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질하는 영주님!-56화 (56/322)

§ 56화 - 멈춰버린 시간의 드워프

적막한 정적이 흘렀다.

정적?

이것을 과연 정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시선이 일제히 한 곳으로 향했다.

쏟아지던 혼돈의 마물들이 바닥으로 녹아내렸다.

마치 존재의 근거를 잃어버린 듯.

그들이 태어난 심연의 대지로 다시 녹아들어갔다.

루벤의 영지민들, 병사들, 드워프들.

지금 이곳 여기에 서있는 모든 사람들이 한 존재를 바라봤다.

충격, 공포, 경악.

이 세상의 그 어떠한 단어를 들이밀어도, 지금 사람들이 느끼는 심정을 대변할 수가 없었다.

사그라드는 악의.

“어, 어, 어떻게···.”

“이, 이런 일이···!”

드워프들은 지금 이 광경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천 년전, 대륙 전체를 혼란에 빠뜨렸던 신화 속의 악(惡).

그것도 악마 7군주, 나태의 누르비아.

아무리 현신이 완전하지 않다 한들.

아무리 본연의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한들.

저 끔찍한 악마를 대적하기란 불가능이었다.

그것이 가능한 존재는, 이미 천 년전에 사라졌다.

그런데···.

그런데 대체 어떻게.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라 생각했다.

말 그대로 ‘불가능’ 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영주님께서 쓰러지지 않는 한. 루벤 또한 무너지지 않습니다.’

저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드워프들은 이제서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하악···! 하악···!”

정신이 멍하다.

물 속을 유영하는 것처럼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기에 알 수가 없었다.

방금 무얼 했는지, 시안은 그에 대한 자각이 일절 없었다.

그 순간의 기억이 도려내어진 듯한 감각.

의식이 구름처럼 희미하다.

“커헉···!”

입가로 피가 왈칵, 터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끔찍한 격통이 전신을 강타했다.

닿을 수 없었던 너머에 강제로 닿은 대가인 것일까.

지금 당장이라도 정신을 놓으라 부르짖는 것만 같았다.

바로 그때.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시야 한 켠에서 끔찍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바라본 그곳.

그곳엔 누르비아가 피투성이가 된 채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흩어지는 광기.

누르비아가 허우적거리며 비틀거렸다.

【말도 안돼···! 말도 안돼!!】

누르비아는 손을 마구잡이로 휘저으며 광기를 끌어모았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광기가 자꾸만 흩어져갔다.

심지어 누르비아 안에 내재된 광기마저 새어나가기 시작했다.

존재의 부정.

【어떻게! 대체 어떻게···!】

누르비아는 도무지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되었다.

그 어떤 경우를 들이밀어도 이건 말이 안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그 힘.

인지조차 불가능했던 경이로운 힘.

그 힘은 분명 그 존재의 힘과 닮아있었다.

아니, 닮은 정도가 아니라 똑같았다.

수준의 차이만 있을 뿐, 본질은 전혀 다르지 않았다.

천 년전, 악마들을 공포에 빠뜨렸던 절대적인 존재.

하지만 그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존재는 이미 아득히 오랜 세월 전에 죽어 사라졌으니까.

그런데 대체 어떻게···!

【끄아아아아아악!!!】

전신을 찢어발기는 듯한 격통이 터져나왔다.

그 사이로 누르비아의 광기가 계속해서 흩어져갔다.

누르비아는 밀려오는 의문들을 떨쳐버렸다.

어째서 이 힘을 사용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당장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하나.

누르비아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시안이 검을 늘어뜨린 채 서있었다.

그러나 입가로 쏟아지는 피는 상태가 썩 좋아보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저렇게 서있는 것도 벅차보였다.

그렇기에 죽이려면 지금이 기회였다.

하지만 누르비아는 차마 그 생각을 실행에 옮길 수가 없었다.

시안은 지금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보였다.

그러나 치명적인 본능이 경고한다.

다가가면 죽는다!

도망쳐야한다.

누르비아는 단번에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모든 것이 끝장이다.

무엇보다 광기를 흩어버리는 저 힘은 자신과 그릇의 존재를 분리시키고 있었다.

역시나 오래 전.

그 존재의 힘과 너무도 똑같았다.

다행히 그릇과의 동화가 100년간 지속된 탓에 쉽사리 끊어지지 않았다.

그게 아니었다면 지금 흩어지는 광기와 함께 그릇과의 동화가 끊어졌을 터.

보이지도, 알 수도 없었던 그 일격과 함께 말이다.

어쨌든 이대로 있다간 그릇과의 동화가 끊어지는 것은 자명한 일.

빨리 도망쳐 상태를 추슬러야했다.

누르비아는 손 끝으로 광기를 끌어모았다.

짙은 어둠이 밀려와 그런 누르비아를 방해했지만,

누르비아는 꾸역꾸역, 광기를 끌어모았다.

키이이이잉─.

이윽고 누르비아의 주변으로 수 십개의 마법진이 생겨났다.

그와 함께 흐릿해지는 누르비아의 모습.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안이 검을 움켜쥐었다.

저대로 보내서는 안된다.

시안은 곧장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크학···!”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끊어진 관절과 찢겨진 근육은 더 이상의 움직임을 허락하지 않았다.

솔직히 지금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레아는?

보이지 않았다.

아까 전 누르비아의 일격에 꽤나 타격을 입은 듯 싶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르비아의 몸이 서서히 사라진다.

바로 그때.

“헬렌···!”

한 쪽으로 절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라본 그곳.

그곳엔 만신창이가 된 세미르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세미르의 목소리 때문이었을까.

【끄윽···! 갑자기 이 년이 왜···!】

누르비아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다시 시작된 그릇의 간섭.

가뜩이나 상황도 여의치 않았건만···!

누르비아는 혼심의 힘을 다해 광기를 끌어모았다.

정신이 타오를 듯한 통증이 치민다.

【끄아아아악!】

이윽고 끔찍한 비명과 함께 누르비아의 광기가 사라졌다.

【허억···! 허억···!】

거친 숨과 함께 헬렌이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살짝 내려다본 시야.

헬렌은 자신의 몸이 서서히 흐릿해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끝내 악마가 마법을 완성시킨 것이었다.

헬렌은 모든 것이 끝이 났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깊어지는 고민.

헬렌은 끝내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죽어야한다.

이 끔찍한 악마를 살려보내서는 안된다.

지난 100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불가능했다.

세미르와 만나고 싶었던 소망도 있었지만,

정신을 지배당한 터라 몸을 어찌할 수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어쩐 일인지 악마의 지배가 약해졌다.

사실 본래라면 이렇게 나올 수도 없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악마와의 동화 또한 약해졌다.

지난 100여년 동안 단 한 번도 이러했던 적이 없었는데···.

그러니 지금이 유일한 기회다.

헬렌은 끝내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바로 그때.

“헬렌···!!”

세미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그곳엔 세미르가 헬렌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세미르···.】

헬렌은 그런 세미르를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악마의 그릇으로 100여년을 버텨온 헬렌.

그 끔찍한 고통의 세월을 악착같이 버텨왔지만 이제는 한계였다.

이게 마지막 순간이겠지.

세미르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그러니.

【부디··· 부디 저를 잊어주세요. 그리고 꼭, 꼭 행복하게 사셔야해요. 세미르. 제 생각에 괴로워도 말고, 슬퍼도 말고. 찬란한 세미르의 시간을 사세요.】

헬렌은 이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세미르의 걸음을 뚝, 하고 멈춰섰다.

헬렌을 바라보는 세미르의 시선이 떨리고 있었다.

모르지··· 않았다.

방금 저 말이 무슨 의미인지.

세미르는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세미르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은 그저 망치나 두들기며 무구를 만드는 한낱 드워프.

떠나가는 헬렌을 무력하게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세미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헬렌 또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100년의 기다림 끝에 마주한 것은, 결국 이러한 운명.

그 운명의 종착역 앞에서 세미르와 헬렌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쿨럭···! 약속까지도··· 못 드리겠습니다···!”

한 쪽으로 고통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라본 그곳.

그곳엔 시안이 힘겹게 말을 내뱉고 있었다.

만신창이가 된 몸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으나.

“언제가 될지도 말씀드릴 수도 없지만···!”

시안은 꾸역꾸역 입을 열었다.

죽으려 하는 헬렌을 바라보면서.

“반드시 그곳에서 꺼내드리겠습니다···!”

어떤 결연한 의지마저 느껴지는 눈빛.

“그러니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주세요. 고통스러울 것을 알지만 세미르를 위해서.”

그리고.

“헬렌, 당신을 위해서라도···! 쿨럭···!”

시안이 왈칵, 피를 토했다.

【아아···.】

그런 시안의 모습에 헬렌의 두 눈빛이 떨려왔다.

계속해서 흐릿해지는 몸.

죽으려면 지금밖에 없건만, 헬렌은 심히 주저하고 있었다.

악마와의 동화가 일순간 끊어진 지금의 헬렌.

이건 100년간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무엇보다 동화를 끊는 것은 불가능이라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러나 저 시안이라는 자는 그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하지만···.

바로 그때.

“잊어달라 하였소.”

나지막한 세미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미르는 확고한 눈빛으로 헬렌에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그렇게는 못하겠소.”

【세미르!】

헬렌이 소리쳤다.

무려 100년이었다.

아무리 드워프에게는 반평생인 세월이라고는 하나.

이 또한 기나긴 세월임은 변함이 없었다.

이제는 그만 놓아주어도 아무도 뭐라할 사람이 없다.

지금도 충분히 아니, 과하게 기다린 세미르였다.

그러나.

“드워프는 드워프만의 방식이 있소이다.”

인간과는 다른.

아주 고지식하고.

또 오우거의 힘줄 보다 억센 방식이.

누군가는 멍청할 정도로 답답하다 욕하겠지만···.

그것이 바로 드워프다.

“드워프가 누군가를 잊는데 100년은 너무 짧다오.”

대륙에 마지막 남은 드워프, 세미르.

그리고 100년 전.

그 날에 멈춰버린 시간의 드워프.

그렇게 멈춰버린 시간의 드워프는.

“천 년쯤이라면 모를까.”

여전히 흐르지 않고 있었다.

【아··· 아아···.】

헬렌의 두 눈빛이 심하게 떨려왔다.

참으로··· 참으로 야속하다.

정말로 야속하다.

이제는 완전히 흐릿해지는 몸.

정말 죽으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였다.

헬렌은 세미르를 바라봤다.

세미르에게 자신을 잊어달라는 말을 하기 위해 100년을 버틴 헬렌이었다.

그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꿋꿋이 버텨온 헬렌이었다.

그러니.

【제가··· 제가 돌아올때까지 기다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또 100년이라고 못 버틸까.

지난 100년은 희망이라고는 일절 없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지금.

미약하지만 희망이 있다.

저 시안이라는 남자.

저 남자는 불가능이라 여기던 악마와의 동화를 끊어버렸다.

비록 완전히 끊어버리는 못했다.

해서 그것이 가능한 일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 꿈과도 같은 일이 가능하다면.

그깟 100년이라고 또 못 버틸까.

【세미르. 정말··· 정말 파렴치한 부탁인 걸 아는데···. 다시 한 번 기다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기다리겠소.”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그렇게 드워프의 시간은 다시 한 번 멈춰버렸다.

사라지는 헬렌의 모습.

사아아악···.

이윽고 헬렌의 모습이 완전한 자취를 감추었다.

세미르는 그 자리에 서 헬렌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사람들은 그런 세미르를 멍하니 바라봤다.

얼마 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세미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시안을 바라봤다.

아득히 먼 세월.

숲에는 숲의 종족이 살았고.

산에는 산의 종족이 살았다.

그러나 다시 오랜 세월.

드워프는 드워프의 방식을 잃어버렸고,

끝내 드워프는 인간이 되었다.

세미르는 그렇게 변하는 드워프가 싫었다.

그래서 이곳 어둠의 숲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세미르의 시간은 멈춰버렸다.

세미르는 여전히 인간을 믿지 않는다.

앞으로도 믿지 않을 것이다.

드워프는 여전히 드워프만의 방식이 있다.

그래서 지금 이 선택이, 정답일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분명히 틀린 선택이라 세미르는 생각했다.

그러나.

“100년 전부터 틀려먹은 생이었거늘. 이제 와 또 틀린다해도 상관없겠지.”

드워프는 끝내.

그 고집을 꺾기로 마음 먹었다.

세미르가 시안을 향해 입을 열었다.

“긍지 높은 망치모루 부족의 족장이자, 동시에 위대한 모르크루의 7번째 자손.”

그리고.

“루벤의 영지민, 세미르.”

일순간 세미르의 몸이 천천히 낮아졌다.

이윽고 한쪽 무릎을 꿇고,

다붓이 고개를 숙인다.

“루벤의 영주님을 뵙습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루벤의 영주님을 뵙습니다.”

“루벤의 영주님을 뵙습니다.”

“루벤의 영주님을 뵙습니다.”

세미르를 비롯한 모든 드워프들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시안에게 예를 다했다.

그리고.

띠링!

그 사이로 스마트 폰의 경쾌한 알림음이 들려왔다.

『[영지 퀘스트] - ‘고통을 함께 나눈 친구야 말로 진짜 친구!’ (클리어!)』

《드워프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루벤을 떠난 당신.》

《그들은 당신을 어떤 의미로 배척했지만 당신은 그들의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갖는 아픔을 이해했고, 또 공감했으며.》

《끝내 그들을 포용해주었죠.》

《기약없는 약속, 그러나 거짓되지 않은 마음.》

《그런 당신의 진실된 마음에 드워프들은 더 이상 당신을 친구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띠링!

《퀘스트 초! 과! 달! 성!》

《퀘스트 초과 달성으로 추가 보상 및 보상의 수준이 변화합니다!》

《드워프들은 당신을 진심으로 영주로 모시고 섬길 것입니다!》

《이제부터 드워프들 모두가 당신의 명령에 복종합니다!》

《설령 그것이 부당함에 기반한 명령일지라도요!》

[추가 보상: 모르크루의 유산]

그리고.

띠링!

《당신은 악마 7군주, 나태의 누르비아와 대적하여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전설 업적 ‘악마 사냥꾼’ 달성!》

《전설 등급 업적 달성으로 숨겨진 특별 항목이 개방됩니다!》

.

.

스마트 폰 화면위로 무수한 알림창이 떠올랐다.

하지만 시안은 그 알림창을 전부 확인할 수가 없었다.

흐려지는 시야.

털썩.

시안의 정신이 끊어졌다.

#

신성 제국, 루테아.

그리고 그런 루테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교황청.

“건국일 행사는 어떠셨어요?”

로라는 이제 막 교황청으로 돌아온 아리아를 반겼다.

로라는 신성 제국의 여사제이자 성녀 아리아를 보좌하는 이였다.

아리아를 위험으로부터 지키는 보디가드 와도 같은 존재.

하지만 아리아에게 보디가드가 무슨 의미가 있으랴.

뮤리엘의 환생.

신성 제국 역사상 가장 강한 신성력을 지닌 이.

“제국의 남자들이란 남자들은 죄다 홀리고 오셨나?”

실상은 그냥 터울 없이 지낼 수 있는 벗이나 다름 없었다.

동시에 아리아의 천성을 알고 있는 몇 안되는 이 중 하나였고.

“남자들은 무슨.”

“처음으로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신 거잖아요. 성녀님의 거룩한 미모를 보고 반하지 않을 남자가 어디있다고?”

“또또 그 소리다.”

아리아는 지겹다는 듯 고개를 흔들어보였다.

“에헤··· 역시 여럿 홀리고 오셨군요?”

“아니라니까.”

고개를 젓는 아리아의 모습에 로라는 살짝 웃음을 흘렸다.

저리 말해도 수없이 많은 구애를 받았음을 모르지 않았으니까.

로라는 그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그런데 로라.”

갑자기 아리아가 궁금하다는 듯 로라에게 물었다.

“혹시··· 남자들 중에 얼굴에 관심이 없는 남자도 있어?”

“어··· 글쎄요?”

로라는 이걸 어떻게 대답해야하나 판단이 서질 않았다.

물론 여인의 얼굴에 관심이 없는 남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어느 정도이지.

아리아 정도 되면 무의미한 질문이었다.

저 잡티 하나 없는 백옥같은 피부와 매끈하게 내려앉은 백금발.

가히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초월적인 미모.

같은 여자임에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찔해지는 아리아이지 않은가.

아리아의 천성을 알고 있는 로라였지만 솔직히 그게 무슨 상관이랴.

천성이 개차반이든 뭐든.

저 정도 미모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뭐···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건 왜요?”

“아니, 뭐···. 아니야. 됐어.”

아리아는 말을 얼버무렸다.

하지만 이대로 놓칠 로라가 아니었다.

“설마, 제국에서 성녀님을 보고 관심 없던 남자가 있었어요?”

“아니 그 정도까진 아닌데··· 아니야. 그냥 잊어버려.”

아리아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러나 아리아의 표정이 어째 심상치 않다.

꽤 오랜 세월 아리아와 자매처럼 지내온 로라.

“설마 관심이 가는 남자가 생기신 거예요?”

“그런거 아니라니까!”

그러자 아리아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꽤나 화가 난 듯 보였지만 로라에겐 전혀 통하지 않았다.

“흐응···.”

로라가 눈을 흘기며 아리아를 바라봤다.

“대체 누구예요? 우리 성녀님의 마음을 훔치신 운 좋은 남자가? 혹시 황태자 전하? 아니면 제국의 별이라 명성이 자자한─.”

“아씨! 그런 거 아니래도!!”

아리아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로라는 귓구멍을 틀어막으며 알았다는 제스처를 보였다.

아리아는 새침하게 눈을 뜨며 고개를 홱, 돌렸다.

“쓸데 없는 소리 그만하고. 여기, 가져왔어.”

이윽고 아리아가 품 속에서 작은 무언가를 꺼냈다.

나침반처럼 생긴 무언가.

다름 아닌 전당에서 가져온 샤를롯의 유산, 악마 탐지기였다.

“이게 그 샤를롯 대제께서 남기신 유산이군요. 마침 성하께서도 물어보셨거든요.”

로라는 아리아가 꺼낸 악마 탐지기를 받아들었다.

“어디 한 번 사용해볼까요? 성녀님의 미모가 악마인지 아닌지?”

로라는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악마 탐지기를 이리저리 살폈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이거 어떻게 사용하는 거예요?”

마땅한 스위치 같은 것이 보이지 않았다.

“······ 응?”

로라의 말에 아리아가 순간 멈칫거렸다.

그리고 크게 당황하며 악마 탐지기를 다시 가져왔다.

그렇게 이것저것 조작해보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혹시 마력을 주입해야하는 건가?

아리아는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악마 탐지기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면 마나석을 껴야하는 건가?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마나석을 끼울 홈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아리아는 한참 동안이나 악마 탐지기를 만지작 거렸다.

끝내 도달한 결론.

“설마 성녀님도 모르시는 거예요?”

아리아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자 전하나 황제 폐하께 물어보지 않으셨어요?”

“그게···.”

아리아는 차마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이걸 황태자나 황제에게서 얻은 것이 아니었으니까!

시안이라는 남자.

그 남자에게서 10만 골드와 몸으로 한 번 때우는 조건으로 얻은 것이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사용법을 물어보지 않았다.

그때 그냥 너무 속상하고 화가 나서 그대로 뛰쳐나와버렸으니까.

“혹시 사용 설명서 같은 건···.”

로라가 말했지만 금방 고개를 저어보였다.

이건 무려 천 년전, 샤를롯이 남긴 유산.

사용 설명서 같은 것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럼 이걸 어떻게···?”

로라의 물음에 아리아가 크게 당황해보였다.

물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 유산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아는 척 하지 말라고 했는데.

먼저 연락하면 괜히 찝쩍거린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용 설명법을 안 알려준 시안 잘못도 있는 거고.

그래, 이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로라, 편지 한 장만 줘봐.”

“편지요?”

“이걸 알만한 사람이 있어.”

로라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편지를 찾아 아리아에게 건넸다.

아리아는 꽤나 들뜬 모습으로 편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마치···.

사모하는 누군가에게 연서를 쓰는 듯한 소녀의 모습이지 않은가.

말로는 아니라고 하더니.

‘대체 누굴까나··· 우리 성녀님의 마음을 훔친 자가.’

로라의 두 눈빛이 꽤나 의미심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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