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질하는 영주님!-147화 (147/322)

§ 147화 - 분노 그리고...(2)

부서진 문 위로 서있는 금발의 사내.

그곳엔 다름 아닌 시안이 서 있었다.

시안의 말을 끝으로 짙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침묵으로 일관된 방 안의 공기는 마치 가시라도 돋아난 것만 같았다.

그 가시같은 침묵 속에서 시안은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이사벨의 시선을 마주했다.

한치의 흐트러짐 없는 자세와 표정.

그 사이로 곁들여진 기품.

알게 모르게 느껴지는 품위는 부드러우면서도 우아한 세련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냐.”

이윽고 닫혀 있던 이사벨의 입이 먼저 열렸다.

시안은 그때서야 어깨를 한 번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갑자기 어머님을 만나뵙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시안의 당돌한 태도에 이사벨은 다시 한 번 눈썹을 꿈틀거렸다.

박살이 나버린 집무실의 문짝.

그리고 박살난 문짝 위로 서있는 시안.

뒤쪽을 보아하니 비단 집무실 뿐만 아니라 저택을 아주 난장판을 만들어 놓았다.

저택 전체를 들쑤셨다는 표현이 딱 어울릴 정도.

이사벨은 다시 시안에게 시선을 향하며 입을 열었다.

“그게 이 상황에 대한 적절한 변명이라 생각하느냐.”

“아들이 어머님을 만나고 싶다는데 막아서지 뭡니까.”

시안은 그래서 어쩔 수 없었다는 듯.

그리고 대체 뭐가 문제냐는 듯.

그저 다시 한 번 어깨를 으쓱여보일 뿐이었다.

이윽고 시안이 터벅, 걸음을 옮겨 집무실 안쪽에 비치된 쇼파로 향했다.

이사벨이 손님을 맞이하는 용도 쓰는 쇼파.

시안은 그 쇼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도련님. 아무리 도련님이라도 지금의 행동은 상당히 무례합니다.”

그런 시안의 행동에 참다 못한 레리트가 나서보였다.

이사벨의 최측근이자 엘란두르의 총관, 레리트.

“지금 당장 나가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그러나 시안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되려 나서는 레리트를 쏘아보며 나지막히 입을 열었다.

“저를 죽이기라도 할 것입니까?”

“······”

레리트는 순간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그 순간.

“되었다.”

이사벨이 그런 둘의 사이에 껴들었다.

이사벨은 시안을 바라보다 다시 레리트에게 말했다.

“레리트. 너는 잠시 나가있거라.”

“하지만···.”

레리트는 말을 흘렸으나 이사벨은 묵묵부답이었다.

레리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시안을 바라볼 뿐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런 이사벨의 모습에 레리트는 몸을 돌려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레리트가 밖으로 나간 이후.

“못 본 사이에 상당히 무례해졌구나.”

“후작가의 망나니라 불리던 저입니다. 그 망나니 성정이 어디 가겠습니까.”

시안의 말에 이사벨은 아무런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도무지 그 생각을 알 수 없는 담담한 표정.

이사벨은 다시 시안에게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무엇 때문에 이 소란을 피운 거지?”

“방금 전에 갑자기 어머님이 보고 싶어서 찾아왔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이번에는 이사벨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지며, 얼굴 위로 뚜렷한 표정 변화가 일었다.

“장난을 받아주는 것도 정도가 있다.”

“장난이 아닙니다만?”

“네가 정녕 경을 쳐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이사벨의 싸늘한 목소리가 나지막히 울려퍼져갔다.

엘란두르의 안주인, 이사벨 엘란두르.

제국을 지탱하는 두 기둥 중 하나인 엘란두르 가(家).

이사벨은 그런 엘란두르 가문의 모든 내정일을 담당했다.

듀라크가 엘란두르의 머리라면.

이사벨은 엘란두르의 팔 다리라 할 수 있었다.

그만큼 이사벨이 엘란두르 내에서 갖는 권력과 힘은 막대했으며.

제국의 어느 누구도 이사벨의 앞에서 기를 펼 수 없었다.

그런데.

“경을 친다는 것이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어째서인지 시안은 기가 죽기는 커녕.

되려 당당하게 말을 꺼내고 있었다.

“레리트 총관처럼 어머님도 저를 죽이기라도 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이사벨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혀버렸다.

“아니면···.”

시안은 그 말과 함께 탁자 위에 놓인 쿠키 하나를 집어들었다.

차와 함께 간단한 다과를 즐기고자 비치해둔 손님 맞이용 쿠키.

“이 쿠키에 독이라도 넣어두신다는 겁니까.”

시안은 쿠키를 입에 넣었고.

아삭, 하는 소리와 함께 쿠키 하나가 시안의 입 속으로 사라졌다.

이사벨은 그런 시안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꾹, 다문 입술.

이사벨은 그때서야 왜 시안이 이렇게 찾아왔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사벨은 말없이 시안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런 이사벨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농담입니다. 설마하니 어머님께서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하시려고요.”

시안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태연하게 굴고 있었다.

“나를 한 번 만나고자 찾아온 것이 전부더냐.”

“네. 그게 전부입니다.”

“그럼 얼굴을 봤으니 되었구나. 그럼 이제 그만 나가─.”

“···만. 이렇게 만나뵌 것. 한 말씀만 딱 드리고 가겠습니다.”

시안은 이사벨의 말을 끊으며 소리쳤다.

마주치는 시선.

“자식된 도리로서 마지막 경고를 드리겠습니다.”

일순간 이사벨의 눈썹이 와락, 일그러졌다.

시종일관 담담하던 표정은 이제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다름 아닌 경고라는 말.

이사벨은 까드득, 이를 깨물며 분노를 삼켰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시안을 죽여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이사벨은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일단 저택에 보는 눈도 많았을 뿐더러.

지금 눈치를 봐야하는 건 다름 아닌 이쪽이었으니까.

이사벨이 시안을 암살하려 했다는 사실은 극비였다.

그리고 예전이라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그러니까, 극비로 취급할 일도 아니었다.

무능력한 놈팽이 따위 어디서 암살 당하든, 객사하든.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의 시안은 아니었다.

새로운 제국의 별.

듀라크가 시안을 주시하고 있었다.

엘란두르의 가주, 듀라크.

아무리 이사벨이 엘란두르의 안주인이라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안주인이었다.

엘란두르에서 가주인 듀라크의 뜻은 절대적.

이사벨 또한 듀라크의 뜻을 거스를 수도, 거슬러서도 안 되었다.

헌데, 이사벨은 시안을 암살하려했다.

듀라크가 주시하고 있는 시안을 말이다.

당연히 이사벨은 듀라크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만일 듀라크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사벨로서도 상당히 곤란한 상황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암살이 실패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암살을 사주한 당사자가 자신임을 눈치채는 것도 어렵지 않을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당돌하게 그리고 대담하게.

시안이 직접 찾아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이사벨은 꾹, 눌러 참을 수밖에 없었다.

저 무례하고도 패륜적인 시안의 행동에도 이사벨은 섣불리 나설 수가 없었다.

그리고 시안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일까.

“어머니께서 저를 위하시는 마음은 얼추 이해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예전부터 언제나, 늘 그래왔듯이요.”

시안은 내뱉는 말과 행동에 전혀 거침이 없었다.

그리고 이어진 시안의 말.

“그런데 제 영지민들은 아닙니다.”

일순간 시안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날카로운 눈빛이 이사벨을 똑바로 향했고.

방금 전까지 어벙하던 분위기는 온데간데 없었다.

그 대신 터져나오는 기세는 이사벨조차 살짝 위축이 될 정도였다.

예전의 시안은 전혀 생각나지 않는.

정말 같은 사람이 맞는 건가 싶을 정도.

“그러니 마지막으로 경고를 드리겠습니다. 만일 다시 한 번, 제 영지민을 건드리신다면···.”

이사벨을 향하는 날카로운 시선.

“그땐 어머님이라도 용서치 않을 겁니다.”

시안은 그 말을 끝으로 기세를 거두었다.

“그럼 이만.”

이윽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그 순간.

“용서치 않는다는 건.”

시안의 등 뒤로 이사벨의 목소리가 나지막히 들려왔다.

시안은 천천히 등을 돌려 이사벨을 바라봤다.

바라본 그곳.

“나를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그곳엔 이사벨이 태연한 표정으로 찻잔을 들고 있었다.

이윽고 시안을 바라보는 눈빛.

그 눈빛에는 일종의 비아냥이 담겨있었다.

네 까짓게 감히 나를 어찌할 수 있겠느냐.

시안은 그런 이사벨의 눈빛을 바라보다 다시 천천히 등을 돌렸다.

그리고 그런 시안의 등 너머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시안은 그 말을 끝으로, 집무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사벨은 시안이 떠나간 자리를 가만히 바라봤다.

정확히는 시안이 떠나기 직전에 내뱉은 말을 되뇌였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말은 즉.

필요하다면 할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닌가.

“······ 건방진.”

꽈드득!

이사벨은 찻잔을 부서져라 움켜쥐었다.

#

시안이 이사벨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정확히는 시안이 이사벨을 무작정 찾아간 이후.

“정말 시안 공자님이 그러셨다고?”

“글쎄, 그랬다니까 정말.”

“어머머. 세상에나.”

엘란두르 저택은 그야말로 발칵, 뒤집혀버렸다.

갑작스럽게 엘란두르 저택을 찾아온 시안.

의외이긴 했으나 그 자체만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비록 사생이기는 하나 시안 또한 엘란두르의 자제였으니까.

그러나 그 이후에 시안이 보인 모습은 그야말로 저택을 발칵, 뒤집어버렸다.

그 과정에서 시안이 보인 행패들.

“난 망나니라는 소문이 헛소문인줄 알았는데···.”

“괜히 소문이 나는 건 아닌 모양인가봐.”

그건 정말 망나니라는 말이 딱 어울렸다.

“심지어 후작 부인의 집무실을 박살내셨다며?”

“아무리 친모가 아니어도 그렇지···.”

무엇보다 이사벨에게 보인 무례.

그건 긍지 높은 귀족으로서 도무지 보일 수도, 보여서는 안되는 행태였다.

그야말로 후작가의 망나니요, 패륜아.

“가문을 떠나시고 많이 달라지신 것 같았는데···.”

“역시 사람은 고쳐쓰는 것이 아닌가봐.”

저택에는 시안에 대한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다.

그러나.

“왜 이렇게 귀가 간지러워.”

정작 소문의 당사자인 시안은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물론 저택이 자신에 대한 이야기로 떠들썩한 건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복도를 거닐때마다 만나는 이들마다 죄다 쑥덕거리는데 모르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그리고 그 이야기가 안 좋은 쪽임 또한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뭔 상관이야.”

시안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지금 시안이 신경쓸 것은 하나.

“커너를 사주한 게 이사벨인 건 맞는데···.”

커너를 사준 이가 누구인가에 대한 답이었다.

그레이슨의 말에 따르면 커너는 홀로 엘란두르 저택에 방문했다.

그리고 그 직후.

시안의 집무실에서 그 사단이 났다.

누가 봐도 엘란두르와 관련이 있는 움직임이었고  방금 전, 이사벨이 보인 태도.

그 태도에서 시안은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다.

커너를 사주한 건 다름 아닌 이사벨이다.

하지만.

“듀라크는 몰랐던 것 같은데.”

듀라크는 이에 대해 알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 정확히는 이사벨이 독단적으로 저지른 일인 것 같았다.

듀라크가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아닌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이사벨은 듀라크의 허락을 받지 않았다.

만일 그랬다면 이사벨이 시안의 행패를 곱게 넘어갔을리가 없었다.

반드시라고 할 만큼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

시안이 보인 행동은 그만큼 무례했으니까.

사지를 찢을 정도는 아니더라도, 경을 치기는 했어야했다.

그러나 이사벨은 그러지 않았다.

이를 까드득, 씹을지언정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그 말은 즉.

이사벨도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

“뭐, 덕분에 속 시원히 할 말은 했다만.”

그리고 덕분에 이사벨과는 영원히 척을 져버렸다고 할 수 있었다.

엘란두르의 안주인과 척을 진다는 것.

그건 사실상 인생 망했다,라고 표현하는 것과 다름 없었지만···.

“뭔 상관이야.”

이것도 알게 뭐란 말인가.

어차피 2개월 뒤면 시안은 싫어도 엘란두르와 척을 지게 된다.

듀라크를 필두로 엘란두르 전체와 척을 져야만 한다.

거기에 이사벨의 반감을 얹는다고 뭐가 달라질까.

“되려 속만 끙끙 앓을 뿐이지.”

시안은 고개를 흔들어 털어버렸다.

“그건 그렇고··· 커너는 괜찮은지 모르겠네.”

시안은 이사벨과 척을 졌다는 걱정이 아닌, 위독한 커너에 대한 걱정을 했다.

세계수의 축복은 물론 신의 치료원 Lv.5

그리고 엘리의 치료에도 커너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목숨을 잃지 않았다는 것.

그래도 위독한 상태인 것은 변함 없었다.

그 때문에 이렇게 경고로 끝이 났지만.

만에 하나 커너가 일어나지 못한다면 그때는···.

바로 그때.

“시안!!!”

시안의 상념을 뚫고 어디선가 부르짖는 외침이 들려왔다.

뭔가 싶어 바라본 그곳.

그곳엔 시안의 형인 네이슨이 성큼성큼, 시안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어느새 코 앞까지 다가온 네이슨.

씩씩, 거리는 네이슨의 숨소리는 어째 상당히 화가 난 것 같아 보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형님.”

“오랜만? 형님?”

그러자 네이슨이 어처구니 없는 표정과 함께 버럭, 소리쳤다.

“지금 뻔뻔하게도 그런 소리가 나오는 것이냐!”

“제가 형님께 인사를 드린 것이 그렇게 뻔뻔한 일인 겁니까?”

“뭐, 뭐라?”

하지만 되려 시안의 당돌한 모습에 네이슨이 당황해보였다.

“지금 그런 저지르고도 그런 말들이 버젓이 나오나 보구나!”

“제가 저지른 짓이요?”

“네가 저택에서 보인 행패 말이다!”

“아. 그걸 말씀하시는 거였습니까?”

시안은 그때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그런 행패를! 게다가 듣자하니 어머니께─!”

“그런데 그건 제가 어머니께 한 행동입니다만. 형님이 아니라요. 형님께서 이렇게 화를 내시는 이유가 뭡니까.”

“이 새끼가 지금 그걸 말이라고!”

네이슨은 기가 찬 표정으로 소리쳤다.

울그락불그락한 표정은 지금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들 기세였다.

괜히 더 있다가는 귀찮은 일에 휘말릴 것 같았다.

“형님. 오랜만에 만난 건 반갑습니다만, 제가 지금 시간이 없습니다. 더 하실 말 없으시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시안은 그 말과 함께 주저없이 등을 돌렸다.

그리고 걸음을 떼려던 그때.

“네가 드디어 미쳐버린 것이냐!”

등 뒤로 노기 가득한 네이슨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리고 등을 돌아볼 새도 없이 네이슨이 시안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가벼운 훈계 정도로 넘어가려 했거늘···!”

챙!

이윽고 네이슨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엑스퍼트 중급의 실력자인 네이슨.

그러나 지금 느껴지는 기세는 중급 이상의 것이었다.

아무래도 그 시간동안 네이슨이 상급의 경지에 발을 딛은 것 같았다.

“지금 당장 검을 뽑아라!”

그렇기에 네이슨은 자신감 있게 소리쳤다.

하지만.

“어머니께서 저와의 결투를 금지시키지 않으셨습니까?”

시안은 굳이 네이슨과 검을 섞을 생각이 없었다.

“제가 지금 시간이 없습니다. 애초에 결투할 기분도 아니고요. 그리고 이렇게 저를 붙잡으시면 후회하실지도 모릅니다?”

“뭐, 뭐?”

당돌한 시안의 말에 네이슨의 얼이 잠시간 빠져나갔다.

“지금 꽁무니를 빼는 것이냐?!”

“네.”

“그게 아니라면─. 뭐, 뭐?”

다시 한 번 벙찌는 네이슨의 표정.

“꽁무니 빼는 거 맞습니다.”

시안은 그런 네이슨에게 확인 사살을 해주었다.

“하! 네가 그러고도 지금 엘란두르라고 할 수 있느냐!”

“그럼 오늘부터 엘란두르 안 하겠습니다. 그러니 이제 가도 됩니까?”

“이, 이···!!”

그러자 네이슨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울그락불그락한 얼굴은 곧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고.

머리 끝까지 차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는지 네이슨의 손이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가히 분기탱천한 모습.

“네 놈 새끼가···!!!”

기어코 네이슨이 시안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시안은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대응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 정확했다.

“그만.”

어디선가 들려오는 나지막한 목소리.

그와 동시에 뚝, 시안을 향하던 네이슨의 검이 멈추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그곳.

그곳엔 한 금발의 미남자가 서 있었다.

이사벨의 차가운 모습.

그리고 듀라크의 고고한 늑대와도 같은 모습.

그 둘을 적절히 버무려 놓은 듯한 인상의 사내.

엘란두르 가문의 장자이자.

제국의 별이라 불리는 천재 중의 천재.

“카이 혀, 형님···!”

카이 엘란두르.

갑작스러운 카이의 등장에 네이슨이 크게 당황해보였다.

어릴 때부터 네이슨은 그랬었다.

카이를 어려워하다 못해 카이만 보면 어쩔 줄 몰라했다.

카이가 딱히 네이슨을 괴롭히는 일도 없었다.

네이슨이 시안에게 그러했던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네이슨은 시안을 한참 괴롭히고 있다가도 카이가 눈에 보이면 행동을 뚝, 멈추었다.

그리고는 괜히 안절부절 못하며 어려워했고.

카이는 그런 네이슨을 가만히 바라보다 자리를 뜨곤 했었다.

카이는 동생들의 일에 별 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렇기에 단 한 번도.

“그만하거라 네이슨.”

이렇게 나서서 네이슨을 말린 적이 없었다.

“예, 예? 혀, 형님···?”

카이의 말에 네이슨도 당황스러운지 안절부절 못했다.

“하, 하지만 형님. 이 놈은···.”

“그만하라 하지 않았느냐.”

그러자 네이슨은 입을 몇 번 뻐끔거렸다.

그리고 평소였다면 이대로 물러났을 네이슨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정말로 분기탱천한 것일까.

네이슨은 눈을 한 번 빛내며 소리쳤다.

“아무리 형님이라도 이번엔 못 넘어갑니다. 시안. 이 놈은 어머님은 물론, 엘란두르 가문 자체를 모욕했습니다!”

카이는 아무런 표정 변화없이 네이슨을 바라봤다.

그리고 들려오는 카이의 한 마디.

“가주께서 지금 시안을 찾으신다.”

“······!?”

그 한 마디에 네이슨의 몸이 덜컥, 굳어버렸다.

“가주께서 오랜 시간 기다리고 계셨다.”

다시 이어진 카이의 말.

이윽고 카이의 시선이 다시금 시안에게 향했다.

그리고 듀라크가 시안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시안이 엘란두르 저택에 온 이유가 원래는 듀라크 때문이었으니까.

정확히는 듀라크가 보내온 서신 때문이었다.

북부 사건과 관련하여 할 이야기가 있으니 가문으로 오라는 내용.

뭐, 대충 듀라크가 무슨 말을 할지는 대강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담판도 지을 겸, 가문으로 찾아갈 생각이기도 했다.

하지만 커너와 관련하여 사건이 터졌고.

시안은 이사벨에 대한 분노로 듀라크가 아닌 이사벨을 찾아간 상황.

한 마디로 시안은 대외적으로 가주의 부름을 받고 가문으로 온 상황이었다.

하지만 시안은 듀라크를 만나기 전에 이사벨을 찾아갔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시안이 듀라크를 기다리게 한 셈이었다.

이건 있을 수도,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아마 이대로 돌아갔다면 상당한 분노를 샀을 터였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네이슨이 시안을 붙잡아버렸다.

그 말은 즉.

“저는 바로 가려했습니다만, 보다시피 네이슨 형님이 저를 막아서는 바람에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습니다.”

네이슨이 듀라크의 부름을 받은 시안을 붙잡은 상황이었다.

조금 과장하자면 듀라크의 손님을 억압한 셈.

“이, 이 무슨···.”

그러자 네이슨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갔다.

이제서야 사태가 파악이 된 것인지 네이슨 크게 당황하며 소리쳤다.

“왜 지, 진즉에 이야기하지 않았느냐!”

“저는 분명 시간이 없다 말씀드렸습니다만?”

“······”

네이슨은 순간 말문이 콱, 막혀버렸다.

시안은 분명 그런 말을 했었으니까.

또한 자신을 붙잡으면 후회할거라고도 했었다.

그리고 기어코 시안은 붙잡은 것은 다름 아닌 네이슨, 본인이었다.

시안의 말에 카이의 시선이 다시금 네이슨에게 향했다.

“이, 이건···! 오, 오해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네이슨. 너는 나를 따라오거라.”

이어진 카이의 말에 네이슨은 끝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네이슨의 모습에 카이가 다시 시선을 돌려 시안을 바라봤다.

말없이 바라보는 카이의 눈빛.

그 안에는 어떠한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이사벨은 그래도 어느 정도 짐작이라도 가능했건만.

옛날부터 카이는 도무지 그 속을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얼마 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서둘러 가보거라.”

카이는 그 말을 끝으로 시안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곧장 등을 돌려 자리를 떠나갔다.

서서히 멀어지는 카이의 모습.

“······ 이대로 곱게 넘어갈 거란 생각은 마라.”

네이슨은 카이를 따라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시안은 그런 둘의 모습을 지켜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여간···.”

이 놈의 가문은 어찌 된게 들를 때마다 피곤한 일 투성이인지.

“빨리 엘란두르를 갖다버리든가 해야지 원.”

시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듀라크의 집무실로 향했다.

#

똑똑.

-들어와라.

노크 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안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

시안은 천천히 방 문을 열었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 틈으로 듀라크의 집무실 풍경이 비쳐보였다.

그리고 그 집무실 중앙에 서 있는 한 중년의 남자.

“가주님을 뵙습니다.”

시안은 듀라크를 향해 예를 보였다.

“앉거라.”

듀라크의 말에 시안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적당한 자리에 가 앉았다.

듀라크는 그때까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물끄러미 시안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

그런 듀라크의 모습에 시안은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아까 전의 이사벨도 그렇고.

방금 전의 카이도 그렇고.

지금 보이는 듀라크까지.

이놈의 엘란두르들은 왜 이렇게 침묵을 좋아하는건지.

시안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이어질 듀라크의 말을 기다렸다.

듀라크는 정말 오랫동안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집무실 가득히 내려앉는 묵직한 정적.

그렇게 얼마 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맹랑한 짓을 벌였더구나.”

닫혀있던 듀라크의 입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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