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 엘란두르 후작가(1)
루벤에서 열린 축제는 루벤을 뜨겁게 달구었고.
그 때문에 축제가 끝났음에도 그 열기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어둠의 숲에서 항상 비루한 삶을 살아가던 이들.
그들에게 이번 축제는 삶에 대한 희망을 꽃피우게 해주었다.
그 때문일까.
영지민들의 사이는 예전보다 더욱 돈독해졌다.
“케마르. 저번 번에 만들어줬던 식칼이 아주 잘 들더군. 이거 별 거 아니지만 받게나.”
“크하핫! 뭘 그런 걸 가지고. 앞으로도 뭐가 망가졌다거나, 필요한 도구가 있으면 언제든 말 만하라고!”
인간과 드워프.
종족이 다른 이들은 문화도, 가치관도 전부 달랐다.
그렇기에 좋은 친구가 될 수는 있어도.
한 지붕 아래 살아가기란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종족이 다르기 전에, 모두가 어둠의 숲에서 살아가던 이들이었다.
종족을 떠나 서로가 서로의 아픔을 알았고.
그로써 인간과 드워프가 아닌 ‘루벤’ 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가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축제의 열기가 아직 가시지 않은 루벤.
“아으··· 머리야.”
시안은 영주관의 집무실에 앉아 지끈거리는 머리를 달랬다.
정말 어찌나 마셔댔는지 아직도 속이 울렁거렸다.
오러를 다루는 기사들은 만만치 않은 주량을 지니고 있었다.
오러가 체내에 들어온 술 기운을 몰아내주었으니까.
따라서 마혼제법의 마기를 다루는 시안 또한 상당한 주량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염병.
드워프들의 주량은 정도를 넘어섰다!
저게 드워프인지 아니면 오크통인지.
나중에는 아주 그냥 오크통과 하나가 되어 들이키는데.
시안이 밑이 박살난 모바일 영주에 현질을 하듯.
드워프들은 밑이 찢어진 위장에다 맥주를 들어 부었다.
그런 드워프들과 어울리다보니 저도 모르게 과음을 해버렸다.
“내 다시는 드워프들과 술을 마시나 봐라.”
시안은 그렇게 다짐했다.
뭐, 그래도.
드워프들이 만든 맥주 맛이 나쁘지 않았다.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왜 드워프 맥주, 드워프 맥주라 하는 지 알 것 같았다.
입 안에 착 감기는 감칠맛은 물론이고,
시원하게 넘어가는 목넘김까지.
시안이 여태껏 먹어본 술 중 단연 최고였다.
사실 그 맛에 취해 시안 스스로가 과음한 경향이 없잖아 있었다.
그런 의미로···.
똑똑.
-영주님. 저 아멜리아에요.
노크 소리와 함께 집무실 문 밖으로 아멜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달칵.
시안의 말과 함께 아멜리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 나름 꾸민다고는 꾸민 모양인데.
푸석한 머리와 초췌한 얼굴은 숨길 수 없었다.
어제 아멜리아가 얼마나 마셨는지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속은 괜찮아?”
“아윽··· 솔직히 죽을 것 같아요.”
아멜리아는 인상을 찡그리며 시안 앞에 앉아보였다.
그 순간.
-자, 여기. 숙취에 좋은 차를 끓여 왔어. 엘리가 추천해준거니까 좋을거야.
갑자기 레아가 불쑥, 튀어나왔다.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거늘.
당최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말 그대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레아는 손에 든 쟁반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시안과 아멜리아, 둘에게 각각 차를 따라주었다.
-더 필요한 거 있으면 불러!
그 말과 함께 레아가 방을 나가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다만 레아가 향한 곳이 방 문이 아니라 벽이라는 점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사아악, 레아가 벽을 관통해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그야말로 유령 집사.
“······ 이렇게 보니까 레아 언니. 되게 섬뜩하네요.”
“계속 보다 보면 익숙해져.”
몸서리치는 아멜리아의 모습에 시안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와 함께 시안은 레아가 따라준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러자 따뜻한 기운이 목을 타고 넘어가며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그와 동시에 숙취로 메슥거렸던 속과 지끈거렸던 두통이 일시에 안정되었다.
‘거의 포션인데?’
엘리가 추천해줬다더니.
확실히 그 효과가 직빵이었다.
아멜리아도 마찬가지인듯 꽤나 놀란 눈을 떠보였다.
뭐, 어쨌든.
“그보다 무슨 일로 저를 부르신 거예요?”
아멜리아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시안에게 물어왔다.
“아, 그게 다름이 아니고. 지난 번에 처리한다던 트롤 사체. 그거 어떻게 됐어?”
“어제 축제 때문에 미뤄지긴 했는데··· 그래도 금방 끝날 거예요. 드워프 분들이 도와주고 계시거든요. 확실히 다들 손재주가 뛰어나시더라고요.”
장인의 종족, 드워프.
트롤 해체 작업은 까다로운 작업이었지만, 드워프들에겐 까다로움 축에도 못 끼는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그간 인구 부족으로 삐그덕 거렸던 문제들이 해소되고 있었다.
해서 슬슬, 생각해두었던 일을 시작해도 좋을 것 같았다.
시안은 곧장 아멜리아에게 말했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상단을 만들까 하는데. 어때?”
“상단···이요?”
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름 아닌 상단.
현재 루벤에서 판매하는 마수의 사체들과 마나석.
이 모든 것들의 판매는 모두 아멜리아가 혼자 처리하고 있었다.
물론 병사들과 영지민들이 거들어주기는 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호위병 혹은 짐꾼.
이 정도에 그쳤을 뿐, 여타 상행에 관한 모든 것들은 아멜리아가 혼자 처리하고 있었다.
해서 상단이라기 보다는 규모가 큰 보부상.
그동안은 이런 느낌이 강했다.
솔직히 주먹구구식이나 다름 없었다.
과거, 제국 서부를 주름 잡던 대상단 브라헤 상단.
그 브라헤 상단의 여식이었던 아멜리아였기에 가능했던 것이지.
다른 이들이었다면 진즉에 나가떨어졌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슬슬 한계에 치닫고 있었고.
또한 시안은 이제 루벤의 사업을 확장할 생각이었다.
마수 사체들과 시안이 정제하는 마나석은 물론이고,
지속적으로 풍년이 드는 작물들.
마수 목장에서 얻어지는 고기들.
드워프들이 만드는 장비들과 도구들.
또한 드워프들이 만드는 맥주까지.
이건 정말 없어서 못 팔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뜨거운 대장간 Lv.2가 아니라,
취한다 양조장 Lv.1을 더 지어야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특히 비누.
이건 시안이 직접 사용해 본 바.
왜 모바일 영주가 그렇게 호들갑을 떨었는지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단순히 물로 씻어내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던 얼룩들을 순식간에 지울 수 있었다.
특히 몸을 씻을 때는 그 이후에 느껴지는 은은한 향기까지.
이건 귀족들을 대상으로 해도 불티나게 팔릴 것 같았다.
어쩌면 대륙 전체에 새로운 유행이 생길지도.
아무튼 이 모든 것들을 팔려면 이제 아멜리아 혼자서는 힘들었다.
해서 이제 어느 정도 영지민들도 있겠다.
아멜리아가 상단주가 되어 영지민들 중 상재가 있는 이들을 선별해 본격적인 상단을 꾸리면 좋을 것 같았다.
“어떻게 생각해? 상단 이름은 아멜리아 네가 정해. 전처럼 진실 상단도 괜찮고. 브라헤 상단이라 해도 좋고.”
나야 돈만 잘 벌어오면 되니까.
시안은 장난식으로 중얼거리며 아멜리아에게 말했다.
그런데 웬걸.
아멜리아가 떨리는 눈빛으로 시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저··· 저는···.”
눈빛처럼 떨려오는 목소리.
끝내 아멜리아가 고개를 푹, 숙여보였다.
지난 세월, 가문이 몰락하고 아멜리아는 가문을 부흥시키겠다는 일념으로 제국을 떠돌아다녔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상인의 일밖에 없었기에 루카스와 함께 보부상의 일부터 시작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수 년.
그 끝에 아멜리아는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었다.
세상은 알량한 재능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특히 여인의 몸으로는 더더욱.
아멜리아는 언제나 무시받기 일 수 였고,
숱한 모욕과 멸시 그리고 추잡한 욕망들까지.
아멜리아를 보고 색욕의 감정만 비쳐보일 뿐.
누구도, 그 어떤 누구도.
자신을 믿고 선뜻 일을 맡겨준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이 아멜리아에게 얼마나 벅찬 순간인지.
“왜 그래? 또 망가진거야?”
시안은 알고나 있을까.
모를 것이다.
그러니 저렇게 멀뚱거리는 시선으로 자신을 보고 있겠지.
그렇기에 저 모습이 어떤 의미로는 야속했고,
또 그렇기에 참으로···.
“감사해요. 정말 감사해요··· 영주님.”
고마운 사람이었다.
“응? 뭐가 감사해?”
뜬금없는 아멜리아의 말에 시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감사할 것이 뭐가 있단 말인가.
시안이 본 아멜리아는 상인으로서 어마어마한 재능이 있었다.
제국에서 아멜리아 같은 이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
아멜리아는 상단을 누구보다 훌륭히 이끌 것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떼 돈을 벌어다주겠지!
그러니 되려 시안이 고마우면 고마웠지.
아멜리아가 고마울 게 무어란 말인가.
“정말··· 정말 감사해요 영주님···.”
그런데 어째, 울먹거리기까지 하는 아멜리아였다.
진짜 왜 저러는지 잘 몰랐지만···.
뭐,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시안은 굳이 그것을 캐묻지는 않았다.
“그럼 영지민들 중에서 상단원을 몇 명 선별해서 다시 말해줘.”
“······ 네.”
바로 그때.
똑똑.
-도련님. 저 한스입니다.
일순간 노크 소리와 함께 문 밖에서 한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안은 잠깐 고민했지만 아멜리아와의 이야기도 얼추 끝났겠다.
“들어와.”
문 밖에 있는 한스에게 말했다.
이윽고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한스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어째···.
이번에도 한스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딱 봐도 무슨 일이 있는 모양.
“무슨 일 있어?”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으나···.”
아니나 다를까 한스가 품 속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들었다.
“또 편지야?”
요즘 왜 이렇게 편지가 자주 오는 건지.
설마 아리아인가?
싶은 생각과 함께 시안은 한스가 건네는 편지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발신인도 확인하기 전.
“어···?”
시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한스가 건넨 편지.
그 편지를 단단히 봉인한 인장이 상당히 눈에 익었기 때문이었다.
설원에 서있는 고고한 한 마리의 늑대.
“이거 엘란두르 인장이잖아?”
다름 아닌 엘란두르 가문을 상징하는, 하얀 늑대의 인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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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안은 일단 아멜리아를 내보냈다.
그리고 편지를 뜯어 그 내용을 확인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계절 속. 엘란두르 후작가(家)에는···.]
하여간, 누가 품위를 중시하는 귀족들 아니랄까봐.
첫 문장부터 쓰잘데기 없는 말들이 잔뜩 있었다.
한 마디로 고리타분한 것들.
차라리 아리아의 시덥지 않은 이야기가 훨씬 나았다.
시안은 차분히 편지의 내용을 살폈다.
기나긴 내용의 글.
그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듀라크가 날 부른다고?”
엘란두르 가문의 가주, 듀라크 엘란두르.
그가 시안을 찾고 있으니, 가문으로 속히 오라는 내용이었다.
“예? 가주가 도련님을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는데?”
시안은 편지를 한스에게 넘겼다.
한스는 편지를 받아들어 차분히 그 내용을 읽었다.
그렇게 잠시의 시간이 지나.
“······ 대체 어째서입니까?”
한스가 편지를 내리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니까. 그동안 관심도 일체 없더니 갑자기?”
그리고 시안 또한 어리둥절한 건 마찬가지였다.
듀라크 엘란두르.
그는 생물학적으로 시안의 아버지였으나.
사실 시안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안이 가문에 있을 적에 듀라크의 얼굴을 본 적이 손에 꼽았고.
오죽하면 말 한 번 제대로 섞어본 적이 기억에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건 비단 시안 뿐만이 아니었다.
듀라크는 이사벨에게 전권을 위임한 채, 가문 내부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가 관심을 두는 이는 오직 한 명.
엘란두르 가문의 장자이자, 명목상 시안의 맏형.
제국의 별이라 불리는 카이 엘란두르뿐이었다.
그렇기에 시안은 듀라크와 단 한 번도 독대를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듀라크가 시안을 찾는다는 내용의 편지.
“음···.”
시안은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싶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냥 무시하고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시안은 그닥 엘란두르와 얽히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럴 일은 없겠지만 설령 듀라크가 시안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해준다 해도.
그로써 이제 와 아버지 노릇을 한다해도.
시안은 별로 받고 싶지도 않았다.
시안은 듀라크를 단 한 번도 아버지라 생각한 적이 없었으니까.
지금 눈 앞의 한스라면 또 모를까.
듀라크는 말 그대로 생물학적인 아버지일 뿐이었다.
시안이 부모라 부를 수 있는 이는 시안의 어머니, 세실의 죽음과 함께 모두 죽어버렸다.
그렇기에 이대로 무시하고 싶었지만.
“가야겠지?”
“이사벨이라면 모르겠습니다만··· 가주가 직접 불렀다면 그래야하지 않겠습니까.”
마냥 무시할 수가 없었다.
시안도 엘란두르와 얽히고 싶지 않았고.
가문에서 또한 내놓다시피한 시안이었지만.
시안의 이름은 어디까지나 시안 엘란두르.
한 마디로 엘란두르의 일원이었다.
한스의 말마따나 이사벨이라면 또 모를까.
가주인 듀라크가 직접 불렀다면 이건 거절할 명분이 일체 없었다.
따지고 보면 이곳 루벤 또한 엘란두르의 직할령이지 않은가.
시안은 이사벨의 명으로 루벤의 영주로 오게 된 것이고.
어떻게 보면 시안은 엘란두르 산하의 귀족.
거절했다간 정말 어떤 일을 당할지 알 수가 없었다.
루벤이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다고는 하나.
엘란두르를 감당할 정도의 세력을 일구지 못했다.
아니, 대륙에 어느 누가 엘란두르를 감당할 수 있을까.
마음 같아선 아리아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얼마] 라는 답장에 추신으로 [선제시]까지 적어넣고 싶었다.
진짜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관심도 없던 이가 갑자기 왜 부르는 지도 궁금하기도 했고.
“한 번 다녀올게.”
한 번 다녀오기는 해야할 것 같았다.
“저도 준비하겠습니다.”
시안의 말에 한스가 등을 돌려 떠날 채비를 시작했다.
그런데.
“아니야. 혼자갈게.”
단호한 시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등을 돌려 바라본 그곳.
시안이 괜찮다는 표정으로 한스를 말리고 있었다.
“하지만 도련님.”
한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시안이 그간 가문에서 어떤 대우를 받아왔고,
또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한스는 알고 있었으니까.
그건 루벤에서 오직 한스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따라가야만 했다.
따라가 시안을 지켜야만 했다.
하지만.
“괜찮아. 혼자가도 충분해.”
시안은 끝내 혼자가겠다 말하고 있었다.
한스는 뭐라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결국 입을 꾹, 다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한스의 눈에 보이는 시안의 모습.
그건 더 이상 한스가 기억하던 시안이 아니었으니까.
시안은 예전의 시안이 아니었다.
가문에서 눈치만 보고 살았던 사생아.
망나니라 손가락질 받던 무능력자.
그런 시안은 이제 없었다.
지금의 시안은 불가능이라 일컫던 일들을 헤쳐나가고.
버려지고 상처받은 이들을 보듬어주는.
루벤의 영주.
‘대체 무슨 걱정을.’
물론 엘란두르는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특히 가주 듀라크는 더더욱.
애초에 이 대륙에서 엘란두르와 듀라크를 만만히 볼 존재가 누가 있을까.
그렇기에 시안 혼자 보내는 것은 어떤 의미로 위험했지만···.
글쎄.
한스는 그 이유를 잘 몰랐으나.
되려 엘란두르가 더 걱정이 되었다.
“한스, 너는 내가 없는 동안 영지를 좀 부탁해.”
“······ 알겠습니다.”
한스는 별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마수들은 병사들도 있고 레아도 있으니 큰 걱정은 없고. 문제는 악마인데···.”
기척을 감쪽같이 숨기는 악마.
그리고 현재 루벤에서 시안 말고는 아무도 악마의 존재를 눈치챌 수가 없었다.
그럴 가능성은 낮다만.
혹시 시안이 자리를 비운 사이, 악마가 또 나타난다면 상당히 곤란했다.
하지만 다행히 그것도 큰 걱정은 없었다.
다름 아닌 전당에서 얻은 악마 탐지기.
아리아에게 준 것보다 상위 등급의 악마 탐지기로서, 그것을 제리가 연구를 끝마쳤기 때문이었다.
‘엘로디가 개량한 마도구인데도···.’
확실히 제리의 마도학 재능은 놀라웠다.
물론 탐지 범위를 영지 전체로 설정하는 것에 성공한 것이지만 그것도 엄청난 일이었다.
저거 연구한다고 제리가 정말 며칠 밤을 꼬박 새웠다.
다크 써클이 짙게 내려온 얼굴로 ‘영주님··· 드디어 밝혀냈어요···.’ 라고 말할 때는 레아보다 더 섬뜩했다.
‘제리의 부담을 덜어주려면 연구원도 보충해야하는데···.’
문제는 연구원은 아무나 넣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엘로디의 연구소 Lv.1.
마법사나 마도학의 지식이 있는 이만이 연구원이 될 수 있었다.
이번에 드워프들이 영지민으로 편입되기는 했지만 드워프들은 말 그대로 장인의 종족.
손재주는 수준급이었지만.
마법과는 거리가 많이 멀었다.
‘마법사들도 구하기는 해야할텐데···.’
뭐, 아무튼.
레아도 있겠다.
악마 탐지기도 있겠다.
설령 악마가 와도 깽판을 치지는 못할 터였다.
“뜸들일 것도 없으니 바로 출발할게.”
시안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엘란두르 후작가(家).
제국을 지탱하는 두 기둥 중 하나.
그런 엘란두르 후작령은 제국 동부에 위치해있었다.
그리고 드넓은 제국의 영토인 만큼 제국 동부에는 무수히 많은 가문들이 있었다.
그 모든 가문들이 엘란두르의 소속인 것은 아니었으나.
동부의 가문 중 그 어느 누구도 엘란두르의 뜻을 거역하는 이는 없었다.
오죽하면 동부에서는 황가보다 엘란두르를 더 쳐준다는 말이 나돌까.
누가 들으면 반역에 가까운 말이었으나.
다들 쉬쉬하며 떠도는 소문이었다.
사실상 동부의 지배자라 할 수 있는 가문.
그런 위명에 걸맞게 엘란두르의 저택은 거대하다 못해 광활했다.
“오랜만에 오긴 하네.”
시안은 눈앞에 보이는 엘란두르의 저택을 바라봤다.
지난 날 루벤으로 쫓겨나듯 나온 뒤로 온 적이 없으니.
확실히 오랜만에 다시 돌아온 것이긴 했다.
“딱히 변한 것도 없네.”
그리고 그때와 변한 것도 없었다.
루벤은 현질만 했다하면 대격변에, 몸단장에.
심지어 진화까지 하거늘.
여긴 어째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
“이게 정상인 건가?”
시안은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는 천천히 저택 정문으로 향했다.
정문 앞에 다가서자 저택을 지키는 병사가 시안의 앞을 가로막았다.
“정지. 신원과 방문 목적을 밝히십시오.”
그리고.
“어라? 당신은···?”
시안의 얼굴을 알아본 것인지 병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시안이 가문이 있을 적에 근무하던 병사인 것 같았다.
시안이 떠나온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으나.
그렇다고 시안의 얼굴을 잊을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시안은 병사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안 엘란두르. 가주의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그러자 병사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시안 엘란두르.
그리고 가주의 부름.
그 어느 것 하나 놀랍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까.
“자, 자, 자, 자, 자,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병사가 허겁지겁 저택 안 쪽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