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화 - 급변하는 상황
시안은 살며시 시선을 들어 듀라크의 표정을 살폈다.
담담하다 못해 무표정한 얼굴.
시안은 저택에서 행패를 부린 것도 모자라 듀라크를 기다리게 했다.
그 행동에 분노할법도 하건만.
듀라크의 얼굴에는 딱히 노기가 서려있다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의 말마따나 맹랑한 짓.
하는 짓이 만만히 볼 수 없을 만큼 똘똘하고 깜찍하다는 정도로 말한 것 같았다.
물론 사전적인 의미 그대로 내뱉은 말은 아닐 터였다.
설마하니 듀라크가 시안을 깜찍하게 생각하려고.
그건 시안부터가 한사코 거절이었다.
“죄송합니다.”
시안은 듀라크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딱히 변명의 말을 하지 않았다.
애초에 변명할 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듀라크가 커너 사건과는 관련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지금.
여기서 더 말을 꺼낼 필요도 없었다.
듀라크 역시 별 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시안의 예상처럼 듀라크는 시안의 행동을 책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잠깐의 침묵.
“이야기는 모두 들었다.”
이윽고 듀라크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듀라크가 말한 이야기.
“변경백이 내게 친서를 보내오더군.”
그건 다름 아닌 북부에서의 사건을 의미했다.
그리고 듀라크의 말에 시안은 살짝 놀라보였다.
북부의 변경백, 오슬리 바텐베르크.
그 곰같은 사람은 누구에게 친서를 보낼 성격이 절대 아니었으니까.
하물며 그 대상이 듀라크라면 더더욱.
그럼에도 오슬리가 친서를 보냈다는 것.
그건 시안이 북부에 공헌한 바가 어느 정도인지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이번 일은 비단 북부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새로운 제국의 별이라는 말까지 나돌더군.”
새로운 제국의 별.
북부의 사건이 제국 전역으로 퍼지며 시안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물론 말만 떠돌 뿐이었다.
아직 제국의 별이라 인정받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말이 나오고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시안의 행한 일이 어느 정도인지를 단 번에 알 수 있었다.
여기에.
“폐하께서도 관심을 보이더군.”
황제, 발루아가 또한 시안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좀처럼 다른 이에게 개인적인 관심을 보이지 않는 황제.
듀라크 또한 이 사실에 사뭇 놀라지 않았는가.
물론··· 듀라크가 생각하는 그런 종류의 관심은 아니었다.
괘씸 혹은 맹랑.
방금 전, 듀라크가 말했던 맹랑함 쪽에 가까운 관심이었다.
이 역시나 깜찍이라는 의미를 빼야했지만···.
뭐, 아무튼.
어떤 의미든 황제의 눈에 들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북부의 사건은 훌륭히 잘 해주었다.”
시안은 맡은 바 임무를 잘 수행해냈다 말할 수 있었다.
따라서 시안과 듀라크와의 거래.
듀라크가 만족할 만한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할 시, 4개월을 기다릴 것 없이 바로 가문에 복귀하겠다는 거래.
그 거래의 조건은 충분히 달성한 것이라 봐도 무방했다.
“허나.”
거래의 조건은 어디까지나 듀라크의 만족이었다.
그리고 만족이라는 개념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개념.
“엘란두르로서는 조금 부족했다.”
듀라크의 말이 나지막히 들려왔고.
시안은 코웃음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억지였으니까.
이건 누가 봐도 억지였으니까.
시안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듀라크는 가만히 시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담담하다 못해 무표정한 얼굴.
역시나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하나.
듀라크의 눈빛에는 뚜렷한 하나의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가문을 더 부흥시킬 도구.
그리하여 제국 제 1의 가문으로 만들어줄 장기말을 보는 눈빛.
시안을 바라보는 듀라크의 눈빛은 탐욕으로 물들어 있었다.
북부의 사건 전에 시안을 바라보는 눈빛이 욕망이었다면.
지금은 가히 탐욕에 가까워져 있었다.
누가 봐도 시안의 성과에 만족하는 모습이었다.
그렇기에 만족하지 않아야하는 모습이었다.
“약속대로 가문으로 돌아오거라.”
그 아이러니함에 시안은 웃음조차 새어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듀라크의 모습을 보고나서야.
시안은 이사벨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왜 이사벨이 커너를 부추겨 자신을 암살하려 했는지.
왜 이사벨이 듀라크를 속여가면서까지 암살을 의뢰했는지.
급했던 것이겠지.
제국 전역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시안.
그리고 듀라크가 전폭적인 지지를 보이고 있는 지금.
이사벨은 시안이 가문으로 복귀하기 전에 없앨 생각이었던 같았다.
하지만 하나.
이사벨이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가주께서 약조하신 2개월의 시간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시안은 엘란두르로 돌아올 생각이 전혀 없었다.
“만족할만한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가문으로 바로 복귀하겠다 약조한 것은 너다.”
“가주께서는 제 공헌이 만족스럽지 못한 것입니까.”
듀라크는 잠시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렇다.”
듀라크는 단호히 말을 내뱉었다.
“억지를 부리시는 겁니까.”
시안의 말에 듀라크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마주치는 눈빛.
시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도 제 공로에 대하여 크게 치하하셨습니다. 그럼에도 가주께서는 만족을 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까.”
듀라크는 아무런 말을 내뱉지 않았다.
살짝 일그러진 눈으로 시안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한 마디.
“황제와 나는 다르다.”
그런 단호한 태도에 시안은 입을 꾹, 다물었다.
수많은 말들이 목구멍까지 끓어올랐다.
그러나 내뱉지 않았다.
이미 듀라크는 억지를 부리고자 마음을 굳혔으니까.
그러니 설득 따위는 의미가 없었다.
그 어떤 사실을 늘어놓아도 소용이 없을 터였다.
되려 말도 안되는 억지를 늘여놓겠지.
괜히 시안의 심력만 소모될 뿐이었다.
물론 명분과 논리로는 어찌 시안이 가져올 수 있을 터였다.
그걸 듀라크라고 모르지 않았을 터.
그럼에도 이렇게 억지를 부린다는 것.
듀라크는 힘으로 끌고 올 생각까지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 이 이상의 말은 의미가 없다.
“뭐, 좋습니다.”
시안은 차분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가주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지금 루벤으로 돌아가 짐을 챙기고 바로 돌아오겠습니다.”
“아니.”
문득 들려오는 듀라크의 말.
“에런에게 루벤을 정리하라 명할테니, 너는 오늘 부로 가문에 머물거라.”
시안은 순간 눈을 치켜떠보였다.
에런은 하얀 늑대 기사단의 단장이었다.
그것도 무려 마스터 중급에 이르는 최상위 실력자.
그런 에런에게 루벤을 정리하라 명한다는 것.
그 말은 즉.
듀라크는 루벤이라는 영지를 없애버릴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하나.
시안이 가문에 머무는 동안 미련을 가질 수 없도록 말이다.
“오늘부터 너는 엘란두르의 부행정관이다. 총괄 행정관에게는 미리 말을 해두었다.”
듀라크는 단호히 등을 돌렸다.
“그만 나가보거라.”
명백한 축객령.
시안은 그런 듀라크의 등을 가만히 바라봤다.
시안은 이대로 엘란두르 저택에 발이 묶여버렸다.
루벤으로 복귀할 수 없는 상황.
‘설마··· 눈치챈 것인가?’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시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하기엔 그 대처가 약했으니까.
시안이 반기를 들 것임을 알았다면 시안은 지금 살아있을 수가 없었다.
듀라크를 만나는 순간, 그 자리에서 목이 날아갔겠지.
아무리 시안이 듀라크에게 필요한 장기말이라고는 하나.
반기를 드는 이를 용서할 정도로 듀라크는 녹록하지 않았다.
그러니 시안의 꿍꿍이를 눈치챈 것은 아니다.
다만.
‘뭔가 있다고는 생각한 건가.’
무언가 낌새가 있다는 것은 눈치챈 것 같았다.
시안이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듀라크가 이렇게 급하게 나올 이유가 전혀 없었다.
게다가 시안을 엘란두르의 부행정관으로 임명한다는 것.
엘란두르 전체를 관리, 운영하는 행정관의 자리.
부행정관은 그런 행정관 중에서도 임원급에 해당하는 직책으로 그리 녹록치 않은 자리였다.
당연히 아무에게나 그 자리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 능력을 인정받고 또 인정받아야만 얻을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런데 곧장 시안을 부행정관으로 임명하는 듀라크.
낙하산도 이런 낙하산이 없었다.
정말로 이례적이다 못해 파격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시안이 듀라크의 자식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듀라크는 시안이 가문에 오기 전.
단단히 조사를 한 듯 싶었다.
시안이 그동안 어떤 일들을 해왔는지.
그리고 루벤을 어떻게 발전시켜왔는지를 말이다.
그 결론 끝에 시안을 부행정관으로 발령시킨 것.
아마 총괄 행정관으로 임명하려던 것을 참은 것일지도 몰랐다.
듀라크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
가문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하는 자.
설령 본인의 핏줄이라도.
듀라크에겐 가문의 부흥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어쨌거나 시안은 꼼짝없이 가문에 묶이게 되었다.
해서 시안은 이대로 도망쳐버릴까 싶었지만 금방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듀라크 상대로 그럴 수도 없었을 뿐더러.
듀라크의 모습을 보아하니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해둔 것 같았으니까.
무엇보다.
‘이러면··· 일을 바로 시작해야겠는데.’
준비해둔 계획을 실행하는데는 큰 문제가 없었으니까.
게다가.
‘부행정관이라면···.’
듀라크가 시안에게 임명한 부행정관 자리.
그건 엘란두르 전체를 관리, 운영하는 막중한 위치의 자리였다.
부행정관이, 그것도 듀라크가 직접 임명한 부행정관의 권한은 무궁무진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을 꼽으면 엘란두르의 예산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그리고 엘란두르의 예산은 정말 상상을 불허할 정도였다.
그런 예산을 시안이 관여할 수 있게 되었다?’
‘엘란두르의 예산으로 현질해도 되려나?’
생각해보니···.
예상 외로 개꿀인 상황이었다.
‘루벤이 걱정되긴 하지만···.’
엘란두르의 최정예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에런과 하얀 늑대 기사단.
하지만 이 또한 큰 문제는 없었다.
‘레아랑 켄드릭이 있으니까.’
천 년의 원귀, 레아.
마스터 상급의 데스 나이트, 켄드릭.
여기에 시안의 3,100만 골드에 달하는 현질로 어마어마한 발전을 한 상황이었다.
엘란두르의 모든 전력이 온다면 모를까.
저 정도의 전력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이번 기회에 영주성도 Lv.3으로 업그레이드 하고. 영지 구역 확장이랑··· 곧 엘란두르랑 싸워야 하니 신기전 50대 정도 구입하면 되려나? 음···.’
시안은 순간 멈칫, 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엘란두르의 예산으로 엘란두르와 싸울 병기를 구입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으니까.
그런데 뭐···.
‘신기전 말고 다른 병기들은 안 파나?’
알게 뭐란 말인가.
‘광고 제거를 구입한 이후 광고를 못봤는데.’
아무래도 광고를 다시 한 번 봐야할 것 같았다.
‘이참에 제반 시설들도 죄다 Lv.6··· 아니, Lv.7로 업그레이드하자.’
그 대략적인 견적만 최소 1~2천만 골드 정도가 나왔다.
실로 어마어마하다 못해 끔찍한 금액.
그런데 뭐···.
‘내 돈도 아닌데 뭘.’
이 역시 알게 뭐란 말인가.
‘아, 그러고보니 건설되는 시간이 문제인데.’
시설들은 현질로 업그레이드 하더라도 건설 시간 만큼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지난 번에야 긴급 점검을 이끌어내면서 점검 보상으로 즉시 완료권을 얻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모바일 영주가 깨어나면 기절하는 금액이 예전보다 더 많아질 것이니까.
한 마디로 점검을 이끌어내기는 쉽지 않았다.
‘에이, 그냥 싹다 즉시 완료권을 구매하지 뭐.’
그냥 건물마다, 시설마다 즉시 완료권을 구매하면 그만이었다.
물론 이러면 견적이 어마어마하게 껑충 뛰었다.
즉시 완료권은 시간을 극단적으로 단축시켜주는 대신, 끔찍한 골드의 인과를 요구했으니까.
그런데 뭐···.
‘내 돈 아니잖아.’
이 또한 알게 뭐란 말인가.
심지어 남의 돈 정도가 아니었다.
곧 철천지 원수가 될 자의 돈이었다.
정작 그 당사자는 자만에 빠져 모르고 있었지만.
아니, 정확히는 시안이 무슨 계획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지만.
그렇기에 오늘만큼은.
“가주께서 기대하시는 만큼 최선을, 정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시안은 듀라크를 대하는 진심을 꾹꾹, 아주 꾹꾹, 눌러 담아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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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수도, 다르칸.
그리고 그 다르칸에 위치한 황궁.
“후우···! 이제 이걸로 끝인가.”
황태자, 콘라드는 마지막 보고서에 결재 인장을 찍고는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나른한 피곤함과 함께 전신으로 휘몰아치는 탈력감.
창 밖을 바라보니, 어느덧 하늘이 어둑어둑해져있었다.
아침부터 시작한 업무였거늘.
어둑한 하늘에는 밝은 보름달이 걸려있었다.
“하하···.”
콘라드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정말 눈코 틀 새 없이 바쁜 나날들의 연속.
비록 황태자로서 마땅히 짊어져야하는 숙명이라고는 하나.
황태자이기 전에 한 명의 사람으로서, 지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이번이 유독 업무가 밀려있던 탓도 있었다.
다름 아닌 북부 전역을 뒤집어 놓은 사건.
그 사건의 전후 처리를 하느라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더없이 힘들었지만 콘라드는 꾸역꾸역 일을 해나갔다.
자신이 잠을 줄이면 줄일수록 고통받는 백성들의 수가 줄어든다.
콘라드는 쪽잠도 버려가며 업무에 집중했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이제 드디어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콘라드는 마지막 결재 보고서를 가만히 바라봤다.
“만일 시안이 제때 물품을 풀어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이것이 마지막이 아니라 시작인 보고서가 되었겠지.
그리고 북부의 상황은 지금도 아수라장이었을 터.
아마 콘라드는 지금쯤이면 앓아 누워버렸을지도 몰랐다.
“하하.”
콘라드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고마움과 동시에 배울 점이 많은 사내.
물론··· 배울 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1,200만 골드를 요구할 줄이야.”
콘라드는 문득 떠오른 기억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다름 아닌 북부에 푼 물품 값으로 1,200만 골드를 요구한 시안.
선조치 후보고.
그런데 말이 선조치 후보고이지, 그냥 강매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것도 황가를 상대로 말이다.
이걸 대범하다고 해야할지.
아니면 정신이 나갔다고 해야할지.
그 때문에 노발대발하는 황제를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빼지 않았는가.
“그래도 뭐···.”
딱 그 정도에서 그쳤다.
황제, 발루아가 또한 노기를 터트린 것에 그쳤을 뿐.
딱히 시안에게 제약을 가하지 않았다.
물품 값으로 1,200만 골드가 과하기는 하나.
그 대가가 백성들의 고통을 빠르게 덜어주었다는 것이었으니까.
발루아가는 시안의 행동을 맹랑한 짓 정도로 여겼다.
뭐, 어쨌든.
이로써 사건은 모두 마무리가 되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올라오는 결재서와 상소문 또한 뜸해졌다.
해서 콘라드는 이참에 잠시 휴가를 갈 생각이었다.
“루벤은··· 처음 가보는 군.”
다름 아닌 루벤으로 말이다.
그것도 엘레나와 같이.
원래라면 엘레나만 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루벤으로 놀러가기 위해 지출된 돈이 있지 않은가.
무려 2천만 골드.
황실에서 더한 1,200만 골드를 합치면 자그마치 3,200만 골드였다.
혼수도 아니고 단순히 놀러가는 것에만 3,200만 골드가 지출되었다.
아니, 혼수여도 문제였다.
세상 누가 혼수로 3,200만 골드를 지참한단 말인가!
“······”
콘라드는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지만···.
뭐 아무튼.
콘라드는 이번엔 엘레나를 따라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조금은 기대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딱히 여행이라는 것을 가본 적이 없는 콘라드.
“엘레나가 루벤에서 만든 다과가 그리 맛있다고 하던데···.”
그런 설레는 기분을 느끼던 바로 그때였다.
똑똑.
-전하,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밖에서 돌연 시종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게.”
콘라드는 의자에 파묻었던 몸을 바로하며 말했다.
이윽고 달칵, 하는 소리와 시종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이지?”
“그것이··· 전하께 서신 한 장이 도착했습니다.”
“서신?”
콘라드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고작 서신 한 장 때문에 시종장이 직접 찾아올 필요는 없었으니까.
정확히는 지금 이 늦은 시간에 굳이 찾아올 필요가 없었다.
내일 아침 일찍 보고해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다.
그럼에도 시종장이 직접 찾아왔다는 것.
“이리 줘보게.”
콘라드의 말에 시종장이 품 속에서 한 장의 서신을 건넸다.
“음?”
그리고 콘라드는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서신 겉면에 찍혀있는 인장.
“엘란두르?”
그건 엘란두르를 상징하는 하얀 늑대 인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엘란두르에서 왜···?”
콘라드는 의아함을 삼키며 서신의 봉인을 뜯었다.
그리고 금방 이 서신의 발신인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이건··· 시안?”
시안이 왜 엘란두르의 인장을?
콘라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시안도 엘란두르의 자제였으니 당연하다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엘란두르의 자제라도 엘란두르의 인장을 사용하지 않았다.
엘란두르의 인장은 말 그대로 엘란두르를 대표하는 인장이었다.
황태자 콘라드 본인 또한 황가의 인장과 황태자의 인장.
두 개의 인장을 따로 가지고 있지 않은가.
시안이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할 수 없었을 뿐더러.
하물며 시안은 엘란두르와는 거리가 멀었다.
엘란두르의 이름을 버리고 싶어 안달난 시안이지 않았는가.
재차 의문이 드는 것도 잠시.
편지에는 시안이 어째서 엘란두르의 인장을 사용하는 지에 대한 사정이 적혀있었다.
“엘란두르의 부행정관이 되었다···?”
콘라드는 차분히 편지의 내용을 읽어내렸다.
그렇게 얼마 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
편지의 내용을 모두 읽은 콘라드는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멍한 정신.
콘라드는 다시 한 번 편지의 내용을 살폈다.
정확히는 편지의 맨 마지막에 적혀있는 한 문장을 확인했다.
[이제 엘란두르의 이름을 버릴 때가 온 것 같습니다.]
“하아···.”
콘라드는 저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나왔다.
방금 막 사건이 마무리되던 찰나였거늘.
그래서 이제 조금 휴식을 가지려고 했거늘.
“하아·········.”
아무래도 휴가를 반납해야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