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 황녀와 성녀(1)
갑자기 소리쳐오는 엘레나와 아리아.
‘뭔데?’
시안은 순간 뭔가 싶었다.
뭔가 싶은 것을 떠나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저는 왜 장신구 선물 같은 걸 안해주시는 거죠?”
“나는 왜 너네 집에 초대안해주는 건데!”
경쟁이라도 하듯 소리쳐오는 두 여인의 말.
장신구 선물?
집으로 초대?
‘진짜 뭔데?’
시안은 정말이지 이게 뭔가 싶었다.
멍한 정신과 시야.
그런 시안을 뒤로한 채 엘레나와 아리아가 서로를 한 번 바라봤다.
“집들이보다는 선물이 더 좋지 않냐고 하시더니··· 내심 부러우셨던 것 같으시네요. 성녀님?”
“설마요. 그냥 한 번쯤 가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러는 황녀님은 집들이보다 선물이 더 좋다고 생각하신 것 같으신데요?”
아니, 노려봤다··· 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아까보다 분위기가 더 묘해졌다.
시안은 그런 둘을 가만히 지켜봤다.
둘이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만.
‘장신구라면···.’
장신구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시안은 엘레나에게 성큼, 걸음을 옮겼다.
“여기 빌려주신 목걸이입니다. 덕분에 원하던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황녀님.”
다름 아닌 아까 받은 엘레나의 목걸이.
뜬금없이 장신구라 함은 이것밖에 없었으니까.
시안은 그 목걸이를 꺼내 엘레나에게 건넸다.
그런데 대체 왜일까.
“이거 말고요!”
엘레나가 짐짓 화난 얼굴로 소리쳐왔다.
정확히는 약간 서운한 듯한 얼굴로 시안을 바라봤다.
‘왜 이래?’
시안은 진짜 뭔가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거 말고라니?
“이건 황녀님께서 빌려주신 목걸이입니다만?”
“아, 아. 그, 그게···.”
그러자 엘레나가 살짝, 놀라보였다.
그리고 방금 전, 자신의 행동을 자각한 것일까.
엘레나의 얼굴이 약간 붉어져있었다.
“죄송···해요.”
엘레나는 조심스레 시안이 건네는 목걸이를 받아들었다.
또한 어딘가 부끄러운 것인지 시안의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상황인걸까.
그 당돌하던 엘레나는 또 저러는 걸까.
“이게 아니라면, 말씀하신 장신구는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 그게···.”
엘레나가 당황하며 말을 흐려보였다.
하지만 내심 물어주기를 바라고 있던 것일까.
“성녀님이 차고 계신··· 장신구 말이에요.”
엘레나가 못 이기는 척, 나지막히 답을 해보였다.
그리고 그때서야 시안은 장신구의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아리아가 차고 있는 장신구.
지난 날, 시안이 뮤리엘의 유적에서 발견한 장신구였다.
뮤리엘이 남긴 유산 중 하나이자.
살아생전 뮤리엘이 사용하던 장신구.
“시안 백작님이 주셨다길래···.”
시안은 당시에 그 장신구를 아리아에게 준 적이 있었다.
딱히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저 장신구는 신성력을 증폭시켜주는 기능이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시안이 착용하고 싶어도 착용할 수가 없었다.
마(魔)를 다루는 시안이 착용하면 그대로 구역질을 해버릴 테니까.
그렇다고 다른 이에게 팔아넘기기에도 영 께름칙했었다.
어쨌거나 뮤리엘이 살아생전 사용하던 장신구.
그것도 특별하다 못해 엄청난 기능이 있던 장신구였으니까.
해서 당시에 아리아가 고생도 했었던지라.
시안은 아리아에게 저 장신구를 준 적이 있었다.
“그것도 선물로 주셨다고.”
그것도 공짜로 말이다.
‘그거 공짜는 아니었는데.’
그런데 사실 이게 공짜는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아리아가 1,200만 골드 가량을 시안에게 주었으니까.
명분은 아리아의 부탁을 들어준 보상이라고는 했다만.
엄밀히 따지면 장신구 값도 포함되어 있는 금액이었다.
그렇기에 사실 공짜로 준 선물은 아니었다.
“제게는 선물 같은 거 해주신 적이 없으시고···.”
그런데 엘레나가 그런 세세한 사정까지 알리가 있나.
뭐, 어쨌든.
엘레나는 그것이 꽤나 서운했던 모양이었다.
‘그럴 수는 있다만···.’
아니, 아니지.
그게 저렇게까지 서운한 일인가?
‘뭐··· 생각해보면 황녀님께 따로 선물을 드린 적이 없긴 하다만.’
돈이나 뜯으면 뜯었지 선물로 무언가를 준 적은 없었다.
여전히 저렇게까지 서운해할 일인가 싶었지만.
“원하신다면 하나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서운해한다면 못해 줄 이유는 없었다.
그 뭐 어려운 일이라고.
“정말요?”
“네. 아리아가 착용한 장신구만큼은 아니지만요.”
그도 그럴 것이 저건 뮤리엘이 살아생전 착용하던 장신구였으니까.
그러니까 신장(神匠)이라 불리던 아르나이즈, 모르크루가 만든 장신구였다.
현재 대륙에서 모르크루의 실력을 뛰어넘을 세공사가 어디에 있을까.
그나마 근접하는 이가 있다면 딱 한 명.
‘세미르한테 부탁하면 되니까.’
망치 모루 부족의 족장이자, 모르크루의 후손인 세미르.
모르크루만큼은 아니더라도 그와 버금가는 장신구를 만들 수 있을 터였다.
“정말이죠? 진짜 정말이죠?”
시안의 말에 엘레나가 화색하며 소리쳤다.
더없이 기뻐하는 미소를 지으며 어린 아이처럼 좋아라했다.
“물론이죠. 그보다 얼─.”
시안은 정말이지 가까스로 목구멍 근처에서 틀어막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얼마?’ 라고 외치려던 것을 꾹 참아낼 수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어떤 치명적인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여기서 얼마라고 내뱉으면 죽는다!
시안은 필사적으로 입을 틀어막을 수 있었고.
다행히 엘레나는 듣지 못한 것인지 저 혼자 좋아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아리아.
“나도!”
아리아가 갑자기 나서며 시안에게 소리쳐왔다.
“너도? 넌 장신구 있잖아. 무엇보다 네 미모에 어울리는 장신구는 이제 만들 수도 없어.”
그도 그럴 것이 아리아의 저 초월적인 미모.
저 미모에 어울리는 장신구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신장(神匠)이라 불리던 모르크루였기에 가능했던 일.
그러니까 대륙에서 저 장신구가 유일하다고 봐야했다.
뭐, 세미르라면 어찌 가능할 수는 있겠다만.
‘황녀님 것보다 돈이 배로는 들어가겠지.’
그리고 시간도 어마어마하게 들어갈 터.
그걸 공짜로 달라?
시안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어보였다.
그리고 그런 시안의 말을 듣던 아리아.
아리아는 괜시리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도 그럴 것이 ‘네 미모에 어울리는 장신구는 이제 만들 수도 없어.’ 라는 시안의 말.
그건 ‘이 세상에서 너보다 예쁜 건 없어.’ 라는 말과 다름 없지 않은가.
아리아는 저도 모르게 표정이 새초롬해졌다.
하지만 금방 아무렇지도 않은 척 시안에게 말했다.
“장신구 말고. 나도 너네 집 갈래.”
“응? 장신구 말고 우리 집? 설마 루벤을 말하는 거야?”
아리아는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리고 시안은 고민할 것도 없이 답을 해보였다.
“안돼.”
“왜!”
“왜긴 왜야. 안되면 안되는 줄 알아.”
시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리아가 루벤에 온다니.
그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란 말인가.
“황녀님은 되는데 왜 나는 안되는건데?”
“응?”
“황녀님은 너네 집에 가봤다며.”
뭐야, 그런 것까지 이야기를 했어?
대체 둘이 무슨 이야기를 했던 거야?
시안은 저도 모르게 어처구니 없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뭐, 아리아의 말마따나 엘레나는 루벤에 온 적이 있었다.
“네가 직접 초대까지 했다면서.”
그것도 시안이 직접 초대까지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까 별 다른 대가를 요하지 않고 루벤으로 초대를 했었다.
그런데 사실 이것도 엄밀히 말하면 대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단 당시 시안은 엘란두르의 예산을 횡령한 상황.
엘란두르의 감시를 떨쳐내고자 엘레나를 방패막이로 이용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시안은 그 전에 이미 2천만 골드를 대가를 받았었다.
그러니까 엘레나가 루벤에 오기로 한 대가로 말이다.
“나는 맨날 안된다고 했으면서···.”
그런데 아리아가 그런 세세한 사정까지 알리가 있나.
아무래도 그것이 꽤나 서운했던 모양이었다.
‘그럴 수는 있다만···.’
아니, 아니지.
이게 저렇게까지 서운해할 일인가?
‘뭐, 생각해보니 아리아가 루벤에 온 적이 없긴 하네.’
오고 싶다고, 가보고 싶다고 아리아가 몇 번 말을 한 적은 있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시안이 매번 거절했었다.
그렇기에 저렇게까지 서운해한다면야···.
한 번쯤 루벤에 와보는 것도 괜찮겠다만.
“그래도 안돼.”
안되는 건 안되는 것이었다.
이건 좀··· 그랬다.
그러니까 엘레나에게 장신구를 만들어주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엘레나는 그냥 장신구만 만들어서 선물해주면 그만이었으니까.
하지만 루벤에 오는 것은 달리 생각해야했다.
그 뭐 어려운 일이라 치부할 것이 아니었다.
그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었지만···.
일단 첫 번째.
‘드래곤을 찾아야 돼.’
시안은 최후의 드래곤을 찾아야만 했다.
평균 수명 1천년의 드래곤.
벌써 1천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한가로이 일을 뒤로 미룰 수가 없었다.
그리고 두 번째.
‘엘란두르와 전쟁도 해야하고.’
시안은 엘란두르에게 선빵을 치겠다고 선전포고를 한 상황이었다.
현재 루벤은 전쟁 발발 직전의 영지.
그런 영지에 타국의 성녀가 온다는 게 말이나 된단 말인가.
여러모로 아리아는 루벤에 오면 안 되었다.
하지만 그런 사정을 아리아가 알리가 있을까.
“왜 나만··· 왜 나만···.”
시안을 바라보는 아리아의 얼굴이 울먹거리듯 일그러졌다.
맑고 투명한 아리아의 눈동자에는 그보다 더 맑고 투명한 무언가가 맺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방울방울 맺혀 흘러내리기 직전.
“됐어!”
아리아가 홱,하니 시안에게서 몸을 돌렸다.
그렇게 시안에게서 등을 돌린 아리아.
아리아는 정말로, 정말로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왜 나만 미워하고. 나만 싫어하고.
왜 나만··· 왜 나만 그렇게 질색하는 건데.
내가 뭘 했다고. 대체 내가 뭐가 그리 못났다고.
난 작위식 축하해준다고 저 먼 타국에서 이렇게 찾아왔는데.
옷도 신경 써서 예쁜 걸로 고르고.
하지도 않던 화장도 해보고.
연회장에서 집적거리는 남자들에게도 친철하게 대했는데.
괜히 너한테 누가 될까봐.
작위식에 폐를 끼치고 또 망쳐버릴까봐.
정말 성질도 꾹, 참았는데.
쟤는··· 쟤는 그런 것도 모르고.
왜 이렇게 나를 싫어하는 건데···.
황녀님한테는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해주면서.
왜 나만··· 왜 나만 이렇게 미워하고, 멀리하는 건데···.
아리아는 정말이지 너무도 서러웠다.
정말 너무도, 너무도 서러웠다.
해서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정말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지만.
아리아는 차오르는 눈물을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아리아의 가녀린 어깨가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너 설마 울어?”
그 순간 뒤에서 시안의 말이 들려왔다.
그리고 저 말이 왜 이리도 야속하게 느껴지는 걸까.
“시끄러워어···!”
아리아는 저도 모르게 울먹거리는 말투로 소리쳐버렸다.
그리고 그런 아리아의 모습 때문일까.
시안은 물론 엘레나 또한 크게 당황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내려앉은 정적.
조용히 훌쩍거리는 아리아의 목소리만이 나지막히 들려올 뿐이었다.
그리고 얼마 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야.”
다시금 시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아리아는 이번엔 답을 하지 않았다.
별로 대답하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그리고 지금 입을 열면 진정시킨 눈물이 또 다시 차오를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등을 돌린 채 가만히 있자니.
“그렇게 가고 싶으면, 이번에 돌아갈 때 같이 가자.”
시안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려왔다.
일순간 아리아의 몸이 멈칫, 거렸다.
아리아는 천천히 등을 돌렸다.
“같이··· 가자니?”
“루벤에 가보고 싶다며. 이번에 나 돌아갈 때 같이 가자고.”
시안은 어깨를 한 번 으쓱거렸다.
“정···말? 정말로···?”
“그래. 그 대신에 얼─.”
시안은 자연스레 튀어나오려는 말을 목구멍 근처에서 틀어막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얼마?’ 라고 외치려던 것을 꾹 참아낼 수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번에도 어떤 치명적인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여기서 얼마라고 내뱉으면 죽는다!
시안은 필사적으로 입을 틀어막을 수 있었고.
다행히 아리아는 듣지 못한 것인지 저 혼자 좋아라 하고 있었다.
‘상황이 좀 그렇긴 하다만···.’
저렇게까지 오고 싶다는데 무작정 막는 것도 좀 그랬다.
무엇보다 아리아가 시안에게 많은 도움을 주지 않았는가.
이번에도 아리아 덕분에 퀘스트 내용도 갱신할 수 있었다.
‘저 먼 타국에서 축하해주러 오기도 했고.’
물론 저 혼자 오겠다고 한 것이다만.
그래도 먼 길을 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니 저렇게 오고 싶다는데.
한 번쯤 초대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보다 레아랑 아리아가 만나게 될텐데···.’
물론 문제점은 여러모로 있었다만.
지난 번, 아르나이즈 전당에서 만났던 레아와 아리아.
당시 레아가 뮤리엘이 어쩌고 하면서 아리아를 털어버린 적이 있었다.
이번에 만나면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는 건 무슨 이유일까.
게다가 엘란두르와 전쟁도 그렇고.
최후의 드래곤을 찾아야되는 것도 그렇고.
지금이라도 오지 말라고 해야하는 건 아닐까 싶었지만···.
“로라가 오면 바로 말해야겠다. 이번에 나온 김에 휴가도 팍팍, 써버리지 뭐. 그리고 또···.”
언제 울었냐는 듯 배시시, 웃으며 좋아하는 아리아.
저렇게 좋아하는데 어찌 말을 번복할 수 있을까.
뭐, 전쟁은 어차피 선빵인지라 엘란두르 영역 내에서 행해질 터.
드래곤 찾으러 갈 때야 자리를 비워야겠지만···.
‘혼자 루벤에서 놀고 있으라 하지 뭐.’
아니면 같이 드래곤 찾으러 가자고 해도 되었고.
역사상 가장 강대한 신성력을 지닌 아리아.
아리아 정도면 큰 도움이 될 테니까.
뭐, 아무튼.
‘어떻게든 되겠지.’
시안은 딱히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
그렇게 한 바탕 소란 아닌 소란이 있은 직후.
똑똑.
“전하. 시안 백작이 찾아왔습니다.”
-들어오게.
시종장의 말과 함께 안 쪽에서 콘라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으로 드시지요.”
그리고 이어진 시종장의 말.
시안은 살며시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집무실 내부의 풍경이 비쳐보였다.
황태자, 콘라드가 정무를 보는 공간.
고풍스럽다는 말로도 부족할 인테리어는 물론.
제국의 2인자가 기거하는 공간답게 방 자체에서 어떤 기세가 느껴졌다.
하지만 루벤의 영주성과 비교해서일까.
아니면 하도 많이 찾아와서 그런 것일까.
시안은 별 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냥 익숙하다 못해 친숙한 풍경일 뿐이었다.
“때 마침 잘 왔네. 잠시, 거기 편한 데 앉아 있게나.”
그 순간 들려온 콘라드의 목소리.
콘라드는 집무실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작성하고 있었다.
시안은 콘라드의 말대로 집무실 내에 비치된 쇼파에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콘라드가 시안이 있는 곳으로 와 자리했다.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모으긴 했다만···.”
그리고는 곧바로 본론을 꺼내었다.
그런데 왜인지 살짝 난처한 표정의 콘라드.
“그런데 황가의 재정 상태가 썩 좋지 않아.”
아니나 다를까 콘라드가 곤란한 어투로 말을 꺼내왔다.
뭐, 아무리 황가라고 한들.
2억 5천만 골드가 적은 돈은 아니었다.
적기는 무슨.
어마어마하다 못해 초월적인 금액이라 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지난 번 흉년의 여파가 남아있던 터라···.”
게다가 제국 전역을 강타했던 흉년의 여파.
지금은 상당히 많이 회복이 된 상태였다.
하지만 그 피해가 완전히 회복된 것은 또 아니었다.
엘란두르마저 그 피해를 입었을 정도였다.
제국 전역을 관리하고 도와주어야하는 황가의 피해야 말할 건덕지도 없었다.
“게다가 자네에게 준 금액도 적지 않았던 터라.”
여기에 시안에게 삥뜯긴··· 아니, 지출된 금액.
그러니까 북부의 물자를 대가로 얻은 1,200만 골드.
그리고 엘레나의 루벤 방문으로 얻어낸 2천만 골드.
도합 3,200만이라는 금액을 시안에게 지출한 바가 있었다.
그 이후로 불과 몇 달밖에 지나지 않은 상황.
“2억 5천만을 끌어오기가 쉽지 않아서 말이네···.”
이런 상황에서 2억 5천만 골드를 끌어모으는 건 여러모로 힘들었다.
콘라드는 그 말을 끝으로 시안을 바라봤다.
그리고 시안은 왜 콘라드가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한 마디로 조금만 할인해주면 안되냐.
콘라드는 그렇게 빙빙, 돌려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해서 조금 약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콘라드가 많은 도움을 준 것도 있었고.
위의 사정들을 듣고보니 확실히 어려운 부분이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조금 할인해줄 생각은 있었지만···.
“에이, 왜 그러십니까 전하.”
어디까지나 ‘생각’만 있었을 뿐이었다.
물론 정말로 재정이 열악하다면 시안은 고집부릴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까 선뜻 할인해줄 생각은 있었다.
할인이 안되면 할부까지도 해줄 의향은 있었다.
하지만 시안은 알고 있었다.
“제가 알기로 황가의 자산은 여전히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콘라드가 지금, 시안을 한 번 떠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콘라드의 말처럼 황실의 재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러나 그걸 감안하더라도 황가의 자산은 그리 열악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황실의 재성이 아닌 황가의 자산.
즉, 황제의 개인 비자금인 황가의 자산은 여전히 건재했다.
“아까 전에 전하께서 내탕금을 뒤적인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다름 아닌 내탕금을 뒤적여보겠다는 콘라드의 말.
내탕금은 한 마디로 황제의 비자금이었다.
보통 비자금이라 함은 떳떳하지 못한 일에 사용되는 자금을 일컬었다.
그러나 간혹, 떳떳하게 비자금을 축적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황제의 비자금, 내탕금이었다.
그리고 내탕금은 비자금이되, 존재 자체가 비밀이 아니었다.
지금 당장 시안조차 내탕금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비자금은 비자금.
내탕금은 대전 회계에 잡히지 않는 자산이었다.
그렇기에 대신들은 내탕금이 얼마나 되는지.
또 어떻게 쓰이는지 전혀 파악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그에 대한 딴지를 걸 수도 없었다.
애초에 나랏돈도 아니고 황제의 돈이었다.
자기 돈을 자기가 쓰겠다는데 뭘 어쩐단 말인가.
그렇다고 이 금액이 안 좋은 일에 쓰이냐.
그건 또 아니었다.
국가적인 잔치를 벌이거나, 개인적으로 신하에게 하사금을 내릴 때.
국가의 사업을 벌여야하는데 대신들이 세금을 쓰기를 극구 반대할 때.
아니면 지금처럼 황실의 재정이 열악할 때.
한 마디로 황제가 돈을 쓰고 싶은데 공식적인 돈줄이 막혔을 때.
황제는 이 내탕금을 풀어 각종 사업들을 벌인다.
쉽게 말해 황제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통치자금’이라 정의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 규모는··· 솔직히 시안조차 감을 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내탕금으로 축적되는 자금은 다름 아닌 토지 사업과 사채였으니까.
즉, 땅과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고리대금업.
그것으로 내탕금의 자산을 축적하고 또 불렸으니까.
그리고 제국법상 제국의 모든 영토는 황가의 소유였다.
한 마디로 제국 전체를 두고 벌이는 고리대금업.
그 수입이 어느 정도일지는 굳이 말해서 무엇할까.
해서 따지고 보면 썩 좋지 못한 돈이라 생각될 수 있었다.
사람들의 골수를 뽑아 얻은 돈이라 여겨질 만도 했다.
그런데 이게 또 그렇지가 않았다.
내탕금은 역시나 만천하에 그 존재가 밝혀진 비자금.
쉽게 말해 내탕금에는 황제의 이름과 체면이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황제가 백성들을 상대로 이자 놀음을 할 수는 없는 노릇.
당연히 그 이자는 월등히 낮을 수밖에 없었다.
일반적인 시중에 비해 절반도 채 미치지 못하는 이자.
게다가 이는 어디까지나 황제의 자산이자 토지였다.
즉, 다른 귀족들의 수탈이 개입할 수가 없었다.
어느 누가 황가의 자산을 건드린단 말인가.
뭐, 모가지가 잘리고 싶다면야 건드릴 수는 있었다.
해서 백성들은 스스로의 땅을 내탕금에 바치고 그 소작농으로 들어가거나.
내탕금에 소속된 땅에서 소작하고자 뇌물까지 바치는 로비 행위마저 일어나는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말만 비자금일 뿐.
사실상 구휼을 위한 정책금에 지나지 않았다.
《정부 햇살론···?》
이에 대해 모바일 영주가 이런 말을 했었다만···.
햇살론이 뭔지를 알아야지.
뭐, 아무튼.
내탕금을 사용한다면 2억 5천만 골드가 지불하지 못할 금액은 아니었다.
“하하···.”
그런 시안의 말에 콘라드가 허탈한 웃음을 흘려보였다.
축, 쳐져있던 표정은 언제 그랬냐는 듯 생기를 되찾았다.
이내 콘라드는 못 당하겠다는 듯.
“하여간, 자네한테는 정말 못 당하겠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보였다.
이윽고 콘라드가 품 속에서 두 장의 종이를 꺼냈다.
다름 아닌 전표였다.
하나는 황제의 이름으로 보증되어있는 전표.
다른 하나는 로르실트의 이름으로 보증되어있는 전표.
“에그리트 후작이 황가를 상대로 발행한 어음이네. 요즘 재정 상태가 영 좋지 않다고 후작이 내게 간곡히 부탁하더군.”
조만간 이자 쳐서 갚겠다고 말이네.
콘라드는 마지막 말을 중얼거리며 작게 웃어보였다.
한 마디로 에그리트 후작이 황가에게 돈을 꾸었다는 뜻이었다.
시안에게서 엘로디의 지식을 얻기 위해서.
그것도 1억 골드라는 거금을 말이다.
뭐, 로르실트 정도면 충분히 갚을 능력이 되었다.
신뢰도 또한 말할 것도 없었고.
문제는 황가가 그 정도 돈을 빌려줄 수 있냐는 것이었는데···.
아무래도 내탕금의 규모가 시안의 예상을 더 뛰어넘는 것 같았다.
어쨌거나 두 장의 전표 앞으로 찍혀있는 금액.
각각 샤를롯의 검술과 엘로디의 지식으로 벌어들인 금액.
[250,000,000 G]
[100,000,000 G]
2억 5천만 골드.
1억 골드.
도합 3억 5천만 골드.
띠링!
《이, 이, 이럴리가···!》
그 순간 들려오는 모바일 영주의 알림음.
《이럴 리가 없어요오오옷!!!!!》
모바일 영주가 기겁을 하며 까무러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