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 듀라크 엘란두르(1)
엘란두르 대저택에 위치한 이사벨의 집무실.
“지금 막, 가주님의 집무실로 들어갔습니다.”
이사벨은 총관, 레리트의 보고에 잠시 침묵에 잠겼다.
그런 이사벨의 모습에 레리트는 조금 뜸을 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저번에 말씀하신 건에 대해서 말씀입니다.”
이사벨이 말없이 레리트를 바라봤다.
이윽고 레리트가 답지 않은 난처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어째서인지 그림자 달이 시안님과 관련된 의뢰를 받지 않고 있습니다.”
“의뢰를 받지 않는다?”
레리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자세한 정황을 파악 중입니다만··· 아무래도 누군가가 먼저 의뢰를 넣은 것 같았습니다.”
“뭐라고?”
이사벨은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떠보였다.
“하지만 실패한 듯 싶습니다. 이 역시 자세한 정황은 파악 중에 있습니다만···.”
그렇겠지.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시안이 이 저택에 있을리가 없었으니까.
“그런 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림자 달은 엘란두르가 시안님과 관련된 의뢰를 넣는지에 대한 의문을 표했습니다.”
“······”
이어진 레리트의 보고에 이사벨은 다시 한 번 침묵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제국 최고의 정보 길드이자.
암흑가를 지배하는 그림자 달 길드.
이사벨은 그런 그림자 달의 길드장, 다이애나에게 직접 시안과 관련된 의뢰를 넣었다.
그런데 그걸 거절했다는 레리트의 답변.
엘란두르의 의뢰임에도 거절을 했다?
의뢰비가 부족한 이유는 아닐 터였다.
거절할 수 없는 수많은 골드를 첨부했었으니까.
무엇보다 골드가 아니더라도 엘란두르의 의뢰를 거절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상당히 놀라던 참인데.
여기에 누군가가 먼저 시안의 의뢰를 넣었다?
대체 누가?
“······”
이사벨은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사벨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렇게 얼마 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이사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주께서는?”
레리트는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한 번 생각을 정리하듯, 조금의 뜸을 들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시안님을 가문으로 다시 부르시려는 것 같습니다.”
이사벨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건국일 행사 이후.
듀라크가 시안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관심 정도에 그칠 것이라 생각했거늘.
이렇게 가문으로 다시 부를 것이라고는 생각치 못했다.
여기저기서 꼬여버리는 일들.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것도 상당히.
일단 꼬여버린 상황들 속에서 가장 급선무는 시안이 가문으로 돌아 오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시안이 가문으로 돌아오면 이사벨이 어찌할 수가 없었다.
듀라크가 다시 가문으로 부른다는 것은 그만큼의 관심을 쏟겠다는 뜻.
그럼 더 이상 듀라크의 관심을 받는 시안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루벤에 있어야만 이사벨이 무언가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어떻게서든지 시안이 가문으로 돌아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런데··· 방법이 없었다.
시안을 다시 루벤으로 쫓아낼 방법이.
아무리 이사벨이 엘란두르의 안주인이라고는 하나.
엘란두르에서 가주, 듀라크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듀라크가 그렇게 하겠다면.
그것을 막을 방법이 이사벨에겐 없었다.
그야말로 외통수.
꽈득.
이사벨의 두 주먹이 거칠게 움켜쥐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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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뜩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공간에 소리라는 개념이 사라진 듯한 적막.
듀라크의 눈썹은 작게 일그러져있었다.
그 어떠한 표정 변화가 없던 얼굴에 생겨난 자그마한 균열.
그리하여 비치는 감정은··· 분노였다.
그도 그럴 것이 시안은 듀라크의 명을 ‘거역’한 것이나 다름 없었으니까.
시안은 살짝 시선을 내려보였다.
이윽고 듀라크의 시선이 시안에게 향한다.
날카로운 눈빛에 담긴 기세.
“내가 제안하는 것처럼 보이느냐.”
바로 그 순간.
‘커헉···!’
시안은 전신을 옥죄어 오는 끔찍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듀라크 전신에서 피어나는 기운.
압도적인 존재감이 짓눌러온다.
강력한 억제력이 시안의 전신을 얽매어왔다.
숨조차 쉬이 내뱉어지지 못하는 끔찍한 살의가 덮쳐온다.
어둠의 숲에서 오직 최상위의 포식자들만이 지닐 수 있었던 권능, 피어(Fear).
지금 이 압박감은 그 피어와 닮아있었으나, 본질적인 차이가 있었다.
피어는 먹잇감을 공포에 질리게 한다.
그로써 제 능력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하게 함에 초점을 둔다.
그러나 지금 이 기운은 아니었다.
오로지 기세만으로.
존재를 짓눌러 죽인다.
‘끄윽···!’
짓누르는 억제력이 점점 강해졌다.
시안은 정말로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안은 혼신의 힘을 다해 마기를 끌어올렸다.
피어나는 어둠이 듀라크의 기운에 저항했다.
대륙 역사상 유일무이한 존재, 카일.
엑시드(Exceed), 그 너머의 경지.
마혼제법(魔魂制法)은 그런 카일의 오러 연공법이었다.
대마도사 엘로디조차 따라갈 수 없었던 힘.
아무리 듀라크라도 이것에는 감히 범접할 수가 없었다.
비록 시안이 완벽히 마혼제법을 다루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기운만으로는 시안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시안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럼에도 숨이 벅차오른다.
간단한 한 마디를 내뱉는 것조차 어려웠다.
하지만 시안은 끝끝내 말을 완성했고.
그리하여 듀라크가 보인 두 번째 감정.
“······!”
그것은 다름 아닌 놀라움이었다.
듀라크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바라보는 시선.
일순간 듀라크의 기세가 잠시 사그라들었다.
시안은 그때서야 호흡을 제대로 내뱉을 수 있었다.
“가문의 일원을 가문으로 불러들이는 것에, 언제부터 이유가 필요했지?”
듀라크가 나지막히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언제부터 시안을 가문의 일원으로 취급해 주었냐만은.
듀라크에겐 그리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이렇게 갑자기 불러들이시는 이유를 말씀해주십시오.”
듀라크는 답이 없었다.
다시 무덤덤한 표정으로 시안을 바라보고 있을 뿐.
그런 듀라크의 모습에 시안이 입을 열었다.
“제가 조디악 소드의 선택을 받았기 때문입니까?”
“부정하진 않으마.”
젠장.
시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조디악 소드의 선택을 받음으로써 아르나이즈 전당에 들어갈 수 있었던 시안.
그 덕분에 카일의 유산과 샤를롯의 유산.
그리고 레아와 함께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로써 시안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급증했고.
끝내 이런 식으로 듀라크의 관심 또한 받게 되버렸다.
천하의 둔재가 조디악 소드의 선택을 받았다.
거기에 그동안 보지 못했던 성장까지.
비록 카이에게는 미치지 못하나.
듀라크로서는 충분히 관심을 가질 만한 일이었다.
물론 언제고 이런 날이 올 것이라 생각은 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올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오게 될 줄은···.
듀라크는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입을 열 필요가 없었다.
듀라크가 그렇게 하겠다면.
그렇게 되어야만 했으니까.
가문으로 돌아오라는 것은 사실상의 통보였고 또 명령이나 다름 없었다.
그리고 시안은 지금.
“거절하겠습니다.”
그런 듀라크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었고.
듀라크의 눈썹이 다시 한 번 꿈틀거렸다.
그와 동시에 끔찍한 살의가 다시 한 번 터져나온다.
“네 이름이 무엇인지 잊었느냐.”
듀라크가 입을 열었다.
“엘란두르의 이름을 달고 있는 한, 가문을 위한 마땅한 의무 또한 가져야 하는 법. 그런 시덥지도 않은 영지는 버려두고, 앞으로 가문에 머물며 가문의 일을 하거라.”
그렇게 말을 아끼더니 결국 목적이 이것이었다.
그리고 듀라크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
가문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하는 자.
설령 본인의 핏줄이라도.
듀라크에겐 가문의 부흥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무능(無能)은 무관심으로 일관하나.
무용(無庸)은 참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듀라크라는 존재였다.
“무엇보다 네가 영주로 있는 루벤. 그 또한 나의 관할 영지임을 잊은 것 같구나.”
“지금··· 협박하시는 겁니까···!”
“내가 지금 협박하는 것으로 보이더냐.”
제국을 떠받치는 두 기둥, 엘란두르.
그건 사실상 듀라크를 지칭하는 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엘란두르가 곧 듀라크였고.
듀라크가 곧 엘란두르였다.
협박 같은 것이 아니었다.
루벤은 결국 엘란두르 관할의 영지였고,
그렇기에 듀라크의 말 한 마디면 루벤의 영주는 바뀔 수밖에 없었다.
엘란두르에서 가주, 듀라크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조만간 루벤의 영주로 다른 이를 임명하겠다. 넌 오늘 부로 가문에 머물거라.”
그야말로 외통수였다.
“이만 나가보거라.”
듀라크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축객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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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안은 듀라크의 집무실을 나왔다.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지만.
거기서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가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었으니까.
애초에 듀라크의 뜻을 꺾을 수 있는 자는 없었다.
대륙에서 그의 뜻을 꺾을 수 있는 자가 있기는 할까.
그나마 황제라면 가능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 이건 엘란두르 가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한 마디로 집안 싸움.
아무리 황제라도 이 일에는 간섭이 불가했다.
그렇기에 루벤을 떠나 다시 가문으로 돌아와야 함은 기정 사실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시안의 입장에서 가문으로 돌아오는 것이 마냥 나쁜 것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듀라크의 관심을 받는다 함은 곧 가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것과 같았으니까.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고 오로지 시안, 본인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한 마디로 버는 골드를 족족 루벤이 아니라 시안에게 쓸 수 있었다.
그렇기에 상환만 본다면 그리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하지만 시안은 가문으로 돌아올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동안 루벤에 쏟아부은 돈이 대체 얼만데!’
이미 매몰된 비용이 정도를 넘어섰으니까!
물론.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현질의 문제가 아니었다.
다름 아닌 루벤의 영지민들.
그들을 버리고 시안은 떠나고 싶지 않았다.
가문에서 지원을 받으며 잘 나고, 잘 살면 좋겠지.
그런데 혼자 잘 나고, 잘 살면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세상에 혼자 남으려고?
어릴 적.
시안은 시안의 어머니, 세실과 함께 가문을 잠시 나와 풍경 좋은 산을 오른 적이 있었다.
답답한 가문에서 벗어난 잠시의 일탈.
어린 시안은 몰랐지만, 아마 세실에겐 그런 의미였으리라.
그리고 그 당시.
세실이 시안에게 해주었던 말이었다.
‘시안. 시안은 이렇게 산을 오르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니?’
어린 시안은 대답은 커녕, 투정만 부렸었다.
그땐 그냥 힘들고 지쳐서 이유 따윈 아무렴 상관없었으니까.
세실은 그런 시안에게 작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엄마는 단지 시안이 정상에 깃발을 꽂기 위해서가 아니었으면해.’
‘산을 오르는 과정과 도전을 받아들이고. 이렇게 맑은 공기와 좋은 경치를 즐기기 위해서.’
‘그래서 세상이 시안을 바라볼 수 있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시안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산을 올랐으면 좋겠구나.’
당시의 어린 시안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와 저 말이 어렴풋이 이해되는 건 무슨 이유일까.
참으로 현명한 사람이었다. 세실은.
그리고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
시안은 떠오르는 오랜 기억에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아무튼.
시안은 가문으로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듀라크의 뜻을 꺾을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딱 한 존재.
듀라크를 ‘설득’ 할 수 있는 자는 있었다.
듀라크가 시안을 불러들이려는 이유는 단순했다.
시안의 이름값이 높아졌고.
그로써 시안에게 가문의 일을 맡기려는 심산.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별로 관심도 없었고.
어쨌거나 듀라크는 가문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하는 자였다.
설령 본인의 핏줄이라도.
듀라크에겐 가문의 부흥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시안이 가문으로 복귀하는 것.
그로써 시안이 가문에 가져다주는 이득.
만일 그것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른다면.
지금의 듀라크를 ‘설득’ 할 수는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존재는 하나.
똑똑.
“시안입니다. 잠시 드릴 말씀이 있어 갑자기 찾아왔습니다.”
시안은 가만히 들려올 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 동안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마 시안이 찾아올 줄은 몰랐던 것이겠지.
시안 또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에 별 말없이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 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들어와라.
문 안 쪽에서 답이 들려왔다.
시안은 문을 열었고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 안쪽의 풍경이 비쳐보였다.
고풍스럽게 장식된 넓직한 방.
그리고 그 방에 앉아있는 한 존재.
한치의 흐트러짐 없는 자세와 표정.
그로써 느껴지는 품위는 부드러우면서도 우아한 세련미.
이사벨 엘란두르.
엘란두르 후작가의 안주인이었다.
이사벨은 가만히 시안을 바라봤다.
역시나 별 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시안은 그 눈빛에 안에 깃든 당황의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네가 갑자기 무슨 일이더냐.”
“가주께서 제게 가문으로 돌아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사벨이 물었고.
시안은 서론 없이 바로 이야기를 꺼냈다.
서로 시덥잖은 안부 인사나 나눌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이사벨은 시안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축하한다.”
그리고 끝이었다.
이사벨은 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모습에 시안은 확신할 수 있었다.
시안은 곧장 입을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가문으로 돌아오는 것이 탐탁치 않으시지요.”
이사벨은 답이 없었다.
그러나 답이 없다 뿐, 그 침묵에 담긴 긍정을 시안은 모르지 않았다.
해서 시안은.
“100만 골드.”
이사벨에게 거래를 하나 제안할 셈이었다.
“100만 골드를 주시면 가문으로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뭐라고?”
이사벨이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표정 변화 없던 이사벨의 얼굴에는 뚜렷한 당황의 감정이 떠올랐다.
“말씀 그대로입니다. 100만 골드를 주시면 가문으로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침묵하는 이사벨.
이사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 가주께서 결정하신 사안이다. 그런데 뭘 어찌하겠다는 거지?”
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사벨의 말마따나 듀라크가 결정한 사안이었다.
그렇기에 듀라크가 마음을 돌리지 않는 한.
절대로 돌이킬 수 없는 일.
듀라크가 마음을 돌리지 않는 한, 말이다.
“어머니께서라면 가주님을 설득하실 수 있으시지 않으십니까. 지난 번에 저를 루벤의 영주로 임명하실 때처럼 말입니다.”
비록 듀라크가 엘란두르의 가주라고는 하나.
이사벨 또한 엘란두르의 안주인이었다.
듀라크의 의견이 최우선이기는 하나.
이사벨의 의견이 아주 묵살되는 것은 또 아니었다.
그렇게 무시할 거라면 애초에 듀라크가 이사벨에게 전권을 주지도 않았겠지.
그래서 과거 시안이 루벤의 영주로 임명 되었을 때.
그때 사실 시안은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 없었다.
쉽게 말해 이사벨이 시안을 죽인 것이나 다름 없었다.
비록 이사벨의 명이었다고는 하나.
시안은 어디까지나 엘란두르의 핏줄인 것은 변함 없었다.
따라서 그 과정에서 반드시 듀라크의 ‘허락’이 있어야만 했다.
쉽게 말해 당시 이사벨이 듀라크를 설득했다.
이사벨은 무언가를 대가로 듀라크를 설득했다.
이사벨은 엘란두르의 안주인이자.
명망 높은 아벤느가 가문의 장녀.
엘란두르 가문만큼은 아니지만 아벤느가 또한 상당히 고위 측에 속한 가문이었다.
하여 당시 듀라크는 시안의 죽음과 이사벨이 말한 무언가를 저울질 했고.
끝내 시안의 죽음을 허락한 것.
설령 본인의 핏줄이라도.
듀라크에겐 가문의 부흥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으니까.
듀라크에게 강요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듀라크를 설득할 수는 있었다.
“제가 가문으로 돌아오면 어머니께서 꽤나 골치가 아프시지 않으십니까. 자식된 도리로서 그런 불효를 저지를 수는 없지요.”
시안은 가만히 이사벨을 바라봤고.
이사벨은 그런 시안을 말없이 바라봤다.
시안이 조금 돌려서 말했지만 이사벨은 모르지 않았다.
시안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가문으로 돌아오면 골치 아플 것을 뻔히 알고 있다.
그러니 그때처럼.
알아서 듀라크를 설득해라.
그럼 가주의 압박을 무릅쓰고.
듀라크의 제안을 거절해주겠다.
시안은 지금 그리 말하고 있었다.
물론 듀라크를 설득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어떤 대가를 걸어야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당사자인 시안 또한 같이 거절한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그럼 설득의 과정이 꽤나 쉬워지니까.
그리고 보아하니···.
시안 또한 가문으로 돌아오기 꺼려하는 것 같았다.
“서로의 목적이 같으면 잠시 손을 잡을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서로의 이해관계가 잠시나마 일치한다.
이사벨은 크나큰 대가로 듀라크를 설득하는 것.
시안은 듀라크의 제안을 거절함으로써 그에 따른 반감을 감수하는 것.
서로 하나씩 출혈을 감수함으써 같은 목적을 달성한다.
이사벨은 저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저울질을 반복했다.
“네이슨과 또 다시 대련을 했다고.”
“형님께서 제게 한 수 가르쳐주셨습니다.”
이사벨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책상 한 쪽으로 다가가 무언가를 꺼내 적기 시작했다.
이윽고 하얀 늑대가 그려진 인장을 찍고는 시안에게 건넸다.
“엘란두르 이름으로 된 전표다. 확인해보거라.”
시안은 이사벨이 건네는 전표를 확인했다.
전표에 쓰여져 있는 금액은 정확히 150만 골드.
아무래도 네이슨과의 대련에서 딴 50만 골드까지 포함한 것 같았다.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시안은 전표를 챙긴 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