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 다시 루벤으로(1)
막힌 말문과 동시에 아리아의 정신이 다시 한 번 출타했다.
아리아는 이내 돌아오는 정신과 함께 입을 열었다.
“······ 돈 말고 다른 건 안돼?”
“돈 말고 다른 거?”
아리아는 아주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명예 성자의 직위라던가···?”
“필요 없어.”
하지만 시안은 단번에 거절했다.
마치 고민할 가치도 없다는 듯.
“자, 잠깐! 이거 아무나 주는 거 아니야. 신성 제국에서 대주교급의 대우를 받을 수 있고. 또 언제든 한 번 교단의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어.”
게다가 사실상 교단과는 무관한 ‘명예’ 직인지라.
성자로서의 의무 또한 다하지 않아도 된다.
그야말로 의무는 없고.
권리만 누리는 직위.
그렇기에 추기경급 이상의 추천이 없으면 주어지지 않는 직위였고.
또 그렇기에 아리아 입장에서도 나름의 히든 카드였다.
그런데.
“명예 성자는 염병. 교황 자리를 준다해도 필요없어.”
시안은 고민조차 하지 않았다.
“······”
아리아는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명예 성자의 직위는 신성 제국 내에서도 영광스러운 자리.
무엇보다 천만금을 준다 해도 살 수 없는 직위였다.
실제로도 이름 좀 있다 싶은 귀족들은 명예 성자의 직위를 받고자 수많은 로비를 해오고 있는 실정이었으니까.
다른 이들은 받고 싶어서 안달이 난 직위였다.
그런데 시안은 무슨···.
“그래서 얼마.”
그냥 돈이나 받겠단다.
태어나 처음으로.
아니, 아마 신성 제국 역사상 처음있는 일일 터였다.
그리고 시안은 진짜 생각이 없었다.
마기(魔氣)를 다루는 기사가 성직자라니.
그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란 말인가.
받아봤자 역겹기만 할 것이 분명했다.
“아니, 다른 사람들은 받고 싶어서 안달난 직위를 대체 왜?”
“그건 다른 사람이고. 난 아니거든.”
“명예 성자가 얼마나 영예스러운 자리인지 몰라서 그래?”
“영예는 개뿔. 난 필요 없다니까? 그리고 너. 자꾸 딴소리 할래?”
아리아는 더 이상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진짜···.
진짜 돈으로 받을 생각인가보다.
“······ 5만 골드 줄게.”
“오케이. 이거 갖다 버려야겠다.”
시안은 거침없이 등을 돌렸다.
“10만!”
그러자 멈춘 시안의 움직임.
하지만 바라본 표정은 ‘고작···?’ 이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더 이상은 안돼! 여행 경비로 받은 게 10만 골드밖에 없단 말이야.”
“여행 경비로 10만 골드를 받아?”
지역의 부지라도 사서 여행하는건가?
역시 성녀는 성녀라는 건가.
“그래도 10만 골드는 너무 싼데···.”
10만 골드에 넘기기엔 조금 아까웠다.
하지만 보아하니 진짜 10만 골드밖에 없는 것 같았다.
물론 지금 당장 가진 돈이 10만 골드라는 뜻일 터였다.
설마 하니 신성 제국의 재력이 고작 10만 골드밖에 되지 않을까.
그리고 아리아는 신성 제국 내에서도 입지로서는 범접할 자가 없는 성녀(聖女).
조금 더 압박하다보면.
아마 더 많은 골드를 뜯어낼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건 아리아가 아니라.
신성 제국을 상대로 삥을 뜯는 격이었다.
뜯는 거야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랬다간 신성 제국과 괜히 엮이게 될 터.
그것도 안 좋은 쪽으로 말이다.
그렇기에 아리아 선에서 끝내는 것이 좋으련만.
‘그냥 뜯을까.’
솔직히 못 뜯을 것이 뭐가 있겠는가.
지금도 어찌보면 황가의 유산을 뜯은 격이 아닌가.
신성 제국이라고 못 할 건···.
‘아, 아니다.’
하지만 시안은 금방 고개를 털었다.
더 좋은 생각이 떠올랐으니까.
“좋아. 10만 골드.”
시안의 답에 아리아가 눈을 치켜떠보였다.
그리고 행여 시안이 말을 바꿀까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알겠어. 여기서 나가면─.”
“받고.”
하지만 시안의 말이 한 박자 더 빨랐다.
시안은 당연히 10만 골드에서 끝낼 생각이 없었다.
시안은 추가로 말을 이었다.
“2가지 조건을 수락하면 이거 줄게.”
“······ 그게 뭔데.”
시안이 오른 검지 손가락을 하나 펼치며 말했다.
“첫째. 여기 전당에서 있었던 일. 어디가서 입도 뻥긋 하지마.”
그것은 여러가지를 포함했다.
전당에 레아가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시안과 아르나이즈가 관련된 사실.
마지막으로 시안이 각종 유산을 털었다는 사실까지.
“이거 받으면 어차피 너도 도굴꾼 공범이잖아?”
“······”
사실 아리아는 황태자에게 허락은 받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굳이 따지자면 시안의 말이 또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레아라는 그 귀신.
그 귀신이 샤를롯의 여동생이라면 사실 도굴도 아니었다.
물론 시안과 천 년전의 아르나이즈가 어떤 연관이 있다는 건 엄청 놀랍긴 했지만···.
“······ 알겠어.”
아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안은 다시 말했다.
“그리고 솔직히. 이 유산을 10만 골드에 넘기는 건 너무 싸거든?”
그건 아리아도 인정하는 바였다.
저건 무려 샤를롯 대제가 남긴 유산.
10만 골드는 그야말로 거저였다.
그렇기에 돈이 아니라 명예 성자 직위로 사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는가.
시안은 아리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머지 부족한 금액은 네 몸으로 때워.”
“내 몸으로···?”
아리아가 몸을 흠칫! 떨어보였다.
그리고 세상 쓰레기를 바라보는 듯한 시선으로 시안을 바라봤다.
“너 미쳤어?!”
“왜? 싫어? 방금은 돈 말고 다른 거로 해도 되냐며?”
“그걸 지금 말이라고! 당연히─!”
“그럼 뭐. 어쩔 수 없지.”
시안이 몸을 홱, 하고 돌렸다.
“너 진짜!”
아리아가 울컥, 하며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지금 당장 저 놈팽이의 뒤통수를 후려갈기지 않으면 속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움찔!
아리아는 끌어올렸던 신성력을 곧장 흩어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어디선가 레아의 기운이 느껴졌으니까!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느껴지는 이 끔찍한 살기(殺氣).
마치 시안을 건드리면 진짜 죽여버리겠다는 살기였다!
아리아는 살며시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한참의 고민을 했다.
악마 탐지기.
저건 반드시 필요한 물건이었다.
천 년전의 악마.
그들이 부활했는지를 확실히 확인해야만 했다.
이건 대륙 전체의 위기와도 직결된 일.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아리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 어떻게···.”
새빨개진 아리아의 얼굴.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데···.”
시안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따라와.”
#
아리아는 시안을 따라 황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황궁을 나올 때 황태자 콘라드를 잠시 만났다.
하지만 급한 일이 있다는 말로 일단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콘라드는 의아했으나.
금방 몰래 시안과 아리아가 황궁으로 나갈 수 있게 도와주었다.
하여, 별 다른 사건 없이.
시안과 아리아는 황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황궁 밖으로 나온 시안은 아무말 없이 걸음을 옮겼다.
아리아는 얼굴을 가린 채 그런 시안을 묵묵히 따라갔다.
어디로 가는지 상당히 궁금했지만.
아리아는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시안의 발걸음이 멈춰섰다.
그리고 그런 시안의 발걸음이 멈춰선 곳.
“······ 빈민촌?”
그건 제국의 수도에 위치한 어느 빈민촌이었다.
시안은 그 빈민촌 중 허름한 집 앞에 서보였다.
그리고 거리낌 없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왜 여기에···?
라는 생각이 들던 찰나.
“뭐해? 안 들어오고.”
시안이 머리만 쏙, 내밀며 아리아를 다그쳤다.
아리아는 그런 시안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집 안으로 들어온 아리아.
외견과는 달리 내부는 그렇게까지 허름하지 않았다.
시안은 마치 제 집인 마냥.
성큼,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제리야. 안에 있냐.”
보아하니 제리라는 자의 집인 모양.
아니나 다를까 방에서 누군가 걸어나왔다.
긴 적발의 미녀.
꽤나 이름 있는 귀족가의 여식처럼 보였는데···.
“영주님···?”
“영주님?”
아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영주라는 호칭.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닐테니.
필시 시안을 향한 것일 터.
그 말은 즉슨.
‘얘가 한 영지를 책임지는 영주라고?’
아리아는 멍한 시선으로 시안을 바라봤다.
“어? 아멜리아도 있었네?”
“아, 네. 영주님 돌아오시면 루벤으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어요.”
시안은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제리는?”
“방 안에 있어요.”
“좀 어때?”
이어진 시안의 물음에 아멜리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조금의 뜸을 들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많이··· 좋지 않아요. 계속해서 악화만 되는데. 루벤으로 가다가 큰일나지 않을까 걱정이 되네요.”
“음···.”
시안은 작은 숨을 한 번 내쉬어보였다.
이윽고 고개를 살짝 돌려 아리아에게 말했다.
“들었지?”
“······”
아리아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아리아를 발견한 아멜리아.
“손님이 계셨나요?”
아멜리아는 시선을 들어 아리아를 바라봤다.
길게 내려앉은 백금발과 완벽한 이목구비.
가히 기적이라 부를 만한 초월적인 미모.
“서, 서, 성녀님?!?!”
아리아의 정체를 파악한 아멜리아가 까무러칠듯이 놀라보였다.
이윽고 경악스러운 눈빛으로 시안을 바라봤다.
“뭐, 뭐예요?!”
“성녀.”
“그건 저도 알아요!!”
그걸 누가 몰라서 묻는가.
문제는 대체 왜 성녀가 이곳, 빈민촌에 있냐는 말이다!
“서, 성녀님이 왜 여기에 계신거죠?!”
아멜리아가 물었고.
“내가 데려왔어.”
시안이 대답했다.
“······”
아멜리아는 뭔가 싶었다.
진짜 뭔가 싶었다!
아니, 무슨 저게 대답이라고···.
그리고 방금 뭐, 뭐라고?
그냥 데려 와?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성녀는 말 그대로 성녀였다.
대륙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자가 없는.
데리고 오고 싶다고, 데려올 수 있는 존재 아니었다!
신성 제국 역사상 가장 강한 신성력을 지닌 이.
그 이름도 뮤리엘의 환생.
그런데 지금 시안은 무슨···.
“뭘 멀뚱히 서 있어? 안 들어오고.”
성녀를 무슨 시골 아낙네 마냥 대하는 게 아닌가.
“아, 아, 아니···! 이, 이게 무슨···!”
아멜리아는 입을 쩌억, 벌린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또 고장났나보네.’
시안은 대수롭지 않게 아멜리아를 지나쳐갔다.
그렇게 방 안으로 들어간 시안.
아멜리아의 말마따나 안에는 제리가 있었다.
그 며칠 사이 제리는 상당히 수척해져있었다.
“여, 영주님···. 오셨군요.”
예를 차리려는 제리에게 시안은 괜찮다는 손짓을 해보였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있는 제리의 어머니를 바라봤다.
확실히···.
전에 봤을 때보다 더욱 심각해보였다.
이윽고 시안의 뒤를 따라온 아리아.
시안은 아리아에게 말했다.
“제리의 어머니인데. 몇 년전부터 병이 악화되다가 최근에 더 심해졌어.”
아리아는 멍하니 시안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리고 시안이 아까 전에 네 몸으로 때우라고 했던 말.
아리아는 그때서야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아리아는 차분히 제리의 어머니를 살폈다.
아리아의 정체를 파악한 제리가 경악해보였다.
“어때. 치료할 수 있겠어?”
“······ 어렵진 않아.”
아니, 어렵긴 했다.
살펴본 제리의 어머니는 정말 상태가 심각했으니까.
모르긴 몰라도 웬만한 사제의 힘으로도 불가능할 터였다.
그러나 아리아의 신성력으로 치료가 불가능한 정도는 아니었다.
괜히 뮤리엘의 환생이라 불리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휴우, 다행이다. 그럼 바로 치료해줘.”
아리아는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시안을 바라볼 뿐.
이윽고 아리아가 제리의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몸 위로 살며시 손을 얹었다.
화아아아아아악!!
그와 함께 터져나오는 어마어마한 신성력.
그건 레아를 상대했을 때의 신성력보다 더욱 거대했다.
‘우욱···!’
그 때문에 시안은 날뛰는 마기를 달래느라 정신이 없었다.
농담이 아니라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
하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참았다.
아리아의 볼 위로 식은땀이 주륵, 흘러내렸다.
현기증 마저 이는 지 아리아가 몸을 비틀거렸다.
아리아의 힘으로도 상당히 어려운 일인 모양.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터져나오던 빛이 점점 사그라들었다.
시안은 가만히 그 광경을 지켜봤다.
사람들은 흔히.
“어, 엄마···?”
성녀를 살아움직이는 기적이라 부른다.
뮤리엘의 환생.
신성 제국 역사상 가장 강한 신성력을 지닌 고귀한 존재.
시안은 그 말을 썩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제, 제리···?”
“엄마!”
이번만큼은 살짝 인정해주기로 했다.
#
제리의 어머니는 뭐가 어떻게 된 상황인지 모르는 눈치였다.
하여 제리에게 그 사정을 물었으나.
제리는 그저 울기만 할 뿐이었다.
시안은 아리아를 데리고 잠시 방문 밖으로 나섰다.
제리와 제리의 어머니를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고.
아리아도 좀 쉬어야할 필요가 있어보였으니까.
밖으로 나가자 아멜리아는 여전히 고장이 나 있는 상태였다.
“아···? 아아···??”
어째 이번엔 정도가 조금 심했는데.
그래도 그 간의 경험상.
저렇게 두면 알아서 고쳐질 터였다.
그렇게 대충 적당한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자니.
달칵.
방 문이 열리며 제리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제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퉁퉁, 부은 두 눈은 바닥으로 깔려있었다.
“제가··· 제가···.”
제리가 울먹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나 울었으면서 또 울 힘이 남아있는 걸까.
툭. 투툭.
숙여진 고개 사이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제가 뭐라고··· 저따위가··· 대체 뭐라고···. 대체 뭐라고···.”
털썩.
제리는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주체하지 못하는 콧물이 흘렀고.
울먹거리는 표정은 참으로 볼품이 없었다.
제리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모르지 않았다.
아리아가 신성 제국의 고귀한 성녀인 것도.
그런 고귀한 성녀가 이런 빈민촌에 올리가 없다는 것도.
또한 이렇게 자신의 어머니를 힘겹게 치료할 이유 또한 전혀 없다는 것도.
세상 어떤 것을 들이밀어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도.
그럼에도 지금 이 기적같은 일이 일어난 이유는 단 하나.
아니.
단 한 명.
“영주님··· 히끅···!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영주님···. 끄허헝···!”
제리는 그렇게
하염없이 울었다.
그리고.
띠링!
《당신!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리시고 다니는 거죠!》
모바일 영주의 알림창이 떠올랐다.
《당신을 향한 한 영지민의 충성도가 새로운 인과의 척도를 만들어내었습니다!》
《업적, ‘내 목숨을, 루벤에.’ 달성!》
《업적 보상 - 영지민의 내재된 잠재력이 폭발합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그는 당신의 명령이라면 어떤 것이든 수행할 것입니다!》
우후죽순 떠오르는 스마트 폰의 알림창.
시안은 잠시 멍해져있다가.
스마트 폰을 다시 품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아리아는 지금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아니, 이걸 혼란스럽다고 해야할까.
아리아는 살며시 시선을 들었다.
그런 시야로 시안의 모습이 보였다.
울고 있는 소년을 달래고 있는 모습이.
아리아가 그동안 봐온 귀족이란.
콧대만 높은 치들을 다르게 이르는 말이었다.
그리고 아리아의 얼굴과 몸을 훑어보면서 침이나 삼키는 족속들.
모든 귀족들이 그러한 것은 아니었지만.
거의 대부분의 귀족들이 그러했다.
그리고 시안은 조금··· 다르다고는 생각했었다.
정확히는 다른 의미로 재수가 없었다.
하지만 결국 귀족은 귀족.
그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해서 몸으로 때우라는 말을 했을 때.
그런 오해를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전부 제 영지민을 위해서라.
이윽고 시안이 제리를 방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시안이 아리아에게 다가와 말했다.
“고생했다.”
티격태격 싸우기만 하다 처음 듣는 말.
그 때문일까.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아리아는 그런 시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물었다.
“아깝지 않아?”
“아까워? 뭐가?”
“내 몸으로 때우는 거 말이야.”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말이었지만.
마땅히 생각나는 말이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의미는 전달된 모양이었다.
“아니? 전혀. 너를 이런 데 쓰지. 다른 데 쓸 데가 어디에 있다고?”
물론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다른 쓸 데가 어디냐니.
성녀의 활용도는 그야말로 무궁무진했다.
비단 신성력 뿐만 아니라, 그 명성을 이용한다던가.
아니면 신성 제국의 힘을 빌릴 수도 있고.
정 아니면.
“······ 데이트 신청··· 이라든지?”
아리아가 딴청을 피우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미쳤냐?”
시안의 인상이 와락, 일그러졌다.
정말로 무슨 미친 소리를 하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니, 진짜로 저게 정녕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인가?
하여간, 구제불능을 넘어서 정신 머리가 이상한 성녀였다.
‘하긴, 그러니까 레아한테 개겼겠지.’
시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물론 시안이라고 아리아의 가치를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시안에게 있어 제리의 가치는 그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그도 그럴 것이 엘로디의 연구소 Lv.1.
제리는 그곳에서 연구원으로 활약할 인재였다.
만일 제리가 없다면 연구는 즉시 완료권으로만 해야할 터.
연구 하나당 즉시 완료권의 가격만 평균 2천 골드였다.
지금 연구 중인 것을 모두 더하면···.
대충 계산해도 수 만 골드였다.
그런데 앞으로 진행될 연구까지 더한다?
수 십만은 물론이고, 수 백만 골드는 그냥 뚝딱이었다.
그리고 시안은 제리에게 엘로디의 지식까지 알려줄 생각이었다.
문제는 그런 제리가 언제고 시안에게 등을 돌릴 수도 있다는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완전한 시안의 편이 된다?
아깝기는 커녕.
이득이면 개이득이었다.
무엇보다 제리의 어머니가 계속 아프다면.
루벤으로 가는 시간이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한시라도 빨리 레아를 루벤에 데려다 놓아야하는 입장에서 꽤나 난처했다.
여러모로 아깝다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세상 떠나가라 울먹거리던 제리의 모습.
‘시안, 사람들을 사랑하고, 또 불쌍히 여기며 그들을 위하렴. 이는 시안이 귀족답게 살 수 있는 방법이란다.’
시안의 어머니, 세실이 언제고 시안에게 해주었던 말이었다.
과거, 어린 시안은 그런 어머니를 지키지 못했다.
지옥같은 나날을 보내던 어머니의 심정을 알지 못했고.
그렇기에 싸늘한 주검으로 변한 어머니를 무력하게 바라봐야만 했다.
그 고통이, 그 아픔이.
어떤지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시안은 지금의 선택을 절대 후회하지 않았다.
“정신 나간 소리 그만 지껄이고. 자, 여기 약속한 거. 10만 골드는 따로 입금하는 거 잊지 말고.”
시안은 아리아에게 악마 탐지기를 건넸다.
“자, 이제 서로 간의 빚도 없겠다. 우리 다시는 보지 말자. 알지? 서로 길가다 마주쳐도 아는 척 하지 말기.”
시안은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아까 신성력 옆에 있어서 그런가.
꽤나 속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리아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게 더 심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아리아는 그런 시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평소라면 ‘내가 할 소리!’ 라며 큰소리쳤을 아리아였다.
그런데 왜일까.
“······”
이번에는 저 말과 행동이 꽤나 야속했다.
아니, 쟤는 내가 대체 뭐가 못 났다고 저렇게까지 싫어하는 거지.
다른 남자들은 어떻게든 말이라도 한 번 섞어보려고 안달인데.
내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자 대륙을 횡단하러 오는 이들이 몇 명이고.
내 앞으로 오는 연서가 하루에 몇 장인지는 알고나 있는 걸까?
“진짜 안 봐?”
“어. 그러니까 안녕.”
“나 그럼 간다?”
“배웅은 안 나간다.”
쳐다보지도 않고 말하는 시안이었다.
아리아는 괜시리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
가늘게 뜬 눈초리.
이윽고 아리아가 몸을 홱, 돌려 문 밖을 나섰다.
그리고.
쾅!
문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며 아리아가 떠나갔다.
“하여간, 성질 머리 하고는.”
시안은 혀를 쯧쯧, 차보였다.
“괘, 괜찮을까요···? 저렇게 보내도?”
어느덧 고쳐진 아멜리아가 걱정스럽게 물어왔다.
시안은 대수롭지 않게 손을 휘휘, 저어보였다.
“괜찮아. 그리고 괜히 더 엮이면 피곤해져.”
아무튼.
이로써 건국일 행사는 모두 끝이 났고.
일도 더없이 잘 마무리 되었겠다.
이제
루벤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 전에···!’
시안은 슬쩍, 인벤토리에 들어 있는 금화를 확인했다.
자꾸만 씰룩거리는 입가.
시안은 스마트 폰을 꺼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