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 비자금...?(2)
시안은 한동안 멍해진 정신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엘란두르의 비자금.
물론 엘란두르의 비자금은 말이 엘란두르의 비자금이었다.
실상은 브라헤 상단의 자금.
서부를 주름 잡던 대상단이 보유하던 거대 자금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들려온 한스의 말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러니까 어찌저찌 이해할 범주에 속하기는 했다.
“그게··· 말이 돼?”
그런데 말이 안 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몇 년 전, 소렌이 들고 도망친 브라헤의 자금은 약 3억 4천만 골드 정도였다.
실로 말도 안되는 천문학적인 자금이었고 그로써 제국 전역이 한동안 떠들썩 했었다.
물론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다를 수는 있었다.
그러니까 들고 도망친 자금이 그보다 더 많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끽해야 5천만 내외일 터였다.
5천만 이라는 앞에 어찌 ‘끽’이라는 단어가 붙을 수 있겠냐만은.
일단은 넘어가보자.
그럼 최대한으로 해봐야 3억 9천만.
아니, 대충 4억이라 치자.
“4억··· 8천만?”
그런데 왜 8천만 골드가 불어있느냔 말이다!
이건 말이 안 되었다.
비자금은 말 그대로 비자금.
이사벨이 수없는 더러운 일들을 하면서 야금야금 빼먹었을 것이니까.
그럼 반드시라고 할 만큼 줄어들어있어야했다.
기존 4억 골드 가량에서 못해도 1억 골드는 줄어들어있어야 했다.
그런데 늘어나있다?.
“이게 무슨···?”
시안은 이게 뭔 상황인가 싶었다.
“저, 저도 잘···.”
한스 또한 내뱉은 말에 확신이 없어보였다.
혹시 한스가 잘못들은 것이 아닐까?
4억 8천만이 아니라 4,800만 골드를 잘못들은 것이 아닐까?
어째 그럴 가능성이 커보였다.
이건 아무래도 직접 확인해봐야 할 것 같았다.
“지금 아멜리아는 어딨어?”
시안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
베니아 마을 사람들이 마련해준 거처.
아멜리아는 베니아 마을 한 집에서 머물고 있었다.
똑똑.
“아멜리아, 나야. 안에 있어?”
노크와 함께 집 안 쪽에서 분주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영주님? 드, 들어오세요!
이어 당황하는 아멜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안은 가볍게 문고리를 돌려 방 문을 열었다.
달칵.
문이 열리며 5평 남짓한 집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집인지 방인지 잠시 헷갈릴 지경이었다.
“언제 깨어나신거예요?”
완전히 열린 문으로 긴 적발의 미녀, 아멜리아의 얼굴이 비쳐보였다.
“방금. 깨어난지 얼마 안 되었어.”
“그런데 이렇게 움직이셔도 되는 거예요? 몸은요? 괜찮으신거예요?”
아멜리아가 와다다, 물어왔다.
한껏 걱정스러운 표정의 아멜리아.
어째 기절해있던 상태가 꽤나 안 좋긴 했었나보다.
그리고 뭐···.
사실 지금도 썩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휘몰아치는 탈력감에 자꾸만 눈꺼풀이 감겨왔다.
아득한 너머의 경지를 본 것 때문일까.
아직도 아찔한 두통이 끊이질 않았다.
무엇보다 메긴기요르드의 부작용.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전신의 근육이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근력 수련을 해놓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움직이지도 못했을 터였다.
아니, 아수라(阿修羅)를 시전할 수도 없었을 터였다.
뭐, 어쨌든.
몸을 움직일 만한 상태는 아니었다.
“견딜만 해.”
하지만 시안은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몸 상태고 나발이고,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앉아도 되지?”
“아! 네! 물론이죠.”
시안의 말에 아멜리아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미처 신경쓰지 못했다는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시안은 딱히 신경쓰지 않았다.
시안은 두리번두리번, 방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비치된 의자가 없음에 어쩔 수 없이 침대에 가서 털썩, 앉았다.
“여러모로 시간 끌어서 좋을 건 없으니까, 바로 본론만 말할게.”
단도직입적인 시안의 말에 아멜리아가 자세를 바로했다.
시안은 아멜리아의 눈을 바라보며 곧장 입을 열었다.
“엘란두르의 비자금. 정말··· 4억 8천만 골드야?”
“어··· 아뇨?”
그러자 아멜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해왔다.
시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지.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4억 8천만 골드가 된단 말인가.
역시 한스가 잘못들은 것이 분명했다.
시안은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그럼 얼마···?’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오던 그때.
“5억 골드가 조금 넘는 걸요.”
우뚝.
시안은 저도 모르게 몸이 굳어버렸다.
멍한 정신.
지금 아멜리아가 뭐라 한 거지?
“5천만 골드?”
“네? 아뇨. 5억 골드요.”
아멜리아는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답을 해왔다.
그리고 그 답은 방금 전과 달라져있지 않았다.
아니, 내 귀가 잘못된 건가?
아니면 정신 상태가 맛이 가버렸나?
아수라를 시전하면서 어딘가 이상해진 것 같기도 한 것 같은데.
아득한 경지를 넘으면서 정신도 아득해졌나?
“5억··· 골드?”
“네.”
하지만 아멜리아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
시안은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정말로 할 말을 잃어버렸다.
5억 골드.
“대, 대체 어떻게?!”
이 천문학적인 금액 앞에서 무슨 할 말이 있단 말인가!
부릅, 떠지는 두눈.
시안은 아멜리아에게 얼굴을 불쑥, 내밀며 소리쳤다.
“아··· 그게 말이죠.”
아멜리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어진 설명.
꽤나 복잡하고 어려운 설명이었지만 이해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엘란두르의 비자금이 5억 골드가 되어있는 이유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사벨이 비자금을 야금야금 빼먹은 건 맞다는 거지?”
일단 시안의 예상대로 이사벨이 비자금을 빼먹은 건 맞았다.
“네. 야금야금이라기 보다는··· 왕창 빼먹기는 했죠.”
빼먹을 때마다 기본 1천만 단위로 빼먹었단다.
또한 빼먹은 돈으로 더러운 일들을 한 것도 맞았단다.
하지만 더러운 일들을 한 것만은 아니었다.
“대부분은 사업을 벌였다?”
“네. 사실상 사업을 벌이기 위해 비자금을 꺼냈다고 보는 게 맞을 거에요.”
듣자하니 광업, 제조업, 도매업, 상업 등등.
손을 안 댄 곳이 없을 정도로 여러 방면의 사업을 벌였다.
그리고 사업을 벌였으면 그에 따른 수익이 있는 법.
“벌어들인 수익의 대부분을 다시 비자금에 모아놓았어요.”
그 수익의 대부분을 비자금으로 다시 모아놓았다고 한다.
한 마디로 비자금을 빼먹은 것이 아니라 투자를 한 셈.
“이번에 아벤느가에서 들어온 돈도 제법 있었고요.”
거기에 아벤느가에서도 이 비자금에 몇 푼 얹었다고 한다.
그 돈은 대략 4천만 골드 가량.
결코 몇 푼, 이라는 말로 정의내릴 수는 없는 금액이나 이 비자금 앞에서는 몇 푼이 맞았다.
뭐, 어쨌든.
기존 브라헤 상단의 자금인 3억 4천만 골드.
그 돈을 이사벨이 몇 년간 굴리고 굴려 불려놓은 골드.
여기에 아벤느가에서 얹은 몇 푼의 골드까지.
그 모든 골드들이 합쳐진 바.
“5억 골드가 조금 넘어요.”
이런 말도 안되는 금액이 모인 것이었다.
“······”
시안은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5억 골드란다.
5천만 골드도 아니고 5억 골드란다.
심지어 5억 골드가 조금 넘는단다.
“수령하실 수 있게 준비는 모두 끝마쳤어요. 영주님이 결재서 하나만 작성하시면 모든 절차는 끝나요.”
그 초월적인 돈을 결재서 한 장이면 얻을 수 있단다.
“······”
시안은 정말이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시안은 한동안 멍하니 아멜리아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멜리아의 모습은 정말이지 말이 아니었다.
거진 콧잔등까지 내려온 짙은 다크 써클.
잠을 자기는 한 것인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새하얀 피부는 관리를 하지 못해 조금씩 갈라져있었고.
윤기가 흐르던 적발의 머리칼은 한껏 푸석해져있었다.
겉으로만 보면 시안보다 아멜리아의 상태가 더 좋지 않아보였다.
그 때문일까.
시안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멜리아.
시안은 그런 아멜리아에게 말했다.
“아멜리아. 이 비자금과 관련해서 할 말이 있어.”
“네. 말씀하세요.”
꽤나 진지한 시안의 표정에 아멜리아는 다시 자세를 바로했다.
“난 이 비자금을 모두 가져갈 생각이 없어.”
“······ 네?”
일순간 아멜리아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왔다.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어째, 시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하기사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러나 시안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시안은 이 비자금을 곧이 곧대로 가져갈 생각이 없었다.
물론 엘란두르에게 나누어준다, 라는 어줍잖은 생각이 아니었다.
미쳤다고 그런 정신 나간 짓을 한단 말인가.
시안이 내뱉은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아멜리아, 너한테 줄 생각이야.”
“저··· 요?”
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5억 골드에 달하는 엘란두르의 비자금.
그러나 사실은 엘란두르의 비자금이 아니었다.
오래 전, 브라헤 상단의 자금.
지금은 비록 몰락했으나 브라헤 가문의 돈이라 할 수 있었다.
이사벨이 그 돈을 불려놓았으나 브라헤의 기본 자금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아멜리아는 브라헤 가문의 여식.
따라서 이 돈은 본디 아멜리아의 것이라 볼 수 있었다.
먼 시간을 돌아왔으나 본래 주인으로 돌아가야할 돈이었다.
“난 브라헤의 돈을 제한 돈만 받을거야.”
물론··· 시안의 몫도 챙길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본디 브라헤의 것이었던 3억 4천만.
그것을 제한 금액인 1억 6천만 정도만 가져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다.
엘란두르의 비자금이 브라헤 상단의 자금이라는 것을 안 때부터.
엘란두르의 비자금을 찾으려는 생각을 했을 때부터.
시안은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다.
“저··· 저, 저는···.”
아멜리아가 말을 더듬으며 횡설수설하기 시작헀다.
시안을 바라보는 눈빛이 심히 떨려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
아멜리아가 고개를 푹, 숙여보였다.
솔직히, 솔직히 말하면.
아멜리아 또한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으니까.
브라헤가 몰락하고 지난 수 년.
아멜리아는 몰락한 가문을 일으켜 세우고자 여인의 몸으로 제국을 누볐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현실의 벽에 가로막혀 좌절했었다.
아무리 발악해도 안되는 현실에 수없이 절망했었다.
하지만 이 돈이면··· 가능했다.
이 돈이면 몰락한 브라헤 가문을 일으켜세우는 것이 가능했다.
바라마지 않던 가문을 일으켜세우는 것이 충분히 가능했다.
무엇보다 이 돈은 본디 브라헤의 것.
아멜리아가 가진다고 한들 그 누구도 뭐라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된다 생각하고 있었던 찰나였다.
그런데 지금 들려온 시안의 말.
아멜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시안은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방금 했던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듯 바라보는 눈빛에는 진심이 담겨있었다.
그래서일까.
“감사···해요. 영주님.”
아멜리아는 지금 이 순간 시안이 너무도 고마웠다.
저렇게 말해주고, 또 이런 결정을 내려주어서.
“뭘. 어차피 내 돈도 아니었는데.”
시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멜리아에게 돈을 주는 것에 있어 아깝다는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돈을 좋아하고 환장하던 시안이었거늘.
시안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깝다는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1,000 골드에도 절친한 친우의 등을 돌리는 세상이다.
10,000 골드면 형제 부모도 배신하는 세상이었다.
하물며 억 단위 돈이라면야 등에 칼을 꽂아도 그럴 수 있지, 라며 끄덕일 수 있었다.
실제로 소렌은 그러했었다.
하지만 시안은 그러지 않았다.
간단하지만 간단하지 않은 차이.
어쩌면 그래서일까.
아마, 그래서인 것 같았다.
아멜리아는 작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받지 않을게요.”
“······ 뭐?”
시안은 순간 크게 당황해보였다.
그 얼빠진 모습에 아멜리아는 그만 풉, 하고 웃어버렸다.
“영주님께서 어떤 의미로 말씀하시는지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래도 받지 않을게요.”
“왜···?”
시안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어왔다.
아멜리아는 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아멜리아도 뭐라 설명할 말을 찾지 못했으니까.
“이 돈이면 브라헤 가문을 일으킬 수 있잖아. 그건 아멜리아, 네가 언제나 꿈꿔오던 일이 잖아.”
시안과 처음 만났을 때 나누었던 이야기.
오랜 시간이 흘렀건만 시안은 그 이야기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래, 오랜 시간의 일이었다.
몰락한 브라헤 가문을 일으켜세우는 것.
그건 아멜리아가 오랫동안 꿈꿔오던 일이었다.
시안의 밑으로 들어온 이유도.
시안과 함께 루벤을 발전시킨 이유도.
모두 브라헤 가문을 일으켜세우기 위함이었다.
처음, 시안과의 만남은 어떤 목적이 있어서였다.
시안은 아멜리아로부터 골드를.
아멜리아는 시안으로부터 어떤 세력을.
어떻게 보면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사이.
그러나 그 간극에 있어서 서로에게 어떤 의지가 될 수 있을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에요.”
이제는 아니었다.
점점 발전하는 루벤을 지켜보면서.
잃어버렸던 사람들의 웃음이 되찾아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아멜리아의 생각이 조금씩 달라졌다.
정확히는 이들과 조금 더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아멜리아는 마음을 다잡았다.
아멜리아에겐 반드시 해야만 하는 사명이 있었으니까.
몰락한 가문을 일으켜 세워야하는 숙명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아멜리아는 생각을 다잡았다.
그리고 이번에 만날 수 있었던 소렌.
브라헤 가문을 몰락시킨 주동자이자 과거라는 이름의 잔재.
소렌은 그저 배신자였다.
가문을 배신해야만 했던 어떤 필연적인 이유가 있지 않았다.
반드시 그러해야만 했던 사연 또한 없었다.
그저 욕심으로 일그러진 배신자에 지나지 않았다.
허탈했다.
아멜리아의 모든 것이었던 가문이 한낱 욕심으로 몰락했다는 것이.
가슴 절절하고도 어쩔 수 없는 사연이 아니라 그냥 욕심으로 몰락했다는 것이.
마주한 진실은 너무도 허탈했다.
그러나 왜일까.
한편으로는 후련한 마음이 들었다.
그토록 쫓아해맸던 과거의 망령.
허무한 진실을 마주한 순간, 가슴 속의 어떤 강박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왜 브라헤를 일으켜 세우려했던 걸까.
나는 왜 그토록 가문을 부흥시키는 것에 집착했던 걸까.
브라헤는 몰락했다.
이건 변하지 않는 지나간 과거다.
그 어떤 노력을 해도 바꿀 수 없는 과거.
나는 브레헤를 일으켜세우려던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 과거를 바꾸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아멜리아의 꿈은 여전히 몰락한 가문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그 꿈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방향은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여지가 있지 않을까.
몰락한 브라헤가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쫓는 것이 아니라.
“저는 지금 살고 있는 루벤이 좋은 걸요.”
현재라는 지금.
과거의 브라헤가 아니라 새로운 브라헤, 루벤 브라헤 상단.
“이 돈은 제가 아니라, 영주님이 써주세요.”
아멜리아는 더 이상 과거가 아닌 현재와 미래를 쫓기로 다짐했다.
아멜리아는 그 말을 끝으로 배시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시안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아멜리아의 말.
지금 아멜리아의 표정.
피곤에 절어있는 얼굴이었지만 어딘가 후련한 기색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건 지금의 시안과 상당히 닮아있었다.
얽매어있던 무언가로부터 벗어난 모습처럼 보였다.
시안이 로즈웰과 네이슨을 통해 과거를 끊어낸 것처럼.
아멜리아 또한 소렌을 마주하며 과거라는 이름의 족쇄를 끊어낸 것일까.
모르겠다.
“그러니 영주님이 저 책임지셔야해요.”
아멜리아는 그저 배시시, 웃어보일 뿐이었으니까.
“아, 앗···! 그, 그게··· 그, 그런 뜻이 아니라···!”
일순간 아멜리아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크게 당황하며 허둥지둥, 손사래를 쳐보였다.
“그러니까··· 책임져달라는 게 그렇고 그런다는 뜻이 아니··· 아, 아뇨 그런다는 게 그러니까···.”
또 다시 아멜리아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아멜리아는 허둥지둥, 손사래를 치던 두 손으로 스스로의 얼굴을 덮었다.
시안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 웃음을 흘렸다.
언제나 똑 부러지던 모습을 보이던 아멜리아거늘.
이럴 때면 가녀린 소녀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시안은 아멜리아에게 천천히 다가가갔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아멜리아는 시안이 온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시안은 그런 아멜리아를 가볍게 안아주었다.
“하, 핫···!”
그러자 아멜리아가 기겁을 하며 놀라보였다.
하지만 크게 반항하지 않고 시안에게 안겨왔다.
시안은 그런 아멜리아에게 말했다.
“확실히 책임질게.”
“채, 채, 채, 채, 채, 책임··· 책임··· 책임···.”
아멜리아의 목소리가 거의 기어들어가다시피 들려왔다.
얼굴을 덮은 손가락 사이로 비치는 아멜리아의 얼굴.
새빨갛게 달아온 얼굴은 저게 사람 얼굴인지, 홍당무인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이윽고 품에 안긴 아멜리아에게서 푸쉬쉬, 하는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사람한테서 들려올 수 있는 소리인가? 싶은 것도 찰나.
아멜리아의 머리 위로 뜨거운 김 같은 것이 올라오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마치 마도구가 과부하를 일으켜 고장이라도 난 듯한 모습.
풀썩.
아니나 다를까, 아멜리아가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
고장난 아멜리아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고쳐지지 않았다.
평소에는 가만히 내버려두면 알아서 고쳐졌는데 이번에는 어째 그렇지가 않았다.
혹시 몸에 문제라도 생긴 것일까.
시안은 곧장 한스에게 도움을 청했다.
한스는 보니타와 함께 아멜리아의 상태를 살폈다.
아무래도 여인의 몸을 살피는 건 같은 여인이 필요한 법이었으니까.
그렇게 아멜리아의 상태를 살핀 보니타.
보니타는 한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고 이내 한스가 시안을 바라봤다.
“아멜리아님 한테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그리고 왜인지 게슴츠레한 눈빛을 지어보였다.
“무슨 짓이라니? 내가 뭘?”
“과한 흥분으로 인한 탈진이랍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멜리아님이 탈진하실 때까지 하신 겁니까?”
“무슨 소리야? 뭘 했다는 거야? 나 아무 짓도 안했어.”
시안은 억울하다는 듯 손사래를 쳐보였다.
정말 아무짓도 안 했으니까!
고생했고 또 고맙다는 의미로 가볍게 안아준 것.
그리고 책임지라는 말에 책임지겠다 말한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아멜리아가 저 혼자 고장났을 뿐이었다.
“제가 도련님의 사생활까지 간섭할 것은 아닙니다만···.”
“왜 그래 한스. 백작 각하께서도 어엿한 남자신데. 브라헤 영애가 상당한 미인이기도 하고.”
그런데 한스와 보니타가 나누는 대화가 영 심상치가 않았다.
뭔가 오해를 해도 단단하고 있는 듯한 모습.
“아니. 나 진짜 아무 짓도 안했다니까?”
시안은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지만.
“네 알겠습니다. 황녀님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황녀님? 와! 백작 각하 능력이 엄청나잖아? 하긴··· 백작 각하 정도면야.”
어째,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렇게 한스와 보니타는 아멜리아를 데리고 방 밖을 나섰다.
아멜리아를 데리고 가면서 또 뭐라뭐라 했지만 시안은 듣지 않았다.
말해봤자 괜히 입만 아플 것이 분명했으니까.
무엇보다 지금 당장 처리해야하는 일이 있었으니까.
“5억 골드라···.”
다름 아닌 엘란두르의 비자금.
솔직히 썩 와닿지 않는 금액이었다.
그러니까 이게 정말 인벤토리에 담길 수 있는 금액인가 싶었다.
하지만 아멜리아가 남기고 간 결재서는 분명 5억 골드가 찍혀있었다.
시안은 고민 끝에 결재서에 이름을 적어넣었다.
이제 이 결재서를 가지고 비자금을 수령하면 되었다.
아멜리아가 고장나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아멜리아가 모든 절차를 마무리 해둔 덕에 혼자서 하는 것에 어려움은 없었다.
아멜리아가 고쳐지길 기다릴 수도 있었지만 이번엔 어째 그 기간이 길었다.
괜히 시간을 끌었다가 이사벨이 또 어떻게 나올지 모를 일.
시안은 곧장 결재서를 가지고 아멜리아가 적어둔 도시들을 방문했다.
그리고 그 과정과 절차는 매우 단순했다.
이 역시 아멜리아가 모든 것을 끝마쳐놓았으니까.
“자, 자, 자,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물론 상당히 시끌시끌한 소란이있었다.
그리고 5억 골드라는 천문학적인 자금이 움직이는 일.
“남부에 어마어마한 자금이 움직였다는데?”
“듣기로는 엘란두르의 비자금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알게 모르게 소문이 안낼래야 안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문제 없이 모든 비자금을 수령할 수 있었다.
[현재 보유 중인 골드] - 521,345,000 G
그렇게 시안은 모든 비자금을 수령할 수 있었다.
“······”
시안은 멍하니 스마트 폰을 바라봤다.
화면 위에 찍은 금액 521,345,000 골드.
무려 5억 하고도 2,100만골드가 더해진 금액이었다.
이게··· 이게 말이 되는 금액일까?
눈앞에 보이는 것은 명백한 현실이었으나 머리가 현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시안은 정말 멍하니 스마트 폰의 화면을 바라봤다.
바로 그때.
띠링!
갑자기 스마트 폰에서 경쾌한 알림음이 들려왔다.
뭔가 싶은 것도 잠시.
《모바일 영주 개같이이이이이 두둥 등장!》
화면 가득히 모바일 영주의 알림창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타이밍 좋게 점검이 끝난 것 같았다.
《긴 점검을 끝내고 개같이 부활한 모바일 영주!》
《그리하여 초월적으로 강력해진 모바일 영주우우!》
띠링!
《더 이상 기절하지 않는 모바일 영주! 이제 킹바일 영주를 넘어 갓바일 영주가 되었다!》
《또 한 번 기절한다면 그건 갓바일 영주가 아니다!》
《나는야 킹! 하! 갓! 적~☆》
역시나 모바일 영주답게 그 호들갑이 어디 가지 않았다.
점검과 함께 호들갑도 강해진 것이 아닐까 싶은 모습이었다.
《자, 우리 모두 다 같이 한 번 외쳐보아요!》
《모바일 영주 개같이이이이이이이─!》
멈칫.
그 순간 모바일 영주가 일순간 멈칫, 거렸다.
확실하지는 않았다.
그저 착각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현재 보유 중인 골드] - 521,345,000 G
하지만 시안은 모바일 영주가 이 화면을 보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개같이이이이이이이─!》
《개같··· 이이이이이···!》
[현재 보유 중인 골드] - 521,345,000 G
《개같이이··· 개같이이이···.》
《개··· 같이···.》
《개, 개, 개··· 같이···.》
띠링!
《······ 퇴장!!!!!!!》
깨꼬닥.
[연장 점검을 실시합니다.]
[서버와의 연결이 끊어졌습니다. 모바일 영주를 종료합니다.]
“······ 뭔데?”
시안은 뭐하는 생쇼인가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