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면순례자 (3)
나를 빤히 바라보는 라피냐의 시선.
어째 약간은 어이없어 보이기도 했고, 당황스러워 보이기도 했으며, 한편으로는 굉장히 의아해하는 듯한 눈빛이었는데, 지금 보여준 모습이 모습이었던지라 그런 라피냐의 반응에도 나는 담담히 시선을 마주해주었다.
그러자 잠시 내려앉는 미묘한 침묵.
“······.”
“······.”
물론 나로서도 지금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가 예상되긴 했지만, 그럼에도 내가 조심해야 할만한 구석은 딱히 없었다.
말했듯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이런 부류의 잡기는 어느 정도 세월이 쌓여있는 무문이라면 모두 어느 정도 간직하고 있을 터였고, 넓게 따지자면 무인들이 흔히들 사용하는 점혈 또한 이와 비슷한 맥락이었다.
그저- 이렇게 심문에도 사용할 수 있을 만큼 확실한 효과를 갖고 있는 게, 그러니까 금제라 불릴만한 기술이 흔치 않았을 따름.
“···그··· 사문이 굉장히 궁금해지는군요.”
신체에 대한 이해와 기를 다루는 조예. 거기에 의념이라는 상승 무학의 세계에 발을 들여야 그나마 시도라도 할 수 있을 터였고, 이건 그런 수준의 무인들이 주기적으로 나타나고, 그런 자들이 계속해서 연구하고 그 결과를 보존을 해왔어야 가능한 결과였다.
그러니, 일반적으로 생각해보면 의아해하는 것도 딱히 이상한 건 아니었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나는 당당했다.
“말씀드려도 모르실 겁니다. 원래의 활동반경도 지금의 심연지대였던 데다가, 어지간해선 속세에 나서지 않는 곳이었으니까요.”
“······속세.”
애초에 이건 그저 당연한 이야기였다.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증명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지만, 반대로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부정하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었다. 확실하지 않다면, 확신할 수도 없을 테니까.
그러므로- 이러한 역설 또한 가능했을 뿐.
“아주 오래전, 위구르- 지금은 잠식당한 티베트에서 싹트고 있던 불가의 깨달음을, 다시 무를 수양해왔던 시조께서 이어받아 그 심득을 통해 구도의 무문을 만드셨습니다.”
“구도··· 요?”
“예. 깨달음을 수양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교적으로도 세월이 깊다고 말씀드린 것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비록 그로 인해 속세에서 활약하는 일은 없었지만요.”
“······.”
“하니, 저희 무문은 어지간해서는, 아니 무련이라 해도 알 수 없을 만한 곳입니다.”
내 스스로, 내가 자라온 무맥이 그러하다 주장한다면야 누가 뭐라 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당사자가 그렇다고 주장하는데 다른 이가 이상하다 하는 것도 웃기는 노릇이었고, 역설적일지언정 내가, 내 존재와 행동이 그러한 증명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결국 그걸 의심하고 불신하기 위해선 나를 부정하고, 실존하지 않는 증거를 찾아내야 했으니- 그렇기에 나는 당당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나를 증명하는 것은 나의 행동이었고, 나는 비밀이 많을지언정 마인과 맞서 싸우고 있는 공략자였고, 다시 생도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걸 증명하듯이 라피냐는 내 말에 굉장히 아리송해진 표정을 지어 보였다.
“······굉장히··· 신기하네요.”
“흔치 않은 경우긴 할 겁니다.”
뭔가 의문쩍어 하는 것 같긴 했으나, 아무래도 정확히 뭐가 이상한지는 모르는 모양.
애초에 무림의 생리와 역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이라면 내가 한 말이 그렇게 불가능한 경우만이 아니라는 걸 이해할 수 있을 터였고, 반대로 무림이란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라면 내 말에 할 말이 없을 터였다.
하물며 그러한 말을 한 사람이, 당사자가 나와 같은 경우라면 더욱더 그러하겠지.
적어도 내가 무공을 익혀 이러한 실력을 지니고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고, 다시 마인을 베어내기 위해 여기에 와있는 것이었기에, 이건 그저 당연한 결과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이게 뭔··· 경력직 신입도 아니고.”
이내 라피냐도 할 말이 없어졌는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저가 시키긴 했지만, 무척이나 당당하게 행한 내 태도도 그렇고, 아무렇지 않게 당연하다는 듯 대답한 내 반응에도 결국은 납득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 그녀는 다소 미묘해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작게 투덜거리면서 제 손에 있던 카드를 내게 던져주었고 말이다.
“쯧··· 설마 진짜 주게 될 줄은 몰랐네요.”
어쨌든, 그렇게 라피냐의 손에 들려있던 은색의 카드가 내게 휙- 하고 날아왔으니, 나는 별다른 반응 없이 그걸 낚아채 주었다.
지금 라피냐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과 행동을 봐선 내게 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니, 나는 빠르게 그것을 살펴보았다.
“······이건?”
은은한 마력이 흘러나오는 아티팩트- 아무래도 여러 마법이 부여되어 있는 듯한 직사각형의 카드였는데, 그래서인지 마치 회랑의 학생증과도 같은 느낌이 풍겨 나왔다. 아니, 지금 이 상황의 맥락을 생각해보자면 아마도 이건 일종의 신분증 비슷한 물건 같았으니 그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터였다.
그저 학생증보단 조금 더 튼튼하고, 여러 마법적인 처리가 가해져 있는 듯했을 뿐.
내 추측을 증명해주듯 카드의 뒷면에는 세계연맹의 심볼과 더불어, 처음 보는- 아마도 이면순례자를 상징하는 듯한 심볼과 집행기관을 의미하는 심볼이 복합적으로 뒤섞여 새겨져 있었고, 양각과 음각이 교차하며 마력 패턴까지 새겨져 있었으니- 척 봐도 함부로 위조하기가 불가능해 보이는 물건이었다.
그리고- 내가 그런 생각을 떠올린 순간.
“임시지만 집행자 대행증이에요.”
“대행증?”
바로 그 순간- 라피냐는 담담해진 목소리로 대답을 건네왔고, 그리고는 이내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내게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예. 대행증입니다. 물론 사실상 집행자의 자격을 드린 것이라 봐도 무방할 거예요. 정식기관에 협조를 요청할 수도 있고, 정당한 사유가 있다면 어지간한 위법행위는 무마하실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일반적인 공략자나 시민들은 알아보지도 못하겠지만요.”
“······.”
“그래도 기관 이용 시, 알아보는 사람은 없더라도 대부분의 리더기에선 인식이 될 겁니다. 검사기에 한번 띡- 찍고, 스캔이 되면 끝입니다. 그럼 아무것도 묻지 않을 거예요.”
나는 그 설명에 다시 카드를 바라보았다.
일종의 비밀 신분증, 아니 공무수행증인 모양- 생각보다 유용해 보이는 물건이었다.
물론 어지간한 경우라면 등천회랑의 학생증만으로도 신분은 충분히 증명되겠지만, 내 얼굴도 이젠 상당히 알려진 바였고, 은밀하게 움직일 때 신분을 드러내기에는 여러모로 껄끄럽게 느껴지는 부분이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집행자라면 대부분의 상황에선 따로 신분을 밝히지 않아도 넘어갈 수 있을 터.
물론 권한이 권한인 만큼, 어지간해서는 따로 기록이 남을 것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상황에 따라 유용하게 쓸만한 신분증이었다. 적어도 임시라지만 이렇게 턱- 내게 건네준다는 게 다소 미묘하게 느껴질 만큼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내 심경이 표정에서 드러났는지 라피냐는 약간 떨떠름해 보이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이내 말을 덧붙였다.
“원래는··· 정말 바로 줄 생각은 없었어요.”
“······그런데 왜 주신 겁니까?”
“그야 이쪽이 효율적일 테니까요. 능력을 보여줬으니 이 정도는 해드려야겠지요? 실력으로 보나, 성격으로 보나, 가진 능력으로 보나, 이 정도 대우는 필요해 보이잖아요.”
“그런 이유라면 알겠습니다.”
나는 태연하게 대답을 돌려주었고, 그에 라피냐는 한 번 더 눈을 깜빡거렸으니, 그녀는 다시금 작게 혀를 차며 입을 열어왔다.
“그거, 정말 원래라면 발급도 잘 안 나오는 자격이니까, 괜히 잃어버리지만 마세요.”
“예. 그럴 일은 없습니다.”
“······그럼 일단 마력을 주입해보세요.”
상당히 떨떠름해 보이는 목소리긴 했지만, 나는 그녀의 말에 그대로 카드에 내력을 주입해보았다. 그러자 카드에 부여되어 있던 마법이 반응하며 허공으로 피어나오는 빛.
우웅- 백색빛이 부드럽게 선을 수놓았다.
물론 산란하는 빛이 만들어낸 형상은 이면순례자를 나타내는 듯한 심볼이었으니, 순간적으로 내 머릿속엔 지난번 내게 주었던 명함도 그렇고, 이 기관은 참 이러한 종류의 장치를 좋아한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나름대로 이면 기관이라고 이런 비밀스럽고, 신비해 보이는 연출을 좋아하는 모양.
그런데, 문득 드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혹시 모바일 증명서는 없습니까?”
“······예?”
“아··· 없나 보군요. 아닙니다.”
순간 무련에서의 일이 떠올라 물었더니, 라피냐가 뜬금없이 뭔 소리냐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기에 나는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하긴- 권한이나 중요성을 생각해보자면 모바일보다는 마법적 처리가 가해진 실물로 보안 절차를 거치는 게 더 나을 거란 생각이 들긴 했다. 한 가지 보안보다는 마법과 물리적인 보안을 같이 거치는 게 더 효율적일 터.
‘······비슷한 거 아닌가.’
아니, 사실 이 세계에는 별의별 이능이 있는 만큼 딱히 이것도 마냥 안전하다고는 보긴 힘들었으니, 그냥 아무래도 이면순례자는 이런 걸 좋아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혹은 의외로 무련이 정규 기관치곤 시대의 흐름을 잘 따라가는 걸지도 몰랐고 말이다.
어쨌든, 그래도 신분증의 형태라면 옥패 같은 것보다는 조금 더 보관이 용이하긴 했기에 나는 그대로 암야의 소매를 변형시켜 그대로 카드를 속에 집어넣었을 따름이었다.
어차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까.
“그것보다··· 일단 그럼 계속하겠습니다.”
잠시 모종의 사유로 인해 딴 길로 새버렸으나, 일단 하고 있는 일이 있지 않았던가?
나는 그 부분을 언급하며 가만히 마인을 바라보았고, 그러자 라피냐도 원래의 목적을 다시 떠올렸는지 바로 내게 답해주었다.
“음···? 아, 예. 뭐··· 필요 없을 것 같지만, 일단은 거기까지만 하고 마무리하죠 그럼.”
“예. 공을 들였으니 결과는 봐야겠지요.”
나는 대답과 함께 마인을 살펴보았다.
마침 마인의 손도 슬슬 꿈틀거리기 시작한 상황. 잠시 대화를 하는 동안 회복이 되어버리는 게, 확실히 혈마공은 혈마공이었다.
그러니 일단은 마무리까진 해줘야겠지.
물론 나도 이 녀석이 쓸만한 정보를 뱉을 거란 생각은 안 들었지만, 이왕 심문을 진행한 거 잔뜩 괴롭히고서는 묻지도 않고 가버린다면 이 녀석은 또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사실 이 녀석의 심경 따위야 알 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마무리까지는 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나는 차례대로 혈을 자극해 녀석의 의식을 자극하였고, 회복되고 있는 듯한 마인의 정신을 강제로 각성시켜주었을 뿐.
우우웅- 꾸드득.
그리고 그렇게.
“웁···!!”
투둑- 마인의 혈도에 기를 불어넣자마자 바로 반응이 일어났고, 그렇게 마인 녀석도 정신이 깨어났는지 번쩍 눈을 떠 보였으니, 경기를 일으키듯 깨어난 녀석과 눈이 마주친 나는 그대로 자연스레 손을 들어 올렸다.
일단 한차례 과정을 거치긴 했으나 제대로 정신을 차리게 하려면, 조금은 더 명확하게 상황을 이해시켜줄 필요성이 든 탓이었다.
아직은 정신이 멍해 보였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내 손이 마인의 머리에 맞닿았고, 그러자 녀석의 눈이 천천히 깜빡거렸으니.
“······.”
“······.”
그리고는- 바로 그 순간.
“······세, 세로데··· 세로데···!!”
마인의 입에서 뜬금없는 말이 튀어나왔고, 녀석은 더는 괴롭히지 말아 달라는 듯이, 내가 손이라도 쓸까 두렵다는 듯이, 정신을 차리자마자 그렇게 큰 목소리로 소리쳐왔다.
그것도 꽤나 흥미로운 말을 외쳐대면서.
지진이라도 난 듯 두 눈을 떨어대면서.
“······세··· 세로데파스코에 있습니다!!”
진심이 가득 담겨있는 표정으로 말이다.
***
뭐라고 해야 할까- 예상외의 수확.
“···마, 말한다고 했··· 데, 사실대로 말했는데 대체 왜, 왜 계··· 시발··· 진······ 쯬!!”
그렇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교차 검증을 끝낸 나는 수고한 녀석의 머리를 두들겨 다시 재워주었고, 그대로 고개를 돌려 말없이 심문을 지켜보고 있던 라피냐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라피냐는 심각해진, 그러면서도 다소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을 뿐.
“이건··· 조금, 많이 당황스럽군요.”
갑작스럽게 정보가 하나 더 생겨났다는 게 당황스러웠던 걸까, 아니면 이미 심문을 거쳤던 마인에게서 새로운 정보가 토해져 나왔다는 게 어이가 없었던 걸까- 라피냐의 표정이 굉장히 오묘한 기색으로 변해간다.
물론 나도 조금은 어처구니없긴 했다.
이 녀석··· 심문을 할 때 자꾸 뭘 말한다고 외쳐댔던 게, 그냥 아파서 아무 말이나 한 게 아니라 정말 말할 게 있어서 그랬던 걸까?
엄살을 부린다 싶었는데 아니었던 모양.
다 말한다고 해봤자 딱히 신뢰는 안 갔기에 그냥 계속 금제를 가했었는데, 그게 상당히 괴로웠던 모양인지 마인 녀석은 정신이 회복되자마자 우리에게 흥미로운 정보를 말해주었고, 그렇게 갑작스러운 녀석의 외침에 나는 한 번 더 놈을 심문해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일단 정보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세로데파스코에 접점이 하나 있는 모양이군요.”
이런 조무래기의 입에서 주교급의 행방이 나왔다는 게 조금 당혹스럽긴 했으나, 일단 녀석이 토해낸 말이 거짓 같진 않아 보였다.
근육의 이완 상태, 동공의 움직임, 말을 할 때마다 빠르게 변해가던 녀석의 표정까지.
이게 연기라면 녀석의 특성은 연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만약을 대비해 심문의 강도를 올려주었더니 녀석이 내비친 반응은 분명 진심이 가득 담긴 절규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물론.
“예···. 일단······ 은 맞는 것 같네요.”
이면순례자의 부단장인 라피냐에게는 이 상황이 다소 미묘한 모양이었고 말이다.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한 진시우의 표정과는 대비될 정도로, 그 잠깐의 시간 동안 다채로운 심경의 변화를 그 얼굴에 내비쳤던 라피냐는 이내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어왔다.
“······기본적으로, 저희의 심문 체계에는, 거짓을 판별하는 특성을 지닌 프로파일러와 자백을 유도하는 아티팩트가 같이 쓰이고, 마법적인 수단부터 시작해서 나름대로··· 그, 여러··· 첨단 기술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그래서, 나름대로 이미··· 다 거쳐서, 설마 이런 경우는······ 미처 고려치 못했었는데.”
하지만- 라피냐가 허탈한 듯 읊조렸다.
“직접적인··· 폭력이 가장 뛰어났군요.”
“예로부터 효율적인 대화수단이었지요.”
아무래도 이 상황이 다소 충격적인 모양이었는데, 나 또한 나름대로 그녀의 심경이 이해가 되었기에 심심한 위로를 건네주었다.
물론 별 효과는 없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이게··· 뭔······.”
사실 저러한 반응이 이상한 건 아니었다.
물론 이 세계가 현대라 한들, 집행기관쯤 되면 인권 같은 건 다소 무시한 채 일을 진행할 터였지만- 침식 마인과 다르게 이런 녀석들은 그래도 범죄자일 뿐이지 사람이란 건 맞았기에 어느 정도 선이 존재했을 터였다.
하물며 내가 마인에게 한 짓은, 사실 일반적인 폭력이라기에도 다소 미묘했을 따름.
아마도 이 녀석은 마법이나 심리적인 트랩에는 나름대로 저항이 있었던 모양이었지만, 이렇게 직접 내부에서부터 뒤집어 엎어버리는 데에는 다소 약했던 게 아닐까 싶었다.
사실 암영비천대에서 활동할 당시에도 생각보다 고문에 잘 버티는 놈이 있는가 하면, 못 버티는 놈이 있었고, 다시 다른 건 다 잘 버티면서도 이상한 부분에서 약해지는 놈도 있었기에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바였다.
게다가 나 또한 쓸 수 있는 수단이 이것이었기에 직접 손을 쓴 것이지, 만약 더 발전된, 여러 이능이 겸비된 수단이 있었다면 원초적인 수단은 뒤로 밀려나지 않았겠는가?
이런 조무래기 하나하나에 일일이 신경을 쓸 만큼 인력이 여유 있어 보이진 않았고, 마법 하나면, 이능 하나면 해결될걸, 굳이 직접 피를 보려고 나서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을 테니 어느 정도 납득이 되는 상황이었다.
“······역시··· 튜닝의 끝은 순정···.”
물론, 정작 이 상황을 목도한 라피냐의 상태는 다소 이상해 보이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중요한 건 어떤 수단이 마인을 괴롭히는데 효율적이냐가 아니었고, 우선은 새로 알게 된 정보를 정리해보는 게 중요하였기에 나는 가볍게 손을 튕겨보았다.
딱!- 그러자 동시에 내게로 향하는 시선.
“우선 지금 들은 걸 정리해 봐야 될 것 같은데, 혹시 이와 관련된 정보는 더 없습니까?”
“······아.”
내 말에 라피냐가 눈을 깜빡거린다.
“황혼급 주교가 그 도시에 나타난다고는 해도, 이 녀석의 얘기를 들어보니 타이밍을 맞추기가 쉬워 보이지는 않아서 말입니다.”
“그, 그렇군요··· 일단, 새로운 정보를 얻었으니 그것부터 먼저 정리해 봐야겠네요.”
그리고는 이내, 제 얼굴 위에 올라와 있던 당황이 담겨 있던 표정을 빠르게 치워버렸으니, 어이가 없는 건 둘째치고서라도 당장 본분마저 헷갈릴 정도는 아닌 모양이었다.
한순간에 표정을 가다듬은 그녀는 이내 잠깐의 생각 끝에,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일단, 세로데파스코에 나타난다는 황혼급 주교가 이 녀석의 말한 대로 테흘리안 그자라면 확실히 쉽지는 않을 거예요.”
“테흘리안···. 유명한 자입니까?”
“유명··· 하다면 유명하다 해야겠죠.”
라피냐는 그 말과 함께 빠르게 제 워치를 두들기기 시작했고, 그리고는 이내 허공에 홀로그램을 띄어 올리며 질문을 건네왔다.
“교단에 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시나요?”
“자세히는 모릅니다. 그저 침식에 관해 광신적인 면모를 보이고, 잿빛탑의 등급을 딴 타천자가 여럿 있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예. 일단 중요한 건 그게 전부에요. 기본적으로 교단이라 칭하는 만큼, 녀석들은 다른 마인들과 다르게 광신도들이라 해도 무방하고, 그렇게 침식을 소망하는 마인들 중에 타천자가 꽤 많이 섞여 있을 뿐이니까요.”
내 말을 들은 라피냐는 그런 대답과 함께 홀로그램을 조작하며 설명을 덧붙였다.
“하지만, 그 타천자의 숫자가 중요한 겁니다. 교단의 마인들에겐 멸화급의 칭호를 딴 주교가 하나, 황혼급의 이름을 칭하는 주교가 셋, 마지막으로 여명급 주교라 불리는 타천자가 보통 다섯 정도나 있으니까요.”
“이젠 넷이겠군요.”
“예? 아, 그렇겠지요. 하지만 여명급 주교는 생각보단 항상 빠르게 보충이 되더군요.”
허공에 떠오른 형상이 몇 가지 사진으로 변화했고, 그곳에는 흐릿하게 찍힌 누군가의 모습이라든가, 혹은 멀쩡하게 사람들 사이를 거닐고 있는 모습 같은 게 찍혀 있었다.
“일단, 이게 현재 주교급을 자처하며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타천자들의 모습이에요. 물론 제대로 사진이 찍힌 적 없는 자들은 타천 이전의 사진을 가지고 온 것이지만······ 사실 이런 게 교단의 가장 큰 문제점이겠지요.”
“······계속 보충이 된다는 것?”
“예. 오직 하나의 목적을 갖고 있는, 한 개의 단체에, 어떠한 상황에서도 열이 넘는 타천자가 발을 들이고 있다는 건···. 분명 무척이나 위협적이라 볼 수 있을 테니까요.”
나는 빠르게 녀석들의 얼굴을 기억했다.
이제까지는 사건에 휘말리는 대로 마인과 전투를 벌였고, 직접 찾아가 사냥했던 자들은 전부 조무래기 수준에 불과했지만- 이렇게 얼굴을 기억해둔다면 추후 마인사냥을 하는 데 있어서 어느 정도 도움이 될 터였다.
적어도 상대가 누군지만 알고 있더라도 그냥 죽일지, 아니면 사로잡을지 정도는 빠르게 결론을 내릴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물론 지금도 세계 곳곳에선 3천에 가까운 등천자가 활동하고 있고, 그 비슷한 수준에 이른 초인들은 더 많이 존재하고 있어요.”
하지만- 라피냐는 가볍게 말을 덧붙였다.
“문제는 세계가 너무 넓고, 침식은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이기에 어지간해서는 여럿이 모이는 일이 그리 많지가 않다는 것, 교단의 테러는 그러한 전력의 공백을 너무나도 손쉽게 뚫어내서 발생한다는 점이에요.”
“능력 때문이군요.”
“예. 그림자 교단의 타천자들은 대부분 공간계 능력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건 분명 나도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물론 그렇게 비중 있게 다뤄진 설정은 아니었기에 승천제 당시에는 곧바로 떠오르진 않았지만, 사실 그때 상대했던 놈들도 다 공간과 관련된 이능을 가지고 있긴 했었다.
내 기억에 따르면 녀석들은 교주로부터 별도의 능력을 부여받는다고 들었을 따름.
그리고.
“물론, 전부 후천적인 이능이지만요.”
라피냐가 그런 내 생각을 긍정해주었다.
“정확한 특성은 모르겠으나 그림자 교단의 교주는··· 타인에게 이능을 부여하는 힘을 갖고 있는 걸로 추정되고 있고, 타천자, 즉 주교급은 전부 다 교주에게 특성을 부여받아 공간계 능력을 추가로 각성하게 됩니다.”
“아, 마력 패턴까지 바뀐다 들었습니다.”
“그걸 말인가요···? 대체 어디서······?”
나는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돌려 진시우를 바라보았고, 그에 녀석은 라피냐와 시선을 마주하지 않겠다는 듯 사진을 바라보았다.
물론- 그에 라피냐는 헛웃음을 흘렸을 뿐.
아마도 내가 없었다면 한소리를 하지 않았을까 싶었다만, 그게 아니었기에 그녀는 잠시 무언가 고민이 되는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이내 작게 고개를 내젓고선 아무렇지 않게 다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뭐, 어쨌든, 그래서 교단의 타천자들에겐 모두 공통적으로 차원 단면의 틈새로 진입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테흘리안은 그걸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편입니다.”
“효과적이라면··· 어떻게 말입니까?”
“본체는 차원 단면의 틈새에 숨긴 채로, 분신체만 현실에 내보내서 활동하거든요.”
그녀는 그 말과 함께 떠올라 있던 사진 중 하나를 가리켰고, 그곳에는 사람이 아닌 일렁이는 그림자의 형체가 찍혀 있었다.
아마도 저게 방금 말한 그 능력인 모양.
라피냐는 그 사진을 바라보며 무척이나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고, 그리고는 아까의 정보와 더불어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황혼급 주교 테흘리안은 대략 10년 전부터 교단의 타천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현재로서는 녀석이 저 능력을 통해 교주의 연락책을 맡고 있다고 추정하는 중입니다.”
“······연락책이라면.”
“예. 아마 녀석만 제대로 잡아도, 사실상 대부분의 정보는 손에 넣을 수 있겠지요.”
하지만- 라피냐는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그걸 알면서도 이제껏 녀석을 사로잡지 못했다는 사실이 증명하듯이, 저 마인의 소재는 어지간해서는 파악하기도 힘들고, 파악이 되었다고 해도 제대로 잡기가 힘듭니다.”
“······.”
“그러니 세로데파스코에 녀석과 만날 접점이 있다고 한들, 저희 같은 사람들은 녀석과 만날 수도 없고, 우연히 발견한다고 해도 녀석이 먼저 우리를 보고 도망치기 시작할 게 뻔해서, 솔직히 조금 난감하긴 하네요.”
나는 그녀의 말에 잠시 생각해보았다.
일단 녀석이 나타난다는 위치는 알아냈지만, 이 상황의 문제점은 이쪽에서 먼저 녀석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과, 설령 알아낸다 해도 녀석이 우리를 먼저 알아본다면 전투가 아닌 도주를 선택할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그걸 위해 중요한 조건은, 차원 단면 너머의 본체를 발견할 수 있는 색적 능력과 녀석으로부터 들키지 않고 접근할 은신 능력, 혹은 미끼가 필요하다는 부분.
하지만, 이 순간 왠지 모르게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어떠한 생각이 있었으니-
“문제는 그게 전부인가요?”
“······예? 예. 일단은.”
그러므로.
“그럼 가능할 것 같습니다.”
-머릿속으로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려 본 나는 이내 빠르게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