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학기의 끝자락 (1)
토요일에 있었던 다사다난한 하루를 지나 주말은 빠르게 흘러갔다. 아니, 사실 주말이라 하기에도 다소 미묘한 시간이었을 따름.
그 하루 간의 일탈 아닌 일탈 끝에 우리가 회랑에 되돌아온 시각은 당연하게도 토요일을 훌쩍 넘긴 새벽이었고, 라피냐의 배웅을 받으며 게이트를 넘어왔을 때는 사실상 이미 회랑에선 해가 떠오르고 있었던 탓이었다.
거기에 일요일은 새롭게 알게 된 정보를 정리하고, 계획을 짜보는데 모두 소모되었으니, 그렇게 다소 길고도 짧았던 주말을 되새겨보자면 영 미묘했다는 느낌이 들긴 했다.
그러한 기분의 이유를 말해보자면- 어째 처음의 예상과는 꽤나 계획이 달라졌던 탓.
‘인턴, 아니 이면순례자와 협업이라······.’
애초에 마인 사냥은 어차피 할 생각이었기에 진시우를 통해 이면순례자의 백업을 간접적으로나마 받을 궁리야 하고 있었으나, 그렇게 단 하루 만에 직접적으로 같이 협업을 결정하게 될지 어떻게 상상이나 했겠는가?
물론- 마찬가지로 그렇게 갑작스럽게 조우하게 될 줄도 상상도 못 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날 나보다 더 복잡한 심경을 느꼈을 진시우는 회랑에 도착하자마자 내게 미묘한 분위기 속에 이러한 말을 건네왔었다.
-······모양새가 조금 이상해지긴 했지만, 달라진 건 없으니 앞으로도 잘 부탁하지.
그리고는 이내 진시우는 상당히 심경이 복잡해 보이는 얼굴로 제 숙소로 되돌아갔으니, 확실히 모양새가 조금, 아니 많이 이상해지긴 했으나 녀석의 상황도 이해되었기에 나 또한 대강 알겠다며 간단히 대답해주었다.
저 말처럼 방식은 달라졌을지언정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달라진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오늘 있었던 일은 다른 데선 언급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군.
물론 녀석에 대한 인상은 고작 하루 만에 꽤나 달라진 느낌이긴 했다만, 진시우가 라피냐에게 어떤 취급을 받는지는 대강 알 수 있었으니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
아무래도 이면순례자에서 진시우는 말 안 듣는 막내쯤으로 취급받지 않을까 싶었다.
사실 원작의 주연들을 아이처럼 바라보고 있을 이하린도 원래는 끽해야 갓 20살이 된 새내기였던 만큼, 전생의 기억들을 갖고 있는 작중작의 주인공 진시우를 조금 어려워하는 구석도 없잖아 있었는데, 그런 녀석도 다른 이들에겐 그저 17살 소년에 불과한 모양.
원작에서는 여러 부분에서 해결사 같은 면모를 보여주었을지언정, 그 실상은 17살의 생도라는 건 부정할 수 없었으니- 라피냐가 진시우를 완전히 어린애를 대하듯이 바라보고 있다는 건 쉽게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아마도 과거를 알고 있어서 그런 거겠지.’
세상이 세상인 만큼, 그리고 각성자의 보편적인 각성 계기가 계기인 만큼 이 세상에 가족이 없거나 죽은 이들은 많겠지만 과연 제 손으로 그런 결과를 만들어낸 이가 얼마나 있겠는가? 하물며 적어도 집행기관이라면 그 기록들을 모두 열람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니 녀석의 태도와는 별개로 분명 거기서도 어느 정도 관심을 받고 있는 모양.
물론- 그런 만큼 생각했던 인상과는 다르다는 게 신기하긴 했으나 그건 내가 관여할 부분이 아니었고, 진시우의 성격 또한 괜한 동정을 바라진 않을 테니 나까지 녀석을 그리 대해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애초에 진시우도 원작의 중요한 축인 만큼 도움을 요청한다면 도와줄 순 있어도, 본인이 원치 않는 배려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니- 서로 제 역할만 잘하면 되는 부분.
녀석이 헤어지며 남겼던 말을 생각해보자면 진시우 녀석은 계속 멸화급 주교를 쫓을 생각이었고, 이면순례자의 지시하에 움직인다 한들 서로 같이 행동하게 될 테니 내가 해야 할 일은 그저 마인을 베어내는 것이었다.
진시우가 내게 부탁하고, 먼저 협력을 구해왔던 부분은 오직 그것뿐이었으니까.
하물며- 다소 상황이 꼬이긴 했지만 그래도 진시우로서는 사실상 작전에서 강제로 배제되었던 입장에서 다시 반편으로나마 판에 끼어들게 되었으니, 어찌 보면 지금 녀석의 입장에선 나쁘지 않은 상황일지도 몰랐다.
물론- 녀석이 정확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알 수 없는 부분이었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든, 그러므로 나는 일단 녀석에게선 신경을 끄고 이면순례자에게 연락이 올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나름대로 이쪽에서도 신경 쓸 일은 있었으니까.
아니, 정확히는 별로 신경 쓰는 부분은 아니었으나 주말 동안 이하린도 그렇고, 라피냐도 그렇고 자꾸 언급하는 것을 들었더니 나도 모르게 일정을 기억하게 되어버렸다.
그러니까.
[천하 씨도 잘 보구 오세요···! 화이팅!]
[실기 끝나고 기원관 카페로! ٩(*•̀ᴗ•́*)و]
6월의, 아니 학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일정. 등천회랑의 1학기 기말고사를 말이다.
-이제 이것만 끝나면 2주 후에 종강이다!
-오. 이번에도 개인전인가 보네? 진짜 단체전 시험평가는 2학년들만 시행하는 건가?
-아니, 그것보다 마수 커트라인이 왜 저래.
-미친··· 저걸 대체 누······!! 아, 있구나.
그렇게 어느덧 기말고사가 시작되었으니, 소란스러운 분위기와 함께 등천회랑의 생활도 1학기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었다.
3월보다는 조금 더 유순해진 분위기 속에서, 그러면서도 다소 들뜬 분위기 속에서.
***
우선적으로 말하자면 실기는 별거 없었다.
-아니 씨발, 난이도 왜 이런데? 돌았냐고.
-점수 기준 뭔데. 진짜 이거 누가 정함?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난이도와 점수의 기준이 꽤 올라갔단 느낌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내겐 크게 유의미한 수준이 아니었다.
그저 배치 고사에선 A급, 지난 중간고사에선 여명급이 측정의 최대치였다면 이번 시험에서만큼은 도전자에 한해 최대 황혼급까지 도전할 수 있게 기회가 주어졌다는 정도?
-아니, 중간이랑 기록은 똑같은데 왜 점수는 50점이나 내려갔냐고. 이거 왜 이러냐.
-난이도는 똑같은데 채점 기준이 미쳤네.
-그거 다 쟤 때문이잖아. 저 재능충 쉐리.
-덕분에 다 같이 하향 평준화되고 있네. 저저, 적폐 새끼. 나쁜 새끼. 까리한 새끼. 후.
-마지막 말이 뭔가 이상한데 얘. 돌았냐?
물론 생도들에겐 황혼급은커녕 여명급도 일부의 유망주를 제외하곤 혼자서는 도전조차 힘든 난이도겠지만, 아무래도 내가 배치 고사부터 줄곧 실기에서 만점을 기록하고 있다 보니 회랑 측에서도 어느 정도 새로운 기준치를 만들 필요성을 느낀 모양이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였을 뿐.
회랑의 설립배경만 생각해보아도 이곳의 시험은 단순히 보편적인 기록이나 성적이 중요한 게 아닌, 개개인의 역량을 파악하고 확인시키는 게 중요한 사항이었으니 회랑 측도 이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을 터였다.
나 또한 명색이 생도였던 만큼 제대로 실력을 측정시킬 의무가 있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물론.
-아니, 근데 어차피 쟤는 또 만점이잖아.
-아니 이러나저러나 만점 뜨게 할 거면 그냥 쟤만 별도 취급해 주면 안 되는 건가? 나 이번에 800점 넘기는 게 목표였는데··· 씨.
-저 새낀 진짜 미친놈인가···? 뭔 칼잽이가 황혼급 솔플을 저 시간에 뚫어내는 건데?
-미쳤으니까 멸화급이랑 다이다이 뜨지.
솔직히 말해서 지금의 내게 황혼급 한 마리 정도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을 따름이었고, 괜히 나 때문에 바뀐 시험의 기준치 덕분에 혼자 엄한 소리만 듣고 있는 중이었다.
정작 시험 점수 컷을 바꿔버린 사람은 점수가 그대로였으니 이건 어쩔 수 없는 노릇.
-하. 4점으로 놀리던 때가 그립다. 시불. 그때는 그걸로 합리화라도 할 수 있었는데.
-으딜 잿빛 기숙사가 감히 신성한 흰색을? 너도 일찌감치 헌터로 전향하는 게 어때?
-실기 시험 끝났다고 대련 함 뜨자는 거지?
물론 중간고사 이후로 바뀐 아이들의 시선은 승천제 이후로는 완전히 친근하게 돌아선 상황이었기에 대부분은 그냥 한탄 반 장난 반으로 속닥거린다는 느낌이었지만 말이다.
뭐, 어찌 되었든.
[1위 - 유천하 1,000점]
-최종기록 황혼급 마수 04:11초
‘생각보단 수월했어.’
애초에 이건 무척이나 당연한 결과였다.
천마신공이 6성이었던 시절에도 시간만 주어진다면 충분히 잡아낼 수 있었던 걸, 이제는 천마신공도 7성에 올라 8성의 고지를 향해 나아가는 중이었다. 하물며 지금의 내게는 암야도, 이하린이 선물해준 검도, 업륜도 3획씩이나 존재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
특히- 업륜의 획이 하나 더 늘어났다는 게 화력에 상당히 큰 영향을 선사해주었다.
‘확실히 업륜은 효율성이 너무 높아.’
내 내력의 양이 검강을 수십 번을 쏘아낼 수준이라 한들, 결코 한 번에 그 내력을 모두 쏟아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내력은 그릇에 담긴 물이라기보단, 일종의 점점 단련을 통해 쌓아온 근육에 가까웠으니 말이다.
그러니- 내력을 쌓아 한 번에 낼 수 있는 힘을 강하게 할 수 있을진 몰라도, 마공이 아니고서야 한 번에 전력을 쏟는 건 힘들었다.
하지만 이 신비한 힘, 업륜만큼은 사실상 물처럼 사용할 수 있었으니- 원래라면 마력의 규모 차이로 방벽을 뚫어내는데 고생했을 것을, 이젠 아크샤에게 받은 것까지 총 3획의 업륜을 보유하게 된 나로서는 단발성의 화력으로 그 정도야 문제없게 되었던 것.
업륜의 마력은 단 일 검 속에도 막대한 기운을 고스란히 담아낼 수 있는 덕분이었다.
물론 업륜이 기반인 만큼 한계는 있었으나, 일단 기존의 내력에 3획의 업륜이 결집되어 쏘아지는 마력의 양이, 어지간한 수호자급 마수의 마력 방벽 값보단 높았던 탓에 이제는 적어도 황혼급의 마력 방벽까진 혼자서도 생각보다 수월하게 뚫어낼 수 있었다.
비록 멸화급 수준이 된다면 일단 규모 자체가 달라지기에 의미가 없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또한.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고, 객관적으로도 근래의 컨디션은 꽤나 좋은 편이긴 했다.
‘점점 가다듬어지는 느낌이긴 하군.’
지난 주말 간 마인들을 사냥하며 느꼈던 부분이지만, 비록 제대로 된 무형지기나 어검의 기예에 닿진 못하고 있을지언정 확실히 요즘 기세가 점점 고조되어가는 중이었다.
만상의 눈으로 검제의 무형검을 목격하고, 다시 업륜이 3획으로 늘어났더니 편법으로나마 점점 길을 나아가고 있다고 해야 할까?
물론 이대로 업륜을 통한 편법에만 익숙해진다면 정말 천하의 둘도 없는 바보가 되어버리겠지만, 지금의 내 상태는 간단히 말해서 두발자전거를 타기 위해 우선은 네발자전거로 감을 익히고 있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뭔가 생각보다 경지의 중요성에 비해 작고 하찮은 비유이긴 했다만, 일단은 그렇게 접근 중이었으니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을 뿐.
우선은 감을 익히는 게 먼저 아니겠는가?
이 상태로 의념과 기의 경계가 뒤섞인 감각을 기억해, 내 스스로 정신의 기둥을 세워 오롯이 내 힘으로만 펼쳐낼 수 있다면 아마 그때가 내가 8성에 오르는 순간일 터였다.
나 자신의 의지로 물리적인 한계를 뛰어넘고, 검을 공간을 넘어 뻗어내게 되는 경지.
‘무형검無形劍이라······ 나쁘지 않아.’
검제가 보여줬던 광경을 떠올려보면, 가슴이 조금 두근거리는 기분마저 들 정도였으니 확실히 나는 빨리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일검에 공간을 뛰어넘고, 일검으로 마음과 물질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곳으로 말이다.
그리고 물론.
‘······.’
한편으로는 지금의 기분이 우습기도 했다.
애초에 스스로도 다른 이들에 비해 감정의 폭이 무디다는 건 원래부터 알고 있었으나, 확실히 이처럼 무武와 관련된다면 생각보다 감정의 변화가 쉽게 생겨난다는 느낌이라 그 부분이 다소 미묘하게 느껴졌던 탓이었다.
물론 거기에도 나름대로 이유는 있었다.
걸음마를 떼면서부터 검을 들고 다녔고, 평생을 가까이 무武를 수양하며 살아왔더니 이제 내게 검과 무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중요한 축이 되어버렸다. 검을 휘두르는 건 언제나 편안했고, 그러다 보면 머릿속이 차분해졌으며, 마찬가지로 새로운 경지는 언제나 내게 새로운 설렘을 안겨주었을 정도였다.
그러니 어찌 보면 내게 검은 자신과도 같았으니- 스스로도 어처구니없다는 느낌.
‘그러면 내게 검劍은 삶生인 것일까···?’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고 저렇게 생각해봐도 검의劍意에 대해서 무언가 확실하게 꽂히는 요소는 없었으니, 그 생각을 떠올리면 다시 머릿속에서 복잡한 상념이 뒤섞였다.
물론- 그러면서도 이런 생각 또한 들었다.
‘···초절정에는 과연 언제쯤 오르게 될까.’
절정에서 극의에 도달하기까지 대략 2년.
또한 극의에서 초극까지가 대략 1년쯤.
그렇다면 초극에서 벽을 넘어 초절정의 세계에 발을 들이기까진 얼마나 걸릴 것인가?
왠지 모르게 앞으로 몇 걸음, 아니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무언가가 펼쳐질 것 같은데 그 한 걸음을 내딛기까지 누군가는 수십 년이 걸릴 수도 있었고, 다시 누군가는 평생 동안 제자리만 맴돌다 끝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러니- 나 또한 이제까지의 성장 속도와는 별개로, 언제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게 될지는 결코 쉽게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애초에 그게 그리 쉬운 경지였으면 사람들이 그렇게 그곳을 갈망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물론- 도달할 자신 정돈 있었지만 말이다.
‘너무 조급해하는 것도 좋지 않지만······ 확실히 눈앞에 있다 생각하니 거슬리는군.’
사실 지금까지의 속도만 봐도 나는 분명 충분히 빠른 속도로 나아가는 중이었다.
내가 이 세계에 온건 이제야 5개월쯤.
처음 입학식부터 시작해서 자잘한 일들을 지나 카룬드에, 위타극에, 승천제에, 등천의 구도자나 천중무련의 일까지 생각해본다면 참 시간을 알차게도 보냈다는 생각도 들었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시간이란 게 참 빠르게 흘러간다는 생각마저 들었을 정도였다.
무언가 일이 계속 생겨나서 그런지, 아니면 나름대로 꾸준히 정진하고 있어서 그런지 어째 시간의 밀도가 꽤 짙었다는 느낌.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나는 5성의 끝자락에서 다시 7성의 봉우리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러니 지금의 내게 중요한 건 더 빠르게 경지에 올라서는 게 아닌, 더 안전하고 확실하게 지반을 다지며 올라가는 것이었으나 이래저래 계속 새로운 변수가 들려오니 나도 모르게 조바심이 생겨나는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를, 그리고 변수를 생각하자면 지금보단 더 강해질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급해하면 안 돼.’
그러한 조바심의 결과를 알았기에 나는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했으니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나는 똑같은 절차를 밟을 순 없었다.
물론 겨우 8성에 오르는 것으로 심상의 번뇌가 나를 집어삼킬 거란 생각은 안 들었으나, 그 이후의 경지를 생각해서라도 나는 제대로 심마를 정돈해나가며 나아가야 했다. 내가 원하고 바라보는 길은 당장 눈앞의 봉오리에서 끝나는 길이 아니었던 탓이었다.
하니- 상념에 너무 빠져들어도 곤란할 뿐.
“······.”
그렇기에 나는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스럽게도 이 세계에는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어 주는 요소들도 많았지만, 그와 반대로 무림하고는 확연하게 대비될 만큼 평화로운 일상 또한 느낄 수 있었으니- 이럴 때는 그러한 분위기에 들어가 있는 것도 생각보다는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던 탓이었다.
구태여 회귀자에 대해서도, 그림자 교단의 실험에 대해서도, 경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그렇기에 느낄 수 있는 평온함이 있을 테니까 말이다.
물론 그것도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적절한 균형이 필요하긴 했다.
하지만 적어도 근래 외출도 잦았던데다가, 주말에 돌아오고 나서도 따로 3학구에 가진 않았기에 지금은 신경 쓰지도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요즘 아리엘과 이하린이 나를 꽤나 수상쩍게 바라보는 중이었으니까.
하물며 남미에서 했던 떨떠름한 상상이 현실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아무 일 없는 척 태연하게 굴 필요성이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러므로.
“아···! 천하 씨다!”
“응? 아, 어서 와!”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빨대를 입에 물고선 인사를 건네오는 두 사람을 향해 다가갔다.
***
오랜만, 아니 사실 끽해야 금요일까지 합해서 3일 만에 보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이번 주말 동안은 아예 못 봐서인지 이하린이 방실거리는 얼굴로 반갑게 인사를 건네왔다.
물론 옆에 있던 아리엘도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손을 가볍게 흔들어주었고 말이다.
“안녕하세요···! 시험 잘 보셨어요?”
“예. 실기라 그럭저럭 괜찮았습니다.”
“하긴 천하 씨는 항상 만점이겠죠···?”
“실기라면··· 딱히 할 말이 없네요.”
그런데 그 순간.
“어? 근데 천하 너 D조 아니야? D조면 아직 시험 시작한 지 10분도 안 된··· 설마?”
반갑다는 듯 부드럽게 인사를 건네던 와중 음료를 마시려고 손을 들어 올리던 아리엘은 순간 제 손목을 바라보고는 의아하다는 듯 눈을 깜빡거렸고, 이내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물론-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기에 나도 가볍게 대답을 돌려주었을 뿐.
“그 정도면 시간은 충분하니까.”
“······혹시나 해서 그런데 너.”
“황혼급까지 도전한 거 맞아.”
그러자 아리엘은 벙찐 표정으로 입을 벌려왔고, 옆에서 열심히 빨대를 후룩거리고 있던 이하린도 뒤늦게 내 말을 이해했는지 콜록거리며 이내 두 눈을 동그랗게 떠 보였다.
“그 말씀은··· 그러면?”
그러더니 붉어진, 그러니까 토끼 같은 눈으로 빠르게 제 워치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성적을 확인해보려는 모양.
“전체 성적은 저녁에 같이 뜨지 않나요?”
“최종 순위는 그런데 기록 자체는··· 아!”
안 그래도 커다란 이하린의 눈이 더 커다랗게 벌어졌고, 그 모습을 본 아리엘이 두 눈을 깜박거리더니 그녀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나도 볼래! 기록이 어떻게 떴는지!”
그리고는.
“······.”
“······.”
그렇게- 두 사람 다 굉장히 복잡미묘한 표정이 되어서는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으니, 나는 둘의 그 태도가 이해가 가지 않아 잠시 시선을 돌려 이하린의 워치를 들여다보았다.
내가 이러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새삼스러운 둘의 반응이 다소 의아했던 탓이었다.
그러자 내 시야에 들어오는 순위.
[등천회랑 2020년 상반기 평가고사]
[1학년 - 실전 전투 역량평가]
[1위 - 유천하 1,000점]
-최종기록 황혼급 마수 04:11초
[2위 - 진시우 1,000점]
-최종기록 황혼급 마수 10:27초
[3위 - 아리엘 화이트 980점]
-최종기록 여명급 마수 08:28초
[4위 - 남궁설아 980점]
-최종기록 여명급 마수 08:32초
역시나 기말고사의 기록이라 한들 딱히 별로 이상할 것도 없는 광경이었고, 오히려 이 순간 내 시야를 사로잡은 건 내 기록이 아닌, 진시우 녀석의 기록이었을 따름이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약간 의외의 행동.
황혼급까지 기회가 주어지긴 했으나 녀석의 성격상 굳이 황혼급 까지 도전할 줄이야- 물론 은근히 기관의 눈치를 보아서인지 성적을 신경 쓰는 편이라 못할 건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기회다 싶어 주말에 받은 스트레스를 해소한 것처럼 느껴진다면 내 착각일까?
물론 마수의 종류도 중요했기에 상성의 차이에서 다소 갈리긴 하겠지만, 그래도 녀석 혼자서 싸우는 거라면 이지가 없는 황혼급까진 진시우에겐 뛰어다니는 샌드백 같은 느낌일 테니 크게 다르진 않을 것 같긴 했다.
진시우의 장점은 분명 그 압도적인 마력량을 바탕으로 한 화력 포대였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잠시 주말에 보았던 녀석의 표정을 떠올리며 잠시 생각해보고 있자니, 아리엘이 어이가 없다는 듯 다시 말을 건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