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 두 가지 선택(2)
드넓다 못해 광활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크기.
그런 황궁의 입구에는 수많은 기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제국의 로열 나이츠(Royal Knight).
엘란두르의 하얀 늑대 기사단(White Wolf Orders)과 더불어 제국에서 제 1의 기사단을 다투는 기사단이었다.
시안은 황궁 앞으로 다가갔다.
“정지. 신원과 목적을 밝히십시오.”
시안이 가까이 다가가자 한 기사가 시안을 막아세웠다.
시안은 기사에게 말했다.
“시안 엘란두르입니다. 황태자 전하를 만나뵙기 위해 방문했습니다.”
“엘란두르···?”
일순간 기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엘란두르의 이름을 모르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그것도 잠시.
기사가 순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황태자 전하를 만나뵙기 위해 방문했다는 말 때문이었다.
“따로 지시받은 사항이 없습니다만.”
하지만 기사는 별도로 지시받은 사항이 없었다.
“어라? 그럴 리가요?”
그런 기사의 모습에 시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번 확인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리고는 기사에게 물었다.
그런 시안의 모습에 기사는 저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시안의 행동.
보아하니 꼴에 엘란두르라고 밀고 들어오려는 심산인 것 같았으니까.
허나, 아무리 엘란두르라고는 하지만 이런 식은 상당한 무례였다.
무엇보다 그 앞의 이름이 시안이지 않은가.
지난 건국일 행사에서 이름을 날린 것으로 어깨 좀 으쓱하나 싶은데···.
뻗댈 자리를 알고 뻗대야지.
황태자가 평범한 귀족도 아니고 무려 제국의 2인자였다.
그런 황태자를 이런 식으로 만난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지시받은 사항이 없습니다. 그러니 돌아가십쇼.”
기사는 단호하게 시안의 입궁을 가로막았다.
“한 번만 안에 확인을 해주시죠.”
하지만 시안은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시안으로서는 억울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오기 전에 미리 연락을 했었으니까.
시안은 엘란두르 저택을 떠나기 전에 편지를 2장 작성했다.
하나는 루벤의 한스에게 보내는 것.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콘라드에게 보내는 것.
그도 그럴 것이 황태자는 만나고 싶다고 덜컥,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해서 대충 도착 날짜를 예상하여 시안은 앞서 콘라드에게 편지를 먼저 보냈는데···.
아무래도 뭔가 착오가 있었던 모양인 것 같은데···.
“안됩니다. 억지부리지 마시고 돌아가시죠.”
그러나 기사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바로 그때.
“무슨 소란이지?”
한 쪽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라본 그곳.
그곳엔 정갈한 복장의 중년 남성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시안의 기억에 있는 얼굴.
다름 아닌 지난 건국일 행사에서 시안에게 황궁의 안내를 해주었던 이였다.
로열 나이츠 제 13기사단의 단장.
로버트라고 했었던가···?
그랬었던 것 같았다.
“충!”
로버트를 마주한 기사가 절도 있게 군례를 해보였다.
로버트는 고개를 한 번 끄덕여보이고는 기사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지?”
“다름이 아니라 이 자가 황태자 전하를 만나겠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는 터라 막고 있었습니다.”
“황태자 전하를?”
로버트의 시선이 시안에게 향했다.
그리고.
“당신은···?”
로버트 또한 시안을 알아본 것인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는 시안에게 말했다.
“전하께 따로 지시받은 사항이 없습니다만, 음···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주십쇼.”
이윽고 로버트가 확인을 위해 황궁 안 쪽으로 들어갔다.
본래 이런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했다.
황궁은 제국에서 가장 존귀한 자들이 머무는 곳.
제국 그 어느 곳보다 경비가 삼엄해야만 했다.
따라서 지시받은 사항이 없으면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렇게 따로 확인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시안은 지난 날, 황태자의 친필 초대장을 받은 이력이 있었다.
그렇기에 로버트가 손수 확인에 나선 것.
그러나 그걸 모르는 기사는 눈살을 찌푸림과 동시에 언짢은 표정으로 시안을 바라봤다.
지금 황궁 안으로 들어간 로버트는 무려 로열 나이츠의 단장.
그 지위는 쉬이 가볍게 볼 것이 아니었으며.
시안이 저렇게 부릴 수 있는 존재 또한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대체 왜일까.
“죄, 죄송합니다!!”
황궁 안 쪽에서 일순간 크나큰 외침이 들려왔다.
바라본 그곳.
그곳엔 로버트가 헐레벌떡 뛰어오기 시작했다.
“저, 전하께서 업무에 치이다 보니 깜빡하셨다고 합니다. 이쪽으로! 이쪽으로 오시죠!”
“······!”
기사는 눈을 크게 떠보였다.
“다행입니다. 설마 전하께 편지가 전달 되지 않은 건가 싶었는데.”
그리고 이어진 시안의 말.
심지어 황태자 전하와 개인적으로 연락을 했다고···?
기사는 놀란 눈으로 시안을 바라봤다.
이윽고 시안이 기사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럼.”
그렇게 시안이 황궁 안으로 들어갔다.
그것도 로열 나이츠 기사단장의 안내를 받으면서.
“······”
기사는 멍하니 그런 시안의 뒷모습만 바라볼 뿐이었다.
#
시안은 로버트의 안내에 따라 황궁 안 쪽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리고 로버트가 시안을 안내한 커다란 방.
방이 아니라 하나의 집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크기.
이곳은 다름 아닌 지난 날, 시안이 아리아를 처음 만났던 곳이었다.
‘설마 아리아가 또 있는 건 아니겠지···?’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역시나 그런 일은 없었다.
시안은 괜시리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여기서 잠시 기다리고 계시면 곧 전하께서 오실 겁니다.”
로버트는 그 말과 함께 자리를 떠나갔다.
그렇게 무료한 시간을 보낼 겸.
“현질이나 하자.”
시안은 스마트 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슬쩍, 인벤토리의 금화를 확인했다.
[보유 중인 금화 ] - 1,770,000 G
177만 골드.
이사벨에게 받은 150만 골드 전표를 현금화 하고 얻은 금액이었다.
조금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유지 관리 비용으로 지출된 듯 싶었다.
그럼에도 현질을 할 자금은 충분한 셈.
“음···.”
시안은 잠시 현질할 항목들을 정리했다.
일단.
『[광고 제거 + 무제한 성장 버프 사용권 (500,000 G)]』
“광고 제거부터.”
광고 제거부터 구매하면 좋을 것 같았다.
그동안 미루고 미뤄왔던 광고 제거.
미쳐버린 가격도 가격이었지만.
딱히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혼수라검의 초급 진행률.
그 진행률이 더럽게 오르지 않았으니까!
거진 하루를 죄다 갈아 넣어야 겨우겨우 과제를 달성할 수 있었다.
어쩔 땐 그래도 달성하지 못한 날도 있었다.
그럼 어김없이 과제는 초기화.
한 마디로 그대로 진행률을 날려먹은 셈이었다.
그러니 무려 1시간이 되는 광고 시청 시간을 아껴야할 때가 왔다.
시안은 큰 고민 없이 구매 버튼을 눌렀다.
꾹.
《구매 완료!》
가벼운 터치와 함께 증발하는 50만 골드.
또한 어김 없이 구매 완료했다는 알림창이 떠올랐다.
그리고.
“멀쩡하네?”
어째 알림창의 상태가 멀쩡했다.
4인 가족이 1,388년을 먹고 살 수 있는 금액을 현질한 것임에도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본래라면 50만 골드 정도면 ‘꾸매애애애액!!’ 혹은 ‘완료오오오오오!!’ 등.
각종 오류를 일으켰어야 했건만.
띠링!
《진행을 하다 막혔을 땐, 현질을 더 해보세요!》
지금은 되려 깐족거릴 뿐이었다.
“어째 점검 이후로 강해진 것 같단 말이지.”
시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다음 현질할 항목들을 물색했다.
그렇게 현질할 두 번째.
“아, 참. 오러 연공법도 구매해야지.”
다름 아닌 업적 보상으로 얻은 A등급 오러 연공법이었다.
영지의 병사들이 입문 기사.
그러니까 견습 기사 수준으로 발전하면서 달성한 업적.
그로 인해 기사 사관 학교 Lv.1에서 A등급 오러 연공법을 구매할 수 있엇다.
정확히는 구매는 모바일 영주에서 하되,
사용 및 습득은 기사 사관 학교 Lv.1에서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가격은 무려.
[A등급 오러 연공법] - 100,000G.
10만 골드.
“······ 성능은 확실하겠지.”
S등급의 바로 아래 등급이니 성능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S등급이 어떤 힘을 발휘하는 지 시안이 몸소 겪어봐서 알고 있으니까.
“한스한테 편지로 대충 언질을 줬으니, 구매해두면 내가 가기 전까지 알아서 배워두겠지.”
물론 오러 연공법은 방법을 안다고 하여 쉬이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영지에는 엑스퍼트 초급의 기사 루카스가 있으니 배우는 데 큰 문제는 없을 터.
“어쩌면 루카스도 배우려 들지도 모르겠는데.”
시안은 거침없이 구매 버튼을 눌렀다.
꾹.
《구매 완료!》
사라지는 10만 골드와 함께 구매 완료 알림창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번에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바일 영주였다.
“어째 좀 섭섭하네.”
정상적으로 출력되니 어째 좀 섭섭했다.
“그리고 또···.”
바로 그때였다.
“미안하네. 내가 요즘 업무에 치이느라 정신이 없었어.”
갑자기 방문이 열리며 황태자, 콘라드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업무에 치인다는 콘라드의 말.
확실히 지난 번에 봤을 때와 달리.
콘라드의 얼굴이 푸석해져있었다.
시안은 들고 있던 스마트 폰을 품 속으로 집어 넣었다.
그리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란두르 가(家)의 시안 엘란두르.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렇게 과하게 예를 차릴 필요는 없네. 무엇보다 이번엔 내가 실수를 했지 않은가.”
콘라드는 작은 미소와 함께 손을 휘휘, 내저어보였다.
그렇게 자리한 시안과 콘라드.
“그래, 부탁할 것이 있다고.”
콘라드가 곧장 시안에게 물어왔다.
그도 그럴 것이 시안은 먼저 보낸 편지에 용건이 있음을 밝혔었다.
다만 구체적인 사정을 말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콘라드가 지금 물은 것이고.
시안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조금··· 곤란한 부탁이 될 수도 있어 우려가 됩니다.”
“뭐길래 그렇게 뜸을 들이는가. 괜찮으니 무엇이든 말하게.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황가의 이름까지 걸지 않았는가.”
콘라드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시안은 그런 콘라드를 바라보다 말했다.
“엘란두르의 이름을 버리려 합니다.”
우뚝.
콘라드의 몸이 굳어버렸다.
마치 콘라드의 시간이 정지된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지금··· 뭐라고 했는가?”
이어진 콘라드의 물음.
시안은 다시 입을 열었다.
“제게 달린 엘란두르의 이름을 버리려 합니다. 그리하여 루벤을 엘란두르의 관할로부터 독립시키고 싶습니다.”
그리고 콘라드의 몸이 다시 한 번 굳어버렸다.
시안은 그런 콘라드를 바라봤다.
듀라크가 쥔 칼자루.
그 칼자루를 빼앗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다.
시안이 엘란두르의 이름을 버리는 것.
그리하여 루벤을 독립시키는 것.
그렇다면 시안은 반 년이 지나도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었다.
더 이상 엘란두르가 아니니까.
또한 엘란두르는 루벤에게 어떠한 강제력을 가할 수 없었다.
루벤 또한 더 이상 엘란두르가 아니니까.
시안이 벌 수 있었던 기한은 반 년.
그 안에 시안은 엘란두르의 이름을 버려야 한다.
더불어 루벤을 엘란두르로부터 독립시켜야 한다.
루벤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다.
시안은 가만히 콘라드의 말을 기다렸다.
콘라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망치를 거하게 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시안은 그런 콘라드를 기다렸고.
그렇게 얼마 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 전혀 예상치 못한··· 부탁이군.”
콘라드가 상당히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설마 지금 농담을 하는 거라면··· 농담이 아니군.”
콘라드는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보이는 시안의 표정.
절대 농담하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리고 누구 앞이라고 농담을 하겠는가.
그렇기에 콘라드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엘란두르를 건드리기는 조심스럽네.”
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엘란두르는 제국을 지탱하는 두 가문 중 하나.
콘라드는 커녕, 황제조차 함부로 할 수 없었다.
다만 건드릴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을 뿐.
“그리고 엘란두르의 이름을 버린다는 것. 그건 엘란두르를 적으로 돌리게 될 수도 있네. 자네가 그 의미를 모르지는 않았을텐데···. ”
시안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시안이 엘란두르의 이름을 버리고 독립을 한다면.
필시 듀라크가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
콘라드의 말처럼 엘란두르가 적이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리고 지난 역사상 엘란두르를 적으로 돌린 존재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남은 것은 오로지 엘란두르라는 가문뿐.
그럼에도.
“마땅히 감수하겠습니다.”
시안은 엘란두르에 대적하겠다 말하고 있었다.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봐도 되겠나?”
그렇기에 콘라드는 물을 수밖에 없었다.
이어 시안은 엘란두르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루벤이 시안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까지도.
그럼에도 콘라드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엘란두르 후작과 함께라면 자네의 재능을 더 꽃피울 수 있네. 이런 말을 하기엔 조심스러우나 어쩌면 세 번째 제국의 별이 탄생할지도 모를 일이지.”
헌데 시안은 그 모든 것들을 버리려 하고 있었다.
“대체 왜 엘란두르에서 벗어나려 하려는 건가.”
콘라드는 그런 시안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만일 시안이 엘란두르에 남는다면.
출세 가도를 걷게 될 것이고, 종국에는 왕과 같은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런데 대체 왜···?
콘라드는 시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시안은 그런 콘라드를 마주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엘란두르의 이름을 가지고 있으나 이름뿐인.
설령 사실과는 다르다고는 하나 후작가의 망나니였고.
또한 아무런 능력도 없던 무능력한 둔재였다.
“무언가를 하고자 하더라도, 무언가가 되고자 하여도. 저는 할 수도, 될 수도 없었죠. 할 수 없다. 될 수 없다. 제가 살면서 가장 많이 들어온 말들이었습니다.”
그 이유도 갖가지였다.
사생아, 무능력자, 찌질이 등.
당장 떠오르는 것만 수 십가지였고.
차분히 적어내려간다면 아마 수 백은 넘어설 터였다.
“그러던 제가 한 영지의 영주가 되었고. 저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제가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그 이유가··· 혹시 무엇인지 전하께서는 아십니까.”
콘라드는 답을 하지 않았다.
답을 할 수 없다고 함이 옳은 표현이겠다.
시안은 잠시 시선을 내려보였다.
현실적으로 모바일 영주 덕분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었다.
만일 그때 모바일 영주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고블린들의 먹잇감이 되어 시안은 죽었을테니까.
그리고 지금의 루벤의 발전 또한 없다할 수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가장 큰 이유는 모바일 영주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시안이 될 수 있었던 건 모바일 영주가 아니었다.
“한 가지였습니다.”
그건 한 가지 이유에서였다.
시안은 여전히 무능력하다.
예전 시안을 정의하는 수 백 가지의 말들은 지금도 시안에게 적용되는 말이었다.
시안은 여전히 그것들을 극복하지 못했다.
지금도 시안의 재능은 여전히 처참했고.
엘란두르의 이름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듀라크 앞에서는 약간의 반항 정도만이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시안은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한 가지였다.
그레이슨을 구해주어 고맙다는 엘리의 수줍음일 수도 있었고.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믿어준 시안에 대한 아멜리아의 고마움일 수도.
천 년의 세월을 외로이 살아온 레아의 절실함.
어머니를 치료해준 것에 대한 제리의 울음이자.
기약없는 약속을 향한 세미르의 기다림일 수도 있었다.
그 어떤 것이라 정의를 내릴 수는 없지만.
시안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비단 모바일 영주 때문이 아니었다.
또한 시안을 질타하는 수 십, 수 백가지 이유도 아니었다.
그것들을 극복했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었다.
오직 한 가지.
시안을 향한 영지민들의 믿음.
그로써 루벤에서 꽃피는 그들의 만연한 웃음.
“그 한 가지 이유가 지금의 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저를 있게 만들어 주겠죠.”
시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저를 이렇게 만들어준 루벤의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콘라드의 표정이 멍해졌다.
마치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사람처럼 초점이 흐려졌다.
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콘라드는 그 침묵 속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시안은 가만히 그런 콘라드를 기다렸고.
그렇게 얼마 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하하하하하하하!!”
콘라드가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참으로··· 참으로 신기하지.”
콘라드가 시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의 선택은 정말 어리석다고 할 수 있네. 누가 보면··· 신종 자살법이라 이름 붙여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시안은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시안도 인정하는 바였으니까.
“그런데···.”
콘라드가 말을 이었다.
“왜인지 그게 썩 싫지가 않아. 묘하게 사람을 이끌리게 해.”
저 기세에, 어떤 기대감에.
저도 모르게 이끌린다.
콘라드는 다시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결국··· 자네의 부탁은 루벤의 영주를 자리하면서 엘란두르에게서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것 아닌가. 설령 엘란두르를 적으로 돌리더라도 말이네.”
“그렇습니다.”
“참으로 어렵고도 곤란한 부탁이군. 과거의 내 입방정을 탓하고 싶을 만큼 말이야.”
콘라드는 작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리고는 고민을 하듯 콘라드가 잠시 시선을 내려보였다.
“자네 혼자라면 큰 문제가 되지 않네. 지금 당장 자네에게 작위를 주어 엘란두르의 성을 갈아치울 수 있으니까.”
하지만.
“루벤이라는 영지까지 얽힌다면 상황은 복잡해지네. 결국··· 엘란두르에게서 루벤을 빼앗아와야 하니까.”
이는 곧 엘란두르의 영토를 강탈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이건 황태자는 물론 황제라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반 년··· 반 년이라···.”
콘라드가 중얼거렸다.
막상 떠오르는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기간 또한 너무 짧기도 했고.
그걸 시안이라고 모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시안은 그동안 생각해둔 계획을 콘라드에게 말하고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해서 제가 궁극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띠링!
『[영지 퀘스트] - ‘여긴 내 세상이야! 내가 만든 세상이얏!!’』
스마트 폰의 경쾌한 알림음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