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질하는 영주님!-156화 (156/322)

§ 156화 - 공로 행사(1)

시안은 금새 황궁 안 쪽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것도 별 다른 절차 없이 신원을 확인하는 것이 전부였다.

뭐, 사실상 이번 공로 행사의 주인공이었으니 충분히 그럴 수는 있었다.

‘전이랑은 대우가 천지차이인데.’

예전에 황궁을 방문할 때는 그렇게 무시당했었건만.

지금은 귀빈 대접도 이런 귀빈 대접이 없었다.

그만큼 시안의 위치가 올랐다는 것의 방증이기는 했으나.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닌데.’

이렇게까지 대우를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적어도 몸 수색 정도는 했어야했으니까.

이 정도면 거진 황가의 일원을 대하는 수준이었다.

황가의 일원을 상대로 몸 수색을 할 수는 없었으니까.

갑작스러운 황제의 개입도 그렇고.

부탁하지도 않았던 행사도 그렇고.

방금 보였던 로열 나이츠들의 태도까지.

‘대체 뭔 일이 있었던 거야?’

시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자니.

“본격적인 행사 시작까지 아직 시간이 남아있습니다. 그 동안 다른 귀빈들과 함께 연회를 즐기고 계시지요.”

옆으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름 아닌 황태자를 최측근에서 보좌하는 시종장이었다.

보아하니 아직 행사 준비가 한창인 모양인 것 같았다.

연회는 썩 내키지 않았지만 그 동안 마땅히 할 것도 없었다.

시안은 시종장이 안내한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종장은 뒤 따라온 에런에게 말했다.

“하얀 늑대 기사분들은 저를 따라오십시오. 머무르실 곳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에런이 잠시 머뭇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에런의 목적은 시안의 호위이자 감시였으니까.

“저희는 신경쓰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도련님과 같이 있겠습니다.”

“이곳은 행사의 귀빈들을 위한 연회장입니다. 허가되지 않은 자는 머무르실 수 없습니다.”

에런의 말에도 시종장은 단호히 말을 일축했다.

사실 말이 귀빈이었지 사실상 제국의 내로라하는 귀족들을 말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으니까.

그런 곳에 기사들이 참석하는 건 말이 안 되었다.

하물며 이곳은 다름 아닌 황궁.

아무리 엘란두르라도 지킬 건 지켜야 했다.

잠깐의 침묵.

“······ 그럼 저희는 잠시 물러나 있겠습니다.”

끝내 에런이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그렇게 에런은 시종장의 안내를 따라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시안은 그때서야 방의 문을 열었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 틈으로 방 풍경이 비쳐보였다.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를 누비는 여러 귀족들의 모습.

시종들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잔을 건네고 있었고,

저마다 담소를 나누는 소리들이 배경음처럼 깔렸다.

더없는 연회장의 분위기.

보아하니 전부 이번 행사와 관련 있는 인물들인 것 같았다.

시안이 북부 사건을 해결한 장본인이라고는 하나.

알게 모르게 복부를 도와준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당장 북부 사건 이후, 물자를 보급해준 것만 해도 그러했다.

아무리 시안이 루벤의 모든 물자를 끌어다 풀었다고는 해도.

그것이 북부의 모든 지역을 감당할 정도의 양은 아니었다.

루벤이 사시사철 풍년이라고는 하나 그래봤자 일개 영지였다.

물론 산출량은 거진 백작령과 맞먹었지만.

또 시안이 물자를 풀지 않았더라면 북부는 지금도 정리되지 않았을테지만.

어쨌든 시안 ‘혼자서’ 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꽤 많네.’

아무튼 그런 것치고도 귀족들이 상당히 많았다.

건국일 행사 때만큼은 아니더라도 그에 버금가는 수준.

뭐,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행사는 귀족들에게 기회라 볼 수 있었으니까.

다른 유망한 귀족들과 안면을 틀 수 있는 절호의 기회말이다.

심지어 이번엔 황제가 직접 주최한 행사였다.

쉽게 말해 나 끗발 좀 있소, 하는 귀족들만 참가할 수 있는 자리.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제린 백작 각하. 저는 두플레 자작이라고 합니다.”

“두플레 자작···? 혹시 철광의 땅을 관리하시는···?”

“하하. 백작 각하님에 비하면 한낱 광부이죠.”

그런 자리를 마다할 귀족들이 아니었다.

연회장에는 그런 귀족들이 저마다 무리를 이루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중앙의 귀족들은 여러 이익을.

변방의 귀족들은 중계 진출의 꿈을.

서로가 서로의 카드를 은근슬쩍 보이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이게 연회인지 뭔지.’

시안은 그런 연회장의 모습을 둘러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는 슬그머니, 구석진 자리로 향했다.

어둠의 숲에 위치한 루벤.

어떻게 보면 변방 중에서 최변방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안은 딱히 중앙에 진출할 생각이 없었다.

중앙에 진출해서 뭘 한단 말인가.

머리 아프게 정치 싸움이나 할 것이 뻔한데.

정치에 관심이 있다면 또 모를까.

시안은 정치에 발을 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또한 딱히 친분이 있는 귀족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저런 왁자지껄한 분위기도 썩 좋아하지 않았다.

“조용히 있다가 가자.”

시안은 그렇게 구석진 자리를 찾아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시선에서 벗어난 곳에 자리한 시안.

“후우···.”

시안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한적한 자리에 있음에도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계속 느껴졌다.

“이런 자리가 뭐가 좋다는 건지.”

시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건 그렇고···.”

시안은 곧장 스마트 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모바일 영주를 실행.

[현재 긴급 점검이 진행 중입니다.]

[점검 동안에는 일부 서비스를 이용하실 수 없습니다.]

[이용에 불편을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긴급 점검에 들어간 모바일 영주를 확인할 수 있었다.

거진 8,000만 골드의 현질 끝에 기절해버린 모바일 영주.

지난 번 3,100만 골드에서 기절한 것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만한 반응이었다.

“그래도 버틸 줄 알았지.”

하지만 시안은 버틸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6,000만 골드 가량의 현질에도 모바일 영주는 끈질기게 정신을 붙잡고 있었으니까.

해서 2,000만 골드도 남았겠다.

어차피 써야하는 돈이겠다.

시안은 남은 돈을 모조리 즉시 완료권에 들이부었다.

그런데 그대로 기절해버릴줄은···.

“명성 포인트도 못 질렀는데.”

그 때문에 이번에도 명성 포인트를 지르지 못했다.

시안은 현재 쌓인 명성 포인트를 확인했다.

[보유 중인 명성 포인트] - 135,000 P

무려 13만 포인트하고도 5천 포인트가 쌓여있었다.

북부의 사건과 더불어, 이번에 엘란두르에서 쌓인 포인트들이었다.

왜 이렇게 쌓이는 것인지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뭐, 어쨌든.

현금 가치로 환산하면 무려 1,350만 골드에 달하는 포인트.

이걸로 아르나이즈 특전을 13번이나 강화할 수 있었고.

아르나이즈 특전 효과를 13번이나 추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 긴급 점검이 진행 중입니다.]

[점검 동안에는 일부 서비스를 이용하실 수 없습니다.]

[이용에 불편을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지금은 긴급 점검으로 인해 명성 상점을 이용할 수가 없었다.

“유효 기간이 있는 건 아니니까.”

시안은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이건 그닥 문제가 되지 않았으니까.

긴급 점검이 끝나고 질러도 큰 상관은 없었다.

진짜 문제는 이것이었다.

“설마··· 점검 보상으로 즉시 완료권을 주지는 않겠지?”

다름 아닌 긴급 점검의 보상이었다.

지난 날의 경험상을 비추어보면.

긴급 점검 보상은 즉시 완료권이었다.

그것도 긴급 점검 전에 현질한 모든 시설과 연구에 대한 즉시 완료권.

보상이라는 취지에 더없이 걸맞는 보상이었다.

오죽하면 루벤 전역을 뒤엎을 때 이 보상을 이용했을까.

하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이번엔 결코 받기 싫은 보상이었다.

보상은 개뿔.

하등 쓸모 없는 쓰레기나 다름 없었다.

이번에는 즉시 완료권을 모조리 구매했으니까!

“잠깐, 설마 모바일 영주가 노린 건 아니겠지?”

생각해보니 그럴 듯한 가설이었다.

모바일 영주는 6,000만 골드 현질 당시에 기절하기 일보 직전의 상태였다.

농담이 아니라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다.

그럼에도 모바일 영주는 끝까지 버텼다.

해서 시안은 이번에는 버틸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시안이 즉시 완료권을 구매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면?

그러니까 시안이 즉시 완료권을 구매할 때까지 모바일 영주가 버틴 것이라면?

그로써 모바일 영주가 시안에게 깐족거리기 위함이었다면?

“······”

설마하니 그럴까 싶다가도.

어째··· 모바일 영주는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 동안 모바일 영주가 해온 것이 있으니까.

“점검 보상으로 즉시 완료권을 주기만 해봐 진짜.”

아주 똥통에 담가버릴라니까.

아니지, 저번에 보니까 추운 걸 싫어하던데.

그럼 차가운 똥통에 담가버려야겠다.

시안은 스마트 폰을 향해 소리쳤다.

“난 지금 1억 골드만큼 화났어!”

시안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시안은 누군가에게 들으라는 듯 소리쳤다.

“SSS등급 다음 등급의 장비만큼 화가 났다고!”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시안은 계속해서 스마트 폰의 검은 화면 위로 소리쳤다.

“난 즉시 완료권만큼 화가 나지 않았─.”

“저기···.”

갑자기 누군가 시안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싶은 것도 잠시.

시안은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바라본 그곳.

그곳엔 웬 아리따운 영애가 서 있었다.

일단 처음 보는 얼굴.

하지만 휘황찬란한 드레스를 보아하니 끗발 있는 귀족가의 영애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애초에 이 연회장에 있다는 것 자체가 그것의 방증이기도 했다.

“혹시 시안··· 공자님이신가요?”

“그렇습니다만.”

영애의 물음에 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영애가 화색을 띠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몰트케 백작가의 차녀, 헤린 몰트케이라고 해요.”

“몰트케 백작가라면···.”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아버지께서 황궁 재상의 보좌관으로 역임하고 계세요.”

“아.”

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한 번 들어본 이름이다 싶었다.

그리고 역시나 낮은 신분의 위치가 아니었다.

“시안입니다.”

시안은 간결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무례하게 느껴질 수 있는 소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 귀족 간의 소개는 성을 붙여 가문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 예의였으니까.

방금 전, 헤린의 소개처럼 말이다.

성을 붙이지 않은 경우는 두 가지.

신분이 평민이거나 혹은 가문이 몰락했거나.

그리고 어느 쪽이나 품격이 떨어지는 일이었다.

그걸 시안이라고 모르지 않았으나 시안은 엘란두르라는 성을 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갖다 버리려던 참이지 않은가.

‘지금쯤이면 저택은 난리가 나있겠지?’

난리가 나다 못해 발칵, 뒤집혀져 있을 터였다.

눈에 불을 켜고 횡령한 당사자를 찾느라 혈안이 되어있을 것이었다.

물론 아직 시안의 행각임은 밝혀지지 않았을 터.

뭐, 어쩌면··· 밝혀졌을 수도 있겠지.

그런데 뭐, 어쩌란 말인가.

‘이미 다 써버렸는걸.’

어쨌거나 시안은 이제 다시는 엘란두르로 돌아갈 일이 없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헤린은 아니었다.

그러나.

“말씀은 많이 들었어요.”

헤린은 전혀 내색하지 않고 밝은 미소를 지어보일 뿐이었다.

그녀의 청순한 미소는 사람의 시선을 매료시키는 힘이 있었다.

한창 미모가 피어나는 나이.

주변으로 모여드는 시선을 모를 만큼 헤린은 눈치가 없지 않았다.

그렇기에 헤린은 자신 있었다.

시안 또한 이 미소에 조금은 흔들릴 것이라는 것을.

헤린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시안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아, 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시안은 별 다른 반응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리고는 손에 들고 있는 요상한 무언가로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작고 네모난 무언가.

검은색의 화면만을 비치고 있는 무언가.

시안은 그 무언가에 입을 가져가 대더니.

“즉시 완료권을 주면 세라한테 말해서 혹한의 똥통을 준비할 줄 알아!”

전혀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

헤린은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저 모습을 보고 대체 무슨 할 말을 할 수 있을까.

헤린은 멍하니 시안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헤린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난 1,000만 명성 포인트만큼 화가 나있다고!”

시안은 계속해서 모바일 영주에게 속삭일 뿐이었다.

즉시 완료권을 받으면 그것만큼 열불이 뻗치는 일은 없었으니까!

“난 분명 말했어! SSS등급 다음 등급의 장비 만큼 화가 났다고!”

그게 뭔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시안은 계속해서 스마트 폰을 향해 소리쳤다.

그런데.

“혹시 시안··· 공자님 이신가요?”

또 다시 시안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번엔 방금 전과 다른 목소리였다.

그러니까 헤린과는 다른 누군가가 시안을 불렀다.

뭔가 싶은 것도 잠시.

“저는 트루엘 자작가의 아린 트루엘이라고 해요.”

“저는 레두스리 백작가의···.”

시선을 돌려 바라본 그곳엔 수많은 영애들이 모여있었다.

어째 연회장의 영애란 영애들이 모조리 시안에게로 달라붙은 것만 같았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소문은 익히 들었어요. 저희 아버지께서도 얼마나 칭찬하시던지.”

그리고 줄줄 이어지는 영애들의 말.

“······ 뭔데?”

시안은 진짜 뭔가 싶었다.

시끌벅적한 것이 싫어 한적한 곳에 자리했건만.

순식간에 시안의 주위로 귀족가의 영애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야기를 나눠도 괜찮을까요?”

“제가 듣기로 따로 연인이 없으시다고 들었는데···.”

끊임없이 들려오는 영애들의 목소리.

그와 동시에 영애들이 시안을 향해 달라붙기 시작했다.

“뭐, 뭡니까?”

시안은 순간 당황스러웠다.

영애들이 이러는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교계에서 시안의 이미지는 그야말로 개박살이 나있었다.

후작가의 망나니, 무능력한 놈팽이.

혹은 후작가의 패륜아.

한 마디로 그냥 쓰레기나 다름 없었다.

물론 일반 백성들에게야 시안의 이미지가 상당히 좋았다.

특히나 제국 서부와 북부.

그리고 엘란두르 후작령에서는 거진 아르나이즈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귀족들의 사교계에서 시안의 이미지는 말 그대로 개박살이 나있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보이는 모습.

“언제 한 번 저희 영지에 놀러 오시지 않으실래요?”

“엘란두르 후작령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시안은 지금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시야 빼곡히 모여있는 영애들.

한껏 빼입은 이들은 저마다 제국에서 이름 좀 날린다는 가문의 영애들이었다.

그런 영애들이 모두 시안에게 몰려들고 있었다.

그 때문에 사방팔방이 꽉, 막혀있었다.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도 도무지가 길이 보이지 않았다.

‘마혼무영보라도 써야하나.’

카일의 보법인 마혼무영보.

몸을 어둠으로 흩어버리는 마혼무영보라면 여기서 충분히 벗어날 수 있었다.

마스터 상급인 켄드릭도 잠시나마 틈을 놓쳤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여기서 탈출하려면 마혼무영보라도 써야할 판이었다.

해서 시안이 심각하게 고민하던 찰나.

“왜 이리 소란이 이나 했더니···.”

어디선가 간드러지는 미성이 들려왔다.

그리고 어딘가 낯익은 목소리.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바라본 그곳엔 한 여성이 서 있었다.

태양빛을 닮은 금발과 더불어 느껴지는 화사한 분위기.

그러나 그와 대비되는 차가운 인상.

제국의 황녀, 엘레나.

엘레나의 등장에 시안을 비롯한 영애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연회장의 모든 이들의 이목이 한순간에 집중되었다.

“황녀님을 뵙습니다.”

“황녀님을 뵙습니다.”

“황녀님을 뵙습니다.”

이윽고 연회장 전체의 사람들이 엘레나에게 예를 표했다.

엘레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여보였다.

그리고 과연 황녀는 황녀인 것일까.

단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임에도 자연스럽게 품격과 품위가 흘러나왔다.

이윽고 엘레나가 시안을 바라봤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싼 귀족가 영애들을 한 번 훑어보더니.

“여기서 다시 뵙네요, 시안 공자님.”

시안을 향해 싱긋, 웃음을 지어보였다.

화사한 분위기가 청순함을 더해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모습.

이윽고 엘레나가 모여든 영애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제가 시안 공자님과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런데··· 다들 괜찮으시겠죠?”

그런 엘레나의 물음에 영애들은 아무런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저건 허락을 구하는 물음이라고 볼 수 없었으니까.

아무리 난다 긴다 하는 귀족가들의 영애라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귀족들 사이에서나 통용되는 말이었다.

황녀 앞에서는 귀족이고 나발이고 없었다.

“아, 그···.”

“그러니까···.”

“그, 그게···.”

영애들은 말을 얼버무리며 쉽사리 말을 내뱉지 못했다.

엘레나는 그런 영애들을 뒤로 한 채, 시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럼 가시죠 공자님.”

이윽고 엘레나는 걸음을 옮겼다.

시안은 벙찐 영애들을 바라보다 엘레나를 따라 같이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엘레나가 걸음을 멈춘 곳은 연회장의 한적한 자리였다.

뭐, 사실 한적한 자리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저 이 근처로 오지 못하는 것일 뿐이었으니까.

시안도 시안이었거니와 엘레나가 귀족 남자와 단 둘이 담소를 나눈다?

이미 연회장의 이목은 시안과 엘레나 쪽으로 집중되어있었다.

지금도 숙덕거리는 소란은 물론.

힐끗힐끗, 모여드는 시선은 전혀 한적하다고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도떼기 시장 같던 방금 전보다는 훨씬 편한 건 사실이었다.

시안은 잠시 숨을 돌리고는 엘레나에게 말했다.

“제게 하실 말씀이···?”

“없어요.”

“······?”

시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 전에 할 말이 있다고 이곳으로 부른 것이 아니었던가?

“불편해보이셔서요.”

“아.”

“내버려두면 사고치실 것 같기도 했고요.”

시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나의 말마따나 마혼무영보를 써서 탈출하려고 고민했던 찰나였으니까.

그게 사고라고 할 것 까지는 아니었지만···.

뭐, 아무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안은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자 엘레나가 역시나 싶은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좋은 시간을 방해한 것이 아니었나 싶었는데, 다행이네요.”

“좋은 시간은 무슨. 말씀대로 불편해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왜 갑자기 영애들이 모여든 건지 원···.”

“사교계에서 공자님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죠.”

“무슨 이미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정말 몰라서 물으시는 거예요?”

되묻는 엘레나의 물음에 시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그런 시안의 반응에 엘레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정말 모르는 것 같았으니까.

하기사, 이 남자는 원래 이런 남자였지.

엘레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공자님처럼 촉망 받는 인재와 연을 맺어서 나쁠 건 없잖아요?”

“그러니까, 저 영애들 모두가 저와 연을 맺고자 모여든 것이란 말씀입니까?”

“당연하죠.”

“왜 굳이 저와?”

“그거야─.”

엘레나는 내뱉던 말을 멈추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걸 꼭 설명해야만 아는 건가?

물론 사교계에서 시안의 소문은 형편 없었다.

그렇기에 그동안 시안이 받아오던 관심은 주로 경멸.

하지만 이번 북부의 사건 이후로 그 평가는 완전히 뒤집혔다.

새로운 제국의 별이라는 말까지 나돌고 있지 않은가.

여기에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망나니라고 저 싫어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당사자는 저딴 소리나 내뱉고 있으니 원···.

일부러 저러는 거라면 얄밉지라도 않았다.

하지만 엘레나가 그간 보아온 시안은 정말 몰라서 저러는 것이었다.

“그냥 그런 줄 아세요.”

엘레나는 고개를 살며시 흔들었다.

“그런 의미로 혹시 마음에 드신 영애가 있으셨나요?”

“아뇨, 없었습니다만. 그리고 전 이런 것에 별로 관심 없습니다.”

시안의 답에 엘레나가 살짝, 눈을 떠 보였다.

묘해진 눈빛. 이윽고 엘레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예전부터 계속 생각하던 건데. 공자님께서는 여인에 관심이 없으신가요?”

“관심이 없다기보다는··· 관심을 갖지 못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현질할 골드 벌기도 바빴으니까.

이 놈의 모바일 영주는 골드를 부어도 부어도 끝이 없었다.

특히나 지금은 엘란두르와 전면전을 준비해야했다.

여기에 연애니, 결혼이니.

이런 것들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도 남자라면 저런 옷 차림에 한 번쯤 눈길이 가실 텐데요.”

엘레나는 살짝, 시선을 돌려 연회장의 한 영애를 바라봤다.

그런 엘레나를 따라 바라본 시야.

그곳엔 육감적인 몸매를 가진 여인이 보였다.

여인은 라인 아래 깊게 패인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몸을 움직일 때마다 쇄골과 가슴이 드러났다.

확실히 눈길이 한 번쯤 가는 모습.

아니나 다를까 여인이 지나갈 때마다 남자 귀족들이 힐끔힐끔, 시선을 흘리고 있었다.

시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남자라고 모두 그런 건 아닙니다. 그리고 저런 스타일은 제 취향이 아닙니다. 뭔가··· 헤프다고 느껴져서 말이죠.”

“저 영애가 가진 매력인거죠. 여인의 옷차림으로 편견을 가지시는 건 명백한 성차별이에요.”

“그렇게 따지면 황녀님께서 제게 남자 어쩌고 하신 건 명백한 성희롱입니다만.”

“그럼 책임지고 결혼하면 되겠네요. 결혼하면 문제 없죠?”

“······”

시안은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

뭐, 결혼하면 문제가 없다만.

왜 이야기가 갑자기 그쪽으로 간단 말인가.

“푸흡!”

그런 시안의 모습에 엘레나가 웃음을 터트렸다.

바라본 그곳엔 엘레나가 끅끅, 거리며 웃고 있었다.

“죄송해요. 벙찌시는 표정에 저도 모르게 그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어깨까지 들썩거리며 끅끅거리는 엘레나였다.

하여간···.

여러모로 이상한 황녀였다.

“뭐, 어쨌든. 저곳에서 꺼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그런 의미로.”

시안은 엘레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곧장 말을 이었다.

“한 가지만 더 도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한 가지 더요···?”

엘레나의 고개가 좌측으로 살며시 기울어졌다.

시안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재차 입을 열었다.

“행사가 끝나고 같이 루벤으로 가시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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