁은 지금 당장 피해주세요.”
성물을 찾으면서 전쟁까지 할 수는 없는 노릇.
무엇보다 레이첼이 살펴본 바.
여러모로 엘란두르의 사정도 좋지 않았다.
그러니까 당장 전쟁을 벌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해서 지금 당장 루벤과의 전쟁은 피해야했다.
물론 저쪽에서 먼저 전쟁을 걸어온다면···.
조금··· 아니, 상당히 곤란했다.
그러면 계획이 상당수 꼬여버리니까.
하지만 그럴 일은 결코 없다 할 수 있었다.
“설마하니 먼저 전쟁을 걸지는 않을테니까요.”
그런 미친 짓을 할 리가 만무했으니까.
그리고 듀라크 또한 레이첼의 의견에 동의했다.
여러모로 시안의 수작에 놀아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엘란두르가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엘란두르는 엘렌두르.
반면에 루벤은 어둠의 숲에 위치한 작은 영지.
아무리 시안이 괄목할 성장을 했다 하더라도.
루벤의 전력이 생각보다 강하다 하더라도.
먼저 전쟁을 거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여전히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엘란두르였다.
휘두르냐, 휘두르지 않느냐를 결정하는 것도 역시나 엘란두르였다.
그러니 그냥 내버려두면 되었다.
그냥 내버려두면 시안은 지레 겁을 먹어 꿈쩍도 안할 터.
그 시간 동안 이쪽은 자유로이 움직이면 되었다.
시안이 거북이처럼 등껍질에 숨어지낼 동안 성물을 확보하면 되었다.
그리고 그때가 된다면···.
모든 것이 끝이 난다.
레이첼은 화사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바로 그때.
“정지! 정지!”
마차 밖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다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 또한 같이 들려왔다.
뭔가 싶은 것도 잠시.
이내 듀라크와 레이첼이 타고 있던 마차가 멈춰섰다.
마부는 듀라크의 명령이 없음에도 마차를 세워버렸다.
그 사실에 듀라크는 분노를 해보였지만.
“황가에서 전해온 서신입니다!”
밖에서 들려온 말에 그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듀라크는 천천히 마차 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드래곤의 문양이 그려진 깃발을 펄럭이며 전령이 서있었다.
그리고 황가의 전령은 곧 황제의 전언을 전달하는 자.
듀라크가 예를 표하려는 것도 잠시.
“폐하의 전언이 아닙니다. 그러니 예를 차리실 필요가 없습니다.”
전령이 다급히 듀라크에게 말해왔다.
그러면서 전령은 품 속에서 한 장의 서신을 꺼내 듀라크에게 건넸다.
“그럼 전 이만.”
그리고는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전령은 다시 말을 몰아 길을 되돌아갔다.
그렇게 순식간에 멀어진 전령.
전령이 멀어진 것을 확인한 것일까.
“무슨 일인가요?”
레이첼이 마차 밖으로 나왔다.
듀라크는 그런 레이첼을 한 번 바라보고는 봉인된 서신을 뜯어보았다.
그리고 그 안에 적혀있는 내용.
“영지전?”
그건 다름 아닌 영지전에 관련한 내용이었다.
정확히는 엘란두르에게 누군가 영지전을 선포했다는 것.
세상에 어떤 미친 놈이 그런 짓을 하겠냐만은.
서신의 마지막에는 그 미친 놈의 이름이 떡하니 적혀있었다.
“시안 루벤 백작···?”
레이첼이 중얼거리듯 그 이름을 내뱉었다.
그리고 이 이름과 이 서신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
“이, 이러면···!”
레이첼의 표정이 크나큰 당황으로 물들어갔다.
#
시안의 작위식이 끝난 이후.
제국 전역은 그야말로 발칵, 뒤집혀버렸다.
일단 시안의 작위식.
성녀의 축복이 더해진 그 장엄한 작위식은 사람들에게 색다른 충격을 안겨주었다.
“시안 백작의 작위식이 그렇게 대단했나?”
“말도 마! 특히나 성녀님의 축복이 행사장 전체를 가득 메운는데···.”
“난 진짜 여신님이 강림한 줄 알았다니까!”
유례를 찾아볼 수 없었던 장엄함과 웅장함.
현 황제, 발루아가의 즉위식도 이렇지는 않았다.
결코 일개 귀족의 작위식이라 생각될 수 없는 행사였고.
또 그렇기에 제국에서 시안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작위식일 뿐이었다.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화려한 작위식이었지만, 솔직히 이렇게까지 떠들썩해질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제국 전체가 발칵, 뒤집힌 이유.
그건 역시나 작위식 때문이 아니었다.
“시안 백작이 엘란두르에 영지전을 선포했다고?”
다름 아닌 시안의 선전포고.
“뭐, 뭐라고? 그게 정말 사실인가?”
“예끼, 이 사람! 농담도 정도 껏 해야지.”
“미치지 않고서야 시안 백작이 그런 일을 할리가.”
“에이, 난 또 진짜인 줄 알았네.”
당연히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그냥 루머로서 치부하며 웃어넘겼다.
세상 어떤 미친 놈이 엘란두르에게 전쟁을 선포한단 말인가.
그건 신종 자살 방법이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루벤 가(家)에서 엘란두르에 선전포고를 했다며?”
“나도 그 소문을 듣긴 했네만···.”
루머치고는 그 소문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사그라들기는 커녕, 점점 그 살을 찌워나갔다.
마지막으로 황궁에서 공식적인 입장이 나왔을 때.
“지, 진짜 였다고···?”
“미친···.”
“시안 백작이 정녕 미친 게··· 아닌가?”
사람들은 그때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할 수 있었다.
“아, 아니 그보다 왜···? 시안 백작은 본디 엘란두르가 아니었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소문이 있었다만···.”
신생 가문 루벤 가(家).
제국을 지탱하는 두 기둥 중 하나 엘란두르 가(家).
두 가문 간의 전쟁.
그건 단순히 두 가문의 전쟁이라 치부할 것이 못 되었다.
“지, 지금 자작님이 어디 계신가!”
“당장 가신들을 소집하게! 지금 당장!
“행정관 이상의 관리직들을 모두 내 방으로 오라 하게!”
제국의 정세가 순식간에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제국의 정세가 들썩이다 못해 뒤집히고 있는 가운데.
루벤 인근 영역에 위치한 어둠의 숲.
“서, 성녀님··· 여기가 정말 맞는 걸까요···?”
로라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아리아를 보좌하는 여사제, 로라.
“그, 글쎄···?”
아리아는 그런 로라의 물음에 확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아리아의 눈에 보이는 풍경.
그러니까 끝없는 마기로 들끓는 어둠의 숲.
“나, 나도 잘···.”
도무지 영지가 있을 곳이라 생각되지 않았으니까!
음침하다 못해 사악한 분위기하며.
당장이라도 몬스터들이 튀어올 것같은 불안감하며.
그리고 사람 하나 죽어나가도 모를 풍경까지.
영지는 무슨 폐허라도 있으면 다행이었다.
어딜 봐도 사람이 살고 있는 집 같은 게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렇기에 지금 이건 집들이라 생각될 수가 없었다.
인신매매 혹은 납치 및 감금.
그런 범죄 행각의 만상이 이루어지는 곳.
정확히는 그런 범죄들이 이루어지기 직전의 풍경이었다.
“설마 시안 공자님이···.”
“서, 설마.”
아리아는 아닐거라 고개를 저어보였다.
하지만 왜인지 불길한 생각이 드는 건 무엇 때문일까.
괜히 집에 가보고 싶다고 했던 걸까?
지금이라도 돌아가야하는 건 아닐까?
설마하니 시안이 나를 상대로···.
아리아의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이 휘몰아쳤다.
“뭐해. 빨리 안 오고.”
바로 그때 들려온 시안의 목소리.
시안은 저 멀리, 앞서 있는 곳에서 아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놓치지 말고 빨리 와. 여기서 길 잃으면 답도 없다.”
그리고는 다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더니.
이내 숲의 어둠으로 그 모습을 감춰버렸다.
아리아와 로라.
둘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일순간 어둠의 숲 풍경의 마기가 들끓기 시작했다.
그에 반응하여 아리아의 신성력이 강력하게 경고를 보내왔다.
역사상 가장 강대한 신성력을 지닌 아리아.
하지만 어둠의 숲이 괜히 제국마저 포기한 금기의 영역이 아니었던 것일까.
“야, 야···! 같이 가!”
“성녀님! 저 버리고 혼자 가지 마요!”
아리아와 로라는 사라진 시안을 쫓아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