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 건국일 행사(3)
샤를롯 제국의 건굴일 행사는 무려 일주일 간 행해지는 기나긴 행사였다.
물론 그 기간 내내 행사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생각보다 정식 행사 일정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귀족들의 일정은 빡빡하기 그지 없었다.
제국 전역의 가문들이 모이는 행사장.
평소 관심 있었던 귀족들과 안면을 틀 수 있는 더없는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하여 굳이 행사가 아니더라도.
친분 있는 귀족들끼리 룸을 빌려 모임을 갖는 것은 다반사였다.
그리고 그런 모임 중에서도 급은 있는 법.
황궁 내부에 위치한 거대한 홀.
태양처럼 반짝이는 화려한 조명 아래.
정장과 드레스를 차려입은 귀족들이 홀을 누비고 있었다.
화려하게 차려진 음식들과 하하호호, 웃는 소리.
시종들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잔을 건네고 있었고,
저마다 담소를 나누는 소리들이 배경음처럼 깔렸다.
더없는 연회장의 분위기.
그러나 그 안을 들여다보면 마냥 그렇지만도 않았다.
“이번에 생산한 가죽 말입니다. 가주께서 생각보다 산출량이 많으시다고 판매처를 새로 뚫어볼까 고민에 있으신데···.”
“그럼 저희 가문과 한 번 거래를 해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저희 가문과 레히나르와는 거리도 가깝지 않습니까.”
“음··· 그래도 이것이 그리 가벼이 생각할 문제가 아닌지라···. 가주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하하하.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는 법이지요. 어떻게, 연회가 끝나고 이야기를 나눠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귀족들간의 기묘한 싸움.
이들 간에는 알게 모르게 묘한 신경전이 오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
“황태자 전하와 성녀님께서 드십니다!!”
연회장을 쩌렁쩌렁, 하게 울리는 외침이 터져나왔다.
다름 아닌 황궁 서기장의 외침이었다
웅성거리던 소란이 일시에 뚝, 하고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모두의 시선이 연회장의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잠시.
곧 연회장의 문이 벌컥, 열리며 한 사내가 등장했다.
정갈한 제복 복장을 한 금발의 미남자.
여기서 저 남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이는 없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연회장의 모든 귀족이 각자의 예를 다했다.
“모두 고개를 들게.”
이어진 콘라드의 말에 귀족들은 고개를 들어보였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시선이 콘라드의 뒤편으로 향했다.
다름 아닌 서기장의 외침 속에 들렸던 한 존재 때문이었다.
성녀(聖女) 아리아.
공식석상에서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그녀는 귀족들 사이에서도 단연 관심 순위가 1순위 였다.
어떤 의미로 황태자보다 더 친분을 쌓고 싶은 존재.
무엇보다 인간을 초월한 미모라고들 하니.
혈기 넘치는 이들로서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기대되는 마음으로 시선을 뒤로 돌렸다.
그런데.
“······ 음?”
“······ 엥?”
뭔가··· 이상했다.
그도 그럴 것이 황태자의 뒤로 성녀가 아니라 웬 이상한 놈팽이가 하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딘가 어벙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
성녀가 아니라 성자였나?
라는 생각이 들던 찰나.
“시안···?”
어디선가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때서야 사람들은 그가 엘란두르의 막내.
시안 엘란두르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그런 시안의 뒤로 한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히 기적이라 부를 만한 미모.
사람들은 그녀가 성녀, 아리아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더욱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와 성녀.
이 둘이 같이 들어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한 사람.
“저 망나니는 왜 저기에?”
시안은 아니지 않은가.
아니, 그래.
이건 그럴 수 있다 치자.
하지만 그 옆으로 보이는 광경은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했다.
다름 아닌 시안과 성녀.
“꼴보기 싫다면서 나갈 땐 언제고. 다시 돌아오는 건 무슨 경우야?”
“말은 바로 하자. 내가 오고 싶어서 왔냐?”
멀리서 투닥투닥 거리는 모습이···.
꽤나 돈독해보이지 않는가.
“······”
“······”
사람들은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 사람들의 심정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콘라드가 사람들 앞으로 한 발 나서보였다.
“나의 초대에 먼 길을 와주어서 고맙네. 천년을 맞이하는 건국일에 앞서···.”
그리고는 일장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대충 간단히 요약하자면.
와주어서 고맙고 또 반갑고.
앞으로 제국을 같이 잘 이끌어가자.
이런 내용에 미사여구를 붙인 연설이었다.
시안은 그런 황태자의 뒤에 서보였다.
정확히는 빠져나갈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무엇보다.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니면 뭔데?”
옆에서 속삭이는 아리아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아니, 얘는 목소리에도 신성력을 담나···.’
대체 신성력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
목소리에도 신성력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마기가 미쳐날뛰는데.
농담이 아니라 ‘저저 요망한 년을 당장 치워!’ 라고 소리치는 것만 같았다.
시안은 옆에 붙어 속삭이는 아리아를 저만치 밀어내며 말했다.
“어쩌다보니 황태자 전하를 만났고, 전하께서 같이 가자고 하시니까 어쩔 수 없이 따라 아윽! 온 거 아니야.”
말을 하다보니 마기가 더욱 날뛰기 시작했다.
여러 귀족들 앞에서 추태를 보일 수 없었기에.
시안은 필사적으로 정신을 부여잡았다.
“핑계가 결국 황태자야?”
“핑계? 너한테는 핑계일 수 있지만 난 아니거든? 나도 너랑 같이 오기 싫었어.”
“뭐? 나는 너랑 같이 오고 싶은 줄─.”
“시끄럽고. 농담이 아니라 너만 보면 머리가 지끈거리거든? 그러니까 제발 그 짜증나는 얼굴 좀 그만 들이밀어줄래?”
“너 진짜!”
분을 이기지 못한 아리아가 버럭, 소리쳤다.
그 모습에 일장 연설을 하던 황태자가 놀라며 물어왔다.
“음? 무슨 문제라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갑자기 벌레가 날아든 것 같아서···.”
그러면서 고고함과 귀품 있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것은 아찔한 미모와 더해져 마치 하나의 작품처럼 보였다.
역시나 연회장의 사람들이 침을 꿀꺽, 삼키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시안은 정말이지 코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벌레는 무슨.”
“즈용히 흐라···.”
아리아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나지막히 속삭였다.
이번에는 꽤나 큰 목소리였는데,
보아하니 시안에게만 들린 것 같았다.
이것도 신성력의 일환인가.
마기가 미쳐 날뛰는 것이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그렇게 아찔한 정신을 달래고 있자니.
“자, 그럼 모두 연회를 즐겨주길 바라네.”
어느덧 콘라드의 연설이 끝이 났다.
시안은 이때다 싶어 아리아에게 말했다.
“너도 나 싫고, 나도 너 싫으니까. 우리 이제 아는 척 하지 말자. 여기서 하나. 둘. 셋. 하고 헤어지면 끝. 길 가다 마주쳐도 아는 척 하지 말기. 알겠어?”
하나, 둘, 셋.
휙.
시안은 주저없이 등을 돌렸다.
아리아는 어찌한 건지 보지 못했지만,
마기가 진정되는 것이 아마 똑같이 등을 돌려 떠나가는 것 같았다.
‘쟤랑 같이 다니면 괜히 나까지 유치해지는 것 같단 말이지.’
이러나 저러나.
정말이지 해악하기 그지 없는 존재였다.
그렇게 자리를 벗어나려는데.
“······?”
시안은 이상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둘러본 주변.
연회장의 귀족들이 모두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 모두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 뭔데?”
시안은 뭐하는 건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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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안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구석진 곳으로 가 자리했다.
친분을 나눌 귀족들도 없었을 뿐더러.
대충 시간만 때우다가 갈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혼자 연회장의 풍경을 지켜보고 있자니.
몇몇 눈에 띄는 장면이 더럿 보였다.
일단 가장 첫 번째는 엘란두르였다.
로즈웰과 네이슨 그리고 카이.
‘카이도 왔구나.’
다만 듀라크와 이사벨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그 둘은 황제가 주최하는 연회장으로 간 듯 싶었다.
카이는 연회장 한 쪽에 홀로 있었다.
여러 귀족들에게 둘러싸여있는 로즈웰과 네이슨과는 달리.
카이는 한 마리의 고고한 늑대처럼 홀로 있었다.
제국의 별이라 불리는 천재 중의 천재.
그리고 어디서 꿀리지 않는 외모.
그 때문인지 주변으로 여식들이 어떻게든 말이라도 걸어보고자 서성이고 있었다.
하지만 카이의 기세에 섣불리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뭐, 시안 또한 가문에 있을 적에도.
카이와는 말을 섞어본 적이 별로 없었다.
로즈웰과 네이슨과는 달리.
카이는 시안에게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애초에 사는 세계가 다른 이.
‘여전하구나.’
시안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다음 눈에 띄는 장면은 로르실트였다.
카이와 마찬가지로 제국의 별이라 불리는 파나트 로르실트.
그는 6위계(位界)에 닿은 마법사였다.
마법사와 기사의 경지를 딱 구분지을 수는 없지만.
6위계의 마법사는 대체로 마스터 초급의 경지와 견준다.
한 마디로 카이와는 라이벌 관계.
따라서 엘란두르와 로르실트의 구도는.
가주, 듀라크와 에그리트.
제국의 별, 카이와 파나트.
이렇게 간단히 설명할 수 있었다.
파나트는 카이와는 다르게 몇몇 인물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눈에 띄는 장면. 그 세 번째.
역시나 성녀 아리아였다.
아리아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있다 못해 파묻혀있었다.
연회장에 있는 사내란 사내는 물론이고,
거의 대부분의 귀족들이 아리아에게 말을 걸어보고자 서있었다.
그리고 아리아는 그런 이들을 상대로 인상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마치 자애로운 성녀인 것 마냥 말이다.
내숭도 저런 내숭이 없었다.
흘깃.
그 순간 아리아의 시선이 시안과 마주쳤다.
이윽고 아리아의 입가가 씨익, 벌어졌다.
그 모습이 마치 ‘자, 봐라.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다.’ 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쟤는 아는 척 하지 말라니까.’
시안은 시선을 휙, 하고 돌려버렸다.
그리고 눈에 띄는 장면.
그 대망의 마지막.
“작년에 황궁의 서기관 중 한 명이 수도 근처의 땅을 구매했네. 다름 아닌 돌아가신 자신의 부모를 안치하기 위해서라더군.”
그것은 다름 아닌 황태자 콘라드였다.
콘라드는 어떤 한 사건에 대한 정황을 말하고 있었다.
듣기로는 꽤나 골치를 썩히는 일이라고 하는데.
“문제는 그 땅 근처에 오래된 민가가 몇 채 있었는데. 서기관은 그 민가까지 모조리 사들여 작년 추수가 끝나면 집을 비우고 나가라는 약속을 받아냈지.”
“그런데 작년에 흉년이 들어 민가에 살던 백성들이 다른 곳으로 이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네. 이에 서기관이 강제로 백성들을 내쫓으려했지만, 백성들은 1년만 시간을 더 달라 애원하고 있는 상황이지.”
“이를 어찌해야 좋을지 고민이 되는데···.”
콘라드는 이에 대해 의견을 물어왔다.
그럴 수 있었다.
여기 모인 이들은 앞으로 제국을 이끌어갈 인재들.
그들의 혜안을 들어보는 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문제는.
“시안,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그 의견을 묻는 대상자가 다름 아닌 시안이라는 점이었다!
시안이 연회장의 한적한 곳에 자리했을 때.
콘라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시안을 찾아왔다.
그리고 곁에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저기 엘란두르와 로르실트가 있음에도.
심지어 성녀까지 버젓이 있음에도.
콘라드는 시안 옆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덕분에 이 연회장에서 가장 관심을 받는 존재는.
엘란두르도, 로르실트도.
그렇다고 성녀도 아닌.
다름 아닌 시안이었다.
시안은 콘라드를 가만히 바라봤다.
“서기관의 편을 들어야 하나, 백성들의 사정을 봐주어야 하나. 무척이나 고민이 되고 있네.”
당최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는 모습.
시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서기관에게 자비를 베풀라 하시지요.”
“허나, 그는 법을 어기지 않았네. 어찌보면 법을 어긴 건 민가의 백성들이지. 그런데 서기관에게 무조건 자비를 베풀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서기관이 자비를 베푼다하여 그에게 피해가는 것은 없습니다. 1년간 조금··· 언짢을 뿐이지요. 하지만 백성들이 쫓겨난다면 그들은 굶주림과 추위에 결국 죽고 말 것입니다.”
“음···.”
콘라드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다시 물어왔다.
“그럼에도 서기관이 법을 들먹인다면?”
“그땐 전하께서 권위를 사용하셔야겠지요.”
“결국 나 또한 법을 어기라는 건데. 나보고 죄를 지으라는 건가?”
콘라드가 매서운 눈빛으로 시안을 바라봤다.
하지만 시안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 죄를 지을지언정. 차마 백성들로 하여금 나라를 원망하게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
콘라드가 눈을 크게 떠보였다.
이윽고 망치라도 한 대 맞은 것 마냥 정신이 멍해졌다.
‘왜 이래?’
시안은 진짜 뭔가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별 다른 의미가 없는 말이었으니까.
그냥 대충 생각나는 대로 지껄인 것이었다.
그렇기에 콘라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조건 그런 뜻은 아니었다.
“하하하! 자네와 대화하면 할수록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네!”
하지만 콘라드는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저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그러니까···.”
콘라드는 시안의 곁에서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아···.’
정식 행사는 대체 언제 시작하는거야.
시안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전하.”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안과 콘라드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돌아갔다.
바라본 그곳.
그곳엔 시안에게 상당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정확히는 모를 수가 없는 얼굴.
“자네는···?”
“소신, 엘란두르 가(家)의 네이슨이라고 합니다.”
엘란두르의 셋째이자 차남.
시안의 형인 네이슨이었으니까.
아까까지만 해도 다른 귀족들과 있더니.
아무래도 콘라드가 시안에만 붙어있는 것이 마음에 안들어 온 것 같았다.
“아! 네이슨 엘란두르. 자네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들었지.”
콘라드가 그런 네이슨을 반갑게 맞이했다.
“소신을 알아봐주신다니 영광입니다.”
“제국에서 엘란두르를 모르는 이가 있을라고.”
콘라드는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고는 물었다.
“그래.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지?”
“다름이 아니라 전하께 한 가지 부탁이자 제안을 드리려 찾아왔습니다.”
“부탁이자 제안?”
콘라드는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여보였다.
“제국의 수많은 인재들이 모여있고, 이들끼리 친분을 나누는 것도 좋으나. 혈기 왕성한 이들에게는 조금 적적하지 않은 자리인가 우려되옵니다.”
“그런데?”
“하여 그 적적함을 조금 달래주고자 이곳에서 제가 대련을 선보일까 싶은데 어떠실련지요.”
“대련?”
갑자기?
콘라드의 물음과 동시에 시안의 고개 또한 기울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꽤나 뜬금없었으니까.
콘라드 또한 같은 생각인지 한동안 답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음··· 대련을 보는 것 또한 나쁘지 않지. 좋네. 누구랑 대련을 하겠다는 건가?”
아마 엘란두르와 로르실트의 대결을 기대했던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시안 또한 마찬가지였다.
로르실트에는 파나트 이외에도 다른 핏줄이 있었으니까.
네이슨과 다른 로르실트와의 대련.
그것만큼 재밌는 볼거리는 없었다.
무엇보다 이 황태자를 떼어낼 수도 있고.
하지만 들려온 네이슨의 대답은 조금 의외였다.
“제 동생과 하려고 합니다.”
“동생?”
네이슨은 엘란두르의 셋째였다.
그런 네이슨에게 동생이라 부를 수 있는 존재는 한 명.
‘······ 나?’
다름 아닌 시안이었다.
“여기 시안 엘란두르를 말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네이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안을 바라봤다.
콘라드 앞이라 표정 관리를 하고 있었지만,
그 안에 깃든 비릿한 웃음을 시안은 볼 수 있었다.
때문에 시안은 네이슨이 왜 갑자기 저러는 지 이해할 수 있었다.
다름 아닌 수도에서 제리를 구할 당시에 있었던 일.
아무래도 대련을 통해 개망신을 주려는 의도인 것 같은데···.
‘나중에 보자더니. 그게 이런 의미였어?’
시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네이슨은 엑스퍼트 중급에 달하는 실력자였다.
반면에 시안은 비기너(Beginner)도 되지 못한 둔재.
승부야 붙어보지 않아도 뻔히 알 수 있었다.
“음···.”
콘라드 또한 그것을 모르지 않았기에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자네의 생각은 어떠한가.”
이윽고 콘라드는 시안에게 물어왔다.
동시에 어떤 대답을 할지 또한 알고 있었다.
당연히 거절.
콘라드가 직접 겪어본 시안은 소문과 달랐다.
망나니, 패륜아.
이런 것들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사람들을 보듬을 줄 아는 진짜 귀족.
그것이 콘라드가 평가한 시안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무능력한 둔재만큼은 크게 부정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이 대련은 보나마나였다.
하여 시안이 당연히 거절할 것이라 콘라드는 생각했다.
그런데.
“오러를 사용하지 않으신다면. 한 가지 조건을 수락하신다는 전제 하에 할 의향은 있습니다.”
들려온 대답은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
“뭐라고?”
“오러를 사용하지 않겠다.”
콘라드는 되물었고,
네이슨은 행여 시안이 말을 바꿀까 황급히 입을 열었다.
“또한 한 손을 쓰지 않도록 하지.”
그것도 모자라 스스로 핸디캡까지 주는 네이슨이었다.
“자, 그럼 네 조건은 뭐지?”
네이슨이 씨익,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시안은 마주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왕 하는 거. 진검으로 돈 걸고 하는 건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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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이 커졌다.
대련의 소식은 연회장 전체로 퍼졌고,
연회장에 참석한 이들은 저마다 돈을 걸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 승리는 네이슨에 몰렸다.
애초에 말이 안되는 대련이었다.
엑스퍼트 중급에 달하는 네이슨.
비기너도 되지 못한 시안.
아무리 오러를 사용하지 않고,
한 손을 쓰지 않는다 한들.
승부가 정해져 있는 대련이었다.
해서 모든 이들의 돈은 네이슨에게 몰렸고,
시안의 승리를 예측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정확히는 딱 한 명.
시안 본인을 제외하고 말이다.
심지어 그가 자신에게 건 돈은 무려 3만 골드였다.
그리고 배당은 자그마치 15배.
한 마디로 시안이 승리하면 45만 골드가 그의 수중에 떨어지는 셈이었다.
하지만.
“망나니에 패륜아에. 이제는 멍청하기까지 한 건가?”
“말도 안되는 일을 저지르는 군.”
“애먹은 3만 골드만 날리는 꼴이지.”
사람들은 그런 시안을 비웃을 뿐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대련.
“꽁무니를 뺄 줄 알았더니··· 의외구나.”
네이슨은 비아냥 거리듯 입을 열었다.
시안은 별 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거기에 진검으로 하겠다니. 배짱이 좋구나. 실수로 팔 하나 자르더라도 저기에 성녀가 있으니 괜찮겠지.”
이윽고 네이슨은 언제든 들어오라는 듯 손을 펴보였다.
“선수를 양보하지.”
“그럼 사양 않겠습니다.”
시안은 굳이 그런 네이슨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시안은 차분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솔직히 현재로서 시안이 네이슨을 이길 수 없었다.
물론 쉽게 지지는 않을 터였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현재 시안은 마혼수라검을 배우고 있고.
루벤에서 마수와의 실전으로 경험도 많이 쌓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승부를 장담할 수 없었다.
네이슨은 엑스퍼트 중급에 달하는 기사.
루카스보다 상위의 기사였다.
카이에 가려져서 그렇지.
네이슨 또한 천재라 불러도 모자람이 없었다.
한손을 사용하지 않는다 한들 어려운 건 마찬가지였다.
단.
네이슨이 오러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이야기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왜냐고?
시안은 천천히 S등급의 검을 뽑아들었다.
시안이 성장 지원 초급 패키지에서 구매한 것이자,
모바일 영주에서 처음 현질한 물품.
동시에 오러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오러의 힘을 발휘하는 기이한 검.
조명에 번쩍이는 새하얀 검신에서 섬뜩한 기세가 터져나온다.
“자, 잠깐···!”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네이슨이 당황해보였다.
하지만 정신을 차렸을 땐.
참(斬).
이미 시안의 검이 눈앞까지 다가온 상황이었다.
꽈꽈꽝!
터져나오는 폭음.
“······!!”
“······!!”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눈들이 일시에 부릅, 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