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화 - 카일의 비망록(1)
시안이 알고 있는 악마는 모두 일곱이었다.
일곱 가지의 대죄(The Seven Sins).
교만, 탐욕, 질투, 분노, 색욕, 탐식, 나태.
그 죄에서 깨어난 일곱의 악마.
신화 속에 기록된 악마는 모두 일곱이었다.
하지만 지금.
샤를롯의 기록에는 악마 6군주라 적혀있었다.
“샤를롯이 잘못 적었나?”
싶었지만··· 설마 하니 그럴 리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건 말 그대로 샤를롯이 쓴 기록이었으니까.
아르나이즈 리더였던 샤를롯이 직접 경험하고 쓴 기록.
그 기록이 잘못되었을리가 없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악마 군주에 대해서 말이다.
잘못 되었다면 지금 알려져있는 신화가 잘못된 것이겠지.
“뭐지? 7군주가 아닌 것인가?”
그렇다고 하기엔 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다름 아닌 루벤에 나태의 악마, 누르비아가 침공했을 당시.
레아 는 분명 악마 7군주라 말한 바가 있었으니까.
레아 또한 천 년전에 악마들과 싸워온 존재.
그렇다는 건 악마 7군주는 확실하다고 봐야했다.
“대체 뭐지?”
알쏭달쏭한 물음.
시안은 계속해서 비망록의 기록을 읽었다.
사락.
『그들의 강함은 일반적인 악마들과는 달랐다.
가히 신의 영역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은 초월적인 힘.
우리는 악마 6군주들의 등장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 초월적인 힘 앞에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오래 전, 그때처럼.
나는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아무런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오래 전.
다시 그때처럼.
번쩍!
한줄기 섬광이 죽음을 향해 번쩍였다.
단 한 순간도 잊은 적 없던 그날의 풍경.
그때와 마찬가지로 한 흑발의 미남자가 우리들의 앞을 가로막으며 서있었다.
홀연히 그리고 오연히.
검을 늘어뜨린 채 싸늘한 눈빛으로 악마 6군주들 앞에서 서 보였다.
흑발의 미남자는 악마 6군주와 맞서 싸웠다.
콰콰쾅!
여섯의 악마에 맞서 그는 한치의 물러섬이 없었다.
나를 비롯한 동료들은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만 봤다.
실로 경이로운 무력.
저게 정녕 인간의 무력인지 심히 의심스러웠으니까.
우리는 그와 힘을 합쳐 악마 6군주에 대항했다.
그리고 끝끝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승리도, 패배도 아니었던 전투.
우리는 겨우겨우 목숨을 부지했을 뿐이었다.
오래 전, 그때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나는 또 다시 그때처럼 목숨만 부지했고.
그는 또 다시 그때처럼 자리를 떠나려하고 있었다.
‘잠깐!’
난 떠나려는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그래야만 했다고 느꼈을 뿐이었다.
‘당신도 악마와 싸우려는 목적인 건가?’
그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무덤덤한 눈빛으로 날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래 전의 그날과 다를 것 없는 무뚝뚝한 목소리.
‘그럼 우리와 함께하자.’
난 그에게 다짜고짜 동행을 제안했다.
내가 그와 만난 적은 이번이 두번째였다.
그렇기에 난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 또한 나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에게 동행을 제안했다.
이유를 묻는다면 글쎄···.
지금 와서 돌이켜봐도 왜 그러했는지 알 수 없었다.
어떤 운명적인 이끌림.
단지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뿐이었다.
‘······’
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살짝, 어처구니 없는 눈빛이 그의 심정을 대변할 뿐이었다.
‘난 샤를롯.’
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내가 내민 손을 물끄러미 바라만 봤다.
‘잘 부탁해.’
그럼에도 그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냉기가 흐르는 것 같은 싸늘한 눈빛.
감정 하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괜시리 뻘쭘해진 나는 내민 손을 거두어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이름이 ······ 이라고 했었나?’
‘그걸 어떻게?’
그러자 시종일관 무덤덤하던 그의 표정에 놀람이라는 감정이 떠올랐다.
난 다시 한 번 멋쩍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발음하기 어려우니까. 카일이라고 부를게. 괜찮지?’
그는 여전히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고.
그렇게 카일은 우리의 동료가 되었다.』
.
.
.
“나, 참.”
시안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그도 그럴 것이 막무가내도 이런 막무가내가 없지 않은가.
“카일이 용케 거절하지 않았네.”
뭐, 보아하니··· 카일도 내심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았다.
카일은 홀로 악마와 싸워왔지만 어디까지나 혼자였다.
그러다 악마 6군주와 싸우는 샤를롯과 다른 아르나이즈들을 발견했고.
그들이라면 충분히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 것 같았다.
압도적인 무력의 최강이라 불리는 카일이었으나.
그렇다고 다른 아르나이즈들의 힘이 약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보다··· 여기서도 이름이 지워져 있네.”
그리고 이 내용에서도 카일의 이름이 지워져있었다.
샤를롯이 카일의 이름이 부를 때, 그 글자가 흐릿하게 지워져있었다.
정확히는 지워진 것인지 아니면 이 자체로 하나의 글자인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알아먹지 못하는 단어인 건 매한가지였다.
그리고 뒤이어 ‘카일’이라는 이름이 명확히 적힌 것을 보아.
아무래도 지워진 글자는 카일의 이름이 맞은 것 같았다.
그러니까, 카일의 본명이 따로 있었던 모양인 것 같았다.
카일은 다름 아닌 샤를롯이 지어준 이름.
“카일에게 본명이 따로 있었구나.”
이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모바일 영주에서도 알려주지 않았던 사실.
“음···.”
시안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어버렸다.
이름이야 뭐, 딱히 중요한 사실은 아니었으니까.
어쨌거나, 다른 아르나이즈를 모은 것도 그렇고.
카일을 영입하는 것도 그렇고.
“아르나이즈 리더는 리더였던 건가.”
시안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비망록의 다음 장을 넘겼다.
사락.
『카일이 우리의 동료로 합류한 이후.
전세는 완벽하게 뒤집어졌다.
우리들은 악마 6군주들의 힘 앞에서도 쉽사리 밀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했던 이유는 역시나 카일 덕분이었다.
카일의 강함은 정말이지 경이롭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였다.
동료라는 이름 아래 싸우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것이 맞는 걸까?
매순간 그런 의문이 들 정도로 카일의 강함은 경이로웠다.
그렇기에 나는 자연스레 카일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카일의 강함은 도대체 어디에서 근간하는 걸까.
카일은 예상대로 나와 비슷한 또래였다.
그러나 그 경지를 비교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심지어 카일은 도무지 그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카일을 제외한 다른 동료들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뮤리엘은 신성국의 성녀였고.
엘로디는 엘프의 숲지기.
모르크루는 드워프의 야금장이었으며.
노에미는 수인족의 대족장이었다.
그리고 나는 일개 마을의 청년.
하지만 카일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애초에 대륙에서 흑발을 가진 존재는 드물기도 했었다.
오직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것만이 알 수 있는 사실일 뿐이었다.
나는 카일의 정체에 대해 심히 궁금했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묻지는 않았다.
카일이 말하지 않은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가끔.
정말 가끔 그 의문이 문득문득 들곤 했었다.
그러다 결국 한 번, 넌지시 카일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카일이 우리와 동료가 되고 꽤나 시간이 지난 이후였던 것 같았다.
유난히도 밝은 달이 떠오른 어느 날 밤.
난 사색에 잠긴 카일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카일은 어딘가 슬픈 눈빛으로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그리워하듯.
카일은 내가 근처에 왔다는 것도 모른 채, 그렇게 사색에 잠겨있었다.
아니,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나의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할 카일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그런 카일에게 이렇게 물었다.
‘왜 그렇게 궁해있어? 두고 온 연인 생각이라도 하는 거야?’
장난스럽게 물은 것이었다.
농담을 섞어서 넌지시 떠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나를 바라보는 카일의 표정은 그렇지가 않았다.
‘정말로··· 연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이어진 내 물음에도 카일은 답을 하지 않았다.
평소답지 않은 카일의 분위기.
‘샤를롯.’
카일은 되려 내게 이렇게 물어왔다.
‘이 모든 일이 끝나면, 돌아갈 수 있을까.’
카일의 물음에 난 아무런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카일이 던지는 물음의 의미를 전혀 알 수가 없었으니까.
돌아간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이 모든 일이 끝난다는 건 또 무슨 의미일까.
난 카일의 말이 심히 궁금했다.
그러나 그 의문을 해소하기에는.
‘······’
카일의 눈빛은, 너무나도 슬퍼보였다.』
.
.
.
사락.
『그 일이 있은 직후, 나와 카일의 관계는 조금 더 가까워졌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정확히는 나 뿐만 아니었다.
카일과 다른 동료들의 관계가 더욱 가까워졌다.
알게 모르게 우리와 거리를 두던 카일이었다.
하지만 우리를 대하는 카일의 태도가 조금은 달라져 있었다.
조금 더 말 수가 많아졌고.
또 먼저 말을 걸어오는 횟수도 증가했다.
해서 난 더 이상 카일의 정체를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카일의 정체가 무엇이든.
카일이 우리의 동료라는 것은 변함이 없었으니까.
다만, 딱 하나.
‘어떻게 그렇게 강할 수 있는 거야?’
카일의 경이로운 힘에 대해서는 도무지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악마 6군주들조차 어찌할 수 없는 강함.
난 카일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나도 너한테 좀 배울 수 있을까?’
‘알려주는 건 어렵지 않다.’
카일은 의외로 쉽게 승낙했다.
그러면서 카일은 하나하나 검을 풀어가며 내게 가르쳐주었다.
하지만.
‘······ 왜 안 되지?’
난 도저히 카일의 검을 따라할 수가 없었다.
‘내 재능이 부족한 건가?’
처음엔 이렇게 생각했다.
그만큼 카일의 검은 난해하기 짝이 없었고.
그렇기에 카일의 강함은 감히 범접할 수 없었으니까.
그러나 카일은 고개를 저었다.
‘네 재능은 뛰어나다. 검이라는 재능만 본다면, 네 재능을 따라갈 수 있는 존재는 이 대륙에 없을 거다.’
‘그럴리가.’
카일은 그렇게 말했지만 난 믿지 않았다.
그저 나를 위로를 하고자 카일이 내뱉은 말이라 생각했다.
‘거짓말 하지마.’
‘거짓이 아니다.’
하지만 카일은 확고했다.
하기사, 카일은 거짓을 말할 사람이 아니었다.
결코 위로 같은 것을 건넬 사람은 아니었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이야기할 뿐.
‘그런데 왜 난 배울 수가 없는 거야?’
‘재능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카일은 이렇게 말했다.
‘재능으로는 뛰어넘을 수 없는, 인과율의 문제다.’
‘인과율의 문제···?’
난 카일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설명하기엔 너무 복잡하다.’
그리고 카일 또한 딱히 나를 이해시키려 하지 않았다.
난 그런 카일을 멍하니 바라만 봤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의문.
‘혹시, 네가 항상 그리워하던 사람과 관련이 있는거야?’
난 언제나 궁금하던 질문을 던졌으나.
‘······’
카일은 아쉽게도 그에 따른 답을 해주지 않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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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
시안은 고개를 한 번 갸웃거렸다.
비망록의 내용에 따르면 샤를롯은 카일의 검, 마혼수라검(魔魂修羅劍)을 배울 수 없었다.
그리고 이는 지난 날, 레아에게서도 들은 이야기였다.
레아가 시안의 마혼수라검을 알아볼 당시.
레아는 자신의 오빠 또한 마혼수라검을 배울 수 없었다고 말한 바 있었다.
오직 카일만이 마혼수라검을 사용할 수 있었다고.
그래서 레아는 시안이 카일임을 확신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지금, 비망록의 내용을 확인한 바.
샤를롯의 재능은 가히 천재라는 말로도 부족했다.
샤를롯은 누군가에게 배우는 일 없이 홀로 엑시드(Exceed)의 경지에 오른 기사였으니까.
샤를롯의 재능은 사실상 측정 불가의 영역이었다.
비록 카일만큼은 아닐지라도, 평범함의 범주를 아득히 넘어선 재능이었다.
해서 카일은 샤를롯이 마혼수라검을 배울 수 없는 이유를 인과율의 문제라 설명했다.
그런데.
“인과율의 문제는 뭐야?”
그게 대체 뭐란 말인가.
“흠···.”
깊어지는 생각.
“일단은··· 계속 봐보자.”
시안은 계속해서 비망록의 다음 장을 넘겼다.
사락.
『우리는 계속해서 악마들과 대적해 나갔다.
그러나 악마들의 침공은 그 끝을 모르듯 이어졌고.
우리는 우리들만으로는 악마들을 막아낼 수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악마와 대적할 세력이 필요했다.
해서 우리는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실력있는 이들을 찾아 세력을 규합했다.
그러던 와중 악마들을 학살한다는 뛰어난 여기사에 대한 소문을 들을 수 있었다.
신들린 듯한 검으로 악마들을 도륙한다는 소문의 여기사.
그렇게 우리는 소문의 여기사를 찾아갔고.
‘레아···?’
‘오빠···?’
난 죽은 줄로만 알았던 레아를 만날 수 있었다.
오래 전, 죽은 줄로만 알았던 레아가 내 눈 앞에 있었다.
난 뭐라,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모든 것을 앗아간 줄 알았던 과거에 한줄기 희망이 남아있었다.
나와 레아는 한동안 눈물을 흘리며 그간의 해후를 나누었다.
난 곧장 레아를 동료들에게 소개시켜주었다.
나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이들.
악마는 나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새로운 무언가를 안겨주었다.
레아는 그런 나의 동료들과 친해질 수 있었다.
다만, 딱 한 존재.
‘오빠, 그런데 저 흑발의 남자는 누구야?’
카일을 제외하고 말이다.
카일은 딱히 레아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카일을 바라보는 레아의 눈빛은 상당히 미묘했다.
그런 레아를 보고있자니···.
왜인지 모르겠지만 카일이 조금은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하지만 카일이라면 괜찮다는 생각도 들었다.
카일은 내가 만나본 남자 중 그 누구보다 올곧고 강직한 이였으니까.
레아와 이어지면 카일이 내 매제가 되는 건가?
비록 카일은 두고 온 연인을 그리워하고 있었지만.
본디 사랑은 새로운 사랑으로 잊혀지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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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레아랑 만났구나.”
그리고 보아하니 레아 또한 검에 상당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았다.
하기사, 레아는 다름 아닌 샤를롯과 남매였다.
그 재능이 어디 가는 건 아니겠지.
“어쩐지.”
레아가 왜 그렇게 강한가 싶었다.
물론 긴 시간동안 사념을 축적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끊임없는 수련을 거듭해온 켄드릭과는 달리 레아는 그저 전당에서 봉인되어 있었다.
별 다른 수련을 한 것이 아님에도 그 정도 경지인 것이 조금은 의아하긴 했다만···.
역시나 기본적인 밑바탕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보다 레아를 루벤에서 매일 보기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만.
“이렇게 샤를롯의 기록으로 보니까 새롭네.”
그것도 무려 천 년전의 기록으로 말이다.
시안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다음의 내용을 확인했다.
사락.
『세력을 규합한 우리는 악마들을 거침없이 몰아내었다.
나와 동료들의 이름 아래 대륙의 모든 전력들이 뭉쳤고.
이에 악마들 또한 모든 전력을 한데 모아 대항했다.
그렇게 대륙의 명운을 건 최후의 전투.
그 치열한 전투는 며칠이 지나도록 이어졌으나.
우리는 그 끝에 승리할 수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수많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 나를 비롯한 동료들은 강해졌고.
우리의 이름 아래 모인 전력들 또한 무시할 수 없었으니까.
그렇게 우리는 악마를 궁지 몰아넣었다.
아니, 몰아넣었다고 생각했다.
교만의 악마.
그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그는 여타 다른 악마 6군주와는 달랐다.
악마 6군주들 또한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으나.
교만의 악마는 그런 군주들과는 결을 달리했다.
존재가 닿을 수 없는 격.
교만의 악마는 그 격을 초월한 존재처럼 여겨졌다.
지금은 지나간 일임에도 아직도 그 끔찍한 강함이 눈앞에 생생하다.
나와 내 동료들이 모두 합심해도.
대륙의 모든 이들이 힘을 합하여도.
결코 닿을 수 없었던 존재.
만일 카일이 없었더라면.
카일이 교만의 악마와 대적하지 않았더라면.
최후의 전투에서 패하는 것은, 우리들일 것이었다.
그러나 카일은 끝내 교만의 악마를 베어냈고.
기나긴 악마와의 전쟁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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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전투 때구나.”
신화 속 이야기와 비슷하면서도 사뭇 다른 내용이었다.
전반적인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세세한 내용.
정확히는 교만의 악마에 관한 내용이 처음 등장하는 내용이었다.
아무래도 이때의 이야기가 전해지며 악마 7군주로 알려진듯 싶었다.
“그런데 교만의 악마가 그렇게 강했나···?”
현재까지 시안이 만나본 군주는 둘이었다.
나태의 악마, 누르비아.
색욕의 악마, 루슈리아.
시안이 대적한 이 둘은 본연의 힘을 대부분 제약당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이 둘의 강함은 가히 끔찍하다 평할 정도였다.
시안 혼자였다면 결단코 어찌할 수 없었으며.
또 대부분의 힘이 제약되지 않았더라면 감히 어찌할 수 없는 절대적인 악(惡)이었다.
그런데 지금.
샤를롯이 말하는 교만의 악마는 이들을 아득히 뛰어넘는다, 라고 말하고 있었다.
카일이 다른 아르나이즈들과 격을 달리한 것처럼.
“음···.”
이런 세세한 내용은 처음 보는 내용이었다.
“최후의 전투가 벌어진 곳이 어둠의 숲이라고 했었지.”
현재 루벤이 자리한 바로 그곳이었다.
그리고 원래는 어둠의 숲이 아니었다고 한다.
어둠의 숲이라 불리게 된 것은 이 최후의 전투 이후.
그러니까 최후의 전투의 여파로 변형된 지형이라 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카일과 교만의 악마.
그 둘의 전투로 변형된 것이 아닐까 싶었다.
뭐, 어쨌든 최후의 전투 이후 악마들은 대륙에서 사라졌다.
그로써 대륙에는 평화가 찾아온 셈.
그러나 비망록의 기록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사락.
『최후의 전투 이후, 악마는 대륙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길고 길었던 전쟁이 끝나고 드디어 도래한 평화.
나는 곧장 카일을 찾아갔다.
카일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교만의 악마와 대적한 직후이기도 했거니와.
카일은 한사코 뮤리엘의 신성력을 거절했었으니까.
애초에 카일은 뮤리엘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좋아하지 않다기 보다는··· 알게 모르게 뮤리엘을 피하고 있었다.
다른 동료들은 눈치채지 못했으나 나는 알 수 있었다.
나는 속으로 실소를 흘리며 카일에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려고?’
길었던 전쟁이 끝나고 대륙에 도래한 평화.
동료들은 모두 돌아갈 곳이 있었다.
그러나 카일은 아니었다.
카일은 돌아갈 곳이 없었다.
언젠가 카일은 이에 관련한 물음을 해온 적이 있었다.
모든 것이 끝나면, 돌아갈 수 있을까.
나는 여전히 그 곳이 어딘지.
또 카일이 누구를 그리워하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끝난 지금.
카일은 돌아갈 수 없음을 난 알 수 없었다.
내 물음에 카일은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갈 곳이 없으면 같이 가지 않을래?’
나는 그런 카일에게 제안했고 카일은 눈을 살짝, 치켜떠보였다.
‘대륙에 평화가 찾아왔지만··· 그렇다고 위협이 없는 건 아니야. 힘없고 약한 이들은 여전히 힘든 삶을 살아가야하지. 난 그런 사람들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곳을 만들려고 해.’
내 말에 카일은 답이 없었다.
그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볼 뿐.
그리고 바로 그때.
‘오빠! 뮤리엘 좀 어떻게 해봐! 쟤는 어떻게 된 게 매번 잔소리만 하는 건지···!’
갑자기 레아가 투덜거리며 나를 찾아왔다.
보아하니 뮤리엘과 또 투닥거린 것 같았다.
레아는 뮤리엘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얼굴도 예쁜데 성격도 착해서 재수없다나 뭐라나.
그렇다고 레아가 정말로 뮤리엘을 싫어하는 건 아니었었다.
그냥 자매들끼리 투닥거리는 정도?
해서 난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카일이 일순간 피식, 실소를 흘렸다.
그런 카일의 모습에 난 놀라 눈을 치켜떠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난 카일이 저렇게 웃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무뚝뚝하고 감정이 없던 카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카일의 입가엔 분명한 작은 미소가 지어져있었다.
카일은 레아를 살짝 바라봤다.
레아를 보는 것인지, 아니면 방금 레아가 한 말을 생각하는 것인지.
그것은 알 수 없었지만 카일은 분명 레아를 보고 있었다.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
이윽고 카일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자리를 벗어났다.
‘저게 무슨 말이야?’
뜬금없는 카일의 말에 레아가 물어왔다.
난 그런 레아에게 방금 전 있었던 대화를 말해주었다.
‘잠깐. 그, 그렇다는 건 카일이 우리랑 같이 간다는 뜻이야?’
‘아마도?’
‘저, 정말? 카일이 우리랑 같이 간다고?’
‘나야 정확히는 모르지?’
난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방금 카일이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하지 않았어? 그건 같이 가겠다는 뜻 아니야?’
그러자 레아가 내게 한껏 달라붙으며 소리쳤다.
난 그런 레아의 모습에 웃음이 터져나왔다.
‘난 모른다니까?’
‘오빠! 그렇게 나몰라라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나서봐!’
난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레아가 뭐라 궁시렁궁시렁 거렸지만 난 신경쓰지 않았다.
방금 전 카일의 모습.
착각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카일도 레아를 썩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았으니까.
뭐, 레아는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만.
‘카일을 설득하고 싶지만··· 왜인지 어깨가 좀 쑤셔서 안 되겠는걸.’
‘하, 하하··· 오라버니. 이 소녀가 안마라도 좀··· 해드릴까요···?’
그렇게 우리들 앞에 찬란한 미래만이 있을 것이라.
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
.
.
사락.
『나의 믿음대로 우리들 앞에는 찬란한 미래만이 가득했다.
나는 나를 따르는 이들을 규합해 새로운 왕국을 건설했다.
카일은 그런 나의 곁에서 큰 힘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정이 싹튼 것일까.
카일은 끝내 레아와 혼인을 약속했다.
그렇게 우리에게는 더없이 찬란한 미래만이 펼쳐져있었다.
분명···.
‘떠나야··· 한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렇다.’
고개를 끄덕이는 카일의 모습에 난 정신이 멍해졌다.
농담이라 생각하고 싶었지만 카일은 더없이 진지하기만 했다.
애초에 카일이 그럴 성격도 아니었다.
‘왜? 대체 왜?’
나는 카일의 결정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