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러기 수비대 (4)
길었던 회의가 끝이 나고, 다시 길었던 밤까지 끝나가며 찾아온 어스름의 시간.
어느새 짙디짙은 푸른 밤하늘에도 주홍색 물감이 서서히 차오르고 있었고, 그곳에서 나는 타천자 추적 및 포획, 심문, 라피냐로부터 들은 이야기에, 하루 동안 있었던 일까지- 여러 생각 속에 하늘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러자 얼굴 위로 스며드는 여명의 빛.
“······.”
나는 그 차갑고도 따뜻한 색을 맞이한 채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해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까 전- 라피냐로부터 우리의 역할, 아니 정확히는 내 역할을 듣고 난 뒤 약간의 회의까지 거친 끝에,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들 또한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히긴 했다.
허나, 그렇다고 당장 모든 걸 정리하기엔 단 하루 동안에 참 여러 일이 있었을 뿐.
그렇기에- 나는 잠시 머리를 식히러 바깥에 나와 있었으니, 잠깐 그러고 있자니 어째 하루가 참 길었다는 생각마저 떠올랐고, 조금은 피곤하다는 느낌마저 들었을 정도였다.
아니, 나만 그리 느낀 건 아니었던 모양.
“흐야··· 오늘따라 왜 이리 피곤하지···.”
내가 바깥에 나오자, 나를 따라 쪼르르 따라온 아이들은 옆에서 기지개를 켜며 회의 동안 찌뿌둥해진 몸을 풀어내는 중이었고, 그러면서도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되뇌었다.
“그야아··· 밤을 꼬박 새운 셈이니까요?”
“예. 회랑 시간으론 밤에 출발했으니, 거의 이틀 연속으로 새운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렇긴 한데··· 뭐, 어쩔 수 없긴 하지.”
아리엘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짧게 하품을 하고서는 이내 나를 바라보며 작게 키득거렸고, 그리고는 다시 내게 말을 건네왔다.
“원래 이걸 노리고 온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덕분에 천하랑 만날 수 있었으니까.”
그치?- 아리엘은 옆에서 조금 꾸벅거리고 있던 이하린을 바라보며 다시 작게 웃어 보였고, 그 말에 이하린은 다소 멍해 보이는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하였다.
“네엡···. 정말 다행이에요. 타이밍을 맞아떨어진 것도, 이렇게 된 것도, 전부 다···.”
그 말과 함께 이하린은 잠이 오는듯한 표정 속에서도 무언가 만족스러운 듯 나를 바라보며 배시시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고, 그러면서도 큼지막한 제 두 눈을 깜빡거렸으니- 아무래도 그녀는 정말로 피곤해진 모양.
“······피곤하신가 보군요.”
“아··· 네엡. 쪼그음··· 요?”
조금이라기엔 얼굴까지 붉게 달아올라 있는 게 상당히 잠이 오고 있는 것 같았으나,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분명 내게도, 그녀에게도 오늘 하루는 충분히 생각보다도 긴 하루였을 테니 말이다.
‘애초에 시기를 맞춰서 찾아온 거겠지.’
우연이라는 듯 이야기를 해봤자 내가 저작권리의 가호를 알고 있는 이상, 이하린의 성격을 알고 있는 이상, 거기까지의 과정을 짐작해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하린은 분명 일부러 작전이 시행되는 타이밍에 맞춰 찾아왔던 게 틀림 없을 터.
하물며 조금 전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시차로 인해 저쪽에선 밤에 세로데파스코로 넘어온 모양이었고, 그렇다면 저 아이들은 우리 쪽보다 한나절은 더 깨어있었던 셈이었다.
우리 또한 작전으로 인해 어느새 하루를 꼬박 지새워 가는 중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니- 당연히 피곤해질 수밖에.
“······.”
물론 피곤함을 느끼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으나, 사실 내게 있어서 단순히 이 정도의 육체적인 피로감은 큰 의미가 없었고, 내가 느끼는 피로감은 그걸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애초에 그건 당연한 이야기였을 뿐.
세로데파스코에서의 타천자 포획 작전부터 시작해, 갑작스러운 변이, 난데없었던 아이들의 합류, 다시 회의가 끝나기를 기다린 끝에 찾아온 이 미묘한 팀 결성까지- 지나간 하루 동안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났고, 그게 모두 중요한 일들이었으니 나 또한 심적인 피로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림자 교단에 관한 비밀도, 앞으로의 계획도, 지금 이 상황도, 모두 내게 계속해서 생각할 거리를 안겨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물론.
-잘하는 것 같던데, 한번 마음껏 해봐요.
그건 마지막까지도 계속되었고 말이다.
사실 애초에 그런 행동을 자유롭게 하고 싶어서 라피냐에게 금제를 드러내고, 소교주 시절의 모습까지 어느 정도 내비친 바였다.
허나, 그렇게까지 대놓고 말해올 줄 몰랐으니, 나 혼자만, 아니 조금 엇나간 멘탈의 소유자인 진시우와 둘이 다닐 때라면 상관없어도, 이러한 상황에선 조금 미묘하단 느낌.
비록 다들 자원해서 온 것이긴 하지만 생도로만 구성된 우리에게 그러한 임무를 직접적으로 부여해준다는 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고, 특히나 원래 라피냐의 태도를 생각해보자면 상당히 미묘하게 느껴졌던 탓이었다.
위험한 일에 끌어들이는 건 싫지만, 이왕 발을 들였으면 제대로 하라는 것이었을까?
비록 어떠한 생각으로 그런 기대를 걸어왔는지는 정확히야 모르겠으나, 적어도 그 말을 통해 느낄 수 있었던 부분이 있긴 했다.
그리고- 그건 바로.
‘생각보다 더 본격적으로 흘러가는군.’
저 라피냐가 우리에게 저러한 역할을 맡겨올 정도로 그녀 또한 이번 일에 한해서는 어정쩡하게 할 생각 따윈 없어 보였다는 것.
사실 그건 내게 저 말을 들려준 직후, 이어진 라피냐의 말에서도 느꼈던 부분이었다.
라피냐는 아직 정확히 결정된 건 아니라 하였으나, 적어도 회의에서 나왔던 내용까진 들려주겠다 말하였고, 분명 간략하게나마 앞으로의 방침을 우리에게도 설명해주었다.
그러니까.
-이번 일로 그림자 교단의 위험도는 더 커졌어요. 더는 좌시할 수도 없을 만큼이요.
-불특정 타천도, 마인의 급속 마수화도, 이능을 사용하는 마수도, 모두 가만히 방치할 수 없는 내용이고, 그건 분명 더 악의적인 목적으로도 사용될 수 있는 현상이니까요.
바로 이러한 내용을 말해오면서 말이다.
-그래서 연맹에서도 이번 기회에 조금 더 본격적인 움직임을 보이기로 결정했어요.
그렇게 들려온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 진지해진 표정으로 건네왔던 라피냐의 말속에는 분명히 한가지 의도가 담겨져 있었다.
-녀석들이 더 이상한 짓을 벌이기 전에 이제껏 여유가 나지 않아 하지 못했던 일을, 백해무익한 불온의 씨앗을, 세계침식의 공백이 길어져 공략자들의 여력이 그나마 남아있는 이 시기에 제대로 뿌리 뽑아버리기로요.
-그래서 이번 작전이 성공한다면, 올해가 지나기 전, 대대적인 작전이 이어질 거예요.
그리고 물론, 그것이 의미하는 건 바로.
-그림자 교단을 완전히 섬멸하는 것. 그게 회의 끝에 연맹이 결정한 최종 목표입니다.
원작에서도 묘사되었던 그 사건이었으니, 그렇기에 나 또한 이어진 라피냐의 말들을 조금 더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저희가 해야 할 일은, 그때의 디딤판을 만들어주기 위해 녀석들의 정보를 얻고, 전력을 깎아내는 것이예요.
애초에 원작에서도 멸화급 마수의 습격을 기점으로 그림자 교단의 위험성이 대두되었고, 그로 인해 이하린과 아이들이 2학년이 될 때쯤에는 대대적인 토벌이 시행된 바.
하여, 초반과 중반까진 꾸준히 등장해 사고를 치던 타천자급의 마인들도 후반부에 가서는 거의 없어져 나타나지 않게 되었는데, 어디서부터 달라진 건진 모르겠으나 아무래도 그 일련의 흐름이 빨라진 모양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나로서는 이 변화에 대해서 생각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고 말이다.
물론 이제껏 벌여온 일이 있고, 그림자 교단을 더 빨리 토벌해야겠다 마음먹었던 건 나였기에 딱히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 다들 이제 회랑으로 돌아가나···?”
“네엡···. 1차 작전이 시행되려면 협의할 시가니이··· 필요하다고 하셨으니까··· 네엡.”
“그래? 그럼 돌아가선 뭐할 거야? 하린이 넌··· 아, 하린이는 바로 자야겠구, 설아는?”
“어제 못한 만큼 더 수련을 해야겠지.”
결국 그건 이 아이들에게 닥쳐올 위험을 먼저 제거해놓기 위해서였으니, 이렇게 된 상황이 내게는 다소 미묘하게 느껴졌을 뿐.
그리고- 그래서일까?
“아···. 저도오 수려언 해야 하는 데에···.”
“수련은 무슨. 하린이 안 그래도 요새 헤어지고 나서도 아침까지 수련하는 것 같던데, 내가 그거 해봐서 아는데 그러다 탈 난다?”
“그치마안···.”
“돌아가면 그냥 오늘은 푹 쉬어. 티르유 씨랑 중간에서 조율하느라 계속 바빴을 테니까. 그리구 지금 너 볼 되게 따끈따끈해졌어.”
“잡하 당히히 말하주세혀어···.”
이 순간- 내 머릿속엔 저 볼을 잡아당기고 싶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을 따름이었다.
“하린이 너 지금 많이 졸리구나?”
“아, 아니헤여···.”
물론 그건 단순히 괴롭히고 싶어서나, 결코 사적인 감정이 담긴 생각은 아니었고, 그저 내가 그리 말했건만 기어코 이렇게까지 찾아온 이하린의 행동이,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어느 정도의 위험을 수반한 일인지 알고 있을 텐데도 저렇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쫒아온 행동이 다소 괘씸하게 느껴졌던 탓.
과연 이하린은 내 심경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도 들었을 정도였다.
“······.”
하지만 그걸 실제로 행동으로 옮길 수 있을 리는 없었으니, 나는 잠시 생각해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라피냐가 말하는 대대적인 작전에 관해선 아직 구체적으로 결정된 사항도 없고, 그녀 또한 조금 더 회의를 거치고 나서 다시 설명해주겠다고 하긴 했었다.
하물며, 아무리 녀석들이 마인을 마수로 변질시키는 능력을 갖고 있다 한들, 멸화급 정도의 변화를 그리 쉽게 만들어낼 수는 없을 터였고, 그건 지금의 정세나 원작의 흐름을 통해 어느 정도 추측해 볼 수 있는 부분.
그러니 당장 진행될 작전의 난이도가 내가 걱정하는 것만큼 높지만은 않을 터였다.
애초에 라피냐가 내게, 이 팀에게 기대하고 있는 것은 추후 이어질 섬멸을 위해 타천자- 즉 교단의 수뇌부인 주교급을 잡아다 심문하고 정보를 캐는 것이었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물론.
‘······그 정도면 문제없겠지.’
정말 그러한 수준에서만 작전이 진행된다면 설령 멸화급 주교가 나타난다고 해도 문제없을 테니, 조금만 조심하더라도 별다른 위험 없이 상황을 끝맺을 수 있을 터였고.
그럼 우리가 할 일 또한 그저 원작에서도 일어났던 그 거대한 시류에 편승해 그림자 교단의 섬멸을 관망하면 그만일 뿐이었다.
이미 변화는 그 흐름을 앞당겼기에, 연맹은 그림자 교단의 섬멸을 결정했고, 세계침식이 찾아오지 않은 이 시점에서 인류는 충분히 그럴만한 역량을 갖추고 있을 테니까.
그렇기에.
“······그런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네헤에···? 갑하히, 아, 이제 그한···.”
결국 나를 걱정하여 이곳까지 쫒아왔을 게 뻔한 이들에게 내가 돌려줄 수 있는 말은,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이었을 따름이었다.
물론 팀이 이렇게 구성되고, 라피냐가 그걸 받아들인 이상, 그리고 그녀들이 그걸 강력히 희망하는 이상,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었기에 이미 이 물음은 지나간 회의에서도 몇 번은 물어보았을지언정 말이다.
라피냐가 내게 요구한 요소가 요소였기에, 그게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었으니까- 나는 그게 계속해서 신경 쓰였던 탓이었다.
하지만.
“또 저런다 또. 괜찮다니까 바보야? 생도라 해도 우린 공략자야.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라봤자 결국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라구.”
“저도 아리엘의 말에 동의합니다. 은공께서 염려하는 부분이 뭔지는 알겠으나, 말씀드렸듯 저희도 분명 각오하고 온 거니까요.”
“······마, 맞아요! 저희는 괜찮아요!”
아직 제대로 된 ‘심문’을 목격한 적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정말 굳건한 마음으로 와서 그런지 그녀들의 대답은 다시금 똑같았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 차분한 목소리로, 그러면서도 당당한 태도로 똑같은 대답을 돌려주었고, 피곤해서 갓 쪄낸 떡처럼 녹아내리고 있던 이하린마저 한순간에 눈에 힘을 주고는 내게 그러한 대답을 건네왔다.
참으로, 심경이 미묘해지는 일이었다.
“······예. 그럼 더는 묻지 않겠습니다.”
“네! 정말 더는 안 물어보셔도 돼요···!”
그리고 물론.
“······쯧.”
그러한 우리의 대화에 마찬가지로 저 멀리서 바람을 쐬며 무언가를 생각 중인 듯했던 진시우가 불만스러운 어조로 작게 혀를 차왔으니- 이후를 생각하면 이젠 저 녀석도 신경을 쓰긴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고 말이다.
아무래도 진시우는 이 상황이 불만인듯했는데, 나는 그렇다 쳐도, 대체 녀석은 뭐가 불만이길래 이 애들의 참여를 저렇게나 질색하는지 짐작 가는 이유가 없었던 탓이었다.
아니, 굳이 짐작해보자면 아마 녀석의 트라우마와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싶었을 뿐.
하니, 이젠 그걸 고려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선은 내가 팀을 맡게 되었고, 어찌 되었든 한동안 우리는 같이 활동을 해야만 했다.
그러므로- 나는 다시 눈을 끔뻑거리기 시작한 이하린에게서 고개를 돌려 진시우를 바라보았고, 그러자 녀석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런 말 없이, 불편한 심경을 드러내며.
“······.”
“······.”
하지만 진시우는 이내 고개를 돌리고선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으니, 나는 가만히 그런 녀석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말을 걸어볼까 싶었지만 이내 관두었다.
일단 녀석의 성향이 성향인 만큼 내가 간섭하는 것은 싫어할 터였고, 적어도 저러한 태도가 실제로 임무를 수행할 때 지장을 줄 만큼 어리숙한 녀석은 아닐 테니 우선은 조금은 더 지켜볼 필요성을 느꼈던 탓이었다.
물론 라피냐가 건네준 이 검은 신분증이 의미하듯이, 팀을 운영하는데 문제가 생길만한 요소라면 미리 조치해야겠지만 말이다.
왠지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는 기분.
‘···대에도 저런 녀석들이 많긴 했지.’
사실 지금에 와서야 말해보자면, 내가 맡았던 암영비천대는 맡은 바의 역할이 역할이었던 만큼, 마인들이 즐비한 신교에선 그리 환영받지 못할 종류의 것이었던 만큼, 주로 배척받는 이단아들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하여 소교주인 내 신분으로서도 모든 것을 해결할 순 없었고, 나는 대를 이끌기 위해선 내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었다.
물론 그 노력이 헛되진 않았는지 마지막에 가서는 다들 나를 돕기 위해서 제 목숨을 헛되이 사그라트리게 되었으나······. 어쨌든 암영비천대 수하들의 성격은 분명 객관적으로 봐도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대체적으로 저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면서도, 타인과의 교류에선 짜증을 낼 때가 더 많았다는 부분이 특히 그러했고 말이다.
그래서인지- 임시지만 비슷한 역할을 맡게 된 채, 비슷하게 구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그때가 떠오른다고 해야 할까?
물론 조금은 입맛이 씁쓸한 기억이었다.
“······.”
하지만 두고 온 의무의 무게가 무거울지언정, 지금은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으니, 나는 그저 계속해서 생각을 이어나갔을 뿐.
사실 굳이 저러한 녀석의 태도가 아니더라도, 아크샤에게 들었던 이야기도 그렇고, 오늘 마인이 쏟아내었던 외침도 그렇고, 진시우에 대해서는 나 또한 한 번쯤은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성이 있긴 했었다.
아니, 그건 단순히 진시우만이 아니라, 눈앞에서 꾸벅거리고 있는 이하린도 마찬가지.
‘전생, 빙의, 환생··· 회귀.’
회귀자를 찾을 방법은 모르겠으나 아크샤는 분명 내게 인과가 존재한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내게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다른 인과가 존재한다면 그건 이 작디작은 소녀도, 저 멀리 사라져버린 진시우도, 모두 일반적이지 않은 인과 속에 이곳에 존재하는 이었을 터였고, 차이점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단순한 순서에 불과하지 않을까 싶었을 뿐.
원작의 이야기가, 이 세계에서 알게 된 이야기의 인과가 내겐 그렇게 느껴졌기에- 내가 짐작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나는 생각해야만 했다.
비록 전생이란 윤회의 수레바퀴가 내게 있어서도 미지의 영역이었을지언정, 생각해보면 환생자인 나는 어찌 보면 이 세계에서 녀석이 겪은 일에 대해 다른 누군가보다 가깝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몰랐으니까.
다시 ‘원작’의 주인공 진시우는 이하린을 이해할 수 없을 터였고, ‘원작’의 집필자이자 다시 내가 읽은 원작의 주인공이었던 이하린은 나를 이해할 수 없었을 테니, 어찌 보면 둘 모두를 이해하고, 이 세계의 진실을 알고 있는 나만이 아크샤의 말처럼 이곳에 예정된 종말을 뒤틀어낼 수 있을지도 몰랐으니까.
이하린이 실패해 모든 것이 잿빛에 집어 삼켜지는 미래를, 눈앞의 이 아이들도 모두··· 끝을 맞이하게 된 미래를, 어쩌면 그렇게.
“어··· 하린이 잔다.”
물론 지금의 나로서는 침식을 끊어낼 방법도, 회귀자를 찾을 방법도 몰랐기에 먼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었지만, 언젠가는 그 순간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로선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분명 만상세계가 나를 이 세계에 초대한 이유는, 나를 데리고 온 이유가 있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문득 그러한 생각이 들었다.
“하린이도 진짜 피곤했나 봐.”
“······.”
이제 완연히 잠들어 아리엘의 어깨에 작은 머리를 기댄 채 색색거리는 이하린은, 다시 그걸 온화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 아리엘은, 혹 다른 주연 인물들은.
과연 어떠한 미래를 꿈꾸고, 그려나가고 있을까- 바로 그런 뜬금없는 생각이 말이다.
그렇기에.
“넌, 미래에 뭐를 하고 싶어?”
“······어?”
나는 알 수 없는 기분 속에, 3년, 아니 이제는 2년에 더 가깝다 봐야 할 정해진 미래를 떠올리며 아리엘에게 물음을 건네보았다.
우웅- 츠르륵.
어느새 여린 숨을 내뱉으며 잠든 이하린에게 암야를 변형시켜 덮어주며, 그걸 보고 두눈을 깜빡거리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설아 씨는, 미래에 뭘 하고 싶으십니까?”
“······.”
물론 큰 의미가 담겨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나로 인해 조금씩 바뀌고 있는 원작의 흐름 속에서, 앞으로 찾아올 미래를 알고 있기에, 나는 그냥 이 아이들이 어떠한 미래를 바라고 있을지가 궁금해진 것이었다.
즐겁게 웃고 떠들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자신들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생도들의 마음속엔, 무엇이 있을지가 궁금해졌으니까.
그리고 물론.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보는 걸까?”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이유는 없어.”
“저는··· 생각해본 적 없는 부분입니다.”
내가 생각해도 뜬금없는 물음이었던 만큼, 잠들어 있는 이하린을 제외하고선 두 사람 다 의아하단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대답은 듣고 싶었기에 나는 말 없이 둘을 바라보았고, 그러자 내 심경을 눈치챘는지 두 사람은 이내 나를 한번, 다시 서로를 한번 쳐다보더니 무언가 고민된다는 듯 생각에 잠겨 들어가기 시작했다.
“정말 하고 싶은 걸 묻는 거야, 아니면··· 조건 없이, 그냥 바라는 걸 묻는 거야···?”
“아무런 조건 없이, 네가 바라는 거.”
“그래···? 으음······ 그렇다며언······.”
그리고는 이내.
“놀고 싶어.”
“······뭐?”
아리엘은 제게 기대어 잠든 이하린의 머리를 조심스레 제 허벅지 위로 옮기면서 그런 대답을 건네왔으니, 당연히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반문을 건네볼 수밖에 없었다.
“놀고 싶다고···? 아리엘, 네가?”
“응! 조건 없이라며? 만약, 만약, 아주 만약이지만··· 정말 머어언 미래에, 침식이 사라지고, 평범한 세계가 되면, 그때는 나도 아무것도 안 하고 친구들이랑 놀고 싶긴 해.”
“······.”
“평범하게 늦잠도 자구, 좋아하는 친구들이랑 밤늦게까지 이야기도 하구, 그것도 아니면··· 멋있는 남자친구라도 만난다던가?”
그렇게 약간 짓궂은 표정으로 나와 시선을 마주한 아리엘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그 말과 함께 장난스레 웃어 보였고, 그리고는 이내- 다시 작게나마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럴 일은 없다는 듯이.
약간은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뭐··· 아무리 조건 없이라도,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이야. 현실적으로, 아니 이것도 현실적이진 않지만···. 일단 지금의 상황에서 바라는 건 언젠간 승천자가 되고 싶다는 게 그나마 현실적인 바람이라 할 수 있겠네. 설마 침식 자체가 사라질 일은 없을 테니까.”
“······.”
“응. 역시, 아무리 그래도 미래에는 승천자가 돼서, 다른 사람들을 더 열심히, 많이 도와주고 구해주고 싶어 나는. 꼭, 반드시.”
이어지는 말속에서는 분명 아리엘의 여러 심경이 느껴지고 있었고, 승천제에서의 일이 있었기에 나는 저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아리엘이 처음으로 한 대답에 정신이 조금 멍해진 상태였다.
“저는··· 사실, 어렸을 때부터 꿈꿔왔던 게 얼마 전에 이루어진 상황이라 지금으로선 딱히 생각나는 건 없습니다. 굳이 말하자면야··· 마인들을 전부 다 토벌한다든가, 제왕검형을 완벽하게 펼쳐내고 싶다 정도네요.”
“······그렇습니까.”
“예. 은공께서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그나마 이어진 남궁설아의 말에 어느 정도 심경이 가다듬어졌으나, 다시 이어진 대답에는 미묘해진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 당황스러웠다가, 신기해졌으며, 그리고는 끝내 조금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래서일까.
“······.”
순간 잠들어 있는 이하린은 어떠한 대답을 돌려줄지가 무척이나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과연 이하린은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을지가, 그녀가 생각하는 미래에, 원작자인 그녀가 꿈꾸는 침식이 사라진 미래에서, 이하린은 과연 무엇을 하고 싶을지가 궁금했기에.
하지만 그걸 위해 자는 사람을 깨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문득 어떠한 생각이 떠올랐으니, 나는 왠지 그녀에게 직접 듣지 않아도 이하린이 꿈꾸는 미래가 무엇인지 알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제껏 지켜봐 온 그녀라면, 나를 쫒아 이곳까지 온 그녀라면, 이하린이 어떠한 미래를 꿈꾸고 있을지는 뻔한 일이었으니까.
“근데 그럼 천하 너는 나중에 뭐 하고 싶어? 우리는 대답했으니까, 너도 말해줘야지.”
그렇기에 이 순간.
“······딱히 없어, 나는.”
“모야 그게. 자기가 먼저 물어봐 놓고.”
내 머릿속에는 그저 그녀가 바라는 대로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아니, 이하린만이 아니더라도, 아리엘도, 다른 아이들 또한 모두 마찬가지로. 다른 어떠한 이유를 떠나 그냥 순수한 마음으로. 그냥 각자라 바라는 대로 되었으면 싶었으니- 나는 어느덧 완연히 밤을 쫒아낸 채 떠오른 태양을 바라보면서, 이리 답하였다.
내면에서 일렁이는 복잡한 심경 속에, 천천히 그 생각들을 다시금 밀어 넣어보면서.
“나도, 그런 건 생각해 본 적 없으니까.”
여명의 끝에서 찾아온 하늘 아래, 우리를 감싸 안는 빛을 느끼며, 여전히 새근거리고 있는 누군가를 바라보면서, 그렇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