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화 - 신임 부행정관(1)
누군가 행정(行政)이 무엇이냐.
이리 묻는다면 참으로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행정이라 함은 참으로 애매한 개념이었으니까.
누군가는 무언가를 관리하는 일.
다른 누군가는 단체와 집단을 운영하는 일.
행정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분분했다.
그러나 그 의견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항상 등장하는 단어들이 있었다.
관리 혹은 운영.
즉, 행정이라 함은 무언가를 관리 혹은 운영하는 일이라 할 수 있었고.
따라서 행정관이라 함은 무언가를 관리 혹은 운영하는 자라 할 수 있겠다.
하여, 엘란두르의 행정관.
그 직책은 엘란두르를 관리 혹은 운영하는 자라 정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엘란두르 저택의 복도를 바삐 걸어가는 사내.
“하필이면 지금 때에···.”
엘란두르의 총괄 행정관, 파이톤.
파이톤은 엘란두르 저택의 복도를 누비고 있었다.
빠른 걸음과 함께 휙휙, 스쳐지나가는 저택의 풍경.
그 사이로 고용인들이 인사를 건네왔으나, 파이톤은 화답을 할 여유가 없었다.
“시안 공자님이라···.”
그도 그럴 것이 머릿속으로 얽혀오는 복잡한 생각 때문이었다.
가주의 명령으로 행정관으로 발령난 시안.
그 이례적인 일을 어떻게 받아야들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곧바로 부행정관이라니···.”
심지어 그 직책이 무려 부행정관이었다.
총괄 행정관 바로 밑의 직책인 부행정관.
파이톤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직책으로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엘란두르 내에서도 쉽사리 내주지 않는 자리.
물론 직책 상으로는 파이톤의 아래였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자면 또 그게 그렇지 않았다.
일단 시안의 핏줄부터가 남달랐다.
다름 아닌 엘란두르의 핏줄.
비록 사생아라고는 하나 듀라크의 핏줄을 이어받은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뭐, 그간 시안이 받아오던 대우를 생각하면 신경쓰지 않아도 되었다.
애초에 듀라크도 시안을 딱히 중요시 여기지 않고 있었고.
하지만.
“가주께서 직접 임명하실 줄은···.”
이번엔 그 듀라크가 직접 임명했다.
이례적이다 못해 실로 파격적인 일.
“······”
파이톤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상당히 난감했다.
그리고 끝내.
“이번엔 가주께서 실수하신 것일지도···.”
파이톤은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후작가의 망나니.
무능력한 놈팽이.
엘란두르 내에서 시안의 소문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그런 시안이 부행정관이라니···.
물론 최근 들어 시안이 달라졌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제국 전역에 소문이 파다한 북부의 사건.
그로써 들려오는 새로운 제국의 별.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랴.
보아하니, 예전과는 확실히 달라진 것은 있는 모양이었다.
그 찌질했던 이미지는 아닌 듯 싶었다.
엘란두르로서의 재능이 드디어 빛을 발하는 것일지도.
그러나 딱 그 뿐이었다.
행정이라는 것이 쌈박질을 잘한다고 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인과 문인.
검과 깃펜.
둘은 엄연히 다른 분야였다.
누군가를 관리하고 운영한다는 것은 다른 재능을 요했다.
무(武)에 천재적인 재능이 있다 한들.
자그마한 마을 하나조차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이지 않은가.
오죽하면 듀라크조차도 가문 내부의 일을 이사벨에게 위임했을까.
“가주께서 이번엔 실수를 하셨어···.”
명백한 실수.
그러나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실수라고 한들 듀라크의 명령이었으니까.
엘란두르에서 듀라크의 명은 절대적이었으니까.
파이톤은 걸음을 바삐 옮겼다.
그리고 어느덧 도착한 한 방문 앞.
파이톤은 심호흡을 한 번 내뱉고는 가볍게 노크를 했다.
똑똑.
“엘란두르의 총괄 행정관, 파이톤입니다.”
#
하루 아침 사이에 엘란두르의 부행정관이 된 시안.
시안은 홀로 방 안에 앉아 있었다.
원래는 행정실에 있어야만 했지만 현재 총괄 행정관이 자리를 비운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다.
보아하니 꽤나 바쁜 일이 있는 것 같았다.
정확히는 엘란두르 후작령에 큰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행정실의 수많은 행정관들이 눈코틀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해서 시안은 방으로 돌아왔다.
뭘 해야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멀뚱히 행정실에 있으면 행정관들이 괜히 눈치만 볼테니까.
그렇게 방 안에서 홀로 총괄 행정관을 기다리는 시안.
“얼마를 현질할 수 있으려나···.”
일단 엘란두르의 예산은 추정 불가였다.
제국 동부의 전역을 지배한다 해도 과언이 아닌 엘란두르.
시안도 자세히는 알지 못했으나 1년 예산이 억단위는 가볍게 넘어갔다.
그리고 부행정관이란 그 예산을 관리할 수 있는 직책.
물론 모든 예산의 사용 권한이 시안에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총괄 행정관은 물론, 대부분은 이사벨이 관여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시안이 관여할 수 있는 예산은 못해도 수 천만은 족히 넘었다.
“횡령의 감시가 없지는 않겠지만···.”
장부는 철저하게 보관되고 있었고.
예산 사용의 출처는 2중, 3중으로 행정관들이 확인하고 있었다.
횡령을 해도 그 출처를 추적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하지만.
“모바일 영주에 현질은 출처 확인이 불가하니 뭐.”
현질은 이야기가 조금 달랐다.
이건 사용 출처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골드가 그대로 증발해버리는데 누가 횡령했는지 알게 뭐란 말인가.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개꿀인 직책이었다.
뜸들여서 무엇할까.
시안은 잔뜩 설레는 마음을 안고 스마트 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현질할 목록들을 정리하고 또 견적을 때리고자 곧장 모바일 영주를 실행했다.
하지만.
[현재 긴급 점검이 진행 중입니다.]
[점검 동안에는 일부 서비스를 이용하실 수 없습니다.]
[이용에 불편을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모바일 영주가 실행되지 않았다.
정확히는 모바일 영주는 실행이 되었다.
그러나 【영지 시설】 및 현질 관련한 부분들은 실행이 되지 않았다.
“아···.”
아무래도 기절한 모바일 영주가 있어야만 현질 기능이 활성화되는 듯 싶었다.
그 순간.
똑똑.
-엘란두르의 총괄 행정관, 파이톤입니다.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문 밖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안은 스마트 폰을 품 속에 넣으며 답했다.
“아, 들어오세요.”
그러자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방 문이 열렸다.
열린 방문으로 흰머리가 희끗희끗 쇤 노인이 서 있었다.
한스보다 살짝 아랫배 정도?
다만, 유한 인상의 한스와는 달리 꽤나 고지식한 면이 돋보이는 이였다.
고집이란 고집은 한아름 가지고 다니는 노인.
파이톤에 대한 첫 인상은 이러했다.
이윽고 파이톤은 시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다시 한 번 소개드리겠습니다. 엘란두르의 총괄 행정관, 파이톤입니다.”
“전 시안이라고 합니다. 이번에 가주의 명으로 부행정관으로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시안은 파이톤을 향해 마주 고개를 숙였다.
총괄 행정관은 엘란두르 내에서도 그 책임이 막중했다.
가진 바 위치는 물론.
실제로도 파이톤은 자작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귀족이었다.
아무리 시안이 엘란두르의 핏줄이라고는 하나 함부로 하대할 수는 없었다.
“자 그럼··· 소개는 이쯤 해두고. 그래서 제가 뭘 하면 됩니까? 행정관이니까··· 뭐 영지민들 관리하면 되는 겁니까?”
“······”
그런 시안의 말에 파이톤은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저게 부행정관이라는 자가 내뱉을 수 있는 말이란 말인가.
부행정관은 말 그대로 부행정관이다.
총괄 행정관인 자신을 대신할 수 있는 직책.
그런데 자신이 뭘 해야할지도 모르고 있다니.
“공자님께서는 루벤의 영주로서 직임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혹시 행정 관련한 일은 해보신 적이 없으십니까?”
“어··· 행정은 딱히요? 행정 관련한 일은 전부 한스에게 맡겼거든요.”
사실 행정이 뭘 의미하는지도 자세히 모릅니다.
중얼거리듯 들려오는 시안의 마지막 말.
파이톤은 속으로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 말은 즉.
자신이 하나하나 처음부터 모든 것을 가르쳐야한다는 것 아닌가.
그리고 영주라는 작자가 아랫사람에게 위임하고는 나몰라라 한다니.
‘하여간, 쌈박질만 하는 무인들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시안을 부행정관으로 임명한 건 듀라크의 명백한 실수인 것 같았다.
파이톤은 내색하지 않은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관련한 행정 업무에 대해서는 차차 알려드리겠습니다. 일단 현재 흉년으로 인한 피해를 수습해야하는지라···.”
“흉년? 후작령에 흉년이 들었습니까?”
“예. 비단 후작령 뿐만이 아닙니다. 제국 전체에 흉년이 들어 각 관할령이 전부 비상인 상태입니다.”
“그래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시안의 모습.
파이톤은 속으로 혀를 차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흉년은 제국 전체에 들이닥친 재난이었다.
당연히 루벤이라고 다르지 않을 터.
“그렇단 말이지···.”
하지만 시안은 거의 처음 듣는 사람과도 같은 반응이었다.
물론 시안이라고 제국에 흉년이 들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 때문에 북부에 대한 황실의 지원이 늦어지지 않았는가.
“그렇게까지 심각한 줄 몰랐습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상황이 심각한 줄 몰랐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루벤은 전혀 해당되지 않았으니까.
이번 현질로 업그레이드한 Lv.5의 생산 시설들.
그리고 이번에 심은 세계수, 인스티즈의 효과.
루벤에는 생명의 근원이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효과 덕분에 이젠 씨앗이 심자마자 자라나는 수준.
일부 작물들은 며칠 뒤에 수확할 수 있을 정도였다.
쉽게 말해 사시사철 신성력으로 루벤의 땅을 축복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런데 흉년은 뭔놈의 흉년이란 말인가.
그래서 제국에 흉년이 들었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
그 여파에 대해서는 그냥 그려려니 하고 있었다.
그런데 엘란두르 후작령까지 흉년으로 인해 문제가 생겼다?
“꽤 심각한 상황인가보네요.”
시안은 어째서 황태자, 콘라드가 그리 골머리를 썩었는지.
또 황제, 발루아가가 북부 지원 물자에 1,200만 골드를 선뜻 주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선뜻은 아니었지만··· 뭐, 아무튼.
그러한 사정을 모르는 파이톤.
‘얼마나 영지에 관심이 없으면 이런 것도 모를꼬···.’
파이톤은 그저 속으로 혀를 차보일 뿐이었다.
“해서 제가 관련 결재서들을 가져왔습니다. 관련한 일은 결재서를 보면서 하나하나 알려드리겠습니다.”
파이톤은 가져온 결재서 뭉치를 꺼내보였다.
엄지 손가락 두께는 가볍게 넘는 어마어마한 양.
“전부 구휼에 관한 결재서입니다. 현재 후작령 관할 마을 1,232곳을 포함한 62개의 영지에서···.”
파이톤은 결재서에 적힌 내용들을 하나하나 읊어보였다.
그리고 말과는 달리, 자세한 설명은 덧붙이지 않았다.
어차피 시안이 알아듣지 못할테니까.
“그 다음입니다.”
파이톤은 설명이라기 보다는 마치 사전을 읽듯이 휙휙, 넘어갈 뿐이었다.
시안은 그런 파이톤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 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잠깐.”
시안이 파이톤의 말을 끊었다.
#
엘란두르 후작령에 들이 닥친 흉년.
사실 시안은 크게 관심이 없었다.
엘란두르에 흉년이 들든 말든.
솔직히 알게 뭐란 말인가.
시안은 그저 엘란두르의 예산으로 현질할 생각만 가득했었다.
하지만 지금 파이톤의 보고.
막상 그 피해 현황을 지켜보니 꽤나··· 심각했다.
하루에 아사자가 속출하고 있었고.
먹지 못해 병든 자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늘어나고 있었다.
‘흐음···.’
시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물론 엘란두르는 시안의 적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철천지 원수가 될 사이였다.
하지만.
“아사자들의 시체가 썩으며 일부 마을에선 역병이 돌고 있습니다. 해서···.”
엘란두르의 백성들은 아니었다.
시안의 적은 듀라크와 엘란두르 가문일 뿐.
저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죄없는 사람들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이 저지른 죄라고는 엘란두르의 백성들인 것.
아니, 이것도 사실 죄라고 할 수 없었다.
그들이 선택한 것이 아니니까.
듀라크와 엘란두르 가(家).
그리고 엘란두르의 가신들에 대해서는 시안은 딱히 연민하지 않았다.
훗날 엘란두르와 대적하게 되었을 때.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 마음도 전혀 없었다.
그래서 딱히 나설 생각이 없었다.
부행정관으로서 마땅히 일을 할 생각조차 없었다.
그저 예산을 빼돌려 현질할 생각만 그득했을 뿐.
그러나 엘란두르의 백성들은 이야기가 조금 달랐다.
‘시안. 사람들을 사랑하고, 또 불쌍히 여기며 그들을 위하렴. 이는 시안이 귀족답게 살 수 있는 방법이란다.’
지금 이 순간, 세실의 말이 다시금 떠오르는 건 무슨 이유일까.
세실과의 추억이 있는 엘란두르의 저택.
그 저택에 있기 때문일까.
피식, 시안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잠깐.”
그리고 사전을 읽는 듯한 파이톤의 말을 끊었다.
파이톤이 멈칫, 거리며 시안을 바라봤다.
시안은 방금 전, 파이톤이 옆으로 빼놓은 결재서를 들어보였다.
“이거. 왜 이렇게 한 겁니까?”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시안은 들고 있던 결재서를 파이톤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여기요. 추른 마을에 곡식을 푼다고 되어있지 않습니까. 이거 왜 그런 겁니까?”
“그야··· 굶주린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파이톤은 답을 하면서도 솔직히 어처구니가 없었다.
흉년으로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곡식을 푸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왜 곡식을 푸냐고 묻는 시안의 물음
설마 사람들이야 굶어죽든 말든,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 없다는 건가?
시안을 바라보는 파이톤의 눈빛에 일순간 경멸이 깃들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아니,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제 말은 왜 이 정도의 곡식량을 책정했냐는 겁니다.”
시안이 의미심장한 말이 들려왔다.
이윽고 시안이 결재서 뭉치를 뒤적거렸다.
그리고 또 다른 결재서 하나를 꺼내들어 파이톤에게 보여주었다.
“여기 보면 추른 영지의 상태는 기아의 비율보다는 병환자들의 비율이 더 많잖습니까? 그럼 곡식보다는 치료 물품을 더 지원해줘야죠.”
“그게 무슨···?”
파이톤은 얼떨떨한 심정으로 시안이 건네는 두 장의 결재서를 번갈아 바라봤다.
“아, 이건···.”
그리고 이걸 뭐라 설명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단순히 인구 수만 보고 곡식량을 책정한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만.”
“그럼 뭐죠?”
파이톤은 잠시 뜸을 들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추른 영지의 케이플 남작이 긴히 부탁을 하는 바람에···.”
“나 참.”
시안은 순간 어처구니 없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대충 어떤 상황인지 뻔히 예상이 되었으니까.
쉽게 말해 권력을 사용한 것이었다.
“그래서 곡식의 양을 더 배정했다고요?”
“구휼에는 크게 영향이 가지 않는 선에서···.”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시안의 질책에 파이톤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런 파이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럼 설마 여기, 게스릴 영지도?”
시안은 추가로 결재서를 들이밀며 물었다.
그리고 역시나.
“······”
그 지적에 파이톤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파이톤은 정신이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시안이 지적한 문제점들.
그러니까 시안이 문제점을 지적했다는 것.
그 말은 즉.
‘내가 말한 내용들을 전부··· 이해하고 있었다고?’
이해한 수준 정도가 아니었다.
문제점을 정확히 지적하고 그 이유까지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이건 관련한 일을 해보지 않으면.
행정이라는 것을 꿰뚫고 있지 않으면 절대 모르는 것들이었다.
‘대체 어떻게···?’
아무것도 모르는 귀족가 도련님 아니었나?
“어쩐지. 아무리 흉년이 심해도 엘란두르에 이 정도가 피해가 올리가 없지. 이거 죄다 해먹고 있었구만?”
바라보는 시선.
“에라이, 이거 문제가 한 두가지가 아니네. 안 되겠다. 가져온 결재서들 싹다 펼쳐보세요.”
파이톤은 멍하니 시안을 바라볼 뿐이었다.
#
시안은 본격적으로 결재서에 관련한 내용들을 뜯어고치고자 마음 먹었다.
엘란두르를 도와주는 격이었지만 그래도 뭐.
말했다시피 엘란두르의 백성들은 죄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사실 엘란두르를 도와주는 것도 아니었다.
예산을 축내어 백성들에게 퍼주는 것이었으니까.
무엇보다.
‘어차피 지금 현질도 못 하니까.’
해서 모바일 영주가 깨어날 때까지 마땅히 할 일도 없겠다.
또 엘란두르를 벗어날 준비도 해야겠다.
그 시간 동안 부행정관으로서 일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정확히는 모바일 영주가 깨어날때까지.
부행정관으로서 신뢰를 쌓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럼 내가 관여할 수 있는 예산이 늘어날테니까.’
시안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뭐하고 있습니까? 결재서 다 가져오라니까요?”
“아, 예, 옛!”
파이톤은 화들짝 놀라며 관련 결재서를 촤르륵, 펼쳐보였다.
시안은 하나하나 결재서에 관련한 내용들을 확인했다.
‘아주 개판이네.’
그리고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었다.
뭐, 왜 이러는지에 대해서는 짐작이 갔다.
세상사 모두가 그렇듯.
궁하면 궁할수록 있는 자들만 호의호식할 뿐이었다.
시안은 결재서에서 시선을 떼, 파이톤에게 말했다.
“일단, 이럴 때를 대비해 후작령에 비축해둔 곡식들 있죠? 그거 열어서 전부 사람들에게 나눠주죠.”
“하, 하지만 그러면 곳간이 남아나질 않습니다.”
“추수 후에 환납 받으면 되잖습니까. 어차피 돌려 받을 거니까, 팍팍 푸십쇼.”
흉년으로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곡식을 대여해주는 한편.
“그럼에도 빌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모든 사람들이 여유가 있는 건 아니니까. 추수 때도 얻을 것이 없는 이들이 있겠죠.”
“그렇습니다만···.”
“그런 사람들에게는 일정량 무료로 곡식과 의류를 풀어줍시다.”
상황이 여의치 않은 이들에게는 무료로 나누어주었다.
“예···? 하지만 그러면 재정에 심한 타격이···.”
“당장 사람이 죽게 생겼는데 그게 문제입니까? 그리고 후작령에 돈 많잖습니까. 이 정도 지출로는 어림도 없으니까 진행해요.”
“하지만···.”
시안의 말에도 파이톤은 쉽사리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빌려주는 것과 무료로 나눠주는 것.
그것이 재정에 미치는 영향은 천지차이였으니까.
하지만 시안은 개의치 않았다.
지금 당장 사람들이 굶어 죽게 생겼는데 돈이 문제란 말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내 돈 아니니까.’
내 돈 쓰는 거 아니지 않은가.
자고로 남의 돈 쓰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는 법.
“그러니 제 말대로 진행하세요.”
시안은 파이톤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일을 진행했다.
“그리고 지금 당장 굶주리는 자들이 많잖습니까. 일을 하려면 일단 먹어야하니까, 각 마을에 시식소를 설치해서 빵이나 죽이라도 좀 먹입시다.”
“설마 이것도 공짜로···?”
“이 정도로는 괜찮다니까요. 엘란두르가 괜히 엘란두르입니까? 설령 나중에 누가 뭐라 그러면 제가 그랬다고 하십쇼. 제가.”
엘란두르의 핏줄인 시안.
물론 시안은 사생아로서 가문 내에서 대우가 야박했다.
그러나 듀라크의 관심을 받고 있는 지금.
시안을 쉽사리 대할 이는 없었다.
지금도 파이톤조차 시안의 의견에 토를 달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시안의 정책이 토를 달 수가 없는 것도 한몫했다.
무엇보다 시안의 말처럼 흉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최우선이었으니까.
“아, 알겠습니다.”
파이톤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각 마을에 치료소를 설치해서 기아로 말미암은 노약자나 환자들을 한 곳에 모아 치료하죠. 사제는 비싸니까 치료사들로 모집하고.”
“하지만 그 많은 마을에 모두 치료소를 설치하고 치료사들을 배치하기에는···.”
“에헤이! 누가 전부 치료소를 설치하랍니까? 1차, 2차, 3차 치료소, 네? 이렇게 단계 별로 나눠서 작은 마을에는 1차. 조금 규모가 큰 마을에는 2차. 큰 영지는 3차. 그리고 증상이 괜찮은 자는 1차, 그래도 안되면 2차, 그 이후엔 3차. 이렇게 효율적으로 운영하면 되잖습니까. 제가 이런 것까지 하나하나 설명해줘야합니까?”
“그, 그것이···.”
수 십년을 엘란두르의 행정관으로 역임해온 파이톤.
“죄, 죄송합니다···!”
그러나 파이톤은 왜인지 따라가기 급급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총괄 행정관 파이톤과 부행정관, 시안.
어째, 둘의 직책이 바뀐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연고자가 없는 사망자들은 후작령에서 직접 수습하는 거 잊지 말고요.”
“옛!”
계속해서 이어지는 시안의 말.
“여기에 각 영지에 명을 내려서 기존의 농지들 싹 갈아엎고 구황 작물 위주로 다시 심으라 하십쇼.”
구황 작물은 가뭄이나 장마 등 기후의 영향을 잘 받지 않는 작물.
척박한 땅에서도 재배할 수 있고.
또 재배 기간 또한 상당히 짧은 것이 특징인 작물을 의미했다.
조, 피, 순무, 토란, 칡과 같은 작물이 이에 속했으며.
짧으면 60일, 길어도 90일 내외로 재배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흉년의 시기에 재배되는 작물들이었다.
해서 시안의 선택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예? 하, 하지만 그러면 나중에 문제가 생길 겁니다.”
파이톤은 그런 시안의 의견에 우려를 표했다.
“구황 작물들은 돈이 되지 않아서···.”
구황 작물은 돈이 되지 않았으니까.
일단 맛이 없었다.
밀과 보리 같은 것에 비해 순무, 토란 칡뿌리들은 정말 맛이 없었다.
한 마디로 사람들에게서 선호되지 않는 작물들이었다.
그렇기에 주식으로 삼는 흉작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재배되는 작물들이었다.
헌데 그런 돈도 안되는 작물을 위해 농지 자체를 완전히 갈아 엎는다?
“가신들의 반발이···.”
자신들의 이득을 포기할 귀족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반발은 염병. 지금 당장 굶어 죽겠는데, 밀을 언제 심고, 언제 수확하고 나자빠져있습니까?”
시안은 거침이 없었다.
“반발이고 뭐고 지금 당장 먹고 살아야할 거 아닙니까.”
“그, 그건 그렇습니다만···.”
“됐고. 제 말대로 진행하세요.”
“하, 하지만···.”
“반발하는 가신들 있으면 명단 싹 정리해서 제게 가져오세요. 그대로 가주께 보고할테니까. 그 동안 횡령한 거 알면 가주가 참 좋아하시겠네요.”
파이톤은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듀라크가 직접 임명한 부행정관.
그 권력은 총괄 행정관인 자신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아마 이사벨조차 섣불리 건드릴 수 없을 터였다.
그렇기에 지금 시안의 행동은 가히 횡포와 독재라 봐도 무방했건만.
사실 따지고 보면 판단과 결정은 전혀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응? 잠깐, 이거 뭐야. 뭐? 생일 축하 파티? 지랄 염병하고 있네. 지금 사람들이 굶어 죽고 있는데 파티를 열어? 진짜 미쳤구나.”
찌직─!
시안은 들고 있는 결재서를 찢어버렸다.
“오늘 부로 후작령 관할 모든 영지 및 마을에 금주 및 연회 금지령을 내리세요.”
후작령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법령들.
부행정관은 간단한 법령의 제정에도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총괄 행정관의 권한이었지만··· 뭐, 지금은 그게 그거였다.
“예? 하, 하지만 그러면 가신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
“그 놈의 반발, 반발. 왜 반발만 한답니까? 아주 그냥 왼발, 오른발, 뒷발, 앞발, 족발, 호기만발까지 하시지.”
“예, 예?”
“됐고. 반발하면 제가 그러라고 했다고 하세요. 제가. 그래도 지랄하면 저기 뭐야. 가주께 보내버려요. 날 여기에 앉힌 건 가주님이니까.”
그와 동시에 찢겨진 결재서가 파사삭─.
잿더미가 되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무래도 시안이 오러를 끌어 태워버린 모양.
“뭐하고 있어요? 결재서 새로 작성 안하고?”
“······”
파이톤은 정말이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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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란두르 후작령 관할의 페이른 마을.
“이, 이보시오! 여기 아이들이 일주일째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있소. 나는 괜찮으니 아이들이라도 제발···.”
“우리라고 안 주고 싶어서 그러는가. 어쩔 수 없지 않나.”
“그러지 말고 상황을 좀 봐주시오. 이, 이보시오! 이보시오!”
“에이, 빨리 나가게!”
쾅!
매몰차게 닫히는 문에 후린은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빠··· 배고파요.”
“우리 언제 밥 먹을 수 있어요···?”
아이들이 후린을 재촉해왔으나, 후린은 아무것도 아무것도 할 수도, 해줄 수도 없었다.
“미안하다··· 이 못난 아비가 미안하구나···.”
그저 힘없는 농노의 자식으로 태어나게 한 것에 사죄를 할 수 있을 뿐.
“정말 미안하구나···.”
후린은 같은 말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엘란두르 후작령에 들이닥친 흉년.
흉년은 후작령 전체로 수많은 기근과 기아를 발생시켰다.
하여 지금 비단 후린 뿐만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헐벗고 굶주리고 있었다.
지금도 후린의 주변으로 배고프다 칭얼거리는 아이들.
어미의 젖이 나오지 않아 울음을 터트리는 갓난아기.
그리고 갈비뼈가 훤히 보일 정도의 병약자들이 즐비해있었다.
후작령 어디를 가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리라.
하지만 후린은 곧 터덜터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낙담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훔치고, 빼앗고, 빌어먹을지언정.
자신의 아이들만은 뭐라도 먹여야했으니까.
그러나.
“······”
후린은 이 발걸음이 과연 의미가 있을지, 심히 의심스러울 뿐이었다.
그렇게 한 걸음, 두 걸음.
그리고 막 세 걸음을 떼려던 찰나.
“여러분! 여러분!!!”
갑자기 한쪽 어귀에서 커다란 외침이 터져나왔다.
바라본 그곳.
그곳엔 한 사내가 고래고래, 고함을 치고 있었다.
그는 후린과 마찬가지로 며칠을 먹지 못했는지 얼굴이 상당히 앙상해져있었다.
툭, 하면 쓰러질 것처럼 야위는 그는 고함 지를 힘도 없어보였다.
그럼에도 저렇게 고함은 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후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왜 저렇게 들떠있는지는 모르겠다만, 별 일 아닐 것이지.
후린은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후작가에서 곡식들을 대여해준답니다!!”
재차 들려오는 소리가 꽤나 심상치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