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팅시즌 (2)
마음을 정했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림자 교단을 척살하는 것도 어차피 해야 할 일이었고,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또한 생사가 오가는 실전이지 않겠는가? 사전에 계속 얘기했던 부분이 있었던 만큼 나는 빠르게 진시우 녀석과 합류했다.
주말이 시작되자마자 게이트를 타고 넘어가선, 다시 도시를 빠져나와 그 바깥을 향해.
그리고 그 결과.
“······쯧.”
철벅-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울려 퍼지는 이 질척질척한 소리가 덥고도 습한 공기와 함께 어우러지며 이곳이 어떠한 곳인지를 끊임없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었으니, 우리는 지금 남미의 열대우림을 거니는 중이었다.
그나마 건기에 속하는 시기라 들었는데 확실히 지역 자체의 기후는 무시할 수 없었다. 만약 그냥 왔다면 조금 불쾌했겠다는 느낌.
물론 나는 암야와 풍결의 가호를 조절하며 평소와 비슷한 느낌으로 숲속을 거니는 중이었기에 딱히 상관없었지만, 아무리 봐도 진시우는 나하곤 체감이 조금 다른 듯했다.
한눈에 봐도 더워 보이는 로브를 전신에 걸치고 있는 녀석은 아무래도 이 기후를 고스란히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는데, 그 사실은 녀석의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과 끊임없이 순환하는 마력.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더럽게도 길게 하는군.”
빨리 끊으라는 듯 잔뜩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녀석의 표정이 알려주고 있었을 따름.
하지만 이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고 있기에, 그리고 요즘 자꾸 바깥을 돌아다니고 있다는 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기에 나는 그에 개의치 않고 통화를 이어나갔다.
왜냐하면.
[주말 동안 또 어딜 다녀오신다구요···?]
“예. 수련은 갔다 와서 봐 드릴게요.”
내게는 진시우 녀석의 기분보다는 이하린의 기분 쪽이 조금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이성적으로든, 감성적으로든 마찬가지로.
나름대로 이러는 이유도 있었고 말이다.
그렇게 내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황폐해진 습지에 울려 퍼졌고, 그 대답에 이하린은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내게 답해왔다.
[······위험한 일 하러 가신 건 아니시죠?]
“예. 위험한 일은 아닙니다. 저한테는요.”
[······.]
나로서야 딱히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지만 이하린에겐 내 대답이 어떻게 들렸던 걸까?
나는 워치 너머의 미묘한 침묵으로부터 불만 아닌 불만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 부분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았다. 오늘의 행적을 설명해주기에는 미묘한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잠시 적막이 흘러갔고, 이내 상대- 이하린도 알겠다는 듯 대답을 건네왔다. 물론 그건 아까보단 시무룩해진 목소리였다.
[네에··· 알았어요··· 그럼 아리엘 씨랑 수련하고 있을게요······ 그, 이번엔 저번처럼 길어지는 게 아니라 주말만 다녀오시는 거죠?]
“예. 월요일 전에는 돌아갈 예정입니다.”
[네엡··· 기말고사니까 꼭 오셔야 돼요.]
기말고사라- 나는 이하린의 말에 잠시 생각해보았는데, 그다지 중요치 않은 일정이긴 했으나 그래도 굳이 빠질 생각은 없었다.
지난번 천중무련 방문부터 시작된 외출도 그렇고, 앞으로의 일정도 그렇고, 화이트라인정도는 계속 유지해줘야 회랑의 규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지 않겠는가? 최소한의 성적은 맞춰 줄 필요성이 있었다.
어차피 이제 기말고사가 끝나면 얼마 안 가 1학기도 같이 끝날 테고, 잠시 계절학기- 즉 방학이 찾아올 테니 고작 며칠 신경 쓰는 거로 2학기 중간고사까지 문제없다면야······ 그러니 정말 갑작스럽게 뜻밖의 변수라도 생기지 않는 이상 시험은 보러 갈 생각이었다.
하여- 가볍게 대답을 돌려주었더니 이하린이 이번에는 조금 뜻밖의 말을 건네왔다.
[그··· 그으러면 호옥시··· 뭐 하나만······.]
“예. 편하게 말씀하세요.”
[아, 아리엘 씨가 시험 끝나면 하루만 다 같이 놀자고 하셨는데··· 시간 괜찮으세요?]
“······아리엘이요?”
어째 상당히 의외의 제안이라는 느낌.
물론 이하린과 다르게 근래의 아리엘은 예전보다 더 여유가 느껴지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고 있긴 했지만, 그와 반대로 수련 같은 쪽에서만큼은 전혀 풀어지지 않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이하린이 그러하듯, 아리엘도 무언가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모양인지 승천제 때 끌어올렸던 컨디션을 계속해서 유지하려고 노력한다는 게 옆에서 봐도 느껴질 정도였다. 그때 같은 조급함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무언가의 목표가 새로 생긴 모양.
그렇다 보니 아리엘의 입에서 놀자는 말이 나왔다는 게 신기해 되물었더니, 이하린의 입에서 조금은 소심해진 대답이 흘러나왔다.
[네엡··· 안 그래도 요새 천하씨도 근심이 많아 보이고, 1학기에 이런저런 일이 있었으니까. 그냥··· 소소하게 같이 하루만 쉬······.]
“아··· 예. 알겠습니다. 괜찮습니다.”
[······! 저, 정말요?! 노는 건 데도요?]
아무래도 내가 거절할 거라 여겼던 건지, 작게 옹알거리던 이하린이 놀라 되물었다.
그에 나는 다시금 확언을 건네주었다.
“하루 정도는 크게 상관없습니다.”
[넵! 그러면 그렇게 전할게요···!!]
그러자 내가 또 자리를 비운다는 말을 듣고 난 뒤부터 약간은 힘이 빠진 채로, 소심하게 말을 건네오던 이하린이 다시 처음처럼 활력이 솟아난 목소리로 힘차게 대답했다.
참으로 손쉽게 휙휙 변하는 이하린의 기분에 내 입에선 작게나마 웃음이 흘러나왔다.
“예. 그렇게 해주세요.”
나는 옆에서 미미하게 인상을 찡그리는 진시우를 흘깃하고는 다시 대답을 건네줬고, 그리고는 이내 잠시 일정을 생각해보았다.
물론 요새 고민거리가 많았던 만큼 휴식이라는 말이 썩 흥겹게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하루 정도는 그래도 문제 없을 것 같았다. 저 말처럼 근래의 내 모습에 두 사람이 신경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도 조금은 신경 쓰이기도 했고, 이런저런 일이 있었던 만큼 적당히 어울려줄 필요성을 느낀 탓이었다.
하물며 근래에 들어서 더 여유가 없어진 이하린마저 저 제안에 찬성했을 정도라면, 요새 내가 자리를 많이 비우긴 했다는 느낌.
“아··· 예, 예. 그렇게······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이하린의 말에 적당한 대답을 되돌려주며 느슨해지는 기분을 느껴보았다.
조금은 신이 난 이하린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역시나 언제나처럼 무거웠던 기분도 뭉그러지기 시작했는데, 확실히 한번씩 쉬어주는 것도 내게는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당분간은 이쪽일에 매달리게 된 만큼 정신이 다소 날카로워질 예정이었으니, 최근의 상태를 생각해본다면 상념이 너무 많아지기 전에 한번씩 풀어줄 필요성이 있었을 따름.
그러한 번뇌가 내게 나아갈 길을 제공해줄지언정, 조급함에 발을 헛디디면 어떻게 될지는 아버지께서 몸소 보여주셨으니 말이다.
나도 어느 정도 완급을 신경 써야만 했다.
[그러면··· 시험 끝나고 뭐 하고 놀지는 아리엘 씨랑 상의해보고 알려드릴게요! 천하 씨는 무리하지 마시고 조심히 다녀오세요!]
“예. 별일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도 할거에요······ 모레 봬요!]
뚝- 그렇게 가벼운 대화를 나누던 끝에 이하린은 작게 속삭이듯 대답하고는 이내 빠르게 전화를 끊어버렸으니, 약 10여 분간 이어졌던 통화를 끝내곤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러자 짜증 서린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다 끝났나 이제?”
“통화야 끝나긴 했지. 들었을 텐데?”
“쯧. 이런 곳에서 여유부리기는······.”
한창 대화 도중 걸려왔던 전화였던 만큼 녀석은 무언가 불만이 많은 듯했지만, 짜증은 녀석의 기본값이었기에 딱히 쓰이진 않았다. 물론 나로서도 할 말이 있었고 말이다.
아니, 조금은 불만스러운 부분이었다.
“이런 곳이니까 여유를 부리는 거다. 대체 네가 찾았다던 놈들은 언제 나오는 거지···?”
“······기다려. 조금만 더 가면 나오니까.”
“한 시간 전에도 그렇게 말했을 텐데.”
“······.”
내 말에 할 말이 없어진 진시우는 이 습도에도 후드를 푹 눌러쓰고는 입을 꾹 다물었고, 그대로 성큼성큼 앞장서서 걸어 나갔다.
스쳐 지나간 녀석의 표정은 분명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 뒷모습에서 녀석이 민망해한다는 게 느껴졌을 뿐.
원작에서는 항상 재수 없는 태도만을 보여주던 녀석인지라 아리엘이나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그런 원작과의 간극이 실로 미묘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질척한 바닥을 몇 시간째 걷고 있으니 불쾌함이 더 크긴 했다.
“그것보다 그 정보의 출처는 말해 줄 수 없는 건가? 슬슬 미심쩍은 기분이라 말이야.”
“······블랙마켓을 뒤진 거니까 맞을 거다.”
“블랙마켓? 상당히 수상쩍은 이름인데.”
이름만 들어도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는 부분이긴 했지만, 나는 저 말이 진짜인가 거짓인가를 생각해보며 다시 질문을 건네보았다.
내 입장에서는 녀석이 직접 이면순례자라는 카드를 꺼내주는 게 더 편했으니 말이다.
아니, 애초에 이면순례자의 협조를 얻을 수만 있다면야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정글을 헤집고 다니기보다는, 조금 더 전문적인 추적 특성을 가진 이의 도움도 받을 수 있었을 테니 나로서는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뭐 때문에 진시우는 혼자서 멸화급 주교를 쫒고 있는 건지 의아하다는 느낌.
물론 그걸 물어보기는커녕, 진시우가 이면순례자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조차 원래라면 내가 알 수 없는 정보였기에 나로서도 모른 체하며 넌지시 질문을 건네볼 뿐이었다.
“마인들이 이용하는 암시장이란 건가?”
“비슷해. 마인이 아니더라도 범죄조직이나, 지역갱단이나, 아님··· 헌터나. 남미에서 활동하는 놈들이 모여 거래하는 곳이니까.”
“그래? 현실에 장소가 있는 모양이야.”
“세로데파스코 외곽에, 검은 여명이 운영하는 곳이 하나 있지. 집행자들도 수시로 방문하다 보니 잔챙이들밖에 안 나타나지만.”
무언가 건드릴만한 단어가 나왔기에 나는 아무렇지 않게 그 부분을 건드려보았다.
“집행자라··· 그러고 보니 넌 거길 어떻게 알게 된 거지? 일개 생도가 알기에 마인이 나타나는 암시장은 꽤 비밀스러워 보이는데.”
“······너도 귀가 있다면 내가 평소에 헌터 노릇까지 하고 있다는 건 들어봤을 텐데?”
진시우는 그 말과 함께 고개를 돌리더니 무언가 불쾌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물론 내가 봤을 때는 진짜 불쾌하다기보다는 그냥 할 말이 없으니 말을 돌리려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나로서도 숨기는 게 많았기에 일단은 한 발짝 물러서 주기로 결정했다.
“착각하지 마. 네 사생활에는 관심 없어.”
“······.”
“평소에 뭘 하는지까지 알아야 하나?”
그러자 이번에는 진심으로 짜증이 난 듯 녀석은 무언가 말을 하려다 꾹 다물었다.
마치 원하는 게 있으니 참겠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며 걸어 나가던 진시우는 이내 다시 고개를 돌리곤 나직한 어조로 대꾸했다.
“너. 통화할 때랑 태도가 너무 달라.”
“상대방이 보이는 태도가 다르니까.”
“······목소리도 꽤 다른 것 같은데.”
목소리?- 딱히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부분은 없었기에 녀석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어조가 달라지니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저런 말을 들을 정도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짜증이 나 헛소리를 하는 모양.
“이상한 소리하지 말고 다시 한번 확인해. 그림자 교단의 흔적이 이쪽에 있는 게 맞나.”
“······쯧.
그러자 내 말에 진시우는 다시 또 혀를 차고는 워치를 두드리기 시작했는데, 확실히 이런 면에서는 대하기 편한 녀석이긴 했다.
마이 페이스 성격답게 사람을 대할 때 제 마음대로 하는 구석이 있고 사교성도 부족했지만, 그와 반대로 남이 저를 어떻게 대하든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편이었으니 말이다.
사실 그걸 떠나서라도, 애초에 진시우만큼은 다른 아이들처럼 멘탈적인 부분을 걱정해줄 필요가 없긴 했다. 원래부터 맛이 간 상태로 살아왔기에 이제 와서 배려해줘봤자 큰 의미는 없었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그 이하린마저도 케어를 포기했던 성격인데 그걸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있겠는가?
진시우의 트라우마도, 마력도, 전생이란 요소도 다른 누군가가 해결해 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녀석에겐 죽이고 싶은 복수대상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쫒아가고 싶은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굳이 따지자면 테러를 일으키는 마인 정도가 있을 뿐.
하지만 기나긴 세월의 기억이 녀석에게 존재하는 만큼, 진시우가 스스로 일어서려면 녀석은 그 무게를 직접 이겨내야만 했다.
그런 만큼- 만약 그것에 겁먹고 망설인다면 원작의 이하린처럼 녀석의 뒤통수 정도는 한 대 때려 줄 수 있을지언정, 다른 아이들처럼 내가 신경 써줄 수 있는 부분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사실 다른 주연들에게도 뭐 엄청 크게 신경 써주진 않았지만 말이다.
내게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의 선의. 그 정도가 내가 베풀 수 있는 선의 기준이었다.
“······마켓에서 찾은 정보로는 이쪽의 마인들의 근거지가 하나 있다고 들었다. 그리고 몇 놈을 잡아본 결과 그림자 교단의 녀석들하고도 교류했다는 소문이 있었고 말이야.”
“교류··· 그 정도면 애매한데.”
“애매하지만 어쩔 수 없지. 원래부터 먼저 활동할 때가 아니면 찾기 힘든 놈들인데, 2주 전부터 행적 자체가 아예 사라졌으니까.”
2주 전- 내가 막 천중무련에 갔을 시기였던지라 다소 미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단에 소속된 놈들이라면 이미 교주의 특성에 침식된 뒤일테고, 그러지 않은 놈들도 중요한 정보를 알고 있다면 진작에 강제로 세뇌를 시켜놓았을 테니 우리는 애매한 놈들을 찾아 천천히 거슬러 올라갈 수밖에.”
“······번거롭군.”
“번거로워도 어쩔 수 없지. 꼬투리에서 꼬투리로, 꼬리에서부터 차근차근 거슬러서 교단의 마인을 잡아 심문하고, 다시 그걸 토대로 추적해나가는 것밖에 방법이 없으니까.”
말만 들어도 참 번거로운 과정이었다.
물론 나 또한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만상의 눈으로 열대우림의 수목 너머를 들여다보며 마인들을 찾아보는 중이었지만, 워낙 광활한 곳인 만큼 그렇게 쉽게 나오진 않았다.
발견만 한다면야 토벌하는 것도, 심문하는 것도 어렵진 않을 테지만 확실히 고작 단둘이서 우림을 뒤지는 건 번거로운 일이었다.
이럴 때 하오란 녀석이라도 있었다면 나름대로 뒷세계에서 굴렀던 녀석의 인맥을 쪼아 비교적 손쉽게 찾아갈 수 있었을 테지만, 승천제 이후 연락이 끊긴 걸 생각해본다면 아무래도 하오란 녀석은 3월에 저가 갔어야 할 곳으로 뒤늦게 가버린 게 아닐까 싶었을 뿐.
그때 죽였던 놈까지 합해서 고작 2명이 여기저기 뒷세계에서 해결사 노릇을 하고 다녔다는 만큼, 그런 쪽의 능력 정도는 있었던 놈인지라 아무나 데려다가 대체할 순 없다는 게 약간 아쉽다는 생각도 없잖아 들긴 했다.
물론 이전에 남궁설아에게 말했던 것처럼 녀석이 지은 죄가 있기에, 죽었다 해도 딱히 애도를 표해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리고 또한- 솔직히 말하자면······.
‘······과연 죽기는 했을까.’
사실 놈이 죽었다는 확신까진 안 들었다.
그때 나르화리얀에게 듣기로는 탑에서 나왔던 마인들은 저와 루타텔이 직접 만났던 녀석들의 외형을 갖다 썼다고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한참 예전에 승천자하고 마주쳤었다면 놈이 이제껏 어찌 살아있었겠는가?
그렇다면 승천제가 열리기 바로 전, 연락이 오고 끊긴 그사이에 둘 중 하나와 조우했다는 말인데······ 그 부분이 미심쩍다는 느낌.
루타텔이나 나르화리얀도 그때는 둘 다 휴식 권고를 받았던 상태이니만큼, 도시에 생긴 탑 정도를 청소하면 모를까 남미까지 와서 마인들을 찾기 위해 침식 영역을 돌아다녔을 거란 생각은 전혀 안 들었던 탓이었다.
물론 나로서도 그 부분에 대해 직접 물어보고 싶은 생각이 안 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 나는 아무것도 못 본 거로 해줄게.
회랑에서 떠나기 직전 그는 그 말과 함께 눈을 찡긋거렸었는데, 그 말과 표정이 다소 중의적으로 느껴졌기에 나는 구태여 그 부분을 캐묻진 않았다. 하오란은 괜히 파헤쳐봤자 나만 피곤해지는 부분이었으니 말이다.
그저 표면상으로는 아리엘과 있었던 일을 못 본 척해준다는 거로 짚고 넘어갈 수밖에.
하지만 역시 조금 궁금하기는 했다.
“······보통 블랙리스트에 등재된 녀석들은 누구든 잡히면 바로 사살하는 편인가?”
나는 문득 든 생각에 혼자 워치를 두들기던 진시우를 향해 넌지시 말을 건네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뭔 소리냐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녀석의 얼굴이 엿보였다.
“블랙리스트? 그걸 갑자기 왜 묻는 거지?”
“그야 오늘 마주치는 녀석들 중에 블랙리스트에 등재된 놈들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럴 수도 있긴 하겠지만, 너라면 그냥 일단··· 다 죽일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야.”
생각보다 성정이 여린 편인가?- 진시우가 작게 헛소리를 중얼거렸지만, 나는 그것을 가볍게 무시하고는 다시 질문을 건네보았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 생포해서 심문하거나, 따로 구금하는 경우가 있나 싶었던거야.”
“······필요하다면야 구금하는 경우도 없진 않지. 침식 마인이라면 구금도 위험해서 어지간해선 즉결 처형이지만, 거물급이거나 침식 마인이 아니라면 상황에 따라 다를 거다.”
“그래···?”
왠지 모르게 저기 뉴욕 어딘가 지하실에 갇혀 있을 하오란의 모습이 쉽게 떠오른다.
물론 죽었든, 정말 잡혀 있든 이제는 딱히 만날 일이 없겠지만······ 만약 정말 살아있다면 슬슬 금제의 주기가 풀릴 시기인 만큼 그 부분에선 조금은 애도를 표해주기로 했다.
“······근데 그런 걸 왜 나한테 묻는 거지?”
“저번 승천제 때 했던 말을 생각해보니 너는 블랙리스트에 관심이 많아 보였으니까.”
“······.”
무언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어 보이던 진시우는 내 말에 딱히 할 말이 없었는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그때 저 혼자서 마인들의 이름을 줄줄 읊었던 게 생각난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이내 조금 민망했는지 다시 또 잔뜩 인상을 쓰고는 고개를 홱- 돌렸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흔적이나 찾아.”
생각보단 참으로 다루기 쉽다는 느낌.
확실히 진시우도 마인이나 마수를 상대할 때는 조금 더 본래의 성격- 그러니까 냉소적인 면이 배가 되는 모양이었는데, 그와 반대로 평소에는 나름 애 같은 구석이 있었다.
뭐랄까··· 약간 애늙은이 같다 해야 할까?
어찌 보면 추가 메모리가 조금 과하게 달려있을 뿐이지 17살짜리 애는 맞았기에 틀린 판단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다른 아이들에 비해선 확실히 다소 애매한 녀석이긴 했다. 일단 진시우의 전생이 겪어왔던 세월과, 그 기억이 주는 영향이 적지 않다는 건 평소 녀석의 성격만 봐도 알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만큼- 적어도 다른 아이들보단 조금 더 어른스러울 거란 생각이 들긴 했다.
적어도 평소의 이하린보다는 어른스럽겠지 싶었으나 순간 그게 기준이라면 누구든 안 그럴까 싶어 나도 모르게 약간 웃음이 나왔다. 아리엘의 말장난에 매일 같이 휘말려서는 울상을 짓는 얼굴이 떠오른 탓이었다.
“······왜 웃는 거지?”
그러자 그걸 느꼈는지 진시우가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며 다시 뒤돌아봤지만,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물론 그런 내 태도에 진시우는 혼자 조금 전의 대화를 연관시켰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뭐라 다시금 입을 열려고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
나는 시야 끄트머리로 들어오는 광경에 뭐라 입을 열려던 진시우를 향해 빠르게 손을 펼치고는 그대로 제 자리에서 멈춰 섰고, 그런 내 태도에 진시우 또한 잠시 움찔하더니 그대로 나를 따라 멈춰 섰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가볍게 교차하는 서로의 시선.
“······.”
“······.”
한순간에 가라앉은 기척 속에, 녀석은 따로 설명을 해주지 않아도 상황을 이해했다.
“······찾았군.”
이 순간 내 손이 새롭게 가리켜준 방향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진시우는 이내 그 광경을 발견했는지 입을 열었고, 속삭이듯 흘러나온 그 작은 목소리 속에는 언제 우스갯소리가 오갔냐는 듯 싸늘한 살기가 담겨 있었으니-
그리고 물론.
“마흔둘. 10분 내로 끝내지.”
-그건 나로서도 마찬가지였을 뿐이었다.