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 산의 종족, 드워프(2)
신장(神匠) 모르크루.
6인의 아르나이즈 중 한 명인 그는 드워프 종족이었다.
그리고 다른 아르나이즈의 전설적인 무구들을 만들어준 아르나이즈이기도 했다.
일단 본인의 둠해머, 아달라드(Adalrad)부터 시작해.
건국일 행사에서 봤던 샤를롯의 조디악 소드(Zodiac Sword).
엘로디의 지팡이, 인스티즈(Instiz).
뮤리엘의 완드, 이슈텐(Isuten)
노에미의 홀, 샤라스달(Sharasdal)까지.
신화적인 무구들을 제작한 전설의 아르나이즈.
다만, 카일의 검에 대한 것은 알려진 바가 없었다.
카일이 어떤 검을 쓰고 있었는지.
또 모르크루가 만들어주었는지.
전혀 알려진 바가 없었다.
카일은 다른 아르나이즈들과는 달리 많은 사실이 알려져 있지 않았으니까.
얼굴이야 레아의 영향이었다지만.
다른 부분은 이상하리만치 알려진 사실이 없었다.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기록을 삭제한 것처럼.
최강의 아르나이즈.
오직 그것만이 카일에 관해 알려진 전부였다.
아무튼 그런 신장(神匠) 모르크루의 후손이라 밝히는 세미르.
‘레아가 이곳 어둠의 숲이 엘로디와 모르크루의 고향이었다고 하더니···.’
그런데 어둠의 숲으로 변질되고 모두 떠났다고 하지 않았나?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모르크루의 후손은 계속해서 이곳에 남아있었던 것 같았다.
시안은 상념을 떨쳐버리며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저는 루벤의 영주, 시안 엘란두르라고 합니다.”
“그렇군.”
세미르는 그렇게 한 번 주억거릴 뿐이었다.
아무리 드워프라 할지라도 족장쯤 되면.
대개 ‘엘란두르’ 라는 이름에 많이 놀라보인다.
인간들과 교류하면서 그 이름을 수없이 접해봤으니까.
그러나 세미르는 그렇지 않았다.
인간들의 사회를 전혀 알 지도 또 관심도 없는 모습.
앞선 소개 방식도 그렇고.
크마루가 왜 마지막 남은 드워프라 했는지 알 것 같았다.
“크마루가 쓸데 없는 짓을 했군.”
이윽고 세미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난 딱히 할 말이 없네. 그러니 돌아가게나.”
그리고는 정말 할 말이 없다는 듯.
다시 문 안쪽으로 들어가는 세미르였다.
그러자 크마루가 황급히 소리쳤다.
“족장! 어렵게 데려온 손님이야! 이렇게 보내는 건 예의가 아니지!”
“네 멋대로 데려온 손님이기도 하지. 내가 분명 안된다고 했을텐데.”
“도움을 받는 게 뭐가 그리 어려운데!”
“도움에는 마땅한 대가가 따른다. 하물며 인간들은 그 대가를 과도하게 얻으려는 경향이 있지. 그리고 우리는 드워프다. 드워프가 언제부터 인간들의 도움을 받았었지?”
이윽고 세미르가 시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영지민은 치료를 받아 무사하다. 우리 드워프는 너희 인간들과는 달리, 선의와 도움에 딱히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니 둘을 데리고 그만 가보도록.”
쾅.
세미르는 그렇게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하여간! 누가 드워프 아니랄까봐 저 놈의 고집은 정말!”
크마루는 씩씩거리며 세미르가 떠나간 문 앞에다 소리쳤다.
그리고는 난처한 기색으로 시안에게 말했다.
“미안허이. 어려운 발걸음을 해주었는데···.”
시안은 그런 크마루를 바라보다 물었다.
“왜 저렇게 저를 경계하는 겁니까?”
“말했지 않나. 우리 족장님은 마지막 남은 드워프라고. 드워프의 쓸데없는 고집인 것이지.”
크마루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보였다.
장인의 종족, 드워프.
그들의 고집은 오우거의 힘줄보다 억세다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도 세미르의 반응은 과했다.
마치 인간 자체를 꺼려하는 듯한 모습.
드워프가 폐쇄적인 사회라고는 하나,
그래도 다가오는 손님을 이렇게 배척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 시안의 의문을 알아챈 것인지 크마루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그것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다네.”
“다른 이유요?”
크마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가세. 두 인간 친구가 있는 곳으로 가면서 말해주겠네.”
#
크마루는 짧은 다리를 움직여 시안을 안내했다.
루카스와 그레이슨.
그 둘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 같았다.
시안은 말없이 그런 크마루를 따라갔다.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
“오면서 말했었지만 현재 우리 부족은 시도때도 없는 마수의 습격으로 시달리고 있네.”
크마루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수가 들끓는 어둠의 숲이라고는 하나. 그럼에도 그 정도가 너무 심해. 지금은 어떻게든 꾸역꾸역 막았지만 슬슬··· 한계에 달하고 있는 실정이야.”
시안은 고개를 한 번 끄덕여보였다.
크마루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같은 처지에 있었으니까.
최근에 끝도 없이 들이치는 마수들.
루벤 또한 시안의 현질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무너졌을 터였다.
어둠의 숲 외곽에 위치한 루벤도 그러할진대.
숲 안 쪽에 있는 드워프 마을은 오죽할까.
그나마 드워프들이었기에 버틸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던 와중 자네의 두 인간 친구를 발견했다네. 우연찮게 우리 마을로 흘러들어왔는데 처음 봤을 땐 정말 다 죽어가고 있었지.”
다름 아닌 숲 안 쪽에 자리잡은 강대한 마수를 조사하러 떠난 루카스와 그레이슨.
크마루의 말을 듣자하니 그 과정에서 심하게 다친 모양이었다.
“그 둘은 괜찮은 겁니까?”
“아아, 지금은 괜찮다네. 저번에도 말했지만 두 친구가 굉장히 터프하더라고. 크하핫!”
크마루가 호탕하게 웃어보였다.
“아무튼. 그 두 친구에게 듣자하니 자네. 폐허나 다름 없던 영지를 그만큼이나 발전시켰다고. 들이닥치는 마수들을 철저히 방비하면서 말이지.”
“아··· 네.”
시안은 멋쩍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러자 크마루가 순수한 감탄의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대단허이. 어둠의 숲에서 홀로 살아남는 것도 벅찰진대 영지민들을 보듬어주기까지···. 저번에 보니까 건축물의 수준도 상당하던데. 실력 좋은 건축가라도 있는 모양이지?”
“뭐··· 그런 셈이죠.”
모바일 영주가 건축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크마루는 고개를 주억거려보였다.
딱히 캐물으려는 의도는 아니었던 것 같았다.
“해서 자네에게 도움을 좀 요청하려 했었네. 맨땅에서 영지를 일굴 정도의 자네라면 우리 마을에도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족장이 저 모양이니 원···.”
크마루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보아하니 시안을 만나러 온 것은 크마루의 독자적인 판단인 것 같았다.
그리고 아까 보였던 세미르의 반응.
“족장님은 왜 저렇게 저를 경계하시는 겁니까.”
“뭐, 드워프의 쓸데 없는 고집이지. 드워프로서 살아가는 걸 굉장히 중요시하거든. 하지만 비단 그런 것 때문만은 아니야.”
크마루가 계속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아마 그때가 100년 전 쯤이었을 걸세.”
그것도 무려 100년 전의 이야기를.
인간으로 치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을 시절이었지만, 드워프의 평균 수명은 대략 200년 가량이었다.
드워프들에겐 반평생의 시간.
“족장님은 한 인간 여성을 사랑했었다네.”
“······ 예?”
시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없는 경우는 아니었다.
대륙에는 인간 이외에 수많은 이종족들이 살았다.
그렇기에 드워프와 인간은 물론이고.
엘프와 인간. 드워프와 엘프.
엘프와 수인족 등등.
이종족들간에 눈이 맞는 경우가 더럿 있었다.
흔한 경우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설마··· 그때 바람 맞은 것 때문에 그런 겁니까?”
“비슷하네.”
비슷해?
시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람 맞은 거면 바람 맞은 거지.
비슷한 건 또 뭐란 말인가.
이어 크마루가 말을 이었다.
“그 인간 또한 족장님을 사랑했어. 둘은 서로 함께하기로 약속했다네. 비록 수명은 다르지만··· 사랑이란 원래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크마루가 입을 한 번 비죽여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드워프가 아닌 인간이었네. 인간들만의 방식이 있었던 거지. 그리고 이곳 어둠의 숲에서 살아가면 그 인간들의 사회로 돌아가기 힘들었고.”
해서.
“그녀는 자신의 부모님께 인사라도 하고 싶다며 잠시의 시간을 달라고 했다네. 족장님은 당연히 허락했지. 아니, 허락을 넘어 자신의 역작을 하나 만들어주어 약속의 징표로 삼았네.”
그렇게 그녀는 어둠의 숲을 떠났고.
“두 번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았어.”
“······”
“족장님은 기다렸다네. 필시 무언가 이유가 있을거라고. 하지만 몇 개월 뒤. 인간들의 도시에 족장님이 약속의 징표로 건넨 역작이 경매로 올라왔지.”
“아···.”
시안은 그때서야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바람 맞은 정도가 아니라 뒤통수를 맞고 배신을 당한 수준.
적나라하게 말하면 공사당한 것이었다.
그리고 인간들의 사회에서는 흔히 있는 일.
확실히··· 인간을 싫어할 만 했다.
“그런데 정말 답답한게 무엇인 줄 아나?”
이어 크마루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족장님은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네.”
“······ 네?”
시안은 저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잊지 못한다니? 대체 누굴 말인가.
“설마··· 그 여인을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
시안은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100년 전의 일이었다.
드워프에겐 반평생의 시간이나,
인간에겐 평생인 시간.
설령 당시 그 여인에게 모종의 어떤 이유가 있었다고 한들.
이제는 늙어 죽었을 시간이었다.
“그러니 내가 답답해 죽을 지경이지 않나!”
크마루는 주먹으로 가슴을 탕탕, 쳐보였다.
시안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인간들을 믿지 않는다면서 아직도 혼자 궁상이나 떨고 있으니 원. 뭐, 아무튼. 미안하게 되었서이. 어렵게 발걸음을 해주었는데···.”
“아닙니다. 그레이슨과 루카스 때문에라도 와봐야했으니까요. 오히려 그 둘을 구해주셔서 제가 더 감사합니다.”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마우이.”
크마루는 묵묵히 걸음을 옮겼고.
시안은 그런 크마루의 뒤를 따라갔다.
바로 그때.
“비상! 비상!! 트롤 무리들이 쳐들어왔다!”
갑자기 마을 한 켠에서 커다란 외침이 터져나왔다.
이윽고 마을의 드워프들이 허겁지겁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제기랄! 아까도 왔잖아! 대체 언제까지 들이닥치는거야!”
“그리고 왜 하필 트롤들인데!”
“불평할 시간 없어! 모두 연장 챙겨!!”
거친 목소리로 저마다 무기를 챙겨들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마수가 또 들이닥친 모양인데···.
그 순간 옆에 있던 크마루가 시안에게 소리쳤다.
“저기 모퉁이를 돌면 갈색 지붕의 집이 있을 걸세! 거기에 인간 친구들이 있으니 가보게나. 난 저쪽으로 가봐야할 것 같아!”
크마루는 그 말을 끝으로 허둥지둥 떠나갔다.
#
크르르르륵!
크워어어어!!!
트롤들의 울부짖음이 숲 가득히 터져나왔다.
번뜩이는 붉은 광채.
3m에 달하는 거대한 크기.
그것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막아! 놈들이 못 올라오게 막아!”
“으아아아아아!”
콰직!
드워프의 망치질에 트롤 하나가 그대로 짓뭉개졌다.
한 번의 망치질로 트롤을 짓뭉개는 어마어마한 괴력.
흔히 드워프를 장인의 종족이라 부른다지만.
그것이 드워프가 장인으로서의 역할만 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드워프는 그 어떤 종족보다 ‘힘’의 영역에 타에 추종을 불허했다.
매일같이 망치질로 단련된 근육.
애초에 6인의 아르나이즈 중 한 명인 신장(神匠) 모르크루.
그와 관련된 일화로 모르크루가 산 하나를 통째로 들어올렸다는 전설이 있었으니까.
물론 실제로 그러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디까지나 신화 속 이야기.
그러나 드워프의 힘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꾸르르르륵!
그 괴악한 힘마저 트롤의 재생력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짓뭉개진 트롤이 순식간에 재생을 끝마쳤다.
일반적인 트롤이었다면 그대로 절명했을 일격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곳의 트롤은 광폭화(Over Drive)가 진행된 트롤.
가히 불사라 불러도 모자람이 없었다.
“크르르륵···!”
“키에에엑!!”
트롤들이 끔찍한 포효를 터트리며 달려들었다.
“발사!”
콰콰콰콰쾅!
드워프들이 만든 갖은 병기들이 트롤들을 휩쓸어버렸다.
하지만 그마저도 트롤들의 재생력을 완벽하게 억제할 수는 없었다.
결국.
콰아아아아아앙!
“방벽이 무너졌다!
“안돼!!!”
마을을 지키던 방벽 하나가 무너져내렸다.
“크르르륵···!”
“키에에에엑!!!”
무너진 방벽 사이로 보이는 트롤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마루는 소리쳤다.
“막아야 돼! 놈들이 안 쪽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야 돼!”
“하지만 그 쪽으로 지원을 가면 이쪽 방벽이···!”
“이런 젠장!!”
크마루는 거칠게 말을 내뱉었다.
극도로 치닫는 상황.
지금 방벽 사이로 들어오는 트롤들은 반드시 막아야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로 마을이 함락될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저 트롤들을 막기 위해 전사들을 보내면 다른 방벽이 위험하다.
그럼 결국 그 방벽 또한 뚫리게 되겠지.
결국 아랫돌을 빼내어 윗돌을 괴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무엇보다.
‘솔직히 더 막을 수가 없어.’
트롤들을 상대할 저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드워프의 전사들이 강력하다고는 하나.
트롤들의 재생력은 더없이 끔찍했다.
죽여도 죽지 않는 불사.
지금을 어떻게 막는다고 치자.
하지만 그 다음은?
또 그 다음은?
이 이상의 항전은 사실상 무의미했다.
크마루가 소리쳤다.
“나카르! 지금 당장 병력을 물려 마을의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쳐!”
“뭐라고?”
나카르라 불린 드워프가 눈을 크게 떠보였다.
그러자 크마루가 망치를 탕탕, 두들기며 소리쳤다.
“아이들이 도망칠 시간은 내가 어떻게든 벌어보지!”
나카르는 버럭, 소리치듯 입을 열었다.
“말도 안되는 소리야! 족장님이 곧 오실거야! 그때만 어떻게든···!”
“족장님이 와도 안돼!”
크마루가 단호하게 소리쳤고.
나카르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크마루의 말이 사실임을 알고 있었으니까.
“아이들은 살려야 하지 않겠나.”
“하지만··· 우리가 갈 곳이 어디에 있나.”
이곳은 어둠의 숲.
생존이 보장되지 않는 끔찍한 공간이었다.
크마루가 등을 돌리며 말했다.
“우리 집에 내가 데려온 인간 친구가 있을 거야. 루벤이라는 영지의 영주인데. 그 친구를 따라가면 될거야. 보아하니 괜찮은 인간 친구 같더라고. 우릴 내치진 않을거야.”
“하지만 크마루 너는···.”
“어서 가!”
크마루는 나카르의 말을 끊으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나카르는 뭐라 할 말이 많아보였지만.
지금은 그런 감상 따위에 젖을 시간이 없었다.
“와라! 트롤들아! 무적의 크마루가 나가신다!”
크마루는 죽음을 각오하며 뛰어들었다.
“크르르륵···!”
“크워어어!”
마주 치는 트롤 무리들.
크마루는 손에 쥔 망치를 꽈득, 움켜쥐었다.
바로 그때.
타닥!
누군가 크마루 옆을 스치듯 뛰쳐나갔다.
가벼운 몸놀림.
크마루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곳을 향했다.
그리고 그런 크마루의 시야로 보이는 한 사내.
“자, 자네는···?”
시안 엘란두르.
루벤의 영주라 하던 인간 친구였다.
“자네가 왜 여기에···?”
시안은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금색의 머리칼을 휘날리며 검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이어진
단 한 번의 일격.
서걱─!
섬뜩한 절삭음이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앞선 트롤 하나가 깔끔하게 양단되어 허물어졌다.
실로 완벽한 일격.
하지만 남아있는 트롤들은 많았다.
시안은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조심하게!”
그런 시안의 모습에 크마루가 소리쳤다.
시안이 양단된 트롤을 전혀 신경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 정도로 트롤은 죽지 않는다.
트롤은 그 자체의 흉포함도 흉포함이지만.
트롤이 진짜 무서운 이유는 불사에 가까운 재생력이다.
아니, 사실 트롤은 저 재생력이 전부라고 봐도 무방했다.
어둠의 숲 외곽은 아직 트롤들이 습격하지 않은 것인 걸까.
아무래도 시안은 트롤의 끔찍한 재생력을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크마루는 망치를 꽈득, 움켜쥐었다.
그런데.
“······ 재생을 안 해?”
쓰러진 트롤이 재생을 안 하고 있었다.
원래 지금쯤이면 재생을 해서 시안의 뒤를 덮쳐야했건만.
트롤은 여전히 바닥에 허물어져 있었다.
크마루는 눈을 크게 뜨며 트롤을 살폈다.
재생을 안하고 있는 트롤.
아니, 안 하는 게 아니라 저건 못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잘려나간 살점은 서로 붙으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잘려진 단면 사이로 깃든 어둠.
그 어둠이 트롤의 재생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렇게 끝내 재생을 하지 못한 트롤은 움직임을 멈추었다.
“어, 어떻게···.”
서걱─!
섬뜩한 절삭음이 연이어 들려온다.
바라본 그곳.
그곳엔 시안의 검이 트롤 하나의 목을 또 다시 베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검 주변으로 일렁이는 검고도 검은 어둠.
그것은 새하얀 S등급의 검신과 대비되어 더욱 어둡게 일렁였다.
쿠웅!
쓰러지는 트롤의 몸뚱아리.
그러나 트롤들의 붉은 광채는 계속해서 늘어만갔다.
크워어어어어어어!!!
끔찍한 포효가 터져나온다.
증오와 더불어 기쁨과 환희같은 감정의 파편들이 피어오른다.
피를 향한 끝없는 갈증, 굶주림의 욕망들.
“아, 안돼!!”
크마루는 소리쳤다.
트롤이 너무 많다.
시안이 보여준 능력은 정말이지 놀라웠다.
그러나 저 많은 수를 상대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지금이라도 도망쳐야하건만.
시안은 타닥! 도약을 하듯 걸음을 내딛였다.
내딛음과 동시에 검을 들었다.
검을 듦과 동시에 트롤들이 시안을 덮쳐왔다.
그리고 그런 지옥의 풍경 속으로 칠흑의 검이 지나갔다.
그렇게 시안의 검이 스쳐가듯 허공을 가로지른다.
서걱─!
그곳엔 어김없이 한 놈 혹은 그 이상의 트롤들이 잘리거나 터져나갔다.
그리고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저, 저게 무슨···!”
“마, 맙소사···!”
드워프들이 놀라 시안을 바라봤다.
경악 어린 시선들이 모두 시안을 향한다.
서걱─!
휘두르고 찌르는 시안의 검은 단순했다.
그 어떠한 화려함도.
그 어떠한 군더더기도 없었다.
시안은 그저 담담히 지옥의 한복판을 거닐 뿐이었다.
부릅, 떠진 크마루의 두 눈이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하지만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소리쳤다.
“다들 뭐하고 있어! 인간 친구가 시간을 벌어줄 동안 다른 트롤들을 처리해!”
크마루의 외침에 드워프들도 번쩍,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저마다 무기와 병기를 들어 쏟아지는 트롤들을 상대했다.
여전히 많은 수의 트롤들.
무너진 방벽이 뚫리면 그대로 마을이 무너진다.
저 인간 친구가 얼마나 버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지금은 어쩔 수 없다.
불가능함을 잘 알고 있었지만 저 인간 친구를 믿는 수밖에.
“으랴아아!”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다오!”
이어지는 치열한 전투.
그렇게 얼마 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더 이상 서있는 트롤들은 보이지 않았다.
가까스로 막아낸 트롤들의 습격.
승리의 기쁨을 누릴 틈도 없이 드워프들이 모두 몸을 움직였다.
무너진 방벽으로 지원을 가야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드워프들은 그것이 무의미함을 곧 깨달을 수 있었다.
바라본 그곳.
그곳엔 무너진 방벽 사이로 시안이 검을 늘어뜨린 채 서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널브러져있는 트롤의 사체들.
저 상황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
시안이 버티는 것을 넘어 홀로 무너진 방벽을 틀어막은 것이었다.
“······!!!”
“······!!!”
“······!!!”
쩌억, 벌어지는 입.
드워프들의 표정이 경악에 경악을 넘어선다.
그 사이로.
띠링!
[마혼수라검(魔魂修羅劍) 초급 진행률 0.08% (+0.08%)]
[마혼제법(魔魂制法) 진행률 4.1%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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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더럽게 안 오르네.”
나지막한 시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