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화 - 다시 돌아온 루벤
우뚝.
시안의 발걸음이 일순간 멈추었다.
그와 함께 시안의 뒤를 따르던 일행들 또한 모두 걸음을 멈추었다.
키에에에에엑─!!
그리고 재차 들려오는 괴성.
시안은 곧장 검을 뽑아들며 뛰어들어갔다.
“켄드릭!”
그리고 왼손을 뻗어 켄드릭을 불러냈다.
사아아─.
주변으로 칠흑의 안개가 피어나며 형체를 갖추었다.
이윽고 일렁이는 켄드릭의 푸른 안광이 번뜩였고.
그런 켄드릭의 뒤로 루벤의 기사들이 재빠르게 대열을 갖추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영주님이다!!!”
“영주님이 돌아오셨다!!!”
갑자기 경비탑의 병사들에게서 커다란 외침이 터져나왔다.
무려 Lv.4에 이르는 경비탑.
주변 전경이 한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특급 암살자인 커너가 시전하는 은신술조차 그 기척을 감지할 수 있는 기능이 있었다.
그렇기에 시안의 왔음을 알 수 있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어째 그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다급한 목소리가 아니라 시안을 반기는 듯한 분위기였으니까.
“이봐! 다들 나와! 영주님이 돌아오셨다고!!”
전혀 긴박한 상황처럼 보이지 않았다.
병사들의 외침과 동시에 루벤 안 쪽에서 우르르,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몰려나온 사람들은 저마다 쟁기, 호미, 망치 등.
농기구들과 같은 생산 도구들을 들고 있었다.
전투의 흔적이라기보다는 하던 일을 내팽겨치고 달려온 듯한 모습이었다.
“응···?”
시안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와 동시에 켄드릭과 루벤의 기사단 또한 표정이 멍해졌다.
“오셨습니까 도련님.”
“오셨소 영주.”
그런 시안의 앞으로 영지민들 사이를 비집으며 한스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시안이 가문에 있을 때부터 함께 했던 한스.
지금은 루벤의 행정을 총괄하는 책임자였다.
그리고 바라본 한스의 표정은 긴박함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
다시 한 번 멍해지는 시안의 표정.
바로 그 순간.
-시안!!!
저 멀리서 희끄무레한 형체가 날아들었다.
짙은 회백색의 눈동자와 백은색의 머리를 한 고혹적인 여인.
다름 아닌 루벤의 수호령, 레아였다.
-왜 이렇게 늦었어! 왜 이렇게 늦었어!
순식간에 날아온 레아가 시안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이윽고 레아가 시안의 뒤를 휘감으며 작게 속삭여왔다.
시안의 목덜미로 떨어지는 레아의 백은색의 머리칼.
어째, 평소의 레아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아니, 평소보다 더욱 고혹적인 레아였다.
뭐, 시안이 떠난 기간이 2달 가까이 되었으니 그럴 수는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과는 전혀 맞지 않는 모습이었다.
“······ 뭐죠?”
시안은 어리둥절한 심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윽고 시안은 곧장 한스에게 물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러자 한스가 되려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어왔다.
“루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 아니었어?”
“아뇨. 별 일 없었습니다만?”
“그럼 방금 괴성은 뭐야. 분명 괴성이 들렸었는데?”
“괴성···이라 하시면은···? 아.”
한스는 퍼뜩 생각났다는 듯 다시 말을 이었다.
“혹시 방금 트롤 무리들이 습격해온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트롤 무리? 트롤 무리가 습격해왔어?”
“예. 방금 전에 동쪽 성문으로 500 개체 정도가 습격해왔습니다.”
“······?”
그런 한스의 말에 시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500 정도 되는 트롤의 개체.
그건 저렇게 담담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트롤 500이면 마을은 물론 도시 하나가 작살이 나는 수준이었다.
심지어 여긴 어둠의 숲이었다.
몬스터가 광폭화(Over Drive)되어 마수가 되는 어둠의 숲이었다.
트롤 마수 500이면 규모가 작은 영지까지도 아작이 나는 수준이었다.
“그럼 별 일 있었던 거 아니야?”
이건 별 일이다 못해 엄청 큰 일이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거야 매일같이 있는 일입니다만.”
루벤에서는 일상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리고 예전의 루벤이었다면 감당할 수 없는 큰 재해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 시안의 꾸준한 현질로 장족의 발전을 한 루벤.
그리하여 지금 보이는 루벤의 자태.
일단 저게 뚫리기는 할까···? 싶은 ‘정신 나간 강철책! Lv.4’부터 시작해.
깊이를 알 수 없는 해자.
사각 지대라고는 보이지도 않는 경비탑과 더불어.
그런 방벽들을 철통같이 수비하고 있는 수준 높은 루벤의 병사들까지.
“방금 습격해온 트롤 무리로 트롤의 피 재고를 다시 채워놨습니다.”
키에에에에엑···!!
키에에엑······!
어둠의 숲의 마수들은 이제 루벤의 특산품이 되어 골드로 화할 뿐이었다.
“······”
시안은 순간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생각해보면 현재 어둠의 숲에서 루벤을 위협할 존재는 없었다.
지상 최강의 포식자, 오우거 무리가 떼거지로 온다면 또 모를까.
아니, 오우거 무리라도 안될 터였다.
-너 없는 동안 얼마나 쓸쓸했는지 알아? 정말···.
지금 시안의 목덜미를 휘감고 있는 레아.
루벤의 수호령, 레아가 있었으니 말이다.
아마 마족이나 악마가 아닌 이상 불가능하지 않을까.
하물며 시안과 함께 떠났던 데스 나이트, 켄드릭.
그러니까, 지금 시안의 뒤에서 당황하는 켄드릭까지 더 해지면···.
어쩌면 악마 7군주 한 명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한 마디로 루벤에는 별 다른 일이 없었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보다 도련님. 저 뒤에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시안이 별 다른 일이 있었지.
한스의 시선이 시안의 뒤쪽으로 향했다.
비단 한스 뿐만이 아니었다.
루벤의 영지민들 전부가 모두 시안의 뒤쪽, 모여있는 다크 엘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면에 다크 엘프들은 살짝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낯선 환경, 낯선 사람들.
이 상황이 어찌 두렵지 않을 수 있겠냐만은.
사실 다크 엘프들이 두려워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다름 아닌 시안의 목덜미를 휘감고 있는 레아.
“어, 어떻게 저런 존재가···?”
“히익···!”
다크 엘프들은 레아를 두려운 기색으로 바라봤다.
다크 엘프들은 어둠의 마나를 다루는 만큼 마(魔)의 힘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리고 레아에게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마(魔)의 기운.
아스란디즈 마저 긴장이 역력한 얼굴로 레아를 바라봤다.
오직.
“유령이다.”
세라만이 천진난만하게 레아를 대할 뿐이었다.
“따뜻해 그리고 강대해. 엄청.”
세라는 거리낌없이 레아에게 다가갔다.
존재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능력을 지닌 세라.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거야?”
세라가 신기한 눈빛으로 레아를 바라봤다.
그런 세라의 모습에 레아가 되려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얘는 누구야?
“난 세라.”
-세라?
“응. 다크 엘프야.”
-다크 엘프···?
레아가 고개를 다시 한 번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다크 엘프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다크 엘프라는 말은 천 년전, 엘로디 이후로부터 파생된 종족이었으니까.
엘로디로부터 시작된 종족.
조금 더 정확히는 엘로디가 어둠의 마나를 다루면서 시작된 종족이었다.
한 마디로 레아가 살아있던 시기에는 존재하지 않던 종족이었다.
-검은 머리 엘프?
레아가 세라를 유심히 살펴 보았다.
-잠깐, 이렇게 보니까 엘로디를 닮은 것 같은데?
이윽고 레아가 세라 주위를 빙글빙글 돌아보였다.
뭐, 다크 엘프가 엘로디의 후손들이었으니 세라도 엘로디의 후손이라 볼 수 있겠지.
-엘로디를 정말 많이 닮았는데?
하지만 세라에게 엘로디의 피가 얼마나 남아있는지는 시안도 알지 못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레아가 시안을 바라보며 물어왔다.
그와 동시에 한스를 비롯한 루벤의 영지민들.
그리고 다크 엘프들의 시선이 모두 시안에게로 향했다.
아무래도.
상황 정리가 필요할 것 같았다.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 하죠.”
시안은 검을 집어넣으며 루벤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루벤 중심부에 위치한 영주성 Lv.2.
그리고 그 안에 위치한 시안의 집무실.
시안은 레아를 비롯한 한스와 세미르, 그레이슨, 루카스.
그리고 아스란디즈와 세라를 모아놓고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주로 레아와 한스, 세미르에게 사정을 설명하는 쪽으로 이야기가 흘러갔다.
북부의 사건은 제국 전체로 소문이 퍼졌고.
루벤 또한 그 사건의 전말에 대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세한 사정마저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설명은 꽤나 길게 이어졌고.
얼추 상황에 대한 설명이 끝난 이후.
“······ 해서 앞으로 다크 엘프들은 루벤에 같이 지내게 될 거야.”
“아스란디즈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난 세라. 잘 부탁해.”
아스란디즈와 세라가 루벤의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한스와 루카스.
그리고 그레이슨과 세미르가 탄성을 터트리며 말했다.
“허어···.”
“엘프를 직접 보게 볼 줄은···.”
“심지어 루벤에서 같이 지내게 되었다니···.”
“지난 번에 영주께서 다크 엘프에 대해 물으실 때 의아하긴 했소만···.”
넷은 저마다의 반응을 보였으나 단지 그 뿐.
다크 엘프가 영지민이 됨에 있어 딱히 거부감을 갖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시안에게서 모든 사정을 들었으니까.
이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었고.
또 어떤 아픔을 지녔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세미르를 비롯한 망치 모루 부족의 드워프들.
그리고 그레이슨을 비롯한 루벤의 인간들.
이들 또한 모두 세상으로부터 버림 받은 이들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같은 고통을 지닌 다크 엘프들을 마음 깊숙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오직.
-왜 하필 엘프여서는···.
레아만이 약간의 심통이 나 있을 뿐이었다.
-이러면 영지에 예쁜 애들이 득실거리잖아. 자꾸 시안한테 기집애들 꼬이는 것도 골치 아픈데.
레아는 뾰루퉁한 표정을 한 번 지어보였다.
그리고는 고개를 홱, 돌려 세라를 바라봤다.
-얘. 여기서 지내는 건 좋은데 영주성에는 함부로 오면 안돼. 알겠어?
“영주성? 그게 뭐야?”
-여기 지금 네가 있는 곳. 시안이 머무는 곳 말이야.
“시안이 있는 곳이 영주성. 여기가 영주성.”
-그래, 여기는 함부로 드나들지 마렴.
“왜?”
-그, 그야···.
순간 레아가 당황하며 말했다.
아마 이렇게 세라가 당돌하게 물어올 줄은 몰랐던 모양인 듯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다크 엘프들은 기본적으로 레아를 두려워했다.
레아에게서 느껴지는 끔찍한 마기.
어둠의 마나를 다루는 이들에게 레아의 마기는 한 차원 높은 마(魔)의 힘이었으니까.
하지만 세라는 아니었다.
세라는 레아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왜 오면 안돼?”
되려 동네 언니처럼 대할 뿐이었다.
-시, 시안이가 귀찮아··· 할 거니까?
“시안은 내가··· 귀찮아?”
세라가 시안을 바라보며 물어왔다.
바라본 세라의 표정은 꽤나 시무룩해져 있었다.
정말로 시안이 세라를 귀찮다고 생각한 모양.
“아니.”
시안은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세라는 다시금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레아를 바라보더니.
“안 귀찮대.”
-······
레아는 뭐라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안.
‘레아 상대로 밀리지 않는 사람은 처음인데.’
시안은 세라의 능력에 감탄을 터트렸다.
그간 레아를 대적했던 인물은 없었다.
성녀, 아리아는 물론.
황녀, 엘레나도 상대가 되질 않았다.
상대는 커녕 탈탈, 털리기 바빴거늘.
세라는 처음으로 레아를 대적하고 있었다.
심지어 레아의 말문을 막아버리기까지.
천 년의 세월을 살아온 레아였건만.
세라는 그런 레아에게도 새로운 유형인 듯 싶었다.
레아는 말문이 막혀버린 채 멍하니 세라를 바라봤다.
그러다 갑자기 홱, 고개를 돌려 시안을 쳐다보더니.
-시안, 흥이다!!
어디론가 휑하니 날아가버렸다.
‘······ 뭔데?’
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잠시.
“유령 언니 화났어. 세라가 나쁜 말 한 걸까?”
세라가 시무룩해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 또 뭔데?’
시안은 진짜 뭔가 싶었다.
‘에이, 모르겠다.’
둘이 알아서 잘 해결하겠지.
시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어쨌거나 그렇게 되었으니까. 한스는 다크 엘프들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당분간 편의를 좀 봐주고.”
“알겠습니다.”
“그레이슨과 세미르님은 영지민들과 동화될 수 있게 도와주고. 루카스도 병사들에게 당부하는 거 잊지말고.”
“걱정하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병사들에게 단단히 말해두겠습니다.”
시안의 말과 함께 한스와 그레이슨.
그리고 루카스가 차례로 답을 해왔다.
시안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상황 설명도 대강 끝났겠다.
루벤에서 다크 엘프들이 살아갈 주거 공간과 영역을 확장해야했다.
또한 세계수, 인스티즈도 심을 공간도 확보해야했다.
이 과정에서 들어가는 골드는 당연히 어마어마할 터.
하지만.
[현재 보유 중인 골드] - 32,060,500 G
시안의 수중엔 무려 3,200만 골드가 넘는 금액이 있었다!
여기에 벌써 5만 포인트가 넘어간 명성 포인트까지!
‘그간 잘도 깐족거렸겠다.’
시안은 속으로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자 그럼 해산. 가서 각자 할 일들 하라고.”
그런 시안의 말과 함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집무실을 나섰다.
하지만 한 사람.
“세미르? 할 말이 있으신가요?”
세미르만이 자리에 남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드워프 종족인 망치 모루 부족의 족장이자, 신장(神匠) 모르크루의 후손인 세미르.
시안이 묻자 세미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혹시 영주께서는 지금 다크 엘프들이 살아갈 공간을 지으시려는 생각이시오?”
“그럴 생각이었습니다만.”
시안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정말 그럴 생각이었으니까.
“내가 지난 번에 만들어준 청사진을 토대로 지으실테고.”
“그렇습니다만.”
그리고 세미르가 지난 번에 만들어준 청사진을 토대로 현질을 할 생각이었다.
세미르가 만들어준 루벤의 청사진은 정말 낙원이라는 말이 딱 어울렸으니까.
그리고 3,200만 골드는 그 낙원이라는 꿈을 실현시켜 줄 수 있었다.
하지만.
“흐음···.”
세미르는 어째서인지 우려 섞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그러시죠?”
“사실은··· 내가 만든 청사진에 조금 문제가 있소이다.”
“문제요?”
세미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실은···.”
그리고 이어진 세미르의 말.
솔직히 완벽히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여러 건축학적 지식들이 난무했으니까.
하지만 세미르가 말하는 문제가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청사진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낙원에 문제가 있을리가 있을까.
다만.
“이 청사진이 다크 엘프들에게 맞지 않은 설계라고요?”
“그렇소.”
세미르는 곧장 말을 이었다.
“엘프들의 생활 방식은 조금··· 특이하오. 이건 영주께서 직접 보셨으니 이해가 빠를 것이오.”
시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것이 북부에서 다크 엘프의 마을을 가본 바.
조금 특이한 정도가 아니라 그냥 다른 세상이었다.
숲의 종족, 엘프.
그들은 숲과 하나가 되어 살아가고 있었다.
일단 엘프들의 집은 모두 나무 위에 붙어있었다.
땅에 붙어있다시피 한 집들로부터.
저기서 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높이 올라있는 집들까지.
반면에 인간들의 집은 그렇지 않았다.
이건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방식.
쉽게 말해 인간의 생활 방식이 수평으로 뻗어있다면.
엘프들의 생활 방식은 수직으로 뻗어있다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 드워프들도 엄밀히 따지면 수직적이라 할 수 있었소. 과거, 선조들께서는 땅굴 생활을 하셨으니 말이오.”
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 드워프는 인간이 되었다.
인간들의 생활 방식에 익숙해졌고.
끝내 인간들의 생활 방식에 적응하여 바뀌어갔다.
허나, 엘프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드워프들과 달리 인간들에게서 멀어졌다.
세상으로부터 등을 돌려 그들만의 삶을 살았다.
평범한 엘프들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세상으로부터 배척받아온 다크 엘프들이야.
“해서 청사진대로 건축한다면 필시 문제가 발생할 것이오.”
세미르는 그런 우려를 표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평생을 엘프로 살아오다 갑자기 인간으로 살아야만 하는 상황.
뭐, 살다보면 적응은 할 터였다.
하지만 그 기간이 오래 걸릴 것은 분명했다.
드워프들이 인간이 되어간 시간만큼의 세월이 필요했다.
그 과정에서 필히 여러 문제가 발생할 터.
무엇보다.
“엘프들에겐 세계수가 필요할 것이오.”
엘프들에게는 세계수가 필요했다.
엘프는 숲을 키우고, 숲은 엘프를 키운다.
이건 엘프라는 종족에 뿌리 박힌 정체성이었다.
인간들의 생활 방식에 적응할 수는 있을지언정.
종족의 정체성까지 죽이면서 살아가라 말할 수는 없었다.
물론 시안에게는 세계수가 있었다.
그것도 평범한 세계수가 아니라 무려 인스티즈가.
하지만.
“세계수를 심을 공간도 딱히 마련해두지 않았소.”
세미르는 청사진을 만들 당시 세계수에 대한 고려를 전혀 하지 않았다.
생명의 근원을 품은 세계수이자 엘로디가 남긴 유산, 인스티즈.
인스티즈는 지금 당장 루벤에 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심을 수 있다하여 마구잡이로 심을 수 있는 것은 또 아니었다.
인스티즈는 인간과 드워프, 루벤 전역은 물론.
근방 어둠의 숲까지 그 영향을 뻗칠 터.
한 마디로 세계수를 중심으로 영지의 구조 다시 개편해야만 했다.
해서 세미르가 하고자하는 말은 즉.
“청사진을 수정해야만 하오.”
지금의 청사진을 개선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설마하니 영주께서 다크 엘프를 데려올 줄은 몰랐소. 하물며 세계수까지···.”
뭐··· 이건 시안도 할 말 없었다.
솔직히 시안도 몰랐으니까.
세상 누가 영지민으로 다크 엘프가 올 것을 예상하겠는가.
당연히 인간이 올 줄 알았지.
게다가 세상 누가 영지에 세계수를 심을 생각을 하겠는가.
심기는 커녕,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도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세계수를 볼 수나 있을까 싶었다.
현재 루벤은 인간과 드워프 그리고 엘프가 영지민으로 있는 영지.
세계수가 심어져 있는 영지.
대륙 전역을 뒤져봐도 이런 영지는 없으리라.
“음··· 그럼 세미르. 청사진을 수정할 수 있는건가요?”
“가능은 하오만···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소.”
세미르는 난색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보아하니 조금이 아니라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 같았다.
뭐, 그래도 수정이 가능하다는 것이 어디냐만은.
‘좀 곤란한데.’
지금 상황에서는 곤란했다.
그도 그럴 것이 듀라크와 약조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북부의 사건이 끝난 지금.
듀라크와 약조한 시간이 약 2개월 가량이 남아있었다.
한 마디로 2개월 뒤에 시안은 엘란두르로 돌아가야하는 상황이었다.
‘그러고보니 듀라크가 잠잠하네.’
북부에서 만족할만한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바로 복귀한다고 했거늘.
북부의 일이 모든 끝난 지금.
어째서인지 듀라크는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만족한다는 건지, 안한다는 건지.
‘에이, 알게 뭐람.’
시안은 생각을 털어버렸다.
어차피 가문으로 돌아갈 생각이 눈꼽만큼도 없었으니까.
지금 중요한 건 청사진의 수정.
“음···.”
생각지도 못한 문제에 시안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현질할 돈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건만.
이런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3,200만 골드라는 어마어마한 돈이 인벤토리에 있건만···.
‘응? 아니지.’
그 순간 시안의 머릿속으로 퍼뜩,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세미르. 이건 어떨까요?”
시안은 세미르에게 떠오른 생각을 말해주었다.
#
시안이 루벤에 복귀한 지, 어느덧 5일이란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다크 엘프들이 루벤의 영지민이 된 지 또한 5일이란 시간이 지났다.
루벤의 영지민들은 다크 엘프들을 배척하지 않고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 덕분에 다크 엘프들은 새로운 터전에 잘 적응을 해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세미르의 우려처럼 다크 엘프들은 루벤에서의 생활에 좀 처럼 적응하지 못했다.
시도 때도 없이 지붕 위를 넘나드는 것은 물론.
루벤의 영역 밖을 나가기 일쑤.
심지어 어둠의 숲에서 잠을 청하다 마수들에게 습격을 당하는 일들이 종종 생겼다.
세미르의 우려보다 더 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고.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문제는 점점 더 심각해져만 갔다.
하지만 마땅한 대책이 없었다.
평생을 걸쳐온 삶의 방식을 어떻게 일순간에 바뀔 수 있었다.
하물며 엘프라는 종족 근원에 뿌리 박힌 정체성까지 바꿔야 하는 상황이었다.
오로지 긴 시간만이 해결줄 것이라 믿을 뿐이었다.
그렇게 혼란한 루벤의 생활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다시 하루, 이틀 그리고 3일이라는 시간이 흐르던 그때.
“준비가··· 모두 끝났소이다.”
세미르가 다시 시안을 찾아왔다.
퀭한 세미르의 눈.
일주일에 걸친 밤샌 작업이었던 것일까.
그 진득한 피로가 얼굴에 고스란히 묻어나왔다.
“고생하셨어요.”
시안은 세미르가 건네는 몇 장의 종이를 받아들었다.
다름 아닌 시안이 부탁한 루벤의 청사진.
“영주께서 부탁하여 만들기는 했소만···. 이렇게 완전히 뒤엎어도 되는 건지···.”
이윽고 우려섞인 세미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벤을 완전히 뒤엎어버린 새로운 청사진.
기존의 것을 수정하는 방식의 청사진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루벤의 전부를 싹 갈아 엎은 새로운 청사진이었다.
기존에 지어져 있는 건물들, 집들.
그리고 각종 제반 시설들.
심지어 밖에 지어진 방벽들까지.
루벤의 모든 것들을 싸그리 들어내어 새로이 짓는 방식이었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이미 틀어진 곳을 억지로 수정하는 것보다.
아예 새하얀 도화지에서 새로이 작성하는 것이 더 용이했으니까.
그 과정에서 세미르가 놓쳤던 부분을 보다 꼼꼼하게.
그리고 보다 완벽하게.
하여 지금.
“미쳤는데요?”
세상에 다시 없을 루벤의 청사진이 만들어졌다.
딱히 건축에 대해 지식이 없는 시안이었음에도 범상치 않음을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아니, 이걸 범상치 않은 정도라 말할 수 있을까.
“진짜 미쳤는데요?”
이건 정말 미쳤다는 말로 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천국, 낙원, 이상향, 유토피아.
그 어떤 것을 들이밀어도 이 청사진을 따라올 수 없을 터였다.
물론 청사진 대로 완성이 된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 청사진 대로 완성하기란 불가능했다.
이 말도 안되는 건축물들은 차치하고서라도.
이 건물들이 지어지는데 걸리는 시간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평범한 방법으로 지금부터 짓기 시작하면 대략 100년.
루벤을 세상에 다시 없을 낙원을 짓는다 한들.
그곳에 살고있는 이는 아무도 없을 터였다.
그렇기에 낙원은 낙원이기에 낙원이었고.
이상향은 이상향이기에 이상향이었다.
하지만.
세상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해주는 절대적인 마법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현재 보유 중인 골드] - 32,000,000 G
3,200만 골드.
실로 어마어마하다 못해 천문학적인 금액.
물론 이럼에도 문제가 있었다.
루벤 전체를 드러내어 다시 짓는다 한들.
그 건물이 철거되고 건설되어지는 시간은 어쩔 수가 없었다.
즉시 완료권이 있었지만 그 많은 건물들의 즉시 완료권을 구매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루벤을 완전히 드러내는 것부터가 정신 나간 짓이었다.
막말로 지금까지 현질한 비용을 다시 한 번 현질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으니까.
모바일 영주로 건물 철거가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일부 금액을 환불해준다 하더라도.
들어가는 비용 자체가 어마어마한 건 변함이 없었다.
그렇기에 사실상 불가능이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시안이 이 일을 감행한 이유는 단순했다.
‘점검 보상을 노린다.’
다름 아닌 점검 보상.
지난 날 점검의 보상으로 모든 건물과 연구의 즉시 완료권을 얻은 바 있었다.
그것을 다시 한 번 얻어낸다면 가능했다.
그리고 그것의 조건은 점검이 이루어질 정도의 인과 과부하.
즉, 모바일 영주가 까무러칠 정도의 골드였다.
그리고 그 동안의 점검으로 강해진 모바일 영주였기에 이 마저도 힘든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다시 한 번, 목 놓아 부르는 그 이름.
3,200만 골드.
세상 불가능한 모든 것을 가능으로 바꾸어주는 절대적인 마법.
‘역시.’
문제에 봉착했을 때.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할 때
모바일 영주가 누누히 하던 말이 있지 않은가.
‘진행을 하다 막혔을 땐, 현질을 하는 거지.’
그 순간.
띠링!
《아니야···! 그런 의미가 아니야···!!》
화면 위로 다급한 알림창이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우우웅···! 스마트 폰이 작게 진동했다.
띠링! 띠리링!
《그거 아니야아야아아아!!!!!!》
마치 두려움에 떠는 듯 느껴지는 건 왜일까.
꾹.
하지만 시안은 가볍게 무시했다.
“그동안 당한 것이 있는데.”
알게 뭐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