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화 - 신임 부행정관(2)
“뭐, 뭐라고?”
“후작가에서 곡식을 대여해줘?”
“그, 그게 참말이여?”
사내의 외침에 주위의 사람들이 반신반의 하며 되물었다.
아니, 반신반의는 커녕 의심 가득한 얼굴이었다.
“이 사람들이 속고만 살았나! 정말이여!”
“차, 참말이라고?”
“후작가에서 곡식을 대여해준다는게?”
“그러다니까!”
사내는 호기롭게 말을 이었다.
“대신 가을 추수에 받은 만큼 환급을 해야돼!”
“아이고! 그거야 당연한 일이지!””
“지금만 버티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다고!”
그런 사내의 말과 동시에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며 소리쳤다.
흉년은 농작물들의 수확이 적은 해를 뜻했다.
즉, 절대적으로 농작물들의 양이 적은 해.
가진 것이 있어도 수확된 곡식이 적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곡식들을 대여해준다는 것은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였다.
하지만.
“아···.”
“아···.”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후작령의 사람들이 모두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흉년은 수확된 농작물이 절대적으로 적은 해.
기본적으로 헐벗고 굶주린 이들이 많은 해였다.
“우리는 그럴 형편이 안되는데···.”
“얘야, 미안하구나···.”
곡식을 빌린다 한들, 그것을 갚을 형편이 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사내의 말에 기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푹,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리고.
“······”
후린도 고개를 숙이는 이들 중 한 명이었다.
한낱 농노 신분인 후린.
후린 또한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바로 그때.
“게다가!”
사내의 외침이 다시 한 번 들려왔다.
그리고 이어진 사내의 외침.
“형편이 안되는 사람들은 아예 공짜로 식사를 배급해준다는 말씀!”
순간 후린의 눈이 번쩍, 떠졌다.
바로본 시야.
그곳엔 고개를 숙였던 수많은 사람들이 후린과 같은 표정으로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한 끼 정도의 식사이지만··· 그래도 먹을 걸 준다는 게 어디여!”
놀라 부릅, 떠진 두 눈.
“그, 그게 무슨···!”
“지금 거짓말··· 치는 거지?”
사람들이 저마다 소리쳤다.
사내의 말은 그만큼 충격적이고 파격적인 일이었다.
가지지 못한 이들에게 무료로 먹을 것을 준다는 것.
그건 귀족들이 가진 바 곡식들을 풀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그동안 굶주린 사람들을 나몰라라 하던 이들이 아니었는가.
그저 제 배가 배부르면 족한 귀족들이었다.
사람들이 굶어죽든 말든, 신경쓰지도 않은 이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거 참, 그렇게 못 믿겠으면 직접 가봐! 지금 마을 입구에서 배급하고 있으니께!”
사내는 그 말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졌다.
사람들은 멍하니 사내가 떠나간 자리를 바라봤다.
마치 태풍이 휩쓸고 간듯한 정적.
후린은 얼이 빠진 사람처럼 그 자리에 서있었다.
거짓말이다.
사내의 말은 필시 거짓말이었다.
후린은 머릿속으로 사내의 말을 끊임없이 부정했다.
그러나 터벅.
어느덧 후린의 발걸음은 마을 입구를 향해 내딛고 있었다.
그리고 보이는 모습.
“아이고 나으리. 정말 감사합니다요! 감사합니다요!”
“살았다! 우린 이제 살았어!”
가장 먼저 감격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뒤를 이어 음식을 배급 받는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 정말··· 이었다고?”
후린의 정신이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비단 후린 뿐만아니라 홀린듯이 따라온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픈 사람들은 저쪽, 치료소에 가봐!”
그 사이로 또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바라본 그곳.
그곳엔 한 사내가 아프고 병든 사람들에게 뭐라뭐라 소리치고 있었다.
후린은 황급히 다가가 사내에게 물었다.
“이, 이보게! 치료소라니? 우리 마을에 치료소가 생겼단 말인가?”
“아, 글쎄 그러니께. 심지어 치료사 분이 어찌나 잘 봐주시던지 우리 딸내미도 금방 나았다니까!”
“세상에나···.”
후린은 다시 한 번 정신이 멍해졌다.
“또 그 뿐인 줄 알어? 지금 후작령 전체로 구황 작물을 재배 중이래!”
“구황 작물을··· 말인가?”
“그래! 농지 전체를 싹 갈아 엎어서 진행 중이라더군!”
“그, 그럼 곧 있으면 먹을 것이 나오는 건가?”
“그렇다니까! 조금만 버티면 이 지긋지긋한 흉년도 끝이 나는 거지!”
사내는 활짝, 웃으며 소리쳤다.
그런 사내의 목소리에는 분명한 생기가 깃들어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절망만이 가득하던 마을이었다.
기아와 기근, 굶주림과 허덕임.
흉년이 가져온 절망에 좌절하던 마을이었다.
하지만 지금.
“엄마! 이 빵 마시써요! 엄마도 하나 드세요!”
“어이구 내 새끼, 마음이 이쁘기도 하지.”
속속들이 희망의 냄새가 피어나고 있었다.
“이보게들! 어여 와서 같이 먹게나!”
“그동안 많이 굶었으니 여기 죽부터 먹으라고! 하하하!”
더 이상 사람들은 흉년이 가져온 절망에 괴로워하지 않았다.
밝은 희망이 마을 곳곳에서 피어나고 있었다.
“아아···.”
후린은 그만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아버렸다.
그동안 헐벗고 굶주렸던 나날들.
하루하루 야위어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슬픔.
그럼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참함.
그럼에도 나아지지 않는 현실의 절망.
그러나 이제는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희망.
수많은 생각과 심정들이 후린의 머릿속을 뒤엉켜왔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단연 떠오르는 생각.
“대체 누가··· 누가 이렇게···.”
누가 이런 일을 만들었는가.
그리고 그 답은 금새 들려왔다.
“이 모두가 시안 공자님이 명하신 일이라며?”
“뭐어? 시안 공자님이? 그, 그 후작가의 망나니라는 분?”
“예끼 이 사람! 망나니라니! 언제적 이야기를 지금 하는 겐가!”
“망나니가 아니라 구세주셔 구세주!”
사람들은 시안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칭송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이 마을만의 일이 아니었다.
엘란두르 후작령 관할 모든 마을, 모든 영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시안 공자님!”
“시안 공자님 만세!”
신임 부행정관, 시안의 이름이 끊임없이 울려퍼졌다.
#
띠링!
“음?”
갑자기 품 속에서 들려오는 스마트 폰의 알림음에 시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바일 영주가 깨어났나?’
시안은 혹시나 싶은 심정으로 스마트 폰을 확인했다.
그렇게 확인한 알림창의 내용.
〈엘란두르 후작령 전역에서 당신의 이름이 울려퍼지고 있습니다.〉
〈명성 포인트 +300 P〉
〈명성 포인트 +500 P〉
〈명성 포인트 +200 P〉
〈명성 포인트 +150 P〉
.
.
.
“······ 뭔데?”
시안은 이게 뭔가 싶었다.
갑자기 명성 포인트가 오르고 있다는 알림창.
“······ 뭔데 이거.”
시안은 진짜 뭔가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시안은 딱히 하고 있는 일이 없었으니까.
진짜 하고 있는 일이 없었다.
그냥 고급스러운 의자에 앉아 몸을 뉘이고 있었다.
물론.
“제드라 마을에 밀 230 포대···. 치료사 고용비랑 또···.”
그런 시안의 옆으로 파이톤이 이것저것 바삐 결재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그 옆으로 파이톤의 수많은 부하 행정관들 또한 펜을 움직이고 있었다.
시안은 그런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정확히는 명령만 내리고 앉아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간혹 문제점이 있으면 지적해주는 정도?
“공자님. 여기 추가 예산 결재서입니다.”
이윽고 파이톤이 시안의 책상 위로 결재서 하나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띠링!
〈명성 포인트 +400 P〉
〈명성 포인트 +200 P〉
또 다시 스마트 폰 화면 위로 명성 포인트가 쌓이기 시작했다.
‘진짜 뭔데?’
시안은 정말 뭔가 싶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에이, 모르겠다.’
시안은 스마트 폰을 다시 품 안에 집어넣었다.
언제는 모바일 영주를 이해했던 적 있었나.
그리고 뭐, 명성 포인트가 쌓이는 건 나쁜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모바일 영주가 깨어날 때까지 명성 포인트도 사용못하는 지금.
생각해봤자 머리만 아플 뿐이었다.
시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파이톤이 작성한 결재서를 확인했다.
각종 치료 물품과 더불어 치료사 고용비에 대한 결재서.
그 금액만 대략 120만 골드 가량되었다.
“음··· 나쁘지 않네요.”
쾅.
시안은 대수롭지 않게 결재서에 인장을 찍었다.
#
시안은 거침없이 결재서에 인장을 찍었다.
그리고 상황이 이쯤되자.
“초, 총괄 행정관님. 이, 이래도 되는 겁니까···?”
“이러다 안주인께서는 물론, 가주께서도 경을 치실지도 모릅니다···!”
엘란두르의 행정관들이 하나 둘씩, 우려를 표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시안이 사용하고 있는 예산.
그건 정말이지 물 쓰듯이 쓴다, 라는 말이 딱 적절했으니까.
이대로 있다간 예산이 거덜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엘란두르의 천문학적인 자금이 거덜날 일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시안이 쓰는 예산은 혹시···? 하는 물음이 떠오르게 만들 정도였다.
“부행정관님의 행동이 과합니다···.”
“총괄 행정관님께서 한 말씀 해주십시오.”
행정관들은 총괄 행정관인 파이톤에게 한 마디씩 우려를 표했다.
하지만.
“크흠···.”
파이톤은 아무런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일단 파이톤이라고 뭐라 한 마디 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물론 직책은 파이톤이 더 높았다.
총괄 행정관과 부행정관.
직책은 파이톤이 시안의 상관이었다.
그러나 말이 직속 상관이지, 그 이면은 결코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한 마디 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시안이 엘란두르의 핏줄이라도.
듀라크의 관심을 받고 있는 인재라 할지라도.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
그리 말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나으리 덕분에 제 아내며 자식들이며. 가족들이 살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요! 정말 감사합니다요 나으리!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요.”
“저희가 천지무식해도 받은 은혜는 알습죠. 암요!”
시안에게는 도무지 그럴 명분이 없었다!
냉철한 판단력과 분석력.
그리고 반발하는 가신들을 휘어잡는 카리스마까지.
잘못은 개뿔이 무슨.
시안의 정책 덕분에 흉년의 피해가 빠르게 사그라들고 있지 않은가!
뭐, 그 과정에서 예산이 과하게 책정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건 전부 후작령의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시안이 그로써 혜택을 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차라리··· 시안이 횡령과 비리를 저질렀다면 또 모르겠다.
몰래 돈을 꿍쳤으면 파이톤은 진즉에 나섰을 터였다.
“예산 사용에 따른 장부들, 꼼꼼이 작성하고 있지?”
그런데 시안은 그러지 않았다.
“예, 옛.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디 한 번 줘봐.”
모든 자금을 투명하고 또 정당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음? 이봐, 여기. 예산 측정이 잘못된 거 아니야? 0하나가 더 작성된 거 같은데?”
심지어 장부에서 실수로 누락된 부분까지 정확히 파악했다.
이건 수 십년을 행정일에서 굴러먹은 베테랑이나 다름 없었다.
물론 시안은 루벤의 영주로 직임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루벤은 고작해야 쬐그만 영지였다.
그것도 어둠의 숲에 위치한 쓰레기 영지.
루벤과 엘란두르 후작령은 그 규모부터가 남 달랐다.
뭐, 도움 정도야 될 수는 있겠지.
“아, 아··· 죄송합니다.”
“숫자 기입엔 항상 조심하라고. 이거 다 돈이야 돈.”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또 그뿐이랴.
예산 사용에 있어 시안은 전혀 머뭇거림이 없었다.
말 그대로 머뭇거림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이건 파이톤은 확신할 수 있었다.
상인으로서 몇 년을 구르던 이들.
혹은 가히 대상인이라 불리는 인재.
아니, 제국 전역을 주름잡는 대상단의 상주가 있다하더라도.
시안만큼은 아닐 것이다.
시안을 따라올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 예산서에 찍혀있는 엘란두르의 막대한 자금.
그 천문학적인 자금 앞에서는 누구나 어버버, 할 것이 분명했다.
툭 까놓고 말할까.
몇 년 전, 대상단으로 명성을 떨치던 브라헤 상단도 멈칫, 거릴 것이 분명했다.
툭, 치면 수 십만!
뭐 좀 할라치면 수 백만!
본격적으로 움직이면 수 천마아아안!
이런 소리가 절로 나오는 예산서들이었다.
엘란두르에서 수 십년을 일해온 파이톤.
그런 파이톤조차 지금 결재를 할 때면 손이 벌벌, 떨리지 않은가.
그런데 시안은 무슨···.
“뭐야. 후작령의 농지 갈아 엎고 구황 작물 심는데 고작 520만 골드밖에 안 들어? 엄청 싸네? 인력으로 대체할 수 있어서 그런가?”
전혀 대수롭지 않게 결재를 하고 있었다!
아니, 대수롭지 않기는 커녕 ‘싸다’ 라는 표현을 하고 있었다!
“520만 골드가 싼 금액이었나···?”
“그, 글쎄···?”
글쎄는 개뿔.
절대로 싼 금액이 아니었다!
그리고 절대로 고작이라는 말이 붙을 금액도 아니었다!
4인 가족이 14,444년을 놀고 먹을 수 있는 금액이 어찌 싸다고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영지 단위로 본다면 엄청난 금액은 또 아니었다.
그럼에도 싸다는 표현은 절대 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그런 금액의 결재가 무수히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저런 배포와 배짱이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건지···.
하지만 그로써 뚜렷한 성과가 보인다는 점이었다.
또 엘란두르를 향하는 민심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파이톤을 비롯한 엘란두르의 가신들.
“허어···.”
“이를 어찌···.”
시안의 행동에 뭐라 딴지를 걸 수가 없었다.
“부행정관님. 이번에 레이플 영지에 추가로 곡식들을─.”
“응. 가져가 써.”
어차피 내 돈 아니니까.
시안은 거침없이 결재서에 인장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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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차례 구휼 정책과 관련한 예산 결재서를 마친 직후.
시안은 장부를 보관하는 곳에서 장부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나하나 장부를 확인하던 와중.
“진짜 어마어마하네.”
시안은 순수한 감탄을 터트렸다.
그도 그럴 것이 엘란두르의 자금 규모가 정말 어마어마했다.
그렇게 물 쓰듯이 썼음에도 재정에 구멍이 나기는 커녕 여전히 건실했다.
시안은 오늘 작성한 장부를 살폈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숫자들.
어느 한 곳을 툭, 치면 수 백만! 이라는 소리가 바로바로 튀어나왔다.
지금 이 장부 하나에 적힌 자금의 합만 무려 수 천만 골드에 달했다.
그리고 지금 이곳, 장부를 보관하는 창고.
이런 장부가 수없이 빼곡히 쌓여있었다.
“과연···.”
엘란두르는 엘란두르라는 것일까.
시안이 루벤에 사용한 골드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뭐, 엘란두르 후작령의 규모를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만한 규모였다.
제국의 동부 전역을 지배하다시피하고 있는 가문, 엘란두르.
괜히 제국을 지탱하는 두 가문이라 불리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렇기에.
“분명 비자금 같은 것도 만들어 놓았을텐데···.”
시안은 이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엘란두르는 깨끗한 사업만 벌리지 않았으니까.
당장 이사벨이 시안을 암살할 때 지출된 골드를 꼽을 수 있었다.
양지에 드러낼 수 없는 일들.
그래서 장부에 적을 수 없는 일들.
그런 일에 비밀리에 쓰이는 검은 돈은 분명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런 검은 돈은 지금 여기.
장부 속에서 세탁되어 어딘가에 고이 잠자고 있을 터였다.
찾아낼 수 있다면, 시안이 꿀꺽, 할 수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건 말 그대로 검은 돈(Black Money).
출처를 밝힐 수 없는, 눈 먼 돈이었으니까.
엘란두르가 꿍쳐놓은 비자금.
그건 모르긴 몰라도 수 천만 골드는 가볍게 찜쪄먹을 터였다.
진짜 어쩌면 억 단위도 갈 수 있었다.
“현질 횡령은 현질 횡령이지만···.”
비자금은 또 이야기가 달랐다.
그건 엘란두르 자체를 흔들어 놓을 수 있는 무기가 될 수도 있었다.
물론 시안이 꿀꺽, 할 수 있는 돈이기도 했고.
“음···.”
시안은 장부를 면밀히 살폈다.
하지만.
“모르겠다.”
장부를 살펴봐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애초에 장부의 양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게다가 시안은 장부를 보는 방법을 잘 몰랐다.
시안이 구휼 정책을 직접 지시하기는 했지만.
구체적인 결재서의 작성은 모두 행정관들에게 위임한 이유가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나마 행정일을 경험해본 바.
‘한스가 왜 그렇게 죽어나갔는지 알겠네.’
엘란두르는 그래도 행정관이 많기라도 하지.
루벤의 행정관은 한스 혼자였다.
‘돌아가면 행정 인원도 좀 뽑아야겠는데.’
뭐, 아무튼.
엘란두르의 비자금은 엘란두르 입장에서도 중요한 돈이었다.
그런 중요한 돈을, 어마어마한 돈을.
별 다른 경험이 없는 시안이 장부를 쓱, 훑어보는 것만으로 알 수 있다는 건 말이 안되었다.
모르긴 몰라도 단단히 세탁하여 숨겨놓았을 터.
지금 당장 시안이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아멜리아라면 알 수 있을텐데.”
제국 서부를 주름 잡던 브라헤 상단.
아멜리아는 브라헤 상단의 여식이었다
비록 지금은 몰락했으나 그 깜냥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시안이 본 아멜리아는 상재로서의 재능이 뛰어난 여인이었다.
충분히 대상인이 될 재목.
그런 아멜리아라면 장부를 보고 자금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을 터.
해서 엘란두르의 비자금 출처는 물론.
어쩌면 이 비자금을 빼앗아 올 방법도 알아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장부를 어떻게 가져가.”
어디까지나 이 장부가 있을 경우에서였다.
이 장부는 엘란두르 내에서도 엄중이 다뤄진다.
시안도 이번에 행정관이 되지 않았으면.
듀라크에게서 전권을 위임받지 않았으면.
또 이렇게 명백한 성과를 보여 신뢰를 쌓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만질 수도, 볼 수조차도 없는 장부였다.
뭐, 그래도 이렇게 눈 앞에 있는 지금.
장부를 몰래 가져가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인벤토리에 넣으면 아무도 모를테니 말이다.
하지만.
“장부가 사라지면 당연히 의심을 하겠지.”
사라진 장부에 대한 의심을 피할 수는 없었다.
시안이 그간 지켜본 바.
장부는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었으니까.
결국 방법은 이 장부를 필사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여의치가 않았다.
“공자님. 이제 나갈 시간입니다.”
장부의 확인은 시안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바라본 그곳엔 총괄 행정관, 파이톤이 시안에게로 다가오고 있엇다.
그 옆으로 많은 행정관들이 창고를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종의 감시라면 감시라고 할 수 있었다.
장부는 그만큼 중요하고 또 엄중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한 마디로 한가롭게 필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저들의 눈을 피해 필사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이 방대한 장부를 통째로 외운다?
‘말도 안되지.’
그건 드래곤은 커녕, 아르나이즈 엘로디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쉽네.’
시안은 아쉬운 마음을 떨쳐내며 걸음을 옮겼다.
아니, 정확히는 걸음을 옮기려던 바로 그때였다.
띠링!
갑자기 품 속에서 스마트 폰의 알림음이 들려왔다.
‘또 명성 포인트가 올랐다는 건가?’
시안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스마트 폰을 확인했다.
그리고.
〈스마트 폰의 사진 촬영 기능을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응···?’
요상한 알림창을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