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과 마음 (4)
“와. 그렇게 생각하니까 조금 신기하네.”
마르네와 딴소리를 하고 있던 리베르테도 방금의 말을 들었는지 그리 말해왔고, 그에 다른 아이들 또한 화답하듯 입을 열었다.
“결국 그럼 얘네는 서로 목숨을 빚졌다는 거네? 이하린은 유천하한테, 유천하는 이하린한테, 아리엘은··· 둘 모두한테 말이야.”
“······나도 갚을 거야 언젠가는.”
“게다가 그 시작은 우리 하린이였고?”
“그러면 그날 은공이 위타극을 베어내신 것도, 제가 이곳에서 은공을 만난 덕분이니 어쩌면 하린 씨 덕분이라 할 수 있겠네요.”
그렇게 이제껏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던 남궁설아마저 대화에 끼어 들어왔고, 그와 동시에 그녀는 작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이내.
“아니, 그날 하린 씨가 없었다면 시간을 벌지도 못했을 테니 어찌 보면 저 또한 하린 씨에게 목숨을 빚졌다고 할 수 있겠군요.”
“······그, 그렇지 않아요.”
“저도 언젠가는 빚을 갚도록 하겠습니다.”
이어진 남궁설아의 말에 이하린도 다시 복잡한 심경이 담긴 표정을 지어 보였으니, 그러자 옆에 있던 아리엘은 저도 꼭 갚아주겠다며 이하린을 와락 끌어안았을 뿐이었다.
덕분에 장난스레 시작했던 대화는 어느새 미묘한 흐름이 되어 이하린을 향해 흘러가기 시작했고, 그에 이하린은 기쁜 듯, 부담스러운 듯, 민망한 듯, 복잡해 보이는 심경을 그 눈에 머금고선 살며시 나를 바라보았다.
곤란한 기색, 그리고 깜빡거리는 눈동자.
어째 대화가 갑자기 이렇게 흘러가게 된 상황에 당황스러워하는 듯했으니, 아마도 내게 도움을 요청하는 느낌이라 해야 할까?
하지만.
“저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이왕 아까의 토라짐이 풀리기도 했고, 당황하는 이하린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장난을 쳐보고 싶다는 생각도 없잖아 들었기에, 나 또한 그녀에게 미소로 화답해주었다.
나 또한 이하린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다는 듯, 아니 그러한 마음을 담아서.
그리고 물론.
“······아··· 아니에요···.”
그런 내 행동에 애처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던 이하린은 속삭이듯 새어 나오는 웅얼거림과 함께, 아까보다 더 붉어진 얼굴을 숨겨보려는 듯 빠르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다만 나는 그 잠깐만으로도 이하린의 표정을 볼 수 있었는데, 어째 지금 그녀의 얼굴 속에 떠오른 감정은 분명 미안함이었을 뿐.
입가가 꿈틀거렸던 걸 보면 우리의 반응, 정확히는 저 자신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말에 기뻐하는 듯했지만, 그러면서도 흔들렸던 눈동자를 생각해보면 그녀 스스로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마치, 이하린 자신은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인사를 들을 자격이 없다는 듯이.
“······제가 그런 게 아닌데···.”
그리고- 속닥거리듯 흘러나온 목소리가 그걸 뒷받침해주었으니, 이하린은 아무래도 이때까지의 사건을 제 손으로 해결한 적이 없다는 사실에 미안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물론 나를 구해주었다는 사실 자체에는 항상 뿌듯함을 느끼고 신경을 쓰는 듯했으나, 이후 카룬드 때도 그렇고, 위타극 때도 그렇고, 하물며 승천제 때도 그렇고, 이하린은 저가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에 이따금 자책하는 태도를 내비쳤던 편이었다.
항상 급박했던 상황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내게 기대는 형식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그러니 결과적으로는 큰 도움은 못 되었던 마당에, 정작 그 사건의 당사자들이 이러한 말을 건네오니 이하린의 입장에선 그게 조금 부담스럽게 느껴졌던 게 아닐까- 나는 이하린의 심경을 그렇게 짐작해볼 수 있었다.
하지만.
“하린 씨가 그런 게 맞습니다. 적어도 저를 처음 도와주셨던 것도, 카룬드 때 아리엘과 함께 싸웠던 것도, 위타극 때 설아 씨와 함께 싸웠던 것도, 전부 하린 씨가 하신 거니까요.”
솔직히 말해서- 나로서도 저 말을 그저 장난을 치기 위해서만 건넨 것은 아니었다.
물론 아까의 어색함을 은근슬쩍 풀어내기 위해서 그런 것이기도 했고, 그냥 분위기가 그러하기에 장난을 쳐보고 싶었던 것도 있긴 했지만, 적어도 내가 이하린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는 것 자체는 분명 사실이었다.
그녀의 활약과는 별개로도. 충분히.
“물론 그걸 떠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애초에 처음 만난 순간의 도움만이 아니더라도, 그 이후의 도움도, 지금까지 계속 건네지는 호의와 염려도, 이하린은 언제나 한결같았고, 그렇게 항상 변함없이 다가오는 이하린의 태도는 내게도 그녀를 조금이나마 특별한 사람으로 여기게 만드는 중이었다.
‘원작’을 집필했던 주인공이라는 입장을 떠나서라도, 필요의 의미를 떠나서라도, 다른 의미 없이 순수한 사람 대 사람으로서도.
이하린은 분명 나와 달리 백색의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더욱 그러했을 뿐.
아니, 사실 그런 이하린의 태도는 내게 더 직접적일 뿐이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였고, 이제까지 이하린이 보여준 행적은 분명 그녀가 어떠한 사람인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맞아!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하린이는 그때 나를 지켜주려고 열심히 싸웠었잖아.”
“갑자기 나타나선 도와주시기도 했지요.”
그런 만큼- 지금 이 두 사람의 반응도 그러한 행적을 뒷받침해주는 것과 다름없었다.
원작자 이하린에겐 분명 더 편하고 쉬운 길이 있었을 테지만, 그녀는 다른 이들을 돕고자 하여 계속해서 노력하고 있었으니까.
“······.”
“······.”
하지만 이하린은 그저 부끄러운 듯, 그러면서도 어딘가 미안해 보이는 듯한 눈빛으로 스리슬쩍 그런 우리를 힐끔거렸고, 이내 눈이 마주치자 입을 꾹 다물었을 따름이었다.
그것도- 자신은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없다는 듯이 미묘하게 쪼그라든 모습으로.
물론 이하린이야 평소에도 소심한 모습을 자주 보였던지라, 그러한 그녀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기는 아이들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쟤 되게 부끄러워하네? 직접 들으면 많이 민망한가? 들을 일이 없어서 모르겠네.”
남궁설아나 아리엘만이 그러한 이하린을 신경 썼고, 다른 이들은 그저 이하린에겐 약간의 관심만을 내비치고선 아무렇지 않게 방금의 주제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들을 일이야 뭐··· 혹시 알아? 나중에 우리 중에서도 서로 비슷한 일을 겪게 될지.”
“오. 확실히 마르네 입에서 구해줘서 고맙단 말을 들으면 기분이 이상하긴 하겠다.”
“뭐? 누가 누굴 구해? 반대겠지, 새꺄.”
물론- 방향은 조금 달라졌지만 말이다.
“하긴··· 같은 생도고, 같은 또래인데도 갑자기 목숨을 구해준 사이가 돼버리면 좀 그렇긴 하겠네. 진짜 생각만 해도 어색해.”
“그것보단 실제로 그럴 일이 생길 만큼 위험한 상황이라 생각하면, 그게 더 그런데.”
“그런 상황을 쟤넨 벌써 겪었는데 뭘.”
“그렇지. 타천자랑 싸우는 게 흔한 일은 아닌데도··· 참 대단한 동기들이군. 아주.”
사카타는 우리를 바라보며 그리 말했고, 그에 마르네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글쎄? 솔직히 우리도 충분히 겪을 수 있는 일 아닌가? 쟤네가 겪은 것처럼 말이야.”
마르네로서야 그냥 한 말이었겠지만, 사실상 앞으로의 미래를 생각해보자면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고, 담담하게 흘러나온 그녀의 말에 아이들은 천천히 우리를 바라보았다.
뭐랄까, 꽤 묘한 심경이 담긴 눈빛.
하지만 잠시 무언가를 생각해보는 것 같았던 아이들은 이내 아무렇지 않게 원래대로 시선을 되돌렸고, 태연히 말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물론.
“확실히, 실제로 그런 사태라면 단순히 확률만으로 안심하기에는 힘든 일이긴 하지.”
“현장에서 뛰면 가능성도 높아질 테고.”
“뭐··· 우리도 언제 죽을진 모르긴 해. 당장 승천제 때만 해도 다 현실인 줄 알았잖아?”
이 순간- 아이들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 속에 담긴 내용은 전혀 평범하지 않았을 뿐.
당장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가십거리에 귀를 기울이며 평범하게 우스갯소리를 하며 떠들던 아이들이었지만, 생도들은 어느새 자연스럽게 각자 전장에 나가 싸울 걸 전제로 한 입장으로서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그것도 무척이나 담담한 얼굴로 말이다.
“음··· 생각보단 자주 있을 것 같은데? 애초에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현장에서 뛰게 되면 어쨌든 서로 몇 번 정돈 마주칠 테니까.”
“글쎄? 멸화급이 미쳐 날뛰거나, 웨이브 방어 아니면 서로 마주칠 일이 있긴 할까?”
“각자 활동하는 곳이 다르면 힘들겠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기분이 어째 묘하네. 졸업하고 나면 한 10년만 지나도 여기서도 몇 명은 죽을 텐데. 뭐··· 아닐 수도 있고.”
리베르테는 태연히 그런 말을 꺼내왔고, 그 미묘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아무렇지 않게 저마다 한마디씩 말을 보태었다.
“재수 없는 소리······ 라고 하고 싶지만 뭐, 사실 아닐 거라 생각하는 게 더 힘들지.”
“이제 와서 새삼스러운 이야기로군.”
“그래도 세계 침식 같은 것만 없으면, 나름 대부분 알아서 잘 돌아다니지 않을까?”
“모르지 그거야. 적지만 타천자들의 테러도 있고, 갑자기 역류가 중첩될 수도 있고, 어쩌면 정말 세계침식이 또 올 수도 있잖아.”
그리고, 그 내용이 내용이었던 만큼.
“솔직히··· 앞선 사례들만 봐도, 언제 3차 세계침식이 시작돼도 이상하진 않으니까.”
나는 그 순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이하린의 몸이 미미하게 움찔거리는 걸 볼 수 있었고, 그와 동시에 만상의 눈을 통해 가려진 머리카락 너머, 그녀의 표정을 들여다보았다.
“······.”
물론 예상했던 대로의, 그런 표정이었다.
“쯧쯧. 쫄았냐 니네? 걱정 마라. 이 차세대 승천자님께서 알아서 구해줄 테니까.”
“어떡하냐 얘? 17살에 노망났나 봐.”
“차세대 승천자는 저기에 따로 있잖아.”
“······마르네는 그럼 내가 지켜줄게.”
“이솔라 빼고 다 꺼져. 개 같은 것들.”
하지만 그런 이하린의 표정과는 반대로 아이들은 태연하게 대화를 주고받았을 뿐.
“음··· 뭐 다들 알아서, 죽지는 말자구.”
“죽으려면 적어도 멸화급 정도는 혼자서 잡아보고 죽어야지. 그전엔 절대 안 죽음.”
“무병장수하겠다는 말을 어렵게 하네?”
그렇게 자신들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아이들의 얼굴에는 그저 태연한 기색과 옅은 웃음만이 떠올라 있었고, 검을 쥐고 있지 않았음에도 고개 숙인 이하린의 얼굴에선 차갑게 가라앉은 표정만이 엿보였으니- 무척이나 대비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물론.
“죽어도 자리는 다른 애들이 채울 테니까, 쓸데없이 타천만 안 하면 되겠지 뭐.”
“미친 새끼. 진짜 재수 없는 소리 하네.”
그렇다고 한들- 아이들 또한 마냥 가벼운 마음으로만 얘기를 나누는 것도 아니었다.
“그럴 새끼면 애초에 여길 안 왔겠지.”
“타천자란 말이 왜 생겼겠음? 등천자 중에서도 타천한 사람이 나오니까 그런 건데.”
“진짜 죽어도 그렇게 되지는 말아야지.”
당장 저 유유자적한 태도를 보자면 그저 우스갯소리를 나누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승천제 때의 행동만 떠올려봐도 분명 지금 흘러나오는 아이들의 말은 진심일 터였고, 저 태연함의 뒷면에는 분명 이미 만약의 상황을 각오한 마음가짐이 깃들어 있을 터였다.
생도인 이상, 공략자를 자처하는 이상, 전투 중 목숨이 위험해질 경우도, 그리고 그로 인해 실제로 목숨을 잃게 되는 경우도, 무작정 외면할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애초에 매년 등천회랑에서만 500명에 가까운 생도들이, 여타의 기관까지 합치면 1,000명에 가까운 생도들이 현장으로 뛰어듦에도 등천자의 숫자가 항상 비슷한 수준으로 유지된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었으니, 설마 생도들이 그 이유를 모르겠는가?
등천자라고 해서 안 죽는 게 아니었고, 승천자라고 해서 죽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건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였을 뿐.
제 손으로 감당하기 힘든 시련에 맞서 싸우는 자일수록 만상세계는 업을 인정해주었고, 등천의 자격은 어찌 보면 그들이 위험을 향해 나아갔다는 걸 증명하는 꼬리표였다.
그러니- 맞닥트린 재앙을 넘어서 칭송받는 자가 있다면, 분명 그걸 넘어서지 못해 쓰러지는 자 또한 있는 게 당연한 현실이었다.
이곳은 분명 그러한 세상이었으니까.
“아 몰라 몰라. 타천자고 나발이고, 나는 승천자까지 찍을 거니까. 나랑 상관없음.”
“아니, 그걸 누가 시켜준다 그랬냐고.”
“좆까. 안 뒤지고 꾸역꾸역 싸우다 보면 언젠가는 되겠지. 승천자들 다 나이 많잖아?”
“풉. 누가 들으면 나이만 먹는다고 승천자가 되는 줄 알겠다. 내가 봤을 때 넌··· 굽!”
그렇기에 생도들의 저 진담 반, 장난 반이 섞인 대화와 그곳에서 느껴지는 괴리감은, 어찌 보면 이하린이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라고도 볼 수 있었다.
“까불다가 한 대 맞을 줄 알았다 넌.”
“아니, 메췐? 그렇다고 죽빵을 갈겨?”
“불만이면 함 뜨든가! 현장에서 뒤지기 전에 내 손으로 죽여줄 테니까. 너 이 새끼.”
“······싸울 거면 나가서. 시끄러워.”
아직 성년조차 지나지 않은 아이들이 아무렇지 않게 자신들의 죽음을 가정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이, 저게 기본이 되는 세계가, 그녀에게는 분명 다르게 느껴졌을 테니까.
비록 생도들에겐 저 대화가 이상하지 않았고, 이게 이 세계에선 당연한 이야기였을지언정, 이 대화가 낯설게 느껴질 터인 그녀는 이 세계를 써 내려간 장본이었을 테니까.
이하린이 항상 자신의 몸을 내던지는 이유도 분명 그곳에서 기인하였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물론.
“······.”
지금 이 순간- 그녀가 아이들의 대화를 들으며 느끼고 있을 감상도, 내가 그런 이하린을 바라보며 느끼고 있는 감상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을 따름이었다.
***
시끌벅적했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소란스러웠던 순간이 지나고 찾아온 밤. 처음 음식을 준비하면서 있었던 어색했던 분위기를 지나, 다시 아이들이 찾아와 소란스러웠던 시간도 지나, 마침내 우리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중이었다.
참으로 길고도, 길게 느껴졌던 하루.
어느덧 자정을 향해가는 시간이 알려주듯이, 놀러 왔던 아이들은 이미 각자의 숙소로 되돌아간 지 오래였고, 이곳에는 오직 나와 아리엘, 그리고 이하린만이 남아 있었다.
물론 따로 이야기를 하려고 남은 건 아니었고, 그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정리를 도와주다 보니 이렇게 된 것이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렇게.
“······.”
“······.”
결국 설거지까지 모두 끝낸 우리는 잠시 공원에 나와 쭈르륵 앉아 있었고, 다시 저마다의 생각 속에 고요함을 느끼는 중이었다.
물론 그에는 끝까지 시끌벅적했던 시간이 끝난 여파도 있었지만, 서로 각자 무언가 생각에 빠져 들어있는 탓도 있었을 따름.
그리고- 그런 만큼.
나는 지금 아까 아이들이 나눴던 대화를 들으며 떠올랐던 생각과 아크샤가 들려줬던 세계에 대해 되새겨보는 중이었고, 다시 내가 끝까지 보지 못했던 이야기의 결말이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지를 생각해보고 있었다.
우연히 시작되었던 주제긴 했지만, 그 대화가 내게도 인상 깊게 남았던 탓이었다.
“······.”
“······.”
그리고 정확하진 않지만, 내가 봤을 땐 아마 이하린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었고, 아까 전 가라앉았던 그녀의 기분은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는 중이었다.
물론 겉으로 드러나는 태도는 평소처럼 행동하려는 게 엿보였지만, 그녀의 기분이 우울한 상태라는 건 참 쉽게 엿보였을 정도.
아무래도 우리에게 들었던 말과 아이들의 대화가 어우러져 고민을 안겨준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조용하네.”
마찬가지로 이제껏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 듯했던 아리엘이 침묵을 깨트렸고, 우리를 바라보며 입을 열어왔다.
“참··· 조용하다. 그치?”
“······네. 조용하네요.”
물론- 딱히 의미 있는 말은 아니었지만, 아리엘은 그 말과 함께 생긋 웃어 보였고, 그리고는 이내 다시 우리에게 말을 건네왔다.
그것도 무척이나 부드럽고, 또 온화하게 가라앉아 있는 따뜻한 목소리로 말이다.
“오랜만에 참 시끄러웠던 것 같아. 재밌긴 했는데··· 역시 약간은 피곤하긴 하네.”
“시험도 보고, 요리도 하고, 날뛰던 마르네 녀석도 말리고, 피곤할 만하지 충분히.”
“그래도 너희 아니었으면 더 힘들었을걸? 둘 다 도와줘서 정말 너무너무 고마워.”
그와 동시에 아리엘은 살며시 우리를 향해 제 양손을 뻗어왔고, 내가 잠시 그걸 피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해보는 사이- 어림도 없다는 듯 바로 우리의 손을 낚아채 갔다.
정말이지 갑작스러운 행동.
“···?”
“···!”
나는 얘가 뭘 하려고 이러는가 싶어 지켜봤고, 생각에 잠겨 있다 손이 낚아채진 이하린은 놀란 눈으로 아리엘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리엘은 이내 가운데 앉아있던 제 무릎 위에 이하린의 손을, 다시 그 위에 내 손을, 마지막으로 자신의 양손으로 그걸 감싸듯이 쌓아 올리고는 해맑게 웃어 보였다.
그것도 무척이나 상쾌하단 얼굴로 말이다.
“오늘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둘 다!”
[고마워 고마워 •'-'•)و✧ ]
물론, 나로서는 그저 어이가 없었을 뿐.
“그래서··· 갑자기 뭐 하자는 건데 이건?”
“응? 그냥 해본 건데? 같이 힘냈으니까 마무리 축하 인사 같은 느낌으로? 그것보다 역시 우리 하린이는 손이 참··· 따뜻하구나?”
“아··· 네, 넵. 체온이 높은 편이라서요.”
순간적으로 또 왜 이러나 싶긴 했으나, 이러는 사람이 아리엘이었던 만큼 나는 구태여 따지지 않고 그냥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물론 내 손 밑에 깔린 이하린의 손이 빠져나가려고 꿈틀거리는 것도 그렇고, 내 손등을 뒤덮고 있는 아리엘의 손이 그걸 못 빠져나가게 막아보겠다는 듯 힘을 주고 있는 상황이 조금 우습긴 했지만 감흥은 없었다.
그냥 아리엘이 아리엘하고 있구나, 딱 그런 생각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던 탓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이, 이거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요?”
“으음··· 내가 만족할 때까지? 계속?”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잔뜩 우울해하고 있던 이하린의 얼굴이 점점 달빛을 뚫고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하고, 기어코 이내 맨 밑에 깔려 꿈틀거리던 손의 저항마저 포기한 순간.
바로 그 순간.
“그것보다. 그래서 둘 다 어땠어, 오늘?”
아리엘이 미소와 함께 질문을 건네왔다. 그러면서도 그 장난스러운 말투와는 별개로 얼굴은 진지한 표정을 띠고 있었고 말이다.
“······나쁘진 않았···.”
“제대로, 대충 말구.”
하지만 귀찮아서 적당히 대답을 돌려주곤 계속 생각에 잠겨보려 하였더니, 아리엘은 제대로 대답하라는 말과 함께 제 손 밑에 깔려있던 내 손등을 바로 꼬집기 시작했다.
그것도 휙- 고개를 돌려 내 눈앞에 얼굴을 들이밀면서, 정확히는 두 눈을 마주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