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 엘란두르의 망나니...?
시끌벅적하던 식당 안에 싸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음식을 먹던 사람들의 움직임이 뚝, 하고 멈추었다.
입으로 포크와 나이프를 가져가던 손들은 허공에 정지해 있었다.
만일 그 사이로 떨어지는 음식들이 아니었다면,
시간이 정지된 것이 아닐까 싶은 착각마저 일었다.
이윽고 사람들의 시선을 모두 한 곳으로 향했다.
경악, 놀람, 호기심.
갖가지 감정이 섞인 시선들이 모두 같은 곳을 향했다.
그리고 그런 시선들이 향한 바로 그곳.
터벅.
그곳엔 한 사내가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터벅.
사내는 거침없이 발걸음을 내딛었다.
오직 사내만이 이 정지된 시간 속에서 움직임이 허락된 존재인 듯.
사내의 발걸음은 내려앉은 정적 사이를 가로질렀다.
바로 그때.
“이 놈이!!!”
“네가 지금 누구의 몸에 손을 댄건지 아느냐!”
사내의 앞 쪽으로 성난 외침이 터져나왔다.
이윽고 일련의 기사들이 시안의 앞을 가로막았다.
크라우드 백작가에 소속된 기사들.
동시에 방금 날아가버린 레민턴의 호위 기사들이었다.
챙! 채챙!
그들은 거침없이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는 사내를 향해 겨누었다.
터져나오는 흉흉한 기세.
지금 당장이라도 납작 엎드리지 않는다면,
베어버리겠다는 의지가 가득한 날이 선 기세였다.
하지만.
“치워.”
사내는 나지막히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리고 사내에게서 느껴지는 기세.
일대를 장악하는 섬뜩함에 기사들이 저도 모르게 움찔, 거렸다.
“이, 이 새끼가 그래도!”
“감히 크라우드 백작가를 건드리고도 무사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냐!”
그와 동시에 적막하던 식당의 분위기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크, 크라우드 백작가?”
“지금 크라우드 백작가를 건드린거야?”
크라우드 백작가.
제국 남부에 위치한 크라우드 백작가는 제국 최대 곡창지를 보유한 가문이었다.
제국에 유통되는 곡물의 15%를 책임지는 거대 가문.
막강한 자본력을 지닌 크라우드는 제국에서 어느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명문가였다.
그런데 그런 가문을 건드렸다?
이건 대형 사고 중에서도 초대형 사고였다.
그렇기에 납작 엎드려 자비를 빌어도 모자라거늘.
“어쩌라고.”
사내는 되려 도발에 가까운 발언을 내뱉고 있었다.
“뭐, 뭐라고?”
“크라우드 백작가를 건드렸는데 뭐 어쩌라고.”
“이 새끼가 지금─!”
사내는 소리치는 기사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너희들은 지금 감히 누구한테 검을 들이민 건지는 알고 있나?”
그리고 그와 동시에.
움찔.
크라우드의 기사들이 몸을 움찔, 떨어보였다.
그런 기사들의 모습에 사람들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사람들은 다시 시선을 돌려 사내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때서야 사내의 정체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시안 엘란두르.
제국을 떠받치는 두 기둥 중 하나인 엘란두르 가문의 막내였다.
바로 그때였다.
“이, 이... 개애새뀌가아···.”
한쪽으로 분노로 가득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라본 그곳엔 레민턴이 부서진 잔해 사이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피범벅이 된 얼굴.
용케 기절하지 않은 것을 칭찬해야할 지경이었다.
“무어하고 이써! 주겨버려어!”
레민턴이 노발대발하며 소리쳤다.
그런데 어째 목소리가 상당히 어눌했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시안이 턱관절을 빼놓았으니까.
정확히는 귓방맹이를 날리면서 턱관절을 박살내버렸다.
“빠리 주겨버리라니까!”
레민턴은 계속해서 소리쳤다.
하지만 기사들은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일 수 없었다.
시안 엘란두르.
제국에서 엘란두르의 이름을 무시할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기사들은 서로 눈치를 볼 뿐이었다.
그런 기사들의 모습이 답답했던 걸까.
“저따 버림바든 새끼가 머가 두렵따꼬!”
레민턴이 기사들의 검을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는 시안을 향해 달려들며 거침없이 검을 휘둘렀다.
쉬익!
명백한 살의(殺意)가 담긴 일격.
그리고 체계적인 검술을 배운 것일까.
내지르는 자세 또한 제법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시안의 눈에는 한없이 허접해보일 뿐이었다.
예전의 시안이었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현재 시안은 최강의 아르나이즈, 카일의 검술을 배우고 있었고,
또 그간 시안이 루벤에서 상대해오던 존재들은 마수(魔獸)였다.
어둠의 숲에 기거하며 오로지 본능만을 탐하는 악의 존재.
인간을 보면 증오와 더불어 기쁨과 환희같은 감정을 터트리는.
새까만 증오와 광기로 뒤덮인 축생이자, 맹목적인 살의로 빚은 짐승들.
공명하듯 울부짖는 비명에선,
모든 핏줄에서 쥐어짜내는 듯한 광기를 터트리는 놈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휘둘러지는 레민턴의 검.
쉬익!
그냥··· 그냥 그랬다.
살의가 담겨있기는 한데, 그저 죽여버리겠다. 그 뿐이었다.
딴에는 지독한 살의를 담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검은 오크가 휘두르던 둔기에 비하면 한없이 허약했다.
솔직히 검은 오크랑 비교할 것도 없었다.
어둠의 숲에 기거하는 고블린이 터트리는 광기가 훨씬 더 매서웠다.
후웅!
시안은 가볍게 레민턴의 일격을 피했다.
그리고 그보다 더 가볍게 레민턴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그리고는.
콰─직!
레민턴의 얼굴을 무릎으로 찍어버렸다.
이 모든 일련의 과정들이 이루어진 시간은 그야말로 찰나.
눈에 담기 힘든 속도였다.
“······!”
“······!”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두 눈이 부릅, 떠졌다.
심지어 레민턴의 호위 기사들조차 놀란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다시 내려앉는 정적.
“커허헉!”
그 사이로 레민턴이 고통에 찬 비명을 터트렸다.
“공자님!”
“너 이 새끼!”
그때서야 호위 기사들이 황급히 시안에게 달려들었다.
시안은 잡고 있던 레민턴의 머리채를 들이밀었다.
“움직이지마. 한 발이라도 움직이면 이 새끼 어떻게 될지 나도 모르니까.”
우뚝.
그러자 달려들던 호위 기사들의 움직임이 뚝, 하고 멈추었다.
시안은 그런 기사들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레민턴의 머리채를 잡아 들어올렸다.
“쿠럭···!”
레민턴의 얼굴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귓방뱅이로 턱관절은 아작이 나있었고,
방금 니킥으로 코뼈가 완전히 뭉개져있었다.
이쯤되면 주제를 파악할 법도 하건만.
“너··· 너 이, 개애새뀌···! 이러고도 네가 무사하주 아라!”
레민턴은 시안을 향한 욕설을 멈추지 않았다.
“뭐라는 거야? 네가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아냐고?”
“가미···! 가미 나르 모굑해!”
“목욕?”
아니, 진짜 얘가 뭐라는 거야.
“모욕!”
“아, 모욕.”
이어진 레민턴의 말에 시안은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런데 모욕은 네가 먼저 하지 않았냐?”
물론 사실은 그러했지만,
그렇다고해서 지금 시안의 대처가 적절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제국 관례법상.
귀족들간의 분쟁은 정식으로 결투를 신청하는 것이 옳았다.
특히 모욕과 관련한 시비는 더욱 그러했다.
그런데 지금 시안의 행동은 다짜고짜 선빵을 날린 것.
이런 건 시정 잡배들이나 하는 짓이나 다름 없었다.
고귀한 귀족인 저들의 입장에서는 모욕 중의 모욕인 행동.
그런데 뭐 어쩌란 말인가.
‘손자 선생님이 가르쳐준 건데.’
아직도 그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뭐, 아무튼.
시안이 선빵을 치긴 했지만,
그래도 말은 바로 해야하지 않겠는가.
아무래도 방금 턱관절이 박살나면서
지능도 같이 박살이 나버린 모양이다.
“너···! 너··· 내가 누구지 아고!”
“크라우드 백작가의 차남이라며. 아니야?”
“그러데도 이따 지거리를···! 쿠럭···!”
“그래서 뭐 어쩌자고. 지금이라도 결투라도 하자고?”
흠칫!
그러자 레민턴은 일순간 몸을 크게 떨어보였다.
방금 시안의 움직임을 겪었던 탓일까.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다행히 지능이 완전히 박살나지는 않은 모양인데···.
그러고보니 귀족들 간의 결투는 대결투라는 규칙이 있었다.
자신의 명예를 대변할 기사를 대신 내보낼 수 있는 대결투.
옆에 호위 기사도 많겠다.
아무나 한 명 지목해서 내보내면 그만이었다.
시안은 엘란두르에서도 무능력으로 소문난 존재.
대충 아무나 보내면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해야만 했다.
그런데 저렇게 쫄아있는 모습.
다시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지능이 박살난 것 같았다.
“너···! 우리 크라우드 가무에서 이 이를···.”
“하라는 대답은 안하고 아까부터 왜 자꾸 가문 이야기만 꺼내─.”
시안은 순간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는 퍼뜩, 깨달았다는 듯.
“아하!”
시안이 소리치며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가문 싸움으로 하자는 뜻?”
“······”
그리고 그런 시안의 말에 레민턴은 순간 말문이 턱, 하고 막혀버렸다.
제국에서 크라우드 가문이라하면 모두 한 수 접어준다.
웬만한 명문이라는 가문조차 크라우드 가문에는 끗발이 밀린다.
그런데···.
엘란두르는 아니었다.
제국에서 엘란두르에 비견될 수 있는 가문이 없다시피했다.
그런 가문은 딱 둘.
엘란두르와 같이 제국을 떠받치는 가문, 로르실트.
그리고 제국의 심장인 황가뿐이었다.
제국 최고의 곡창지를 보유한 크라우드 백작가.
그러나 엘란두르 앞에서는 땅 넓은 농부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가문 싸움으로 가면 절대 안된다.
“버, 버림바든 망나니 새뀌 주제에!”
물론 시안은 엘란두르에서 버림받은 존재였다.
그렇기에 엘란두르가, 이사벨이 시안을 보호하고자 나서주는 일은 없을 터였다.
레민턴도 그걸 알았기에 아까 전에 그렇게 나댄 거겠지.
하지만 이렇게 정식으로 가문의 일로 번진다면 이야기는 달랐다.
아무리 시안이 버림받은 망나니라고는 하나,
시안이 엘란두르의 막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게 나도 이 성좀 갖다 버리고 싶다. 그런데 그게 안되는 걸 어떡하냐. 이런 성폭행 병기는 왜 안 파나 몰라.”
원치 않더라도 시안은 엘란두르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이사벨은 명목상으로나마 시안의 어머니.
물론 일이 그렇게 되면 시안의 입지는 안 좋아질 터였다.
이사벨이 시안을 더더욱 안 좋게 볼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진짜 알게 뭐란 말인가.
지금도 시안을 죽이려 안달이 나있는 이사벨이었다.
여기서 더 안 좋게 봐봤자 사지를 찢으려 드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뭐하자고. 가문으로 싸우자는 거야 아니면 그냥 맞짱 뜨자는 거야. 확실히 정해.”
“······”
레민턴은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어느 쪽이든···.
이길 자신이 없었으니까.
“둘다 싫으면 대가리 박든가.”
시안은 레민턴의 머리채를 잡아 끌었다.
그리고는 아까부터 어쩔 줄 몰라하는 아멜리아 앞으로 끌고 갔다.
철푸덕.
힘없이 아멜리아의 발 아래로 깔리는 레민턴.
“아, 참. 저기 네가 부순 것들도 변상하는 거 잊지 말고.”
당연히 레민턴이 부순 것은 아니었지만.
레민턴에게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
식당을 나온 시안과 아멜리아.
그렇게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졌다 싶었을 때.
“미쳤어요! 미쳤어요! 대체 어쩌려고 그러셨어요!”
아멜리아는 아닌 척 했던 감정을 표출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시안이 아작을 내버린 레민턴.
그는 크라우드 가의 차남으로 크라우드 백작이 굉장히 애지중지하는 아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크라우드 백작이 이 사실을 접한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시안이라도 크라우드 백작의 압박을 견디기란 쉽지 않았다.
아니, 견딜 수 없을 터였다.
그렇기에 그냥 자신이 참고 넘어가면 되는 문제였건만.
“어쩌긴 뭘 어째. 먼저 지랄한 건 저 놈인데.”
시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싶었다.
“저한테 그런 거잖아요. 그냥 제가 참고 넘어가면 되었는데···.”
“말했지. 너는 내 영지민이라고. 영지민이 앞에서 모욕받고 있는데 가만히 있으라고? 그리고 저 새끼. 분명 나한테도 지랄했다고?”
시안은 조금 더 조져놓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라는 듯 말을 이었다.
“결투라도 했으면 더 박살을 내놓는 건데.”
“그러다 진짜 가문 싸움으로 번지면 어쩌시려고요?”
“그럼 오히려 좋지. 내 성이 무엇인지 잘 알잖아?”
잘 알았다.
그렇기에.
“······”
아멜리아는 쉽사리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시안이 엘란두르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시안이 나서준 일.
그것이 시안 스스로를 희생한 것인지.
또 그것이 얼마나 아멜리아, 본인을 위했던 것인지.
바보가 아닌 이상 모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괜히 더 미안하고.
그렇기에 더 고마운 마음.
아멜리아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와 동시에 아멜리아는 그 말이 진심이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지켜주겠다는 시안의 말.
사실 아멜리아가 루카스 없이 혼자 돌아다닌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렇기에 솔직히 조금은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영주님.”
“응?”
“······ 고마워요.”
시안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됐어. 그보다 한바탕 했더니 더 배고픈데. 저기 말고 괜찮은 식당 없어?”
“가요. 제가 더 좋은 곳을 알아요.”
“더 좋은 곳···? 더 비싼 곳이 아니고?”
아멜리아는 대답 대신 배시시, 웃어보였다.
#
엘란두르의 망나니가 기어코 한 건 했다!
루치아에서 벌어진 사건은 순식간에 일파만파 퍼졌다.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들은 거의 모두가 귀족들.
귀족들의 사교계는 시안의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 놓을 수 있는 거죠? 그것도 크라우드 가문의 자제를요.”
“괜히 후작가의 망나니가 아닌 거죠.”
“엘란두르도 상당히 골치 아프겠어요.”
그리고 대부분은 그럼 그렇지라는 반응이었다.
“듣자하니 먼저 모욕한 건 크라우드 쪽이었다더군. 정도도 꽤 심했다던데.”
“내 친우가 그 자리에 있었는데, 솔직히 죽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하더군.”
물론 자세한 사정을 아는 이들은 시안을 옹호했다.
하지만.
“그래도 어떻게 그런 시정 잡배와도 같은 짓을···.”
“정식으로 결투를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역시 망나니는 망나니인가.
그럼에도 시안을 안 좋게 바라보는 시선이 주를 이루었다.
그리고 그 소식은 자연스럽게 이사벨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크라우드 가의 자제를 짓뭉개놓았다라···.”
이사벨은 총관 레리트의 보고에 들고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문 밖이 저렇게 시끄러운 것이었나.
아까부터 문밖에서 웅성거리던 소음.
이사벨은 그 소란스러움을 그때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이어진 레리트의 물음.
이사벨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들어오라 전해라.”
레리트는 별 말 없이 문 밖을 나섰다.
그렇게 조금의 시간이 지나 한 사내와 함께 다시 들어왔다.
척 보기에도 나 끗발좀 있다는 느낌의 사내.
제국 최대의 곡창지를 보유한 크라우드 가문의 가주, 크라우드 백작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이오!”
크라우드 백작은 단단히 화가 난 모습이었다.
하기사, 자신의 아들이 그렇게 되었는데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듣자하니 아주 개박살이 나있었다.
코뼈는 짓뭉개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고,
이빨도 몇 개 나가버린 것 같았다.
“어떻게 우리 크라우드한테···!”
무엇보다 박살이 나다못해 아작이 나버린 턱관절.
사제의 치료를 받더라도 어눌한 발음은 고치지 못할 것이라 들었다.
“나는 이에 대한 적절한 보상과 엘란두르의 사과를 요구하는 바이오!”
크라우드 백작의 표정은 곧 터질 것처럼 울그락불그락, 거리고 있었다.
이사벨은 그런 크라우드 백작로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찻잔을 들어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잠시.
“크라우드 백작.”
찻잔을 홀짝이던 이사벨이 입을 열었다.
이윽고 이사벨의 시선이 크라우드 백작을 향했다.
몸짓 하나하나. 행동 하나하나.
그리고 눈짓 하나하나에서 고고함이 흘러나오는 기품.
이사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크라우드가 엘란두르 앞에서 언성을 높였지.”
싸늘한 냉기가 흘렀다.
그저 말 한 마디에 불과했지만 그곳에는 섬뜩한 살기가 담겨있었다.
크라우드 백작은 그때서야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엘란두르 후작가.
명문이라는 말로도 온전히 표현할 수 없는.
제국의 황가조차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귀족 중의 귀족.
크라우드 백작의 볼 위로 주륵, 식은땀이 흘렀다.
이사벨이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먼저 모욕을 한 것은 크라우드 백작. 자네의 자제인 걸로 아는데.”
이어진 이사벨의 말.
“엘란두르를 모욕하고도 무사할 것이라 생각한 건가?”
크라우드 백작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사실 크라우드가 이렇게 배짱 좋게 엘란두르를 찾아온 이유가 있었다.
사건을 일으킨 당사자.
그 대상이 다름 아닌 시안이었기 때문이었다.
후작가의 망나니.
존재해서는 안되었던 사생아.
시안은 엘란두르에서 버린 존재였다.
그렇기에 엘란두르에서도 시안을 크게 신경쓰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시안도 엘란두르였기에 이를 따지고 든다면.
얻어낼 것은 있을 것이라 여겼다.
시안을 골치 아파할 엘란두르가 크라우드를 대충 달래주고 보낼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이런 식으로나마 엘란두르의 빚을 만들어두면,
좋을 것이라 크라우드 백작은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건 명백한 크라우드의 착각이었다.
엘란두르가 시안을 그렇게 대한다고 해서.
다른 이들 또한 그렇게 대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엘란두르가 그어 놓은 선.
지금 크라우드는 그 선을 넘은 것이었다.
크라우드 백작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다 못해 사색이 되어갔다.
제국 최대의 곡창지를 보유한 가문?
웃기는 소리였다.
크라우드는 엘란두르 앞에서 땅 넓은 농부에 지나지 않았다.
하늘 위의 하늘.
제국을 주름잡던 명문가들도 엘란두르의 이름 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봐오지 않았는가.
“죄, 죄송합니다!”
크라우드 백작은 머리를 땅에 박듯이 숙였다.
이사벨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무심한 얼굴로 찻잔을 내려다볼 뿐.
“제, 제가 감히 주제도 모르고 나댔습니다! 부디··· 부디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주신다면 이 은혜를 평생토록 잊지 않겠습니다!”
크라우드 백작은 필사적으로 말을 이었다.
“시안님께 정식으로 배상도 하겠습니다! 아들 놈의 교육도 단단히 시키겠습니다! 아니, 다시는 엘란두르 앞에 얼쩡거리지 않도록 다리를 분질러놓겠습니다!”
이사벨은 차분히 찻잔을 홀짝였다.
그리고 들려온 이사벨의 답.
“지켜보겠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크라우드 백작은 행여 이사벨의 마음이 바뀔까.
황급히 방문 밖으로 사라졌다.
이사벨은 살며시 찻잔을 내려놓았다.
허공을 바라보는 이사벨의 시선.
“루벤에서 죽지 않았다라···.”
“지금이라도 사람을 보낼까요.”
레리트의 말에 이사벨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그럴 수가 없었으니까.
보고에 따르면 시안은 지금 건국일 행사에 초대된 상황이었다.
그것도 황태자가 손수 작성한 초대장을 받고서 말이다.
어째서 황태자가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무게는 쉬이 여길 만한 것이 아니었다.
한 마디로 황태자가 직접 초대한 손님.
그런 손님이 건국일 행사에서 의문의 피살을 당한다?
“황태자가 가만히 있을 거라 보느냐.”
그걸 황태자가 가만히 보고 있을까.
아무리 엘란두르라고는 하지만,
제국의 심장인 황가 앞에서는 한 수 접어줄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그 대상이 황태자라면야.
“······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레리트가 깊이 고개를 숙여보였다.
이사벨은 그런 레리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결국.
건국일 행사에서 시안의 낯짝을 마주쳐야만 한다.
시종일관 평온함을 유지하던 얼굴.
꽈득!
이사벨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