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행자 유천하 (1)
후우웅- 어느덧 찾아온 7월의 여름.
거센 바람결에 머리카락이 흩날렸고, 등천회랑에 남아있었다면 분명 더위와 씨름을 하고 있었을 시기였으나, 나는 지금 선선한 가을 하늘 아래 도심을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활동하기에는 적절한 날씨라 해야 할까?
이 시기의 남미는 건기라더니, 우림에만 들어가지 않고 있으면 딱히 습한 느낌도 없어서 나쁘지 않은 날씨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문득- 회랑을 떠올렸더니, 날씨가 좋아서인지 덩달아 떠오르는 이가 있었다.
저 하늘의 구름처럼 몽글거리는 누군가가.
[수신 – 0 / 발신 – 1]
“······.”
다만, 여전히 수신된 문자는 없었고, 수업을 열심히 듣고 있는 모양인지 이하린답지 않게 아직도 답장이 오질 않고 있었는데, 생각할수록 무언가 미묘해지는 기분이었다.
딱히 그녀의 답장이 중요한 건 아니었으나, 왠지 모르게 신경 한구석이 거슬렸던 탓.
애초에 그날 밤의 대화 이후로 연락하는 틈이 다소 뜸해지긴 했었지만, 괜스레 라피냐의 입에서 협업에 관한 내용을 듣고 나니 무언가 나도 모르게 미묘한 상상이 떠오른다고 해야 할까? 평소라면 단순히 토라져서 그랬거니 싶었을 것도 미묘하게 느껴졌다.
분명 이 시간이라면 수업에 들어가, 새근거리고 있을 텐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우웅-!
하지만- 사실 지금은 그런 데에 신경 쓰고 있을 순간이 아니기도 했고, 계절학기인 만큼 수업도 일찍 끝날 테니 작전이 끝날 때쯤이면 답장이 와있을 거란 생각도 들었기에, 나는 이내 진동하는 워치를 두드려보았다.
물론 원래라면 계절학기가 시작되었을 이 시기에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 이유는 분명했으니, 그 이유는 오직 단 하나였을 뿐.
그러므로.
[어때요. 뭐 보이는 게 있긴 해요?]
“헌터, 공략자, 빈민. 아직 타천자로 추정되는 마력의 변화는 관측되지 않았습니다.”
[저 마인 녀석은 잘 쫓고 있겠지요?]
“예. 하오란도 문제없이 추적 중입니다.”
나는 도시를 내려다보며 그리 대답했고, 그에 워치 너머의 상대- 라피냐는 알겠다고 대답함과 동시에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연히 나도 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시야의 화각을 조금 더 돌려보았고 말이다.
그러니까 바로.
[그렇다면, 어디 한번 잡아볼까요.]
타천자 포획 작전을 시작하기 위해- 그것이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였기 때문이었다.
***
이번 작전, 타천자 포획에서 내가 맡은 역할은 중요하지만 꽤나 간단한 임무였다.
바로 전장에서 떨어진 곳에서 들키지 않고 녀석의 위치를 관측해내고, 다시 그것을 토대로 위치를 공유하며 녀석을 제압하는 것.
물론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언덕, 아니 산의 봉우리였기에 도심의 풍경이 오밀조밀한 모형처럼 느껴질 정도였으나, 세로데파스코는 분지의 형태를 띤 도시였고, 만상의 눈은 그런 작은 풍경 속에서도 명확히 개체들을 구분할 수 있었다.
시야 속에서 휘몰아치는 수많은 색채.
‘···사람 한번 많군.’
마력이 없는 것들을 제외했고, 다시 일정량을 넘기지 못한 것들을 제외했으며, 최소한 현상을 일으킬만한 것들만 남겨놓았다.
당연히 거점도시였던 만큼 마력을 갖고 있는 이들이 많았기에 그리 쉬운 작업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나는 그저 도심을 내려다보았을 뿐.
애초에- 내가 주시해야 할 범위는 결국 도망치는 하오란과 그 주변뿐이지 않은가?
“아니 이··· 미······ 그만··· 쫓······ 와!”
우우웅- 파앙! 콰과··· 콰아앙!
그러므로 나는 도심 한복판에서 요란하게 도망치고 있는 하오란을 바라보았고, 다시 구석구석에서 대기하고 있는 진시우와 라피냐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작전이 개시되기 전에 들었던 개요를 떠올려보았을 뿐이었다.
분명 지난 며칠간- 정보를 토대로 사전에 협의된 작전의 내용은 무척이나 간단했다.
-미끼는 저 녀석과 이분이 맡을 거예요.
하오란과 저 집행자가 맡은 역할은 미끼.
타천자의 이목을 끌 만큼 화려하게 일을 벌이고, 저렇게 교단과의 접선지에서 소란을 피우는 동안 이쪽이 먼저 마인을 발견한다- 그것이 이번 계획의 기본적인 골자였다.
물론 그리 완벽한 작전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오늘 준비된 수는 여럿이었으니 타천자가 어찌 대응하든 덫은 마련되어 있었다.
작전이 시작되기까지 괜히 준비만으로 며칠의 시간을 보냈던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안 그래도, 그때 포획했던 주교. 주세페 베르디로부터 몇 가지 정보를 얻어냈거든요.
솔직히 말해서 테흘리안- 황혼급 주교라는 그자의 행적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판국인지라 그렇게 여유로운 것은 아니었으나, 괜히 급하게 처리하다가 일을 망치는 것보다는 확실하게 타천자를 잡고 싶었던 모양.
하오란을 빼내 오고, 오늘의 작전이 시작될 때까지 우리는 여러 준비를 끝마쳤었다.
물론 준비라고 해도 대부분은 내가 신경 쓸 부분이 아니었고, 내가 담당한 건 오로지 하오란의 교육이었을 뿐이었지만 말이다.
당연히 그것도 말로만 교육이지, 실상은 금제의 주기를 재조정해준 것에 불과했다.
솔직히 나로서도 빠르게 일을 처리하고 싶은 마음은 있긴 했지만, 이번엔 그날 파린칭스에서 여명급 주교를 습격했을 때와는 상황이 조금 달랐고, 테흘리안은 경계심이 깊고 본체마저 숨긴 채로 생활한다고 하니 조금 애매한 구석이 없잖아 있었던 탓이었다.
내가 먼저 발견하면 다행이지만, 단순히 사람들을 들여다보는 걸 넘어서 차원 너머를 들여다보려면 나도 인지하는 과정이 필요했으니, 저렇게 사람이 많은 도시에서 녀석 하나를 구분해내는 건 다소 번거로웠으니까.
그러니 이런 번잡한 계획이 필요했을 뿐.
“······교단··· 주교님······ 도와주십···!!”
“주세페 님이··· 이 개 같은 집······!!”
뭐, 타천자가 지금의 소란을 그냥 무시할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집행자에게 쫓기는 범죄자가, 저렇게 얼마 전 집행기관에 잡혀들어간 여명급 주교의 소식을 떠들어댄다면 어찌 흘려 넘길 수 있겠는가?
하물며 우리가 잡을 마인, 황혼급 주교 테흘리안이 교단의 정보를 담당하고 있다면야. 최소한의 확인은 하러 나타날 게 분명했다.
녀석이 저걸 의심하든 말든, 무조건.
‘그럼 사실상 끝이겠지.’
아니, 직접 나타나진 않더라도 분신체를 만들어내는 것만으로도 조건은 충분했을 뿐.
저렇게 하오란이 사전에 교육받은 대로 주교의 정보를 풀어대면서까지 소란을 피운다면,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을 타천자 또한 그에 반응을 내비칠 수밖에 없을 터였고, 녀석이 어떻게든 마력을 흘려낸 순간- 바로 그 순간이 우리가 녀석을 사로잡을 순간이었다.
물론 그때 녀석을 사로잡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인원도 나뿐만은 아니었고 말이다.
[마력의 패스만 관측돼도 바로 보고해주세요. 이쪽에서도 역추적에 들어갈 거니까요.]
“보고는 하겠습니다만, 말씀드린 대로 마력만 관측돼도 위치는 특정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아무리 눈이 좋아도, 거기서 그렇게 자신할 수 있겠어요?]
“명색이 특성이라. 5km면 충분합니다.”
[뭔 독수리도 아니고··· 일단 알겠어요.]
사실 시간이 조금 필요할 뿐이고, 피곤해서 그렇지 미끼가 없어도 관측은 가능했다.
물론 도시의 넓이나, 그 안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숫자를 생각해보자면, 차원 너머에 숨어있을 타천자를 찾아내기까지 소요될 정신력의 소모가 상당하긴 하겠으나 만상의 눈은 분명 그만한 능력 정도는 갖추고 있었다.
그저 그걸 그대로 드러내는 것도 조금은 거북했고, 겹쳐지는 시야 속에서 타천자 하나를 구분해낼 바엔 이쪽이 편했을 뿐이지.
그렇기에 나는 천천히 시기를 기다렸다.
콰아앙-!! 골목에서 터져 나오는 마력의 소용돌이를 바라보며, 다시 그곳에서 목이 터져라 살려달라고 외쳐대는 하오란의 모습을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그 주변에서 마력의 유동이 발생하는지를 계속 확인해보면서.
‘확실히··· 요란하게 하는군.’
분명 사전에 약속된 대로 연기를 하는 것에 불과했지만, 어째 집행자가 쏘아내는 마력도 그렇고, 도망치는 하오란 녀석도 그렇고, 실제 상황인 것마냥 살벌한 느낌이었다.
당연히, 그런 살벌한 상황에 주변에 있던 이들이 소리치며 도망가기 시작했을 정도.
사실 실제로 잡힌다 한들 녀석이 죽는 일은 없겠지만, 보다 연기에 몰입할 수 있도록 금제의 주기를 조절해놨기에 하오란의 입장에선 상당히 애가 타들어 가고 있을 터였다.
“······제발··· 적당······ 이제 그만··· 좀!”
아니, 일단 괴로운 것 자체는 맞아 보였다.
마치, 정말로 잡히기라도 하는 순간 제 목숨이 끝난다는 것처럼, 절박한 심경으로. 녀석은 누가 봐도 쫓기는 듯한 태도로 도시를 헤집는 중이었고, 나는 그런 소란의 중심지를 기점으로 열심히 마력을 관측해보았다.
“······.”
녀석의 분신도 능력인 이상, 분명 거리의 한계가 있을 터였고, 하오란이 소란을 피우는 저 장소로 접근하려면 분명 녀석의 본체 또한 최소한 저 근처까진 다가가야 하겠지.
생각보다 어려워 보이는 조건은 아니었다.
물론 차원 단면의 틈새에 숨어, 100m 바깥에서만 분신을 내보내도 어지간한 능력자라면 발견하기조차 힘들었을 테고, 하물며 이런 거점도시에선 다른 도시처럼 헬기나 드론 같은 걸 띄워봤자 바로 티가 날 터였으니 나 같은 특성이 아니라면 찾기 힘들 터였다.
거기에- 애당초 집행자는 숫자도 그리 많지가 않았고, 인적 자원은 항상 부족했기에 이번 작전에도 겨우 1명만 보충되었을 정도니, 이들끼리라면 더 어려웠을 테고 말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하긴 하지.’
뭐, 이번 작전의 책임자 자체가 라피냐에, 나도 있으니 사실상 하이랭커급만 2명이 동원된 상황인 만큼, 진시우까지 고려한다면 멸화급 마수가 나타난다고 해도 최소한 시간은 끌어볼 수 있을 만한 전력이기는 했다.
물론, 토벌까지는 다소 힘들겠지만···.
어쨌든 일개 타천자라면, 멸화급 주교라 해도 문제없었으니- 일단 녀석의 모습만 보이면 작전은 종료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놈을 포획하면 여러 과정을 거쳐 정보를 뽑아낼 수도 있을 테고 말이다.
하여, 나는 계속해서 정신을 집중하였다.
“······.”
만약의 만약, 변수는 언제 어디서나 존재했고, 나로서는 그러한 변수를 원하지 않았으니 최대한 2학기 전에 그림자 교단의 여력을 최대한 상실시키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자잘한 주교급은 모조리 죽이고, 다시 위험이 될만한 멸화급 주교도 죽이고, 녀석들의 연구시설과 결과물도 전부 다 파괴한다.
그것이 내가 이 협업에서 원하는 목표.
적어도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것 같았으니, 허나 혼란한 마음의 길이 어디로 향하게 될지는 아직은 잘 모르겠기에, 적어도 선택의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나의 바람이, 그대로 현실로서 자리하기를 바라며- 그걸 위해 나는 이곳에 와있는 것이었다.
그날 밤, 내 입에서 흘러나왔던 말들은 분명 모두 진심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니까.
괜스레 다시 번민이 일어나는 기분이었다.
“······.”
그리고 그렇기에- 빠르게 복잡해지는 마음속에 만상의 눈이 수 킬로미터 미터의 거리를 격하고, 저 어두운 골목 한구석에서 일렁이는 그림자의 형상을 관측해낸 순간, 그 잿빛의 마력이 대기를 일그러트리던 순간.
바로 그 순간.
“······찾았습니다.”
쾅-!! 내 몸은 이미, 입이 열리기도 전에 자리를 박차고 뛰어내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
색채가 빠져나간 잿빛의 세계.
까드득··· 카득. 꾸드드득.
아니, 차원의 축에서 한 발짝 벗어나 일그러진 틈새에 잠겨 있는 한 남자. 그림자 교단의 황혼급 주교- 테흘리안 뫼니에는 지금 다소 중요한 고민에 휩싸여 있는 상태였다.
타천자 빠르게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주세페 베르디··· 역시 잡혔던 건가.]
분명 저 위대한 그림자. 교주님께서 저희에게 내렸던 명령은 행적을 숨기라는 것이었고, 그 이후 그분께선 더 아무런 말 없이 그대로 심연 속으로 들어가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몸을 숨길 수도 없는 노릇.
그렇기에 다른 교인들보다 더 은밀한 행동이 가능한 저 자신만큼은 혼란스러운 정국을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다시 존귀한 그림자가 계획하고 있던 테러의 준비만큼은 차질없이 진행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도, 이렇게 몸을 숨긴 채 정보를 그러모으는 중이었다.
테흘리안 저 자신은 다른 집행자와 공략자들에게 들키지 않고, 얼마든지 교단을 위해 정보를 모을 능력이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순간.
“그, 그림자시여···! 주, 주세페 님께서··· 크아악!! 제, 제게··· 꼭 전하라고 한 말이···!”
“미친 새끼. 허공에다 뭔 지랄이야.”
우웅··· 콰아앙-!!
난데없이 나타난 마인 나부랭이가 행적이 묘연해졌던 여명급 주교- 주세페 베르디의 이름을 언급하며 도와달라는 듯 소리치고 있었고, 그런 녀석을 쫓고 있는 건 분명 아무리 봐도 집행기관의 집행자 같아 보였다.
솔직히 말해서, 실로 당황스러운 상황.
[······.]
물론 아무리 봐도 교인 같지는 않았기에 구태여 저걸 도와줄 필요는 없었고, 설령 교인이라 한들 말단을 위해 주교급인 자신이 위험을 무릎 쓸 이유 따윈 하나도 없었다.
허나, 주교급이 집행기관에 잡혀들어간 상황이라면, 다시 정말로 저 녀석이 중요한 전언을 들고 온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렇기에 마인은 저울을 기울여 보였다.
집행자의 무력 수준과 저 상황의 이질감. 혹시나 하는 가능성과 여러 변수 속에서도 저 자신의 안위를 챙길 수 있을지- 타천자는 빠르게 여러 사항들을 고려해나갔을 뿐.
솔직히 말해서 딱히 위험해 보이진 않았으나, 왠지 모르게 본능이 간지러워지는 기분.
하지만 혹시나 해 데이터베이스를 확인해보니 쫓기는 녀석은 연맹의 블랙리스트에 얼굴이 등록되어 있는 범죄자였고, 그런 녀석을 공격하는 집행자의 마력에도 분명 강대한 살의가 실려 있었으니 저 상황이 아예 거짓말처럼 느껴지지만은 않았을 따름이었다.
그러므로.
[······쯧.]
이내 그는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우우웅···!
아무리 봐도 집행자의 무력 수위는 하위권 등천자 정도밖에 안 돼 보이고, 설령 조력자가 있다고 한들 자신의 특성과 위대한 이로부터 부여받은 능력을 꿰뚫고 제 본체를 찾아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전혀 안 들었다.
그렇다면, 만약 자신이 쓸데없이 겁먹고 놓쳐버린 이 상황이, 나중에 알고 보니 정말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그는 그 실책을 감당해낼 자신 따윈 없었다.
저런 비루한 마인과 집행자보단, 위대한 그림자를 실망케 하는 게 더 무서웠으니까.
하여- 그는 서서히 그림자를 일으켰다.
고오오오오···.
이목구비조차 존재하지 않는 사람의 형상.
오로지 그림자로만 이루어진 분신체로서.
비록 본체의 좌표는 한참을 떨어진 골목 어딘가에 위치해 있었으나. 그는 저 소란스러운 동선이 향하는 방향. 그 한구석에 있는 골목길 어귀에서 은밀하게 마력이 몰아쳤고, 그대로 어둠 속에 녹아든 채로 현신했다.
“···주, 죽겠습니다···!! 어, 어서···! 저를!”
“마인 주제에 질기기도 하군.”
물론 은밀한 마력의 운용은 그가 타천하기 이전부터 자신 있어 하던 장기였으니, 저 둘은 그 변화를 눈치채지도 못하고 있었을 뿐.
하니, 생각보다 상황은 간단했다.
[······한심한 것들.]
테흘리안은 그것을 인지한 채, 그대로 허공에 분신을 녹여내 그림자에서 그림자로. 저 시끄러운 잔챙이와 거슬리는 집행자의 발밑으로 서서히 제 분신을 이동시켜보았다.
비록 썩어도 준치라고, 집행자에게 발각당하지 않기 위해 천천히 준비하고 있었으나, 저 분신이 녀석들의 발밑에 도달하는 순간.
바로 그 순간- 구현된 마력이 집행자의 목을 갈라버릴 터였고, 그 즉시 테흘리안 자신은 분신체를 통해 저 시끄러운 놈에게 주세페의 전언을 전해 들으면 그만인 일이었다.
물론 그 이후 또 다른 집행자나, 혹은 다른 위험 거리가 생길 수도 있겠으나 그건 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야기지 않겠는가?
그는 한순간에 집행자를 죽이고, 그대로 정보만 전달받고선 도시를 떠날 계획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간 이곳에다가 쓸만해 보이는 녀석들 위주로 정보를 모아오도록 만들어놓은 인프라가 아깝기는 했으나, 이렇게 된 이상 집행자가 몰려올 게 뻔할 노릇.
잔챙이들이야 상관없었으나, 그 서리백귀가 직접 찾아온다면 그로서도 대응할 수단이 없었고, 어차피 도주를 해야 한다면 교주님의 말씀도 있었으니, 굳이 불필요한 교전을 이어나갈 필요성이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사실 아예 무시하면 그만이긴 했지만, 만약의 만약까지 고려했을 때- 인프라를 다시 구축하는 건 귀찮을 뿐이지 어려운 게 아니었으나,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었다.
하니, 그로서는 지금 최선을 다해볼 뿐.
만약 저 녀석이 들고 온 정보가 쓰잘데기 없는 것이라면 시끄러운 입까지 같이 베어 죽여버릴 생각이었으나, 일단 어떠한 정보길래 저리 소란을 치나 확인은 해봐야만 했다.
안 그래도 근래에 들어서는 주교들의 소식마저 자주 끊어지고 있는 듯하였으니까.
이미 영혼을 넘어, 정신의 모든 면이 심연에 잡아먹힌 마인에게 중요했던 건 저 자신의 노고보다는 오직 심연의 뜻이었으니까.
[모든 것은 위대한 그림자를 위하여···.]
그러므로.
“크, 크아악!! 어서··· 제··· 흡?!”
“시끄러운 녀석. 언제까··· 아.”
쿠루루룩-!!
어느새 가느다란 전깃줄의 그림자를 타고 흘러 들어간 테흘리안의 분신체는, 그렇게 단 한 순간에 그곳에 제 형상을 드러내었다.
마치 끈적한 진흙이 몸을 일으키듯이, 오로지 어두운 잿빛으로 뒤덮인 사람의 형상을. 불현듯 솟구쳐 올라온 그림자의 장막을.
두 사람이 인지하기도 전에, 한순간에.
“······.”
“······.”
그리고는 즉시- 검은 선을 그어냈으니.
서걱-!
그 순간- 순식간에 그림자에서 뻗어진 잿빛의 궤적이 집행자의 목을 스쳐 지나갔다.
그것도 무언가 베여 나가는 소리와 함께.
“······!!”
그에 집행자의 몸이 멈칫하며 뒷걸음질 쳤고, 그 모습을 지켜본 하오란은 두 눈을 놀란 듯 치켜뜨며 타천자의 팔을 바라보았다.
물론 테흘리안은 그림자의 팔이 휘둘러진 찰나, 그와 동시에 들려온 절삭음에 거리가 조용해지는 것을 느꼈으니, 방해물을 치워낸 마인은 그대로 하오란을 응시하였을 뿐.
당연히, 본체가 아닌 분신체로서 말이다.
[자. 정보를 말해 보아라.]
“······?!”
그리고는- 곧바로 그렇게 말을 건네었다.
집행자를 단번에 죽이긴 하였으나, 역시 더 일을 벌이는 건 번거로웠기에 그는 재빨리 대답만 듣고 사라질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를 불러대며 소리를 외쳐댔던 녀석이, 막상 제 분신이 나타나니 입을 다물곤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으니- 타천자의 미간이 살며시 꿈틀거렸다.
설마 놀라서 입이 굳어버린 것일까?
테흘리안은 불쾌해진 기분 속에 손을 들어 올렸다. 아무래도 시간이 없었기에 직접 정신을 차리게 해줄 생각이었던 탓이었다.
물론, 다소 거친 방법으로 말이다.
하지만.
[······?]
훙- 분명 하오란의 머리를 후려치기 위해 휘두른 팔이었건만, 그의 팔은 아무렇지 않게 녀석을 스치고 지나갔고, 그 순간 그는 마치 허공을 때린 듯한 붕뜬 느낌을 체감했다.
그러니까. 마치 제 팔이 사라져버린 듯한. 그런 무언가, 굉장히 이질적인 기분을···.
[아.]
아니, 아니었다. 정확히는 그게 아니었다.
그 순간- 타천자는 그제서야 본체와 겹쳐져 있던 감각을 인지해낼 수 있었을 따름.
아니, 정확히는 제 본체와 연동되어 있어야 할 분신체의 팔이 무언가에 베어져 나간, 있어야 할 손이, 사라져버린 그 모습을- 그는 뒤늦게나마 그 사실을 인지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
느슨하게 풀어져 있던 타천자 테흘리안의 본능은 한순간에 조여졌고, 그 순간 그는 멀쩡히 목이 붙은 채로 놀란 표정을 한 채 제 분신체를 바라보고 있는 집행자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으니, 마인은 느려진 세계 속에서 빠르게 감각을 합치시켜나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
분명 제 귀에 들려온 건 피륙이 베어져 나가는 소리였으나, 분명 베어져 죽었어야 할 집행자는 저리 멀쩡히 서 있었고, 그렇다면 그건 다른 것이 베여나갔다는 것이었으니.
지금- 이 상황에서 그게, 베여나간 무언가가 의미하는 건 단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바로- 차원의 틈새, 그 너머에 있던 저 자신. 잠시 무방비하게 방치되어 있던 제 육신. 제 본체가 베어져 나갔다는 것.
그리고- 그건 분명 정확한 추측이었다.
[······.]
불길했던 타천자의 예상은 그대로 들어맞았고, 본체로 되돌아온 그의 감각은 통증조차 없이 한순간에 베여나간 제 팔을 뒤늦게나마 인지해낼 수 있었으니. 타천자는 과부하 되는 의식 속에 그 눈을 마주하게 되었다.
“느리군.”
아무런 감정조차 담겨있지 않은.
검디검은, 칠흑빛의 눈동자를.
“한심한 녀석.”
서걱-! 다시 한번 들려오는 소리 속에. 왜곡되는 차원의 틈새에서, 흩날리는 자신의 팔뚝을 바라보며, 마인은 그렇게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