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화 - 극한[極限]의 일순간
번뜩이는 아스란디즈의 안광이 시안에게 향한다.
꽈드드드득!
시안을 옭죄어오는 손아귀 힘이 거세졌다.
숨이 턱, 막히며 시안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정신이 아득해지며 의식이 저만치 멀어진다.
그 순간.
쐐애애애액!
칠흑의 오러블레이드가 아스란디즈에게 날아들었다.
그 사이로 번뜩이는 짙푸른 안광.
아스란디즈의 모습이 일순간 사라졌다.
털썩.
사라진 아스란디즈와 함께 시안의 몸이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쿨럭 쿨럭!”
옥죄어오던 숨통이 트이며 기침이 토해진다.
복부를 틀어막고 있던 마기가 약해지며 피가 쏟아져내렸다.
-주군!
켄드릭이 다가와 황급히 마기를 끌어올렸다.
피어나는 마기가 뚫린 복부를 틀어막았다.
그러나 새어나오는 피를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조금 떨어진 공간에서 모습을 드러낸 아스란디즈.
아스란디즈가 붉은 광채를 발하며 주변을 훑어보았다.
아스란디즈의 전신으로 형용할 수 없는 악의가 피어오른다.
드리운 마기를 몰아내며 세상을 새빨갛게 물들인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깨달을 수 있었다.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다이슨과는 다르다.
다이슨 또한 인스티즈에 먹혀 광기의 힘을 사용했다.
그러나 가진 바 역량으로 인스티즈에 깃든 힘을 온전히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스란디즈는 아니었다.
8위계(位界)에 닿은 대마법사.
아스란디즈는 인스티즈가 가진 모든 힘을 끌어내고 있었고.
그 힘을 기반으로 가진 역량을 뛰어넘었다.
아니, 뛰어넘은 수준이 아니었다.
9위계(位界).
그랜드 마스터(Grand Master)와 마찬가지로 존재가 닿을 수 있는 궁극의 영역이라 불리는 경지.
아스란디즈는 가진 바 역량을 초월했다.
경지로는 9위계였다.
그러나 그 경지를 뒷받침하는 힘은, 다름 아닌 엘로디의 힘이었다.
기나긴 대륙의 역사상 단 6명만이 닿은 전설의 경지, 엑시드(Exceed).
아스란디즈는 지금 이 순간.
엑시드의 힘을 사용하는 9위계(位界)의 마법사.
최악, 최흉의 악(惡)이었다.
“마, 마, 말도 안돼···!”
파나트의 입이 쩌억, 벌어지며 경악으로 물든다.
비단 파나트 뿐만 아니라 오슬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아스란디즈의 힘을, 경지를 느낄 수 있었으니까.
아스란디즈는 지금.
대륙 최강의 존재라 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콰르르르르릉···!!
공간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지독한 가뭄에 땅이 메마르듯, 공간 자체가 메마르며 쩌저적─!
거미줄과 같은 균열이 사방으로 새겨졌다.
공간 전체에서 기묘함과 위화감이 묻어나온다.
타닥!
그 사이로 한 존재가 달려든다.
검푸른 안광을 일렁이는 데스 나이트, 켄드릭.
마스터 상급의 실력자이자.
현재 <뮤리엘의 축복>으로 가진 바 능력이 +450%가 된 켄드릭.
켄드릭은 이 자리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이자.
아스란디즈에 대적 가능한 유일한 절대적인 존재라 할 수 있었다.
켄드릭의 검이 어둠처럼 쇄도해갔다.
칠흑의 오러 블레이드가 맹렬히 타오른다.
아스란디즈는 움직이지 않았다.
가만히 손을 들어, 마력을 폭사시킨다.
꽈릉, 꽈르르릉···!
뇌명이 터져나왔다. 아스란디즈의 전신에서 붉은 마력의 번개가 파지직, 튀어올랐다.
켄드릭의 전신으로 짙은 어둠이 피어올랐다.
공간이 한 번 어둠으로 물들었고.
그 이후에는 다시 시뻘겋게 물들었다.
무수히 많은 마력의 번개가 켄드릭의 어둠을 유린했다.
꽈꽈꽈꽈꽝─!
셀 수도 없이 많은 뇌전들이 켄드릭에게 쇄도했다.
켄드릭은 검을 휘두르며 뇌전을 베어냈지면 끝내 몸이 주륵, 뒤로 밀려났다.
켄드릭의 안광이 당황으로 짙어진다.
켄드릭은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실로 초월적인 힘.
이건, 어찌 감당할 수 있는 힘과 수준이 아니다.
과거, 전대 주군의 동료들에게서 보였던 힘.
비록 그보다는 얄팍하나, 그 경지에 분명 한 발 걸쳐있다.
-주군···! 도망··· 치십시오···!
켄드릭의 입에서 끝내 이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순간에도 수 천의 벼락이 켄드릭을 덮어왔다.
파지지직─!
끝내 일격을 허용한 켄드릭의 갑옷이 번개로 번쩍거렸다.
드리운 어둠이 흩어지며 켄드릭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
“······!!”
“······!!”
숨길 수 없는 경악이 내려앉는다.
아스란디즈가 차분히 발걸음을 내딛으며 재차 마력을 끌어올린다.
터벅, 아스란디즈가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붉은 마력의 세계가 넘실거렸다.
공간이 깨지며 피로 물든 지옥도가 펼쳐진다.
다크 엘프이지만 도저히 다크 엘프라 생각할 수 없는.
아스란디즈는 괴물이자, 세상의 종언.
최흉의 악마(惡魔)라 불러도 모자람이 없었다.
“아아···.”
“이럴 수는··· 이럴 수는 없어···.”
사람들이 저마다 절망에 빠져 소리쳤다.
투지가 꺾이며 마음이 죽어간다.
끝내 자리에 주저앉으며, 가진 바 무기를 땡그렁 떨구었다.
그 어떠한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생각을 떠올릴 수조차 없었다.
그렇기에 반항할 생각이 들지 않는다.
저항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저 경이로운 힘에, 저 끔찍한 악의에.
감히 대적할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그 모든 풍경을 가로지르며 절대적인 존재, 아스란디즈가 나지막히 입을 열었다.
【“우리 다크 엘프들은, 어둠 속에서 태어났다.”】
짙은 흑발의 다크 엘프.
【“세상의 모든 이들이··· 우리를 악마라고 불렀지.”】
그러나 지금은 끝없는 악의가 느껴지는 악(惡)의 존재.
【“슬픔··· 절망··· 불안··· 혼돈··· 나는 다크 엘프의 숲지기로서 모든 것을 감내해야만했다. 반복되고, 반복되는 운명을···.”】
아스란디즈의 시선이 정면을 향한다.
【“이제··· 그 망가진 운명의 고리를 끊겠다. 오로지 존재의 죽음으로써···.”】
번뜩이는 붉은 안광.
【“너희들은··· 날 막지 못 하리라.”】
아스란디즈가 인스티즈를 앞으로 내밀었다.
뒤틀어진 공간으로 심연의 세계가 펼쳐진다.
마경이 열린다. 심연이 번진다.
현상 세계의 일부분에 부정과 심연의 세계가 겹쳐 존재한다.
세상의 모든 것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보랏빛 하늘, 연두빛 태양.
그리고 붉디 붉은 대지.
오감의 현실이 뒤집어지며 현상 세계의 법칙이 뒤흔들린다.
지상의 색이 사라지고, 하늘의 색이 소멸한다.
그림자가 형체를 갖춰 일어난다.
온갖 종류의 마물들이 형상을 갖추며 눈동자가 번뜩인다.
드리운 지상의 풍경에 아찔한 괴성을 내질렀다.
온 사방이, 존재의 향연이라.
살의와 악의, 절망과 공포.
혼돈, 슬픔, 좌절, 광기···.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부정의 감정들이 덩어리 지어져 끓어오른다.
그리하여 떠오르는 하나의 결말, 죽음(死).
죽는다.
여기서 모두 끝이다.
사람들의 마음은 죽어갔다.
살아남을 수 있는,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저 절대적인 존재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더더욱 없다.
끝이다.
여기서 모두 죽는다.
이것은 불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사실이자 진실.
바꿀 수 없는, 결말.
그런데···.
대체 어째서일까.
비적비적.
모두 절망에 주저앉은 풍경 사이로 한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머리는 피로 물들어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사이사이로 비치는 금빛만이 금발이었음을 시사하고 있었다.
뚫려있는 복부에선 왈칵, 피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만신창이가 되어있는 몸은 당장이라도 까무러칠 듯 해보였다.
일어나는 것도 힘겨운지, 검을 바닥에 꽂아 겨우겨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루벤의 영주, 시안.
시안이 가만히 시선을 들었다.
귀에는 짙은 이명이 들려온다.
잡음은 들려오지 않는다.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고.
아무것도 시야에 보이지 않는다.
시안은 차분히 몸 상태를 확인하다 피식, 웃음을 흘렸다.
확인이 의미가 있을까.
만신창이라는 말로도 부족했으니, 지금 서 있는 것조차 한계였다.
그래, 한계.
여기까지가 시안이 할 수 있는 한계였다.
광기의 야만족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
다이슨 또한 홀로 대적할 수 없었다.
그래서 켄드릭과 루벤 기사단의 힘을 빌렸고.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해 다이슨을 대적해야만 했다.
지금 여기까지가.
시안이 가진 바 능력이자, 할 수 있는 한계였다.
그리고 지금 눈앞의 아스란디즈.
아스란디즈는 한계가 없어보였다.
엘로디의 힘을 사용하는 9위계(位界)의 대마법사.
최악, 최흉의 악(惡)에 대적할 방법이 없다.
시안이 가진 바 한계로는 절대로 아스란디즈를 대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시안은 검을 움켜잡았다.
검을 쥔 손이 파르르, 떨려온다.
몸을 지탱하는 다리는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후들후들, 거린다.
그럼에도 시안은 마음을 다 잡았다.
한 번.
단 한 번뿐이다.
제대로 검을 휘두를 수 있는 것은, 한 번이 마지막이다.
그 이후엔 몸을 움직일 수 없으리라.
그러니···.
시안은 꽈득, 움켜쥐었다.
“불가능해··· 불가능한 일이야···.”
그 사이로 파나트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현상을 분석하고 이해하여 법칙을 다루는 마법사.
파나트는 그런 마법사들 중에서도 제국의 별이라 불리는 천재였다.
그런 파나트가 불가능이라 정의한 현상.
그러나 시안은 신경쓰지 않는다.
마법사들의 복잡한 이론 따위는 모른다.
마법사들이 정의하는 법칙 따위는 모른다.
시안은 기사다.
세계의 법칙 따위는 무시해버리는 기사.
시안은 모든 시선을 도외시하며 품 속에서 스마트 폰을 꺼내들었다.
아까 전, <뮤리엘의 축복>을 강화 현질할 당시.
무려 5만 포인트에 달하는 명성을 모두 <뮤리엘의 축복>에 투자했을 당시.
그리하여 +5의 강화 효과를 얻었을 당시.
지난 번과 마찬가지로 <뮤리엘의 축복>의 새로운 기능을 사용할 수 있었다.
《지속 시간 동안 단 한 번. 선택한 효과의 종류를 변경할 수 있습니다!》
《지속 시간은 소모된 비율에 따라 차감 적용됩니다!》
.
.
다름 아닌 [효과 1]과 [효과 2].
<뮤리엘의 축복이>이 유지되는 한, 효과를 한 번 변경할 수 있었다.
『《뮤리엘의 축복》
[강화 효과 1](+5) - 1분 간, 업적 보유자의 모든 신체 능력이 +7,000% 상승합니다!
[강화 효과 2](+5) - 반경 100미터 지정 범위 내, 모든 아군의 신체 능력이 10분 간 +450% 상승합니다!
《[강화 효과 1]과 [강화 효과 2]는 중복해서 사용할 수 없습니다!》
《[효과 2]의 남은 지속 시간 (2분 18초)》』
.
.
《효과를 변경하시겠습니까?》
《효과 변경 시, 재시전까지 다시 변경할 수 없습니다.》
100시간에 한 번 재시전이 가능한 <뮤리엘의 축복>.
한 번 변경하면 100시간 후에나 다시 사용할 수 있었다.
시안은 망설임 없이 Y버튼을 눌렀다.
꾹.
《뮤리엘의 축복 [효과 2]가 [효과 1]로 변경되었습니다!》
《업적 보유자의 모든 신체 능력이 +7,000% 상승합니다!》
《지속 시간은 [효과 2]의 남은 시간에 비례하여 차감됩니다!》
《[효과 1]의 남은 지속 시간 (16초)》
화아아아아악!
효과 변경과 함께 시안의 전신에서 환한 빛무리가 터져나왔다.
뮤리엘의 신성.
시안은 전신으로 차오르는 어마어마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미약하다.
루슈리아를 대적할 때 느꼈던 뮤리엘의 신성에 비해.
그리고 지금, 저기 절대적인 악(惡) 아스란디즈에 비해.
그러나 해야한다.
사아아아악─!
일순간 시안의 전신이 어둠으로 화했다.
번져나가는 마경을 비집으며, 시안은 아스란디즈에게로 달려들었다.
증폭된 신체 능력에 어둠은 마치 검은 섬광과도 같았다.
아스란디즈의 시선이 이쪽을 향한다.
천천히 손을 뻗으며 끔찍한 마력이 폭사한다.
덮쳐오는 마력을 마주하며 시안은 생각했다.
단 한 번.
두 번의 기회는 없다.
뮤리엘의 축복을 받았어도 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이 한 번에 모든 것을 건다고 한들, 아스란디즈를 쓰러뜨릴 수 없다.
뮤리엘의 축복이 있어도 소용없었다.
지난 날, <뮤리엘의 기적 - 신화>에 비하면 한없이 초라했으니 말이다.
기적은 기적이었고.
신화는 신화였을 뿐이다.
현실에 기적과 신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독한 마경만이 번지고 있을 뿐.
꽈드드득!
시안은 검을 부서져라 움켜쥐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더한다.
시안은 변경된 효과에 한 가지 추가 기능을 덧붙였다.
지난 날, 시안이 처음 <뮤리엘의 축복>을 강화했을 당시.
시안은 이러한 기능을 추가로 얻은 적이 있었다.
《이제부터 축복의 효과 지속 시간을 조절하여, 증폭되는 수치를 상승시킬 수 있습니다!》
축복의 지속 시간을 줄여 증폭되는 수치를 상승시킨다.
《[효과 1]의 남은 지속 시간 (16초)》
현재 남은 시간은 16초.
이 수치를 반으로 줄인다.
《[효과 1]의 남은 지속 시간 (8초)》
《업적 보유자의 모든 신체 능력이 +14,000% 상승합니다!》
전신으로 형용할 수 없는 힘이 휘몰아친다.
그러나 부족하다.
저 끔찍한 악에 대적하기엔 한없이 모자르고 부족하다.
그러니.
‘한 번 더.’
《[효과 1]의 남은 지속 시간 (4초)》
《업적 보유자의 모든 신체 능력이 +21,000% 상승합니다!》
한줄기 검은 섬광이 아스란디즈를 향해 쇄도한다.
아득해지는 정신.
그러나 견딘다.
이 단 한 번의 일격에.
《[효과 1]의 남은 지속 시간 (2초)》
《업적 보유자의 모든 신체 능력이 +28,000% 상승합니다!》
나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뚝.
사고의 흐름이 정지한다.
세상의 시간이 고무줄처럼 쭈욱, 길게 늘어지며 흘러간다.
띠링!
《[효과 1]의 남은 지속 시간 (1초)》
《업적 보유자의 모든 신체 능력이 +35,000% 상승합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
시안의 전신으로 끔찍한 마기가 터져나왔다.
주변의 시야는 흐릿하나 아스란디즈의 모습만은 뚜렷하게 보인다.
길게 늘어지는 시간 속.
사아아아아···.
시야가 흩어지며 하나의 환각이 드리운다.
그 환각 속에 보이는 은발의 미남자.
칠흑의 검을 들고 있는 은발의 미남자.
세상 전체를 오시하는 절대적인 강자.
최강의 아르나이즈, 카일.
카일은 칠흑의 검을 늘어뜨린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이윽고 카일의 검이 움직인다.
늘어진 시간 속으로 카일의 검이 흘러간다.
꽈꽝!
닿는 모든 것들을 찢어발기는 괴악한 위력.
단순히 환각에 불과함에도 그 힘이 느껴진다.
그것은 카일의 수라천살(修羅天殺)이었고.
지난 날, 루슈리아를 소멸시켰던 초월적인 힘.
시안의 ‘극(極) - 수라천살(修羅天殺)’이었다.
저건 지금의 아스란디즈조차 감히 어찌할 수 없었다.
최악, 최흉의 악(惡)인 아스란디즈조차 저 힘에는 감히 닿을 수 없었다.
갈라지는 세상.
카일의 검이 멈추며 카일이 돌아본다.
카일의 두 눈빛이, 시선이.
시안을 바라본다.
그리고.
다시 해봐라.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어.
비록 그때는 <뮤리엘의 기적 - 신화>였다.
아무리 기적은 기적이고, 신화는 신화라 할지라도.
시안은 한 번 그 경지에 가보았다.
한 번 가봤으면, 두 번도 할 수 있다.
시안은 검을 움켜쥐었다.
전신에서 어마어마한 힘이 휘몰아친다.
시안은 방금 전, 카일이 보인 검을 떠올리며 힘을 끌어올렸다.
늘어지고 늘어지는 시간 속.
시안은 끝내···.
검을 쥔 손에 힘을 풀었다.
검을 옆으로 늘어뜨리며, 카일을 바라봤다.
시안을 바라보는 카일의 두 눈은 담담했다.
방금 보인 검을 따라해보라는 듯 시안을 향해있었다.
하지만 시안은 검을 들지 않았다.
할 수 없다.
시안은 극(極) - 수라천살(修羅天殺)을 할 수 없었다.
부족하기 때문이라.
한 번 가본 곳에 두 번은 갈 수 있다.
그러나 시안은 아니었다.
남들과는 달리 시안은 재능이 부족하다.
남들이 갈 수 있는 곳에 시안은 갈 수가 없다.
그 누구보다 많은 노력이 필요로 했다.
시안을 바라보는 카일의 눈빛의 무덤덤했다.
엑시드(Exceed), 그 너머의 경지.
기나긴 대륙 역사상 유일무이한 존재.
최강의 아르나이즈.
카일이 갈 수 있는 곳에, 시안은 갈 수가 없었다.
그가 닿은 아득한 너머의 경지.
시안은 갈 수가 없었다.
시안을 바라보는 카일의 눈빛은 여전히 담담했다.
방금 보인 검을 따라해보라는 듯 마주 서 있었다.
시안은 끝내 검을 들지 않았다.
카일의 검은 정답이다.
지금 이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가능성이다.
시안이 할 수 있냐, 없냐의 문제일뿐.
카일의 수라천살(修羅天殺)만이.
시안이 지난 날 경험했던 ‘극(極) - 수라천살(修羅天殺)’만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다.
그러나 시안은 끝내 검을 들지 않았다.
정말··· 저것만이 유일한 가능성일까.
유일한 정답인 것일까.
왜일까. 시안의 어머니, 세실.
세실이 언제고 시안에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시안, 경험은 노련하게 성공으로 향할 때가 많지만. 때론 목표로 가는 과정을 멈추게 한단다.’
‘경험은 닥쳐온 상황에 정답을 알려주지만, 어쩔 땐 생각을 지배하기도 하지.’
‘명심하렴 시안. 앞으로 전진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시안이 걸어온 길을 부정할 줄도 알아야 한단다.’
.
.
나는 당신이 될 수 없어.
시안은 카일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당신에겐 그것이 정답일지 모르나.
나에게는 할 수 없는 오답이야.
시안은 끝내 카일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 순간.
오답 같은 건 없다.
아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등을 돌려 바라본 그곳.
너의 선택만이, 정답이다.
카일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사아아아아···.
환각이 흩어진다.
늘어지고 늘어진 시간의 세계가 다시 펼쳐진다.
그 사이로 끔찍한 아스란디즈의 마력이 덮쳐온다.
알고 있다.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내가 남들보다 모자라다는 것도.
내가 남들보다 뒤쳐진다는 것도.
난 남들보다 너무도 초라하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아스란디즈를 대적하기에 너무도 부족하다.
카일이 닿은 경지에 이를 수가 없다.
하지만.
“마혼수라검(魔魂修羅劍).”
초라하다면 긁어모은다.
“제 2식(第 二式)”
닿지 못 한다면 쥐어짜낸다.
시안은 늘어진 시간 속을 내달렸다.
시안의 세계가 부서진다.
늘어지고 늘어지던 시간이 뚝, 멈춘다.
시안의 눈의 실핏줄이 모두 터져나간다.
붉어지는 시야로 붉은 피눈물이 흘러내린다.
주륵, 흘러내리는 선혈은 멈춰버린 세상의 시간 속에서 굳어진다.
허락되지 않은 아득한 너머의 영역.
경험하지 않은 새로운 영역.
의식이 흐릿해지며 사라진다.
《[효과 1]의 남은 지속 시간 (1초)》
《업적 보유자의 모든 신체 능력이 +35,000% 상승합니다!》
늘어진 시간 속의 1초.
1초의 시간이 쪼개지고 쪼개진다.
인간의 인지 영역 밖, 극한의 영역이 펼쳐지며 세상이 정지한다.
멈춘 세상이 일그러진다.
일그러진 세상 위로 공간이, 시간이 깨어져 부서진다.
그 사이로 떨어나오는.
한 조각, 시간의 파편.
75분의 1초, 찰나(刹那).
1초도 필요없다.
단 한 순간. 극한의 일순간.
이 찰나의 순간에 모든 능력을 집중시킨다.
이 찰나의 일격에 나의 모든 것을 건다.
설령 몸이 부서져버린다해도.
다시는 일어날 수 없다 해도.
버텨야한다.
뛰어넘어야 한다.
이 한계를.
정지된 시간 속, 시안의 몸이 길게 늘어진다.
존재에게 허락되지 않은 시간의 영역.
인지를 초월한 감각에 전신이 부서진다.
온몸의 모든 실핏줄이 터져나가며 정지된 시간 속으로 훌러 굳어진다.
그러나 버틴다.
넘어선다.
가능성을, 인지를, 감각을.
시간을, 한계를.
내딛어라.
극한의 일순간을!
번─────쩍!
마경을 가로지는 한줄기 묵빛 섬광.
멸천수라(滅天修羅).
온 세상이
어둠으로 물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