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질하는 영주님!-134화 (134/322)

§ 134화 - 알현

알현실의 문으로 한 존재가 걸어들어왔다.

존재만으로도 위엄과 기품이 느껴지는 아우라.

별 다른 기세가 없음에도 괜시리 위축이 되는.

옆에 있는 황태자 콘라드가 중년을 넘어선다면 딱 저러한 모습일까.

인자하면서도 내면의 카리스마가 돋보이는 존재.

다름 아닌 샤를롯 제국의 1인자.

황제, 발루아가 폰 샤를롯.

시안은 발루아가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여보였다.

“루벤의 영주, 시안. 지엄하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황태자, 콘라드. 지엄하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시안과 더불어 콘라드 또한 깊이 고개를 숙여보였다.

비록 콘라드가 발루아가의 아들이라고는 하나 이곳은 알현실이었다.

사적인 자리였으면 모르겠으나.

공적인 업무가 오가는 알현실에서는 마땅히 그 예를 다해야만 했다.

발루아가는 성큼, 알현실을 가로질렀다.

그리고는 가장 상석, 황좌에 앉으며 말했다.

“고개를 들라.”

시안은 그때서야 고개를 들었다.

지난, 건국일 행사 당시는 물론.

지금 알현실에 들어오면서 얼핏 보기는 했다만.

발루아가는 말 그대로 황제였다.

위엄과 기품이 느껴지는 압도적인 카리스마.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괜히 위축이 되는 무형의 아우라가 있었다.

시안은 그동안 발루아가를 마주한 적이 없었다.

정확히는 이렇게 직접적으로 알현을 한 적이 없었다.

처음 마주하는 발루아가의 모습이었고.

그렇기에 처음 알현하는 발루아가였다.

“뭐하고 있나?”

멀뚱히 서있는 시안의 모습에 발루아가의 물음이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제가 아직 몸이 성치 않아, 통증을 참고 있었습니다.”

발루아가는 고개를 한 번 끄덕여보였다.

북부의 사정을 모두 알고 있는 발루아가.

시안이 어떤 일을 했고, 또 어떤 상태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주 큰 일을 해주었다. 네가 아니었으면 북부의 백성들은 물론 제국이 큰 곤욕을 치를 뻔 했어.”

그 때문인지 발루아가의 분위기는 더없이 따뜻했다.

압도적인 위엄과 카리스마가 느껴지기는 하나.

그것이 적대적이지 않으니 든든하게 여겨질 뿐이었다.

시안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저 혼자 한 것이 아닙니다. 변경백 각하는 물론, 파나트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하하하. 내 보고 들은 것이 있음에도 그런 말이라···.”

발루아가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시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변경백이 아주 극찬을 하더군. 내 평생 그 곰같은 변경백이 누군가를 칭찬하는 건 처음봤어. 새로운 제국의 별이라는 말까지 꺼내더군.”

응?

시안은 저도 모르게 고개가 약간 기울어졌다.

“심지어 로르실트의 자제까지 자네를 인정할 줄은···. 엘란두르와 으르렁 거리기 바쁜 로르실트가 말이야.”

그리고 다시 이어진 발루아가의 말.

시안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었다.

정확히는 발루아가가 무슨 말을 들은 건가 싶었다.

아무래도 시안이 기절해있던 3주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던 것 같았다.

“그래, 짐에게 할 말이 있다 했었지.”

발루아가는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시안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소신. 불경하오나 한 가지 청이 있어 이렇게 알현을 요청드렸습니다.”

“무엇이든 말하라. 내 가능한 선에서 무엇이든 들어주도록 하지.”

발루아가는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정말 무엇이든지 들어줄 요량이었다.

대체 오슬리가 무슨 말을 한 걸까.

그리고 파나트는 또 무슨 말을 한거고.

둘이 무슨 말을 했길래 황제가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음···.’

잠시 멍해지는 정신.

“단.”

그 사이로 발루아가의 말이 다시 들려왔다.

“다크 엘프의 숲지기를 용서해달라는 청은 들어줄 수 없다.”

그건 차디찬 냉기와도 같은 말투였다.

살짝 고개를 들어 바라본 시야.

방금 전 보였던 따뜻한 분위기는 온데간데 없었다.

유했던 눈빛은 날카롭게 변해있었으며.

제왕으로서의 위엄이 시안을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만지면 베어버릴 것만 같은 칼날 같은 분위기.

그 서늘한 분위기가 알현실 전체로 퍼져나갔다.

급변하는 분위기에 시안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설득이라고는 전혀 통하지 않을 틈조차 보이지 않는 단호함.

이에 황태자, 콘라드가 나서며 말했다.

“폐하. 허나, 숲지기가 저지른 일이 아닙니다. 그는 되려 동족의 과오를 덮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비록 다크 엘프의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나, 자비를 베풀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발루아가의 시선이 콘라드에게 향한다.

그리고 그 시선은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이 아니었다.

제국의 1인자.

황제, 발루아가.

“군주의 자리가 그리 쉬워보였더냐.”

발루아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비는 군주가 갖추어야할 미덕이다. 백성들을 기만하고, 다른 이들을 배신하고, 농락하고, 냉혹히 대하는 것. 군주는 이런 식으로 제왕이 될 수 있으나, 결코 영광은 얻을 수 없는 법이니.”

바라보는 시선.

“그런 의미로 콘라드. 너는 참으로 자비로운 군주이며, 영광스러운 군주가 될 자질을 갖추고 있다 볼 수 있지.”

허나.

“자비는 어디까지나 ‘미덕’일 뿐이다.”

발루아가는 계속 말을 이었다.

“군주는 선하기만 해서는 안된다. 원한이 자비로운 은혜를 베풂으로써 깨끗이 씻어진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군주는 필요하다면 악(惡)이 될 줄도 알아야 한다.”

사실만 따지고 보면 다크 엘프들은 죄인이다.

만일 그들을 용서한다면.

희생된 북부인들의 아픔은 누가 대변해준단 말인가.

그리고 발루아가는 그런 북부인들의 황제다.

제국민들 전체를 보살피는 군주다.

“그리고 다크 엘프의 숲지기는 다크 엘프들의 군주다. 백성들이 저지른 과오는 마땅히 군주의 책임인 법. 콘라드, 언젠가 네가 이 자리에 앉게 되었을 때.”

발루아가는 콘라드를 바라보며 나지막히 말을 내뱉었다.

“오늘의 일을 떠올리며 군주로서의 책임감을 잊지 말거라.”

“······”

콘라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목구멍에서 말이 틀어막힌 것처럼 콘라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끝내 시선을 내리며 뒤로 물러날 뿐.

발루아가의 시선이 다시금 시안에게 향했다.

“알현을 청한 이유를 말하라.”

그리고 내뱉어진 발루아가의 말.

그곳엔 싸늘함이 사라졌으나 제왕의 위엄이 깃들어 있었다.

시안은 살짝, 시선을 내려보였다.

북부의 제국민들을 위험에 빠뜨린 죄인.

발루아가는 다크 엘프의 숲지기, 아스란디즈를 용서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리고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다.

콘라드가 발루아가를 설득하지 못했다는 것에서 짐작하고 있었다.

비록 시안은 군주는 아니었다.

군주라 부를 수도, 불러서도 안되었다.

루벤의 영주.

어둠의 숲에 자리한 변방의 영지를 책임지는 한낱 영주였으니 말이다.

반면에 발루아가는 황제다.

샤를롯 제국 전체를 관할하는 제국의 1인자.

시안은 감히 군주라는 것에 논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비록 발루아가와는 비견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책임자’라는 것에, ‘책임’이라는 것에.

시안은 깨닫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발루아가의 심정을 이해했고.

그렇기에 시안은 처음부터 아스란디즈를 용서해달라 할 생각이 없었다.

그저.

“숲지기와 함께 소신을 같이 처벌해주십시오.”

아스란디즈의 죄를, 다크 엘프들의 죄를 끌어안고 갈 생각이었다.

“······ 뭐라?”

시안의 말에 발루아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금··· 무슨 말을···?”

콘라드 또한 상당히 놀란 기색으로 시안을 바라봤다.

시안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히 시선을 내린 채, 발루아가의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아래로 향한 시선에 발루아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시안은 자신을 향한 제왕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내려앉는 침묵.

“숲지기와 같이 처벌해달라?”

조금의 시간이 지나 적막을 깨고 발루아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냐.”

발루아가의 물음에 시안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바라본 발루아가의 표정엔 의문과 약간의 당황.

그 두 가지 감정이 깃들어있었다.

시안은 다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방금 전, 폐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내가 했던 말?”

시안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외람되오나, 소신은 작은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입니다.”

발루아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루벤이라는 영지.

시안이 그 영지의 영주라는 것을 들은 바 있었으니 말이다.

“헌데?”

“제가 감히 폐하와 전하와 같은 군주의 덕목을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허나, 영주 또한 한 명의 책임자라고는 생각합니다.”

발루아가는 이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정도와 규모의 차이가 있을 뿐.

영주라는 직책 또한 영지 내의 군주와 다름 없었으니 말이다.

“하여, 영지민이 저지른 죄는 마땅히 영주가 끌어안고 가야할 문제라 생각한 것 뿐입니다.”

하지만 이어진 시안의 말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말 자체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허나, 저것이 숲지기와 시안을 동시에 처벌해야할 이유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발루아가의 의문을 알고 있는 것일까.

시안이 재차 말을 이었다.

“아스란디즈와 다크 엘프들은, 루벤의 영지민입니다.”

“뭐라?”

“자네, 그게 무슨···!”

발루아가와 콘라드가 동시에 놀라 소리쳤다.

황제와 황태자가 같이 놀라는 진귀한 광경.

어디가서 이런 광경을 볼 수 있겠냐 싶은 생각이 잠깐 들었다.

그리고 뭐···.

저렇게 놀라는 이유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다크 엘프가 루벤의 영지민이라는 것.

그건 금시초문이었으니까.

당연히 시안도 금시초문이었다.

다크 엘프들의 동의를 얻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생각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그러고 싶었다.

물론 이렇게 말해놓고 정작 다크 엘프들이 ‘응? 우리 루벤의 영지민 아닌데.’  이래 버리면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한 마디로 그냥 저질러 놓고 보는 형식이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알고 말하는 것이냐.”

이윽고 들려온 발루아가의 말.

시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다크 엘크의 의견도 묻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발루아가의 결정이었다.

만일 발루아가가 ‘좋다. 네 청을 들어주지.’ 이러면서 같이 처벌해버리면 진짜 할 말이 없었다.

그렇기에 솔직히 시안으로서도 도박수였으나.

마냥 도박은 아니었다.

그래도 믿는 구석이 없지는 않았으니까.

“의미를 잘 알고 있습니다.”

시안은 시선을 살짝, 내린 채로 발루아가의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런 시안을 바라보던 발루아가.

발루아가는 정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난감··· 했으니 말이다.

물론 다크 엘프들에게 죄를 묻고자 함에 변함은 없었다.

그리고 만일 시안이 그들의 영주라면.

시안에게 또한 죄를 물어야 했다.

아스란디즈를 처벌하고자 하는 명분이 그것이었으니까.

아스란디즈는 숲지기이자, 다크 엘프들의 군주.

다크 엘프들의 죄를 아스란디즈에게 물으려 했던 것이니 말이다.

헌데 시안이 그들의 영주라면 같은 이치로 시안을 처벌해야만 한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시안은 북부의 사태를 해결한 최고의 공로자라는 것이었다.

변경백은 물론, 로르실트의 파나트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새로운 제국의 별이라는 말까지 언급할 정도였다.

그리고 보고를 듣자하니···.

사실 북부의 위기는 시안 혼자 해결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말 그대로 최고의 공로자다.

그런 최고의 공로자를 처벌한다?

이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란 말인가.

논공행상은 확실해야한다.

이 또한 군주로서의 덕목이었으니.

죄는 확실하게 벌하고.

공은 확실하게 치하한다.

헌데 죄인을 처벌하자니 공로자도 처벌해야하고.

그렇다고 처벌을 안 하자니, 뭐 어찌할 수가 없고.

“......”

발루아가는 정말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숲지기에게 내려진 형벌은 참형이다. 그래도 같이 처벌을 받겠단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시안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말의 주저함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영주로서의 책임을 다하겠다는 듯.

당돌하면서도 날카로운 패기가 엿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사뭇, 군주의 위엄과도 닮아있었다.

발루아가는 시안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무언의 기세가 터져나오며 알현실의 공기를 무겁게 짓누른다.

시안은 아무런 말도, 반응도 내보이지 않았다.

콘라드는 살짝 당황한 얼굴로 상황을 지켜봤다.

그렇게 얼마 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하.”

발루아가의 실소가 새어나왔다.

“엘란두르의 망나니라더니.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 되는군.”

발루아가의 말이 이어졌다.

“아무리 그래도 숲지기의 죄를 용서하지 않는다.”

“하오나, 폐하···.”

콘라드가 나서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발루아가는 손을 들어보이며 콘라드의 말을 끊었다.

“허나. 그렇다고 새로운 제국의 별을 참형할 수도 없는 노릇.”

발루아가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숲지기의 죄를 적당히 감형해주겠다.”

시안은 그때서야 고개를 깊이 숙이며 말을 내뱉었다.

“폐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그러자 발루아가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은혜라··· 네 손바닥에서 놀아나 준 것도 은혜라면 은혜겠군.”

시안은 아무런 말도 내보이지 않았고.

발루아가 또한 그에 관해 딱히 더 물어오지는 않았다.

그리고 다시 이어진 발루아가의 말.

“해서. 청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전부인가?”

시안은 숙인 고개를 들어보였고.

발루아가는 그런 시안에게 말했다.

“숲지기의 죄를 감형해주긴 했으나, 그것만으로는 북부의 사건을 해결한 최고의 공로를 치하할 수는 없지.”

역시 황제는 황제고.

제왕은 제왕이라는 것일까.

“더 청할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말하라.”

정말 배포가 남달랐다.

뭐··· 다른 이들이라면.

‘아니옵니다. 이미 베풀어주신 은혜로 만족하옵니다.’ 라며 겸양을 떨었을 터.

하지만 이미 강짜를 부린대로 부린 거.

여기서 더 부려도 달라질게 뭐가 있을까.

시안은 망설임 없이 곧바로 말했다.

“무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리오나, 가능하다면 골드를 좀··· 받을 수 있겠습니까.”

“골드? 원하는 게 돈이란 말인가?”

시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소신은 한 영지의 영주입니다. 그런데 영지를 운영하는데 보통 자금이 들어가는게 아닌지라··· 게다가 이번 북부로 파병가며 이것저것 차출하는 바람에 재정에 타격이 심각합니다.”

발루아가는 뭐 대수로운 부탁이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황실 재무관에게 말해두도록 하지. 재무관과 상의하여 받아가도록.”

제국 전역을 관할하는 황실의 재정은 그야말로 마르지 않는 바다와 같았으니.

그깟 골드 몇 푼쯤.

공로를 치하하는 것으로 주는 것은 얼마든지 알 수 있었다.

되려 무리한 부탁보다는 골드로 끝내는 게 더 깔끔했다.

그런데.

“폐하!”

콘라드는 그렇지 않아보였다.

콘라드는 기겁을 하며 나서보였다.

별 다른 이유는 없었다.

“재무관에게 맡겨서는 안 되옵니다!”

콘라드는 알고 있었으니까!

일순간 시안의 시선이 콘라드에게 향했다.

그러나 콘라드는 애써 외면했다.

물론 콘라드가 시안을 도와주겠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이건 아니었다.

이런 식은 아니었다.

발루아가는 모르기에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폐하께서 보상 금액을 확실히 정해두셔야 함이 옳다 생각합니다!”

자칫 잘못하다간 정말 황궁의 기둥이 뽑혀갈 수도 있었다!

콘라드는 필사적으로 발루아가를 말렸다.

하지만 발루아가는 콘라드의 말을 듣지 않았다.

“대신 그에 대해서는 조건이 있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을 내걸 뿐.

“폐하. 불경을 무릅쓰고 말씀드리오나, 조건 같은 것을 내걸 문제가 아니옵니다!”

그럼에도 콘라드는 필사적으로 말렸다.

무슨 조건이든, 나발이든.

시안에게 맡겨서는 안된다!

발루아가를 향한 콘라드의 입이 다시 한 번 크게 벌어졌다.

하지만.

“그간 황태자가 쓸데 없는 말을 한다고 생각했건만.”

이어진 발루아가의 말.

“엘레나와 한 번 만나보거라.”

나서려던 콘라드의 입이 꾹, 하니 다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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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현을 마친 시안은 곧장 아스란디즈를 만나러갔다.

엘레나와 만나보라는 발루아가의 말이 있었지만.

엘레나는 잠시 자리를 비운 상황이었다.

해서 가만히 기다리기도 뭐할 겸.

그 전에 아스란디즈를 만나고자 시안은 발걸음을 돌렸다.

아스란디즈는 다름 아닌 황궁의 감옥에 갇혀있었다.

정확히는 황궁이 아닌 황궁에서 관하는 감옥.

알트라즈(Altraz)라는 수용소였다.

제국의 가장 흉악한 범죄자들만이 수용되는 감옥.

주로 반역을 비롯한 제국의 전반적인 안녕과 관련된 범죄.

혹은 차마 상상도 못할 끔찍한 흉악한 범죄.

그런 종류의 범죄를 저지를 이들만이 수용되는 제국 최악의 감옥이었다.

당연히 보안과 방비는 철통과 다름 없었다.

애초에 간수장이 무려 로열 나이츠의 단장이었으니.

마스터의 기사가 간수장인 것부터 말 다한 셈이었다.

그렇기에 범죄자가 아니더라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신원 확인되었습니다. 들어가십시오.”

하지만 시안은 별 다른 제지를 받지 않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무려 황제의 허락을 받은 상황.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제가 동반하겠습니다.”

제지는 커녕 간수장의 호위를 받을 수 있었다.

“아, 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 죄인이 있는 곳까지만 안내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시안은 간수장의 호위를 정중히 거절했고.

간수장은 별 다른 말을 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사실 황제의 허락이라는 것에 간수장이 나섰을 뿐.

마스터의 기사가 나설 이유는 없었다.

또한 말 그대로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는 것일 뿐.

이곳 알트라즈의 모든 곳은 철저한 감시 하에 놓여져 있었다.

떠나가는 간수장을 뒤로하고 시안은 아스란디즈가 감금되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알트라즈의 감옥은 내부가 어두컴컴하거나, 더럽거나.

흔히 지하 감옥하면 상상하는 이미지는 아니었다.

조금의 과정을 섞어서 일반적인 가정집의 느낌.

흉악한 범죄자들이 수용되는 공간이기는 하나.

한편으로는 로열 나이츠들이 머무는 공간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물론 정작 범죄자들이 머무는 공간은 칙칙한 감옥이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걸었을까.

“이쪽입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간수장은 시안을 한 감옥 안으로 안내한 뒤 다시 걸음을 옮겨 떠나갔다.

시안은 떠나는 간수장의 뒷모습을 바라본 뒤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칙칙한 분위기와 더불어 묘한 마력이 느껴지는 감옥.

숨이 답답해지는 것이 아무래도 마력을 억누르는 장치가 있는 것 같았다.

보아하니 마법을 사용하는 범죄자들을 전용 감옥인 듯 싶었다.

그런 감옥 안 쪽에 축, 늘어진 한 존재가 앉아있었다.

벽에 박혀 이어진 사슬에 묶여있는 모습.

흑발의 머리는 산발이 되어 떡이져있었고.

얼굴을 가리워 아스란디즈인지 아닌지 정확한 확인이 불가했다.

하지만 옆으로 보이는 뾰족한 두 귀는 엘프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시안은 천천히 감옥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느껴지는 인기척에 아스란디즈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초췌한 모습.

“······ 너는?”

시안을 발견한 아스란디즈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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