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 정면돌파(2)
아벤느가 백작성의 접객실.
웅장한 아벤느가의 백작성에 걸맞게 접객실 또한 널찍하고 또 고풍스러웠다.
일반적인 서민들은 물론.
같은 백작들도 쉬이 가질 수 없는 크기와 인테리어의 접객실.
“돈도 많나보네.”
시안은 접객실의 내부를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니, 그보다 언제 와?”
아무리 기다려도 별 다른 반응이 없는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확히는 아벤느가 백작.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홀란트 백작의 모습에 시안은 뭔가 싶었다.
“분명 보고가 들어갔을텐데?”
시안이 백작성에 들어온 지 대강 30분가량이 지나있었다.
보고가 되었어도 진즉에 되었어야 할 시간이었다.
그리고 보고가 되었으면 당장이라도 의자를 박차고 뛰어와야했다.
얼굴을 울그락불그락 일그러뜨리며 달려왔어야했다.
이렇게 30분이 넘도록 감감 무소식일 수가 없었다.
“설마 중간에 보고가 누락되었나?”
···싶었지만 설마하니 그럴라고.
시안은 뭔가 싶어 고개를 한 번 갸웃거렸다.
그리고 오우거도 제 말하면 온다고 하던가.
쿵쿵!
접객실 밖으로 쿵쿵, 거리는 진동이 울려왔다.
마치 진각을 내딛듯 노기가 가득찬 발걸음.
“드디어 오나보네.”
콰앙!
시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접객실 문이 박살이 나듯 열렸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한 노인은 이사벨을 닮아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이사벨이 닮은 노인의 얼굴.
“오랜만입니다 할아버님.”
다름 아닌 홀란트 아벤느가 백작이었다.
시안의 말에 접객실을 훑어보던 홀란트의 시선이 멈추었다.
이윽고 고개가 부서져라 시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뭐라? 할아버님?”
그리고 들려온 홀란트의 목소리.
“네가 드디어 미쳤나 보구나!”
이윽고 노기 가득한 외침이 시안을 향해 쏟아졌다.
시안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말했다.
“오랜 만에 만난 손주인데, 말씀이 좀 지나치십니다.”
“뭐, 뭐? 소, 손주??”
그러자 홀란트가 발작이라도 일으키듯 노발대발 소리쳤다.
마치 너같은 손주를 둔 적이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는데.
“난 너같은 손주를 둔 적 없다!!”
역시나 그런 것 같았다.
그리고 뭐···.
맞는 말이긴했다.
시안은 듀라크와 핏줄이 이어졌을 뿐.
이사벨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홀란트는 이사벨의 아버지.
당연히 홀란트와도 피 한 방울 섞여있지 않았다.
그러니 손주··· 라고 칭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명목상으로는 이사벨은 시안의 어머니였다.
그에 따라 홀란트 또한 시안의 외할아버지라 할 수 있었다.
물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관계이다만.
품격과 품위를 중요시하는 귀족 사회에선 그 ‘명목’이라는 이름은 무시할 것이 못 되었다.
“네가 정녕 미친 게로구나!!”
그래도 손주라 부르기엔, 역시나 무리가 있었지만.
“뭣들 하느냐! 당장 이 자식을 포박하지 않고!!”
이어진 홀란트의 외침과 함께 접객실 안으로 수많은 병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아벤느가 백작령의 병사들.
간간히 기사로 보이는 이들 또한 섞여있었다.
시안은 그때서야 홀란트가 왜 이렇게 늦게 온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또 아무리 화가 잔뜩 났다고 한들.
접객실 밖으로 진각을 내딛는 소리가 들려오나 했더니.
“사지 하나쯤 잘라도 책하지 않겠다!”
백작성의 병력들을 끌어 모으느라 늦었던 모양이었다.
이어진 홀란트의 외침에 병사와 기사들이 천천히 다가왔다.
서슬 퍼런 기세를 풍기며, 서서히 시안을 압박해왔다.
그리고 시안은 아무런 무장 상태가 되어있지 않았다.
아벤느가 백작성에 들어오기 전.
몸수색을 통해 가진 바 무기를 모두 반납했으니까.
하지만 겉보기로만 그렇다 뿐.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다.
일단 허리에 차고 있는 메긴기요르드는 물론.
SSS등급의 검 또한 인벤토리에 얌전히 들어있었으니까.
반납한 무기는 그저 눈속임 용.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 검을 뽑아들 수 있었다.
하지만 시안은 별 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다짜고짜 싸움이나 하자고 이곳, 백작성을 찾아온 것이 아니었으니까.
서슬 퍼런 기세 속.
시안은 노기 가득한 홀란트에게 말했다.
“아벤느가는 손님 대접을 이런 식으로 하는 겁니까?”
“뭐? 손님? 난 너를 손님으로 초대한 적이 없다!”
홀란트는 수작부리지 말라는 듯 일갈했다.
어느덧 가까이 다가온 아벤느가의 병사와 기사들.
이윽고 아벤느가의 병사와 기사들이 시안을 억압하려던 찰나.
“저는 제국의 백작입니다. 지금 하시려는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는 알고 계시는 겁니까?”
멈칫.
이어진 시안의 말에 아벤느가의 병사와 기사들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뭐라···? 지금 그게 무슨···.”
당황하는 홀란트의 표정.
시안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저는 현재 할아버님과 같은 백작의 지위에 있습니다.”
“누가 네 놈의 할아버님이라는 게냐!!”
홀란트가 버럭, 소리쳐왔지만 시안은 가볍게 무시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까.
지금 중요한 건 하나.
“지금 할아버님께서는 손님으로 찾아온 제국의 귀족을 억압하려드시는 겁니까? 그것도 같은 백작의 귀족을요?”
시안의 말에 홀란트는 아무런 말을 꺼내지 못했다.
뭐라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벙긋거렸으나 딱 그 뿐.
홀란트는 끝내 아무런 말을 내뱉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시안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홀란트는 모르지 않았으니까.
물론 시안은 초대받지않은 손님이었다.
하지만 손님으로 초대했든 초대하지 않았든.
시안은 현재 백작위로서 제국의 고위 귀족이었다.
홀란트와 동등한 지위.
홀란트는 그런 귀족을 겁박하고 있는 것이고.
물론 적대적 관계라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아벤느가와 루벤은 딱히 적대적 관계라고 할 것이 없었다.
뭐, 깊게 파고들면 적대적이다 못해 원수지간이었으나.
가문과 가문으로만 본다면 그렇지 않았다.
애초에 적대적 관계여도 이런 식은 아니었다.
본래 전쟁 중에도 적국의 사신은 죽이지 않는 법.
시안이 몰래 백작성에 잠입해서 들켰다면 또 모를까.
시안은 당당하게 백작성의 정문을 통해 들어왔다.
몸수색도 하고 가진 바 무기도 반납했다.
적의가 없음을 만천하에 밝히고 들어왔다.
공식적인 모든 절차를 시안은 거부하지 않았다.
반면에 홀란트는 그런 시안을 병사와 기사들을 대동하여 겁박하고 있었다.
이는 명백한 귀족 모욕죄.
이를 귀족 사회가 그리고 제국이 가만히 두고볼 리가 없었다.
그 사실을 홀란트라고 모르지 않았다.
“이, 이···!”
그렇기에 홀란트는 이 이상의 움직임을 보일 수가 없었다.
한 마디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역시.
신분이 깡패였다.
“네··· 네놈···!”
그렇게 분노만 속으로 삭히고 있을 그때.
“이게 누구야.”
접객실 밖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상당히 낯익은 목소리.
시안의 고개가 자연스레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향했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내는 목소리의 주인.
“어···라?”
시안은 저도 모르게 이런 소리를 내뱉어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그 목소리의 주인.
그러니까 지금 접객실 안으로 들어오는 한쌍의 남녀.
“우리 막내 아니야?”
그건 다름 아닌 로즈웰과 네이슨이었으니까.
멍한 정신.
“형님과 누님이 왜 여기에···?”
시안은 뭔가 싶었다.
진짜 뭔가 싶었다.
로즈웰과 네이슨이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
물론 있을 수야 있었다.
여기 아벤느가는 로즈웰과 네이슨의 외가였으니까.
시안과는 달리 둘에게는 진짜 외할아버지의 가문이었다.
그러니 로즈웰과 네이슨이 있을 이유야 충분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지금?
이 타이밍에?
시안은 정말로 당황하는 심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두 분이 왜 여기에 계십니까?”
“내가 묻고 싶다. 네 놈이야말로 왜 여기에 있지?”
시안의 말에 네이슨이 답했다.
그리고는 터벅, 시안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감히···!”
이윽고 네이슨의 표정이 울그락불그락해지더니.
곧 어마어마한 기세를 터트리며 시안을 억압해왔다.
피부 끝을 찌르는 명백한 살의(殺意).
어째, 지난 번 엘란두르 저택에서 봤을 때보다 더 성장한 것 같았다.
하지만.
“뭡니까?”
성장한 건 비단 네이슨 뿐만이 아니었다.
“······!”
아무렇지도 않은 시안의 모습에 네이슨의 눈이 크게 떠졌다.
가만히 지켜보던 로즈웰 또한 살짝 놀란 눈을 떠보였다.
“이번엔 형님이 저를 겁박하시는 겁니까? 귀족 작위도 못 받으신 분이?”
그리고 이어진 시안의 말.
“네 놈이···!!!!”
네이슨이 거진 눈을 까뒤집으며 노기를 터트렸다.
하지만 아까처럼 섣불리 행동에 나서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시안의 말.
그 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귀족가의 자제는 엄밀히 말하면 제국에서 인정하는 귀족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제국법상 인정하는 귀족이 아니었다.
쉽게 예를 들어 후작가의 자제라 한들.
후작이라는 작위를 받은 것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제국법상 인정하는 귀족은 작위를 받은 귀족 한 명이었다.
즉, 엄밀히 따지면 후작가의 자제는 작위가 없는 귀족.
신분상으로는 남작보다 낮은 지위라 볼 수 있었다.
비록 네이슨이 엘란두르 후작의 자제라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자제일 뿐, 후작의 지위는 아니었다.
한 마디로 백작위를 받은 시안보다 낮은 신분.
“이, 이 새끼가···!!”
그렇기에 눈만 까뒤집고 있다 뿐.
네이슨은 섣불리 행동에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역시.
신분이 깡패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측면일 뿐이었다.
세상 사 모두가 그렇듯, 법보다 주먹과 칼이 가까운 법.
실질적인 권한과 위명은 남작보다 후작가의 자제가 압도적이었다.
“내가 그 까짓 명분에 휘둘릴 것 같으냐!!!”
분기탱천한 네이슨의 분노가 한계에 도달했다.
챙─!
결국 네이슨이 근처에 있던 기사의 검을 빼앗아 뽑아들었다.
그리고 시안에게 달려들려던 찰나.
“그만해.”
로즈웰이 한 발 나서며 그런 네이슨을 막아섰다.
“누나!!”
네이슨이 로즈웰을 향해 소리쳤지만 로즈웰은 물러나지 않았다.
“같잖은 도발에 넘어가서 일을 크게 만들지마. 지금 네가 시안을 겁박하면 황가가 나설 명분이 생겨. 그깟 감정 때문에 일을 그르칠 셈이야?”
그리고 이어진 로즈웰의 말.
네이슨은 이를 까득, 깨물었다.
홀란트가 시안을 어찌할 수 없었던 이유.
그 이유를 네이슨이라고 모르지 않았으니까.
“젠장!”
네이슨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삼키며 끝내 검을 바닥에 집어던졌다.
이판사판 달려들 줄 알았더니.
그래도 감정을 제어하는 네이슨이었다.
‘웬일이래?’
시안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일 뿐이었다.
로즈웰은 그런 네이슨을 뒤로 한 채, 시안을 가만히 바라봤다.
시안 또한 시선을 돌려 로즈웰을 바라봤다.
평온한 시선.
네이슨과는 달리 이성적으로 보이는 로즈웰이었다.
하지만 시안은 알고 있었다.
로즈웰이 괜히 저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사실 네이슨의 반응이 정상적이었다.
현재 시안과 엘란두르와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네이슨의 분노는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어째서 로즈웰과 네이슨이 여기에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보자마자 시안을 죽이려 드는 네이슨은 정상의 범주에 속했다.
그런데 로즈웰은 그러지 않았다.
침착함과 차분함을 유지하는 건 전혀 상식적이지 않았다.
그리고 어릴 적부터 로즈웰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앞에서는 아닌 척, 자신은 모르는 척.
속내를 감추고 일을 꾸몄다.
그리하여 누구보다 악랄하고 끔찍한 방법으로 시안을 괴롭혔다.
시안을 챙겨주는 척, 간식 속에다 벌레를 집어넣는다던지.
시안을 위하는 척, 대련을 핑계로 두들겨 팬다던지.
심지어는 시안의 어머니, 세실.
세실을 건드리기까지 했다.
세실이 말을 하지 않았던 터라 어떤 식이었는지 시안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로즈웰이 세실을 건드렸을 때면.
세실은 몸이 안 좋다는 이유로 시안에게 며칠 동안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세실을 만나지 못해 우울해하던 시안을 보며.
로즈웰은 낄낄거리며 좋아라했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억지를 부려서라도,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을 달성해야만 직속이 풀리는 로즈웰.
로즈웰의 속내를 모를 만큼 시안이 겪어온 세월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네가 여기를 찾아올줄은 몰랐네.”
“저도 누님과 형님이 여기에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만.”
“루벤에 틀어박혀 있는 줄 알았는데.”
“영지를 다스리다보니 이것저것 필요한 것이 많아서 말이죠. 용돈 정도로는 영지민들 먹여 살리기가 힘듭니다.”
시안의 답에 로즈웰의 눈썹이 약간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로즈웰이 표정을 바꾸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어떻게, 가볍게 다과라도 먹으면서 이야기라도 나누는 건? 식사라도 함께하고 싶지만 우리는 지금 막 식사를 끝낸 참이라서 말이지.”
시안은 가만히 로즈웰을 바라봤다.
앞선 말마따나 시안에 대한 반응은 네이슨이 정상이었다.
그런데 로즈웰은 정작 태평하게 티타임이나 하자고 제안하고 있었다.
“네 말마따나 너는 손님으로 온 것이잖아?”
로즈웰이 싱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번엔 도대체 뭘 꾸미고 있는 걸까.
생각을 거듭했지만 역시나 알 수 없었다.
시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알 수 없는 로즈웰의 꿍꿍이.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만···.
솔직히 상관없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설령 일이 수틀리게 된다 한들.
그땐 그냥 한바탕 뒤집어버리면 되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좋습니다.”
이렇게 되면 일이 훨씬 수월해질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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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타임은 자리를 옮기지 않고 이곳.
접객실에서 진행되었다.
딱히 자리를 옮길 이유도 없었거니와.
정말로 한가로이 티타임이나 즐기자고 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접객실에는 때 아닌 티타임이 행해졌다.
테이블에는 갖은 다과와 향긋한 내음이 나는 차(茶)가 세팅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런 테이블에 앉아있는 4명의 사람.
아벤느가의 가주, 홀란트 아벤느가.
로즈웰 엘란두르와 네이슨 엘란두르.
마지막으로 시안이었다.
시안은 자신 앞에 놓인 찻잔을 가볍게 들어보였다.
꽤나 고급진 차인지 찻잔을 들자마자 향기가 퍼텨자나왔다.
시안은 가볍게 찻잔을 홀짝이며 차 맛을 음미했다.
물론 독을 탔나···? 싶은 의문이 있었으나.
크게 개의치 않았다.
전설 속 엘릭서의 힘을 흡수한 시안.
연금술의 궁극이자 만병통치약이라 불리는 엘릭서.
웬만한 독 따위는 시안을 위협할 수가 없었으니까.
시안은 찻잔을 살며시 내려놓고 차분히 시선을 들어보였다.
그런 시야로 홀란트와 네이슨은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해져있었다.
이 자리가 불편한지 자꾸만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하기사, 사지를 찢어도 모자랄 판에 태평하게 찻잔이나 들이키고 있으니 열불이 터질 수 밖에.
다만, 로즈웰은 그렇지가 않았다.
시안과 마찬가지로 여유롭게 차의 맛을 음미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윽고 들려온 로즈웰의 목소리.
로즈웰이 살며시 찻잔을 내려놓았다.
“네가 뜬금없이 여기에 찾아온 이유를 좀 들을 수 있을까?
로즈웰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물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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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님께서 지금 막 백작성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레이슨의 보고에 한스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지금이라도 시안을 뜯어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음을 알기에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정확히는 시안의 말마따나 이 방법 말고는 소렌을 잡을 방법이 없었다.
한스는 살짝 시선을 내리며 아까 전의 일을 떠올렸다.
다름 아닌 여관 방에서의 일.
‘미끼가··· 되신다는 말씀입니까?’
‘맞아.’
시안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스의 말처럼 내가 백작성에 들어간다 한들. 소렌을 찾기란 어려워. 정확히는 소렌을 찾는다 한들··· 잡을 수가 없지.’
그도 그럴 것이 여긴 적진의 한복판이었으니까.
시안이 소렌을 잡아가도록 가만 보고 있을리가 없었다.
애초에 소렌을 찾을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도 않을 터였다.
사지를 찢으려들지 않으면 다행이지.
‘물론 백작의 작위를 들먹이면 홀란트도 나를 어찌할 수는 없을거야. 하지만 내가 수상한 행동을 보인다면 다르겠지.’
그건 홀란트에게 명분을 주는 것이니까.
‘그러니 내가 백작성에서 할 수 있는 건 없어.’
하지만 하나.
‘백작성 자체를 들 쑤실 수는 있지.’
한스는 처음에 저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비단 한스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 또한 시안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시안은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차분히 계획을 설명했다.
‘소렌은 내가 자신을 쫓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해. 나는 그 맹점을 파고들어 백작성을 들 쑤실거야. 그러니까 내가 소렌을 쫓고 있다는 사실을 밝힐 거라는 뜻이지.’
‘하지만 그러면···.’
‘알아. 그럼 소렌은 흔적을 감추고 도망치겠지.’
이어진 시안의 말.
‘바로 그 맹점을 노리자는 거야.’
시안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과거, 그 무수한 추격에도 단 한 번도 발각되지 않았던 소렌이야. 그런 소렌이 내가 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생각해봐. 그리고 그런 내가 소렌이 있는 곳. 백작성까지 들어왔다고 생각해봐. 그럼 소렌이 할 수 있는 행동이 뭐일거 같아?’
‘소렌이 반드시··· 행동을 취할 것이라는 말씀이군요.’
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소렌은 어떤 식으로든 행동에 나설거야. 자신을 쫓고있는 내가 코앞까지 들이 닥쳐왔으니까. 그것이 꼬리를 말고 숨는 것이든, 아니면 도망치는 것이든. 소렌은 반드시 움직여.’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는 알 수 없었다.
꼬리를 말고 숨을지, 아니면 어디론가 멀리 도망칠지.
그것까지는 예측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소렌은 반드시 백작성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어.’
어떤 식으로든 소렌은 백작성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자신을 쫓고 있는 시안이 백작성 안에 있으니까.
최대한 시안으로부터 멀어져야하니까.
그렇게 소렌이 백작성 밖으로 나오면.
‘너희들이 밖에서 기다렸다가 소렌을 잡아.’
.
.
.
한스는 당시의 기억을 곱씹었다.
한 마디로 토끼몰이 작전.
소렌이 백작성 밖으로만 나오게 하면 되었다.
그러면 위고를 비롯한 한스의 동료들이 잡을 수 있었으니까.
추적술의 달인, 그레이슨의 추적을 벗어날 수 없을테니까.
그렇기에 이 작전의 가장 큰 핵심은 이것.
“시안 백작께서 할 수 있을까?”
시안이 백작성을 어떻게 들 쑤시느냐.
그러니까 소렌이 백작성 밖으로 나오게 할 수 있느냐, 였다.
사실 소렌 입장에서 백작성보다 안전한 곳은 없었다.
아벤느가와 엘란두르의 비호를 받을 수 있는 공간.
제국을 전역을 뒤져봐도 이곳보다 안전한 곳은 없었다.
그런 소렌에게 ‘백작성이 안전하지 않다’ 라는 생각이 들게 해야했다.
아무리 시안이 백작성 앞까지 들이닥쳤다 한들.
소렌에게는 백작성이 가장 안정한 공간이었다.
한 마디로 등껍질에 목을 숨긴 거북이가 자신의 등껍질이 안전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해야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거북이에게 평생을 살아온 자신의 등껍질이 안전하지 않다고 여기게 하다니.
한스는 어떻게 해야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스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모두 준비하게.”
한스는 시안을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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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웰의 물음에 시안은 가만히 로즈웰을 바라봤다.
싱긋, 미소짓는 얼굴에 차분한 표정.
이사벨을 닮아서 그런지 모르겠다만.
역시나 속내를 알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변수였다.
로즈웰과 네이슨의 존재는 계획에 없던 변수였다.
시안은 로즈웰과 네이슨이 아벤느가 백작성에 있는지 몰랐으니까.
그렇기에 계획이 살짝 틀어졌다만 큰 문제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잘 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이러면 백작성을 들 쑤시기에 더 용이했으니까.
보아하니 로즈웰과 네이슨은 비자금 때문에 아벤느가에 온 것 같았다.
그럼 굳이 번거롭게 시안이 나서지 않아도 되었다.
조금만 찌르면 둘이 알아서 해줄 것이 분명했다.
등껍질에 숨은 거북이가 가장 안전하다고 믿는 등껍질.
그 등껍질은 사실 가장 위험한 곳이라는 생각을 거북이가 아니라, 로즈웰과 네이슨이 하게 만들면 되었다.
그러니 주저할 필요가 뭐가 있을까.
아니, 시간을 끌 필요가 뭐가 있을까.
“소렌.”
이어지는 시안의 한 마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로즈웰의 움직임이 덜컥, 굳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