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 엘로디의 기록(2)
“진짜 잔가지네.”
시안은 손에 든 나뭇가지를 내려다 보았다.
힘을 조금이라도 주면 똑, 부러질 것만 같은 잔가지.
아니, 이 정도면 잔가지라 부를 수도 없었다.
떨어져나간 부스러기.
혹은 자라다 못한 나뭇가지.
“이게 어디냐.”
시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쉽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건 아스란디즈의 의지와는 상관 없었으니까.
세계수는 스스로가 의지를 지닌 나무였다.
이렇게 떨어져 나간 잔가지라도.
세계수가 허락하지 않는 한 그 힘을 사용할 수 없었다.
이 잔가지 하나도 아스란디즈가 어찌나 많은 설득을 했던지.
그 덕분에 다크 엘프가 식물과 소통하는 진귀한 장면을 보긴했다만.
뭐, 어쨌든.
시안이 이 세계수의 가지를 얻은 이유는 두 가지였다.
일단 첫 번째.
‘이걸로 인스티즈의 위치를 알 수 있단 말이지.’
정확히는 인스티즈를 품고 있었던 세계수.
이 세계수의 힘을 이용하면 인스티즈를 추적할 수 있었다.
‘인스티즈의 자식이라 했던가.’
인스티즈는 세계수 하나를 통째로 깎아 만든 지팡이였다.
한 마디로 지팡이 모양을 한 세계수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엘로디의 기록을 살펴본 바.
다크 엘프의 마을에 있던 세계수.
인스티즈를 품고 있는 세계수는 다름 아닌 인스티즈의 자식이었다.
물론 아들, 딸과 같은 자식의 개념은 아니었다.
식물에게 그런 개념이 있겠냐만은.
정확히 말하자면 인스티즈의 힘으로 창조한 분신? 뭐, 그런 개념이었다.
그러면서 이상한 이론들을 설명하길래 그냥 훑어읽었다.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오기도 했고.
쉽게 말하자면 인스티즈의 자식이요.
지팡이에 깃든 엘로디의 힘을 봉인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하여 이 세계수를 이용하면 인스티즈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
‘이 세계수만 있다고 해서 되는 건 아니었지만.’
그리고 단순히 세계수의 가지만 있다고 되는 건 아니었다.
또 다른 무언가가 하나 더 필요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시안이 세계수의 가지를 얻고자 한 두 번째 이유.
가장 중요하고. 중대하며. 절실하고, 주요한.
아주 결정적인 이유였다.
‘이걸로 강화 확률을 올릴 수 있다니!’
세계수의 힘으로 강화 확률을 올릴 수 있었다!
시안이 살펴본 인스티즈의 기록에는 색다른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다름 아닌 카일의 검.
신장(神匠) 모르크루는 다른 아르나이즈들의 전설적인 무구들을 제작해주었다.
그러나 유일하게 무기를 만들주지 못한 아르나이즈가 카일.
모르크루는 기존에 카일이 지니고 있던 검을 뛰어넘을 수 없었다.
이에 모르크루는 방향을 달리했고.
끝내 카일의 검을 강화해주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하여, 흑석(黑石)이라는 것을 만들어 카일의 검을 강화해주었다.
그리고 그 흑석은 모르크루의 후손인 세미르가 가지고 있었고.
지금은 시안의 인벤토리에 있었다.
그리고 처음 세미르가 흑석을 시안에게 보일 당시.
세미르는 이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선조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셨소.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고, 끝내 다른 아르나이즈 엘로디와 상의한 끝에 방법을 찾게 되었다오.’
한 마디로 흑석을 만드는데 엘로디의 도움을 받았다는 뜻이었다.
그 도움이 바로 인스티즈.
그러니까, 세계수의 힘이었다.
인스티즈에 관련된 기록에 흑석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다.
흑석은 단순한 돌이 아니었다.
세계수의 힘이 깃들어 있는 돌이었다.
조금 더 정확히는 인스티즈의 힘이 응축되어 있는 돌이었다.
그리고시안이 들고 있는 세계수의 잔가지.
인스티즈의 자식인 세계수의 잔가지.
이 잔가지를 이용하면 강화 확률이 올라갔다!
그리고 흑석에 응축되어 있는 것은 인스티즈의 힘.
흑석과 잔가지를 이용하면 인스티즈의 위치 또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인스티즈가 있는 곳은 다름 아닌 다이슨이 있는 곳이었으니.
“대체··· 대체 어떻게 알 수 있는 건가?”
이 질문에 뭐라 설명을 해야한단 말인가.
시안은 정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다시 북부의 주둔지로 복귀하는 길.
고개를 돌리자 파나트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비단 파나트뿐만이 아니라 오슬리도 마찬가지였다.
아스란디즈와 세라는 보이지 않았다.
일단 서로가 서로의 병력들을 차출하여 다시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파나트와 오슬리.
둘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시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걸 진짜 뭐라고 설명해야할까.
시안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하지만 딱히 떠오르지 않는 생각에.
“어쩌다··· 보니요?”
그냥 아무렇게나 내뱉어버렸다.
“그게 뭔···.”
파나트의 표정에 정신이라는 것이 빠져버렸다.
그와 동시에 어이가 정신을 따라 승천했다.
어쩌다보니라니.
그 무슨 되먹지도 못한 소리란 말인가!
8위계(位界)의 마법사, 아스란디즈조차 찾지 못한 일이었다.
대륙 최강의 마법사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럼 대륙에서 그 누구도 할 수 없다고 봐야했다.
그런데 뭐?
어쩌다보니 찾을 수 있었다고?
심지어 시안은 마법사도 아니었다.
기사였다.
마법이라고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해서도 안되는 기사.
그런데 지금···.
“정말··· 정말 자네는 마검사란 말인가!”
파나트는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경악 어린 시선을 시안을 바라보는 파나트.
시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에이, 됐다.
어차피 설명도 못하는 일인데, 무슨 해명을 하냐.
시안은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는 조금 떨어진 거리.
뭐, 저런 놈이 다있지? 싶은 표정의 오슬리에게 말했다.
“각하. 어느 정도의 병력을 차출하실 수 있으십니까.”
시안의 말과 함께 오슬리가 번쩍,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는 살짝 시선을 내려 생각에 잠겼다.
다이슨의 위치를 찾을 수 있다 한들.
말 그대로 위치를 찾을 수 있는 것뿐이었다.
결국 다이슨을 처리해야만 모든 것이 끝나는 일.
허나, 그게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일단 인스티즈를 사용하는 다이슨.
거기에 그런 다이슨을 따르는 다크 엘프들.
그리고 광기에 물든 야만족들.
사실상 전쟁이라 부를 법한 전투를 해야했다.
“최대한 차출을 해야하겠다만, 가서 사태를 파악해봐야겠지. 지금 당장 고통받는 이들을 괄시할 수는 없으니.”
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다이슨을 처리해야만 해결되는 사태라고는 하나.
지금 이 순간에도 북부 사람들은 야만족들에게 고통받고 있었다.
자식들이 고기로 화하고 아내와 딸이 몹쓸 짓을 당하는.
오슬리가 부르짖던 그 말들이 지금 북부 전역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모든 힘을 쏟아 다이슨을 처리했다치자.
그로써 예전과 같은 북부로 되돌려놓았다치자.
그러나 그 미래에 살아있는 이가 아무도 없다면.
그것이 낙원이라 한들, 대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시안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 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대략 반나절 정도가 걸린 듯 싶었다.
시안은 저 멀리, 마을에 위치한 주둔지를 볼 수 있었다.
주둔지와 다크 엘프 마을은 하루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그러나 걸음을 빨리한 덕에 반나절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 상으로는 그리 빠른 시간은 아니었다.
아스란디즈가 세계수를 설득하는 시간도 필요했거니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바람에 다크 엘프 마을에 3일 정도 발이 묶여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북부의 주둔지.
“뭐지?”
시안은 순간 앞선 걸음을 멈추었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으로 보이는 마을의 풍경.
정확히는 마을 밖, 주둔지로 보이는 풍경.
뭔가··· 느낌이 묘했다.
조금 이상하다고 해야할까.
바라보는 시야로 세 무리가 각기 모여있었다.
한쪽은 오슬리의 아들, 벤딩턴을 비롯한 바텐베르크 가문의 기사들.
다른 한 쪽은 로르실트 가문의 아르카닉 마법 병단.
마지막으로 피칠갑을 한 일련의 기사들.
방금 전까지 격렬한 전투를 한 듯.
갑옷 사이로 뚝뚝, 시뻘건 핏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뭐지···?”
시안은 그들을 자세히 살폈다.
피칠갑을 한 기사들은 20명 정도로 이루어져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언뜻 비치는 어둠.
“설마··· 루벤의 기사단?”
다름 아닌 루벤의 기사단들이었다.
벤딩턴과 아르카닉 마법 병단.
그 둘은 루벤의 기사단을 경악스러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뭔데?”
시안은 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그리고 그건 오슬리와 파나트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오슬리가 한 걸음 나서며 말했다.
“벤딩턴.”
“······ 아, 아버님!”
벤딩턴의 외침과 함께 사람들이 시선이 모두 이쪽을 향했다.
이윽고 벤딩턴이 다가오며 말했다.
“돌아오셨군요. 어떻게··· 가신 일은 잘 해결되셨습니까?”
“얼추 해결되었다. 그런데···.”
오슬리가 주변을 훑어보며 다시 벤딩턴에게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아, 그게···.”
오슬리의 물음에 벤딩턴은 쉽사리 말을 내뱉지 못했다.
확실히 무슨 일이 있기는 한 모양.
그리고 그게 누구에게서 비롯된 일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오슬리는 손가락으로 피칠갑을 한 기사.
루벤의 기사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혹시 저 기사들이 사고를 친 건가?”
“아,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어째 벤딩턴은 격하게 부정해보였다.
연신 손사래를 쳐보이며 오해라는 듯 소리쳤다.
“그럼 무슨 일이지?”
이어진 오슬리의 물음.
벤딩턴은 꽤나 주저해보였다.
정확히는 이게 맞나?
이걸 말해도 믿어주기는 할까?
나도 믿기지가 않는데?
이런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윽고 벤딩턴은 에라 모르겠다는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기 루벤의 기사분들께서··· 북부 전역의 야만족들을 죄다 쓸어버리셨습니다.”
“······ 뭐라고?”
오슬리가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 예?”
그리고 시안은 두 박자 늦게 반응했다.
누가 뭘 쓸어버려?
시안은 진짜 뭔가 싶었다.
시안의 시선이 루벤의 기사단에게 향했다.
전신이 피칠갑이 되어있는 기사들.
누가 보면 악독한 살인귀처럼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시안은 볼 수 있었다.
“영주님··· 살려주십시오···.”
“차라리 죽여주십시오···.”
피칠갑 된 갑옷 속에 들어 있는 좀비들을!
살아있되, 살아있지 않은 망자들의 비명을 말이다!
루벤의 기사들이 좀비처럼 시안에게 다가왔다.
철컥철컥, 힘 빠진 걸음마다 갑옷이 비명을 내질렀다.
목소리를 보아하니 제대로 잠도 못 잔 것 같았다.
“단장님이··· 단장님이···.”
“저희를 죽이려 하십니다···.”
그리고 들려오는 좀비의 목소리.
‘아, 참.’
시안은 그때서야 어찌된 영문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켄드릭을 놓고 왔었지.’
아무래도 시안이 없는 동안 켄드릭이 미친듯이 날뛴 모양이었다.
켄드릭은 무려 마스터 상급의 기사였다.
듀라크와 대적해도 쉬이 밀리지 않을 절대적인 실력자이자.
카일에게서 마(魔)를 가장 가까이서 배운 검은 사자 기사단의 단장.
검은 사자 기사들이 도달한 곳에 악마들은 없다.
그 중에서도 켄드릭은 악마 학살자라 불리던 최강의 기사였다.
거기에 데스 나이트로서 인간이 펼칠 수 없는 무위를 보였으니.
야만족들의 광기는 말 그대로 ‘따위’였다.
심지어 야만족들이 숨는다한들 소용 없었다.
켄드릭이 다루는 마(魔)는 카일에게 배운 근원의 마(魔)에 가까웠다.
비록 하위호환이라고는 하나 결국은 근원에 기반한다.
광기 따위가 숨을 수 있을리가 없었다.
어째··· 시안이 다크 엘프 마을을 다녀오는 그 시간 동안.
켄드릭이 루벤의 기사단을 데리고 북부 전역을 이잡듯이 쏘다닌 듯 싶었다.
심지어 켄드릭은 이미 죽음을 맞이한 데스 나이트.
잠도 자지 않아도 되고, 딱히 뭘 먹지 않아도 되었다.
게다가 추위 또한 타지 않으니.
“사, 살려주십시오 영주님···.”
“엘리··· 엘리가 필요해···.”
“다나님의 음식이 먹고 싶어···.”
그 결과가 이것.
지금 켄드릭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데스 나이트다보니 사람들 앞에 그 모습을 보일 수 없었으니 말이다.
지금은 잠시 몸을 숨긴 모양인데.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야만족들을 찾아 다니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그때서야 시안은 한 가지.
그토록 의문이었던 일의 전말을 알 수 있었다.
시안은 품 속에서 스마트 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밀려있는 알림창을 쓰윽, 훑어보았다.
‘어쩐지.’
《당신과 루벤의 이름이 북부 전역에서 들끓고 있습니다아아악!!!》
《명성 포인트 + 3,000 P》
《명성 포인트 + 4,000 P》
《명성 포인트 + 5,000 P》
《명성 포인트 + 2,000 P》
《명성 포인트 + 3,000 P》
《명성 포인트 + 1,000 P》
.
.
.
‘명성 포인트가 왜 이렇게 많이 오르나 했다.’
시안은 다시 시선을 돌려 루벤의 기사들을 바라봤다.
“아아··· 이것이 광기인가··· 단장님이 경계하라 하시던 광기인가···.”
“난 그냥 광기에 물들래··· 그럼 이 고통이 사라질 거잖아···.”
“차라리 광기에 물들게 해줘···.”
절규하는 루벤의 기사단원들.
“······”
“······”
그리고 경악 어린 시선으로 시안을 바라보는 오슬리와 파나트.
그 표정엔 ‘대체 어떻게···?’ 라는 의문이 담겨있었다.
이건 또 뭐라고 설명해야할까.
“뭐··· 어쩌다보니···?”
시안은 그냥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
북부 외곽에 위치한 이름 모를 산 속.
사실 산이라 부르기도 민망했다.
혹독한 추위에 식생이 자라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이 추위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가고자 발악하는 식생들이 있었다.
그러나 끝내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꽁꽁, 얼어 붙어있었다.
해서 높은 둔덕 혹은 민둥산.
이렇게 부름이 적당했다.
그리고 그런 산 속으로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짙은 눈 안개로 가려진 시야 사이로 수많은 병력들이 산을 오르고 있었다.
북부의 변경백, 바텐베르크.
그런 바텐베르크 가문에서 차출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병력들이었다.
켄드릭과 루벤의 기사단이 북부 전역을 휩쓸어버린 지금.
정확히는 켄드릭이 북부 전역을 휩쓸어버린 지금.
다이슨을 처리하는 것에 모든 병력을 집중할 수 있었다.
해서 오슬리는 최소한의 병력만 남겨둔 채 모든 병력을 차출했다.
그리고 파나트와 아르카닉 마법 병단.
시안과 루벤의 기사단.
마지막으로.
“여기에 정말 오빠가 있어?”
다크 엘프들까지.
세라가 시안의 옆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그 옆으로 숲지기, 아스란디즈와 파수꾼들의 모습 또한 비쳐보였다.
파수꾼은 인간들의 개념으로 치면 경비대와 비슷했다.
한 마디로 전투 가능한 이들을 파수꾼이라 불렀다.
“아마도.”
“아마도?”
시안의 말에 세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세라의 모습에 주변의 병사들이 힐긋, 거리며 이쪽을 바라봤다.
세라의 미모 때문에 그런 것도 있었지만.
역시나 다크 엘프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세라는 머리색을 바꾸지 않았다.
짙은 어둠처럼 물든 검은색의 머리.
어둠의 마나를 사용한다는 증거이며.
어둠의 마나는 사이하기 그지 없는 마나였다.
하지만 섣불리 나서는 이는 없었다.
오슬리와 파나트가 오기 전에 단단히 당부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인간들이 엄청 많아.”
“이렇게 많은 인간들은 처음 봐!”
다크 엘프들이 보이는 순하디 순한 모습 때문이었다.
그 모습에 다크 엘프에 대한 고정 관념이 흔들려왔다.
하지만 지금 상대하러가는 이들 또한 다크 엘프.
고정 관념이 깨진 것은 아니었다.
시안은 인벤토리에서 흑석(黑石)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얻은 세계수의 가지를 가져다대자.
우우우웅···!
흑석이 크게 떨려오며 공명하기 시작했다.
주둔지에 있을 때만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거늘.
아마 인스티즈가 가까이 있다는 뜻이리라.
“여기가 맞는 것 같은데···.”
시안은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휘몰아치는 눈보라뿐.
“난 모르겠어.”
세라는 딱히 느껴지는 바가 없는 것 같았다.
세라가 시선을 돌려 아스란디즈를 바라봤다.
“······ 조금 기이한 마력의 흐름이 느껴지기는 하구나.”
그리고 아스란디즈는 달리 보이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언제까지 더 가야 하나?”
그 순간 뒤 쪽으로 파나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파나트와 더불어 아르카닉 마법 병단의 마법사들이 비쳐보였다.
그리고 그런 마법사들의 얼굴에 보이는 감정은 짜증.
정확히는 ‘네 까짓게 뭘 안다고?’ 였다.
파나트가 저러니 별 말없이 따른다지만.
아르카닉 마법사들은 시안에게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어보였다.
“눈보라가 너무 과해 마력의 소모가 심하네. 이러다가는 싸우기도 전에 지칠 것이네.”
“그건 우리 병력들도 마찬가지다. 추위에 강한 이들이라고는 하나 추위를 타지 않는 건 아니야. 지금까지는 괜찮았지만 더 이상의 수색은 힘들다.”
파나트와 더불러 오슬리까지 시안에게 말해왔다.
“음···.”
그들의 말에 시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전부 맞는 말이었으니까.
앞으로 이어질 전쟁.
그것까지 생각하면 더 이상의 체력 소모는 있어서 안되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
시안은 다시 한 번 흑석과 세계수의 가지를 꺼내들었다.
우우우웅···!!
방금 전보다 더욱 떨림이 거세진 흑석이었다.
그리고 방금 전의 아스란디즈의 말까지 고려해보면 이곳에 인스티즈가 있는 것이 확실해보였다.
그런데 그게 전부였다.
흑석과 세계수의 공명.
이건 인스티즈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말 그대로 탐지기의 역할만 하고 있었다.
아마 환계 마법을 펼친 것 같은데···.
‘아. 혹시?’
시안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흑석과 세계수의 가지를 인벤토리에 넣었다.
그리고 터벅, 한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와 동시에 허리춤에 매단 SSS등급의 검을 뽑아들었다.
눈보라와 함께 온통 새하얀 풍경 속.
칠흑의 검신이 검은빛을 발했다.
사아아아아─!
그와 동시에 시안의 전신에서 짙은 어둠이 피어올랐다.
“지금 무슨···?”
“뭐하는 겐가.”
시안을 바라보던 사람들의 표정에 의문이 떠올랐다.
“······!”
“······!”
오직 아스란디즈와 세라.
그리고 다크 엘프들의 표정만이 경악으로 물들 뿐이었다.
지금 시안에게서 느껴지는 힘.
저것이 가진 바 정체를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 깃들어있는 근원적인 힘까지.
“어, 어떻게···!”
아스란디즈의 충격 어린 말이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시안의 검이 앞선 시야를 베었다.
단 한 번의 휘두름.
하나의 거대한 참격이
눈으로 담을 수 있는 풍경을 베어냈다.
마혼수라검(魔魂修羅劍).
제 1식(第 一式).
수라천살(修羅天殺).
콰자자자자작!
공간 전체에 거대한 흉터가 새겨졌다.
그와 동시에.
파장창─!
세상의 윤곽이 유리 조각처럼 부서지며 무너져내렸다.
“······!!!”
“······!!!”
“······!!!”
바텐베르크의 병사들은 물론 아르카닉 마법 병단까지.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역시···.”
그 사이로 들려오는 시안의 중얼거림.
시안이 천천히 등을 돌리며 말을 내뱉었다.
“이 공간 자체가 환계였던 듯 싶습니다.”
“그 무슨 말도 안되는···.”
파나트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 공간 자체가 환계라는 것도 말이 안 되건만.
그런 사실을 파악한 시안도 말이 안되었고.
심지어 환계를 깨뜨린 저 힘은 더더욱 말이 안 되었다.
파장창─!
그럼에도 지금 눈앞으로 부서져내리는 공간.
믿지 않을래야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경악과 충격이 내려앉으며 공간이 산산히 부서져내렸다.
그리고 바로 그때.
“기어코 찾아오신 겁니까. 아버지.”
무너진 공간 사이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