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 천 년의 기다림(1)
목소리?
아니, 이건 목소리가 아니었다.
목소리라기보다는 마치 의지가 직접 뇌리에 박히는 듯한 느낌.
방향조차 가늠할 수 없는 이질적인 감각에 시안은 고개를 홱홱, 돌렸다.
그리고 시안은 어떤 한 여인을 마주할 수 있었다.
아니, 저걸 여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모습 자체는 분명한 여인의 형상이었다.
긴 백은색 머리에 고혹적인 외모.
그것은 몽환적인 분위기와 더불어 신비로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형체가 흐릿흐릿한 것이 사람이라 하기엔 미묘했다.
무엇보다 그녀의 주변으로 어둠보다 더 어두운 칠흑의 아우라가가 뿌려지고 있었다.
그 사이로 느껴지는 끔찍한 사념(死念)
마기(魔氣)의 성질이 광기에 먹혀 변형된 악의(惡意)였다.
그렇기에 저것은 사람이되, 사람은 아니며.
살아있되, 살아있지 않은 존재.
망령(亡靈).
저건 죽어 사라진 망령이었다.
-너··· 너 대체 뭐야···.
그녀는 시안을 향해 같은 말을 웅얼거렸다.
그리고 시안이 눈 한 번 깜빡할 사이.
후우웅!
그녀의 존재가 순식간에 시안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코 앞에서 보이는 그녀의 두 눈.
빛 아래로 비쳐보인 그녀의 두 눈은 짙은 회백색이었다.
마치 얼굴에 묘비 두 개를 박아넣은 것처럼 생기라고는 일절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근육은 빳빳하게 굳어버리고.
날카롭게 선 정신이 몸을 옭아맨다.
그녀는 허공을 부유하며 시안의 주위를 빙글빙글 맴돌았다.
-어떻게··· 어떻게 카일의 모습을 알고 있는 거야···?
뇌리에 박히는 의지.
정신을 마비시키는 공포.
-대답해!!!
터져나오는 귀기(鬼氣)에 의식이 저만치 멀어진다.
시안은 이를 까득, 깨물며 떠나려는 정신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S등급의 검을 뽑아들며, 정면으로 흩뿌리듯 휘둘렀다.
쩌─엉!
어둠이 갈라진 자리에서 굉음이 터져나왔다.
보이지 않는 힘의 충돌이 공기를 찢어발긴다.
시안은 검을 고쳐잡으며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그런 시안을 향해 끝없는 사념(死念)을 뿜어내었다.
적막한 어둠이 긴 기지개를 피며 전당의 공간을 잠식해간다.
바로 그때.
“뭐, 뭐야···?”
한 쪽에서 아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리아는 당황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의문을 해소할 틈도 없이.
잠식한 어둠이 아리아를 뒤덮어갔다.
아리아는 손을 앞으로 뻗어보였다.
화아아아아아아악!!!
새하얀 빛이 터져나오며 드리운 어둠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어둠을 몰아내는 절대적인 힘.
그 탓에 시안의 마기(魔氣)가 들끓기 시작했지만 시안은 억지로 눌러 삼켰다.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으니까.
빛과 어둠이 얽히며 서로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끼야아아아아악!!!
소름끼치는 귀곡성이 들려오며 드리운 사기(死氣)가 짙어지기 시작했다.
삼켜진 어둠이 끊임없이 피어오른다.
그 끝에 신성력의 빛은 점점 퇴색되기 시작했다.
“말도 안돼!”
아리아가 소리쳤다.
신성력을 더욱 끌어올리며, 피어나는 어둠에 대항했다.
그러나 피어나는 어둠을 막을 수는 없었다.
“어, 어떻게 이 정도의 사념이···!”
“정신 차려!”
쩌─엉!
코앞에서 터져나오는 굉음에 아리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바로 한 시야.
그곳엔 시안이 아리아의 앞을 가로막으며 피어나는 어둠에 대적하고 있었다.
쩡! 쩌정!
시안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어둠이 갈라졌다.
“어, 어떻게···?”
그 모습에 아리아는 눈을 부릅, 떠보였다.
저 어둠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방금 경험해봐서 알고 있었으니까.
자신의 신성력조차 삼켜버리는 어둠.
그 끔찍한 어둠을 시안은 검 하나로 걷어내고 있었다.
쩌저적!
시안은 쇄도하는 어둠을 베어내었다.
S등급의 검이 지닌 오러의 힘을 이용하고 있었지만,
이 끔찍한 사념은 일반적인 사념과는 차원이 달랐다.
신성력으로도 정화가 안되는 악의(惡意).
그러나 아무리 끔찍한 사념이라 할지라도 그 본질은 어둠.
결국 마기(魔氣)에 기반한 마력이었다.
그리고 시안이 사용하는 마혼수라검(魔魂修羅劍).
그것은 마기를 다루는 검술이었다.
그렇기에 시안은 어느 정도 이 어둠에 대적하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크윽···!”
그것도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오래 못 버텨! 보고만 있지 말고 뭐라도 좀 해봐!”
시안의 외침에 아리아가 곧장 행동에 나서보였다.
신성 제국 역사상 가장 강한 신성력을 지닌 성녀.
아리아의 손 위로 새하얀 빛이 떠올랐다.
그렇게 하나 둘, 조금의 시간이 지나 하나의 광휘를 이루기 시작했다.
이윽고 아리아가 손을 뻗자.
광휘는 공간을 가르며 드리운 어둠을 일시에 몰아내버렸다.
콰콰콰쾅!!
그와 동시에 폭음이 들려왔다.
아무래도 원귀 또한 광휘의 빛에 휩쓸린 것 같았다.
과연 뮤리엘의 환생이라는 걸까.
실로 어마어마한 신성력이었다.
시안은 그때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지금 뭐가 어떻게··· 아니, 대체 저건 뭐야? 저런 끔찍한 사념을 가진 존재는 처음 봐. 저런 사념을 가진 존재가 어째서 이 전당에···?”
아리아는 상당히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시안은 그런 아리아를 향해 말했다.
“아무래도 전당을 지키는 망령인 것 같아.”
“전당을 지키는 망령?”
아리아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그러다 퍼뜩, 생각났다는 듯.
아리아가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
“설마··· 그 떠나간 남자를 기다린다는 망령?”
아리아가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물어왔다.
“그거 그냥 지어낸 이야기 아니었어?”
“나도 몰라.”
“······ 뭐라고?”
시안의 답에 아리아가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은 전당을 지키는 망령이라매?”
“전당을 지키는 망령은 맞는데. 그게 황태자 전하가 말씀하신 이야기 속의 망령인지는 확실하지 않다는 거지.”
“그게 무슨···! 아니, 그럼 너는 저 망령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어? 어떻게?”
“그야···.”
모바일 영주가 퀘스트에서 여기 망령이 있다고 했었으니까.
시안은 뒷말을 굳이 내뱉지는 않았다.
시안은 다시 검을 고쳐잡았다.
그야말로 귀신처럼 등장한 망령.
그 때문에 일이 급작스럽게 진행되기는 했다.
하지만 단지 그 뿐이었다.
어차피 망령을 찾으려고 했거니와.
퀘스트의 내용에 따르면 카일의 유산을 얻기 위해서는 어쨌거나 저 망령을 쓰러 뜨려야 한다.
“온다.”
“오다니? 뭐가?”
바로 그때.
-어떻게··· 어떻게···.
앞선 시야로 망령의 형체가 흐릿하게 보였다.
“말도 안돼! 샤이닝 레이를 맞고도 소멸되지 않았다고···?”
아리아는 눈을 크게 뜨며 놀라보였다.
보아하니 방금 아리아가 사용한 신성력은 꽤나 수준 높은 종류인 것 같았다.
그럼에도 망령은 소멸되지 않았고.
저 망령의 사기(死氣)가 얼마나 끔찍한 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야말로 사령의 원귀(怨鬼).
-어떻게 카일의 모습을 알고 있는거야···?
원귀가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그리고 원귀는 아까서부터 같은 말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시안이 어떻게 카일의 모습을 알고 있느냐.
얼핏 보면 이해할 수 있는 물음이었다.
현재 대륙에서 카일의 모습을 알고 있는 이는 없었으니까.
-카일의 진짜 모습을 알고 있는 사람은 다 죽었는데···?
그렇기에 원귀의 물음은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지?’
시안은 그 모습에서 작은 위화감을 느낄 수 있었다.
원귀는 왜 카일이라는 이름에 집착을 할까.
지금 생각해보면 원귀는 시안이 카일의 모습을 발견한 직후, 등장했다.
원귀와 카일이 무슨 관련이 있나?
그렇다면 그의 진짜 모습을 알고 있는 것에 저렇게까지 반응을─.
잠깐.
‘이거 설마···?’
그 순간 시안의 머릿속으로 하나의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여기서 기다려봐도 아무도. 그 어떤 누구도 카일의 모습을 알아보는 이가 없었는데···? 너는 어떻게···?
원귀는 시안을 바라보며 연신 중얼거렸다.
회백색의 두 눈빛으로 여러가지 감정이 스쳐지나간다.
혼란, 당황, 그리움, 애틋함.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러나 시안은 그 안에서 뚜렷한 두 가지의 감정을 엿볼 수 있었다.
분노.
그리고 증오.
그렇기에.
“······!”
시안은 비로소 진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바로 그때.
“당신! 무언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우리는 당신이 기다리던 남자가 아니야!”
아리아가 한 발 나서며 소리쳤다.
아무래도 저 원귀가 콘라드가 말한 이야기 속의 망령임을 확신하는 것 같았다.
-넌 또 뭐야···.
원귀가 시선을 돌려 아리아를 바라봤다.
모든 세포 하나하나에서 쥐어짜내는 듯한 광기가 느껴진다.
그것은 마주보는 이로 하여금 죽음을 강요했으나.
아리아는 전혀 위축되지 않고 소리쳤다.
“그리고 그 남자는 이미 죽었어. 돌아오지 않는다고!”
-네가 뭘 안다고 지껄여!!!
콰콰콰콰콰콰!!
새어나오는 빛마저 가려진 완전한 어둠의 장막 속.
물결치는 어둠에 덧칠하듯, 사념이 새까맣게 몰려온다.
그와 동시에 아리아의 전신으로 빛이 터져나왔다.
어둠을 일시에 몰아내는 어마어마한 신성력.
원귀의 사념은 흉측했으나,
아리아는 신성 제국 역사상 가장 강한 신성력을 지닌 이.
카이와 파나트를 제치고 조디악 소드의 선택을 받은 이였다.
아리아는 빛의 물결을 원귀를 향해 쏘아보냈다.
얽히고 설키는 빛과 어둠.
한치도 물러서지 않는 두 힘이 서로를 탐했다.
그리고.
“흐윽···!”
그 싸움 끝에 밀린 것은 다름 아닌 아리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원귀는 단순한 원귀가 아니었다.
족히 수 백년의 세월을 원한 속에 사무쳐 지낸 원귀.
아무리 뮤리엘의 환생이라 불리는 아리아라 한들.
저 원귀를 대적하기란 어려웠다.
피어나는 어둠이 빛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죽어···! 죽어···!
원귀의 지독한 악의가 피어난다.
아리아는 이를 까득, 깨물며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시안.
시안은 가만히 원귀를 바라봤다.
콘라드의 말에 따르면.
전당을 지키는 원귀는 지난 세월 간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시안이 카일의 진짜 모습이 그려진 벽화를 찾았을 때.
원귀는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어떻게 시안이 카일의 모습을 알고 있냐며 물어왔다.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나 만일 콘라드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콘라드가 말해주었던 그 동화 같은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하여, 저 원귀가 그 이야기 속의 여인이라면.
이 모든 것들이 가리키는 진실은 하나.
“카일.”
아무래도.
“여기서··· 카일을 기다렸던 겁니까.”
그 이야기 속의 남자가 카일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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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칫.
시안의 말에 원귀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어둠이 눈에 띄게 약해졌다.
아리아는 이 기회를 놓칠세라 신성력을 최대치로 끌어모았다.
그런데.
“하지마.”
시안이 그런 아리아를 막아세웠다.
“뭐, 뭐라고?”
아리아는 놀란 눈을 뜨며 말을 이었다.
“저 망령은 네 생각 이상으로 강해! 나조차도 감당할 수 없다고! 기회가 있을 때 없애야 해!”
알고 있다.
저 원귀는 끔찍한 악의로 뒤덮인 존재.
이미 광기에 뒤덮여 미쳐버린 상태다.
그렇기에 아리아의 말처럼 없앨 수 있을 때 없애야 했다
무엇보다 저 망령을 퇴치해야만 카일의 유산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하지마.”
시안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계속해서 아리아를 막아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