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질하는 영주님!-86화 (86/322)

§ 86화 - 황녀의 방문(3)

두 눈 앞으로 보이는 귀신의 형체.

엘레나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어쩐지 처음에 들려왔던 소리가 목소리라고 하기엔 미묘했다.

목소리라기보다는 어떤 의지.

그것도 뇌리에 직접 박히는 무엇이었다.

-귀신 처음 봐?

처음 본다.

물론 엘레나는 황궁 밖을 많이 나가보지는 못했다.

여기 루벤으로 온 것도 꽤나 이례적인 일이었다.

황궁 안에서 보고 배운 것은 많았다.

그렇기에 사령(死靈)이라는 존재를 알고 있었으나.

그 사령이 대체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

엘레나는 순간 몸이 굳어버렸다.

하지만 두려움에 몸을 떠는 추태는 보이지 않았다.

황녀로서의 품격이 그렇게 만들었고.

또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을 예일에 대한 믿음이 그렇게 만들었다.

아직 예일이 나서지 않았다는 것.

그렇다는 건 이 귀신이 딱히 위험하지 않다는 것이었으니까.

“저를··· 부르신 건가요?”

-그래 너. 그럼 내가 누굴 불렀겠니?

“누구시죠···?”

-나? 레아.

레아는 그렇게 말한 뒤 엘레나의 주위를 한 번 돌아보았다.

짙은 회백색의 눈동자가 엘레나를 향한다.

-음··· 오빠를 닮아서 그런가? 확실히 얼굴은 제법 예쁘네. 응? 잠깐. 아니지?

다시 바라보는 시선.

-오빠가 아니라 나를 닮은 건가?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엘레나는 당최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슨 일로 저를 부르신 거죠?”

엘레나가 레아에게 물었고.

레아가 눈을 치켜 뜨며 곧장 말했다.

-너 말이야. 아멜리아한테 듣자 하니까 시안이랑 결혼 이야기가 오고 갔었다며?

엘레나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아멜리아는 또 누군지 잘 모르겠으나.

시안과 결혼 이야기가 오고 간 건 사실이긴 했으니까.

정확히는 자신이 꺼낸 이야기였지만.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이윽고 레아가 어처구니 없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잘 들어. 시안이는 내가 천 년 전에 점찍어 놨어. 그러니 시안이랑 결혼하려면 천 년은 기다리라고. 어딜 새치기야? 새치기는?

“새치기···?”

엘레나는 뭔가 싶었다.

천 년전에 루벤의 영주를 점찍어 놓았다니?

그 말은 이 귀신이랑 루벤의 영주가 천 년전부터 이어온 인연이라는 뜻?

그럴 리가 없었다.

아무리 젊게 보여도 루벤의 영주가 1,000살은 아니었으니까.

애초에 지금 눈앞에 있는 귀신도 1,000살로 보이지 않았다.

뭐, 귀신이니 그럴 수 있다만은.

그럼에도 외모로만 보이는 나이는 자신보다 조금 윗년배 정도?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았다.

레아가 눈을 가늘게 떠보였다.

-야.

그리고 또 야라고 불렀다.

분명 야라고 불렀다.

“무례하시군요.”

엘레나가 눈을 치켜뜨며 일갈했다.

아무리 인간이 아닌 귀신이라도 이 이상의 무례는 용납할 수 없었다.

“계속 무례하게 대하신다면 저도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엘레나가 몸을 바로 하며 소리쳤다.

황녀로서의 품격과 기품.

그에서 비롯되는 위엄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뭐? 무례? 이년이? 누가 할 소리인데?

레아가 되려 섬뜩한 기운을 풍기며 엘레나에게 다가왔다.

바로 그때.

“더 이상의 행동은 용서하지 않겠다.”

예일이 벼락처럼 다가와 엘레나의 앞을 막아서보였다.

말 그대로 눈에 보이지도 않은 속도로 다가온 예일이었다.

과연 마스터(Master) 중급의 실력자라 할 수 있었다.

레아는 뚝, 하고 자리에 멈춰섰다.

가만히 시선을 들어 예일을 바라봤다.

그리고.

-너 혹시 저 계집애를 호위하는 기사야? 그러니까 오빠를 따르던 기사단?

“이 앞에 계신 분은 제국의 황녀님이시다. 그러니 말을 삼가라. 지금까지는 몰랐으니 넘어간다만, 더 이상 무지로 인한 무례는 용납하지 않겠다.”

예일의 섬뜩한 기세가 터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검을 뽑아들어 레아를 겨누었다.

마스터가 내뿜는 기운.

그것은 오로지 기세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살의(殺意)를 담고 있었다.

아무리 형체가 없는 귀신일지라도 마스터를 감당할 수는 없을 터.

그런데 대체 왜일까.

-넌 내가 누군지 알고 나한테 검을 겨눠? 게다가 날 상대로 살기까지? 이것들이 쌍으로···!

레아는 전혀 위축이 되지 않았다.

되려 소름끼치는 기세를 피워올렸다.

예일을 압도하는 살기.

-너 이거 반역이야.

끼야아아아아아아악!!!!

끔찍한 귀곡성(鬼哭聲)이 터져나왔다.

그와 함께 피어나는 어둠이 주변을 잠식한다.

지옥의 이명이 들려온다.

청각을 마비시키는 공포는, 죽음의 사선에 서 있는 듯한 착각마저 일었다.

그리고.

주륵···!

예일의 입가에서 한줄기 붉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

엘레나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설마 잘못 본 것인가 싶어 다시 한 번 학인했다.

그러나 예일의 입가에는 선명한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이건··· 절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로열 나이츠 제 2기사단의 단장, 예일.

예일은 무려 마스터(Master) 중급의 실력자였다.

제국 제 2의 검하면 빠지지 않고 오르는 인물이었다.

그 말은 즉.

예일을 제압할 수 있는 이는 대륙에 거의 없다시피 했다.

물론 지금 예일이 엘레나까지 보호하느라 무리를 한 영향도 없잖아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저 레아라는 귀신도 마찬가지였다.

레아도 딱히 진심인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예일이 어찌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대체 어떻게···!”

-너넨 안 되겠다.

레아가 짙은 어둠을 흩뿌리며 다가왔다.

예일이 이를 까득, 깨물며 밀려오는 어둠에 저항했다.

아무리 그렇다할지라도 마스터는 마스터.

예일은 최대한의 오러를 끌어올리며 다가오는 레아를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바로 그때.

“잠깐!!!”

그 사이를 가로막는 크나큰 외침이 들려왔다.

바라본 그곳.

그곳엔 시안이 서 있었다.

시안은 한 쪽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있었다.

상당히 골치 아픈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안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 걸어왔다.

그와 동시에 피어나던 어둠이 일시에 사그라 들었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시안! 얘가 버르장머리 없게 대들잖아!

레아가 시안에게 달라붙으며 소리쳤다.

-게다가 날 향해 살기를 피워올리는데, 엄청 무서운거 있지!

그러면서 세상 약한 척을 해보이는데···.

방금까지 예일을 압도해놓고 저게 할 소리인가?

엘레나가 살짝 시선을 돌아봤다.

그곳엔 예일이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다.

입가에 번져있는 피.

다행히 시안이 나서주었기에 망정이지.

솔직히 무서운 건 이쪽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안.

시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황당한 표정의 엘레나.

거친 숨을 내뱉으며 입가에 흐르는 선혈을 닦아내는 예일.

그 뒤로 황급히 달려오는 로열 나이츠 기사들을 볼 수 있었다.

기사들은 엘레나를 보호하며 저마다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는 흉흉한 기세를 풍기며 레아를 바라봤다.

“하아···.”

시안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었다.

이럴까봐 레아를 영주성 밖으로 내보냈거늘.

또 빨리 엘레나를 루벤에서 내보내려고 했거늘.

-저저! 지금 누구한테 기세를 흩뿌려? 저 놈들 전부 다 반역이야!

“저런 사악한 존재가 왜 영지에 있는 거죠?”

기어코 사단이 나버렸다.

레아와 엘레나가 시안을 향해 소리쳤다.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해달라는 듯한 눈치였다.

지끈거리는 머리.

뭐, 누굴 탓하랴.

100만 골드에 눈이 멀어버린 시안 탓이지.

그래도 다행인 건 늦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

시안이 한스의 보고를 듣자마자 달려온 덕에.

그리고 로열 나이츠의 단장, 예일이 시간을 벌어준 덕에.

레아가 엘레나를 털려는 그 시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뭐, 설마 하니 레아가 엘레나를 해코지 하지는 않았겠지.

애초에 레아가 그럴 성격도 아니었고.

다만, 좀 몇 마디 하려는 생각이었던 것이었겠지.

물론···.

아리아 때를 생각하면 혼쭐 정도까지 갈 수도 있었다.

황녀를 혼쭐 낸다니.

이 무슨 끔찍한 소리란 말인가.

그런데 사실 뭐.

‘레아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고.’

레아의 입장에서는 그럴 만도 했다.

레아는 무려 샤를롯의 여동생이었다.

엘레나가 아무리 황녀라고는 하나.

레아한테는 그냥 까마득한 후손이었다.

그런 까마득한 후손이 바락바락, 대들기나 하니.

시안 같아도 열불이 치솟을 터였다.

지금 이 상황도 엘레나가 후손이랍시고 레아가 엘레나를 많이 봐준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저기 레아한테 검을 겨누는 로열 나이츠들.

솔직히 말할까?

싸그리 잡아다가 반역으로 참형시켜도 할 말 없었다!

하지만 그건 레아가 누군지 알고 있을 때의 이야기.

저들은 레아가 누군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할까···.’

시안은 심히, 심히 고민이 되었다.

설명한다 한들 믿기는 할까?

‘에이, 모르겠다.’

괜히 얼버무렸다가 또 무슨 오해를 할지 몰랐다.

정확히는 무슨 상황이 벌어질지 몰랐다.

그러니 믿든 말든.

알아서 생각하겠지.

시안은 고민 끝에 엘레나에게 말했다.

“미리 말씀을 드렸어야 했습니다만··· 여기 레아는 사악한 존재가 아니라 저희 루벤의 수호령입니다.”

“수호령이요?”

시안은 고개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고 믿기지 않으실지 모르겠지만, 레아는 황녀님의 오랜 조상이십니다.”

“······?”

저건 또 무슨 소리일까.

엘레나의 표정이 뭐라 설명할 수 없게 일그러졌다.

오랜 조상이라니?

저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리고 오랜 조상이 왜 여기 루벤에 있는 거란 말인가.

또 조상이라면 언제적 조상을 말하는 건가.

그러고보니 아까 전.

저 귀신이 천 년전에 루벤의 영주를 점찍었다고 했었지.

그럼 천 년전의 조상?

천 년전이라면···.

“설마 샤를롯 대제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르나이즈 샤를롯밖에 없었다.

그러자 시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샤를롯 대제의 여동생 분이십니다.”

“그게 무슨···!”

엘레나의 두 눈이 찢어져라 떠졌다.

뚜렷한 충격과 경악이 엘레나의 표정에 새겨졌다.

“지금··· 지금 저를 놀리시는 건가요?”

엘레나는 살짝 화가 난 눈으로 소리쳤다.

솔직히 믿기 힘들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이건 놀리는 것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바로 그때.

-야. 너 황녀라고 했었지? 그럼 지금 내가 쓰던 방쓰고 있겠네? 천장에 달린 간당간당한 샹들리에가 언제 떨어질지 모를 그 방 말이야.

시대적인 차이가 있었으나.

엘레나와 레아는 그 지위가 같다고 볼 수 있었다.

엘레나의 눈에 잠시 이채가 서렸다.

레아가 말한 방이 맞는 모양인 듯 싶었다.

그런 엘레나의 반응에 레아가 다시 말했다.

-그 샹들리에 바로 아래 쪽 바닥을 살펴보면, 숨겨진 방으로 갈 수 있는 장치가 있지?

“······!!!”

일순간 엘레나의 두 눈이 부릅, 떠졌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레아의 말.

저건 다른 사람이 쉬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황족의 일원이 아니면··· 아니, 같은 황족의 일원도 잘 알지 못했다.

그 방을 직접 써보지 않으면 알 수 없었으니까.

해서 엘레나는 종종 혼자 있고 싶을 때.

그 방에 들어가 조용히 휴식을 취하곤 했다.

아늑하기도 했거니와.

방의 디자인 마음에 쏙 들기도 했었으니까.

“그, 그, 그걸 어떻게···?”

-그거 내가 모르크루한테 만들어 달라고 몰래 부탁한거야 이 기집애야. 오빠가 시도때도 없이 찾아와서 영 귀찮은 게 아니었거든.

심지어 그 용도 또한 비슷했다.

엘레나는 충격에 빠진 듯 말이 없었다.

시안은 그런 엘레나에게 말했다.

“그러니 그··· 할머니의 오지랖이라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너무해! 할머니라니! 이렇게 젊은 할머니가 어디 있다고!

그러자 레아가 충격 먹은 표정으로 소리쳤다.

솔직히 나이만 따지면 할머니도 젊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내뱉지는 않았다.

-시안, 너도 결국 젊은 것이 좋다 이거지! 흥이다!

그리고는 레아가 엘레나를 향해 버럭, 소리쳤다.

-이년아, 너라고 1,000살 안 먹을 것 같아?

먹고 싶어도 못 먹지 않을까?

시안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 역시 굳이 내뱉지는 않았다.

이윽고 레아가 새침한 눈으로 시안을 흘겨봤다.

시안은 그런 레아에게 나지막히 속삭였다.

“황녀님은 아무것도 모르시잖아요. 아무것도 모르는 후손의 치기라 생각하고 레아가 너그러이 이해해주세요.”

-아니! 이해 못 해!

그러더니 레아가 고개를 홱,하니 돌려버렸다.

뾰루퉁한 표정이 어째 삐쳐도 단단히 삐친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방금 자기 편을 들어주지 않은 게 많이 섭섭한 것 같았다.

-무엇보다 저 계집애가 새치기했잖아!

“네? 새치기요?”

-쟤랑 너랑 결혼한다며!

시안의 고개가 저도 모르게 기울어졌다.

결혼 이야기가 오고 간 건 사실이나.

그게 결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지 않은가.

무엇보다 그건 방금 있었던 일인데 레아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건데?

“누가 그래요?”

-아멜리아가!

“아멜리아가 무슨··· 아.”

시안은 퍼뜩, 떠오르는 기억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다름 아닌 루벤으로 오기 전.

그러니까 서부에서 루벤으로 떠나기 직전.

시안은 아멜리아에게 황녀와의 혼사가 오고 갔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물론 거절했다고는 했었지만.

아무래도 그 말이 레아에게 전혀지며 오해가 있었나보다.

“결혼 안 해요. 결혼 이야기가 오고 가긴 했는데 제가 거절했습니다.”

-응? 정말?

그러자 레아가 반색하며 답했다.

돌아본 시선.

방금까지 삐쳤던 기색은 온데간데 없었다.

“네. 그러니까 화 푸세요.”

-음··· 뭐. 음··· 그렇단 말이지?

레아가 슬쩍, 딴청을 피워보였다.

동시에 백은색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꼬아보였다.

그러다가 다시 시안을 바라보더니.

-그럼 뭐. 내가 또 이해해줄 수 있지!

배시시, 웃어버리는 레아였다.

-하지만 괘씸해. 새치기 하려 했잖아.

그러다가 다시 새침해지는 레아.

그런 레아의 모습에 시안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하여간 레아는 역시 레아였다.

시안은 투덜투덜, 거리는 레아를 뒤로 한 채 다시 엘레나를 바라봤다.

충격과 경악으로 물들어 있는 엘레나의 표정.

어지간히 충격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니 제가 대신 사죄드리겠습니다.”

시안은 엘레나에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리고 그런 시안을 바라보던 엘레나.

“아··· 네. 뭐.”

엘레나는 얼떨결에 그리 대답해버렸다.

“하오나 황녀님, 저 말을 믿는 것은···.”

“괜찮아요.”

그 모습에 예일이 잠시 나섰으나.

엘레나는 되려 그런 예일을 막아서보였다.

솔직히 엘레나도 믿는 것은 아니었다.

천 년전, 샤를롯 대제의 여동생이라니.

말이 안 되지 않은가.

무엇보다 설령 그렇다 한들.

그런 레아가 여기 루벤에 있는 것도 설명이 안 되었다.

그러나 방금 황궁의 방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는 것.

마냥 거짓은 또 아닌 것들이 있었다.

해서 엘레나는 시안의 말을 온전히 믿지도.

그렇다고 아주 믿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걸 전부 떠나서.

엘레나는 레아의 행동을 딱히 뭐라할 생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보이는 예일의 모습.

입가에 번져있는 선혈과 잔뜩 찡그린 인상.

자신의 오랜 조상이고 나발이고를 떠나서.

저 레아는 예일도 어찌하지 못하는 존재였다.

그런 존재를 상대로 무례는 뭔 놈의 무례란 말인가.

용서하기 싫어도 용서해야만 했다!

엘레나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고.

시안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예일 경이 다치신 것 같은데··· 저희 영지에 실력 좋은 치료사가 있으니 치료를 받으심이 어떠하겠습니까.”

시안의 말이었음에도 예일은 움직이지 않았다.

치료를 받는 동안 엘레나를 호위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영주님 말씀대로 하세요.”

엘레나가 그런 예일을 다독였다.

“하지만···.”

“괜찮아요. 보아하니 저를 더 이상 적대할 것 같지는 않으니까요.”

솔직히 처음부터 적대한 것 같지는 않기도 했고.

엘레나의 말에 예일은 잠시 고민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상이 생각보다 심각했으니까.

아무리 엘레나를 보호하느라 무리를 했다고는 하나.

이렇게까지 내상을 입을 줄은 몰랐다.

예일이 살짝 시선을 돌려 레아를 바라봤다.

형체만 사령일 뿐, 외견 상으로 그냥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방금 말에 따르면 천 년전.

샤를롯 대제의 여동생이라는데···.

예일은 당연히 믿지 않았다.

믿는 게 이상했다.

하지만 엘레나가 막아서니 그저 따를 뿐이었고.

또 예일은 다른 생각을 할 뿐이었다.

전력을 다한다 해도 승부를 장담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면 지는 것은 이쪽일 것 같았다.

그럼에도 예일은 목숨을 걸고 엘레나를 호위할 것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이렇게 흘러간 지금.

마냥 그럴 수만은 없는 이유도 있었다.

지금이야 상관없었지만 3일 뒤.

루벤에서 다시 황궁으로 돌아갈 때 내상이 도진다면 그것대로 문제였다.

그러니 지금은 내상을 치료를 하는 것이 엘레나의 안전에 더 도움이 되는 길.

예일은 끝내 결정을 내렸다.

“단원들에게 단단히 일러두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엘레나.

“한스. 예일 경을 치료원에 모셔다 줘.”

그런 둘의 모습에 시안은 뒤 따라온 한스에게 예일을 맡겼다.

#

그렇게 얼추 상황이 정리된 직후.

시안은 레아와 함께 영주성으로 돌아왔다.

-그 계집애. 왠지 나랑 닮아서 더 싫어.

레아는 영주성까지 오면서 계속 뭐라뭐라 중얼거렸다.

괘씸하다느니.

자기랑 닮아서 나를 욕하는 것 같다느니.

-그냥 내쫓아버리면 안돼?

결국 엘레나를 내쫓아달라고 부탁까지 해왔다.

뭐, 사실 시안도 불편한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미 100만 골드를 받아버렸으니까!

3일 꾹, 참고 100만 골드.

이보다 수지 맞는 장사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3일 뒤에 떠난다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3일··· 천 년을 기다렸는데도 3일이 이렇게 길게 느껴질 줄이야.

레아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렇게 다시 집무실로 돌아온 시안.

그런 집무실의 책상 위에는 아리아의 편지가 아무렇게나 놓여져 있었다.

황급히 뛰쳐나가면서 던져놓다시피 했던 편지.

시안은 다시 편지를 집어 들었다.

‘악마 탐지기가 작동하지 않는다라···.’

그리고 그런 생각이 가능한 경우는 하나.

아리아는 누군가를 악마로 확신하고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 때문인가?’

아무래도 이 아리아의 편지 때문에 스토리 퀘스트가 반응한 것 같았다.

카일이 마주했던 모종의 진실.

그러나.

‘그런데 퀘스트 내용이 달라지지 않았단 말이지.’

편지의 내용을 확인 했음에도.

퀘스트의 내용이 달라지질 않았다는 것이었다.

다른 무언가가 있나 싶었지만···.

모바일 영주의 점검이 끝나지 않은 터라 마땅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음···.’

시안은 잠깐의 고민 끝에 레아에게 말했다.

“레아. 저번에 말했던 악마 탐지기 말이에요.”

-악마 탐지기···? 아, 응. 그게 왜?

“그거 레아한테도 반응한다고 했었죠?”

-그럴 걸? 변형된 마기를 탐지하는 거였는데, 짙은 마기에도 반응했었으니까. 그래서 카일한테 엄청 반응했었고.

“그런데도 그때 레아한테 반응하지 않았고요.”

-그랬었나···?

저번에도 그렇고 레아는 기억을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시안은 분명 반응하지 않았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진짜 고장났었나 본데.’

결국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럼 고장난 것을 판 것이니 뭐라도 해야하는데···.

‘무상 수리는 이용 약관에 없었는데.’

제리가 연구하던 마도구라도 빌려줘야하나.

라는 생각이 들던 찰나였다.

벌컥!

“도련님 큰일 났습니다!!”

갑자기 집무실 문이 벌컥, 열리며 한스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에 시안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또 무슨 일인데?”

“지금 루벤의 병사들과 로열 나이츠 기사분들이···!”

아주 지랄 났다. 지랄 났어.

아니, 지금 사건이 해결된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사건이란 말인가.

영주성에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잘못 생각한 것 같았다.

100만 골드는 염병.

“지금 당장 이 골칫덩이 황녀를 내쫓아버리든가 해야지.”

-그래! 어서 내쫓아! 내쫓아 버려!

레아의 응원 아닌 응원과 함께 시안은 곧장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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