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행자 (1)
수십억에 달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 세계에서, 정작 그 생명의 무게를 짊어지고 싸우는 이들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았다.
그 수십억 중에서 특별한 힘을 깨우친 이들은 고작해야 수백만 명이었고, 거기서 그 힘을 갖고 전장에 발을 들이는 게 수십만 명, 다시 그중에서도 공략자로 활동하는 이들의 숫자는 기껏해야 수만 명에 불과했을 뿐.
하물며- 그 무게를 감당할 실력을 지닌 이들은 더더욱 부족했으니, 어찌 보면 지금 이 상황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시펄, 내일은 산타렝에 들려야겠··· 음?”
“산타렝? 벌써 할당량을 다 모··· 어라?”
“뭐야 갑자기 어디 봐? 뭐 지나가··· 어?”
단순히 마석을 빼다 팔기 위해 싸우는 이들 사이에서, 오직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침식과 맞서 싸우는 이들은 분명 특별했기에 사람들은 공략자들을 존중했다.
하니- 그런 존중이 관심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승천자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100명에 달하는 하이랭커들에 대해서도, 이름이 자주 들려오는 등천자들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자연스레 공략자들을 주목하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야, 잠깐만··· 저기, 저거 그놈 아니야?”
“뭔 소리야 갑······ 뭐야, 쟤가 여긴 왜?”
“허··· 직접 보니까 진짜 존나 눈에 띄네.”
-굳이 선두 공략자가 아니더라도 재능을 품은 이들은 언제나 주목받아왔을 따름.
공략이란 말의 의미가 사람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것에서 기인하였기에, 선두 공략자는 물론이고 미래의 희망이 될 수 있다는 자질을 증명한 이들에게 세간의 관심이 쏠리는 것은 분명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응원과 격려의 의미를 담아 그들을 주시했고, 누군가는 그들의 재능을 질시와 시기의 마음으로 바라보았으며, 때로는 어린 나이임에도 빛나는 그들의 행보를 보며 선망 어린 마음을 품기도 하였다.
바로- 그들을 유망주라 칭하면서 말이다.
“살다 살다 여기서 유망주를 다 보네.”
그러나, 당연하게도 그러한 관심이 언제나 좋은 방향으로만 이어질 수는 없는 노릇.
“아니, 그것보다 저 녀석 생도 아니었냐?”
“생도가 여기엔 왜 온 거야? 이상하네.”
“공략··· 이라기엔 혼자 온 모양인데···?”
하물며 그렇게 주목받는 이의 행보가 평범하지 않다면야, 다른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딱 좋은 가십거리를 제공한다면야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만큼.
유망주들 사이에서도 항상 압도적인 자질을 증명해왔던 생도. 기관들이 평가하는 유망주 랭킹의 1위를 꾸준히 유지해온 생도.
하지만 그러면서도 헌터처럼 마석을 캐다 파는 초인. 자유연맹에 그 이름을 올려 특례법의 개정을 지지하는 이질적인 공략자.
진시우는 분명 ‘여러’ 주목을 받는 이였다.
그 자체의 재능과 실력을 보나, 혹은 지금까지의 행보를 보나, 어느 쪽으로든 말이다.
“설마 헌터 짓까지 한다더니 진짜였나?”
“뭐야··· 그러면 꼴에 유망주란 녀석이 여기에 마석이나 캐러온 거라고? 우리처럼?”
“하, 하하하!! 진짜면 거 웃긴 자식이네.”
애초에 수많은 공략자들 중에서도 차세대의 선두 공략자가 되리라 확실시되는 생도이자, 그러면서도 다른 공략자들과는 달리 미묘한 행보를 보이는 회색분자의 얼굴은 어지간한 랭커들보다 더 널리 알려져 있는 상황.
심지어 그 외형조차도 다른 이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색채를 띠고 있다면야 더더욱 눈에 띌 수밖에 없었으니- 진시우가 로브를 벗어젖히고 담담히 거리로 나온 순간부터, 이러한 반응은 정해진 결과였을 뿐이었다.
아니, 애초에 진시우는 그것을 예상하였기에 아무렇지 않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확실히··· 예상대로군.’
바로- 마인들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서.
-그나저나··· 거 존나 부담스럽게 생겼네.
-설마 다른 놈은 아니겠지? 저 얼굴로.
-와, 가릴 생각도 없이 그냥 돌아다니네.
그리고 그 예상은 역시나 그대로 들어맞았고, 진시우는 단번에 주목받기 시작했다.
새하얀 백색의 머리카락, 붉은색의 눈.
그렇게 너무나도 이질적인 그의 외형은 골목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그 얼굴을 보자마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시우의 정체를 눈치채게 되었다.
이곳에 거주하는 빈민들도, 공략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헌터들도, 침식 영역에 들어가기에 앞서 잠시 들린 공략자들도. 그 누가 되었든 오랫동안 언론과 각종 웹사이트에서 꾸준하게 언급되고, 조명받아온 진시우의 얼굴 정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한눈에 진시우를 알아보고는, 그에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대체 왜 저런, 그러니까 아직 생도에 불과한 이가 이런 후미지면서도 위험한 전선에 얼굴을 내비쳤는지 의아해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물론.
“아이고, 이런 누추한 곳에 귀한 분이 오셨네. 고귀하신 공략자님께서··· 어쩐 일로?”
“생도가 되어서 마석이나 캐러 온 건가?”
“하여간 맞을 일 없다고 깝치긴. 야 거기! 진시우 맞지? 승천제 때 활약은 잘 봤다!”
그렇게 시작된 관심은 이내 각자의 흥미에 따라 흘러가 각각의 형태로 토해졌을 뿐.
진시우는 지금 로브는 대충 구겨 팔에 걸친 채 광장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기에, 그런 그를 향해 이런저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단순히 공략자들에게 자격지심을 갖고 있는 이부터 시작해, 공략자와 헌터의 간극에 대해 조소를 머금은 자도, 다른 일이 어찌 되었든 생도라는 사실 자체를 좋게 보고 있는 자도 지나가던 그에게 한마디씩 던져댔으니- 그러한 외침들은 미처 그를 발견하지 못했던 이들의 이목까지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뭐야 저긴. 갑자기 왜 저렇게 시끄러워.
-누구 유명한 사람이라도 왔나 본데?
-설마··· 스, 승천자라도 온 건 아니겠지?
-그랬으면 오히려 쥐죽은 듯 조용했겠지.
그리고 주변에서 들려오는 그 소음에 진시우는 이내 천천히 미간을 찡그렸다. 마치 이러한 시선이 짜증 난다는 듯,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거슬린다는 듯이, 그렇게 말이다.
하지만- 물론 그것은 연기에 불과했다.
‘슬슬··· 어느 정도 모여들었나.’
애초에 진시우가 원한 건 처음부터 이런 상황이었던 만큼, 실제로 그가 느끼는 감정은 드러난 표정과는 다르게 꽤나 평온했다.
물론 시선과 웅성거림이 거슬리긴 했지만 애초에 진시우는 다른 이들의 시선을 신경 쓰는 성격이 아니었고, 지금의 이 상황은 어디까지나 처음부터 이런 반응을 예상하고 일부러 택한 것이었으니 불만이 어딨겠는가?
이건 처음부터 그 자신이 자처한 계획.
하니- 진시우로서는 그저 어느 타이밍에 행동을 시작해야, 유천하의 거동이 수월해질까를 생각해보는 게 전부였을 따름이었다.
‘그래도 역시··· 아직은 애매하겠군.’
물론 근래의 행보나 인지도를 생각한다면 유천하가 얼굴을 드러내는 쪽이 마인들의 관심을 사로잡기엔 더 수월했을 테지만, 지금 유천하가 해야 할 일은 그런 게 아니었기에 직접 시선을 끌기 위해 나선 것에 불과했다.
시가지에선 능력의 제어가 어려운 저가 시선을 끌고, 유천하가 마인들을 살해한다- 그게 자신들이 선택한 계획이었으니 말이다.
‘후폭풍까지 고려한다면 어쩔 수 없지.’
애초에 진시우 저 자신이 이곳에 발을 들였다는 것 정도는 솔직히 말해서 그닥 주목도 못 받을 테지만, 그와 반대로 만약 유천하가 이곳에서 얼굴을 드러낸 채 타천자까지 사냥해버린다면 당장 1시간도 안 돼서 온 사이트에 이름이 도배될 게 뻔한 노릇이었다.
원래부터 헌터 소리를 들어왔던 저와 근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차세대 승천자의 이름은 분명 그 무게가 다를 테니 말이다.
그러니 이게 가장 깔끔한 방법이었다.
어차피 이걸로 기사가 떠봤자 끽해야 황색 언론의 비난 정도일 테고, 대부분은 그저 진시우 걔가 그럼 그렇지- 정도로 여길 게 뻔했으니, 추후 이면순례자에 올라갈 보고만 잘 둘러댄다면 문제없겠다는 판단이었으니.
고작 그 정도로 수고로 그림자 교단의 꼬리를 밟을 수 있다면야 뭐가 어렵겠는가- 그렇게 진시우는 그런 생각을 되새겨보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
“······.”
진시우의 영감靈感은 드디어 자신을 바라보는 잿빛의 파문을 감지해낼 수 있었고, 타천자가 자신을 응시한다는 걸 인지하자마자 그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유천하가 말한 시간은 20초였으니, 저 신경을 확실히 사로잡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경계를 사지 않으면서.
물론 그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진시우는 바보가 아니었기에 저 자신의 인지도와 독특함을 객관적으로 인지하고 있었고, 마침 이곳은 야밤이 찾아온 무법지대의 한복판이었으니 나름대로 방법이 없진 않았다.
굳이 하나만 예를 들어보자면-
“쯧. 공략자면 공략이나 하고, 마석을 캘 거면 마석이나 캐든가! 명예는 명예대로, 실리는 실리대로······ 어린 노무 쉬끼가 씨펄.”
“하하하!! 애새끼한테 질투라도 하냐?”
“질투는 뭔···! 박쥐 같은 게 좆같은 거지!”
“취했군, 이 자식. 목소리가 너무 컸어.”
-바로 저러한 시빗거리 같은 게 말이다.
마침 타천자가 있는 방향 쪽에 앉아있던 한 남자가 대놓고 그를 향해 욕설을 내뱉었으니, 진시우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러자 주변에 앉아있던 이들이 순간적으로 몸을 움찔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정작 욕을 내뱉었던 남자는 그저 잔뜩 달아오른 취기를 내비치며 진시우를 노려보았을 뿐이었다.
“뭐야··· 뭘 봐! 불만 있냐 이 새끼야!”
그렇게 적반하장으로 되돌아오는 꼬장.
분명 헌터로 보이는 저 남자도 원래라면 이런 식으로 굴진 않았겠지만 술이 들어간 무법지대의 밤은 그에게 용기를 심어주었다.
물론 술기운이 없었더라도 설마 명색이 생도라는 놈이 이런 시비 좀 걸렸다고 손을 쓰진 않을 거라 생각했을 테고, 애초에 상대가 평범한 공략자라면 모를까 진시우처럼 저렇게 구설수가 많은 이라면 욕할 구실도 있으니 참을 이유도 없다 생각했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렇게 흐리멍덩해진 남자의 이성은 그가 평소에 품어온 공략자에 대한 반감과 열등감을 토해내기 시작했으니- 남자는 진시우를 바라보며 큰 소리로 빈정거렸다.
누가 들어도 잔뜩 취한 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텅 빈 허공에다 주정을 토해내듯이.
“씨펄! 누구는 잔챙이 하나 잡는 데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데···! 누구는 재능을 타고난 덕분에 저러고 살고, 후원도 받고, 그래놓고 헌터짓까지 하는데도··· 욕도 덜 먹고······.”
“······야야. 노려본다. 애한테 그만해라.”
“뭘 그만해! 지가 뭘 어쩔 건데 새끼가. 어리면 단가, 생도면 단가······ 눈깔하고는···.”
하지만.
“도대체 무슨 배짱인지 모르겠는데.”
“······응?”
가만히 참고 넘어갈 거라 생각했던 사람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진시우는 남자를 바라보며 조소를 머금었고, 그 순간 흘러나온 진시우의 목소리는 거리에 선명히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혼자 떠들 거면 조용히 떠들든가. 모르는 사람한테 그런 소릴 듣고도 참아야 하나?”
“······무, 뭐?”
“일반인도 아니면서 어처구니가 없군.”
우웅-!!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찡그린 그의 손에선 마력까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순간에 피어나는 방대한 마력.
“······!!”
물결치듯 퍼져 나가는 그 마력의 양에 미묘한 심경으로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던 헌터들은 물론이고, 흥미롭게 지켜보던 마인들이나, 불안하게 지켜보던 공략자들까지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일제히 그곳을 바라보았다.
왜냐하면- 척 봐도 화가 난듯한 진시우가 마력까지 끌어올리며 인상을 쓴 채 욕을 하던 남자에게 다가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 뭐야··· 설마 한 대 치려는 건가?
-설마 생도가? 이렇게 보는 눈이 많은데?
-아니, 그것보다 저거 마력량 뭐야 시발.
-공략자치곤 재밌는 녀석이네 저 새끼.
물론 진시우로서는 실제로 화가 난 게 아닌, 그저 딱 좋은 핑곗거릴 찾았을 뿐이었지만 그걸 다른 사람들이 알 수는 없는 노릇.
사람들의 시선에는 대강 봐도 성깔이 더러워 보이는 사춘기 소년이 화를 참지 못하는 것처럼만 보였기에, 남자의 주변에 있던 일들은 슬금슬금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생도가 고작 이런 일로 사람을 팰 것 같진 않았지만- 평소 뉴스에서 들었던 진시우란 사람의 이미지를 생각하자면, 그리고 행보가 미묘할지언정 유망주라 불릴 정도라면 어지간한 각성자는 상대도 안 될 터였기에 그들로서는 괜히 휘말리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방금 뭐라고 했었지? 잘 못 들었는데.”
“······.”
갑작스러운 마력의 압박에 서서히 술이 깨기 시작한 남자는 약간 아차 싶은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으나, 이미 그 주변에는 휑한 공간만이 생겨나 있었을 따름.
그들로부터 한순간에 거리를 벌린 사람들이 두 사람을 빙 두른 채로 각양각색의 표정 속에 저들을 바라보고 있었으니 취해있던 남자도 빠르게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었다.
나이고, 행보고를 다 떠나서 지금의 마력만으로도 술이 깨기엔 충분했던 탓이었다.
“······아··· 그··· 그, 그게.”
그렇기에 침을 꿀꺽 집어삼킨 남자는 어떻게든 상황을 무마시키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물론-
“쯧. 술주정도······.”
-진시우로선 이 상황도 그저 핑계에 불과했기에 그가 뭐라 하든 말든 상관없었을 뿐.
그러므로- 진시우는 그저 천천히 제 손을 들어 올렸을 따름이었다. 그것도 마치 다른 이들의 눈에는 남자를 위협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그러면서도 일부러 허세를 부리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다소 과장되게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상대를 봐가면서 부렸어야지.”
우웅-! 진시우의 손에서 터져 나온 막대한 빛이 상대를 위협하듯 불을 밝히며 밤하늘을 향해 솟구쳤고, 그대로 파동을 터트렸다.
그것도 어두운 밤하늘을 한순간에 대낮으로 만들어버리며, 그곳을 구경하듯 바라보고 있던 수백 명의 시야를 환하게 물들이면서.
마치- 자신의 마력을 과시하겠다는 듯이.
그렇게 진시우의 몸에서 쏟아진 방대한 마력은 모조리 빛으로 화해 하늘을 물들였고, 난데없이 솟구친 백색의 파동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으니-
──────────────!!
“······큭! 갑자기 무슨 짓이야 시발!”
“아니, 뭐 저딴 미친놈이 다 있어?!”
-그 덕분에 그곳을 바라보고 있던 난민도, 헌터도, 공략자도, 그리고 마인들까지도. 모두 순간적으로 두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고작 저런 시비로 이렇게 능력까지 사용하는 진시우의 행태에 어이없어하면서도, 동시에 저렇게 손쉽게 토해냈다기엔 너무나도 방대했던 마력의 양에 기겁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 순간.
“······.”
저벅- 시기를 기다리고 있던 한 인영은 진시우가 손을 들어 올린 시점에서 이미 두 눈을 감은 채 광장의 중앙을 거니는 중이었다.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기척을 가라앉힌 채 군중 속에 녹아들어 있던 검은 인영은, 그렇게 빛이 터져 나온 순간- 오온에 접어든 채로 부드럽게 제 손을 들어 올렸다.
─────────────······.
그것도- 그 손에서 검은빛을 토해내면서.
***
백야의 세계는 분명 한순간에 찾아왔다.
그리고 그 눈부심을 지켜보던 이들의 행동은 너나 할 거 없이 모두 똑같이 펼쳐졌으니, 진시우가 무슨 짓을 할지 저마다의 관심 속에 바라보던 이들은 일제히 갑작스러운 빛으로부터 고개를 숙인 채 지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시선을 회피하면서도,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건 제각기 달랐다.
분명 실력이 없는 이들은 난데없이 솟구친 빛을 이해하지 못한 채 사고가 정지했지만, 그와 반대로 감각이 좋은, 그러니까 실력이 뛰어난 이들은 진시우의 행동에 어처구니없는 기분을 느끼면서도 그 마력을 가늠했다.
그리고- 당연히 마인들은 후자였을 뿐.
애초에 그들은 조금 전 상황을 낄낄거리며 바라보던 중이었기에 별다른 위협을 느끼진 않았던 탓도 있었고, 저들을 공격한 것도 아닌 만큼 말로만 듣던 유망주의 실력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볼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마력량은 감탄스러울지언정 척 봐도 과시용으로 뿜어낸 빛에 겁먹고 움츠러들 정도라면 마인 노릇을 어떻게 해 먹고 있겠는가?
진시우의 행동을 술에 취한 행인의 시비에 사춘기 유망주가 짜증을 내고 있다는 것 정도로 받아들인 그들은 적의조차 실려있지 않은 마력에 반응할 정도로 초짜가 아니었다.
하지만.
퀴잉.
그 판단이 마인들의 목숨을 결정지었다.
“······.”
이미 모든 기척을 가라앉힌 채 광장의 한가운데로 걸어들어와 있던 유천하의 손- 그 손등에서 빛이 진동하던 순간. 바로 그 순간 칠흑의 선이 허공을 격하고 쏘아져 나갔다.
빛이 떠오르고, 유천하의 검이 저 혼자 떠올라 허공을 가로지르기까지가 약 0.2초.
그리고 서로 20, 30m씩 떨어진 채 그 광경을 구경하고 있던 마인들이 연이어 터져 나온 섬광에 눈을 감기까지가 대략 0.5초.
마지막으로.
“······어?”
푸슉-! 시력을 빼앗겼던 마인의 심장에 검은 점이 새겨지기까지가 고작해야 1초.
그것이 마인이 토벌되기까지 걸린 시간이었으니, 마인이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그 핵을 꿰뚫린 형체가 한줄기 그림자로 화해 터져 나가는 중이었고, 마인의 몸이 펑- 터지는 순간 빛이 한 번 더 터져 나왔다.
──────────────!!
그렇게 하늘에서 연이어 터져 나오는 빛의 파동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입을 떡 벌린 채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고, 그 광량에 다른 마인들조차 광장의 상황을 눈치채지 못했다.
허나- 두 눈을 반개한 채 걸음을 옮기는 유천하만큼은 오직 마인들만을 응시했을 뿐.
육안은 닫혀있을지언정 만상의 눈은 이미 근방의 전경을 모두 들여다보고 있었고, 그림자처럼 은밀히 인파 속을 걸어 나가는 유천하는 부드럽게 다시금 제 손을 그어냈다.
우웅-!! 그러자 마인을 꿰뚫은 검신이 한 번 더 허공에서 춤추며 쏘아져 나갔으니- 지금 이 상황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한 가지.
그렇게 이 순간.
─────────────······
느려지고 느려진 찰나의 세계 속에서 유천하는 어검馭劍의 기예를 부리는 중이었다.
정확히는 그 경계에 걸쳐진 기예를.
“······.”
사실 초절정에 오르지 못한 유천하가 벌써 어검을 다루는 건 이상한 일이었지만, 이건 그저 지난번 검제와 보냈던 시간을 통해 낚아챈 몇 가지 발상을 시도한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바로 의지의 각인.
물론 원래라면 이건 검의를 새겨, 그 의지를 물질의 너머까지 벼려내야만 가능한 시도였으나, 지난번 이하린과 다른 아이들에게 탄검강을 설명해줄 때의 일을 떠올려본 유천하는 업륜의 활용을 시도해보게 되었다.
우웅-!!
애초에 업륜은 자유로운 성질을 품고 있었고, 의식과도 일체 되는 기운이었다.
그렇기에- 유천하 스스로도 원래부터 그러한 업륜의 성질을 통해 검강을 수십 미터씩 멀리 쏘아내고는 했었으니, 최근에는 그저 그러한 응용의 방향성을 조금 더 의념의 경계를 무너트리는 쪽으로 연습해보았을 뿐.
한 마디로 이건 업륜을 통해 반강제적으로 의념과 기운을 혼합시킨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충분해.’
지금처럼 별것도 아닌 녀석들을 상대로는 이러한 반푼이 기술로도 충분했기에, 유천하의 검은 그렇게 저 홀로 검무를 펼쳐냈다.
부드럽게 흐르는 손, 허공을 유영하는 검.
─────────────······
감속된 세계를 거닐면서 유천하의 심안은 물질의 장벽을 꿰뚫고 마인들의 위치를 들여다보고 있었고, 그 의식은 의념 속에 각인되어 그대로 검의 궤적을 그려내고 있었다.
퀴이잉-!! 퍼석··· 퍼엉-!! 콰아앙-!!
원래부터 의념의 활용을 수련해온 그였기에, 업륜으로라도 의식이 뻗어 나갈 수만 있다면 조정 자체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지난번 아크샤와 조우했을 때 쏘아진 참격을 그대로 공간에 유지시킨 것도 그러한 응용의 결과였고, 지금은 그걸 검 자체에 깃들어 조정해내는 것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다소 억지스러운 편법일지언정 말이다.
그러나 이 복잡한 인파를 헤치고 마인들을 베어내는 것보다는, 검 하나만 허공을 가로지르며 마인들의 핵을 꿰뚫어내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으니- 진시우가 쏘아낸 빛이 흐릿해지며 사람들의 시야가 회복되었던 때.
바로- 그 순간엔 이미.
푸슉-!! 카득··· 퍼엉-!!
“······!! 뭐, 무슨···?!”
유천하도 목적을 달성해나가고 있었다.
비록 아직 두 명이 남아있었지만, 빛이 사그라드는 순간 유천하의 신형은 이미 남은 마인 중 한 명의 뒤에 도달해 있었고, 암야를 뒤집어쓴 유천하의 손은 마치 허공에서 튀어나오듯 기척을 드러내며 마인의 꿰뚫었다.
맨손에 묵빛의 강기를 예리하게 머금은 채, 그는 그렇게 순식간에 마인을 살해했다.
퍼엉-!!
그리고- 그와 동시에.
“······!!”
“······?!”
난데없이 옆에 있던 사람이 마력으로 화해 터져나가는 걸 목도하게 된 사람들이 경악한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그들의 입에서 미처 비명이 토해지기도 전에 유천하의 검은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마인을 꿰뚫었을 뿐.
그 순간까지 걸린 시간이 대략 10여 초.
그리고- 그때가 돼선 진시우를 바라보고 있던 타천자도 이 상황을 인식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지금 이게······.”
아직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늘의 빛에 시선을 빼앗긴 상황에서, 오직 몇몇만이 광장에서 일어난 이변을 눈치챈 상황에서, 제 수하들의 죽음을 타천자가 깨달은 상황에서.
순식간에 100m 반경을 휩쓸며 그림자의 폭풍을 만들어낸 흑색의 검이 다시 공간을 가로지르며 유천하의 손으로 날아왔으니-
바로 그 순간.
“······무슨?”
콰앙-!! 고개를 돌린 타천자의 시야에 들어온 건, 사방 곳곳에서 흩날리는 그림자의 잔재와 칠흑빛 검을 움켜쥐고 저를 향해 다가오는 검디검은 인영이었을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