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질하는 영주님!-223화 (223/322)

223화 - 작위식(2)

듀라크의 등장과 함께 연회장에는 묵직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서로 담소를 나누던 귀족들은 모두 입을 꾹, 다물었고.

음식과 술들을 나르던 고용인들도 움직임을 멈추었다.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만 같은 착각.

오직 듀라크의 발걸음만이 정지된 시간 속을 누빌 뿐이었다.

이윽고 연회장을 누비던 듀라크의 발걸음이 뚝, 하니 멈춰섰다.

걸음을 멈춘 듀라크의 시선 앞.

그곳엔 에그리트와 오슬리와 서 있었다.

에그리트와 오슬리 그리고 듀라크.

세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와 동시에 벤딩턴과 파나트가 살며시 뒤로 물러났다.

이건··· 둘이 끼어들 레벨이 아니었으니까.

제국을 떠받치는 두 기둥.

로르실트의 가주, 에그리트 로르실트.

엘란두르의 가주, 듀라크 엘란두르.

그리고 북부의 안위를 책임지는 변경백, 오슬리.

제국의 정점에 서있다시피한 세 사람.

“오랜만에 뵙습니다.”

듀라크는 에그리트와 오슬리를 향해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반면에 에그리트와 오슬리는 그런 듀라크를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할 지 알지 못했으니까.

정확히는 듀라크가 왜 여기에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으니까.

물론 따지고 보면 듀라크가 오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작위식에 오는 것이야 개인의 자유.

무엇보다 듀라크는 결국 시안의 아버지였다.

듀라크가 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알 만한 사람들은 알고 있는 사정.

듀라크는 이곳에 오면 안 되었다.

“엘란두르께서도 참석하실 줄은 몰랐네만.”

에그리트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듀라크에게 물었다.

“제가 참석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있습니까.”

“그건 아니외만.”

에그리트는 가볍게 고개를 저어보였다.

역시나 따지고 들면 참석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에그리트가 살짝 물러나자 그 뒤로 오슬리가 듀라크에게 물었다.

“설마하니 작위식을 엎어버릴 생각인 건···.”

“이곳이 황궁임을 더없이 잘 알고 있다만.”

하지만 재차 이어진 듀라크의 답.

오슬리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말마따나 이곳은 황궁이었으니까.

아무리 듀라크가 막 나간다고는 하나, 황궁에서 일을 벌인다?

반역이라도 꿈꾸지 않는 이상 그건 말이 안되는 일이었다.

한 마디로 듀라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듀라크는 이곳에 서 있었다.

오슬리는 듀라크를 가만히 바라봤다.

듀라크는 특유의 담담한 표정으로 오슬리를 마주 바라봤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연회장의 귀족들.

“······”

“······”

연회장의 귀족들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정확히는 연회장에 내려앉은 무거운 분위기에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저기에 모인 이들.

북부의 변경백, 오슬리와 엘란두르의 가주, 듀라크.

그리고 중간에는 로르실트의 가주, 에그리트가 흥미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또 그 뿐이랴.

조금만 시선을 돌리면 신성 제국의 성녀가 황홀한 분위기를 풍기며 한쪽에 앉아있었다.

“백작의 작위식··· 이라며···.”

이게 어딜 봐서 백작의 작위식이란 말인가.

찾아온 손님들의 이름 값만 따지면 황제의 즉위식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

“······”

그 때문에 연회장의 분위기는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방금 전까지 하하호호, 떠들던 귀족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이게 연회장인지 도서관인지 모를 정적.

“응?”

그 사이로 들려온 얼빠진 물음.

“분위기가 왜 이래?”

시안은 이게 뭔가 싶었다.

#

연회장 전체로 울려퍼진 시안의 목소리.

그를 기점으로 연회장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시안에게로 향했다.

“······ 뭔데?”

시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손님들이 모여있다길래 한 번 와봤건만.

지금 느껴지는 연회장의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았다.

마치 일촉즉발의 어떤 상황에 놓인 듯한 모습.

시안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변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모든 귀족들의 이목이 집중된 시선 속.

그 중에서도 시안은 특별하다 할 수 있는 장면을 캐치할 수 있었다.

일단 한쪽에 조신하게 앉아있는 모습의 아리아.

그리고 곰 같은 외모로 인상을 살짝, 찌푸리고 있는 오슬리.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흥미로운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에그리트.

그리고 마지막으로.

‘······ 듀라크?’

듀라크의 모습이 비쳐보였다.

연회장을 훑어보던 시안의 시선이 듀라크에게서 뚝, 멈춰섰다.

듀라크는 담담한 표정으로 시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듀라크가 왜 여깄어?’

시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듀라크가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

이 자리는 작위식을 축하해주기 위해 모인 자리.

듀라크가 올 리가 없는 자리였다.

시안은 슬쩍, 듀라크의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다른 엘란두르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듀라크 혼자서 온 듯 싶었다.

시안은 시선을 바로하여 다시 듀라크를 바라봤다.

전혀 예상치 못한 듀라크의 모습.

뭐, 따지고 보면··· 못 올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따지고 들 때의 일.

솔직히 제대로 따지고 들면 듀라크는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되었다.

‘그런데도 이곳에 왔다?’

그 말은 즉.

듀라크가 이곳에 찾아온 어떤 꿍꿍이 혹은 목적이 있다는 뜻이었다.

‘작위식을 깽판 치려는 건가?’

···싶었지만 금방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듀라크가 막나간다고는 하나, 황궁에서 깽판을 칠 정도로 막나가지는 않았으니까.

그렇게까지 생각이 없는 듀라크가 아니었다.

‘그럼 왜 온 거지?’

그럼 듀라크가 온 이유가 전혀 설명이 되지 않았다.

로즈웰과 네이슨의 소식은 물론.

비자금의 강탈에도 당장 루벤을 공격하려하지 않는 것도 그렇고.

뜬금없이 이렇게 대뜸 찾아온 것도 그렇고.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할까.’

시안은 잠깐의 생각에 잠겼다.

대뜸 연회장에 찾아온 듀라크.

현재로서 시안이 할 수 있는 건 두 가지였다.

첫 번째로는 역시 모른 척 하는 것.

듀라크가 왔든 말든, 듀라크가 뭘 하든 말든.

그냥 없는 사람 취급하며 시안이 할 일을 하면 되었다.

아예 대응 자체를 하지 않으면 꿍꿍이든 뭐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테니까.

어떻게 보면 가장 합리적인 대응인 셈.

‘음···.’

고민은 이어졌고 끝내 시안은 성큼, 발걸음을 내딛었다.

거침없이 연회장을 가로지르는 발걸음.

시안이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귀족들의 두 눈이 하나 둘씩 크게 떠졌다.

그렇게 얼마 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시안의 발걸음이 끝내 한 곳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바라본 시선.

“엘란두르 후작께서도 찾아오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시안의 시야 앞으로 듀라크가 서 있었다.

정확히는 에그리와 오슬리까지 모여있는 곳.

일순간 연회장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어갔다.

모여있는 귀족들이 헙, 하며 탄성을 내뱉었다.

모두가 숨을 죽이며 시안과 듀라크의 대면을 지켜봤다.

그리고 듀라크도 시안의 행동을 예상하지 못했던 걸까.

듀라크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그 사이로 보이는 듀라크의 감정은 놀람 그리고 약간의 당황.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내가 찾아오면 안되는 이유라도 있나?”

듀라크가 금방 표정을 바꾸며 물어왔다.

평소와 같은 담담한 표정.

역시나 그 속내를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굳이 제 입으로 말씀드릴 일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만.”

시안의 답과 동시에, 담담한 듀라크의 얼굴 위로 뚜렷한 표정 변화가 일었다.

꿈틀거리다 못해 일그러지는 듀라크의 눈썹.

그 사이로 분노라는 감정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윽고 듀라크의 시선이 시안에게 향한다.

날카로운 눈빛에 담긴 기세.

듀라크의 전신으로 섬뜩한 기세가 흘러나왔다.

그와 동시에 시안은 전신을 옥죄어 오는 끔찍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압도적인 존재감이 짓눌러왔다.

숨조차 쉬이 내뱉어지지 못하는 끔찍한 살의가 덮쳐온다.

그러나 연회장의 다른 이들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아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느껴지는 이 살의.

이건 오로지 시안에게만 향하는 것이었으니까.

다른 이들에게는 전혀 해를 끼치지 않는 목표된 살의였다.

다만, 오슬리와 에그리트를 비롯한 일부 뛰어난 실력자들.

그들은 듀라크의 기세를 느낄 수 있었다.

강력한 억제력이 시안의 전신을 얽매어왔다.

오로지 기세만으로 존재를 짓눌러 죽이는 듀라크의 기세.

“역시.”

시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리가 불편하신가 봅니다.”

“······!”

그와 동시에 듀라크의 눈이 크게 치켜떠졌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보이는 시안의 모습.

시안은 별 다른 내색없이 그 기세를 받아내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건 비단 듀라크뿐만이 아니었다.

듀라크의 기세를 느낄 수 있는 이들의 눈 또한 크게 치켜떠졌다.

듀라크가 내뿜은 기세가 얼마나 끔찍한지 알고 있었으니까.

마스터 상급이자 무려 대륙 제 1의 검이라 불리는 듀라크.

그런 듀라크가 사출한 목표된 살의였다.

깜냥이 있으니 기세에 짓눌리지는 않겠다만.

그렇다고 지금 시안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낼 정도는 또 아니었다.

여기서 에그리트 정도는 되어야 그게 가능할까.

그럼에도 시안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 기세를 받아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뭔가 이상한데···?’

시안은 속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지금 느껴지는 듀라크의 기세.

확실히 살벌한 힘을 담고 있었으나 딱 그 뿐이었다.

마(魔)를 다루는 근원의 방법, 마혼제법(魔魂制法).

그 진행률을 100% 달성한 지금, 대륙 제 1의 검이든 나발이든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최강의 아르나이즈, 카일이 사용한 오러 연공법.

여기서 기세로 시안을 어찌할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연회장은 물론 대륙 전체와 그 역사를 뒤져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듀라크가 내뿜는 기세는 시안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시안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왜 마(魔)가 반응하는 거지?’

듀라크의 기세에 마혼제법(魔魂制法)이 반응하고 있었으니까.

지난 날, 시안이 엘란두르 저택에 방문했을 적.

듀라크의 기운을 정면으로 받아냈을 때도 마혼제법(魔魂制法)이 반응했었다.

그렇기에 크게 이상하다고 여겨질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뭐지···?’

그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들었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미묘한 차이.

마혼제법(魔魂制法)의 진행률이 100%를 달성해 예민해진 것인가?

그럴 수도 있었지만···.

단순히 그렇게 생각하기엔 영 찜찜했다.

그런 단순한 느낌과는 사뭇 다른 무엇.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생소한 느낌.

이건 마치···.

‘잠깐. 이거 설마···?”

그 순간 시안의 머릿속으로 스쳐지나가는 한 가지 생각.

그 생각과 동시에 듀라크의 기세가 사그라들었다.

그와 함께 묘하게 반응하던 시안의 마(魔) 또한 사그라들었다.

시안은 시선을 들어 듀라크를 바라봤다.

듀라크는 어느덧 표정을 갈무리하고는 시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주치는 시선.

이윽고 듀라크가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등을 돌려 성큼, 발걸음을 내딛더니.

“문제를 일으킬 생각은 없다.”

그렇게 말을 내뱉고는 홀연히 연회장 밖으로 나가버렸다.

점점 멀어지는 듀라크의 뒷모습.

확실히 문제를 일으킬 생각은 없어보였다.

정말 말마따나 조용히 있다가 갈 생각인 모양.

‘대체 무슨 꿍꿍이야?’

시안은 떠나가는 듀라크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

여전히 무거운 연회장의 분위기.

하지만 듀라크가 자리를 떠나갔기 때문일까.

묵직했던 분위기가 조금씩 풀어지며 도란도란 떠드는 소리가 조금씩 들려왔다.

그러나 아직까진 얼어붙은 분위기가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았다.

시안은 천천히 주변을 한 번 훑어보았다.

근처에 있던 오슬리와 에그리트가 그런 시안을 가만히 바라봤다.

하지만 시안은 둘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계속 주위를 두리번 거릴 뿐이었다.

이윽고 저 멀리 보이는 백금발의 여인, 아리아.

워낙에 튀는 외모 덕분에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시안은 곧장 아리아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꽤나 오랜 만에 만나는 아리아.

아마 그래서일까 어째, 아리아의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채 다소곳한 모습으로 시안을 바라보는 것이 뭐랄까···.

천상 말괄량이 같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지금은 가녀린 미소녀처럼 보였다.

게다가 시안이 지난 번에 선물한 뮤리엘의 장신구.

그 장신구와 어우러진 아리아의 미모는 솔직히··· 예쁘긴 예뻤다.

시안은 그런 아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툭, 말을 내뱉었다.

“야.”

그러자 아리아가 살짝, 놀란 눈으로 시안을 올려다봤다.

마치 시안이 오는 줄 몰랐다는 눈치였다.

“어머. 시안 공자님?”

아니나 다를까 아리아의 청아한 목소리가 잔잔히 퍼져나갔다.

어째 목소리에도 신성력이 담겨있는 것일까.

그야말로 성녀(聖女)나 다름 없는 모습.

귀족 남자들의 탄성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뭐하는 거야?”

하지만 시안은 진짜 뭔가 싶었다.

얘가 정녕 미치기라도 한 걸까.

“너 갑자기 왜 이래?”

“무슨 말씀이신지···?”

“왜 갑자기 존댓말이야. 그 말투는 또 뭐고.”

“저는 공자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아리아가 조신하게 백금발의 머리를 귀 뒤로 넘겨보였다.

그와 동시에 지어지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아리아의 표정.

순백의 드레스와 함께 어우러지며 발산되는 초월적인 미(美).

“와···.”

“여, 여신님이다···.”

아니나 다를까 주변의 귀족들이 탄성을 터트렸다.

남자 귀족들은 물론, 여자 귀족들까지 아리아의 미모를 넋놓고 바라봤다.

그야말로 살아 움직이는 기적.

“아윽···!”

하지만 시안에게는 살아 움직이는 재해였다.

갑자기 이는 현기증에 시안은 이마를 짚어보였다.

저도 모르게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그도 그럴 것이 아리아의 신성력에 반응한 마기가 일순간 들끓었으니까.

예전이었다면 들끓는 마기를 어찌할 수 없었을 터.

하지만 마혼제법(魔魂制法)의 진행률이 100%에 달했기 때문일까.

“후우···!”

시안은 들끓는 마기를 금방 억누를 수 있었다.

마기를 억누른 시안은 천천히 시선을 돌려 아리아를 바라봤다.

“너 어디서 신성력이라도 주워먹었냐.”

방금 전에 일었던 현기증.

솔직히 말하면 아리아의 신성력은 더 이상 시안을 괴롭힐 수 없어야했다.

마혼제법(魔魂制法)의 진행률이 100%에 달하면서 완벽히 마(魔)를 통제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웬걸.

“예전보다 더 역겹··· 우윽···!”

못 본 사이에 더 강대해진 아리아였다.

“공자님···? 괜찮으세요? 설마 아까 전에···?”

아무래도 저 요조숙녀 같은 아리아의 모습이 속을 더 뒤집어놓는 것 같았다.

“제가 신성력으로 치료해드릴게요.”

이윽고 아리아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미모에도 향취가 배어있는 걸까.

묘한 향기가 시안의 코를 찔러왔다.

그와 동시에 치솟는 역겨움.

시안은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다가온 아리아를 밀쳐내었다.

“야이, 다가오지말라고 했지. 그보다 너. 지금 사람들 앞이라고 내숭떠는 거야? 아니면 뭐 잘못 먹었냐?”

“네? 지금 말씀이 너무 지나치신─.”

“됐고. 평소대로 해 평소대로. 우윽···!”

그와 함께 휘청거리는 시안의 몸.

아리아가 순간 입을 꾹, 다물었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고.

“에이 씨.”

끝내 아리아가 말을 씹듯이 내뱉었다.

시안은 그때서야 속이 안정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진즉에 그렇게 나올 것이지.”

“그래. 이제 됐냐?”

“후. 좀 살 것 같네.”

조금 진정되는 속.

그러자 아리아가 새침한 표정으로 시안을 쏘아붙였다.

“넌 어떻게 된 게 변한 게 하나도 없니? 그리고 오랜 만에 만난 사람한테 다짜고짜 역겹다는 게 할 소리야?”

“역겨우니까 역겹다고 하지. 그러니까 왜 어울리지도 않는 짓을 해?”

“네 작위식에 누가 될까봐 신경써준거 아니야!”

“그런거 필요없으니까 다시는 그런 짓 하지마. 어윽··· 아직도 머리가 아프네.”

그러면서 시안이 슬금슬금, 아리아에게서 멀어졌다.

그런 시안의 모습에 아리아는 뭔가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진짜··· 진짜 내가 무슨 영광을 누리자고 여길 온 건지.

작위식을 빛내주려고 이렇게 옷도 골라입고, 화장도 했는데.

연락 한 번 없던 애가 뭐가 이쁘다고···!

그리고 오랜만에 만났는데 다짜고짜 한다는 소리가 뭐?

역겨워?

“그건 그렇고. 야.”

“왜!”

아리아는 괜시리 버럭, 소리치며 답했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귀족들이 화들짝 놀라며 아리아를 바라봤다.

“하여간, 성질은.”

시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뭐, 아무튼.

“너, 방금 이상한 점 못 느꼈냐?”

“이상해? 뭐가 이상해? 설마 지금 내가 이상하다는 소리를···.”

그러자 아리아가 잔뜩 토라진 표정을 지어보였다.

시안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바로 말을 이었다.

“아니, 너 말고.”

“나··· 말고?”

시안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재차 입을 열었다.

“방금 전의 듀라크 말이야. 뭔가 이상한 점 못 느꼈어?”

“듀라크···? 듀라크라면···?”

아리아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시선을 내려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방금 너랑 싸웠던 사람?”

금방 듀라크의 정체를 인지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륙 제1의 검으로 알려진 듀라크 엘란두르.

비록 아리아는 타국의 성녀였지만 듀라크의 이름을 모르지는 않았다.

“안 싸웠는데.”

“죽일 것처럼 기세를 뿌려대는데. 검만 안 뽑았지 싸운거랑 뭐가 달라?”

이어진 아리아의 답.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시안은 멋쩍게 웃음을 흘렸다.

“아무튼. 듀라크에게서 이상한 점 못 느꼈어?”

“음··· 딱히? 그냥 괜히 대륙 제1의 검이 아니구나 정도?”

어째, 아리아는 이상함을 감지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렇기에 시안의 착각이라 생각될 수 있었지만.

‘나만 느낄 수 있었다라···.’

반대로 생각하면 오직 시안만이 느낄 수 있는 무엇이라 할 수도 있었다.

“갑자기 그건 왜?”

“뭔가 이상해서 말이야.”

“그러니까 뭐가?”

아리아가 답답한 듯 물어왔지만 시안은 대답 대신 다시 한 번 생각에 잠겼다.

방금 전, 듀라크에게서 느껴진 이상한 기운.

그리고 오직 시안만이 느낄 수 있었던 기운.

익숙하면서도 생소한 무엇.

그런 종류의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니, 딱 하나밖에 없다고 할 수 있었다.

“루슈리아.”

“루슈리아?”

갑작스러운 시안의 말에 아리아가 되물어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잠깐, 루슈리아라면···.”

그 이름을 떠올린 것인지 아리아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성녀(聖女)인 아리아조차 감지하지 못하는 악(惡).

일곱 가지의 대죄(The Seven Sins).

교만, 탐욕, 질투, 분노, 색욕, 탐식, 나태.

그 죄에서 깨어난 일곱의 악마 중 한 명.

“색욕의 악마···?”

지난 날, 시안에게 소멸되었던 악마 7군주.

악마 7군주 색욕의 악마.

“듀라크에게서 왜 루슈리아의 기운이 느껴진 거지?”

시안의 중얼거림이 다시 한 번 아리아의 귓가로 들려왔다.

#

황궁의 복도를 가로지는 묵직한 발걸음.

연회장을 나선 듀라크는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내딛는 듀라크의 발걸음은 황궁 밖을 벗어나고서도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 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듀라크의 발걸음이 한적한 곳에 이르러 멈추었다.

수도, 다르칸에서도 인적이 드문 골목길.

“쥐새끼처럼 숨어지내는 것이 취미인가.”

듀라크의 목소리가 나지막히 울려퍼졌다.

그리고 듀라크 이외에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골목걸이었건만.

“아직 제 존재가 드러나서는 안되어서요.”

어디선가 화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골목길 한 쪽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새하얀 머리의 여인.

“쫓겨난 추기경 다운 발언이군.”

다름 아닌 황혼 교파의 수장이자 신성 제국의 추기경, 레이첼이었다.

“저는 상관 없는데, 제 안의 힘은··· 조금 문제가 되어서 말이에요. 지금 이렇게 수도에 와있는 것도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 거랍니다.”

레이첼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듀라크 앞에 서보였다.

백합을 닮은 머리색과 뒤로 곱게 땋인 머리.

“그보다 어떠셨어요?”

레이첼이 싱긋 웃으며 듀라크에게 물었다.

“지금도 제 목을 벨 생각이 있으신가요?”

듀라크는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별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시안이 자신을 넘어설지도 모른다는 말 같지도 않은 사실.

그러나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한 지금.

듀라크는 쉽사리 입을 열 수가 없었으니까.

아니, 쉽게 입을 열 수가 없었기에 그 답을 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 원하는 게 뭐지.”

“어머. 드디어 저와 대화를 하실 생각이 드신 거군요.”

싱긋, 미소짓는 레이첼의 표정.

“일단은··· 작위식을 조금 더 지켜볼까요?”

바라본 레이첼의 미소에는 어떤 추악(醜惡)함이 깃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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