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화 - 루벤에 온 손님(2)
루벤에 위치한 생명의 치료원 Lv.7
“응급 치료는 끝냈어요. 좀··· 괜찮으세요?”
엘리의 말에 시안은 가볍게 고개를 끄떡여보였다.
그리고는 차분히 내부를 관조했다.
확실히··· 느껴지던 통증은 현격하게 줄어들어 있었다
뒤틀리고 꼬였던 내부가 모두 제 자리를 찾은 모양.
“다 나은 것 같은데?”
아니, 이 정도면 다 나은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너무 무리하시면 안돼요. 급하게 응급처치만 해둔 터라 무리하시면 상처가 금방 벌어지니까요.”
엘리의 말에 시안은 헛웃음을 흘렸다.
이게 응급처치를 한 수준이라니.
시안은 몸을 일으켜 스트레칭을 한 번 보았다.
조금 뻐근한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움직임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대체 어딜 봐서 응급처치란 말인가.
아무리 세계수의 축복과 치료원의 회복 효과가 겹쳤다고는 하나 이 정도 회복 속도는 말이 안 되었다.
세계수의 축복이 대단한 건지.
아니면 엘리가 대단한 건지.
‘아마 둘 다 겠지.’
시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차라리 하루 정도 푹, 쉬었다 가시는 것이···.”
“아니야. 하루 쉴 시간이 어딨어.”
엘리의 말에 시안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황태자와 황녀가 기다리고 있는데 쉴 틈이 어디에 있을까.
“난 조금만 쉬었다가 바로 갈게.”
“······ 영주님 고집을 누가 말리겠어요.”
물품을 다 정리한 엘리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병사분들 치료하러 가볼게요.”
“응. 고마워 엘리.”
시안은 떠나가는 엘리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걸음을 옮겨 치료원 안 쪽,.
병실의 문을 열었다.
“영주님. 오셨습니까.”
“몸은 괜찮으십니까?”
달칵, 하는 소리에 병실에 있던 이들이 시안에게 인사를 해왔다.
다름 아닌 방금 전 격돌에서 부상을 입을 병사들이었다.
시안은 손을 휘휘, 내저이며 말했다.
“어 괜찮아. 그보다 너희들은. 괜찮은거냐.”
“저희야 뭐, 보다시피 튼튼합니다.”
“솔직히 제국 제 1의 기사단이니 뭐니 하길래 긴장했습니다만··· 막상 붙어보니 별 거 없지 뭡니까?”
그러면서 우쭐대는 병사들의 모습.
“허세는.”
시안이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허세라니요 영주님? 저희 싸우는 거 보셨잖습니까.”
“그렇슴다! 늑대 새끼들을 이렇게 빠샤!”
“아악! 가만히 있는 날 왜 때려 이 새끼야!”
그러면서 병사들이 투닥투닥, 거리기 시작했다.
시안은 그런 병사들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시끄럽고. 나 여기서 조금만 쉬다 갈 거니까. 그런 줄 알아.”
“옙! 편히 쉬다 가십시오.”
“이거 노으아···! 이 새뀌야! 수 마켜...!”
소란스러운 병사들을 뒤로 한 채, 시안은 빈 침실에 몸을 뉘었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시안은 혼자 이 병실을 통째로 쓸 수 있었다.
아니면 1인실에 혼자 조용히 쉴 수도 있었다.
엘리도 그렇게 제안을 했지만 시안이 한사코 거절했다.
애초에 조금만 쉬었다가 갈 생각이었을 뿐더러.
그곳엔 시안보다 상태가 심각한 이들이 치료를 받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침대에 누워 쉬고 있자니.
시안은 문득, 옆 자리에 있는 사내에게 자연스레 눈길이 갔다.
그도 그럴 것이 시안을 보며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으니까.
시안은 뭔가 싶어 사내의 얼굴을 자세히 확인했다.
그렇게 확인한 얼굴.
“커너?”
다름 아닌 커너였다.
암흑가 출신의 특급 암살자이자 루벤의 암살 교관, 커너.
지난 날, 이사벨에게 시안의 암살 의뢰를 받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던 이였다.
“여, 영주님···.”
시안의 말에 커너가 크게 당황하며 말했다.
시안은 그런 커너를 가만히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몸은 좀 어때. 괜찮아?”
“······”
커너는 말이 없었다.
그저 고개를 푹, 숙여보일 뿐이었다.
“········· 많이··· 괜찮아졌습니다.”
염치 없게도.
푹, 숙여진 고개 아래로 커너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갈 듯 새어나왔다.
시안은 그런 커너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사건이 있은 직후, 꽤나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커너는 아직도 병실에 누워있었다.
만두에 들어 있던 독이 어지간히도 독했던 모양.
농담이 아니라 세계수의 축복과 치료원의 치료 효과.
그리고 엘리의 치료가 없었더라면 커너는 살아 있을 수 없었을 터였다.
그래도 뭐, 다행히 지금은 상당히 괜찮아진 모양이다만.
“음···.”
커너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시안은 많은 말들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이번에는 그냥 넘어갈거야.”
하지만 시안은 그 모든 말들을 꾹, 눌러삼켰다.
“하지만 두 번은 없어. 또 한 번 내 앞에서 그 지랄을 하면 내 손으로 직접 죽여버릴줄 알아. 앞으로 고민이 있으면, 무슨 일이 있으면. 혼자 해결할 생각 말고 나한테 말해. 알겠어?”
“······ 죄송·· 합··· 니다.”
답을 하는 커너의 목소리는 상당히 떨려있었다.
고개를 숙인 탓에 커너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들썩거리는 커너의 어깨는, 커너가 어떤 심정인지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영주님 말씀이 맞습니다.”
“커너 교관님 혼자 해결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 커너의 모습에 투닥거리던 병사들도 한 마디씩 거들었다.
그런 병사들의 반응을 보아하니 커너가 시안을 암살하려고 했다는 오해는 풀린 듯 싶었다.
시안은 그런 병사들에게 말했다.
“니들도 마찬가지야. 무슨 일이 있으면 혼자 해결할 생각 말고 나한테 말해. 알겠어?”
“옙!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영주님께 달려가겠습니다!”
“여주님···! 그런 이미로 이 새뀌 좀 떼어내주면 안댑니까···! 이러다 수 마켜 죽게씁니다···!”
힘차게 대답하는 병사들의 말.
시안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다시 침대에 눕자 왜인지 온몸으로 묘한 활기가 느껴졌다.
아무래도 치료원의 회복 효과가 발휘되는 것 같았다.
가만히만 있어도 생기가 절로 차오르는 기분.
회복되는 과정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치료원의 효과야 진즉에 알고 있었다만.
‘Lv.7로 업그레이드해서 그런가.’
어째, 그 효과가 시안의 예상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 정도면 정말 조금만 쉬면 완전히 완치가 될 것 같았다.
‘이게 얼마 만의 휴식인지 참···.’
시안은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그동안 현질할 골드버랴, 악마들을 대적하랴.
퀘스트 깨랴, 독립할 계획 세우랴.
생각해보면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해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이 참에 조금 쉬면 되겠네.’
시안은 웃음을 흘리며 침대에 몸을 편히 뉘었다.
그렇게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자니, 이런저런 생각들이 쏟아져나왔다.
그러다 문득, 방금 전에 있었던 격돌이 뇌리 속을 스쳤다.
카이와 싸웠던 그 순간들.
시안은 카이와 검을 맞대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가문에 있을 적, 카이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었다.
애초에 카이는 시안에게 이렇다할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카이와 직접 검을 맞대어 본 바.
시안은 카이의 수준을 깨달을 수 있었다.
왜 카이가 제국의 별이라 불리는 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과 얼마나 격차가 있는지 또한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다.
물론 콘라드가 중간에 개입하여 그 승부의 행방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시안은 알고 있었다.
그대로 싸움을 지속했더라면 결과가 어떠했을지.
시안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까.
“······”
솔직히 조금은··· 분한 마음도 들었다.
조금은 수련을 더 했더라면 결과는 달라졌을까.
글쎄···.
시안은 그 의문에 대해 선뜻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수많은 상념들이 휘몰아치며 얽혀왔다.
복잡해지는 머릿속.
하지만 시안은 스스로를 다독였다.
나약해지면 안된다.
이제부터 시작될 엘란두르와의 전쟁.
또 언제 있을지 모를 악마들과의 전투.
앞으로 더 험난하고 고된 일들이 있을 터였다.
그러니 벌써부터 나약해지면 안 된다.
시안은 스스로를 다독이며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천천히, 병실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병실을 꽉채운 병사들.
이곳뿐만 아니라 다른 병실에도 병사들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치료원 밖에는 아직도 치료를 받지 못한 병사들이 상당히 많았다.
‘생각보다 부상자들이 많네.’
물론 전투에는 부상자들이 없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시안의 생각보다 부상자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 모든 이들을 지금 엘리가 담당하여 치료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루벤에는 치료사가 엘리 한 명이었으니까.
엘리를 도와주는 이들은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도와주는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
물품을 가져다주고, 깨끗한 천을 빨아주는 등 기타 잡일을 도와주는 이들.
치료는 어디까지나 엘리, 혼자서 도맡아하고 있었다.
그리고 엘란두르와의 전면전이 확정된 지금.
앞으로 많은 부상자들이 나올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지금보다 부상자들이 많아질 것은 자명한 사실.
‘이거, 치료사들을 더 뽑아야겠는데.’
엘리 혼자서 모든 것을 도맡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솔직히 지금도 세계수, 인스티즈의 축복.
그리고 업그레이드한 치료원의 효과.
이 둘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지금도 엘리 혼자서 감당이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치료 인력들을 더 뽑을 필요성이 있어보였다.
하지만.
‘치료사들을 또 어디서 구해.’
이 역시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일단 의학이라는 분야는 상당히 전문 분야라는 것이었다.
마법사와 마찬가지로 치료사는 뽑고 싶다고 뽑을 수 있는 인력이 아니었다.
‘엘리가 가르치면 될 것 같기는 한데··· 아, 참. 그러고보니 모바일 영주에 학교나 아카데미 관련한 시설이 있었는데.’
이번에 도시 수준으로 발전하면서 개방된 다양한 시설들.
그 시설들에 교육 시설 또한 있었다.
애초에 이번에 연구한 연구 중에는 교육학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시안은 이번 현질에서 교육 시설은 짓지 않았다.
굳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해서 전쟁에 필요한 군사 시설들을 위주로 현질했었다.
하지만 지금 병실의 모습을 보니···.
“음···.”
생각을 조금 잘못한 것 같기도 싶었다.
전쟁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건 당연 군사력이었다.
하지만 그 군사력은 결국 사람의 힘이었다.
간단한 예로 마스터도 결국 사람.
한 두달 밥을 먹지 못하면 굶어죽는다.
치료를 받지 못하면 상처가 곪아 썩는다.
누군가 전쟁은 단순히 힘만 강하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했던가.
“현질을 조금 더 해야겠는데···.”
막상 그 상황을 겪어보니, 저 말이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거진 1억 골드가 넘는 현질에도 또 현질 할 것이 남아있다는 사실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뭐, 그래도 이번에 행한 현질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각종 신설 건물들은 물론.
기본의 제반 시설들 또한 모두 Lv.7로 업그레이드 해두었기에 보급 자체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엘란두르의 외압으로 완벽히 고립이 된다 한들.
어떤 외부의 자원도 수급할 수 없다고 한들.
루벤은 현재 물자를 자급자족할 여력이 충분했다.
다만, 앞으로의 전쟁에 조금 더 보완할 필요가 있을 뿐.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시안은 품 속에서 스마트 폰을 꺼내들었다.
아니, 정확히는 꺼내들려던 바로 그때였다.
벌컥!
“도련님···!”
갑자기 치료원의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 다급하게 들어왔다.
뭔가 싶어 바라본 시선.
병실의 문 앞에 한스가 숨을 헐떡거리며 서있었다.
동시에 한스의 또한 상당히 다급한 표정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스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 황태자님과 황녀님이 레아님을···. 아니, 레아님이 황태자님과 황녀님을··· 아니, 그게 그러니까···.”
한스는 횡설수설 말을 반복하다 끝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이어진 한스의 한 마디.
“아무래도··· 지금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하아···.
시안은 저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나왔다.
간만에 조금 쉴 수 있나 싶어 현질할 목록도 정리할 겸.
많이도 아니고 조금만 쉬었다 가려했거늘..
“거기가 어디야.”
시안은 누웠던 자세 그대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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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눈 앞으로 보이는 유령의 모습.
콘라드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어쩐지, 귓가로 들리는 소리가 목소리라고 하기엔 미묘했다.
목소리라기보다는 어떤 의지.
그것도 뇌리에 직접 박히는 무엇이었다.
-야. 너 또 여긴 왜 왔어?
이윽고 의지가 다시 한 번 들려왔다.
탁자 위로 머리만 빼꼼 나와있는 여인의 시선은 엘레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방금 전 들려온 ‘야’라는 말은 아무래도 엘레나를 지칭하는 것 같았다.
움찔!
아니나 다를까 엘레나가 몸을 크게 떨어보였다.
그와 동시에 마지막 남은 다과를 잡고 있던 엘레나의 손에서 격한 떨림이 느껴졌다.
이윽고 엘레나가 슬금슬금,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너. 왜 또 여기에 왔냐니까?
그런 엘레나의 모습에 유령이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그리고는 쑤욱, 머리만 내밀었던 탁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보인 모습은 확실히··· 유령이라 칭할만 했다.
그리고 조금은 익숙한 모습이기도 했다.
다름 아닌 아까 전, 격돌에서 얼핏 그 모습을 본 바 있었으니까.
끔찍한 사념을 발산하며 하얀 늑대 기사들을 압도하던 존재.
하지만 그것 말고도 꽤나 익숙한 모습이었다.
정확히는 낯이 익다고 해야할까.
왜 그런가 싶어 자세히 살펴보니···.
이 유령은 어딘가 엘레나를 닮아있었다.
물론 분위기를 비롯한 성품, 성향.
이러한 것들은 완전히 달랐다.
그러나 딱 외모만 봤을 때는 유령과 엘레나는 상당히 닮아있었다.
만일 엘레나의 태양빛 금발을 백은색 머리로 바꾼다면.
그리고 엘레나가 한 5~6년 정도. 조금 더 성숙한 나이가 된다면.
지금 눈앞에 보이는 유령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 때문인지 모르겠다만 유령과 엘레나는 서로 알고 있는 사이인것 같았다.
뭐, 보아하니 이 유령은 루벤에 사는 존재인 것 같았다.
그러니 지난 날, 엘레나가 루벤에 왔을 때 만난 인연인 것 같았다.
대하는 태도를 보면··· 친우? 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쭈? 대답 안 해?
아무리 그래도 유령의 태도는 상당히 무례하다 할 수 있었다.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었다.
어떤 관계인지도 추측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설령 엘레나와 친우라 하더라도 유령의 태도는 무례했다.
엘레나는 다름 아닌 황녀였으니까.
아무리 격없이 지내는 친우라하더라도 황녀를 대하는 예를 갖추어야만 했다.
하물며 엘레나의 오빠인 콘라드가 앞에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래야했다.
해서 콘라드는 엘레나가 먼저 나서서 한 마디 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대체 왜일까.
“그, 그게···.”
엘레나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었다!
말도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유령의 말을 고분고분 말을 듣고만 있었다.
“······?”
그런 콘라드는 의문을 감출 수가 없었다.
콘라드의 시선에 비친 엘레나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유령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신께 맹세코, 가문의 모든 것을 걸고.
“이 무슨···?”
엘레나가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처음 봤다!
엘레나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인다···?
상황 파악이 빨라 언제나 현명하게 대처하던 엘레나였다.
눈치 또한 빨라 똑 부러진다는 소리를 매번 듣던 엘레나였다.
황녀로서의 품격과 품위를 몸에 둘러 언제나 그 기품을 잃지 않던 엘레나였다.
그래서 귀염성이라고는 하나 없는, 답답할 정도로 고지식한 여동생이지 않았는가.
그런 엘레나가 저렇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인다?
“대체 무슨···?”
콘라드는 지금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콘라드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 제가 여기에 오면 안될 이유가 있··· 나요?”
엘레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유령에게 말했다.
-당연하지. 너. 지난 번에 쫓겨났던 거 기억 안 나? 그런데 왜 또 기어 들어와?
“기어··· 들어와요?”
-쫓겨난 주제에 다시 왔으면 기어 들어온 거지. 그럼 뭐야?
유령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고, 이에 엘레나가 살짝 화가난 것일까.
엘레나가 유령을 향해 눈을 치켜뜨며 답했다.
“쫓겨난 것 맞지만 다시 허락을 받았어요! 그리고 듣자하니··· 그쪽도 원래는 전당에 계셨다면서요? 그렇게 따지면 그쪽도 기어들어온 것 아닌가요?”
-뭐 이 년아? 그쪽? 지금 나한테 그쪽이라고 한 거니? 이게 기어들어온 것도 모자라, 버르장머리 없게 기어오르기까지 해?
이윽고 유령의 기세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피어나는 어둠.
지옥의 이명이 퍼져나가며, 공포가 청각을 마비시켜왔다.
“아, 아니요··· 그, 그게··· 그러니까···.”
그러자 엘레나가 크게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하기 시작했다.
콘라드가 보기에 현재 유령의 행동은 도를 넘어선 것이었다.
무례함을 넘어 황녀를 겁박하는 반역의 행위나 다름 없었다.
그렇기에 황녀로서의 권위를 사용해도 되건만.
어째서인지 엘레나는 어쩔 줄 몰라하며 당황할 뿐이었다.
아무리 절친한 친우라고 한들.
또 루벤의 영지민이라고 한들.
이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어서는 일.
“그만.”
결국 보다 못한 콘라드가 나서보였다.
-넌 또 뭐야?
그러자 유령이 고개를 홱, 돌려 콘라드를 바라봤다.
그 모습이 꽤나 괴기스러웠지만··· 콘라드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말했다.
“그대가 겁박하고 있는 이는 제국의 황녀다. 손님으로 와서 일을 크게 벌리고 싶지 않았건만. 더 이상의 무례는 용납하지 않겠다.”
-넌 뭔데 끼어들어?
“콘라드 폰 샤를롯. 제국의 황태자다.”
-황태자? 황태자면··· 이 기집애의 오빠?
유령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콘라드를 바라봤다.
그리고 보통은 황태자라는 직위에 초점을 맞추기 마련이거늘.
어째서인지 유령은 엘레나의 오빠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렇다. 그대는 누구기에 이런 무례한 짓을 하는 거지?”
-나? 레아.
레아는 그렇게 말한 뒤, 콘라드를 한 번 훑어보았다.
콘라드를 향하는 짙은 회백색의 눈동자.
일순간 콘라드를 바라보던 레아가 상당히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너··· 오빠를 엄청 닮았잖아?
오빠?
콘라드는 레아가 당최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콘라드의 심정을 아는 지 모르는 지.
레아가 콘라드 주위를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자세히보니 외모는 조금 다른 면이 있는데 여러모로··· 세상에, 오빠 젊었을 때랑 진짜 똑같은데?
그리고 다시 들려오는 레아의 말.
콘라드는 여전히 레아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레아가 허공을 부유할 때마다 몸을 움찔움찔 떠는 엘레나는 더더욱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 참. 이럴 때가 아니지.
일순간 레아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윽고 레아가 엘레나에게 다가갔다.
-야 너. 내가 아까 가만히 듣다보니까. 시안이랑 결혼 뭐 어쩌고 하더라?
그러자 엘레나의 몸이 다시 한 번 움찔, 떨려왔다.
-시안이랑 결혼하면 뭐? 다과를 마차 한가득 보내줘? 너 내가 저번에 말했지. 시안은 내가 이미 천 년전에 점찍어 놨다고. 내가 그때 새치기 하지 말라고 분명 경고했을텐데?
이어지는 레아의 말에 콘라드는 도무지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천 년전에 시안은 점찍어 놓았다니?
그 말은 이 귀신이랑 시안이 천 년전부터 이어온 인연이라는 뜻?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일단 시안의 나이는 1,000살은 아니었으니까.
무엇보다 지금 눈앞에 있는 레아도 1,000살로 보이지 않았다.
뭐, 유령이니 그럴 수 있다만은.
그럼에도 외모로만 보이는 나이는 엘레나보다 조금 윗년배 정도로 보일 뿐이었다.
-야.
그리고 또 야라는 말이 들려왔다.
분명 야라는 말이 들려왔다.
“더 이상의 무례는 용납하지 않는다 했거늘.”
콘라드가 기세를 피워올리며 일갈했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지금 레아라는 유령의 태도는 도를 넘어섰다.
아무리 유령이라 하더라도 이 무례는 넘어갈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레아가 물러난다면, 콘라드는 용서해줄 생각이었다.
어디까지나 손님으로 와서 문제를 일으키기도 싫었거니와.
애초에 유령에게 인간의 예법을 강요하는 것도 어불성설이었으니까.
하지만.
-넌 빠져 이것아.
레아는 전혀 물러날 생각이 없어보였다.
일촉즉발의 상황.
바로 그때.
벌컥!
“잠까아안!!!”
갑자기 방 문이 벌컥, 열리며 절박한 외침이 들려왔다.
#
“그러니까···.”
멍한 콘라드의 얼굴.
시안은 그런 콘라드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렇게 내려앉은 정적.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자네의 말은··· 저 레아라는 유령이 샤를롯 대제의 여동생분이라는 말인가?”
콘라드가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냐는 표정.
그러니까, 어이가 출타한 표정으로 시안에게 물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