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 엘란두르의 망나니
“시안, 너는 내일 부로 루벤 영지로 가거라.”
뚝.
불현듯 들려오는 목소리에 식탁에 앉아있는 모두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사람들의 표정에는 놀람, 당혹과 같은 감정들이 깃들어 있었다.
이윽고 짙고도 무거운 정적이 식당에 내려앉았다.
드넓은 식당.
약속이라도 한듯, 사람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화려하게 차려진 음식들을 지나 가장 끝석.
말석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유심히 살펴보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는.
그곳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움직임을 멈춘 한 사내가 있었다.
시안 엘란두르.
엘란두르 후작가의 막내였다.
시안은 스프를 뜨던 숟가락을 든 채 굳어있었다.
그 모습은 단순히 움직임을 멈춘 것만이 아닌,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한 착각이 일 정도였다.
곧이어 사람들의 시선이 시안에게 향했다.
그리고 시안은 그때서야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시안은 들고 있던 숟가락을 그대로 내려놓았다.
이어 방금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 시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시안이 있는 자리와는 달리 가장 상석의 위치.
그곳엔 금발의 한 여성이 앉아있었다.
한치의 흐트러짐 없는 자세와 표정은 기품이 곁들여 있었고, 식기를 달그락거릴 때마다 잘 관리된 금발이 찰랑거렸다.
그 도도한 몸짓에서 느껴지는 품위는 부드러우면서도 우아한 세련미가 흘러나왔다.
이사벨 엘란두르.
다름 아닌 시안의 어머니이자,
엘란두르 후작가의 안주인이었다.
“······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시안은 이사벨을 향해 다시 한 번 되물었다.
이사벨은 그런 시안을 흘깃, 쳐다보며 말했다.
“듣지 못한 것이냐. 아니면 못 들은 척 하는 것이냐.”
“듣지 못했으니 물어보는 것 아니겠습니까?”
시안은 이사벨을 향해 따지듯 물었다.
조금 더 정확히는 대듦 혹은 반항.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바람직했다.
그러나 이사벨은 아무런 감정 변화도 내보이지 않은 채, 재차 입을 열었다.
“내일 부로 루벤 영지로 가거라.”
“······!”
“······!”
“······!”
이어진 이사벨의 말에 설마설마했던 사람들이 모두 눈을 부릅, 떠보였다.
엘란두르 가문의 일원들은 물론이고,
주위에서 시중을 드는 고용인들까지.
“허헙···!”
“헉···!”
모두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숨을 삼켰다.
엘란두르 후작가.
황제조차 감히 어찌하지 못하는 두 가문 중 하나인 엘란두르 후작가는 그 품위에 걸맞게 고용인들조차 함부로 뽑지 않는다.
그 어느 때에서도 평상심을 유지하도록 훈련받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루벤 영지.
이곳은 엘란두르 후작가 변방에 위치한 영지였다.
그리고 방금 이사벨이 시안에게 루벤 영지로 가라고 한 것.
이 말은 즉.
시안을 루벤 영지의 영주로 임명한다는 뜻이나 다름 없었다.
보통 영주(領主)라 함은 드넓은 땅의 영지(領地) 다스리고, 그곳에 사는 영주민(領主民)들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고위 귀족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아무리 작은 영지라 하더라도 영주로 임명된다는 것.
그것은 정식적인 작위를 받는다는 것과 동시에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방금 이사벨의 말은 시안에게 있어서도 영광스러운 제안이자 또 명령이었다.
그러나 여기 모인 이들 중 그 누구도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영지가 다름 아닌 ‘루벤 영지’ 였기 때문이었다.
사령영지, 루벤.
죽음의 영지라 불리는 그곳은 말이 영지일 뿐.
사실상 버려진 땅이나 다름 없었다.
제국의 금기 구역인 어둠의 숲을 끼고 있는 이곳은 하루라도 마수들이 들이닥치지 않는 날이 없었다.
심지어 마족들이 소환되어 사람들을 학살하면서도.
농사 지을 땅은 없어 매일매일 굶주림에 시달리는 죽음의 땅.
루벤은 사실상 영지로서의 가치가 전혀 없는 땅이었다.
그럼에도 이곳이 루벤 ‘영지’라 불리는 이유는 단순했다.
첫 번째는 사령영지라 한들 그럼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음이었고.
두 번째는 엘란두르 후작가의 가주, 듀라크 엘란두르.
그가 이 영지를 다른 용도로 개척했기 때문이었다.
에둘러 말하면 유배지요.
직접적으로 말하면 사형 집행지.
후작은 자신을 위협하는 정적을 처리할 때.
혹은 마음에 들지 않는 가신들을 처리할 때.
이곳을 자주 이용했다.
루벤으로 보내면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는 않고,
명분 마저 깔끔하고 또 합당하게 처리할 수 있었으니까.
이에 ‘루벤 영주’라는 감투 하에 수많은 가신들이 마수의 먹이가 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
“······”
그 차례가 시안에게 돌아온 것이었다.
그렇기에 식당에 모인 사람들은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설마하니 시안을 루벤 영지로 보낼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시안은 엘란두르 후작가의 막내였다.
한 마디로 시안은 이사벨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세상의 어떤 부모가 자식을 사지로 내몬단 말인가.
내려앉는 짙은 정적은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만 같았다.
바로 그때.
“······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정적 사이로 시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사벨은 아무런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런 이사벨을 시안은 다그치지 않았다.
이유를 묻기는 했으나,
사실 그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안은 이를 까득, 깨물며 소리쳤다.
“제가 후작가의 골치 아픈 망나니라서입니까?”
명망 높은 후작가의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망나니.
“아니면 제가 가문의 적자가 아닌, 한낱 시녀의 자식이라서?”
존재해서는 안되었던 후작가의 사생아.
이것이 시안의 뒤에 따라붙는 명칭들이었다.
“······”
이사벨은 여전히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시안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식당의 사람들은 시안의 시선과 마주칠 때마다 눈을 피했다.
그러나 딱 두 사람.
시안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후작가의 둘째이자 장녀, 로즈웰 엘란두르.
셋째이자 차남, 네이슨 엘란두르.
둘 모두가 엘란두르 후작의 적자이자.
이사벨이 낳은 자식들이었다.
그에 반해 시안은···.
한낱 시녀의 자식이었다.
그것도 후작의 하룻밤 불장난으로 태어난 사생아.
심지어 시안의 어머니는 시안이 어린 시절에 세상을 떠났다.
이사벨과 시안은 부모와 자식이나,
사실상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이나 다를 바 없는 사이였다.
정확히는 이사벨에게 있어 시안은 남편의 정을 가져간 도둑년의 자식이자, 자신의 자식들이 가져가야할 권리를 훔쳐빼았는 도둑놈일 뿐이었다.
때문에 시안의 유년기 시절은 그리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핍박과 억압.
시안의 기억 속에는 추억이라 부를 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 정도 선에서 그쳤거늘···.
시안은 다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사벨은 여전히 시안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더 이상의 할 말이 없다는 듯 묵묵히 식사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래.
꼴보기 싫은 건 인정한다.
귀족들의 결혼은 이해 관계 속에 얽힌 정략 결혼이라지만.
사랑 따윈 없는 형식적인 결혼이라지만.
그래도 남편이라는 작자가 딴 사람이랑 놀아나는게 보기 좋을 수가 없다.
게다가 그 자식 놈이 가문에 버젓이 빌붙어 살고 있으니 꼴 보기 싫을 수밖에.
뭐, 이사벨은 그럴 수 있다치자.
시안과 이사벨은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이었으니까.
하지만 엘란두르 가문의 가주이자 제국을 지탱하는 두 기둥 중 한 명, 듀라크 엘란두르.
그는 아니지 않은가.
듀라크는 공사가 워낙 다망하여 가문에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거의가 아니라 가문에 붙어있는 꼴을 못 봤다.
시안마저 유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듀라크를 마주한 적이 손가락에 꼽을 정도 였으니까.
오직 후작가의 첫째이자 장남, 카이 엘란두르.
천재라는 말로도 부족할 재능의 소유자로, 제국의 별이라 불리는 카이만이 듀라크를 독대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가문 내부의 중대사는 이사벨의 역할이었다.
엘란두르의 안주인.
그러나 이사벨은 어디까지나 엘란두르의 안주인일 뿐.
엘란두르의 주인은 듀라크다.
시안과 피가 섞인, 명백한 시안의 아버지.
물론 결단코 아버지라 부르기 싫은 작자였으나, 그럼에도 피가 섞인 혈연임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이 중대 사안.
시안을 루벤 영지로 보낸다는 사안이 고작 이사벨의 의견으로 결정될리가 만무했다.
아무리 사생아라지만 자신의 피가 섞인 자식을 사지로 내몰지는 않을테니까.
그 사실을 이사벨이라고 모르지 않을 터였다.
그럼에도 시안을 루벤 영지로 보낸다는 결정.
“······ 가주께서도 허락한 사안입니까?”
시안의 물음에, 이사벨은 여전히 답이 없었다.
아니, 입만 열지 않았다뿐.
바보가 아닌 이상 저 의미를 모를 리가 없었다.
듀라크는 그런 자였다.
가문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결단이라도 내릴 수 있는 자.
아마 이사벨이 무언가를 대가로 듀라크를 설득했겠지.
이사벨은 명망 높은 아벤느가 가문의 장녀.
엘란두르 가문만큼은 아니지만 아벤느가도 상당히 고위 측에 속한 가문이었다.
반면 시안은 아무런 배경도, 힘도 없는 시녀의 자식.
“······”
시안의 두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금이라도.
지금이라도 살려달라 애걸복걸한다면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아무리 사생아라 한들 엘란두르의 핏줄인 것은 변함없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그 온정에 호소한다면···.
피식.
풉.
돌연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라본 그곳.
그곳엔 로즈웰과 네이슨.
시안의 두 형제가 입을 틀어막은 채 웃음을 참고 있었다.
명백한 조롱.
꽈악!
시안의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주먹은 당장이라도 뻗어질 듯 덜덜, 떨려온다.
그러나 끝내 힘없이 풀어진다.
후작가의 망나니이자,
존재해서는 안 되었던 사생아.
그런 시안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저 딱 하나.
“······”
그 운명을 애써 담담한 척 받아들이는 것.
이것만이 시안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발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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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준한 산의 풍경.
우거진 나무들과 삐죽삐죽 솟아있는 풀들이 시야를 가린 이곳.
“이랴.”
이곳에 한 대의 마차가 가로지르고 있었다.
본디 산이라 함은.
아무리 험준하다 한들 사람이 다니다보면 자연스레 길이라는 모양새가 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곳은 길이라 부를 만한 것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람은 커녕 들짐승조차 쉬이 보이지 않는 깊은 산중.
하물며 마차가 지나가기엔 상당한 무리가 있어보였다.
그러나 마부는 아무렴 어떻다는 듯.
“이랴이랴.”
말들을 채찍질하며 험준한 산의 길을 힘차게 오르고 있었다.
달그락달그락.
그렇게 얼마 간 험준한 산세를 올랐을까.
“크흠, 큼.”
마부는 살짝 헛기침을 해보였다.
그리고 주변의 풍경을 둘러보는 척.
“어디보자, 거진 다 온 것 같은데···.”
슬쩍, 마차의 내부를 바라봤다.
1평 조금 넘는 공간.
그 안에는 노인과 한 청년이 있었다.
주름기 가득한 노인의 얼굴은 따로 묻지 않아도 살아온 세월을 알 수 있었다.
동시에 노련함이 한껏 묻어나는 분위기.
그것은 마치 은퇴한 베테랑 용병과도 같은 느낌을 주었다.
반면, 청년은 가지런히 앉아있는 노인과는 달리 아무렇게나 널브러져있었다.
등을 지고 누워있는 바람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느껴지는 분위기는 한량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마부는 저도 모르게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바로 그 순간.
“무슨 문제가 있나?”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
바라본 그곳엔 노인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마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그, 그것이···.”
마부는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몰래 훔쳐본 노인과 청년.
정확히는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어버렸던 청년.
그 청년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안 엘란두르.
제국을 지탱하는 두 가문 중 하나, 엘란두르 후작가의 막내.
자신같은 평민은 감히 똑바로 마주해서는 안되는 존재였다.
하물며 방금 전의 한심하다는 태도야···.
마부는 크게 당황하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