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질하는 영주님!-137화 (137/322)

§ 137화 - 황녀, 엘레나(2)

제국의 수도, 다르칸.

그리고 그 다르칸에 위치한 황궁.

황태자, 콘라드는 한 장의 보고서를 훑어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북부의 피해가··· 생각보다 심하군.”

북부 전역을 뒤집어 놓았던 사건.

다행히 사건 자체는 잘 해결되었다.

그러나 그에 따른 피해마저 잘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백성들이 희생되었고.

많은 제반 시설들이 파괴되고 사라졌다.

그리고 추정된 피해만 이렇다 뿐.

보고서에 적혀있지 않은 피해는 더욱 심각했다.

무엇보다 콘라드가 직접 북부에 가본 바.

당장 먹을 것이 없어 굶고 있는 백성들이 즐비하지 않았는가.

또한 다치고 병든 사람들이 길거리에 전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백성들을 돌볼 물자가 너무도 부족했다.

돈도 돈이지만, 물자들을 공급할 수급처가 너무도 부족했다.

가뜩이나 척박한 북부의 환경인 터라 현지 수급도 불가능한 상태.

자금이 있어도 물자를 구할 수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이럴 때 누군가 나서준다면 좋으려만···.”

하지만 귀족들은 모두 내색하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가뜩이나 흉년이 들어 자신들도 여유가 없다는 것.

뭐,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콘라드는 그 이상으로 추궁하지 않았다.

콘라드는 작게 나마 한숨을 내쉬며 보고서를 한 쪽으로 밀어두었다.

그리고 새로운 양피지를 하나 꺼내들었다.

다름 아닌 황실 재무관에게 보내는 북부 지원 결재서.

콘라드는 차분히 깃펜을 들어 결재서를 작성했다.

사각.

이제 막 결재서의 첫 글귀를 적어 내린 콘라드.

그런데 벌써부터 재무관의 하소연이 귓가에 맴도는 건 무슨 이유일까.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아깝다고 고통 받는 백성들을 외면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슥, 스슥.

콘라드는 거침없이 결재서를 작성했다.

그 순간.

똑똑.

-전하. 엘레나 황녀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집무실 밖으로 시종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레나가?”

시종장의 보고에 콘라드는 결재서를 작성하던 고개를 들었다

이윽고 고개를 몇 번 갸웃거리고는 들고 있던 펜을 살며시 내려놓았다.

“들라하게.”

콘라드의 말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달칵, 하며 집무실의 문이 다시 열렸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엘레나.

“황태자 전하를 뵙─.”

“사석에서는 괜한 예의는 접어두라. 그리 말하지 않았더냐.”

콘라드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이윽고 몸을 바로하는 엘레나에게 손짓해보였다.

“거기 편한데 앉거라.”

콘라드의 손짓에 엘레나는 적당한 곳에 자리했다.

“그래. 무슨 일로 찾아왔느냐.”

“실은··· 오라버니께 한 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어 찾아왔어요.”

“부탁···?”

엘레나의 말에 콘라드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엘레나가 부탁을 해?

엘레나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부탁했던 적이 있었던가?

일단 콘라드의 기억에는 없었다.

꽉 막히다 못해 울화통이 치밀 정도의 엘레나였다.

그 놈의 의무감이 대체 무엇인지.

엘레나는 부탁은 커녕, 되려 자신에게 일거리를 달라 말하던 아이였다.

그 과정에서 앓는 소리 하나 내지 않았으니.

한 마디로 여동생답지 않은 여동생이지 않았는가.

그런 엘레나가 부탁을 해온다?

“편히 말하거라. 이 오라비가 최대한 들어주도록 하마.”

콘라드는 왜인지 들뜬 기분을 느끼며 말했다.

“그것이···.”

엘레나는 살짝 시선을 내렸다.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는 모습.

애초에 부탁이라는 것을 처음 해보는 아이였다.

지금 이 상황이 엘레나에겐 생소한 일일터.

그렇기에 콘라드는 그런 엘레나를 재촉하지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그렇게 한참을 뜸을 들인 직후.

“혹시··· 돈을 좀 빌릴 수 있을까요?”

“······ 뭐라?”

콘라드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뭐라 그랬느냐?”

콘라드는 혹시나 싶은 심정으로 다시 물었다.

그리고.

“돈을··· 빌릴 수 있을지···.”

엘레나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을 해왔다.

“······”

콘라드는 뭐라,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러니까, 엘레나가 돈을 빌려달라고 말하는 건가?

그러니까,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는 뜻?

콘라드는 엘레나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진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엘레나는 황녀다.

쉽게 말해 돈 걱정 따위는 없는 신분.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가지면 되고.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먹으면 된다.

그것이 황녀가 누릴 수 있는 권리다.

그리고 그렇게 누린 권리 때문에 엘레나가 그런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지 않는가.

그런데 돈을 빌려달라?

그러니까 돈을?

대체 왜?

혹시 따로 무언가를 하고 싶은 것이 있는 것인가?

콘라드 가까스로 정신을 붙잡으며 엘레나에게 물었다.

“얼마를, 얼마를 빌려달라는 게냐.”

그리고.

“2천만··· 골드 정도요.”

“······ 2백만?”

“아뇨. 2천만···.”

이어진 엘레나의 답에 그만 정신을 놓아버렸다.

“·····················”

이건···.

이건 아니었다.

아무리 하나 뿐이고 사랑스러운 여동생이라고는 하나.

황녀라는 신분에 사로잡혀 제 인생을 살지 못한 불쌍한 아이라고는 하나.

“제정신··· 인게냐?”

2천만 골드는 아니었다!

콘라드는 이걸 뭐라, 뭐라 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처구니가 없다 못해 어이가 승천하는 지경이었다.

엘레나가 끝내 미쳐버린 것인가?

바라본 시선.

엘레나는 콘라드의 시선을 회피하고 있었다.

“2천만 골드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고 말하는 게냐.”

“········· 네.”

모를 리가 없었다.

엘레나는 영특하고 현명한 아이니까.

아무리 돈 걱정 없이 사는 황족이라도 2천만 골드의 값어치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콘라드는 더욱 뭐라 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잠시간 이어진 정적.

“왜··· 그런 돈을 빌리려 하는게냐.”

엘레나는 또 다시 쉽사리 답을 하지 못했다.

콘라드는 그런 엘레나를 말없이 기다렸다.

그렇게 다시 한 참의 시간이 흐르고.

“그것이···.”

엘레나는 그때서야 자세한 사정을 이야기했다.

길지도, 그렇다고 짧지도 않은 이야기.

그리고 그때서야 콘라드는 왜 엘레나가 2천만 골드를 빌리려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루벤에 놀러가려면 2천만 골드가 필요하다?”

“네.”

“하도 철벽을 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고?”

“······ 네.”

“허어···.”

콘라드는 저도 모르게 침음을 흘렸다.

이걸 잘했다고 해야할지.

아니면 제정신이냐고 해야할지.

뭐, 다짜고짜 결혼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것.

자신의 조언대로 천천히 친분을 쌓을 건덕지를 만들려던 것.

이건 참 잘한 일이었다.

그리고 보아하니···.

‘엘레나가 먼저 그런 말을 꺼낼 줄은···.’

이건 상당히 의외였다.

아니, 의외이다 못해 예상 밖의 행동이었다.

엘레나도 단순히 의무감이 아닌, 시안을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어한 것일까.

물론 아직은 황녀로서의 의무감이 더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자신과 황제가 시안을 자신의 짝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

하지만 엘레나가 보이는 태도는 분명한 호감이었다.

시안을 조금 더 알아가고 싶다는 호감.

그래서 콘라드는 머릿속이 조금은 복잡해져왔다.

엘레나가 남자에게 호감을 보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고.

그렇기에 오라비로서 엘레나를 적극 지원해주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콘라드는 살짝 시선을 내려 보였다.

탁자 위로 방금 전까지 작성하던 [북부 지원 물자 결재서]가 눈에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환청처럼 황실 재무관의 한숨 또한 들려왔다.

“지금 황실 재정에서 2천만 골드를 지출하는 것은 불가하다.”

콘라드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엘레나가 하나 뿐인 여동생이라는 하나.

아닌 건 아닌 것이었다.

가뜩이나 북부 지원에 재정이 빠듯한 지금.

2천만 골드라는 천문학적인 돈을 지출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황족 개인적인 일에 황실 자산을 쓸 수는 없다.”

공과 사는 확실히 해야하는 법.

“미안하지만 그건 없던 일로 해야할 것 같구나.”

콘라드는 일말의 여지 없이 고개를 저어보였다.

하지만.

“아뇨. 황실 재정 말고, 다른 곳에서 빌리고자 말씀드린 거예요.”

“다른 곳?”

이어진 엘레나의 말에 콘라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곳에서 돈을 빌리다니?

2천만 골드라는 돈을 대체 어디서···?

“폐하께서 시안 공자와 약조하신 것이 하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엘레나의 말에 콘라드가 움찔, 몸을 떨었다.

다름 아닌 시안에게 골드를 주는 대신, 엘레나와 한 번의 만남을 갖는 것.

황제와 콘라드는 그 사실을 엘레나에게 알리지 않았다.

괜히 돈으로 만남을 주선하는 것 같았으니까.

그렇기에 콘라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건만.

엘레나는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딱히 거절하지 않았던 것인가.’

하여간, 귀염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여동생이었다.

“폐하께서 시안 공자에게 주는 보상은 황실 자산이 아니지 않나요?”

“그건 그렇다만···.”

황실의 자산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제국의 대소사에 쓰이는 황실 자산.

황족 일원들이 개인적인 일에 쓰는 황가의 자산.

둘 모두 황실의 재무관이 관리한다..

그러나 제국 공적인 일에는 황실 자산이 쓰인다.

지금처럼 북부의 피해를 지원하는 일 등.

황실 자산은 제국과 관련된 공적인 일에 쓰인다.

그러나 황족의 사적인 일에는 아니었다.

공적인 자산을 사적인 일에 쓸 수는 없는 일.

이건 아무리 황제라도 어길 수 없었다.

그렇기에 방금 콘라드가 엘레나에게 돈을 빌려주는 것을 거절하지 않았는가.

같은 이치로 황제가 시안에게 직접 보상을 약조한 일.

그것은 황제 개인적인 일이었고, 따라서 황실 자산을 끌어 쓸 수는 없었다.

그리고 지금.

엘레나가 그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

“지금··· 폐하의 자산에서 빌리겠다는 것이냐?”

엘레나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고.

콘라드는 그대로 할 말을 잃어버렸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사실상 황제의 삥을 뜯겠다는 것이나 다름 없지 않은가!

그리고 뭐···.

황제의 자산에서 2천만 골드는 지출 가능한 금액이었다.

하지만 지출이 ‘가능’하다 일뿐.

“폐하께서··· 윤허하실지 모르겠구나.”

그것이 선뜻 내줄 수 있다는 뜻은 절대 아니었다.

무조건적으로 거절할 것이 분명했다.

보나마나 황제는 보상으로 몇 백만 정도를 생각했을 것이 뻔했으니까.

아마 마지노선을 1천만까지 생각했을 터.

그런데 2천만을 부른다?

아마 윤허는 개뿔.

눈을 까뒤집으며 사지를 찢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그걸 엘레나라고 모르지 않았을 터.

“해서 오라버니께 부탁을 드리고자 찾아왔어요.”

이어진 말에 콘라드는 그때서야 엘레나의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같이 폐하를 설득해달라는 것이냐?”

“네.”

고개를 끄덕이는 엘레나의 모습에 콘라드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어쩐지···.

현명한 엘레나가 다짜고짜 2천만 골드를 빌려달라 한다 싶었다.

그리고 엘레나가 이렇게까지 한다는 것.

‘만남을 부추긴 건 나이다만···.’

남자에 빠지면 앞뒤가 없다더니.

둘의 만남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어째, 콘라드의 생각보다 엘레나는 시안을 더 마음에 들어한 것 같았다.

어딘가 기쁘면서도 괜시리 서운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뭐, 시안 정도면 엘레나의 짝으로 더없이 좋았다.

무능력한 놈팽이라는 소문이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시안을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그런데 막상 엘레나가 이리 적극적으로 나오니···.

“음···.”

콘라드의 생각이 아주 약간 달라졌다.

물론 여전히 시안을 엘레나의 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인지 시안이 놈팽이··· 라는 것에는 조금 고개가 끄덕여졌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콘라드는 복잡미묘한 심정을 느끼며 생각에 잠겼다.

2천만 골드.

실로 어마어마하다 못해 천문학적인 돈이었다.

하지만 황제의 자산에서 뜯어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부탁드릴게요 오라버니.”

“······ 좋다. 내가 도와주도록 하마.”

콘라드는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난생 처음으로 받는 여동생의 부탁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폐하께서도 시안이 어떤 인물인지는 자세히 아셔야하지 하지 않겠느냐.”

사랑스러운 딸이 시집 가고 싶다는데.

아비된 자로서 지갑을 열어야하지 않겠는가.

#

하늘을 뚫을 듯 치솟아 있는 나무들이 특징인 다크 엘프의 마을.

“아빠!”

그런 나무들 사이를 뚫고 저 멀리, 한 여인이 뛰어오고 있었다.

뜀박질에 맞춰 휘날리는 긴 흑발의 머리.

와락!

세라는 순식간에 달려와 아스란디즈의 품에 안겼다.

달려드는 세라의 힘에 못이겨 아스란디즈가 뒤로 주춤거렸다.

한때는 대륙 최강을 논했던 8위계(位界)의 대마법사.

그러나 지금은 모든 힘을 잃어버린 아스란디즈였다.

세라는 그런 아스란디즈의 품에 더욱 안겨들었고.

아스란디즈는 말없이 세라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침묵으로 행해지는 부녀의 상봉.

그러나 말보다 더 깊은 것이 있는 법이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일순간 아스란디즈의 고개가 시안을 향했다.

마주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에는 왜인지 투명한 무언가가 맺혀있었다.

“정말··· 정말 뭐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할지···.”

그리고 들려온 아스란디즈의 말.

심히 떨려오는 목소리에는 아스란디즈가 느끼는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괜시리 쑥스러워지는 이 기분.

“뭐···.”

시안은 멋쩍게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시안 좋아!”

와락!

일순간 아스란디즈의 품에 안겨있던 세라가 시안에게로 달려들었다.

역시 세라 또한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어쩌면 아스란디즈와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지금 아스란디즈와 다시 만났다는 것.

그건 시안이 힘을 써주었다는 것을 세라는 모르지 않은 것 같았다.

세라는 시안의 품에 안겨 얼굴을 부비적 거렸다.

그를 보다 못한 아스란디즈가 입을 열었다.

“세라, 말과 행동을 바로하거라. 새로운 숲지기님이시다.”

멈칫.

아니나 다를까 세라의 움직임이 뚝, 하고 멈추었다.

이윽고 파묻은 고개를 들어 시안을 한 번, 아스란디즈를 한 번.

그리고 다시 시안을 한 번.

마지막으로 아스란디즈를 다시 한 번 바라보더니.

“숲지기? 시안이?”

세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어왔다.

아스란디즈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간의 사정을 간략하게 말해주었다.

그렇게 짧은 이야기가 끝나고.

“그럼 우리 시안이 집으로 이사 가는거야?”

“그래. 앞으로 우리 다크 엘프들을 이끌어주실 숲지기님이시다.”

세라의 시선이 다시금 시안을 향했다.

코앞에서 보이는 세라의 모습.

그 모습은 참으로 엘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똘망똘망한 검은 눈동자.

검은 머리칼과는 달리 희다 못해 순백색의 피부.

솜털은 아이와 같이 뽀송했고, 피부로는 잡티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세라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난 좋아! 시안이 숲지기인 것도, 시안이 집으로 이사가는 것도.”

“세라, 숲지기님께 말과 행동을 바로 하라 하지 않았느냐.”

“움···.”

아스란디즈의 호통 아닌 호통에 세라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다 입을 한 번 비죽이더니.

“하지만 시안은 시안인걸.”

와락.

다시금 시안의 가슴께로 얼굴을 파묻어보였다.

“세라, 숲지기님께···.”

“괜찮습니다. 그냥 두세요.”

결국 보다 못한 시안이 아스란디즈를 막아섰다.

“하지만···.”

“그런 것에 딱히 신경쓰지 않으니 괘념치 마세요.”

시안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애초에 엘프들에게는 딱히 존칭이라는 없었다.

그저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만 있다면 그만.

무엇보다.

‘세라가 존칭을 쓴다면 그것도 좀···.’

솔직히 지금 아스란디즈가 존칭을 쓰는 것도 조금 어색했다.

여러모로 이 상태가 가장 적절했다.

“숲지기님께서 그러시다면···.”

그런 시안의 뜻에 아스란디즈는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럼 저는 다른 동족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겠습니다.”

그러면서 아스란디즈가 손가락으로 마을 한쪽 어귀를 가리켰다.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이동한 곳.

그곳엔 수많은 다크 엘프들이 웅성웅성, 모여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마다 호기심과 두려움이 반반 섞인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현재 상황에 대한 설명이 필요해보였다.

“그러시죠.”

시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퍼뜩, 떠오른 생각.

“아, 참. 혹시 다크 엘프들의 인구가 어느 정도 됩니까?”

“대략··· 1천명 정도 될 겁니다.”

“1천명이라···.”

시안은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기를 두들겼다.

‘영지 구역 하나를 확장하는데 1백만 골드. 1천명이면 2개 정도 확장해야하려나?’

그리고 확장을 했으면 관련 시설들을 지어야할 터.

‘Lv.4 짜리 집 10채당 10만 골드니까, 그럼 1채당 4인을 수용한다 했을 때. 1천명의 집값이 2백 50만···.”

여기에 확장된 구역에 도로도 깔아야해고.

늘어난 인구만큼 제반 시설도 새로 지어야하고···.

‘······ 이런 젠장.’

수 백만 골드는 염병.

1천 만 골드는 족히 넘을 것 같았다.

정말 한숨밖에 안나오는 현질 금액.

띠링!

《진행을 하다 막혔을 땐, 현질을 해보세요!》

“······”

시안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혀버렸다.

밑 빠진 독은 개뿔.

밑이 박살난 독에 돈을 들이 부어도 이 정도는 아닐 터였다.

‘황녀님이 2천만 골드를 뜯어내겠··· 아니, 주신다고 했지만···.’

그게 가능할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가능하기는 개뿔.

사지를 찢으려 들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설마하니 정말로 사지를 찢겠냐만은.

2천만 골드는 그래도 팔 하나 정도는 찢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금액이었다.

‘하아···.’

한 마디로 엘레나만 믿고 있을 수는 없었다.

엘레나가 아니더라도 골드를 구할 구석을 마련해야만 했다.

‘그런데 저 많은 돈을 대체 어디서 구하냐─ 아?!’

그 순간, 시안의 머릿속을 스치는 한 가지 생각.

시안을 천천히 시선을 돌려 아스란디즈를 바라봤다.

아스란디즈는 다크 엘프들에게 지금까지의 사정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행히 다크 엘프들은 거부감을 갖지 않았다.

시안이 새로운 숲지기가 된 것.

그리고 루벤으로 터전을 옮겨야 된다는 것.

이 두 가지 사실에 반감을 갖지 않았다.

아니, 반감은 커녕 되려 반기고 또 시안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시안은 그런 아스란디즈에게 다가가 물었다.

“혹시 언제쯤 떠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것이··· 아무래도 준비를 좀 해야할 것 같습니다.”

아스란디즈는 난처한 기색으로 답을 해왔다.

그도 그럴 것이 평생을 살아온 터전을 옮긴다는 것.

그것은 한순간에 할 수 있는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하물며 1천명에 달하는 대규모 인원이라면 더더욱.

이들도 나름의 준비가 필요했다.

“마침 잘 되었네요.”

시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잠깐 할 일이 있어서요. 다크 엘프들의 이주 준비를 맡겨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아스란디즈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다크 엘프들을 이끌던 숲지기, 아스란디즈.

그런 아스란디즈라면 시안이 없어도 잘 해줄 터였다.

그렇게 말을 마친 시안은 곧장 발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런 시안의 모습에 세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어왔다.

“어디 가?”

“돈 벌러.”

“돈?”

시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걸까.

세라의 고개가 다시 반대편으로 기울어졌다.

시안은 별 다른 설명 없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세라는 이주를 준비하는 다크 엘프들.

그리고 다크 엘프 마을을 떠나는 시안의 모습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렇게 몇 번을 번갈아 바라봤을까.

“나도 갈래.”

세라는 시안의 뒤를 졸졸 따라붙었다.

#

루벤에서 상인으로 활약하며, 현재는 루벤 브라헤 상단의 상단주인 아멜리아.

“아? 아아?”

아멜리아는 지금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지.

또 왜 이렇게 된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눈앞에 펼쳐진 상황.

아니, 펼쳐지고 있는 상황.

“이게 며칠만에 먹는 음식인지···!”

“차디찬 북부에서 이렇게 부드러운 빵을 먹을 수 있다니···.”

“게다가 엄청 마, 맛있어···!!”

헐벗고 굶주린 북부의 사람들이 아멜리아가 가져온 음식들을 먹는 한 편.

“상처가 자꾸 곪아서 걱정이었는데···.”

“세, 세상에나 바르자마자 상처가 아물기 시작한다고?”

“이 치료약의 효과가 엄청나잖아···?”

부상자들은 갖가지 아멜리아가 가져온 치료 물품들로 치료를 받고 있었다.

물론 이 상황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저기.

“자자,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것이 아니다! 루벤 특산품 특가 세일! 물품들이 모두 공짜?!”

사람들 앞에서 판촉을 하고 있는 시안.

“필요한 물품이 있으면 원하는 만큼 가져가시라! 값은 전부 황가에서 뜯어낼··· 아니, 음··· 아무튼 공짜!”

아멜리아는 시안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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