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과 마음 (5)
나를 향해 지어 보이는 부드러운 미소.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아리엘은 아무렇지 않게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다시금 입을 열어왔다.
“오늘 하루, 만족스러웠던 것 같아?”
그러자 달빛이 스며든 아리엘의 두 눈 속에는 내 얼굴마저 담겨 내비쳤고, 코앞으로 다가온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내 기분을 알아야겠다는 듯이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거짓말은 하지 말아 달라는 듯이. 그냥 솔직하게 대답해달라는 듯이 말이다.
그렇기에- 그냥 적당히 대답을 돌려주려고 했던 나로서는 순간적으로 뭐라 대답을 해줘야 할지 할 말을 잃어버리고야 말았으니, 저 말을 들은 순간,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 너무 여러 생각이 떠올라버렸던 탓이었다.
“······.”
“······.”
말없이 허공에서 마주친 서로의 시선.
그렇게 우리가 앉아있던 공원의 벤치에는 잠시 침묵이 찾아왔고, 당연하게도 이 갑작스러운 분위기에 당황한 이하린이 그녀의 옆에서 입을 달싹거리는 모습마저 같이 엿보였지만, 아리엘은 손으로 그런 이하린의 손을 꾹 잡고선, 계속 내 두 눈을 응시하였다.
상쾌해 보이던 얼굴 위로 약간이지만 씁쓸한 기색을 머금은 채, 미묘한 눈빛으로.
그리고는 이내.
“역시··· 별로였구나?”
마치 알겠다는 듯 잔뜩 시무룩한 표정이 되어서는,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제 어깨를 힘없이 축- 늘어트렸을 따름이었다.
그것도 잔뜩 실망한 어린애 같은 얼굴로, 속상하다는 듯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이다.
아무래도 곧바로 되돌려주지 못한 내 대답 없는 대답이 아리엘에겐 미묘하게 다가온 모양이었는데, 그렇게 기운이 없어진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곤 제 무릎 위에 올려져 있던 우리의 손을 쪼물딱거리기 시작했다.
참으로 당황스러운 행동.
“저, 저는 진짜루 재밌었어요···!”
“···나도 별로였던 건 아니었어.”
그리고 물론- 그런 아리엘의 반응에 지켜보던 이하린은 잔뜩 당황한 채 황급히 그녀를 다독여주기 시작했고, 당연히 나 또한 뒤늦게나마 대답을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다만, 장난을 치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Ó╭╮Ò) (╯︵╰,) (இдஇ; )]
물론, 우리가 이제 와서 그러든 말든 딱히 별다른 효과는 없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오늘 같이 요리도 해봐서 좋았어요···!”
“오랜만에 쉬는 느낌도 들어서 좋았고.”
“마, 맞아요. 완전 쉬는 느낌이었어요!”
“······.”
“오, 오늘 참 좋았는데··· 지, 진짠데···.”
어쨌든, 그렇게 상쾌해 보이던 얼굴에서 한순간에 우울해진 아리엘의 표정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차갑게 가라앉아 있던 이하린의 얼굴도 마찬가지로 한순간에 다시 동글동글해지기 시작했으니, 아리엘은 계속되는 이하린의 반응에 다시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이내.
“하지만··· 지금 너희들 아침보다 상태가 더 안 좋아졌는걸? 표정이 그렇단 말이야.”
“······.”
“너도, 하린이도, 대놓고 그래 보이니까.”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이리 말해왔을 뿐.
그것도 제 작은 손가락으로 우리의 손을 꾹꾹- 눌러가면서, 무언가 약간의 미안함과 불만, 그러면서도 속상함이 느껴지는, 다소 조심스럽게 느껴지는 손짓과 함께 말이다.
그러면서도 아리엘은 작게 말을 덧붙였다.
“나는 둘 다 조금 편안해졌으면 해서, 이렇게 다 같이 쉬어보자고 했던 건데···. 어째 저녁 이후로 상태가 영 안 좋아져 버렸잖아.”
“······그런 이유였어?”
“이건 전에도 말했잖아 바보야! 애초에 내가 감사를 전하고 싶었던 건 너희도 마찬가지였단 말이야. 가장 고마운 것도 너희였고.”
속상해 보이는 표정으로 차례차례 고개를 돌린 아리엘이 나와 이하린을 바라보았다.
“천하 너도 요새 근심이 많아 보이고, 하린이도 덩달아 걱정이 많아 보이고, 둘 다 조금 여유를 가졌으면 해서 일부러 시끌벅적하게 불러봤는데··· 어째 마지막에 가선 같이 찬성했던 하린이까지 상태가 이상해졌는걸?”
“······그건···.”
“괜히 오지랖 부려봤다가, 여유만 더 뺏어버린 거 같아서 미안해지잖아. 이러면.”
그렇게 속상함이 묻어 나오는 아리엘의 말에, 무언가 대답하려던 이하린은 잠시 입을 달싹거리고선 그대로 다시금 꾹- 다물었고, 이내 아리엘과 비슷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나는 한순간에 울상이 되어가는 둘의 모습에 할 말을 잃어버렸고 말이다.
하지만 아리엘은 그런 우리의 반응에도, 그냥 마치 이왕 말문이 트인 김에 다 말해야겠다는 듯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요즘은 같이 있는 시간도 예전보다는 줄어든 느낌이라서, 하린이도 걱정하는 이유가 있으니까, 그냥 다 같이 하루만 아무것도 안 하고 쉬어보면 좋을 거라 생각했던 건데···.”
아리엘로부터 다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솔직히··· 천하 네가 요새 고민이 많다는 것도 알고, 우리 몰래 뭔가 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말해주고 싶어 하는 것 같진 않아서 그냥 적당히 모른 척해 주려고 했었거든?”
“······.”
“근데 아까 낮에 너, 잠깐이지만··· 뭔가 평소보다도 더, 되게 안 좋아 보였단 말야.”
“······.”
“그치만 얘기해줄 순 없는 거지?”
아리엘은 그 말과 함께 씁쓸해 보이는 표정을 지어 보였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대답이 없는 내 반응이 조금 속상했는지 우울해 보이는 얼굴로 다시 이하린을 바라보았다.
“하린이는 왜 그런지 알 것 같긴 한데, 그래도 항상 내 생각보다도 걱정이 더 많아.”
“······.”
“물론 너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만, 내가 먼저 말 안 하면 혼자 속으로만 끙끙대는 게 속상하다구··· 맨날 얘기를 안 해주니까.”
“······.”
“나름 좋은 생각이라 생각했었는데, 천하 너는 너대로, 하린이는 또 하린이대로 심각해지고··· 결과가 이래서 미안하단 말이야.”
그렇게 투정 아닌 투정 끝에 흘러나온 그녀의 말속에는 분명 미안함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이하린 또한 그런 아리엘의 말에 뭐라 대답해줄 말이 없었는지, 붙잡혀 있는 손 대신 아리엘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며 말없이 도리도리 고개만 내저었을 뿐이었다.
그런 생각하지 말라는 듯이, 오히려 자기가 더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이다.
그렇기에 나도 작게 대답을 돌려주었다.
근래 두 사람의 태도가 태도였던 만큼 나도 저러한 마음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고, 또한 아까 있었던 입마의 전조가 두 사람을 걱정시켰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리엘이 미안할 구석은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앞의 이야기는······ 뭐라 해줄 말이 없지만, 적어도 네가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
“······.”
“같이 이렇게 쉰 건 정말로 나쁘지 않았어. 생각이 조금 많아지기야 했어도 그게 너 때문인 것도 아니고, 나름대로 오늘 하루 동안은 계속 쉬는 기분이 들긴 했었으니까.”
그리고 물론, 그런 내 말에 말없이 도리도리만 하고 있던 이하린도 입을 열어왔다.
“···맞아요. 저도 오늘은 진짜 즐거웠으니까 미안해하지 마세요. 덕분에 오랜만에 이렇게 셋이서 제대로 같이 있었는걸요······?”
“······.”
“그게 좋아서 저도 찬성했던 거구요···.”
하지만 우리 둘 다 아리엘을 달래주면서도 정작 무엇 때문에 이러고 있었는지는 이야기해주지 않았으니, 그것 때문인지 아리엘도 말없이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물론 나로서야 이하린이 왜 조금 전 그리 우울해했었는지를 알고 있었고, 근래 내 태도가 수상해 보인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반대로 그 모든 게 함부로 이야기하기에는 미묘한 부분이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나도, 이하린도 원작과 ‘원작’을 알고 있었기에, 그리고 다시 각자가 원하는 목표가 있었기에 이러고 있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허나- 그건 아리엘이 알 수 없는 부분이었고, 그걸 제외하곤 설명하기도 어려웠을 뿐.
그리고.
“······.”
그러한 우리의 태도가 아리엘로서는 걱정이 되면서도, 서운하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근래의 내 행동도 그렇고, 아까 이하린과의 일도 그렇고, 저녁 이후의 상태도 그렇고, 더불어 심각해진 이하린의 상태도 그렇고, 마냥 무시하긴 힘들었을 테니까.
하지만 우리에게는 각자 말하기 힘든 사정이 있었으니 이건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그렇기에.
“······.”
“······.”
조금 서운해 보이는 얼굴을 한 아리엘과 마찬가지로 할 말이 없어진 우리는 잠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으니, 이 순간 밤하늘엔 미약하지만 별들이 반짝거리고 있었고, 그렇게 우리 사이엔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적막을 가르고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
그렇게 각자 하고 싶은 말을 삼킨 채- 시선을 돌리고 있는 우리였지만, 아직도 우리의 손은 아리엘의 손에 붙들려 가운데에 모여있었으니,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겹쳐진 손처럼 같은 곳에 자리하고 있을지언정, 서로가 마주하는 면은 달랐으니. 어찌 보면 지금 겹쳐진 이 손들이 우리의 관계를 나타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뜬금없지만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지금 겹쳐진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이야기해주는 것처럼, 서로의 걱정과 염려는 분명 거짓이 아니었다.
나는 그 또한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 순간 내 머릿속에도 다시 왠지 모르게 3학구에서의 나날이 떠올랐고, 셋이서 같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어서 그런지 승천제 마지막 날의 기억마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뜬금없지만 내게는 그러했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혹시······.”
잠깐의 적막이 흐르고, 한참을 그렇게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아리엘은 다시 조금은 차분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어왔다.
“······아까 내가 말했던 거 기억나?”
그것도 다소 의아한 물음을 건네오면서.
***
아까 말했던 거- 미묘했던 적막을 깨트리고 건네진 말이었기에 어지간해서는 대답을 해주고 싶었으나,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정확히 모르겠기에 나는 아리엘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런 내 반응에 아리엘은 조금 전 아이들에게 얘기했던 부분을 언급하였다.
그러니까.
“너랑 친해진 계기가 있다면 그건 너가 필기 4점을 맞은 바보라 그랬을 거라 했던 거.”
“······그건 왜 갑자기.”
내게 처음 관심을 가졌던 이유를 말이다.
“그야 그냥 갑자기 말하고 싶으니까.”
아리엘은 그 말과 함께 여전히 꼭 붙잡고 있는 손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맨 처음에 스터디를 하자고 한데에는 그것도 나름대로 중요한 이유였다···?”
“···스터디? 다른 이유 아니었어?”
“물론 가장 큰 이유는 걱정돼서였긴 했지. 승천제 때도 그렇고, 실제 공략을 하다 보면 이론이 필요해지는 순간도 분명 올 테니까.”
하지만- 아리엘은 조심스레 덧붙였다.
“사실, 두 번째 이유는 미안해서였어.”
“미안···?”
그것도 다소 뜬금없는 말과 함께.
“만약 천하 네가 실력이 별로였으면 나는 너한테 별로 관심을 갖지도 않았을 거 아니야? 아니, 정확히는 네가 누군지도 모르고 있었겠지. 그렇다고 반대로 만약 필기까지 잘했으면 오히려 질투했을지도 모르고.”
“······.”
“그래서인지, 어찌 보면 네가 나보다 더 대단하면서도, 그러면서도 나보다 못난 구석이 있었기에 친해졌다고 생각하니까 그게 왠지 되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드는 거 있지?”
처음의 관심이 너무 불순했던 것 같아서- 아리엘은 겸연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서, 너가 공부를 못해서 그런 게 아니라 안 배워서 그런 점수를 맞았다는 걸 알게 되니까. 한번 이론을 가르쳐주고 싶어지더라구. 그러면 그나마 덜 미안할 것 같아서.”
“······.”
“그리고 너가 이론 점수가 오르면, 그때는 진짜 동등한 입장에서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스터디를 하자 했던 거야.”
뭐라고 해야 할까- 참으로 쓸데없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런 이유든, 저런 이유든 중요한 게 아니었을 텐데 참 별거 아닌 거로 미안해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순수한 호의여도 모든 호의에는 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는 건데, 이 순진하고 착한 바보에게는 그게 참 거슬렸던 모양.
애초에 맨 처음의 나는 원작의 주연이라서 말을 걸었던 거에 불과했는데도 말이다.
괜스레 내 양심만 찔리는 순간이었다.
“아니, 어쩌면 확인해보고 싶었는지도 몰라. 카룬드 때는 오히려 민폐만 끼쳤고, 위타극 때는 뭔 일이 있었는지도 몰랐었으니까.”
“······확인?”
“응. 그렇게 평소에도 넌 내게 기대는 부분이 하나도 없을 정돈데, 만약 너가 거기서 더 잘나지면은, 그래서 정말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하나도 없게 되면은, 너는 나를 어떻게 대할까··· 그런 생각도 들었었거든.”
그 말에 나는 헛웃음을 터트렸고, 옆에서 우울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하린마저 순간 벙찐 표정을 지었을 정도였다.
왜냐하면 너무 바보 같은, 그러면서도 어린애 같은 생각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미안하지만··· 정말 멍청한 소리 같은데.”
“······나도 알아 바보야. 그냥 그땐 그런 것뿐이야. 그땐 너가 등천자가 되는 바람에 나도 되게 바보 같은 생각을 할 때였으니까.”
물론 그 이후엔 더 제대로 터져버렸지만- 아리엘은 그리 중얼거리며 조금은 부끄러워졌는지 고개를 숙여 보였고, 나는 그녀의 말에 승천제에서의 일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협력전이 끝나고 난 뒤 터져버렸던 아리엘의 마음이라든가, 아니면 제 몸까지 던져버리곤 울먹거리며 말했던 이야기들이라든가.
뭐, 아리엘이 보여줬던 모습들을 말이다.
“그때는 정말 바보 같기야 했지.”
“굳이 떠올리진 않아도 되는데···.”
하지만 어째 그때의 일을 말해서인지 아리엘이 굉장히 부끄러워 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고, 조금 흥미로운 이야기이긴 했으나 왜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낸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아 나는 아리엘에게 질문을 건네보았다.
“그런데 이 얘길 지금 왜 하는 거야?”
그리고 물론.
“그야··· 지금도 여전한 것 같으니까.”
“······지금도?”
“응. 승천제 때는 그렇게 너랑 같은 위치에 서서 싸우고, 도와주고 싶어서 노력했는데··· 정작 여전히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아서.”
아리엘은 그런 내 질문에 여전히 바보 같은 목소리로 대답을 돌려주었을 뿐이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지금 아리엘의 입에서 흘러나온 저 말을 마냥 무시할 수 없었을 따름.
“그야 물론··· 나는 천하 너가 왜 우리에게 고민을 숨기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마 네 성격을 생각해보면 그냥 너 혼자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일 것 같단 말이야.”
“······.”
“아니, 정확히는 아직 너한테 우리는 생각만큼 도움이 안 되는 친구일지도 모르고.”
“······.”
“사실 처음부터 그랬어. 나한테도, 하린이한테도, 설아한테도 아무렇지 않게 도움은 주면서, 정작 다른 사람한텐 도움을 받을 생각은 전혀 안 하면서 살잖아. 우리 천하는.”
“······도움이 필요한 일이 없으니까.”
그렇기에 나는 잠시 입을 달싹였고, 그런 내 말에 아리엘은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나도 알아. 천하 너라면 어지간해선 혼자 알아서 다 잘 해결하겠지. 내가 아는 유천하는 뭐든지 척척 다 잘하는 사람인걸?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대로 질투도 하고, 조바심도 느껴보고, 대단하다 생각해서 쫓아가고 싶었을 만큼 뛰어난 사람이니까.”
“······.”
“그러니까, 뭐가 고민되었든 간에 넌 알아서 잘할 거라 생각했고, 그래서 너가 숨기려 하면 우리도 그러려니 하려고 했었던 거야.”
하지만- 아리엘은 그렇게 잠시 말을 멈추었고, 그리고는 내 손등과 이하린의 손등을 같이 매만지며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까 너는 너무 불안해 보였단 말이야.”
“······.”
그것도 내가 차마 할 말이 없게 만들면서.
“아까 너. 나도, 하린이도 더는 모른 체하기 힘들었을 정도로 되게 힘들어 보였어.”
“······.”
“근데도 너는 얘기 안 해주려고 하는 걸 보니까 순간 그런 생각이 다시 드는 거 있지? 여전히 나나 하린이가 너한테는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라 얘기해주지 않는 걸까? 아니면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걸까? 뭐··· 그런 생각이 문득 떠올랐어 방금.”
“······.”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었던 이유를 떠올려보니까, 아무래도 우리가 항상 너한테 도움만 받아와서 그런 건가 싶었고 말이야.”
말없이 아리엘의 말을 듣고 있던 이하린도 그 말에는 순간적으로 입을 달싹거렸고, 이내 어두워진 표정 속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
물론 나 또한 저 말을 들으면서도 뭐라 할 말이 없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비록 내가 두 사람에게 이야기하지 않는 까닭은 크게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이 가장 중요한 고민거리이기에 그러한 것이지만, 작게는 근래 하고 있는 일 자체가 두 사람의 행동이 걱정돼서, 그렇기에 혼자서라도 마인을 사냥하고자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두 사람을 무시해서 이러는 건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 두 사람에게 크게 기대하는 부분이 없기에, 괜히 걱정되어 그런다는 건 결국 저 말과 다를 바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므로.
“······그런 건 아니야.”
나로서는 그저 투명해진 이하린의 눈을 바라보며, 다시 씁쓸하게 웃어 보이는 아리엘을 바라보며 이렇게 답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그럼 뭔데···? 말해 줄 수 있어?”
“······.”
우리 사이엔 다시금 침묵이 내려앉았다.
여전히 서로의 손은 아리엘의 무릎 위에 고이 올려져 있었지만, 분명 우리 셋은 각자 다른 부분을 걱정하고, 생각하고 있었을 터였고, 이곳에선 아마도 내가 그걸 가장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리엘은 나와 이하린에 대해 걱정하고, 이하린은 다시 우리와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고, 나는 그걸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러면서도 문득 생각이 들었다.
“······.”
만약 내가 원작을 읽지 않은 평범한 환생자였다면, 그래서 그저 아무것도 모른 채 이 세상에 적응하려고 노력 중인 사람이었다면, 어쩌면 지금과는 다른 태도를 보여줄 수 있지 않았을까- 바로 그러한 생각이 말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고, 나는 원작을, 이하린이 쓴 ‘원작’도, 돌아가야 할 무림도, 전생자도, 빙의자도, 회귀자도, 너무나도 많은 걸 알고 있었고, 고려해야만 했을 따름이었다.
내가 그 모든 걸 원하든 원치 않든, 오직 내가 원하는 하나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무뎌졌어.’
그러니 어찌 보면 이건 또 다른 변화였다.
맨 처음의 나였다면 아무렇지 않게 잡아떼거나, 그냥 이야기하고 신경 쓰지 않았을지도 몰랐지만, 지금의 나는 이 두 사람이 위험해지지 않았으면 했고, 둘이 내게 느끼는 친애의 감정을 마냥 무시하기가 힘들었다.
두 사람은 분명 나를 걱정해주고 있었다.
내가 어떠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어떠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평범한 한 사람으로서 말이다.
이건 분명 그러한 관점의 문제였다.
이곳이 내가 살아온 세상이 아니었기에, 그렇기에 느낄 수 있는 순수한 호의였기에.
비록 내가 둘에게 접근했던 가장 처음의 이유는 불순했을지언정, 적어도 이제는 내게도 이 두 사람은 중요한 이들이었으니까.
“위험한 일이라도 하는 거야? 그래서, 말해봤자 우리가 도움이 안 될 것 같아서?”
“······아니야 그런 건.”
분명 나는 무림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그걸 위해 나는 미래를 대비해야만 했다.
하지만 어쩌면 지금 내 행동에는 단순히 그런 걸 넘어, 조금 더 감정이 담겨 있을지도 몰랐다. 단순히 원작의 미래를 생각해서만이 아니더라도, 무사히 돌아가기 위해서만이 아니더라도, 미래를 알고 있기에 다른 누군가의 미래를 염려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게 참으로 우스웠다.
무정 강호에서도 온전히 마음을 버려내지 못했던 나는, 결국 이렇게 이곳에 와서야 마음을 비웠고, 다시 채워나가는 중이었다.
손바닥과 손등, 양쪽에서 느껴지는 온기를 통해서도, 지금도 나를 바라보며 걱정하는 두 사람의 눈을 통해서도, 나는 두 사람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고, 너무나도 우습지만 그러한 염려가 싫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성과 합리의 영역이 아닐지언정, 그게 이렇게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고 있을지언정.
“그러면? 왜 아무런 말도 안 해주는 거야?”
그렇기에 나는 문득, 마음이란 참으로 어렵고, 다시 이상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기분과 마음인데도 불구하고, 절세의 신공을 익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생각 하나가 마음대로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건.
“······걱정되니까.”
분명 지금도 마찬가지였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