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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질하는 영주님!-54화 (54/322)

§ 54화 - 나태의 악마

느껴지는 끝없는 사념(死念).

이건 그 동안 시안이 마주했던 그 어떠한 사념보다 차원이 다른 흉악함을 품고 있었다.

심지어 레아에게 느꼈던 원념보다도 더욱더.

여인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시안의 볼 위로 주륵,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그리고.

“아니야··· 이럴 리가··· 아니야··· 아니야···!”

어디선가 이런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바라본 그곳엔 세미르의 모습이 비쳐보였다.

신장(神匠) 모르크루의 후손이자 망치모루 부족의 족장, 세미르.

세미르는 석상처럼 그 자리에 굳어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시선은 여인에게 고정되어있었다.

“아니야··· 아니야···.”

세미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같은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무슨 일일까.

물어보고 싶었지만 시안은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뭐, 뭐야···!”

“갑자기 이게 무슨···!”

급변하는 상황에 사람들이 모두 당황해보였다.

그리고.

“너, 너, 너는···!!”

“어떻게 네가 여기에!!”

그들 중 루카스와 그레이슨의 반응이 가장 거세었다.

둘은 두 눈을 거의 찢어질듯 뜨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시안은 알 수 있었다.

숲 안 쪽에 자리 잡았다던,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강대한 마수.

시안은 그 강대한 마수가 바로 저 여인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루카스는 분명 저 여인을 ‘인간’이라 정의했다.

그리고 실제로 보이는 모습 또한 인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겉으로 느껴지는 기운 또한 인간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시안은 알 수 있었다.

정확히는 시안만이 알 수 있었다.

다른 이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심지어 레아조차 저 여인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곳 루벤에 들어올 수 있었겠지.

오직 시안만이 저 여인에게서 끔찍한 악의(惡意)를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시안은 저 여인의 진정한 정체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다름 아닌 아르나이즈 전당에서 있었던 일.

그곳에서 아리아에게 팔았던 ‘악마 탐지기’.

그것에 관해서 레아는 이러한 말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거 주변에 변형된 마기가 있는 지를 측정하는 장치인데. 그러니까··· 악마 탐지기? 따로 부르는 이름이 있었는데 까먹었어.’

‘옛날에 악마들의 접근을 알아채는 데 쓰던 거야. 악마가 접근하면 막 요란하게 울려. 예전에 악마들이 사람으로 감쪽같이 변신해서 접근하고 그랬거든. 그래서 필요했던 건데··· 지금은 뭐.’

‘그리고 너한테는 필요 없을 걸? 카일은 악마의 존재를 누구보다 빠르게 눈치챘거든. 그것도 오빠가 쓰던 건데. 엘로디가 버리라는 거, 오빠가 넣어놓고 까먹고 있던 거야.’

아르나이즈의 리더인 샤를롯조차 눈치챌 수 없어 마도구의 힘을 빌려야만 했던.

처음엔 반신반의 했지만.

지금은 확신에 가까워졌다.

【이상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여인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기울어진 고개 사이로 시뻘건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 사이로 억눌려진 포악한 힘이 엿보인다.

저것은 어떠한 촉발제만 있다면, 금방이라도 끔찍한 해방을 맞이할 것처럼 날뛰고 있었다.

【우리의 존재를 아는 이들은 이제 없을텐데?】

여인의 번뜩이는 시선이 시안에게로 향한다.

퍼져나오는 자욱한 죽음의 기운.

【넌 어떻게 날 알고 있는거니, 꼬마야?】

따악─.

주변으로 먹구름처럼 검붉은 악의가 떠올라 여인의 몸을 휘감았다.

악의로 감싸진 여인은 이윽고 다시 모습을 드러내었고.

방금 전까지 피칠갑을 하고 있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렸다.

피어난 악의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여인.

“저, 저, 저···!”

“저게 대체 무슨···!”

그건 끔찍하다는 말로도 감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저 존재를 정의내리는 개념이 있을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부정적인 단어를 끌어다 모아놓아야 비로소 저 여인을 설명할 수 있으리라.

모습은 분명한 인간 여성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주변으로 끝없는 어둠에 잠긴 사위.

단 한 점의 빛도 허용하지 않는 칠흑의 어둠 사이로 새빨간 안광이 번뜩인다.

저건··· 더 이상 인간이라 부를 수가 없었다.

사령(死靈)이라 정의할 수도 없었다.

마족(魔族).

천 년전에 사라진 악마들의 잔재.

그나마 설명이 가능한 개념이 이 정도이리라.

그러나 시안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저건 마족이 아니다.

“악마···.”

악마(惡魔).

천 년전.

대륙을 혼란에 빠뜨렸던 악의 존재들이자.

끝내 아르나이즈들에 의해 사라졌다 알려진 악마였다.

“아, 아, 아, 악마···?”

“말도 안돼! 어떻게 악마가!”

시안의 중얼거림에 사람들이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리고.

【진짜 나를 알고 있잖아?】

사아아아악─.

흉측한 악의(惡意)가 뒤덮는다.

모든 세포 하나하나에서 쥐어짜낸 듯한 광기.

그것이 어둠을 새빨갛게 물들인다.

땅거미 마저 가려진 완전한 어둠의 장막 속.

물결치는 어둠에 덧칠하듯 사념이 새까맣게 몰려온다.

【그럼 꼬마야. 내가 지금 무언가를 찾고 있거든? 혹시 네가 그것도 알고 있을까?】

물결치는 어둠에 덧칠하듯.

사념이 시안의 정신을 헤집어 놓는다.

【아, 무엇인지는 알 필요는 없어. 내가 알아서 너희들의 기억을 뜯어볼테니까.】

아득해지는 정신.

“아··· 아아···.”

“이, 이건···.”

사람들의 얼굴에 끝없는 공포가 깃들었다.

내려앉는 절망.

시안이 이를 까득, 깨물었다.

마혼제법의 마기를 끌어올리며 덮쳐오는 사념을 떨쳐버렸다.

“모두 정신 차려!!”

그와 동시에 밀려오던 어둠이 일시에 달아났다.

【······ 내 사념에 저항했다고?】

악마가 눈을 크게 떠보였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인간.

느껴지는 기운은 그다지 별 볼일 없었다.

어떻게 정체를 눈치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약한 인간인 건 변함이 없었다.

그렇기에 존재를 개방한 순간, 공포에 질려 정신을 잃었어야했다.

【그런데 어떻게···.】

바로 그때.

“모두 대열을 갖춰라!”

시안의 외침에 정신을 차린 루카스가 가장 먼저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그런 루카스의 외침에 병사들 또한 각자의 무기를 뽑아들었다.

아르나이즈의 특전, 샤를롯의 긍지.

사람들의 정신에 간섭하려던 어둠은 끝내 아무런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다른 인간 놈들도 저항을 했다고?】

악마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윽고 악마가 스스로의 몸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아직도 그릇의 정신 때문에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긴 하다만···. 100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굴복하지 않는다니. 귀찮기 짝이 없다니까.】

뭐, 그래도.

【상관 없겠지.】

악마가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쩌──────엉!

악마의 주변으로 소름끼치는 광기의 마력이 터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대지가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검은 꽃이 만개하듯.

마치 심연에 삼켜진 것만 같은 대지.

그것은 맑은 물에 검은 물감이 확산되는 것처럼, 삽시간에 주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키에에에에에에에엑───!!

그 사이로 흉측한 괴성이 들려왔다.

이윽고 검게 물든 대지를 뚫고 흉측한 마물들이 튀어나왔다.

어둠의 숲에 기거하는 마수들.

그러나 그간 루벤을 습격해온 마수들과는 달리 저들은 완전한 어둠으로 물들어 있었다.

일말의 이성조차 남아있지 않는 본능의 마물들.

키에에에에에에에엑───!!

마물들이 역병처럼 퍼져나가며 병사들을 덮쳐갔다.

그와 동시에

“전원 전투 대열로!”

시안의 외침과 함께 병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저마다 투기를 끌어올리며 무기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콰직!

퍼서석!

루벤의 병사들이 쏟아지는 혼돈의 마물들을 막아내고 있었다.

혼돈의 마물들은 어둠의 숲의 마수보다 흉악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끝도 없이 쏟아져오는 마수와의 전투 경험.

그리고 어마어마한 현질로 인한 성장 버프.

그것은 루벤의 병사들이 갖는 한계를 뚫어놓았고.

“대열 전진!!”

“키에에엑···!”

콰직!

아무리 어둠에 잠식된 마물들이라 할지라도 루벤의 병사들을 쉽게 뚫어낼 수 없었다.

【대체··· 뭐하는 것들이야?】

악마는 황당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바로 그때.

끼야아아아아아아아악!!!

소름끼치는 귀곡성(鬼哭聲)이 터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피어난 어둠이 퍼져나가는 마물들을 일시에 휘감았다.

마물들이 피어나는 어둠에 저항했지만,

어둠은 끝내 모든 마물들을 집어 삼켜버렸다.

꽈드드드드득!

【이게 무슨···.】

악마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바라본 주변.

그곳엔 소환된 마물들이 전부 으스러져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한 존재.

그곳엔 레아가 짙은 마기를 흩뿌리며 허공에 떠있었다.

【군단장급의 원귀가 있다고?】

악마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이윽고 레아가 시안의 곁으로 다가갔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악마인 것 같습니다.”

-악마···?

레아가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냐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그리고 악마가 어떻게?

이윽고 레아의 시선이 악마에게로 향했다.

-잠깐, 이 힘은···?

그리고 점점 눈이 크게 떠지더니.

-나태의 누르비아···?

레아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말도 안돼! 네가 어떻게 여기에! 넌 천 년전에 분명··· 죽었었는데?

충격에 빠지는 레아의 표정.

시안은 그런 레아에게 물었다.

“아는 악마입니까?”

그러자 레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태의 누르비아. 7군주 중 한 명이야.

“7군주라 하심은···.”

-악마 군단을 이끄는 7군주를 말해. 저 녀석 말고 6명이 더 있어.

“······!”

시안은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떠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레아가 말한 7군주.

그건 신화 속의 존재이자 무려 천 년전.

대륙을 혼란에 빠뜨렸던 악마들의 핵심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일곱 가지의 대죄(The Seven Sins).

교만, 탐욕, 질투, 분노,색욕, 탐식, 나태.

그 죄에서 깨어난 일곱의 악마.

저 여인은 그 중 나태(Pigritia)의 악마였다.

“악마 7군주가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그보다 분명 천 년전에 전부 소멸했을텐데 대체 어떻게···!

【너··· 평범한 사령이 아니구나?】

누르비아가 히죽, 웃어보였다.

그리고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에 인간들이 모여살고 있길래 호기심에 잠깐 들렀건만. 내 정체를 파악하는 것도 그렇고, 사념에 저항하는 것도 그렇고, 심지어 내 존재를 알고 있는 사령까지···.】

이윽고 누르비아의 시선이 시안에게서 멈추었다.

피어나는 끝없는 악의.

【그럼 내가 찾는 것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고 있겠네?】

키에에에에에에에엑───!!

심연으로 잠식된 어둠 사이로 다시 한 번 마물들이 튀어나왔다.

그와 동시에 레아가 다시 한 번 마기를 끌어모았다.

쏟아지는 마물들을 다시 쓸어버리기 위함.

하지만.

【어딜!】

누르비아가 다시 한 번 가볍게 손을 휘저어 보였다.

검붉은 광기의 마력이 누르비아의 손에 깃들며 공간을 찢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섬뜩한 송곳들이 튀어나와 레아에게 쇄도해갔다.

-이 년이!

꽈아아앙!

폭음이 터져나오며 뜨거운 불길이 솟구쳤다.

그 불길 사이로 레아가 누르비아를 막아서고 있었다.

시안은 루카스와 한스를 번갈아 바라보며 소리쳤다.

“루카스! 병사들과 함께 마물들이 더 안 쪽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 그리고 한스, 그레이슨! 지금 당장 가서 사람들을 모아 대피시켜!”

루카스와 한스 그리고 그레이슨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전원 착검!! 여기서 저 마물들을 단 한 놈도 보내지 않는다!”

“엘리! 어서 이쪽으로 오거라!!”

“모두 나를 따라오시오!”

그저 행동으로 보일 뿐.

키에에에에에에엑─!!!

심연의 대지를 가르고 튀어나온 마물들이 덮쳐온다.

심지어 지금 이 순간에도 마물들은 끊임없이 튀어나왔다.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우리 드워프들도 돕겠네!”

“으랴아아아아!!!”

드워프들이 저마다 무기를 들고 루벤의 병사들과 합류했다.

급작스럽게 치닫는 상황

시안은 다시 한 번 검을 고쳐잡았다.

솔직히 의아한 점은 많았다.

어째서 7군주 중 하나가 여기에 있는지.

천 년전에 소멸한 악마가 어떻게 다시 나타났건지.

또 왜 갑자기 나타났는지.

그리고 저 누르비아가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인지.

수없이 떠오르는 의문들.

그러나 시안은 그 모든 의문들을 밀어내었다.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시안은 타닥! 앞으로 달렸다.

마물들은 병사들에게 맡긴다.

요동치는 마기.

시안은 레아와 싸우고 있는 누르비아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꽈아아앙!

섬뜩한 폭음이 터져나오며 먼지가 일었다.

S등급이 갖는 힘과 마혼제법의 마기가 더해진 끔찍한 힘.

【귀찮게 굴긴!】

하지만 누르비아에게 닿기에는 부족한 힘이었다.

키이이이잉─!

시안의 귓가로 찢어지는 이명이 들려왔다.

이윽고 시안의 주변으로 여러 개의 마법진이 새겨졌다.

‘위험!’

시안은 곧장 다리에 힘을 주어 자리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그것과 거의 동시에.

꽈꽝!

방금 전까지 시안이 있던 곳의 공간이 박살이 나버렸다.

가만히 있었다면 시안 또한 같이 으스러졌을 터.

다행히 반응을 했지만.

“쿨럭···!”

완전히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주륵, 입가로 흐르는 피.

-시안! 괜찮아?

레아가 황급히 시안의 곁으로 다가왔다.

시안은 입가에 흐르는 피를 소매로 훔치며 답했다.

“레아, 제가 누르비아의 시선을 끌테니까. 틈틈이 병사들을 지켜주세요.”

-하지만 그러면 네가···.

“전 신경쓰지 마세요.”

-······ 알겠어.

레아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너···.】

누르비아는 지금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시안의 일격.

인간치고는 매섭긴 했으나 그래봤자였다.

그런데 한 가지.

【내 광기가 흩어졌다고···?】

시안의 검격을 막은 광기가 잠시나마 흩어졌다.

정확히는 그 본연의 성질로 돌아가버렸다.

이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광기의 마력은 이미 자신의 통제하에 있었다.

그 마력이 흩어지다 못해 본연의 성질로 돌아간다.

그건 저 인간이 자신의 광기를 지배했다는 뜻이었다.

그건 절대 불가능하다.

한낱 인간 따위가 악마의 힘을 다스린다니.

딱 한 번.

아니, 딱 한 존재만이 이러한 것이 가능했다.

떠오르는 불쾌한 기억.

아니, 불쾌하다기보다는···.

공포.

내지는 트라우마.

그렇게 표현함이 옳았다.

악마에게 공포와 트라우마라니.

그만한 아이러니함이 없었으나, 이 기억은 충분히 그렇게 만들었다.

【허튼 생각을.】

누르비아는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

절대로 그럴 리가 없었으니까.

그건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되는 일이다.

그러니 아마.

광기가 흩어진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 망할 놈의 그릇은 대체 언제 굴복할 셈인 건지.】

그릇의 간섭.

무려 100여년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음에도 이 인간은 정신이 무너지지 않았다.

한낱 인간 따위가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건지.

그 때문에 누르비아는 온전한 본연의 힘을 끌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힘을 사용할 때마다 그릇의 정신이 방해를 해왔으니까.

심지어 얼마 전에는 두 인간 놈을 살려주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뭐.

【그래봤자 나약한 인간 놈들인데.】

누르비아가 끔찍한 광기를 터트렸다.

바로 그때.

흠칫!

누르비아의 정신으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

누르비아와 대적하는 시안과 레아.

혼돈의 마물들과 싸우고 있는 루벤의 병사들과 드워프.

이 치열한 전장 속에서.

“아니야··· 아니야···.”

세미르는 여전히 그 자리에 박혀 서있을 뿐이었다.

정신이 멍하다.

아무런, 아무런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생각은 눈앞의 광경을 부정하고 있으나,

바라본 현실은 끝내 달라지지 않았다.

“족장! 대체 무얼하고 있는거야!”

“아까부터 왜 그래 족장!!”

그런 세미르의 모습에 크마루를 비롯한 다른 드워프들이 소리쳤다.

그러나 세미르는 답을 하지 않았다.

“아니야··· 아니야···.”

그저 계속 같은 말만 중얼거릴 뿐.

세미르의 시선은 계속 한 곳만을 향해 있었다.

떨리는 두 눈.

조금은 달라진 모습이었다.

그렇기에 다른 드워프들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세미르는 모르지 않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애써 아닌 척, 잊어보려했지만.

되려 잊자는 그 생각 먼저 잊어버렸으니까.

100년 전.

세미르의 시간은 그곳에서 멈춰버렸으니까.

그렇기에 단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는 이름.

그렇기에 단 한 순간도 흐른 적이 없었던 시간.

“헬렌···.”

세미르가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그 순간.

흠칫!

누르비아의 몸이 멈칫 거렸다.

이윽고 누르비아의 고개가 천천히 세미르를 향했다.

마주 보는 시선.

그리고.

【끄아아아아아아악!!!】

누르비아가 고통에 찬 비명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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