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 새로운 길
묵직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드리운 어둠과 잠식된 공포가 일시에 사라진다.
그와 함께 어둠 속에서 쏟아지던 마물들 또한 사라졌다.
마치 존재의 근거를 잃어버린 듯.
그들이 태어난 어둠으로 다시 빨려들어갔다.
그리고 허물어진 검은 로브 사이로 쌓여있는 뼈 무더기.
시안은 그 뼈 무더기 앞에 서 있었다.
“방금 대체···!”
알렉스가 경악 어린 시선으로 시안을 바라봤다.
정신이 어둠에 먹혀 흐릿한 기억.
그러나 그 흐릿한 기억 속에서도 뚜렷한 모습은 있었다.
어둠을 끊어내며 리치를 압박하는 시안의 모습.
“대체 어떻게···.”
알렉스는 떨리는 시선으로 시안을 바라만 봤다.
그리고 로열 나이츠라고 그런 알렉스와 다르지 않았다.
방금 시안과 리치의 전투를 두 눈 똑똑히 봤으니까.
심지어 시안뿐만이 아니었다.
마물들을 틀어막던 루벤의 병사들.
로열 나이츠들이 어둠에 먹혀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루벤의 병사들은 어둠에 저항하며 마물들과 싸웠다.
만일 이들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알렉스와 로열 나이츠들은 모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섣불리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그 순간.
휘청.
시안의 몸이 휘청거렸다.
시안은 쥐고 있던 SS등급의 검을 바닥에 꽂아 몸을 지탱했다.
“허억···! 허억···!”
시안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 순간 가슴 쪽으로 뜨거운 무언가가 느껴졌다.
시안은 한 손을 들어 가슴을 매만졌다.
그러자 끈적한 피가 손 가득히 묻어나왔다.
아무래도 리치에게 한 방 먹은 것 같았다.
“커헉···!”
다시 몸이 크게 꺾이며 피가 왈칵, 쏟아져나왔다.
긴장이 풀리며 끔찍한 격통이 휘몰아쳤다.
아득해지는 정신.
“젠장···.”
시안은 떠나려는 정신을 억지로 부여잡았다.
전투의 양상은 시안이 리치를 압도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리치는 언데드 최상위 마법사.
그것도 존재가 마땅히 받아들여야할 죽음을 부정하며 태어난 악마(惡魔)였다.
비록 나태의 악마, 누르비아보다는 약했으나.
악마(惡魔)는 악마(惡魔)였다.
로열 나이츠들은 물론이고.
단장인 알렉스마저 쉽사리 어찌하지 못했던 존재.
만일 시안이 카일의 마혼수라검(魔魂修羅劍)을 배우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마혼제법(魔魂制法)을 익히지 못했더라면.
그리하여 리치의 어둠에 대항하지 못했더라면.
시안은 리치에게 반항조차 못하고 죽었을 터였다.
“커흑···!”
심지어 둘 모두를 어느 정도 수련하고 있음에도 이 꼴이었다.
그나마 S등급의 방어구가 막아주었기에 망정이지.
S등급의 방어구가 아니었으면 죽어도 진즉에 죽었을 것이었다.
‘세미르한테 말해서 S등급의 방어구도 강화를 해야겠는데.’
아무래도 루벤으로 돌아갈 때 강화 재료들을 사가야할 것 같았다.
띠링!
[마혼수라검(魔魂修羅劍) 초급 진행률 45.6%(+1.5%)]
이 더럽게 안 오르는 진행률도 어떻게 해야할 것 같았고.
시안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자, 자네···! 괜찮나!”
일순간 알렉스가 옆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시안은 바닥에 꽂은 SS등급의 검에 몸을 지탱한 채 말했다.
“괜찮습니다··· 쿨럭!”
하지만 몸 상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시안의 몸이 크게 꺾였다.
알렉스가 잡아주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넘어질 뻔했다.
“전혀 안 괜찮아 보이는군.”
알렉스가 시안의 몸상태를 살폈다.
그리고 처참하다시피한 상태를 확인하고는 놀라 소리쳤다.
“이런 몸상태로 어찌···! 이, 일단 서둘러 돌아가세!”
알렉스는 시안의 몸을 부축해주었다.
시안은 알렉스의 부축을 받으며 이동했다.
“그런데 어찌 쿠슬라 산맥에 마족이···.”
걸음을 옮기며 알렉스가 중얼거렸다.
시안은 입가에 흐르는 피를 소매로 훔치며 말했다.
“마족이 아닙니다.”
“마족이 아니라고?”
시안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답했다.
“악마입니다.”
“아, 악마?!”
알렉스가 크게 놀라며 소리쳤다.
그런 알렉스의 외침에 다른 로열 나이츠 단원들도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루벤의 병사들만이 놀라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마족이 아니라 악마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자네!”
알렉스가 소리치듯 물어왔다.
표정을 보아하니 썩 믿는 것 같지는 않아보였다.
믿기 힘들 것이다.
아니, 믿기지 않을 것이다.
천 년전에 사라졌다는 악마라니.
시안 같아도 믿지 않을 터였다.
솔직히 시안도 솔직히 나태의 악마, 누르비아를 만나보지 않았더라면.
레아의 증언이 없었더라면 아마 마족이라 치부했을 터였다.
하지만 리치는 확실한 악마였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쿨럭, 사실입니다.”
“어, 어찌···!”
알렉스는 여전히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시안은 그런 알렉스에게 별 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마땅히 설명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이윽고 알렉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만일 자네의 말처럼 저것이 악마라면··· 악마가 어찌 여기 쿠슬라 산맥에 있단 말인가.”
“그건···.”
그건 시안도 알지 못했다.
일단 어떻게 악마가 부활했는지부터가 의문이었다.
그리고 리치가 왜 여기 쿠슬라 산맥에 있는지 또한 의문이었다.
물론 대충··· 짐작이 가는 것은 있었다.
다름 아닌 리치가 중얼거렸던 말.
군주님들의 계획이 어쩌고 한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누르비아와 관련된 것인 것 같았다.
리치가 군주라 부를만한 존재는 악마 7군주.
아마··· 누르비아가 찾던 무언가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누르비아는 루벤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었으니까.
아마 리치도 그 무언가를 찾기 위해 이곳 쿠슬라 산맥으로 온 것이 아닐까 싶었다.
마물들을 풀어 서부를 휩쓴 것도 그 무언가를 찾기 위함이라면 얼추 들어맞았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모바일 영주 퀘스트도 별 말 없고.’
다름 아닌 스토리 연계 퀘스트 ‘카일이 마주한 진실’.
누르비아에 이어 리치와 마주했음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렇다는 건 카일이 마주한 진실은 단순히 악마가 부활할 것이라는 사실이 아니었다.
카일이 아르나이즈 동료들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홀로 떠나야만했던 이유.
대체 카일이 마주했던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누르비아가 찾고 있는 물건은 또 무엇─.
바로 그때.
흠칫.
시안의 감각으로 섬찟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보다 한박자 늦게 알렉스 또한 움직임을 멈추었다.
딱딱하게 굳어지는 표정.
시안과 알렉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바라본 그곳.
그곳엔 검은 로브 사이로 쌓여있는 리치의 뼈 무더기가 있었다.
그리고 증폭되는 어둠의 기운.
달그락.
리치의 뼈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
사아아아악─!
뼈 무더기 주위로 어마어마한 칠흑의 마력이 폭사한다.
공간이 어둠으로 메워지며 짙은 장막이 펼쳐진다.
촤라라라라락!
뼈 무더기들이 공중으로 치솟으며 하나로 뭉쳐갔다.
이윽고 리치의 몸이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저게 무슨···!”
“말도 안돼!”
병사들과 기사단원들이 눈을 부릅, 뜨며 소리쳤다.
그리고 시안.
시안은 검을 꽈득, 움켜쥐며 리치를 바라봤다.
번뜩!
뻥뚫린 동공에서 다시금 붉은 안광이 떠올랐다.
【어떻게 이런···.】
리치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일순간 휘청거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세웠다.
리치에게 육체는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
리치가 리치로 생존함에 있어 필요하는 것은 하나.
육체와 혼을 계약한 라이프 포스 베슬(Life Force Vessel)이었다.
그것만 살아있다면 이깟 몸뚱이는 얼마든지 재구성할 수 있었다.
존재가 마땅히 받아들여야할 죽음을 부정하며 태어난 악(惡), 리치(Lich).
하지만 지금···.
【쿨럭···!】
리치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앙상하게 남은 뼈에서 나올 것은 없었건만.
격통과 함께 짙은 어둠이 내뱉어졌다.
그와 동시에 리치는 흩어지는 어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하여 라이프 포스 베슬과의 고리가 끊어지고 있음을 인지할 수 있었다.
라이프 포스 베슬에 직접적인 타격이 없었음에도.
지금 그 고리가 조금 끊어졌다.
리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곳엔 시안이 검을 움켜쥔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 하나는 확실했다.
저 인간은 위험하다.
수상쩍은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리치의 검은 로브가 바닥으로 질질, 끌렸다.
그 사이로 리치는 생소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리치가 정말로 오랜만에 느끼는 공포.
그것과 상당히 ‘유사한’ 감정이 휘몰쳤다.
유사하다고 정의한 이유는 단순했다.
지금 느끼는 공포는, 리치 본인조차 알 수가 없었으니까.
단순히 공포라고 하기엔 본질이 달랐다.
인지할 수 없는 미지의 무언가.
정신이 미쳐버릴 것만 같은 공포가 확산되고 있었다.
그렇기에 리치는 지금 느껴지는 이 감정을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아직은 이르다고 생각했거늘···!】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군주들의 부활을 위한 그릇을 찾고.
또 그 분들의 현신을 방해하는 성물을 찾아야했다.
단순히 시간이 끌리는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 실패하면 모든 계획이 어그러진다.
비록 영혼에 심각한 손상을 입겠지만 감수한다.
리치의 앙상한 뼈가 허공을 훑었다.
그와 함께 끔찍한 악의(惡意)가 피어올랐다.
방금 전과는 차원이 다른.
세포 하나하나가 얼어붙으며 심장이 고동친다.
억눌러놓은 포악한 힘.
그 난폭함은 끔찍한 해방을 맞이하며 사방으로 날뛰기 시작했다.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악의(惡意).
타닥!
시안은 고민도 않고 뛰어들었다.
리치가 무얼하는지 모르겠지만 저대로 두어서는 안된다.
지금 감각으로 느껴지는 악의는 감당할 수가 없다.
시안은 SS등급의 검을 꽈득, 움켜쥐었다.
그와 동시에 마기를 터트리며 리치를 향해 휘둘렀다.
쩌엉─!
그러나 검이 가로막히며 둔탁한 굉음이 터져나왔다.
SS등급의 검 위로 일렁이는 마기는 어둠의 장막에 막혀 나아가질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둠의 장막 속.
【강제로 현신하게 만들 줄이야.】
마주하는 리치의 붉은 안광이 시뻘겋게 타올랐다.
콰직─!
전신을 강타하는 통증과 함께 시안의 몸이 튕겨져 나갔다.
콰당탕!
허공으로 치솟은 몸이 바닥을 나뒹굴며 끔찍한 고통이 몰아쳐왔다.
리치의 손이 허공을 훑었다.
이윽고 칠흑의 마력이 발하며 수많은 마력의 다발들이 만들어졌다.
하늘 아래 무수히 많은 어둠이 피어난다.
그리고 그 어둠은 긴 잔상을 남기며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콰콰콰콰콰콰쾅!!
무자비한 폭력이 시안이 있는 공간 전체를 뒤덮으며 터져나갔다.
시안은 황급히 몸을 움직였다.
“커헉···!”
그러나 만신창이가 된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다가오는 어둠의 다발.
바로 그때.
쩡─!
쩌정─!
누군가 시안의 앞을 가로막으며 어둠을 베어냈다.
시선을 들어 바라본 그곳.
그곳엔 알렉스가 검을 치켜들며 시안에게 쏟아지는 어둠을 베어내고 있었다.
그렇다고 모든 어둠을 베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크윽···!”
그러나 알렉스는 몸을 아끼지 않았다.
베어내지 못한 어둠은 몸으로 맞으며 시안을 지켜냈다.
“영주님!”
“단장님!”
루벤의 병사들과 로열 나이츠 단원들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찰나의 뚜렷함은 끝내 짙은 어둠 속에서 스러질지니.】
키에에에에에엑─!
리치의 영창과 함께 끝없는 마물들이 쏟아져나왔다.
아까보다 더 많은 수의.
보다 더한 광기가 느껴지는.
“젠장!”
“전원 착검!”
병사들과 기사들은 시안과 알렉스가 있는 곳으로 다가갈 수가 없었다.
쾅! 콰쾅!
어둠의 다발들은 계속해서 쏟아져 내렸다.
알렉스는 몸을 사리지 않으며 어둠을 베어냈다.
피부로 끝으로 느껴지는 끔찍한 악의(惡意).
확실하다.
저건 마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악마(惡魔).
천년 전에 사라졌던 악마가 부활했다.
이유도, 원인도 모른다.
알 수도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알려야했다.
악마의 부활을 알려야만 한다.
이건 비단 제국 서부의 문제가 아니라 대륙 전체와 관련된 일.
이 사실을 황태자에게 알려 대비를 해야한다.
그러나 지금 당장 저 악(惡)에 대항할 수가 없다.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니.
“도망치게!”
시안을 살려보내야했다.
알렉스가 앞선 어둠을 베어내며, 시안을 향해 소리쳤다.
알렉스는 시안의 무위에 거의 전율하다시피했다.
소문과는 전혀 다른 존재.
특히 시안이 펼치는 검술은 경이로웠다.
알렉스가 감히 닿을 수 없는 까마득한 너머의 무(武).
분명한 착각일 것이다.
그러나 알렉스는 시안에게서 마스터(Master), 그 너머의 경지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부족하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완전히 발아하지 않았다.
아직은 부족하다.
꽈꽝!
“커헉···!”
알렉스는 시안에게 향하는 어둠을 몸으로 막으며 생각했다.
살려야 한다.
악마가 부활한 지금.
어쩌면··· 천 년 전의 악몽이 다시 재현될 수도 있었다.
신화 속의 이야기를 들먹일 필요도 없었다.
지금 마주하는 이 악마는 끔찍하기 그지 없었다.
생존이 천박한 농담이 되어버린 시대.
그러니 살려야 한다.
자신이 대신 죽는 한이 있더라도.
설령 로열 나이츠 전원이 희생하더라도.
시안만큼은 살려야한다.
그것이 앞으로 다가올 크나큰 위협을 위한 길이다.
“지금 당장···! 도망치시게!”
알렉스는 이를 까득, 깨물며 소리쳤다.
시안은 그런 알렉스의 말을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부정을··· 할 수가 없었으니까.
지금 저 리치를 상대하기란 불가하다.
개화한 악마(惡魔).
비록 누르비아에 비하면 한없이 나약하다고는 하나.
지금의 시안으로서 대적하기란 불가능했다.
이대로 있다간 모두 죽는다.
그러니 알렉스의 말처럼 둘 중 하나는 도망쳐야한다.
시안은 아무런,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시안의 모습에 알렉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로열 나이츠 기사단들에게 소리쳤다.
“기사단 전원···! 목숨을 걸고 시안 엘란두르와 루벤의 병사들을 보호한다!”
“충!”
로열 나이츠들이 검을 치켜들었다.
누구 하나 도망치는 이 없이 마주하는 악(惡)에 맞섰다.
비록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으나.
이들은 제국 제 1의 기사단이라 꼽히는 로열 나이츠(Royal Knights).
전원 엑스퍼트로 이루어진 실력자들이자.
황가를 수호하는 긍지높은 기사들이었다.
“그대들은 충분히 의무를 다했다!”
“이제부터 여기는 우리가 맡겠다!”
“어서 도망쳐라!”
로열 나이츠 단원들은 죽음을 불사하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 어떤 의지도 쓰러지는 육체를 이겨낼 수 없을지니.】
영창과 함께 리치의 손이 빠르게 허공을 훑었다.
앙상한 뼈가 허공을 스칠 때마다 시꺼먼 빛이 터져나왔다.
사아악─.
살의와 악의. 절망과 분노.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이 덩어리 지어져 끓어 오른다.
“끄아아아아악!”
로열 나이츠 단원들이 끔찍한 비명을 터트렸다.
이윽고 하나 둘씩 자리에 허물어졌다.
그리고.
“커허헉!”
“단장님!”
끝내 알렉스 마저 한계에 닿았다.
내려앉는 절망.
【미약한 불빛에 모인 어리석은 영혼들이로구나.】
리치가 광포하게 웃었다.
“안돼!”
“어서···! 어서 도망쳐라!”
“끄아아아악!”
타락이 대지를 적시고,
하늘의 선한 믿음이 조금씩 좀 먹힌다.
폭사하는 어둠의 마력.
이 거친 타락에는 끝이 없었다.
참으로 비참한 악의만이 가득할 뿐이다.
그렇기에 저 악(惡)을 대적하기란 불가능하나.
“으아아아아아아아!!”
누군가는 반드시 싸워야하는 법이었다.
쩌엉─!
둔탁한 굉음이 터져나오며 들끓는 어둠의 잠시 사그라들었다.
바라본 그곳.
그곳엔 만신창이가 된 시안이 리치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자네!”
알렉스가 소리쳤다.
그리고.
“도망치지 않습니다!”
“끝까지 싸울 겁니다!”
루벤의 병사들이 로열 나이츠 옆으로 서 보였다.
“너희들···!”
“이런 멍청한···!”
기껏 목숨을 걸고 시간을 벌어주었거늘.
제 발로 다시 지옥으로 들어오지 않았는가.
“우리들의 희생을 헛되이 할 셈인가!”
“지금이라도 도망쳐라!”
로열 나이츠 기사들이 소리쳤다.
그런데.
“영주님께서 포기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영주님께서 싸우시는 한. 저희도 끝까지 싸울 겁니다!”
루벤의 병사들은 요지부동이었다.
되려 죽음을 불사하며 확고한 믿음을 보였다.
그 모습에 로열 나이츠 기사들의 정신이 잠깐이나마 멍해졌다.
그리고.
콰르릉!
장막 너머로 느껴지는 힘.
“크윽···!”
시안의 정신이 점멸한다.
【어리석구나.】
리치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콰직─!
섬뜩한 소리와 함께 시안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콰당탕!
몸이 거칠게 쳐박히며 끔찍한 통증이 휘몰아쳤다.
리치가 그런 시안을 향해 다시 한 번 어둠을 피어올렸으나.
그 사이를 알렉스가 끼어들며 가로막았다.
하지만 잠깐의 시간벌이일 뿐.
그걸 알렉스라고 모르지 않았기에
“어서 도망치게!”
알렉스가 시안에게 다시 소리쳤다.
그리고 시안도 알고 있었다.
지금 당장 리치를 대적할 방법이 없다.
지금 이러는 행동조차 무의미한 발악일 뿐이었다.
알렉스와 로열 나이츠를 희생하여 도망치는 것만이.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책이다.
그러나 시안은 차마 도망칠 수가 없었다.
시안이 살아온 세월은 그리 길지 않았다.
성인을 막 넘긴 나이.
죽음을 부정한 리치에겐 찰나의 세월.
지금 저기 알렉스를 비롯한 로열 나이츠 기사들에게도 길지 않은 세월.
그러나.
시안에게 있어서는 평생인 세월이었다.
다짐했다.
다시는 누군가를 버리지 않기로.
버려진다는 아픔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러니 지금 이 행동이 무의미한 일일지라도.
이 한 순간의 선택으로 평생을 저버리고 싶지 않다.
그 순간.
사아아아···.
시안의 시야가 흐릿해지며 환상이 비쳐보였다.
지난 누르비아와의 전투에서 보였던 것과 똑같은 환상.
역시나 그 속에 은발의 미남자가 비쳐보였다.
무구한 대륙의 역사상 유일무이한 존재.
최강의 아르나이즈 카일.
카일은 등을 돌린 자세로 고개만 돌려 시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카일과 시안 사이로 한줄기 길이 펼쳐져 있었다.
평소엔 까마득하고도 아득한 길이었건만.
도저히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길이었건만.
어쩐지 이번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지금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경지에.
시안은 크게 발을 뻗어보았다.
그러다 문득.
멈칫.
시안은 뻗은 발을 멈췄다.
다시 시선을 들어 카일을 바라봤다.
카일은 여전히 등을 돌린 자세로 고개만 돌린채 시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길의 거리.
왜일까.
‘이게 아니야.’
시안은 고개를 저었다.
이 길은.
카일과 시안과의 격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순간 시안의 의식이 확장되었다.
카일은 역사상 그 누구도 닿지 못했던 엑시드(Exceed) 그 너머의 경지.
현재 시안의 수준으로는 까마득하다.
그렇기에 시안은 카일처럼 할 수 없다.
카일이 보여준 마혼수라검을.
카일이 가르쳐준 마혼수라검을.
지금의 시안은 할 수도, 보일 수도 없었다.
지금 펼쳐져있는 이 길에 발을 뻗는다 한들.
저 앞에 있는 카일에 닿을 수 없었다.
그러니 이 길은···.
시안이 걸을 수 있는 길이 아니다.
하지만.
시안답게는 할 수 있었다.
시안만의 방식으로 할 수는 있었다.
카일이 시안에게 가르쳐준 것은 궁극의 무(武).
그러나.
궁극(窮極)은 완벽(完璧)을 의미하지 않는다.
부족하더라도.
재능이 처참하더라도.
나답게.
그래, 나답게.
애써 완벽할 필요없이.
지금 할 수 있는 그대로.
시안은 뻗은 발을 다시 회수했다.
그리고 시안과 카일 사이에 이어진 길이 아닌.
그보다 조금 벗어난 곳.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에 터벅, 발을 내딛었다.
그러자.
촤아아아─.
까마득히 머나먼 길이 시안의 눈앞에 펼쳐졌다.
평생토록 걷는다 한들.
과연 저 끝에 닿을 수 있을까.
모르겠다.
다만 시안은 지금 한 걸음을 내딛었을 뿐이었다.
사아아아···.
환각이 사라진다.
그리고 사라지는 환각 사이로.
정답이다.
카일의 미소가
시안의 귓가에 스친다.
번쩍!
시안의 두 눈으로 칠흑의 어둠이 터져나왔다.
【······!!】
갑자기 휘몰아치는 섬뜩함에 리치가 안광을 부릅, 떠보였다.
저도 모르게 고개가 홱, 돌아갔다.
바라본 그곳엔 시안이 서 있었다.
다를 바 없었다.
만신창이가 된 몸은 툭, 치면 쓰러져 죽어버릴 것처럼 위태롭다.
그런데 이상··· 하다.
뭔가 이상하다.
그리고 위험하다.
상당히, 그것도 상당히 위험하다.
그 순간.
콰콰콰콰콰콰!!
소름끼치는 어둠이 시안의 전신으로 피어났다.
어둠?
저것을 과연 어둠이라 할 수 있을까?
저건 어둠이 아니다.
어둠이라는 존재가 태어난 근원.
마(魔).
【네, 네가···! 네가···!!】
리치는 당황과 경악이 뒤섞인, 확실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힘.
저 힘은 절대 인간이 사용할 수 없는 힘이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근원의 마(魔)는 그 누구도 다룰 수가 없는···!
그 순간.
리치의 머릿속으로 무언가가 떠올랐다.
그건 악마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그리고 괴담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였다.
아득히 먼 세월.
존귀한 7군주 조차 감히 어찌하지 못했던 존재가 있었다.
악마들의 악몽이라 불리던 존재.
허나 그는 죽었다.
필멸자에 불과한 존재는 아득한 세월에 묻혀 사라졌다.
그런데···.
【네, 네 놈 따위가 어떻게···! 네 놈 따위가 어떻게···!!!】
리치가 마구잡이로 손을 휘저었다.
스스로의 영혼을 제물로 바치며 끔찍한 어둠을 피어올렸다.
그러나 사라진다.
피어나는 모든 어둠이 시안 앞에 굴복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세상 만물로 하여금 복종을 강요한다.
리치의 어둠이, 시안의 마(魔)에 굴복하여 흩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한 가지 절대적인 사실을 가리켰다.
죽는다!
라이프 포스 베슬 같은 건 의미가 없었다.
저 힘은 모든 어둠에 대한 절대적인 힘.
반드시라고 할 만큼.
죽는다!
【안돼···! 안돼···!!】
리치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반항할 수 없는 힘이 전신을 억누른다.
그리고 그 사이로.
하나의 거대한 참격이
세상과 함께 리치를 베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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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혼수라검(魔魂修羅劍).
제 1식(第 一式).
수라천살(修羅天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