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화 - 천 년의 임무(2)
공간을 잠식한 루슈리아의 악의가 크게 들썩인다.
그 사이로 알 수 없는 어둠이 새어들어왔다.
드리운 악의는 그런 어둠을 덮쳐갔다.
아리아의 신성력 마저 소멸시킨 절대의 악의다.
악마 7군주가 지배하는 악의.
그러나.
사아아아아─!
영역을 지배한 악의가 소멸한다.
악의가 피어올라 대항했으나 힘의 격류에 휘말려 찢겨진다.
새로운 어둠이 공간을 장악한다.
그 깊이를 가늠할 수조차 없는 마(魔).
이 곳의 진정한 주인이 돌아왔음을 알리듯.
어둠은 루슈리아의 악의를 집어삼키며 퍼져나간다.
그와 동시에 루슈리아의 치명적인 본능이 경고한다.
‘위험하다!’
루슈리아는 저도 모르게 아리아를 붙잡은 손을 놓아버렸다.
그와 동시에 크게 뒤로 물러섰다.
저항과 반항.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저 지금 이 손을 놓지 않으면 죽는다.
이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죽는다.
이 치명적인 본능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루슈리아의 손과 아리아의 몸이 분리된다.
루슈리아의 몸이 크게 도약한다.
그리고 거의 그와 동시에.
콰자자작─!
루슈리아와 아리아 사이로 하나의 거대한 참격이 지나갔다.
그것은 세상 전체를 갈라버리듯.
땅거죽을 할퀴며 거대한 흉터를 새겨넣었다.
【이 무슨···!】
루슈리아의 두 눈이 부릅, 떠졌다.
그 격한 움직임에 짓이겨진 살점이 툭, 하니 떨어져내린다.
하지만 루슈리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신경쓸 수가 없었다.
지금 땅거죽에 새겨진 참격.
그리고 그 안에서 느껴지던 힘.
이건 언젠가 루슈리아가 한 번 마주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절대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루슈리아의 시선이 정면으로 향한다.
그리고 어떤 한 인간을 볼 수 있었다.
금발의 머리를 한 사내.
다름 아닌 시안이었다.
시안은 쓰러진 아리아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케엑···! 쿨럭쿨럭! 케켁···!”
아리아는 대답 대신 고통스러운 기침을 토해냈다.
백옥같은 목덜미 위로 선명한 손자국이 새겨져있었다.
아리아는 생명을 갈구하며 계속해서 기침을 토해냈다.
꽤나 고통스러워보였지만···.
다행히 큰 이상은 없어보였다.
정말 다행히도.
늦지 않았다.
시안은 작게 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너··· 너 방금···!】
그 순간 악에 받친 소리가 들려왔다.
바라본 그곳.
그곳엔 썩어문드러진 여인이 시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여인이었던 것이 시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시안은 가만히 그 여인을 바라봤다.
본능의 경고가 쉼없이 울려온다.
느껴지는 끔찍한 악의는 저 여인이 인간이 아님을 알려오고 있었다.
썩어문드러진 살점에선 역병의 기운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저것이야말로 역병의 근원.
이 남부에 퍼진 역병의 원인이었다.
그렇기에 끔찍하다는 말로도 감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저 존재를 정의내리는 개념이 있을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부정적인 단어를 끌어다 모아놓아야 비로소 저 여인을 설명할 수 있으리라.
그렇기에 저 존재는 단순한 악마가 아니다.
악마 7군주.
그러나 어떤 죄에서 깨어난 악마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안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악마가 자리한 여인.
시안은 저 여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저 악마가 바로 역병의 근원이다.
그리고 저 악마는 다름 아닌 뮤리엘의 유적에서 잉태되었다.
그렇기에 저 여인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아득한 세월을 넘어 악의에 뒤덮여 끔찍한 존재가 되었으나.
한 때는 그 어떤 존재보다 고귀했던 여인.
천 년전, 세상을 구원한 6인의 아르나이즈.
신녀(神女), 뮤리엘이었다.
본래라면 세월에 묻혀 완전히 썩어 문드러져야만 했다.
그러나 뮤리엘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악마.
저 악마로 인해 죽음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게 된 것 같았다.
그러니 어렵지 않게 추측이 가능하다.
지난 날, 시안이 레아에게서 악마 7군주들의 특징을 들은 바.
어렵지 않게 추측이 가능했다.
일단 악마가 굳이 신성력으로 가득찬 존재를 그릇으로 사용할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뮤리엘의 몸을 그릇으로 썼다는 것은 필시 이유가 있을 터.
가령 초월적인 미모라든지 말이다.
그 미모를 활용할 수 있는 악마는 하나.
눈앞의 악마는 악마 7군주.
색욕의 악마, 루슈리아(Luxuria)다.
【너··· 너 방금···!】
루슈리아는 경악 어린 시선으로 시안을 바라봤다.
루슈리아는 지금 떠오르는 이 감각을 믿을 수가 없었다.
짓눌리는 악의.
루슈리아의 악의가 시안의 어둠에 의해 짓눌리고 있었다.
허나 막상 느껴지는 시안의 기세는 한낱 인간이었다.
인간들 사이에서는 어떤 수준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루슈리아가 보기엔 형편없기 그지 없었다.
차라리 저기 구역질이나 해대는 계집년이 더 뛰어났다.
그러나 악의가 맥을 못추고 있었다.
시안을 잠식하려 들면 되려 삼켜진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
본질적인 격의 차이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하지만 방금 전에 보였던 거대한 참격.
이 두 가지 사실이 루슈리아에게 어떤 끔찍한 악몽을 떠올리게 했다.
악마가 악몽을 떠올린다.
이와 같은 아이러니함이 어디에 있을까.
그러나 이 기억은 충분히 그 모순을 현실로 만들었다.
아득히 먼 세월.
그 어떤 악마들조차 범접할 수 없었던 악마들의 악몽이자 공포를.
【말도 안돼!】
루슈리아가 악에 받친 듯 버럭, 소리쳤다.
그건 말 그대로 말이 안 되었다.
그 존재는 죽었다.
한낱 필멸자에 불과한 그는 세월에 묻혀 사라졌다.
그러니 착각이다.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착각을 일으킨 것뿐이다.
저 놈은 그저 한낱 버러지 같은 인간 따위다.
【감히···! 감히···!!】
루슈리아가 주먹을 꽈득, 움켜쥐며 소리쳤다.
문드러진 살점이 주먹 사이로 떨어진다.
오랜 세월에 걸쳐 겨우 차지한 몸이었거늘.
이 빌어먹을 년이 수를 쓰는 바람에 꼴이 이 모양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몸은 썩어 없어질 터.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몸을 바꿔야했다.
하지만 여기서 힘을 과하게 썼다간 그 전에 육체가 붕괴될 지경이었다.
지금도 억지로 육체의 붕괴를 틀어막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이곳저곳에서 살점이 떨어져내리니.
몸을 바꾸기 전에는 힘의 사용을 자제해야했다.
루슈리아의 표정이 기괴하게 일그러진다.
그리고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런 루슈리아의 시야로 개럿을 비롯한 신성 기사단이 보였다.
루슈리아가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지금 당장 저 년놈들을 내 발 아래로 끌고 와!】
루슈리아의 외침에 개럿과 신성 기사들이 반응했다.
이윽고 개럿이 천천히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그런 개럿의 모습에 시안은 그간의 상황을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처음부터 이상하다 싶었다.
시안이 처음 개럿을 봤을 당시.
시안은 개럿에게서 어떤 위화감을 느낄 수 있었다.
다름 아닌 신성 기사면서 신성을 사용하고 있지 않는 모습.
오러와 비슷한 힘을 사용하고 있는 개럿의 모습을 말이다.
신성을 사용하는 신성 기사는 오러를 사용하지 못한다.
오러란 기사들이 행하는 믿음의 결과물.
세계와 현상의 법칙 따위는 무시해버리는.
그야말로 터무니 없는 힘이었다.
허나, 신성을 사용하는 이들은 태어날 적부터 거룩한 힘을 보았다.
그것은 곧 ‘신’이 실존함을 증명하는 것이리라.
자신이 행하는 기적의 힘은 신에게서 빌려온 것이요.
그것이 눈앞에 실존하니 그 믿음 또한 확고한지라.
그러나 오러는 현상의 법칙을 비트는.
오직 인간이 갖는 확고한 믿음의 산물이자.
하나의 기적.
허나, 기적을 행하는 신이 이미 실존하거늘.
어찌 인간 따위가 그 기적의 힘을 부릴 수 있으랴.
신성력을 타고난 이들은 오러라는 현상을 부정할 수밖에 없었고.
해서 사제들과 신성 기사들은 오러의 힘을 다룰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개럿은 분명 오러의 힘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 말은 즉.
개럿은 신을 믿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러나 정작 그 힘은 또 신성과 비슷해보였다.
개럿은 신을 믿되, 믿지 않는 모순적인 존재.
그렇기에 시안은 이상하다 생각할 뿐.
별 다른 의구심을 갖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
“명을 받들겠나이다.”
개럿이 루슈리아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와 동시에 신성 기사들이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나의, 신이시여.”
시안은 어찌된 일인지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개럿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신성 기사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개럿이 검을 치켜들었다.
그사이로 검붉은 오러가 일렁였다.
그 동안 개럿이 보였던 힘과는 다른 광기.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리아.
“······!!”
아리아는 차마 말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아직 숨이 죄어오기도 했거니와.
지금 개럿에게서 느껴지는 끔찍한 힘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광기의 힘에 삼켜진 개럿은 가진 바 역량을 뛰어넘었다.
그리고 그건 개럿 뿐만이 아니었다.
도열한 신성 기사 단원들.
그들에게서도 선명한 광기의 힘이 느껴졌다.
그 뚜렷하고도 선명한 광기가 오롯이 이곳을 향한다.
아리아는 그 광기에 정신이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마스터 수준의 개럿.
100여명에 가까운 신성 기사들.
반면에 여기는 아리아와 시안.
둘뿐이다.
이길 수··· 없다.
대적할 수 없다.
아리아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아리아는 지금 개럿 하나도 감당하기 힘들다.
하물며 신성 기사들까지 가세한다면 더더욱 힘들다.
시안이 합세한다 하더라도···.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터였다.
아니, 설령 어찌할 수 있다 치자.
그러나 그것이 전부 였다.
색욕의 악마, 루슈리아.
지금은 어쩐 이유에서인지 나서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저건 한낱 인간이 감히 어찌할 수 없는 절대적인 악마다.
그러니 이길 수 없다.
모든 것이 끝이 났다.
그런데 대체 어째서일까.
“아리아, 몸을 추슬러. 상태가 안 좋은 것을 알지만··· 지금은 싸워야 해.”
시안은 그 투지를 꺾지 않았다.
아리아는 뭐라 말을 하려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시안이 터벅, 걸음을 내딛었다.
올려다 본 시선으로 시안의 등이 보인다.
시안은 폭사하는 광기 사이로 당당히 그 걸음을 내딛었다.
오른손으로 검을 움켜쥐었고.
왼손을 옆으로 뻗어보였다.
그리고 그런 시안의 손목에 보이는 무언가.
시안의 입으로 아득한 목소리가 새어나온다.
“켄드릭.”
그 순간.
사아아아악─!
시안의 손목에서 짙은 어둠이 피어났다.
이윽고 유령과도 같은 존재가 손목에서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어어어어어어어···!!
사방으로 섬뜩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죽은 자의 절규.
망자의 비명.
그것엔 어떤 것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섬뜩함이 깃들어있었다.
새까만 어둠이 밀려온다.
칠흑의 어둠이 공간을 잠식한다.
그리하여 드리운 광기를 무차별적으로 집어 삼킨다.
그 사이로 수많은 칠흑의 안개 덩어리가 형성되었다.
【이, 이, 이 힘은···!!!】
루슈리아의 경악 어린 외침이 터져나온다.
쩌억, 벌어진 입 사이로 무수한 살점이 떨어져 내린다.
【말도 안돼!! 말도 안돼!! 너희들이 어떻게!!!】
시안은 터벅, 걸음을 계속 옮겼다.
사아아악─!
칠흑의 안개가 시안의 주변으로 쏟아져내렸다.
그것은 한데 뭉쳐져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내었다.
짙은 어둠으로 물든 존재.
죽음의 기사, 데스 나이트(Death Knight).
도합 31명의 데스 나이트가 칠흑의 안개 속에서 피어난다.
시안의 뒤로 질서 정연하게 도열하며 검푸른 안광을 발한다.
시안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살며시 시선을 내려 왼쪽 손목에 찬 팔찌를 바라봤다.
별 다른 치장이 없는 단조로운 팔찌.
다름 아닌 시안이 뮤리엘의 무덤에서 발견한 유산이었다.
스토리 연계 퀘스트의 보상인 카일의 유산과 뮤리엘의 유산.
그리고 이 팔찌는 아이러니하게도.
카일의 유산이 아니라, 뮤리엘의 유산이었다.
카일의 유산은 따로 있었다.
이 팔찌는 다름 아닌 뮤리엘의 유산.
뮤리엘은 검은 사자 기사단을 가둬두면서.
그들을 풀어줄 수 있는 유산 또한 같이 남겨두었다.
그들 중 일부가 데스 나이트로 부활할 것을 짐작이라도 했다는 듯이.
정확하진 않다.
그렇기에 이유 또한 모르겠다.
그 답을 알고 있는 뮤리엘은 지금 눈앞에 있었으나.
답을 해줄 뮤리엘은 이미 죽어 사라졌다.
철컥.
-하명하십시오 주군.
켄드릭이 시안 옆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시안은 고개를 흔들었다.
의문은 나중에.
지금은 눈앞의 상황에 집중한다.
시안은 팔찌에서 시선을 떼었다.
그리고 광기의 힘을 발하는 신성 기사단을 바라봤다.
교황청을 대표하는 신성 기사들이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신성 기사라 부를 수 없는 이들이었다.
시안은 그들을 바라보며.
나지막히 말을 내뱉었다.
“교황청의 사람들을 죽여라.”
-존명.
켄드릭이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난다.
이윽고 켄드릭이 검을 뽑아들었다.
그 뒤로 30의 데스 나이트들이 모두 검을 뽑아들었다.
일렁이는 마기가 주변을 잠식한다.
칠흑의 어둠이 공간에 드리운다.
감히 정의를 내릴 수 없는 힘.
사아아아아악─!!!
켄드릭을 비롯한 검은 사자 기사단 전원의 검 위로.
마스터의 상징인 칠흑의 오러 블레이드가 새겨진다.
도합 31명의 데스 나이트 마스터 기사단.
“······!!”
“······!!”
그 모습을 마주한 신성 기사들의 표정에 당황이 새겨진다.
개럿의 두 눈이 찢어질듯이 떠진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너희들은 여기에 있어서는 안돼! 있을 수가 없다고!!】
루슈리아가 경악으로 가득찬 표정으로 소리친다.
그 모든 것들을 마주하며.
검은 사자 기사단의 단장, 켄드릭이 천천히 검을 치켜들었다.
데스 나이트는 살아 생전의 기사가 원한에 사무쳐 부활한 마(魔)의 존재다.
그리고 이들을 데스 나이트로 부활시킨 원한(怨恨).
켄드릭과 검은 사자 기사단들의 검푸른 안광이 일제히 타오른다.
그 안광은 오롯이 신성 기사들에게 향한다.
천 년전.
끝내 수행하지 못했던 그 임무.
-교황청의 사람들을 죽여라.
허나, 천 년이란 까마득한 세월을 거슬러 올라.
-지금.
나지막히 내뱉어지는 켄드릭의 말과 함께.
-수행합니다.
억눌려있던 포악한 마기(魔氣)가.
그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끔찍한 해방을
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