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화 - 엘레나(1)
엘레나는 홀로 루벤의 생산 지구 거리를 활보했다.
그리고 역시나 엘레나의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황녀로서 이렇게 혼자 있어본 적이 언제였던가.
일단 엘레나의 기억으로는 없었다.
황궁에서는 시종과 시녀들이.
황궁 밖에서는 로열 나이츠들이.
어디서든 항상 엘레나는 누군가와 함께였다.
이렇게 혼자 있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라 할 수 있었다.
어딘가 설레면서도 조금은 외로운 기분.
엘레나는 묘한 심정을 느끼며 루벤의 거리를 활보했다.
루벤의 생산 지구는 말 그대로 생산 지구였다.
대장간을 비롯한 각종 생산 시설들이 위치한 구역.
루벤의 물품들이 생산되는 구역이었다.
“이봐! 여기 마정석좀 가져다 줘!”
“다음 작업까지 얼마나 남았지?”
그 때문인지 생산 지구에는 뜨거운 열기가 가득했다.
대장간에서는 불길과 함께 깡깡, 둔탁한 쇠망치 소리가 들려왔고.
방앗간에서는 맑은 물소리와 함께 물레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석재소, 제련소, 작업장 등등.
각종 생산 시설에서 각자의 역할에 맞는 소리와 냄새가 풍겨나왔다.
또 그렇게 생산된 물품들을 빠르게 운반하는 이들까지.
생산 지구에는 생기와 활력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엘레나는 눈을 크게 뜨며 생산 지구의 풍경을 살폈다.
처음 루벤에 왔을 때만해도 영지 자체가 갖는 경이로움은 있었다.
그러나 지금.
생산 지구에서 느낄 수 있는 경이로움은 또 새로웠다.
엘레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생산 지구를 구경했다.
그리고 이내 대장간으로 보이는 건물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후끈, 느껴지는 열기.
깡깡, 들려오는 쇠망치 소리.
분위기 자체는 일반적인 대장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 대장간의 건물 자체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이게 대장간인지 뭔지 모를 정도의 장엄한 규모.
들려오는 쇠망치 소리가 아니었다면 대장간이 아니라 공장이라 여겼을 터였다.
또한 이 대장간에는 인간과 더불어 드워프들이 함께 일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멍하니 대장간을 구경하고 있자니.
“응? 아가씨는 못 보던 얼굴인데.”
어디선가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짜리몽땅한 키와 우락부락한 근육.
다름 아닌 드워프였다.
드워프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엘레나를 바라봤다.
“이상타. 루벤에서 내가 모르는 인간 친구가 있었던가? 음··· 인간 손님이라면 나보단 베한이 오는 게 나을 것 같군. 이봐 베한!! 잠깐, 나와봐!”
“뭔데 그래?”
드워프의 외침에 대장간 안쪽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이윽고 중년의 인간 남성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중년의 인간 남성은 한껏 귀찮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바쁜 데 왜 나오라고 한거야?”
“그게 아니라. 여기, 손님이 왔어.”
“손님? 그 정도야 자네가···?”
말을 하던 베한이란 남성의 표정이 순간 벙쪄버렸다.
정확히는 엘레나의 얼굴을 확인함과 동시에 표정이 벙쪄버렸다.
잠깐의 침묵.
“히익!”
베한이 기겁을 하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응? 자네 왜 그래?”
그런 베한의 모습에 드워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베한은 답을 하기는 커녕, 황급히 고개를 푹, 숙일 뿐이었다.
“화, 황녀님을 뵈, 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그리고 들려오는 베한의 말.
“황녀···?”
그런 베한의 말이 있고 나서야 드워프가 눈을 크게 떠보였다.
“이, 이 아가씨가 황녀라고? 그러니까 이번에 루벤에 오신 그 분?”
“그렇다니까! 뭐하고 있어! 빨리 고개 안 숙이고!”
드워프는 그때서야 자신의 행동을 깨닫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벌벌, 몸을 떨기 시작했다.
“아니에요. 그렇게까지 예를 차리시지 않으셔도 돼요.”
상황이 이쯤되자 되려 엘레나가 무안해졌다.
드워프가 딱히 무례를 저지른 것도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드워프는 어디까지나 드워프였다.
아무리 드워프가 인간처럼 되었다고는 하나 드워프는 결국 드워프.
인간의 예절은 서툴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인간의 예절을 요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황녀님! 이 친구가 무지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자비를···!”
“그, 그렇습니다! 제가 어릴 때부터 망치질만 해온 터라··· 천지무식한 놈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예요. 저는 괜찮으니까 하던 일들 하세요.”
엘레나는 괜찮다며 손사래를 쳐보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고개를 들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괜히 방해를 한 기분.
“괜찮아요.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엘레나는 결국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엘레나가 생산 지구에 왔다는 소식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 때문인지 엘레나가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은 저마다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하던 일을 멈추고 과하게 예를 차리는 이들까지 있었다.
그 모습이 굉장히 불편했지만 따지고 보면 자신의 잘못이기도 했다.
엘레나의 신분은 제국의 황녀.
루벤의 영지민들에게 있어서는 하늘과도 같은 존재나 다름 없었으니까.
“······”
결국 엘레나는 생산 지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딜 가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주거, 문화, 농업, 공업 등등.
루벤의 어딜 가나 사람들은 엘레나의 눈치를 살폈다.
상황이 이쯤되자 엘레나는 괜시리 자신의 존재가 방해가 된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어딜 가나 엘레나는 환대받지 못했다.
괜시리 밍숭맹숭한 마음.
엘레나는 걸음이 향하는 대로 몸을 움직였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정신을 차리고 문득 발걸음을 멈춘 곳은 어떤 한 공터였다.
시야가 탁, 트이는 넓디 넓은 평원.
주변으로 인기척은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무의식적으로 사람이 없는 곳으로 걸음을 옮긴 것 같았다.
공터에는 나무가 한 그루 심어져 있었다.
엘레나보다 4~5배 정도 크기의 나무로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나무였다.
그리고 딱히 특별하게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대체 왜일까.
그 나무를 바라보고 있자니 괜시리 평안해지는 기분이었다.
엘레나는 저도 모르게 나무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그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무 위에 어떤 한 여인이 있었으니까.
나이는 그리 많지 않아보였다.
정확한 나이는 가늠할 수 없었으나, 젊음이라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피부는 눈처럼 희다못해 투명했고.
똘망똘망한 두 눈과 더불어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여인이었다.
대륙 어디에서도 쉬이 볼 수 없는 미(美)의 소유자.
그리고 길게 내려앉은 흑발의 머리.
엘레나는 그녀가 다크 엘프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다크 엘프는 나무 위에 가만히 누워있었다.
정말 가만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나무 위에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하는 걸까.
···싶은 생각을 하던 찰나.
“안녕.”
다크 엘프의 목소리가 문득 들려왔다.
엘레나는 저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었다.
이윽고 다크 엘프가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그리고는 엘레나를 바라보며 싱긋, 웃음을 지어보였다.
“난 세라야.”
엘레나는 다크 엘프를··· 아니, 세라를 가만히 바라봤다.
아무래도 세라는 엘레나의 신분을 모르는 것 같았다.
엘레나가 황녀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 저렇게 편하게 말을 하지.
그리고 다른 이가 세라의 말을 듣는다면 뭐라 했을 터.
하지만 지금 엘레나는 혼자였다.
“전 엘레나예요.”
“반가워 엘레나.”
엘레나의 답에 세라는 다시 한 번 싱긋, 웃어보였다.
그리고는 폴짝, 나무에서 내려와 엘레나 앞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여긴 어쩐 일이야 엘레나?”
“그냥···.”
그런 세라의 물음에 엘레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뭐라 답을 해야할지 몰랐으니까.
엘레나는 약간의 고민을 더했으나.
“여기저기 떠돌다가요.”
결국 대충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본인이 생각해도 수상하다 못해 이상한 변명이었다.
그런데 세라는 그렇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그것만으로도 괜찮은 것일까.
“그래?”
세라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왜인지 뻘쭘한 이 기분.
엘레나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세라는 여기서 뭐하고 계셨어요?”
“하늘 구경.”
“하늘 구경··· 이요?”
세라의 답에 엘레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늘 구경이라니?
하늘을 구경할 일이 있던가?
그것도 이렇게 각잡고?
“응. 파란 하늘을 보면 괜시리 기분이 좋아지거든. 엘레나도 같이 할래?”
“하늘 구경을요?”
“이리 와봐.”
그 말과 함께 세라가 엘레나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자, 잠깐···.”
그리고 힘이 어찌나 센지.
같은 여인이라고는 믿기지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세라에게 끌려가다시피한 곳.
그곳은 방금 전, 세라가 누워있던 나무 위였다.
“여기 인스티즈 위에 누워서 보면 기분이 더 좋아져.”
세라는 엘레나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리고 보아하니 인스티즈라는 것이 나무 이름인 같았다.
엘레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세라가 권유하는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보이는 푸르디 푸른 루벤의 하늘.
“어때?”
“뭐···.”
이쁘긴 이뻤다.
푸른 하늘과 더불어 두둥실 떠다니는 구름은 평소에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으니까.
그 청명한 풍경을 바라보자니 마음마저 상쾌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루벤의 하늘을 바라보다 문득.
‘내가 하늘을 의식적으로 올려다본 적이 있었나···?’
생각보니··· 없는 것 같았다.
황녀로서 매일 마주하는 것은 황궁의 천장.
밖으로 나올 적에도 딱히 의식적으로 하늘을 본 적은 없었다.
그저 시야 한켠으로 비치는 하늘을 바라봤을 뿐.
이렇게 의식적으로 고개를 올려 하늘을 올려다 본 적은 없었다.
사아아···.
한줄기 바람이 엘레나의 머리칼을 스치며 태양빛을 닮은 금발이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인스티즈의 나뭇잎들이 춤을 추는 소리가 들려왔다.
청명한 하늘과 맑디 맑은 나무의 소리.
그리고 시원한 바람.
“···좋네요.”
괜시리 기분이 좋아졌다.
“그치?”
세라가 배시시, 웃으며 엘레나의 옆에 자리했다.
엘레나는 세라와 함께 가만히 하늘을 구경했다.
그러다 문득.
“마음 같아선 계속 이렇게 있고 싶네요.”
이런 생각이 들고 말았다.
“그럼 있으면 되잖아.”
그러자 세라가 무슨 문제냐는 듯 말했다.
하지만 엘레나는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나무 위에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 보고 싶다는 뜻이 아니었으니까.
오늘뿐만 아니라 내일도, 내일 모레도.
앞으로도 계속 이런 여유를 느끼고 싶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러나 그건 불가능했다.
엘레나는 곧 떠나야하는 사람.
무엇보다 엘레나에게 이런 여유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것이 황녀로서 행해야하는 의무이자 책임은 여유라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의 사정.
“하고 싶은게 있으면 하면 되는 걸.”
다크 엘프인 세라는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다크 엘프인 세라는 잘 모르시겠지만, 인간에게는 마땅히 져야하는 책임이라는 것이 있어요.”
“움··· 어려운 말은 잘 모르겠어.”
세라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엘레나는 그런 세라에게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다크 엘프와 인간의 사정은 다르니까.
“하지만 엘레나가 말하는 인간이 루벤의 사람들도 포함되는 거라면, 그렇지 않은 걸.”
그 순간 다시 들려온 세라의 말.
세라가 작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하고 싶은 걸 하면 돼. 되고 싶은 게 있으면 도전하면 돼. 실패해도 괜찮아. 그것도 나름의 경험이라 생각하거든.”
세라의 말에 엘레나는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도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죠.”
그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상황적인 여유가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모든 이들이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것이 현실이라는 벽이었다.
모두가 꿈을 꾸나, 이루는 사람이 적은 이유이기도 했다.
다크 엘프의 사정은 어떨지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의 사회에서는 어찌할 수 없는 높디 높은 벽이었다.
하지만.
“여기 루벤에선 괜찮아.”
세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윽고 세라가 배시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시안이가 모두 지켜주니까.”
엘레나는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
영지민들의 꿈을 지켜준다.
그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 생각될 수 있었다.
제국에서 그러한 귀족은, 영주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엘레나는 세라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직접 봤으니까.
시안이 영지민들을 위해 노력하는 것을.
그리하여 루벤을, 사람들을 지켜주는 것을.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하고 또 경험하고 있었으니까.
지금도 눈코틀새 없이 바쁜 시안.
그 모두가 제 영지민을 위해서이지 않은가.
“그러니 루벤에선 하고 싶은 걸 하면 돼.”
멍한 정신.
엘레나는 정말이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엘레나는 하고 싶은 일이 있어?”
“글쎄요···.”
이어진 세라의 말에 엘레나는 역시나 마땅히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딱히··· 하고 싶은 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정확히는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하면 되었다.
제국의 황녀로서 그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움··· 그럼 되고 싶은 것은?”
“그건···.”
이어진 세라의 물음에 엘레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제국의 황녀로서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하면 되었다.
그러나 되고 싶은 것은··· 그럴 수가 없었다.
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될 수가 없었다.
엘레나는 태어날 때부터 황녀라는 존재가 되어있었으니까.
생각해보면··· 엘레나는 황녀 이외에 되고 싶은 것이 없었다.
로열 나이츠들은 더 높은 기사가 되고자 땀을 흘려가며 대련을 하고 있었다.
황태자, 콘라드는 황가의 명맥을 잇고자 샤를롯의 검술을 배우고 있었다.
그리고 보다 나은 황제가 되고자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었다.
엘레나 주변의 사람들은 그렇게 노력하고 있었다.
각자 맡은 바 지위에 걸맞는 이가 되고자.
그런데··· 엘레나는 없었다.
황녀라는 신분 이외에 되고 싶은 것이 없었다.
그저 황녀.
그 신분에 따른 의무감에 묶여 있을 뿐이었다.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황녀로서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런데 엘레나의 의지는 없었다.
태어날 적부터 정해진 운명에 순응하는 일이었다.
그것에 딱히 불만도, 의문도 가지지 않았건만.
방금 시안이 모두를 지켜준다는 세라의 말 때문일까.
만일···.
만일 황녀가 아니라 평범한 여인으로 태어났다면.
이곳, 루벤에서 태어났더라면 조금은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 부럽네요.”
엘레나는 저도 모르게 이렇게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응? 뭐가?”
그러자 세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어왔다.
그런 세라의 모습에 엘레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라, 저는 사실 제국의 황녀예요.”
“그렇구나.”
그러자 세라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놀랄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세라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놀라지 않으시네요···?”
엘레나가 다시 묻자 그때서야 세라가 눈을 크게 뜨며 엘레나를 바라봤다.
“놀라야 하는 일이었어?!”
어째, 놀라지 않냐는 말에 놀라고 있었다.
이윽고 세라가 슬금슬금, 엘레나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더니 익, 깜짝이야! 라며 놀라보였다.
엘레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그리고 억지로 놀라실 필요도 없어요.”
“그래? 휴, 다행이다. 난 내가 놀랄 타이밍도 모르는 눈치 없는 애인 줄 알았어···.”
그러면서 세라가 가슴을 크게 쓸어내렸다.
나무 위에 누워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세라.
그 모습이 아름다우면서도 웃긴 건 왜일까.
“푸흡.”
엘레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런 엘레나의 모습 때문일까.
“역시, 내가 눈치가 없었던 거구나···.”
세라의 표정이 한껏 시무룩해졌다.
“아, 아니에요··· 꺄핫. 그게 아니라··· 꺄하핫.”
“괜찮아 엘레나··· 위로하지 않아도 돼. 난 괜찮아···.”
엘레나는 도무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바탕 웃고 나자 마음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세라는 엘레나가 황녀라는 사실에도 대우가 달라지지 않았다.
아까와 똑같이 친구처럼 대할 뿐이었다.
황녀를 친구처럼 대한다라···.
누가 들으면 기겁할 만한 일이다만 엘레나는 개의치 않았다.
애초에 세라는 다크 엘프.
엘레나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엘프들에겐 마땅한 예절이 없었다.
그저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애초에 다크 엘프에게 인간의 예절을 강요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었다.
그리고 솔직히···.
지금 이대로가 편했다.
세라와 대화하고 있자면 황녀가 아닌 엘레나로서 있을 수 있었으니까.
어둠의 마나를 다룬다는 이유로 배척되어온 다크 엘프.
솔직히 엘레나도 어느 정도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마주한 다크 엘프, 세라는 그 누구보다 순수한 여인이었다.
그간 지니고 있던 선입견이 괜시리 미안해질 정도였다.
“고마워요 세라.”
“응? 뭐가?”
엘레나의 말에 세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어왔다.
시무룩했던 표정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상시로 되돌아와 있었다.
“그냥··· 이것저것이요.”
“이것저것?”
엘레나는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실은, 저는 어떤 강박에 사로잡혀있어요. 지금도 가지고 있기는 한데···.”
“강박? 트라우마 같은 거야?”
“비슷해요.”
“그래? 나도 트라우마 비슷한 거 하나 있어. 그러니까···.”
그러면서 세라가 생각에 잠겼다.
강박을 가지고 있다는 게 하나의 자랑처럼 들렸던 걸까.
세라는 고개를 좌우로 몇 번이나 까딱거렸다.
그리고는.
“······ 뭐였더라?”
세라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을 내뱉었다.
그런 세라의 모습에 엘레나는 또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떠오르지 않는데 그걸 어찌 트라우마라 할 수 있을까.
“미안. 생각이 안 나.”
“괜찮아요.”
엘레나는 작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엘레나가 가진 강박은 뭐야?”
이어진 세라의 물음.
엘레나는 세라에게 가진 바 강박을 이야기해주었다.
다름 아닌 황녀로서의 의무감.
왜 이 이야기를 꺼내는지는 엘레나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럴 필요도, 이유도 없었음에도 엘레나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마치 사제에게 고해성사를 하듯.
엘레나는 푸르른 하늘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리고 역시나.
“움··· 어려워. 하나도 모르겠어.”
세라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엘레나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인간들이 살아가는 방법이니까요.”
“인간들은 참 복잡하게 사는 구나.”
“그러게요. 그저 좋은 사람과 결혼해서 황가에 도움이 되고자 할 뿐인데. 그게 이렇게 복잡할 줄은 몰랐네요.”
“좋은 사람? 시안이를 말하는 거야?”
그 어디에도 시안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세라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세라의 머릿속에는 ‘좋은 사람=시안’이라는 공식이 성립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뭐···.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 순간 엘레나의 시야 위로 세라의 얼굴이 보였다.
청명한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보이는 세라의 모습.
긴 흑발이 엘레나의 얼굴로 쏟아져내렸다.
“엘레나.”
그리고 들려온 세라의 말.
“시안 좋아해?”
“네, 네?”
엘레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