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화 - 뮤리엘의 유적(3)
시안이 역병의 근원을 찾으러 떠나간 이후.
아리아는 다시 게스탁 마을로 돌아갔다.
시안이 언제 역병의 근원을 제거할지도 몰랐거니와.
그곳에 있어 봤자 마땅히 할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기다릴 바에 게스탁 마을에서 기다리는 편이 나았다.
그리고 그건 비단 아리아뿐만 아니라 레이첼과 신성 기사단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해서 아리아는 신성 기사단과 함께 다시 게스탁 마을로 돌아갔다.
그렇게 게스탁 마을로 돌아가는 길.
“······ 나쁜 놈.”
아리아는 저도 모르게 이렇게 중얼거렸다.
왜인지 모르겠다.
그럴 이유가 없다는 것도 알겠다.
“······ 같이 가자고 할 수 있는 거였잖아.”
그런데도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아리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새하얀 갑옷을 입은 신성 기사단.
그들이 아리아를 호위하며 길을 내고 있었다.
세상 든든한 광경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리아는 왜인지 혼자가 된 기분이었다.
로라라도 있었으면 모르겠지만 로라는 게스탁 마을에 있었다.
역병의 근원으로 다가가는 터라 위험하기도 하여 아리아가 마을에 남아있으라 했기 때문이었다.
로라는 걱정했지만 아리아는 괜찮다 말했다.
시안이 옆에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시안은 혼자만 휙, 하니 역병의 근원으로 가버렸다.
아리아 혼자만 덩그러니 버려두고 가버렸다.
솔직히 말해 아리아는 시안과 같이 가고 싶었다.
심지어 같이 가자고 말하려고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차마 먼저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역병의 근원은 근원이었던 걸까.
풍기는 역병의 기운을 아리아도 감당하기 힘들었으니까.
괜시리 따라갔다 시안의 발목만 잡을 것 같았으니까.
아리아는 차마 먼저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내심 같이 가자고 말해주기를 기대했건만···.
“나쁜 놈.”
시안은 혼자 휙,하니 떠나가버렸다.
물론 시안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본인 딴에도 아리아가 걱정되었던 거겠지.
“······ 진짜 나쁜 놈.”
그럼에도 아리아는 괜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아리아는 툴툴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퀡뉃!”
습격하는 몬스터 무리들.
하지만 신성 기사들이 일시에 휩쓸어버리고 있었다.
왜인지 아까보다 몬스터가 더 많이 습격해오는 것만 같았다.
다행히 신성 기사단들이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다만, 레이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레이첼은 따로 할 일이 있다며 단독으로 행동했기 때문이었다.
아리아는 그런 레이첼을 따라갈까?
심각한 고민했었다.
레이첼은 악마 탐지기에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시안 또한 레이첼이 악마가 아니다, 이렇게 단정지었다.
그럼에도 아리아는 쉽사리 의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직접 두 눈으로 봤기 때문이었다.
레이첼이란 존재를 처음 봤을 때부터 의심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의심을··· 아니,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은 불과 몇 개월 전.
황혼 교파에서 강제로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교리를 전파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였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학대까지 이루어지고 있다고.
신의 뜻을 설파하는 것 또한 교단의 의무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발적인 것이어야하지 절대로 강제해서는 안된다.
심지어 학대까지 한다니.
아리아는 이를 확인하고자 해당 지역을 찾아갔다.
그리고 아리아는 볼 수 있었다.
그건 신의 교리가 아니었다.
여명과 황혼.
두 교파의 교리가 조금씩 다르다고는 하나 그럼에도 그 뿌리는 같다.
그러나 아리아가 마주한 풍경은 결코 같은 뿌리라고 볼 수 없는 무엇이었다.
시뻘겋게 충혈된 아이들.
마치 광신도와 같은 모습에 아리아는 충격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 앞에 서있던 레이첼.
그건 분명한··· 악(惡)의 기운이었다.
아리아는 악마를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아리아는 알 수 있었다.
저건 분명한 악의(惡意)다.
심지어 너무나도 끔찍한 악의였다.
역사상 가장 강대한 신성력을 지녔다 평가받는 아리아.
그러나 그때 레이첼이 보인 끔찍한 악(惡)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과연 내가 저 악(惡)에 대항할 수 있을까?
아리아는 그런 의문마저 들었었다.
아리아는 두려움에 바로 자리를 벗어났다.
당장 아이들을 구해야한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아리아 혼자 어찌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 정도로 드리운 악의는 끔찍했다.
레이첼은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아리아가 왔다는 것을 몰랐던 것인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 척 해준 것인지.
그것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아리아는 곧바로 사람들을 이끌고 다시 그 장소에 찾아갔다.
그러나 그 어떠한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추기경 다운 레이첼만이 있을 뿐.
그러나 아리아는 분명 볼 수 있었다.
그렇기에 아리아는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었다.
시안의 확신이 있었음에도.
아리아는 여전히 레이첼이 악마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지금 따로 행동하겠다는 레이첼.
무얼 하려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의심이 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니 따라가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해야하건만.
“······”
아리아는 섣불리 그러겠다 말하지 않았다.
만일 아리아의 의심처럼 레이첼이 악마이고.
지금 레이첼이 하려는 일이 아리아가 봐서는 안되는 무엇이라면.
아리아는 그것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아리아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마주한 끔찍한 악의.
그건 아리아가 어찌할 수 없는 수준의 악이었으니까.
방법도 없고.
어찌할 도리도 없다.
그럼에도 나서는 건 대책없는 생떼밖에 되지 않았다.
신중하고 현명하게 행동하자.
지금은 레이첼을 따라가는 건 아니다.
시안이 역병의 근원을 제거할 때까지 기다린 뒤, 시안과 상의하자.
그때 움직여도 늦지 않는다.
일단은 게스탁 마을에서 시안을 기다리자.
아리아는 그렇게 게스탁 마을로 향했다.
그렇게 얼마 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저 먼 시야로 게스탁 마을의 풍경이 보였다.
어느 덧 도착한 마을.
아리아는 로라를 찾기 위해 성큼, 걸음을 옮겼다.
“어라···?”
그런데 느낌이 이상했다.
마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무언가··· 무언가···.
바로 그때.
“서, 성녀님!!”
마을 안 쪽에서 로라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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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지배하는 공포.
이성 한켠에 자리잡은 본능이 지워진다.
아무런, 아무런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나태의 악마, 누르비아를 비롯한 수많은 강적을 만나온 시안이었다.
그간 수많은 역경과 불가능을 이겨내온 시안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격이 다르다.
상황 자체가 결을 달리했다.
한곳에 모인 데스 나이트들은 눈에 보이는 역병이나 다름 없었다.
존재만으로도 주변을 오염시킨다.
아까까지만 해도 즐겁게 호흡했던 기운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은 오로지 죽음의 기운만이 드리울 뿐이었다.
시안은 억지로 고개를 들었다.
시안을 바라보는 검푸른 안광이 보인다.
표정은 볼 수 없었고, 그렇기에 읽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주변으로 느껴지는 분위기는 볼 수도, 읽을 수도 있었다.
죽음(死).
데스 나이트는 살아 생전 뛰어났던 기사가 원한에 사무쳐 탄생한 마(魔)의 존재다.
그리고 눈앞의 데스 나이트.
이 데스 나이트는 뛰어났다, 라는 단순한 표현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인간이었던 시절에 아마 적수를 찾기 힘들 정도의 수준이었던 것 같았다.
그런 자가 원한에 사무쳐 데스 나이트가 되었다.
세월의 연륜이 쌓였고, 마(魔)에 잠식되어 그 광기는 더욱 짙어졌다.
인간 이었을 적, 고결한 혼을 가진 존재일수록 마(魔)에 잠식된 힘은 더욱 증폭된다.
그렇기에 시안은 확신할 수 있었다.
눈앞의 데스 나이트는 듀라크와 대적해도 쉬이 밀리지 않으리라.
그리고.
-교황청의 사람들을 죽여라.
-교황청의 사람들을 죽여라.
-교황청의 사람들을 죽여라.
그와 비슷한 수준의 데스 나이트가 무려 30이다.
지금 시안에게 죽음을 윽박지르는 존재들 하나하나가.
전부 마스터(Master)의 존재들이다.
-교황청의 사람들을 죽여라.
그리고 이들이 데스 나이트가 되었던 계기가 다름 아닌 교황청에 대한 원한이었던 듯 싶었다.
물론 시안은 교황청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저들이 갖는 원한의 대상 또한 아니었다.
그러나 소용 없다.
원한은 계기일 뿐, 저들은 이미 광기에 삼켜졌다.
-교황청의 사람들을 죽여라.
-교황청의 사람들을 죽여라.
지금은 그저 생명의 죽음만을 갈구하는 데스 나이트(Death Knight)일 뿐이었다.
도망쳐야한다.
어째서 뮤리엘의 유적에 이런 존재들이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건 도저히 어찌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여기 모인 데스 나이트 하나도 감당할 수 없거늘.
이건 시안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니 도망쳐야한다.
하지만.
“커헉···!”
시안이 피를 왈칵, 토했다.
몸을 쉬이 움직일 수 없다.
오직 기세만으로 억눌린다.
조금이라도 마음을 꺾는다면 존재가 삼켜질 어둠이 밀려온다.
치명적인 본능이 경고한다.
반드시 이곳에서.
죽는다!
쐐액!
공기가 찢어지는 파쇄음.
시안은 뿌득, 근육에 힘을 주어 몸을 뒤로 젖혔다.
그와 동시에 눈앞으로 날카로운 검이 지나간다.
그 위로 끔찍한 살기가 느껴진다.
코끝이 살짝 베이며 붉은 선혈이 맺혔다.
언제 검을 휘둘렀는지도.
어찌 반응을 한 것인지도.
이해할 수가 없다.
다만 조금이라도 반응이 늦었다면.
그대로 목이 잘렸다는 명백한 사실만이 인지될 뿐이다.
-교황청의 사람들을 죽여라!
쐐애액!
시야가 확장된다.
명백한 공포에 되려 이성이 날카롭게 예민해진다.
싸우면 반드시 진다.
이길 수 있는 그 어떠한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유적 밖으로 나가야한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한 가지, <뮤리엘의 축복>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싶은 아쉬움이 들었다.
시안의 모든 신체 능력을 10배 상승시켜주는 사기적인 버프.
그것만 있었다면 대적할 수는 없을지라도 어찌 도망칠 수는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 <뮤리엘의 축복>을 쓸 수 없었다.
당장 현질할 돈도 없었다.
역시.
레이첼에게 돈을 뜯어냈어야했다.
짙은 아쉬움이 일었다.
하지만 지금와서 그런 후회는.
쿠르르르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데스 나이트들이 진군을 시작했다.
눈앞의 데스 나이트는 움직이지 않았다.
듀라크와 대적할 수준의 데스 나이트.
저 데스 나이트가 움직였다면 시안은 아무것도 못하고 죽었으리라.
이걸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아니면 희망 고문이라고 해야할까.
빠아앙!
공기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시안의 몸이 크게 뒤로 밀려났다.
시안은 곧장 인벤토리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생각을 접는다.
할 수 있냐 없냐의 문제 또한 생각하지 않는다.
덮쳐오는 데스 나이트 군단들.
시안은 반동으로 몸을 뒤로 날리며 SS등급의 검을 크게 휘둘렀다.
꽈앙─!
폭음과 함께 검위로 끔찍한 힘이 느껴졌다.
“커헉···!”
단순히 막아낸 것임에도 근육이 파들파들, 떨려왔다.
막은 것이 아니라 검과 함께 후들겨 맞은 충격이 느껴진다.
SS등급의 검이 아니었다면 버틸 수조차 없었으리라.
쐐애액!
시안의 옆으로 다시 한 번 공기가 찢어진다.
이곳에 있는 데스 나이트는 대략 30.
하나를 막은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게다가 마스터 수준의 기사가 틈을 노리고 내지르는 일격이다.
현재 시안의 수준으로는 막을 수도, 대응할 수도.
콰직─!
피할 수도 없었다.
“크학···!”
내부가 뒤집힌다.
왈칵, 하며 피가 쏟아진다.
다행히 베이진 않았다.
S등급에서 업그레이드한 SS등급의 방어구.
그것이 일격을 막아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들려온 소리 또한 파육음이 아니었다.
SS등급의 방어구가 깨지는 소리.
일격에 방어구가 깨졌지만 S등급이었다면 그대로 같이 베어졌을 터.
마스터의 일격을 막은 SS등급의 방어구가 대단한 걸까.
아니면 SS등급의 방어구를 깨부순 저 데스 나이트들이 대단한 걸까.
알 수 없다.
중요하지도 않고.
다만 한 가지 명백한 사실만을 알려줄 뿐.
‘도망칠 수 없다.’
저 데스 나이트들을 무시하고 도망칠 수 없다.
도망치기 위해서는 틈을 만들어내야한다.
아주 미약한 틈이라도 만들어 그것을 비집어야한다.
허나, 30의 데스 나이트.
하나 하나가 전부 마스터에 이르는 수준.
저들을 상대로 틈을 만드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그러나 불가능하다고 해서 이대로 죽을 수만도 없다.
까드드득!
시안의 입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함께 시안은 마혼제법의 구결을 되뇌었다.
근원의 힘이 반응한다.
역병의 흡수와 더불어 상승된 진행률에 끔찍한 마기(魔氣)가 터져나온다.
칠흑보다 더 어두운.
근원의 마(魔)가 시안의 전신에서 피어올랐다.
그것은 시안을 잠식한 죽음에게 복종을 강요한다.
아무리 마스터 수준에 이른 데스 나이트라고는 하나.
결국은 마(魔)에 기반한 존재다.
또한 엑시드(Exceed), 그 너머의 경지.
최강의 아르나이즈, 카일에 비할 바가 못되리라.
그러니 카일의 마혼제법(魔魂制法).
그리고 시안의 수라천살(修羅天殺).
허나, 이것으로 데스 나이트들을 쓰러뜨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잠시 나마 틈을 만들 수는 있으리라.
사아아아악─!
피어나는 모든 어둠이 시안 앞에 굴복한다.
데스 나이트의 어둠이, 시안의 마(魔)에 굴복하여 흩어진다.
시안은 SS등급의 검을 꽈득, 움켜쥐었다.
그 순간.
뚝.
이런 소리가···.
들려온 듯한 착각이 일었다.
마치 시간이 정지되어버린 듯.
모든 데스 나이트들이 일시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검을 치켜든 자세.
시안에게 달려들던 자세.
시안을 향해 검을 휘두르던 자세.
말 그대로 시간이 정지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데스 나이트들의 검푸른 안광이 일렁인다.
모두 투구를 쓰고 있어 표정을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투구 안의 어둠에서 일렁이는 안광.
그 안광에서는 뚜렷한 감정을 읽을 수가 있었다.
명백한 당황.
그리고 경악에 기반한 놀람.
철컥.
그 사이로 한 데스 나이트가 움직였다.
듀라크와 대적해도 쉬이 밀리지 않을 데스 나이트.
그 데스 나이트가 시안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내딛었다.
철컥, 거리는 갑옷 소리가 들려온다.
어찌된 일인지 시안을 바라보는 두 안광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갑자기 데스 나이트가 몸을 낮추었다.
그리고 시안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주, 주군!!!
데스 나이트가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주군!!!
-주군!!!
-주군!!!
30의 데스 나이트들 모두가 시안을 향해 한 쪽 무릎을 꿇어보였다.
모든 데스 나이트가 시안을 향해 무릎을 꿇어 그 예를 다하니.
“······ 에···?”
시안은 저도 모르게 이런 소리를 내뱉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