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 작위식(1)
황궁에 위치한 황태자의 집무실.
“하하하하!”
그곳엔 때 아닌 웃음 소리가 터져나왔다.
콘라드는 호탕한 웃음을 계속해서 터트렸다.
그렇게 얼마 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콘라드가 작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작위식의 주인공을 못 알아보다니···.”
아까 전, 황궁 앞에서 일어난 소란.
로열 나이츠의 주된 임무는 황가를 수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비단 황가의 수호만이 그들의 임무는 아니었다.
제국 전역으로 파병을 나가는 등의 여러 임무들이 있었고.
특히나 평상시에는 황궁을 지키는 것이 그들의 주된 임무라 할 수 있었다.
황궁을 출입하고자 하는 이들의 신원과 목적을 명확히 파악하는 것.
해서 귀족들의 얼굴을 익히는 것 또한 로열 나이츠의 주요한 업무라 할 수 있었다.
실제로도 로열 나이츠들은 무예 수련 이외에도 주요한 귀족들의 얼굴을 외우는 공부도 하고 있었다.
“이번에 승격된 신입이었던지라 자네의 얼굴을 몰랐던 모양이네.”
하지만 시안을 상대했던 토말은 이번에 막 승격된 신입.
원래라면 이처럼 곧바로 임무에 투입되는 경우는 없었다.
그러나 워낙에 인파가 붐볐던지라 한 명의 일손이라도 아쉬웠던 상황.
어쩔 수 없는 상황이 겹쳐져 이러한 상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나, 잘못은 잘못. 내가 대신 사과하겠네. 미안하네.”
콘라드는 시안에게 정중한 사과를 표했다.
그런 콘라드의 행동에 시안은 가볍게 손사래를 쳐보였다.
“아닙니다. 전하께서 무슨 잘못을 하셨다고···.”
“책임을 지는 자리에 있지 않은가. 아랫사람이 잘못을 저질렀으면, 윗 사람이 응당 그 책임을 져야하는 법.”
그러나 콘라드는 끝내 사과의 뜻을 꺾지 않았다.
하여간, 콘라드 답다면 콘라드 다운 모습이었다.
“저는 신경쓰지 않으니 괘념치 마시지요. 무엇보다 그렇게 하나하나 따지고 들면 제 잘못도 없잖아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세상 누가 작위식을 받는데 그렇게 몸만 덜렁 온단 말인가.
백작위는 한 지역에서 패업을 이룬 제후를 상징하는 고위 귀족.
그에 따른 품격과 품위를 지켜야할 어느 정도의 의무가 있었다.
그러니 시안을 못 알아본 로열 나이츠를 책하기 이전.
그럴 상황을 발생시킨 시안의 잘못도 없잖아 있다고 볼 수 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하나하나 따지고 들었을 때의 경우였다.
무엇보다 잠깐 확인해본 바.
토말은 아주 극심한 얼차려를 받고 있기도 했었고.
“자네가 이야기를 꺼내서 말이네만··· 어떻게 자네는 예나 지금이나 변하질 않는가?”
이윽고 콘라드가 묘한 표정으로 시안에게 말했다.
“귀족들도 바라마지 않은 백작위거늘. 조금은 위세를 떨고, 어깨를 좀 으쓱해도 누가 뭐라할 사람이 없는데. 그리고 그런 허례허식은 어느 정도 필요한 법이고.”
“그건 그렇습니다만···.”
시안 또한 콘라드의 말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바였다.
솔직히 말이 허례허식이었지 실상은 마냥 ‘허(虛)’ 하지는 않았다.
대동한 병사들의 숫자와 수준.
타고 있는 마차의 화려함 정도.
그런 사치 아닌 사치를 통해 해당 귀족의 영향력을 알 수 있었으니까.
기세에서부터 이기고 들어간다는 말이 있듯.
마냥 허례허식이라 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평소 이런 작위식 같은 중요한 행사에서만큼은 그 위세를 보일 필요도 있었다.
시안 또한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나 굳이 그러지 않았다.
“저 혼자 다녀오면 되는 걸, 굳이 병사들의 시간을 빼앗기가 좀 그래서 말입니다.”
병사들의 수련을 방해할 수는 없었으니까.
곧 있을 엘란두르와의 전쟁.
루벤에서 황궁까지의 거리는 하루 이틀 걸리는 거리가 아니었다.
넉넉하게 잡으면 1주일.
그럼 왔다갔다 하는데 2주일.
하지만 허례허식 가득한 마차와 병사들을 대동한다면 이보다 더 늦어졌다.
그리고 작위식 이후에 이것저것 처리할 일까지 생각하면 못해도 1달은 잡아야했다.
고작 1달 사이에 뭐가 달라질 수 있겠냐만은.
성장 버프가 덕지덕지 중첩되어있는 루벤에서는 1달은 거의 1년과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거추장스러운 것을 썩 좋아하지 않아서 말입니다.”
여러모로 허례허식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몫을 했다.
정확히는 허례허식을 위해 소모되는 골드가 아까웠다.
그런 것에 돈을 쓸 바에 차라리 현질을 하는 게 백 번 이득이었으니까.
그런 시안의 생각을 아는 지 모르는 지.
“하여간···.”
콘라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나깨나 영지민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건 정말이지 제국 최고라 할 수 있었다.
콘라드조차 한 수 접어줄 정도.
정확히는 콘라드조차 배워야할 정도.
백작이 되었어도 한결 같은 시안의 모습이었다.
“그 부분은 그렇다치고··· 그보다 자네, 새로이 사용할 성과 문양은 정했는가?”
다시 들려온 콘라드의 물음.
시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품 속에서 자그마한 무언가를 콘라드에게 건넸다.
다름 아닌 황궁에 오기 전 세미르에게 부탁해 만들어둔 문양.
콘라드는 시안이 건넨 문양을 받아 유심히 살폈다.
전방을 향해 거칠게 포효하는 검은색의 사자.
“검은 사자···?”
“네. 명칭은 흑사자로 할 것입니다만···.”
뭐, 명칭만 다를 뿐 의미는 그거나 그거나였다.
“흑사자인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그것이···.”
특별한 이유가 있기는 있었다.
다름 아닌 천 년전, 아르나이즈 카일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검은 사자였으니까.
그에 따라 카일을 따르던 기사단의 이름은 검은 사자 기사단이었다.
켄드릭은 검은 사자 기사단의 단장이었고.
그리고 시안은 어떻게 보면 카일의 후계자나 다름 없었다.
해서 시안은 검은 사자로 문양을 선정했다.
다만, 그 명칭만 검은 사자에서 흑사자로만 바꾼 것에 지나지 않았다.
어쨌거나 이런 특별한 이유가 있었지만 이걸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
“멋있지 않습니까.”
시안은 대충 얼버무렸다.
콘라드 또한 크게 신경쓰지 않는 듯 그 이상으로 물어오지 않았다.
“그럼 성은? 따로 생각해둔 것이 있는가?”
이어진 콘라드의 물음에 시안은 고개를 끋거이며 답했다.
“루벤. 루벤으로 하려고 합니다.”
다름 아닌 시안이 영주로 있는 영지의 이름.
그리고 지금의 시안을 있게 만들어준 이름.
“루벤 가(家)의 가주, 시안 루벤. 그리고 흑사자라···.”
콘라드는 새로운 시안의 이름과 문양을 한 번 되뇌었다.
그리고 잠깐의 생각을 하더니.
“나쁘지 않군.”
콘라드가 씨익,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리고는 시안이 건넨 흑사자 문양을 품 속에 고이 챙겨넣었다.
“그럼 지금 바로 처리하도록 하지. 작위식 전에 처리하려면··· 지금 바로 움직여야 할 것 같군.”
이윽고 콘라드가 서랍에서 몇 장의 종이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깃펜을 들어 무언가를 바삐 작성하기 시작했다.
말마따나 시안의 새로운 성과 문양을 정식으로 등록하려는 것 같았다.
“시간이 좀 걸릴 것이네. 그러니 다른 이야기는 이 일부터 처리한 다음에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 지금은 작위식을 무사히 마치는 것이 우선이니 말이네.”
그리고 이어진 콘라드의 말.
시안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콘라드가 말한 다른 이야기.
그건 샤를롯 대제의 검술에 관한 이야기임을 모르지 않았으니까.
뭐··· 이왕 이렇게 만난 거 한 번에 끝내고 싶기는 했다만 시안도 그리 급한 것도 아니었다.
‘어쨌거나 황궁에 떠나기 전에만 처리하면 되니까.’
1억 5천만 골드를 받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아 맞다. 사실 2억 골드라고 지금 말해둬야하나?’
시안은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제대로 된 협상 테이블이 펼쳐지면 그때 말해도 되는 사실이었다.
어쨌거나 바쁜 와중에 지금 당장 재촉할 필요는 없었다.
“그럼 최대한 빨리 끝내보도록 하겠네. 자네에겐 시간이 좀 있으니, 찾아온 손님들과 이야기라도 나누고 있게나.”
콘라드는 그 말과 함께 다시 깃펜을 움직여보였다.
그리고 시안의 작위식을 축하해주기 위해 모인 제국의 귀족들.
작위식이 시작하기 전, 황궁의 연회장에서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아리아도 왔으려나?’
온다고 했으니 지금쯤이면 황궁에 도착했을 터.
시안은 콘라드를 뒤로한 채, 집무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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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 내부에 위치한 거대한 홀.
태양처럼 반짝이는 화려한 조명 아래.
정장과 드레스를 차려입은 귀족들이 홀을 누비고 있었다.
화려하게 차려진 음식들과 하하호호, 웃는 소리.
시종들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잔을 건네고 있었고,
저마다 담소를 나누는 소리들이 배경음처럼 깔렸다.
거대한 홀을 가득히 메운 수많은 제국의 귀족들.
“후작가의 망나니에서 백작위라니···.”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다름 아닌 시안의 작위식을 축하해주기 위해 모인 귀족들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시안과 대화 한 번 섞어보지 못한 이들이 태반이었다.
아니, 태반을 넘어 거의 전부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렇기에 여기 모인 귀족들의 목적은 하나였다.
“시안 백작께서는 언제 오시지?”
“황궁에 도착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시안에게 얼굴이라도 한 번 내비치기 위함.
그로써 어떻게든 시안과 연을 쌓아보려는 목적.
새로운 제국의 별이라는 말과 더불어 제국 전역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시안이었다.
그런 시안과 연을 맺어서 전혀 나쁠 것이 없었으니까.
“레베카, 시안 백작께서 오시면 곧장 인사드리거라.”
“실수인 척, 음료를 흘리는 것도 괜찮단다. 어떻게든 시안 백작과 말이라도 섞어보거라.”
그 일환으로 수많은 귀족가의 영애들이 홀에 가득 들어 차있었다.
저마다의 매력을 뽐내는 드레스와 의상을 입고 조신하게 시안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가 시안이 얼굴을 비추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
물론 넋놓고 시안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또 아니었다.
“그러고보니 베지민 자작, 최근에 관할령에서 새로운 철광이 발견되었다고···.”
“하하하. 소문이 거기까지 났습니까. 안 그래도 철광 생산이 급증한 터라 판매처를 새로 뚫어볼까 고민하던 찰나였습니다만···.”
“그럼 저희 가문과 한 번 거래를 해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안 그래도 저희 영지와 교통이 꽤나 좋지 않습니까.”
“음··· 트일라이 자작령과는 유통이 편하긴 합니다만···.”
귀족들 간의 은밀한 거래.
시안에게 얼굴을 비치기 위한 자리임과 동시에.
각 귀족들끼리의 친분과 연, 그리고 이해관계를 논할 수 있는 장이기도 했다.
그렇게 수많은 귀족들이 저마다 짝을 지어 이야기를 나누는 이곳.
그러나 어딜 가나 무리에 섞이지 못하는 부류는 존재했다.
그리고 그 부류는 크게 2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하나는 마땅히 내세울 것이 없는 초라한 귀족이거나.
“아버님. 이왕 참석한 연회이니 만큼 아버님도 다른 귀족들과 담소를 나눠보시지요.”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될 정도로 영향력이 강한 존재이거나.
2M에 달하는 거구.
이게 곰인지 사람이지 분간이 안갈 정도의 덩치.
“됐다. 그런 시덥잖은 대화 따위.”
북부의 변경백, 오슬리 바텐베르크.
지난 날, 북부의 사건에서 시안의 도움을 받은 오슬리였다.
그리고 변경백이란 국경을 책임지는 귀족이었다.
비록 백작위에 머물고 있는 귀족이었으나, 그 막중한 책임과 권한으로 인해 다른 백작위보다 우위에 있었다.
해당 지역에서 행정, 군사, 사법상의 최고 권력자를 넘어, 일종의 자치권을 가진 변경백.
변경백은 해당 지역에서 사실상 왕이나 다름 없었다.
어떻게 보면 지위상으로는 백작이었지만, 권한 상으로는 공왕(公王)과 다름 없는 존재.
그렇기에 오슬리와 연을 트고자 하는 귀족들은 상당히 많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오슬리에게 먼저 말을 걸지 못했다.
일단 오슬리는 마스터(Master) 중급의 실력자.
오슬리는 대륙 제 2의 검을 논하는 자리에 빠지지 않는 실력자였다.
그런 오슬리가 인상을 찌푸리며 서 있으니.
그 위압감에 짓눌려 섣불리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님도 참···.”
그런 오슬리의 모습에 벤딩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오슬리의 아들이자 바텐베르크의 대공자, 벤딩턴 바텐베르크.
“그보다··· 은인께서 벌써 백작위를 받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 녀석의 행보를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보다··· 의외의 손님이 왔군.”
갑작스러운 오슬리의 말.
벤딩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오슬리는 별 다른 말이 없었다.
정확히는 시선을 돌려 연회장의 한 쪽을 바라볼 뿐이었다.
벤딩턴은 그런 오슬리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인 곳은 연회장의 정문.
이윽고 연회장의 정문이 열리며 일련의 사람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기나긴 로브를 입고 있는 마법사들.
벤딩턴의 기억에 있는 얼굴들이었다.
정확히는 로브에 새겨진 문양을 모르지 않았다.
“로르실트···?”
다름 아닌 로르실트 가(家)를 상징하는 그리핀 문양.
최강의 마법 병단이라 불리는 아르카닉(Arcanic) 마법 병단이었다.
그리고 가장 앞서서 들어오는 두 인물.
한 명은 파란 머리가 인상적인 사내이자 제국의 별 중 한 명인 파나트 로르실트였다.
그리고 그런 파나트의 옆으로 걸어들어오는 존재.
길게 내려앉은 백발과 잘 다듬어진 하얀 수염.
얼굴에 피어난 주름에서 묻어나는 세월의 깊이.
마치 삶에 통달한 현자를 연상케 하는 존재.
“에, 에그리트 후작···!”
로르실트 가(家)의 가주, 에그리트 로르실트.
“뭐, 뭐라고?”
“정말로 에그리트 후작이 왔다고?”
일순간 연회장이 크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모두가 하던 대화를 멈추고 로르실트를 바라봤다.
내려앉는 정적.
에그리트는 그 정적을 가로지르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멈칫.
어떤 존재를 인지한 듯 에그리트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이윽고 에그리트가 곧장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에그리트가 멈춘 곳은 다름 아닌 오슬리의 앞이었다.
마주보는 두 사람.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두 사람의 만남을 지켜보고 있었다.
“허허, 오래 살고 볼 일이군. 북부의 변경백께서 이런 행사에 참여할 줄이야···.”
“나야말로 오래 살고 볼 일이군. 그 엉덩이 무거운 마법사가 이런 자리에 참석할 줄이야.”
피식, 웃는 오슬리.
“물론 후작보다는 덜 살았지만.”
오슬리의 말에 에그리트가 껄껄, 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그때서야 벤딩턴과 파나트가 에그리트와 오슬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후작 각하를 뵙습니다.”
“변경백 각하를 뵙습니다.”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것으로 화답하는 오슬리와 에그리트.
오슬리는 다시 시선을 돌려 에그리트에게 말했다.
“그보다 무슨 바람이 불어 직접 온 거지? 설마하니 그 놈의 작위식을 축하해주기 위해 왔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맞네만.”
“능글 맞은 건 여전하군.”
오슬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슬리가 알고 있는 에그리트는 절대로 그럴 인물이 아니었으니까.
“뭐 때문에 온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이목을 끌 생각이었다면 실패했다고 말해주고 싶군.”
“허허. 이거, 아무래도 내가 주인공이 아니었나 보오.”
이윽고 약속이라도 한듯 오슬리와 에그리트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그와 동시에 벌컥, 열리는 연회장의 문.
그 열린 문으로 들어온 것은 한 여인이었다.
차분하게 내려앉은 백금발과 주변으로 풍기는 미의 아우라.
“서, 서, 성녀···!!”
신성 제국의 성녀, 아리아.
사실 아리아는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기에 아리아의 얼굴을 알고 있는 자는 극히 드물었다.
따라서 저 여인이 성녀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저 여인이 성녀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저 말도 안되는 미모.
저건 딱 봐도 성녀라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으니까.
“지, 진짜였어··· 진짜로 왔어···.”
“성녀가 왜 여기에···.”
아리아의 등장과 함께 연회장이 크게 들썩거렸다.
모두가 입을 쩌억, 벌리며 아리아를 바라봤다.
아리아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연회장을 가로질러갔다.
그럴 때마다 흩날리는 백금발은 주변으로 알 수 없는 향기가 흘러나왔다.
마치 미모에도 향기가 배어나오는 듯한 풍취.
혹자들은 성녀를 살아 움직이는 기적이라 칭한다.
정말로 그 기적이 행해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지금 보이는 아리아의 미모는 가히 기적이라 해도 믿을 수 있었다.
아리아는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둘러보았다.
마치 누군가를 찾듯, 연회장의 구석구석을 살폈다.
하지만 찾는 누군가가 없는 것일까.
아리아는 약간 실망한 표정을 지어보이더니 한적한 자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런 아리아를 향해 수많은 남자 귀족들이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보고자, 어떻게든 말이라도 한 번 섞어보고자 슬금슬금 아리아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런 광경을 지켜보던 오슬리와 에그리트.
“성녀는··· 정말 의외군.”
“그렇구려.”
둘은 그렇게 한 번씩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타국의 성녀가 올 이유는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더 이상의 충격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니까 성녀 이상으로 파격적인 손님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연회장의 귀족들 또한 그와 생각이 다르지 않았다.
오슬리와 에그리트 그리고 성녀까지.
이들을 뛰어넘는 손님이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하지만.
흠칫.
멈칫.
일순간 오슬리와 에그리트의 몸이 살짝, 떨려왔다.
이윽고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지며, 시선이 다시 한 쪽으로 향했다.
그와 동시에 둘의 시선으로 한 사내의 모습이 비쳐보였다.
짧게 친 금발의 머리와 무뚝뚝한 분위기.
마치 우두머리의 늑대를 연상케 하는 중년의 남성.
“엘란두르 후작···?”
엘란두르 가(家)의 가주, 듀라크 엘란두르.
듀라크가 성큼, 연회장의 안 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